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인 59명이 눈 속에 파묻혀 숨지자…
(김일주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13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건립됐다. 축하의 감동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부국(富國) 대통령' 박정희 기념관은 건립됐는데, '건국(建國)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은 왜 이리도 어려운가?"라는 부러운 감정만은 아니다. '역사의 단절'이라는 어떤 문제의식이 계속 머리에 맴돌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계도, 두 분을 차례로 모셨던 인물들도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박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이 대목이 아예 금기시되었고, 이후에는 이승만 연구가들도 박정희 측에서도 종북 좌파들의 공격에 대한 소극적 방어에만 몰두하여 두 분에 대한 합동연구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거부하는 짓이다.
개인적으로도 이승만과 박정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군인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 때문에 사형 언도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의 결재를 한 사람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6·25 전쟁 중 문관이었던 박정희를 다시 군에 복귀시키도록 결재한 사람도, 능력 위주의 인사를 과감하게 펴서 '박정희 장군'을 탄생시킨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1959년 박정희 5사단장은 사병과 대위 등을 포함해 군인 59명이 눈 속에 파묻혀 죽은 커다란 안전사고를 겪었다.
경무대에 불려간 박정희 사단장은 전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명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그 사고는 인재(人災)가 아닌 천재(天災)'라고 결론짓고 박정희 사단장을 원대 복귀시켰다.
한국 보수 세력의 원조는 누가 뭐라 해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부국 대통령 박정희다. 누가 더 훌륭하고 누가 더 위대하다는 키재기 식 평가를 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을 견인해 낸 두 영웅을 함께 연결해 연구해서 올바른 평가를 하고 후세에 넘겨줄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후로 산업화와 근대화에 올인한 것은 분명히 '역사의 연결'이었다.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 대한민국 정사(正史)를 펴나가는 귀한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2.02.2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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