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선포하라

하워드 크로스비(1826-1891)
역: 이권우

사도바울은 말년에 순교를 눈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딤후 4:2). 이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한 최후 명령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 제 강연의 본문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삼십년의 경험과 십오년의 사도적 통찰력, 그리고 성령님의 영감, 이 모든 것이 이 안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로서 주어진 명령이며 디모데에게 뿐 아니라 신유언(신약) 교회 내에서 복음전도자(evangelists)나 선포자(preacher)의 직무를 수행하는 모든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은 간결하지만 말씀 선포(preaching)에 관한 바울의 모든 가르침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간결한 명령에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는 바울이 그렇게 강조한 '건전한 교리'(딤전 1:10; 딤후 4:3; 딛1:9; 딛2:1)를 붙잡으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우화(fables)나 세상 지혜(world's wisdom)'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의 교리(doctrine of Christ)를 인간의 철학에 맞추어 이 둘을 함께 융합시키려는 풍조가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모든 종교가 그 뿌리에 있어서 동일한 신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초기 영지주의(gnosticism) 내에서,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의 알렉산드리아 학교 내에서, 그리고 이후 교회 안에 일어난 여러 이단사상들 속에서 우리는 이런 점을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그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하여 철학적인 사고와 융화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많은 특징들을 인간 지각의 관점으로나 본성의 가르침에 호소함으로써 설명해 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공통적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의 가증함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운명의 동질성을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죄는 하나의 결함이나 질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처방에 의해 결함은 채워질 수 있고, 질병도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이러한 인간의 노력에 대한 격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 생활과 도덕적인 개선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 인생 여정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리들을 사용해서도 족히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도 단지 그런 원리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히 무시되거나 소홀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말씀을 공부해서 그렇게 광범위하고 무분별한 적용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세련됨이나 거기에 기초한 우주적 형제애를 마음에 두고 전전긍긍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속해 있던 시대에서 이러한 풍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게 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경고합니다. "조심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말미암아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골 2:8).

악한 원리들(evil principles)은 항상 활동하고있고, 인간의 본성도 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은혜의 기초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교만의 발명품을 집어 넣으려 하는 인간의 본성적인 노력에 항상 노출되어 왔습니다. 악한 원리가 성직계급의 형태로 나타나건 이성적인 연구나 과학적인 탐구라는 성격으로 나타나건 간에 그것은 언제나 성경기록을 가리고 삭제하며 반박합니다. 악한 원리는 성경 자체를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성한 요구와 타협없는 단호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한 원리들은 성경에 직접 호소하는 것을 무지의 표현이요, 맹신의 표시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볼 수있는 가장 슬픈 장면 중의 하나는 소위 지명 받은 말씀의 선포자들(preachers)에게 조차도 이런 교만의 영이 지배적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현대판 디모데들이 예술이나 문학강연을 위해 강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선포를 자신의 화려한 문체나 웅변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삼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편법이나 편의주의를 선포하기도 합니다. 한편 다른 이들은 '뭐 재미있는 거 없을까'하며 찾아 다니는 청중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 주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에서 복음이 헛되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루시안(Lucian, 아리우스파의 스승이며,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사상을 가짐* 역자주) 조차도 앞에 언급된 내용 정도는 떠 벌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육적인 요구와 미적인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유창한 설교, 엄선된 음악, 센세이셔널한 주제들 그리고 현대적 감각의 의자받침대,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치사한 고안물들이 성공적으로 먹혀들게 될 때, 사람들은 그 교회가 번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설교자(preacher)는 자신의 이름이 신문에 게재되기를 기뻐하여, 자신의 설교를 신문에 게재될 수 있는 수준에까지 기꺼이 끌어 내리려 합니다. 이런 교회는 당연히 세속적인 교회임원들과 세속적인 회원들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거나 그렇지 않다면 남몰래 탄식할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에 직접 대항하여 여러 세대를 향해 경고의 나팔을 힘껏 불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

그렇다면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철학이나 인간의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계시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권위(authority)와 권능(power)을 가집니다. 권위는 주의를 요하며, 권능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약사발(mortar) 속에서 빻아지거나 인간의 틀에 맞추어져서는 안됩니다. 왜곡되거나 인간의 예측된 사고에 맞추어져서도 안됩니다. 인간의 채로 걸러내어서도 인간의 속임수와 혼합시켜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십자가 곁에 서 계십니다. 거기서 그분은 죄를 위한 희생물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뒤로는 구유언(Old Testament, 구약) 그리고 앞으로는 신유언(New Testament, 신약)이 있고, 이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구유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라"(요 5:39) 신유언에 대해 주님은 그분의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위로자(Comforter)가 오시면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것이요, 그들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5:26).

이 구유언은 하나님의 한 계시 즉 한 성경이며, 또한 하나의 무오류한 믿음의 법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에 의심스럽고 속임이 가득한 빛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진리와 우화가 하나로 묶여져 있는 꾸러미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약하고 일관성이 없는 이성(reason)에다 방치해 두시므로, 계시(revelation)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확실한 대언의 말씀"(sure word of prophecy)을 주셨고, 이 말씀만이 우리의 이성과 죄악된 성품에 합당하고도 유일한 지침이 됩니다. 이 확실한 말씀 위에 그분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은혜의 교리들은 인간에게 비롯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지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전체가 하나님에게 비롯된 것이며,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 사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리들을 설명하려거나 끼워 맞추려고 인간의 철학이나 인간의 내적 인식에 의존하는 것은 형법의 탁월함을 이해하기 위해 유죄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류중의 오류는 신앙의 진리를 사람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인간의 육적인 마음에 끼워 맞추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반역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방종을 변호하는 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비난은 우리가 책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숭배" 이것은 그들이 우리들에게 내뱉는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책(the Book)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분이 주신 성경을 등한시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존귀히 여긴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주신 말씀을 존귀히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몽상가들의 변덕이나, 잘난 체하는 비평가들의 불경건한 손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말씀에 대한 열의를 갖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말씀에 대항하여 깃털의 무게를 재는 행위들, 즉 사색이나 상상들, 그리고 사람들의 추측들(그가 제아무리 많이 배운 자라 할지라도)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영향을 헐뜯기 위한 그들의 뜨거운 노력이 크나큰 오류임을 거듭해서 깨닫게 되었고, 결국 그들의 비평은 스스로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소위 학식있다고 하는 이런 류의 말씀의 적들이 터무니없이 퍼뜨려진 오류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신비, 로맨스, 운문체의 소설, 구전집, 모순되는 기록들, 경건한 속임수, 이런 것들이 거드름을 피우는 교만한 인간들이 성경이 그러하다 하여 성경말씀에다 갖다 붙인 딱지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비웃음 중 어떤 부분도 정직한 비평의 조명으로 뒷받침된 적은 없습니다. 모세로부터 요한까지의 모든 거룩한 기록들 안에서 그것을 반박할 만한 과학적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반박하는 역사적 사실도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가장 열심있고 학식 있는 진리의 대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단지 필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들과 일반 상식으로도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을 그들이 상상해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러한 시험(test)을 Vedas(힌두교의 경전)나, Avesta(조로아스터교의 경전), 또는 Koran(이슬람교의 경전)에다 적용시킨다면 그 차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이들은 정말 오류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흙도가니에서 나온 흠없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적대적인 비평가들만큼이나 학식 있고 철저하며, 그 분야에서 알려지고 존경받는 사람들도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무오류한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일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판정이 똑같이 학식 있는 자들의 법정에서 무효화될 수 있다면, 그들의 학식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증거들 위에 또한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그들은 성경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평안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이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듯이 말씀에 다가가며, 아이가 아버지의 소중함과 권위에 대해 의심치 않듯이, 말씀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수의 원천이 불완전하거나 부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이런 자세야말로 바른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서 나오는 한 방울 한 방울을 신성한 은혜의 선물로 소중히 여기며, 늘 복된 샘물로 달려가 그곳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트집잡기 좋아하는 비평가들은 고려해 볼 가치도 없습니다.그들은 마치 태양 빛을 상대로 논쟁하는 자들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크리스천 설교자들이 선포(preach)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 곧 흠없고 능력 있어, 의(義)와 위로에 합당한 '거룩한 말씀'(holy Word)이어야 합니다. 설교자(preacher)는 선포자(proclaimer)요, 전언자(herald)이지 잡다한 이론들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다만 그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철학이라는 우물물을 길어와서는 안되며, 다만 하나님의 왕좌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그 물줄기를 끌어와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을 메시지 뒤로 숨기고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과 똑같이 그 메시지를 받아야만 합니다. 선포자나 설교자는 (preacher)는 교회의 신조나 말하고, 교회의 입장에서 비난이나 퍼붓는 교회의 대변자(mouthpiece)가 아닙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전언자의 위치에 서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호소의 대상인 인간의 마음과 양심이 있고, 그의 뒤에는 선포하고 강조해야 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놓여져 있습니다. 선포(preaching)에 관해 그에게 주어진 교회의 명령도 결국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는 전언자로서 교회에 대해서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언자이지, 교회의 전언자가 아닙니다. 선포자는 사람들의 동의를 그의 설교(preaching)의 지침으로 삼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위를 그 지침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선포자가 사람과 교권(敎權) 모두의 비위를 맞추길 원할 때, 그는 하나의 표준(사 59:19)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의 의무는 더 높이 있으며 이 모든 것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서 한정짓는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크게 발휘해야 하는데, 말씀만을 열심히 인용하는 것으로도 그는 말씀에다 인간적인 방법들을 혼합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사람들의 구원에 훨씬 더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론은 매우 그럴싸하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슬프게도 많은 설교자들이 그것들을 도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법론들이 많은 군중을 끌어들여 자리를 가득 메우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지로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을 위해 주님께서 그분의 전언자들을 보낸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대만원을 이루거나 대중의 갈채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성공'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참된 성공'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경건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더욱 거룩한 삶, 곧 더욱 세상과 구별되며, 각기 종사하는 일에 있어 정직하며 그리스도인답게 남의 유익을 구하며, 보다 철저히 말씀을 아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선포자가 올바르게 추구해야 할 '참된 성공의 표지'(signs)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광스런 결과로, 헌신된 영혼들은 이를 위해 기도할 것이고, 선포자가 그 안에서 더욱 순수하고 거룩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숫자나 부(副), 또는 대중의 칭찬으로부터 오는 그런 기쁨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선포자가 오직 말씀만을 선포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말씀을 다루도록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즉 그는 다음과 같이 가르칠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먼저 제가 성경을 읽거나 해석할 때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은 각자 집에서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이 축복된 진리들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 심겨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능하게 되고, 성경말씀에 능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구원에 있어서도 강한 능력이 됩니다. 그는 그것을 원천에서 직접 끌어들여 거룩한 진리의 능력을 자신의 영혼 안에서 충만히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감으로 그 빛의 어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자가 말씀만을 선포한다면, 스스로도 말씀을 공부하는 부지런한 학생이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잠겨 충만함으로, 무지와 속임수로 가득찬 비난의 화살들에 대항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각 항목 즉 역사, 연대기, 민족, 지리, 예언, 교훈, 그리고 교리에 대해 친숙하게 될 것입니다.그는 그것을 어떤 간접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습니다.그는 무엇을 설교할까 알기 위해 교황이나 공의회에 가지 않을 것이며, 칼빈(calvin)이나 알미니우스(Arminius)에게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그의 기쁨은 주님의 법 안에 있으며, 그는 그것을 주야로 묵상할 뿐입니다.

참으로 슬픈 사실은 설교자들이 그의 사역을 위해 준비되는 장소인 신학교, 그 신학교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지 않고, 대신 그 자리에 소위 '교부'(敎父)나 위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이라는 철학의 계략을 집어놓고서는 이것을 교리적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계략들을 방어하고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있어야 하고, 또 성경구절들이 인용됩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 몇몇은 성경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잘못은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부수적인 역할밖에는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어떤 신학교들은 하나도 과장 안하고, 다음과 같습니다:

"신자(believers)를 회의론자(doubters)로 바꾸어 드립니다."
(○○ 신학교, ☏ ×××-○○○○ )

물론 그들의 변명은 설교자가 되려면 마땅히 성경의 진실성과 확실성 그리고 순수성을 반대하는 이론들도 모두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정말 속이 빤히 들여다 보입니다.정말 성경이 목적이 된다면 이러한 반대이론이야 막간에 있는 익살극 정도로 취급되고, 성경의 압도적인 증거들이 사고의 주류를 이루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이론이 높임을 받고 그에 관련된 저작물들이 추천도서 목록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넌지시 하나님의 말씀의 영감에 관한 보수적인 견해를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의 발로(發露)라고 비웃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높임을 받고, 주님의 거룩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 말씀에 대한 신실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던 - 우리는 죄악되고 죽어 가는 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선포자로 자신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바로 이런 기대를 했었습니다. - 바로 그 장소에서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는 성경의 영감의 교리와 그 권위가 훼손당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서 속히 이 악을 분별하여 교회 전체가 이 교활한 영향력에 의해 중독 되기 전에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네 젊은 디모데들에게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한가지 갈망으로 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말씀에 관한 의혹들이나 다툼들을 피하십시오. 이러한 것들은 경건한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세우는 능력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임을 명심하십시오.설교자들의 설교가 삭막하고 열매가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말씀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영은 오로지 거룩한 말씀과 함께 하고, 그분의 강한 능력은 오로지 그분의 방식대로 역사합니다. 말씀은 초자연적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위해 초자연적인 것을 버리는 설교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검(the word of the Spirit)은 한쪽 구석에다 제쳐 두고 대신 자신의 기분에 따라 면도날을 사용하는 설교자에게 또한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워드 크로스비 (1826-1891) 는 뉴욕 대학을 졸업하고, 1851년 이후 줄곧 동대학에서 그리스어 교수로 있다가, 1859년부터는 룻거스(Rutgers) 대학(그의 증조부의 이름을 따서 만든)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뉴욕 Fourth Avenue 장로교회 목사로서, 그의 저서는 <여호수아>, <느헤미야>를 비롯, 신약 전체 주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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