총독 스룹바벨과 다리오(다리우스)대왕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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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전사(불사대不死隊:Amrtaka -정예부대) 부조 일부

<루브르 박물관 소장>

 

 

“지역민들 방해 속에서 제2성전 건축은 놀라운 역사” 

 

솔로몬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전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느브갓네사르에 의해 파괴되었다. 느부갓네사르(Nebuchadnezzar, 626-539 BC)는 신바벨론 제국의 통치자로 제국을 43년간 다스렸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느브갓네사르에 의해 철저하게 응징당하였고 그는 소경이 되어 쇠사슬에 묶인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다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왕하 25:5-7; 렘 39:4-8; 52:8-11). 황폐해진 예루살렘에는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만 남겨두었다(왕하 25:8-9; 대하 36:17-20; 렘 39:9-10; 52:12-13). 맹인이 된 시드기야는 바벨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왕하 25:7).

 

이후 70년이 지나 고레스(키루스) 칙령에 의해 귀환한 유대인들이 기원전 536년 두 번째 성전의 기초를 놓기는 하였지만 공사는 반대에 부딛혀 20년간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는다(스 4:1-5).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를 세워 백성들이 공사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셨다(스 5:1). 기원전 520년 8월 29일, 학개가 말씀을 선포한 지 두 달 후 스가랴 또한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선포하였다(슥 1:1).

 

성전건축 공사는 다윗계보의 여호야긴 왕의 손자이며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에 의해 진행되던중 반대자들에 의해 중단되었고, 이러한 성전공사 중단 시기는 고레스 2세 통치후기(530 B.C)에서 다리오 1세(다리우스 1세) 통치 제2년(520 B.C)까지로 그동안 공사는 아무런 진척도 없었다. 이 기간동안 예루살렘에 귀한하였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거처할 집들을 짖는 데 분주하였다.

 

당시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자들은 총독 닷드네(Tattenai)와 스달보스네(Shethar Bozenai)였다(에 5:3).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왕족(王族) 가문의 총독 스룹바벨에 대하여 후일 유대인들이 스룹바벨 주도로 유다 국가를 제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하며 반대를 하였다. 스가랴 4장 10-14절에 나오는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암시하는 인물들은 암스타드(Olmstead)의 주장에 의하면 스룹바벨과 예수아이다.

 

그러나 다리오 1세(DariusⅠ the Great, 522-486 BC)는 이들이 모함하는 공문서를 무시했다(스 5:6-17). 다리오는 고레스(GyrusⅡ The Great, 558-547 BC)가 남긴 조서의 원본을 문서 창고에서 발견하고 모든 페르시아의 관리들에게 성전건축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지원해 주라는 고레스 칙령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스 6:1-12).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성취된 결과였다(슥 4:9). 성전이 완성되고(516 BC) 낙성식 잔치와 함께 스룹바벨은 성경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스 6:16; 느 12:47).

 

페르시아 아케메네즈 왕조(Achaeminian Empire)는 다리오 1세 치세 기간동안 최대의 황금기를 누렸다. 다리오 대왕은 약 40년간(522-486 BC) 통치하였으며 영토를 인도까지 넓혔고 그리스 접경 지대까지 진출하였으며 동유럽까지 뻗쳤다. 그는 스키타이인들을 정복하기 위해 다뉴브강을 건넜지만 이곳까지는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세력들에게는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다리오 대왕은 뛰어난 행정가로 원정 중에도 효율적인 행정제도의 법률을 제정하여 질서 있고 번영하는 제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건축예술의 꽃이라고 일컫는 페르세 폴리스를 건축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수도 시설의 도시 계획을 확립하였으며, 표준 화페를 주조하고 완벽한 도로망을 확충하여 왕실 우편제도를 체계화 시켰고, 급행우편을 배달하는 조직체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건물화재를 미리 예방하는 경보 통신 체계도 확대 조직하였다.

 

그는 페르시아를 더욱 견고한 제국으로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제도를 법제화 시켰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박트리아와 인도는 연간 360텔런트, 이집트는 700텔런트, 바벨론은 1000텔런트와 어린 환관 500명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콜키스에는 소년소녀 100명씩 바치도록 하였고, 에티오피아는 정련되지 아니한 금과 흑단나무 200그루와 상아 20두를 바치게 하였다.

 

다리오 대왕은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용 정책이라는 아케메네즈 왕조의 정책을 충실하게 존속시키는데 있어 아낌없는 정책을 폈다. 그는 ‘온갖 혈통을 보존하는 민족들의 왕’이라는 칭호를 제국내의 속주국가들에게 들을 정도였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은 여러개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공문서(公文書)는 그리스어, 바빌로니아어, 이집트어, 리디아어로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국내의 다양한 언어들을 통역하는 통역관을 세워 제국 전체에 왕의 칙령을 전하게 하였다.

 

고레스 2세에서 다리오 1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이들 제왕들은 죠로아스트교를 믿으라고 페르시아의 국교를 강요하지 아니 하였다. 그 결과 다리오 치세 아래에서 통치를 맡은 총독, 즉 사트라프(Satilpy)들은 해당 지역의 종교예식과 그들의 신앙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고레스(KyrusⅡ The Great, 558-547 BC) 시대에서 다리오 1세 치대 당시의 페르시아에는 불사대(不死隊:Amrtaka)라는 1만명의 정예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금으로 장식된 옷을 호화롭게 차려 입었으며 행군할 때에는 수종드는 여인들과 노복들 그리고 낙타 등에 많은 일용품을 싣고 다니게 하였다.

 

이 시대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였던 스룹바벨(Zerubbable)의 말년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오래된 전승에 의하면 성전 건축 완공에 참여한 인물들 중 스룹바벨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스 6:14) 다리오 1세에 의해 총독직에서 해직되어 모함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A.D 6세기 경의 유대 연대기(年代記)에는 성전완공 후 바벨론으로 귀한하여 유대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스룹바벨은 후에 다윗 계열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가 우수하다.

 

A.D 13세기의 미드라쉬에는 메시아 사역을 감당한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일꾼’으로 표현한다. 많은 학자들은 관용정책의 대명사인 다리오 1세가 스룹바벨을 유다왕국을 제건하려 한다는 모함으로 처형시켰다는 학설은 정설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J.H. Hertz, The Authorized Daily Prayer Book, New York: Bloch Publsihing Co; Inc).

   

역사가 요세푸스는 스룹바벨이 다리오의 ‘옛 친구’였다고 언급하고 있다(Antiq. ,ⅲ).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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