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신세 소년, 바이올린에 미쳐 용기 냈습니다"

미국 라이트주립대의 바이올린 부교수이자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차인홍(54) 교수는 '휠체어의 지휘자'로 불린다. 오는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소리얼 필하모닉을 지휘하기 위해 내한하는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어릴 적에는 신체가 자유롭지 않다는 점 때문에 세상에 대한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고,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 탓에 9세 때 대전의 재활원에 맡겨져 7년간 생활했다. 하지만 12세 때 재활원에서 처음 들었던 바이올린 소리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차 교수는 "당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재활원이 있어서 라디오는 물론, 음악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원봉사를 오셨던 바이올린 선생님이 처음 들려준 동요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불편하고 힘든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바이올린 소리는 신비하면서 화려했고 소년에게 음악에 대한 동경을 불어넣었다.

그 뒤로 그는 자원봉사 바이올린 선생님으로부터 틈틈이 교습을 받으면서 의자와 보면대(譜面臺)도 없이 방바닥에 앉아 연습에 몰두했다.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충남 음악 콩쿠르 초등부 1위를 차지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감을 얻었던 사건"이라 했다.

 

 
휠체어에 앉아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차인홍 교수.

미국 라이트주립대 제공

 

 

재활원에서 초등 과정을 마쳤지만 가정 형편과 장애 때문에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18세 때 재활원 친구들과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 제1바이올린을 맡았다. 그는 "실력이나 기교는 모자랐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고 먹고 연습하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한마음이었고 앙상블만큼은 자신 있었다"고 했다. 단원 4명은 셋방을 얻어 합숙했고, 소년 차인홍은 아침 6시면 일어나 먼지 쌓인 연탄 창고에서 하루 10시간씩 연습에 몰두했다.

이들을 틈틈이 지도했던 신동옥 전 서울대 음대 교수(비올라)는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라살(La Salle) 4중주단에 추천서를 써주고 아산사회복지재단의 후원을 주선하면서 제자의 유학에 발벗고 나섰다. 결국 중·고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그는 24세 때인 1982년 미국 신시내티 음대로 유학을 떠났고, 이어 뉴욕시립대의 브루클린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24세 때까지 내게는 장애와 빈곤, 무학(無學)뿐 아무것도 없었다.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귀국해 대전시향의 악장을 6년간 맡았다가 1996년 지휘 분야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로 다시 유학을 떠났다. 차 교수는 "휠체어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휘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미국의 지도 교수가 바이올린과 지휘를 겸하고 있었기에 감히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미국 악단에 입단하기 위해 수없이 오디션에 응모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그는 "치과 기공사 자격증을 따 전업(轉業)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고 했다. 하지만 마침 라이트주립대의 바이올린 교수 모집에 응모해서 2000년 조교수로 선발됐다. 차 교수는 "바이올린 연주와 현악 4중주 경험, 지휘 경력이 응모 조건으로 붙어 있었는데 꼭 나를 위한 모집공고인 것만 같았다"면서 웃었다.

그는 장애인이지만 운동에도 열심이다. 1975년 일본 오이타현에서 열린 아시아 장애인 경기 대회에서 좌식 스키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1981년 한국의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도 100m와 휠체어 마라톤(10㎞) 부문에서 우승했다. 차 교수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다거나 명예를 얻고 싶은 욕심은 없다. 삶을 축복으로 여기면서 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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