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죽음은 아침에 생겼다 없어지는 버섯"

별세 6일전 편지 발견..’목민심서’ 집필 언급 편지도

“죽는다는 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버섯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생각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생활하면서 더욱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자리 보전하고 있으며 또 두풍(頭風)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회혼(回婚)이 이미 임박하였지만 부끄러울 뿐입니다.(중략) 2월16일 병제(病弟) 약용(若鏞) 돈수(頓首)”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오랜 유배 생활로 기력이 쇠잔해졌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다 친구가 찾아와도 옛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조선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는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세상을 뜨기 6일 전에 쓴 편지가 발견됐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이사장 정해창)은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펴낸 ’다산 간찰집’에서 이 편지를 공개했다.

조선 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세상을 뜨기 6일 전에 쓴 편지가 처음 발견됐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이사장 정해창)은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펴낸 '다산 간찰집'에서 이 편지를 공개했다. 다산은 이 편지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버섯처럼 덧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다산 간찰집’ 발간을 총괄한 고문헌연구가 박철상 씨는 여기저기 흩어진 다산의 간찰(편지)을 한데 모아 정리하던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편지를 찾아냈다.
“회혼이 임박하였다”는 편지 내용으로 보아 이 편지는 다산이 1836년에 쓴 편지로 보인다고 박씨는 추정했다.

회혼은 혼인 60주년을 일컫는 말로, 부부가 혼인 60주년을 맞으면 자녀가 이를 축하하는 잔치(회혼례)를 열었다. 다산은 혼인 60주년 회혼례 당일인 1836년 2월22일 아침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박씨는 “정약용은 1836년 2월22일 회혼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세상을 뜨기 6일 전의 편지”라면서 “지금까지 확인된 정약용의 편지 중 마지막”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다산의 절필(絶筆)이라 할 수 있는 편지”라면서 편지 수신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 쓴 편지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짙게 배어 있다.

“저는 노쇠함이 날로 심하여 책을 몇 줄만 보면 이미 두 눈썹이 아교 붙인 듯 달라붙고, 이웃 마을에서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소일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한 달 전에는 채(蔡) 영감이 찾아와 쌓인 회포를 풀었지만, 눈물을 흘리며 마주할 뿐이었습니다.”(1821년 쓴 편지)

“저는 나이가 많은 데다 병이 있어 참으로 괴롭습니다. 힘이 없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정신과 진액은 모조리 소진되어 남은 것은 겨우 실낱같은 목숨뿐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1830년 쓴 편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를 언급한 다산의 편지가 발견됐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이사장 정해창)은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펴낸 '다산 간찰집'에서 이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는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일제강점기인 1935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에 사진으로 실려 있다. 고문헌연구가 박철상 씨는 "조선일보에 실린 편지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면서 "다산이 '목민심서'에 대해 자신이 지었다고 언급한 것은 이 편지가 유일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를 언급한 다산의 편지도 발견됐다.

“사군자(士君子)가 입신(立身)하여 임금을 섬김에는 오직 이 목민(牧民)이라는 한 가지 일만 있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마음을 씻고 정성을 다한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실의(失意)하게 되어 백성을 윤택하게 할 길이 없어지자 옛 사람이 남긴 언행 40권을 모아 ’목민심서’라 이름 지었습니다. 품에 안고 돌아온 지 2년이 되었건만 함께 읽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오형(吾兄)께 처음으로 이 책을 봉증(奉贈)하니 제사가 지난 뒤에 모여서 함께 이 책을 보았으면 합니다. (중략) 8월14일에.”

이 편지는 1820년 8월14일 다산이 조선 후기 문신 한익상(1767-1846)에게 보냈다.

박씨는 “이는 (다산의 연보인) ’사암선생연보’를 기준으로 ’목민심서’ 초고가 완성된 것이 1818년이고 이때 12편 72조의 편제가 모두 갖춰졌으며 이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1821년 서문을 썼다는 일반적인 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다산은 1818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다산이 48권이나 되는 자기 저술(목민심서)을 40권이라 했을 리 없다는 게 박씨의 분석이다.

그는 “이때까지 다산은 ’목민심서’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고 한익상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면서 함께 검토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라면서 “결국 한익상과 만난 이후 ’목민심서’는 지금의 모습인 48권의 형태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편지는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1935년 7월18일자 조선일보에 사진으로 실렸다.

박씨는 “조선일보에 실린 편지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면서 “다산이 ’목민심서’에 대해 자신이 지었다고 언급한 것은 이 편지가 유일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간된 ’다산 간찰집’에는 다산의 저술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편지 121편이 실렸다.

박씨는 “의원(醫員)으로서 다산의 모습, 저술하는 다산의 모습, 그리고 해배(유배에서 풀려남) 이후의 다산의 모습은 우리에게 또 다른 다산의 얼굴을 알려주기 충분한 자료들”이라고 소개했다.

다산은 무엇보다 편지를 쓰는 데 신중했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어야 한다. ’이 편지가 큰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겠는가?’ (중략) 그런 다음에야 봉투를 붙여야 한다.”

유배지인 강진으로 찾아온 아들 학유에게 써준 글 ’신학유가계’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씨는 “다산의 간찰은 형식적인 인사말은 별로 없고 꼭 필요한 말만 썼으며 해학적인 언사들이 가득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면서 “다산의 진짜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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