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전족 풀었던 여자, 스스로 마오에게 구속된 여자

 

중국은 아직 마오쩌둥(毛澤東)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 빈자(貧者)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이는 언제나 마오를 앞세운다. 정치적 야심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가 그랬다.

 강한 중국의 이미지가 필요할 때도 마오는 21세기의 중국 현실로 곧잘 소환된다. 반일 시위가 벌어질 때 어김 없이 등장하는 게 마오의 사진이다. 마오는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적이 없다(戰無不勝)’는 전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의 대중적 인기와 달리 중국 지도부는 마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마오가 만년에 저지른 문화대혁명의 10년 폭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이 선생을 산 채로 때려 죽이고, 자식이 아비의 뺨을 후려치는 하극상(下克上)의 수치를 되풀이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 문혁의 광란 뒤엔 “나는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다”고 절규하는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이 있다.

 이 책은 20세기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꿈 꿨던 장칭의 한평생에 걸친 투쟁의 삶을 수많은 인터뷰와 문헌을 이용하여 정밀하게 그리고 있다. 배우 출신으로 인생을 한 편의 연극처럼 살다간 장칭의 치명적인 매력과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자 로스 테릴이 장칭에 앞서 1980년에 낸 『마오쩌둥』(이룸)이 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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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둥(山東)성의 한 시골 마을에서 첩의 딸로 태어난 장칭은 어려서 스스로 전족을 풀었다. 한평생 남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와 달리 장칭은 어느 남자에게도 자신의 삶을 묶어두지 않으려 했다. 소녀 시절 연기를 배우던 장칭이 입센이 쓴 『인형의 집』을 읽고, 집을 박차고 나간 ‘노라’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장칭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활용하는 데 노련했다. 상하이에서의 어설픈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옌안(延安)으로 가 마오쩌둥을 사로잡는 데 1년이면 충분했다. 마오의 4번째 부인이 됐고, 마오는 장칭의 4번째 남편이 됐다.

 장칭은 첫 결혼에선 현모양처라는 전통의 족쇄를 풀어버렸고, 두 번째 결혼에선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떴다. 둘째 남편 위치웨이(兪啓威)는 현재 중국 권력 4위인 위정성(兪正聲) 정치국 상무위원의 아버지다. 위치웨이가 장칭과 헤어진 뒤 만난 여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그 여인은 훗날 장칭의 박해를 받는다.

 장칭이 상하이 여배우 시절 만난 세 번째 남편은 기자 겸 섬세한 예술평론가로 장칭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큰 산과도 같았던 마오와의 만남은 달랐다. 장칭은 모든 힘을 마오를 돌보는 데 쏟아야 하고 향후 30년간 어떤 정치 활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의 ‘굴욕적’ 조건을 받아들이며 마오와 결혼했다. 마오 역시 당이 결혼을 허용치 않으면 “혁명사업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생떼를 썼다. 1939년의 일이다.

 장칭이 정치적으로 힘을 얻은 건 60년대다. 대약진운동 실패 후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마오는 반전을 노렸고 그 카드로 장칭을 활용했다. 본시 잃을 게 없는 태생인 장칭이야말로 세상을 뒤집어 엎는 문혁에는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장칭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진두지휘했다.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등 많은 이들이 장칭의 개인적 시샘에서 비롯된 분노의 희생양이 됐다. 그런 장칭을 덩샤오핑은 “아주 사악한 여자”라 불렀다.

 마오의 건강이 나빠진 70년대 중반부터 장칭은 비로소 마오를 넘어설 궁리를 했다. 후계자 지위를 노렸다.

 장칭은 영국이 중국만큼 봉건적이지 않은 이유는 “영국이 종종 여왕의 통치를 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 언론엔 갑자기 한(漢)의 여태후(呂太后)를 칭송하는 글이 실렸다. 기사엔 여태후가 황제였던 남편 유방(劉邦)의 유지를 계승한 것으로 묘사됐다. 측천무후도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장칭은 마오가 장칭을 두고 한 말처럼 불을 불일 수는 있지만 큰 불을 관리할 능력은 없었다. 중국에서의 정치는 ‘경제+지역+총’이다. 경제적 이익집단과 지역 기반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무력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나 장칭은 셋 다 부족했다. 특히 무력 동원에서 늦어 마오 사후의 권력 투쟁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마오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돼 문혁을 주도한 4인방(四人幇)의 하나로 체포됐다. “주석의 몸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너희들은 벌써 쿠데타를 자행하는가”라는 장칭의 저항은 공허했다. 결국 장칭은 수감 생활과 통원 치료를 반복하다 91년 5월 병원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77세였다. “마오 주석, 당신의 제자이자 전우였던 제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장칭은 한평생 ‘강한 자’가 자기 자신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환경에 좌우되는 나약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원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는 데 반발하며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장칭은 끝내 마오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중국 사회가 아직도 마오의 그늘에서 배회하는 것과도 같다.

 저자가 그린 장칭의 굴곡진 삶은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오 없이 중국을 알 수 없고, 장칭 없이 문혁을 읽을 수 없다. 마오와 장칭이 남긴 유산은 질기고 강하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지난달 중국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 견지를 강조했다. 1인자가 된 시진핑(習近平) 총서기도 덩이 개혁개방을 재차 강조한 92년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코스를 방문하는 걸 자신의 집권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왜 그런가. 덩의 개혁개방은 계급투쟁·문혁으로 점철된 마오 노선과의 결별을 뜻한다. 후진타오와 시진핑이 최근 보이는 행보 또한 마오와의 재결별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직도 마오의 그림자 속에 살기 때문이다. 사실 장칭의 잘못 중 적지 않은 부분은 마오의 잘못이다. 좀 더 파고 들어가면 공산당 자체의 잘못이기도 하다. 중국공산당은 결코 마오와 장칭의 유산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중국에선 역사가 승자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중앙일보]  2012.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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