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설교  (홍광현)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방법       

 
Ⅱ 본론      

  1. 예배와 설교의 관계      

  2. 설교의 기본이해와 기능 

   1) 설교의 기본이해      

   2) 설교의 기능      

  3. 역사적으로 보는 예배와 설교      

   1)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      

   2) 중세시대의 예배와 설교      

   3) 칼빈의 예배와 설교      

 
Ⅲ 결론      

 
Ⅳ 참고도서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도날드 밀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란 글 속에 교회의 예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하여 인간이 행하는 응답임을 의미한다"

 

  예배란 의미를 어떤 특별한 행위에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인간의 깊은 내면의 움직임인 것이다. 예배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씀과 성례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말씀을 주셨는데 주의 종이나 인물을 사용하신다.

말씀은 곧 예배의 요소 중 설교라 할 수 있고 수세기 동안 이 설교에 자세한 관심을 가져왔다. 이 설교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놀란 것은 엄청나고 방대한 연구와 저작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교회는 말씀 선교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선교 백년이 훨씬 넘은 이 시점에서 우리들이 말씀 사역의 기능과 위치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아야 한다는 좀 다른 결심을 낳는다. 제임스 레인은 "하나님 말씀 선포에 대한 불신은 심지어 복음주의적인 목회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강당에서 그들이 전하는 내용을 볼 때 그들이 설교에 대한 소신은 잃고 있음을 역력히 말해 주고 있다"라고 하여 같은 우려를 보여 준다. 그러기에 이 소논문은 예배 속에서 설교의 제기능을 찾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방법

 
앞서 말한 구조적인 어려움과 삶속에 부적응은 교회사의 역사적 교훈으로, 그것의 본질의 파악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예배와 설교의 관계를 살필 것이다. 예배 속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그 요소인 설교에 대한 위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설교의 기본이해로 시작하여 그 기능을 소고하여 볼 것이다. 말씀이 교회 안에서 예배 안에서의 바른 기능을 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방대하기에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한다. 그리고 세번째로 역사 속에서 설교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본다. 신약시대, 중세시대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칼빈을 통해 예배와 설교를 생각해 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 교회에서 잃어가는 예배에 있어서 설교의 본질을 바로 인식하고 세우는 계기를 만드고자 한다.

  

 

Ⅱ 본론 


1. 예배와 설교의 관계 


우리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열 중에 아홉은 설교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회 가서 무엇하지요?라는 물음에 "말씀을 듣지요" 라고 대답한다. 현대 교회는 이처럼 예배의 중심은 말씀 선포인 설교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설교는 예배라는 이해 속에서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회중들은 예배를 위해서 모인다. 말과 행동과 노래들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지닌 기억을 되찾고 소망을 말하며 능력과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주께 영광을 돌린다.

 

예배는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관의 관계를 은혜의 촛점에 맞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듯 그 역할을 하는 수단이요 도구가 이 말씀 선포인 설교이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며 우리의 감사를 드리며 삶으로 다짐하는 것이 설교이다. 이 점은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에서 더더욱 확인 할 수 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강단의 역사 하심을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Praedicatio verbe dei est verbum dei). 칼빈은 이것을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입과 혀가 주님께 드려저셔 사람의 입 안에서 하나님의 목소리가 공명될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기독교 강요 Ⅳ,1). 곧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다. 이처럼 현대 교회의 예배 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 교회에서 수많은 목사들에게 설교만을 위한 관심과 열정을 쏟아지고 예전에 대한 외면과 배격을 초래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는 했어도 예배 안에서 설교의 중요성은 무시되어질 수도되어져서는 안되는 근원적 요소인 것이다.

 
2. 설교의 기본이해와 기능 


  1) 설교의 기본이해

설교란. (Sermon)는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 "담화"와 "연설"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 근대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예배의 중심이 되는 형식을 갖춘 연설(Formal address)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설교하다(Preching)라고 할 때는 그것을 설교하는 행위를 두고 쓰는 말이다. 그러나 헬라어의 설교에 해당하는 이 말은 차라리 말씀의 선포, 즉 '복음의 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힘있는 증거를 가르친다.

 

설교는 이처럼 하나님이 성령의 내주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고린도전서 1장에서 잘 나타내어 주는데, 바울은 케리그마(kerygma)를 설교의 기본으로 보고 있는 설교신학을 세우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 가운데 행하는 설교는 그리스도 사건, 즉 예배 뿐 아니라 예배자들의 삶에도 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사건인 그리스도 사건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특히 목회서신에서 설교 속에 디다케(didache, 교훈)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교훈은 바로 교훈(sound doctrine, 딤전 1:10), 혹은 좋은 선한 교훈(good theaching, 딤전 4:6)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여기서 디다케가 케리그마에 속하며 케리그마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우리는 발견한다. 다시 말하면 설교엔 이 두가지 기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설교의 기능

그렇다면 설교의 기능은 어떤한가.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가지는 위치는 어떤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교회 아니 이 설교를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 설교는 어느때부터 예배의 꽃으로 대두되었을까? 초대 교회때 중세때까지 일반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많은 설교가 행하여졌던 것은 아니고 종교개혁 이후에야 오늘날과 같이 많은 설교가 행하여졌다. 


  (1) 예언자적인 기능

말씀선포의 기능중 한가지가 이 예언자작인 기능이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설교는 위안, 개선, 개혁의 문제제기의 목적을 가지고 신자와 교회의 삶에 직접적인 예언적 개입이 일어나는 기본적 수단이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현대의 설교자의 임무가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예언자적인 설교는 피할 수 없는 설교자의 임무이듯이 이러한 설교는 이 흔들리고 어지러운 세상의 신본주의의 제자리로 돌리며 바른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 역할은 감당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진리로 다가와 우리 현실의 삶 속에 깊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오늘의 사회적, 역사적 문제 속에 진리의 길을 여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한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능

만약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것이 한낱 인간의 삶의 경험에서 나은 이야기나 지적 수준을 펼쳐보이는 역할에 그친다면 그것은 생명력 없는 설교의 궁극적인 면이 될 것이다. 현대교회에 많은 목회자가 이 점을 또한 간과한다는 한 글귀에서 보듯 말씀의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해 불감증에 걸려 있는 듯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하나님과의 만남과 화해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응답과 결단이 예배라고 볼 때 설교는 말씀을 통해서 위의 제반 사건을 경험케 하여 참다운 삶을 결단케 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현현이며 나에게 주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말씀의 권위가 없게 된 이유는 목회자의 설교가 성경을 기초한 영적 깨닮음이 삶에 적용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나 그 이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면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 선포의 기능을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3. 역사적으로 보는 예배와 설교 


  1)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

신약시대의 예배와 설교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회당예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유는 설교가 비록 구약의 선지자들에 예언활동에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예배의 중심된 순서로서의 설교는 역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회당예배를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전을 잃어버려 회당(synagogue)에 모여 간단한 예정을 갖추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배려주셨던 말씀들을 다시 상고하고 반복하여 들음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바로 이 예배의 형태는 설교를 수반한 기독교 예배의 시발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과 제자 베드로, 그리고 사도 바울의 회당 및 서원에서의 설교를 그 예로 찾아볼 수 있다. 신약에서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실현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생애와 교훈과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선포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된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의 사건을 과거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현재적이고 전체적인 사건으로써 창조 때부터 재림까지를 이어주는 사건으로 외치고 있다.

신약시대 및 초대교회 많은 복음 전파자들의 설교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설교했으며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러하셨다"는 순수한 전달을 하였고, 자기주관적인 "바랍니다" 라든가, "…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약시대 초대교회는 이러한 말씀의 사실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설교는 수많은 영혼을 깨우쳤다.

 
  2) 중세시대의 예배와 설교

사도바울의 말씀에 기초한 예배와 설교는 아쉽게도 중세기에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였다. 종교개혁이전까지 어둠과 암흑속에서 예배와 예전 그 맥락을 간신히 지켜갈 뿐이였다. 실로 말씀을 들음은 예배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도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하나님의 말씀은 들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다고 하듯이 말씀은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중세의 카톨릭교회는 초대교회가 물려준 성찬예전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말씀보다는 성체성사의 지나친 신비와 미신적 신앙으로 교인들을 이끌어간 나머지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을 차단시키는 예전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 구조부터 성례전 중심으로 장식했으며 상대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는 구조를 외면해 버렸다. 이처럼 말씀이 없었던 중세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되었고 성직자의 탈선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은 중세의 예배와 설교에 대해 서글픈 역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에 균형있게 서있고 설교자나 회중이 말씀으로 새로와지는 역할을 방해하는 사탄의 역사도 보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이 사장되어 버린 시기가 바로 이 중세때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말씀의 권위를 다시 세우시는데 그것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예배와 설교의 역사창조이다.

 
  3) 칼빈의 예배와 설교

칼빈의 예배와 설교는 사실 살펴보자면 큰 논문의 주제와도 같이 엄청나게 많은 사고와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는 그 작은 부분, 즉 일국면을 소개할 수 밖에 없음을 먼저 밝힌다.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했다. 교회와 강단 설교자들은 "너희는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강단은 교회 내에서 또 세속적인 사회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칼빈의 설교의 입장과 그에 비추어진 사실에 대해 정성구 교수는 6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칼빈은 자기가 행하는 설교의 일이 성직자의 처지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말씀의 사역자" 또는 "말씀의 종"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다고 생각되는 것, 즉 복음을 증거하였지 회중의 변덕스런 기분에 맞추기 위해서 설교하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인간은 성령님의 도구임을 말하였다. 칼빈이 설교자로서 활동은 스트라버그에서의 3년간(1538-1541)과 다시 제네바(Geneva)에 돌아가서 약 20년간이었다 라고 정성구 교수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주일에 두번씩 설교를 했다. 한 번은 새벽이고 다음은 오후 3시에 있었다. 평일에는 월, 수, 금요일에 설교를 하였다. 설교시간은 약 1시간 정도였는데 그 안에서는 기도와 찬송이 포함되어져 있으므로 말

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고, 칼빈의 설교는 연속적 성경강해인데 깊은 명상과 기도로 준비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설교를 했다. 그는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달하는 것을 설교자의 의무로 여겼고 주일 아침에는 신약을, 주일 저녁에는 시편을, 평일에는 구약을 강해하였으나 결코 어떤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설교자가 성경의 해석만하고 청중의 감화를 귀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설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듣는 자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회개를 위해서는 먼저 설교를 듣는 자들의 형편과 성질을 잘 살펴서 거기에 합당한 어법과 비유를 선택해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 주께서 말씀하신 이것을 칼빈은 성경 속에서 발견하였다. 이 사실 때문에 성경은 그에게 있어서 다른 기록 문서처럼 여러 가지 서류의 집합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뜻"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에서 성경은 인간의 영혼 깊이 파고드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설교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앞에 계시는 것처럼 설교해야 하며, 서기가 임금 앞에서 말하듯 하며, 천지의 대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구임을 자각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들 중에 하나님 앞에 선 것처럼의 "마치…처럼(as if)"이란 표현은 칼빈에게 있어서는 허구나 가장의 뜻이 아니라 사실로 해석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를 하면서 칼빈은 우선 청중들의 의지에 호소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가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려주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할 때 첫째 회개에 강조점을 둔 이유가 여기 있다. 이것이 효과적인 설교의 비결인 것이다.

 
  넷째,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이 말씀은 성경이며 설교의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회개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어로 강해하고 연구하는 근면성을 보이는데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설교할 자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을 통해서 교회에 전파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다섯째, 칼빈은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 듣는 청중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저들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청중이 잘 깨닫기 위해 예화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일상용어, 속담도, 유모어도 섞었다. 또한 칼빈은 그 시대에 대한 연구와 풍속, 시사적인 문제까지도 대단히 민감하였다.

 
  여섯째, 칼빈은 주로 강해설교를 하였는데 성경해석뿐만 아니고 영적감화를 동시에 주장하였다. 성경해석만 하고 영적감화가 없다면 그 설교는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Ⅲ 결론 


맨 앞서 글을 이끌면서 이야기 했지만 현대 많은 교회는 말씀의 권위가 없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계시적 말씀에 불감증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예배에 있어서의 설교를 고찰해 보았다. 특별한 주장도, 내용의 심오성도 없다. 일선 지도자로서 그리고 이제의 강단 사역자로서 설교의 진정한 위치가 무엇인가를 보려고 이 책 저 책 찾아 깨닫고 좋았던 것을 정리하는 글이 된 것 같다. 설교는 예배의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기능이요 예언자적인 삶의 구체적인 실천적인 기능을 설명하였다. 그외에도 서술하지 않았지만 교육적인 면 도덕윤리적인 면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무엇보다도 그러기 위해서는 신약시대나 중세시대 종교개혁 시대의 설교를 보아야 했고 그속에서 기본 중심된 설교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첫째, 성경에 근거한 온전한 말씀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령의 강한 인도를 따라 삶 속에 기도와 묵상으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온전히 계시하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들이, 그의 삶이 좋은 교과서가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다양한 세상의 수많은 문제가운데 말씀의 예전이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서고, 하나님의 권위의 재정립은 이 설교의 올바른 가치와 목적을 수행함에 있다 하겠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서 함께 노력하고 고민하는 강단 사역자가 되었으면 한다.

 
Ⅳ 참고도서 

김희보. "목회자로서의 칼빈." [신학지남] 제29권, 제1호. 1962.

방지형. [기초예배학] 서울: 성광문화사, 1992.

엄필형. [예배의 갱신과 목회] 서울: 감신출판부, 1991.

정성구. [실천신학개론] 서울: 총신대출판부, 1980.

정장복. [예배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5.

J.J. 폰 알멘. [예배학원론] 정용섭 외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도날드. G. 밀러. [교회의 본질과 사명] 박상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2.

제임스 레인. [능력있는 설교] 이태웅, 송헌복 역. 서울: 두란노, 1986.

로버트 웨버. [예배학] 편집부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죤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정성구, 양낙홍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논문>

박봉원. "한국교회 설교의 형태 연구." 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원, 1982.

 

(출처: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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