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예배에 진단과 대안

 

Ⅰ. 예배의 성경 신학적. 역사적 개요

 

한국 교회 가운데 예배의 현상학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생각해 보자.

한국 교회는 일방적인 설교 중심의 예배와 사회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예배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 형태가 맞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접근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 다음으로 예배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 교회란

 

교회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모든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성령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종교적인 것 보다는 교육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敎會는 가르침을 받는 무리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가르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한 가르침이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성경신학적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23에서 교회를 ‘그리스도 몸’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의 피값으로 교회를 사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이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한다. 예배는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반응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예배는 그 속성상 기쁨과 찬양, 감사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2. 예배의 개념

 

예배(禮拜)는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예를 갖추어 절하다’란 뜻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에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분께 피조물로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예배가 ‘아밧’이라는 단으로 표현되었다. ‘아밧’은 ‘아바드’에서 온 단아로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뜻이다.

 

또 다른 단어는 ‘샤하’인데 이 용어는 ‘굴복하다’ ‘복종하다’ ‘자신을 엎드리다’ ‘숭배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가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샤하’는 ‘프로스큐네오’란 단어로 채용되었고, ‘아밧’은 ‘라이트루기아’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동양적 의미에서 예배는 섬기며, 절하다는 뜻을 강하게 가지는 반면, 서구교회는 ‘라이트루기아’라는 단어를 통하여 섬김과 봉사의 의미를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학은 ‘라이투르기아’의 섬김의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

 

영어에서 사용하는 워십 Worship이란 단어는 가치를 뜻하는 worth와 신분을 뜻하는 ship이란 단어가 합성되어, 자신의 모든 가치를 드린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예배는 Worship-Service라고 부른다. 이것 또한 ‘라이투르기아’의 섬김의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왔음을 보여준다.

 

3. 예배의 역사

 

예배의 간략한 역사를 통해 현재의 한국 교회의 예배 형태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1) 초대교회

 

초대교회는 세가지의 예배 근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복음적 사명에 근거하고 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한다.

셋째,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에 근거한다.

 

초대교회의 예배의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남겨져있지 않다. 다만 신약성경을 통하여 가늠해 볼 뿐이다. 먼저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통하여 선명하게 보이는 한가지의 특징은 초대교회의 예배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분리되어 따로 모여 예배하셨다. 성경은 이것은 집에서 떡을 떼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분명 예수를 통하여 기초한 만찬 공동체 였음을 보여주는 단서이다.(행2:46)

 

사람들은 식사를 찬양과 함께 시작하였다.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고조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만찬 공동체를 통해 부활한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이해했으며, 동시에 도래하는 구원 시대에 기쁨의 만찬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예배는 예배의 중심이 성찬에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감사의 만찬(Euchristie)에 참여 하기 위하여 각 가정에 모였으며, 그 가정은 회당과 성전을 대신하는 새로운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행2:46; 5:42; 롬16:5; 고전16:19 등)

 

예배는 배불리 먹는 식사와 감사의 축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고린도교회를 통해 읽는다.(고전11:23-25) 이기서 구약성경은 언약의 책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도와 찬양이 있었다. 때로는 예언이 있었다고 보고된다.(행2:46; 15:32 등)

 

우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배 형태 속에서 9가지의 기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성경의 낭독과 가르침

2) 복음의 선포와 설교

3) 성도의 교제

4) 성만찬

5) 세례

6) 기도

7) 신앙고백

8) 찬송과 노래

9) 헌금과 연보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떡을 떼며 잔을 나누는 성찬이 가지는 의미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누게 될 영원한 만찬에 대한 선취 행위라는 것이다. 성만찬은 현재적으로 역사하는 종말에 대한 증표이었다. 죄와 사망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역사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종말 선언이다. 이것은 또한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영적인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2) 종교개혁 시기

 

중세를 지나 종교 개혁시기는 통한 예배는 말씀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떡만을 돌리던 카톨릭의 성만찬을 잔과 함께 돌림으로 초대교회의 성찬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성찬에 대한 중요성을 점점 희박해지고 오직 설교만을 중심으로하는 예배로 흘러가게 된다.

 

3) 근·현대

 

현대는 탈권위의 시대요, 반합리주의 시대이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워지는 현대는 객관화된 진리체계를 수용하기 보다는 각 개인의 감성과 주관을 더욱 중요시 한다. 이러한 경향은 예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설교에 대한 부분에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려고 시도되고 있다. 성만찬의 부재로 인하여 설교의 타켓을 잃어 버린 가운데서 더욱 나아가 감성적인 설교로 돌아선 현대 교회의 예배는 더욱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Ⅱ. 한국교회의 예배의 진단과 대안

 

1. 한국 교회의 예배 진단

 

현재의 한국 교회의 예배의 형태는 예배의 모범이 부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한국 교회는 교단의 정체성을 잃어버린지 오래이고, 성장이라는 화두에 묻혀 모든 것이 성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예배 신학의 부재와 무시로 이어졌고, 무분별한 예배의 변형과 파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체적인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는 대개 아래와 같다.

묵도 ⇒찬양 ⇒신앙고백 ⇒찬양 ⇒기도 ⇒성경봉독 ⇒성가찬양 ⇒설교 ⇒찬송:헌금 ⇒광고 ⇒찬양 ⇒축도

이러한 구도 속에서 약간의 변형이나 첨삭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순서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간의 배분을 보면 단연 설교가 가장 많다. 대체로 주일 오전 예배에 설교 시간은 짧게는 25분에서 길게는 50분 가까이 할애되고 있다. 이것은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여기서 본인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설교 중심의 예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도는 필연적으로 몇 가지의 결과를 가져 온다.

 

먼저는 설교의 중심을 놓치기가 쉽다.

두번째는 회중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세번째는 설교를 강연의 하나로 취급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갖게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구원받는 성도들의 반응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교회의 예배의 진행 순서는 이러한 구속사적 전제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단순히 피상적인 예배의 틀만을 가지고 있는 생각을 들게 한다.

 

2. 대안

 

1) 예배의 신학적 연구

 

예배 신학의 부재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책임이다. 본인일 아는 바로는 예배의 신학적 근거에 대한 알고 있는 목사들이 매우 소수인 것으로 안다. 목회자 자신이 예배에 관한 신학적 근거를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예배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먼저 예배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꼭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총회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학교의 교수들에게 위탁하여 주기적으로 예배에 관한 논의를 하도록 하고, 올바른 예배관을 심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2) 예배 교육의 활성화

 

놀라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배 순서에 관하여 거의 무관심할뿐더러 거의 습관처럼 그러한 순서를 따르고 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적어도 3-5년에 한번씩은 예배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먼저 목회자 자신이 예배에 관하여 배우게 될 것이고, 바른 예배관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할 것이며, 성도들도 미신적이고 습관적인 예배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3) 성만찬의 확대

 

앞서서 언급한 설교 중심의 부재는 성만찬의 부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대교회가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기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와 종말론적 ‘소망’을 함께 갖게 된다. 특별히 설교는 성찬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하여 더욱 극명하게 전달 되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을 매주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적인 배려와 성찬의 진행에 대한 많은 고민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찬의 시행은 성도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뿐 아니라, 재림을 소망하는 삶으로 인한 순결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기대도 할 수 있게 한다.

 

4) 주일학교 예배

 

현재 우리교회는 예전적인 예배의 형태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찬양은 대부분은 요즘 유행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아닌 CCM타입이거나, 메믹이나 윈윈등에서 유행하는 노래들을 가져온 것이다. 설교도 강해나 교리적인 설교가 아니라 이야기 중심이며, 설교 후 곧 바로 복습게임이라는 순서가 들어가 있다. 비단 우리 교회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간과할수 없는 예배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 과연 주일학교의 예배를 장년의 예배와 동일시 할 수 있는가의 신학적 논쟁이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에서는 장년의 예배에 준하여 드리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학교 예배도 기존의 예배의 형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찬양의 선별에 있어서 모두 내용 위주로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결코 성경에 벗어난 게임이나 놀이 위주의 예배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예배에 관한 명확한 선이해와 교육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특별히 성만찬에 대한 고려는 진지하게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너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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