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정치 조폭의 시대
우리나라에 현대적 의미의 ‘조폭’을 처음 결성한 사람은 김두한 전(前) 국회의원이었다. 1930년대 후반 서울 종로 우미관 일대를 무대로 삼아 ‘주먹계’를 장악했으며 해방 직전까지 일본 야쿠자에 대항하는 ‘항일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두 손과 두 발을 자유자재로 썼다는 전설적 싸움꾼이었던 그는 의리를 중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라이벌은 명동 일대의 일본인 상인을 보호한 한국계 야쿠자 ‘하야시’. 하지만 둘은 영화에서처럼 ‘죽일 듯’ 싸우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물러간 하야시의 자리에는 평양 출신의 이화룡이 자리 잡았다. 동대문에는 자유당의 ‘정치깡패’로 잘 알려진 이정재가 터를 잡았다. 조폭계는 김두환, 이화룡, 이정재의 3각 구도로 재편된 것이다. 이들은 해방과 6·25 등으로 혼란한 정국에 뛰어들어 스스로 정치인이 되기도 하고(김두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이정재)을 하기도 했다.

1960년 4월18일, 정치화된 조폭들은 이승만 정권에 항의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각목 등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정치깡패’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고,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에게는 ‘본보기’ 척결대상이 됐다.
◆칼을 든 조폭, 유혈낭자(流血狼藉)의 시대가 시작됐다
‘정치깡패 소탕’으로 서울은 한동안 조용했다. 하지만 곧 ‘명동파’ 이화룡의 중간 두목급으로 활약했던 신상현이 중심이 된 신상사파가 서울 명동·충무로·을지로 일대를 장악했다. 주로 호남 지역을 연고지로 둔 ‘상경(上京)’ 조폭들도 등장했다. 이른바 범(凡)호남파가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울에 뿌리를 둔 신상사파에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년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신상사파의 독재가 끝난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뒤다.

1975년 1월2일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신상사파 거두(巨頭)들의 신년회장. 당대의 ‘주먹’이 모두 모인 ‘위풍당당’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범호남파의 행동대장 조양은이 회칼, 쇠파이프를 든 장정 10여명과 함께 들이닥쳤고, 신년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검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조폭계에 ‘칼’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보고 있다. 신상사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범호남파는 비록 검찰의 표적이 됐지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렇게 ‘호남 3대 패밀리’의 시대가 왔다.

◆조폭 르네상스…호남 3대 패밀리가 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국을 주름잡은 ‘호남 3대 패밀리’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OB동재파’를 일컫는 말이다. 세 집단은 계획개발이 시작된 서울 강남 일대를 근거지로 유혈 폭력을 일삼았다. 1980년대 서울 밤거리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때를 ‘조폭 르네상스’ 시기라 부르기도 한다.

조양은은 광주 OB파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했다가 1970년대 초반 상경해 범호남파의 두목 오종철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사보이호텔’ 사건을 주도했으며, 1976년 김태촌(63)에 의해 오종철이 불구가 되자 서로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1978년 ‘양은이파’를 결성한 뒤 서울 강남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한 때 조직원 수가 1만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0년 신군부 출현 이후 범죄단체 조직 등의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막후에서 조직의 운영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0년 12월 부산지역 양대 폭력조직인 칠성파와 2차례 집단 난투극을 벌인 재건20세기파

두목과 행동대원들이 부상한 조직원이 입원한 부산시내 한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는 모습.  

보안요원을 폭행(사진 왼쪽)하는가 하면 칠성파의 보복폭행에 대비해

응급실 입구를 차지해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

연합뉴스

 

범호남파계(系) 박종석의 행동대장이었던 김태촌은 1976년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조양은의 보스 오종철을 습격해 불구로 만들며 전국 3대 조

 

폭의 한 축인 ‘서방파’ 결성의 초석을 다졌다. 같은 해 신민당 총재직 선출 전당대회에 개입,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 사건을 주도하며 ‘정치깡패’의 부활을 알리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에 의해 투옥됐다가 1986년 출옥한 뒤 최고의 조폭으로 명성을 날렸다.

1980년 조양은과 김태촌이 동시에 감옥에 갇히자 이동재를 중심으로 한 OB동재파도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동재는 조양은·김태촌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유력 조폭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 말 서초구의 한 온천장에서 양은이파 조직원들의 습격을 받은 뒤 미국 이민을 떠나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후반 서울 강남 일대는 ‘호남 3대 패밀리’를 필두로 한 조폭의 유혈 난투극장이었다. 급기야 1986년 8월. ‘서진 룸살롱’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강남 유흥업소의 이권을 두고 ‘진석이파’와 ‘맘보파’가 부딪쳤고, 맘보파 조직원 4명이 회칼에 난자당해 숨졌다. 이 사건으로 전 국민적인 반(反) 조폭 정서가 대두했고, 계속되는 조폭 관련 사건에 급기야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그들은 더 영악해졌다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고 3년 후, 전국의 두목급 조폭 200여명이 체포됐다. 1998년까지 적발된 조직폭력원 수는 1만1000여명. ‘호남 3대 패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소 조폭 몇개만 ‘조용히’ 활동했으며 한동안 거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정부도 이들을 영원히 잡아 둘 수 없었다.

2000년을 전후해 하나, 둘 출소하기 시작한 조폭들은 새로운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국제조직범죄연구소의 안흥진 대표는 “대대적 단속이 있은 뒤, 조폭들이 ‘지나치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했다”고 했다. 때마침 ‘벤처’ 붐이 일었고, 일부는 ‘벤처 투자자’로 변신했다. 사채업을 운영하며 정·관계 로비스트가 되기도 했다. 조직은 더욱 합법화·체계화 됐다.

기술의 발달도 무리지어 다니는 조폭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줬다. 안 대표는 “‘예전에는 1시간 만에 100명을 모을 수 있다’거나 ‘조직원 수가 수백명이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조폭들의 자랑거리였으나 이제는 달라졌다”고 했다. 휴대전화로 문자 한 번만 돌리면 수백명의 조폭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비회사’ 간판을 내걸고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조폭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경비회사 직원처럼 보이며, 민간인 앞에서는 웬만해서는 싸우지 않는다. “튀면 죽는다.” 과거로부터 생존법을 배운 것이다. 안 대표에 따르면 이들이 명시적으로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때다. ‘세(勢)’를 과시하고, 새로운 ‘사업’ 정보를 얻으며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유혈참극의 시대는 끝났지만, 조폭들은 새로운 사업을 하며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항상 있다는 말이다.

 

조선일보 & Chosun.com 

양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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