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여종 수목원 만든 '나무광' 푸른 눈의 한국인

평소에도 한복을 즐겨입던 민병갈 /해누리 제공
 

 

"내 얼굴은 서양인이나 내 가슴은 한국인이다. 한국에 반한 한 이방인을 품어준 은혜에 감사하여 나는 이 땅에 수목원을 차리고 자식 돌보듯 나무를 키웠다. 내가 평생 사랑한 나의 제2 조국 동포들이 한마음이 되어 하늘이 내린 이 아름다운 강토에 늘 푸른 산림의 옷을 입혔으면 한다."

민병갈(1921~2002)이 남긴 말이다. 본명이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인 이 미국 태생의 나무광(狂)은 1979년 서양인으로서는 광복 후 두 번째로 한국에 귀화해 30년 만에 천리포 수목원을 1만1000여 종의 식물종이 살고 있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1945년 한국에 진주한 미군의 선발대 장교로 인천항에 첫발을 디딘 그는 주한미군 총사령부(군정부) 직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아 1954년부터 29년간 한국은행에서 일했다. 1960년대 초부터 한국 이름을 사용한 그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의·식·주에 동화돼 김치를 먹어야 입맛이 나고 온돌에 누워야 잠이 잘 드는 자신을 두고 "내 전생은 한국인"이라 표현했다.


1970년 태안반도 천리포에 나무를 심으며 수목원 조성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는다. 유럽과 미국의 명문 수목원과 교류하며 세계의 나무들을 수집하는 한편, 한국의 토종 나무를 세계에 전파했다. '완도호랑가시나무'를 발견하여 국제 공인을 받는 학술적인 업적도 남겼다. 이런 공로로 1989년 영국왕립원예협회(RHS)로부터 세계의 식물학자와 원예인이 선망하는 비치(Veitch) 메달을 받았다. 한국 정부는 2002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2005년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동판 초상을 헌정했다.

 

신문사 편집기자 출신인 저자는 꼼꼼히 조사한 자료들과 수목원 관련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 민병갈의 진면목을 균형감 갖춘 일대기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30년간 수목원에 들어간 500억여원을 증권 투자를 통해 마련할 정도로 돈벌이의 귀재였으나 지독한 구두쇠였다는 사실, 72세 때인 1993년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나는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암시한 점, 철저한 기록 정신의 소유자라 태안반도의 1970~1990년대 날씨 변화는 기상청 자료보다 천리포 수목원 일지가 더 정확한 점, 유창한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독일어·러시아어·이탈리아어를 구사한 외국어 달인이라는 사실, 편지쓰기를 특히 좋아해 업무상의 통신문을 포함하면 하루 평균 1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는 점 등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q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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