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달력을 보면, AD 336년 까지는 로마에서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의 축제로 축하하여 왔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동쪽에서는 오직 탄생만을 축하해 오던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탄생과 침례를 1월 6일로 기념하였다.

4세기 동안에 동방그리스정교회들은 12월 25일에 행해지던 그리스도 탄생의 축하를 받아 들였다. 예루살렘은 끝까지 크리스마스를 반대 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르메니안 교회(Armenian Church) 에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1월 6일에 축하하였다. 동방에 크리스마스가 세워지고 나서 예수님의 침례는 에피하니(Epiphany)라 하여 1월 6일에 축하하였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에피하니는 매기(Magi)가 아기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날이다. (Encyclopedia Britannica)

 

초대 교회 사도들이나 주님의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도 기념하지도 지내지도 않았다. 초대 교인들에게는 그들의 하나님이자 구원자가 섬광처럼 오셨다는 것으로 충분했고, 예수님께서 이미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탄생의 날이나 시간은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것은 부활하신 고귀한 예수님이지 구유에 누워있던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아기예수’ 가 아니라 모두의 고귀한 주님이셨다.

 

다신교 로마 시절에는 예수의 부활이후 300년 후에 해마다 로마의 신(god) 새턴(Saturn)을 섬기는 축제가 있었다. 이 축제의 시기는 항상 동지라고 불리는 12월 17에서 23일 근처였다.  

 

그 다신교 해는 지구의 변화에 따른  겨울, 봄, 여름, 가을의 계절 변화가 이어졌다. 동지는  겨울에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하루이거나 그 기간이었다. 이때는 보통 술취함과 환락과 흥청거림의 축제였다.  

 

이교도 로마인들은 이 잔치를 그들의 신(god) 새턴(Saturn)을 기념하여 ‘농신의 날 잔치 (The Feast of Saturnalia)’ 라고 불렀다.

사탄(SATAN)과 새턴(SATURN)은 얼마나 소리가 비슷한 이름인가? 이 축제는 12월 17일부터 23일 까지 계속 되었다.

이때는 술잔치가 벌어지고, 마지막 이틀 동안은 집집마다 새턴(사탄?-Saturn)을 기념하며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새터나리아(Saturnalia)” 농업의 신 새턴(Saturn)을 기념하던  고대 로마의 축제 이름이다. 축제는 12월 17일에 시작하여 7일

      동안 계속 된다. 첫째날에는 새턴(Saturn)을 기념하는 종교적인  의식이 이루어 진다. 둘째날에는 많은 종족들이 어린 돼지를  

      제물로 바친다. 세터나리아(Saturnalia)는 게이의 근원이다. 학교도 문을 닫고 모든 가게들도 문을 닫는다. 법정도 문을 닫으며

      어떤  범죄자도 처벌 받지 않는다. 가족들은 연회를 베풀고 종들도 그  축제에 참가하는 자유를 가진다. 축제의 마지막 날은

      서로를 방문  하고 선물을 교환한다. ‘Sigillaria' 라고 불리는 흙으로 채워진 선물들은 ’작은 인형‘을 뜻한다.”

       - World Book Encyclopedia

 

  그리고나서 12월 25일에는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The Birthday of the unconquerable Sun)’ 이라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Natalis Solis Invicti) 고대 이교도 들은 태양이 동지 기간동안 에는 죽어 있다가 동지가 끝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하늘 높이 떠오르며 그것이 권세를 다시 얻는 다고 믿었다. 12월 25일 은 또한 정의의 태양이고 빛의 신이며 구원자인 페르시안 (이라니안) 의 신 미트라 Mithras 의 생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태양신 미트라 Mithras는 고대 고마 왕국의 유명한 신 이었고, 그에 대한 숭배는 BC 1세기 로마인들에게 강하게 전파 되었다.   

 

        “이 축제는 단순하게 태양의 일년 주기를 마치고 해로운  주기를 시작하는 오직 천문학적인 성격만을 가진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이 축제는 이것 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문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단지 표상적인 새 주기를 시작

       하는 태양의 생일이 아니라  태양신, 위대한 중재자인 구원자의 탄생을 기념하였다.”

        (Alexander Hislop, The two Babylons or The Papal

        Worship, Loizeaux Brothers, 1916, pp. 94, 97)


미트라(Mithras) 는 이집트에서는 호루스(Horus)로, 바벨론에서는 탐무즈(Tammus)로 그리고 다른 고대 신화에서는 다른 명칭들로 알려졌다.  

 

태양신 오시리스(Osiris)와 그의 배우자 여신 이시스(Isis), 그리고 신들의 아버지 fp 아템(Re-Atem)은 ‘젶 테피(Zep Tepi)’ 혹은 ‘첫 시간(First Time)’ 이라고 불리는 황금 시대에 최고 권력자로 여겨졌다. 그들의 왕국은 오시리스(Osiris)가 그의 악마 형제 세스(Seth)  혹은 타이풍(Typhon)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갑자기 끝이 났다. 아이가 없는 이시스(Isis)는 오시리스(Osiris)의 절단된 몸들을 찾아 다녔고,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Horus)라고 여겨질 만큼 후에 그를 부활 시켰다. 호루스는 오시리스의 환상이며, 이시스의 새 남편이며, 세스(Seth)가 통치하는 오시리스의 왕국을 되찾을 자라고 믿어졌다.  

 

호루스 신화는 창세기 이야기의 특이한 사냥군 니므롯(Nimrod)에 대한 신의 판단과 이집트의 신비스런 종교들에서 유래된 바빌로니아의 종교 체계에 대한 왜곡이다.  

 

이 신화 형태는 프리메이슨(Freemasonry) 주의와 다른 신비스런 믿음 체계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프리메이슨주의의 심취자 몰몬(Mormons)은 세스가 오시리스의 형제였던 것처럼 사탄(Satan) 도 예수님(Jesus)의 형제라고 믿었다.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말로 하늘의 여왕인 이시스의 아들은 바로 동지에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크리스마스라고 잘 알려진 율 데이(Yule Day)는 예전 그것의 이교도들과 바빌론 기원을 입증한다. 율(Yule)은 아이 혹은 작은 아이의 갈데아의 이름이고, 우리의 이교도 앵글로 -색슨 선조들이 기독교인들과 접촉하기 훨씬 전부터 12월 25일은 ‘율 데이(Yule Day)' 혹은 아이의 밤, 그 전날은 ’어머니의 밤‘ 이라고 불렀다는 것에서 그 참 성격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이교도들의 세계에서는 이날도 널리 숭배되고 있다.”(The Two Babylon,pp.93,94)

 

‘어머니의 밤’ 은 오늘날 크리스마스 이브 라고 불리고,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 와는 아무 상관없으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훨씬 전부터 지내왔다. 세미라미스(Semiramis)가 ‘어머니의 밤’의 기원이고, ‘아이의 날’은 그녀의 아들이자 태양신인 탐무즈(Tammuze) 가 태어난 날이다.   

 

사탄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늘을 떠날 것이고 처녀의 몸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자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태어날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짜 처녀와 아이를 위조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를 가로챘다.

그 가짜 처녀는 세미라미스라고 하는 아름다운 처녀 마술사였다.  

 

노아 홍수가 끝나고, 생존자들은 번식했고, 바벨론을 세웠다. 세미라미스는 바벨론의 여왕이 되었고, 니므롯(Nimrod- 역사적으로

그의 엄마의 남편이라고 알려진)와 결혼했다. 니므롯이 죽었을 때, 사탄의 거짓 처녀 세미라미스는 탐무즈(Tammuz-나중에 태양신 바알이 되는)을 잉태 하였고, 그는 니므롯의 부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 주위의 사탄적 이교도는 매우 영향력 있었고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바벨론 사람들이 전 지구로 흩어질 때 그들은 그 신비한 모자(母子)에 대한 경배를 가지고 갔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훨씬 전에 그의 조작된 종교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세미라미스는 점점 더 많은 이름으로 알려졌고, 시간이 갈수록 많은 나라에서 여신과 그의 아들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바벨론(Babylon) : 세미라미스와 탐무즈(Semiramis and Tammuz(BAAL)

중국(China) : 싱무-거룩한 어머니(Shing Moo-Holy Mother)

헬라(Greece): 여신 아프로디테 “메디아트릭스”(Aphrodite- "The Mediatrix")

인도(India) : 여신 디바키, 아기 크리쉬나(Devaki(goddess) Crishna (child)

로마(Rome) : 여신 비너스 아기 쥬피터(Venus(goddess) Jupiter(child)

에베소(Ephesus) : 다이아나(신들의 어머니로 세미라미스와 동격)(Diana)

이집트(Egypt) : 이스스(어머니 여신)와 아기 호루스(Isis,  Horus)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 : 아기를 안고있는 디사

이스라엘(Israel) : 아스다롯(여신)과 바알(아기)(Ashtaroth, Baal)  

 

“심지어 중국, 티벳, 일본에서도 로마에서와 같이 성모 마리아와 그 아기와 꼭 닮은 자들을 독실하게 섬기는 것을 발견한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매우 놀랐다.”(The Two Babylon, Hislop, p.20)

 

고대 로마에서는 종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목상 기독교에 공식적인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는 그 왕국내에 평화를 가져왔다. 콘스탄틴 황제는 훌륭한 군대 지휘자였고, 외형적 기독교를 국교로 공포하고, 모든 이방인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게 되면 기독교인들과 이교도인들 사이에 진정한 하나됨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만큼 천재적이었다. 콘스탄틴이 이끄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교도들의 구미에 맞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상징들, 형식, 관습, 전통들을 다시 해석하였고, 이교도들은 다른 이름으로 그들의 전통신들을 여전히 숭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새터나리아(Saturnalia)를 기독교에 접목 시켰다. 12월 25일이 태양신의 탄생일이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이 이교도의 의식과 신의 아들의 탄생일을 숭배하는 것을 취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의의 태양으로 태양신 미트라(Mithras)를 대신하여 나타났다.  

 

알렉산더 히슬롭은 ‘투 바벨론’에서 초대 교회의 순수함은 로마 카톨릭이 이교도들의 풍습을 받아 들였던 시기에 변질되었다 라고

하였다.  

 

“3세기까지 참된 기독교 교회 안에서 크리스마스와 같은 이교도 축제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고, 4세기도 체 되기 전에 무척 발전하여 그것은 보편적 관례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로마카톨릭은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했을까? 왜, 그 4세기 훨씬 전에 예수시대 그 훨씬 전에 바로 그것과 일치하는 때에, 바벨론의 하늘의 여왕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이방인들 사이에 행해졌던 것을 그대로 따랐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방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그리고 명목상의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기 위해 로마카톨릭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어 그 축제를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The Two Babylon, p.93)

 

“이교도 문화 상징과 용어의 ‘기독교화’- 이교도 로마인들이 그들의 오래된 믿음이나 의식들을 포기하지 않고 개종시키기 위하여 기독교는 변질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실질적인 효과는 공식적인 기독교를 이교도화 한 것이다. 복합종교는 기독교가 학명들과 이교도적 교리의 정의들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과거의 명성에서 멀어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세계의 우상숭배는 폐지될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 이교도적 결합들은 변질된 기독교의 옷으로 감추어졌다.” (Vire, W.E, Gospel Tract Publications, The Colleted Writings of W.E. Vire, Volume 5. Glasgrow, Scotland, 1986, pp. 436-439)

 

이교도의 휴일들은 기독교적 휴일로 다시 분류 되었고, 의복 초, 향 등을 포함한 이교도적 관습들과 영의 발현은 교회의 예배와 모두

결합되었고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 고해성사에 대한 사상과 성직자의 금욕주의(독신주의등)는 고대 바벨론의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이교도의 위대한 어머니를 대치할 논리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Mary)였다.  처녀 어머니와 그의 아들을 숭배하는 것은

그것이 이집트 이름인 이시스와 호루스건 혹은 바벨론 이름인 세미라미스와 탐무즈이건 또는 로마 이름인 비너스와 쥬피터이건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이건 로마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똑같은 오래된 우상숭배였다.  

 

콘스탄틴은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고, A.D. 325년에 니케아 회의를 개최할 발판을 세웠던 바벨론의 미신적 종교를 A.D 313년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A.D. 375년 쥴리어스1세(Julius I) 밑에 있던 로마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일이 12월 25일로 ‘발견’ 되었다고 알리고, 독실한

사람들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 비록 몇몇 교부들이 그 축제를 기념하는 것은 아주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터나리아(Saturnalia) 축제와 미트라(Mithras)의 생일을 지금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숭배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인도에 따라 예루살렘 교회는 약 A.D. 440년경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을 받아 들였다.  

 

카톨릭 미사(The Catholic Mass)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미사(Christ's Mass)”가 줄여져 ‘크리스마스(Christmas)’가 되버린 그리스도를 위한 불경스런 미사를 갖기 시작했다. 그 카톨릭 미사는 그리스도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집행되었다.

이 미사 속에서, 성직자이며 동시에 희생양으로 여겨졌던 예수님은 매번 이 미사가 행해질 때 마다 희생제물로 드려졌던 카톨릭 신부에 의해 재현되었다. 이 제물을 드릴 때, 그 신부는 그가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순전한 살과 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신에게 하는 것처럼 이 요소들을 경배하도록 요구 하였다. 이것은 분명한 복음의 부정이다. (죄를 대속하는 제물을 다시 드렸다.) 히브리서 9:12,24-26; 10:10-14를 보라

 

“그리스도께서 참 성막의 모형들인 손으로 만든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늘 자체 안으로 들어가셔서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나시고 또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을 자주 드려야할 필요가 없으니 그리하면 주님께서 세상의 시작 이래로 반드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의 끝에 단 한 번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희생 예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4-26 KJV)  

 

AD831년에 처음으로 그 변질에 대해서 교회에 소개되었을 때, 프랑스의 왕은 그것을 폭로하기 위해 아일랜드 박사 요하니스 스코투스, 에리게나(Johannis Scotus, Erigena)를 소집했다. 여기 스코틀랜드 국가사 3권의 간단한 인용문이 있다.  

 

“831년은 교회 발달학상에 있어서 기록할 만한 해이다. 그해에는 4백년후에 잔인한 변질을 가져오는 극악무도한 대죄가 처음으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게 된 때이다. 831년 출판된 프랑스 신부 파스카시우스 레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는 처음으로 세상에 성찬식때의 그리스도의 몸은 처녀에게서 났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제안했다. 모든 서구의 교회들은 놀랐다. 당대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 개념은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그들은 결코 찬성할 수 없다고 공표했다. 이 엄청나고 새로운 개념에 대해 반대하는데 있어서 스코틀랜드 교회들과 그 연계지보다 완고한 곳은 없었다.  그 반대파의 우두머리에는 파리 대학의 설립자인 에리게나, 요하니스 스코투스를 포함한 스코츠-아일랜드(Scoto-Irish) 교회들이 있었다.”  

 

스코투스는 프랑스의 한 영지에 장기간 체류하였고, 그 군주는 그에게 파스카시우스 반대파에 들어오라고 요청하였다. 그 위대한 철학자는 왕의 부름에 따랐고 당시 프랑스의 교회들이 받아들이려 하는 그 배도적인 교리를 비난하는 책을 썼다.

또다른 뛰어난 신학자 베르트람(Bertram)은 새롭고 기괴한 건의에 대항하는 활동에서  스코투스와 의견을 같이 했다. 파스카시우스에 대해 논박하는 베르트람의 책은 현존하고, 로마의 금기서적 목록에 성경과 같이 자리하고 있다.

 

약 200년 쯤 후에 그 변질된 교리가 짙은 어두움처럼 강력하게 독일과 프랑스를 향해 갈 때  베렝가리우스(Berengarius)는 절대 화합하지 않는 반대자로 맞서 대항했다. 거친 박해의 폭풍속에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믿는 진리를 대담하게 방어했고, 19세기 교회들에게 자신의 성만찬에 대한 생각을 보여 줌으로써 스코투스의 연구를 옹호했다. 이것은 스코투스의 책을 소동 속에 몰아넣었다. 한 시골 사람의 연구는 레오 11세에 의해 A.D. 1050년에 불속에 던져졌다. 그러나 그 제목은 시대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 제목은 이러하다: 제단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진짜 몸과 피가 아니라 단지 그의 몸과 피의 형상일 뿐이다.  

 

초대교회에서 ‘제단’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의 논쟁에서 로마 법학자들을 도왔다. 초기 기독교의 기록에서 성구가 종종 나타나는 것은 허락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그 성구가 무슨 의미로 사용 되었는가’이다. 역사는 의문들에 대해 우리에게 답한다.

초대교회의 강단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초대교회의 만찬은 성물의 기념 혹은 빵과 포도즙의 성찬이었고, 성물이 놓여 있는 테이블 주변에 서 있는 성직자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의 예배는 직무하는 성직자에 의해 인도되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분석할 때 초기 교회의 강단에 대해 어떤 로마 카톨릭의 교리들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나무 테이블에 빵과 포도즙을 드리는 단순한 행위에서 헌신적인 의미도 속죄의 효능도 볼 수 없었고, 초대교회들의 생각이나 시각에서 변형된 그러한 미사가 아직 존재 하지 않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자연스러웠고, 단순하고 성스러웠다.

 

그렇다면, 로마 법학자들이 초대 교인들이 사용했던 생각이나 교리의 표현, 상징들을 그 후에 몇 세기 동안이나 주장한 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미래에 가져오게 된 것들에 대해 무시했던 초대교회에 의해 행해지던 종교예식에 대해 말할 때, 콜럼비아 교회가 같은 문체를 쓴다는 것 만으로 그들의 발견되지 않은 논리적인 대죄에 집중하려는 시도 또한 똑같이 모순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과제이다.

 

우리는 그들이 모순적인 의식으로 다툰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침묵 속에서 믿는 것은 허락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그들의 시각의 고집과 모든 사람들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 주장하는 그들의 대담함에 대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Footnote  발췌

 

1 Dupin, Cent, ix.c.7 제목외에 약간 더 스코투스의 작품에서 인용되었다. 예를들어; ‘제단위에 놓여지는 것들은 보여지는 것이 전부이지 현실성은 없다.’ Specie geruntur ista, non veritate

 

1563년경 트렌트회의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오직 상징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죽음의 선고를 제정했다.   

 

규범1. 누구든지 가장 성스러운 성례인 성찬식에서 진실로 진실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혼과 함께 그 몸과 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고, 그것은 오직 표시와 상징으로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받으리라.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13장 7조.  

 

한 기독교 종교재판에 대한 연구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카톨릭의 트렌트 공회의를 부정하고,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톱니 바퀴에서 죽고, 고문을 당하고, 화형을 당했는지 밝히고 있다. 미사에서 사용된 빵이 작은 태양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그 기원이 바벨론과 태양숭배에서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카톨릭에게 저항함으로써 마치 이방인처럼 신부들과 카톨릭주의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바티칸 회의 기간과 그후의 모든 신부들은 이 법령위에 모든 회의의 비준을 받아들이고 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등을 위시한 청교도들이 잉글랜드를 장악했을 때 크리스마스는 그 이교도적 성격 때문에 법으로

금지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거나, 그날에 일을 안하고 집에서 쉬는 것에 대한 형법은 엄했다. 크리스마스를 금한 것에 대한

폭동이 일어났고, 1660년 카톨릭 국왕 찰스 2세 Charles II 는 기념일을 다시 부활 시켰다.

 

모든 비난은 청교도들에게 남겨졌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경멸스러운것이고 비그리스도적인 것이었고, 크리스마스를 휴일이나 기념하는 것은 금지 되었다. 1644년 청교도들이 의회를 조종하여 12월 25일을 금식일로 정하면서 공격받기 시작한다. 1647년에는 금식일 조차 로마 카톨릭교회와 유사한 미신의 잔재로 여겨져 폐지되었다. 12월 25일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날은 보통의 일하는 날과 같이 여겨졌다. 크리스마스는 불경스런 사람들이 소리치는 날, 미신적인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는 날, 경멸스런 천주교 미사의 날, 사탄의 일하는 날, 다양한 우상숭배의 날, 오래된 이방인의 축제의 날 등으로 정확히 묘사 되었다. 그런 날들에 장식을 부수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군대에 의해 모든 크리스마스 의식은 망가졌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람들 또한 감옥에 갇혔다. 크리스마스를 금지한 것에 대한 폭동들 때문에 1660년 찰스 2세(Charles II)는 크리스마스를 부활시켰다.(a Catholic Sulgrace, Manor, "A Tudor Christmas," p.3)

 

청교도들의 전통은 뉴 잉글랜드로 전해졌다. 식민지 주민들은 블루법(Blue Law)이 라고 알려진 잉글랜드 법을 따랐고, 미국의 정착자들은 크리스마스는 천주교적 휴일로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는 ‘공동체의 성스러운 빵’으로 여겨지지 않아서 금지 되었다.  

 

“영국 기독교의 많은 부분들은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이교도의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 청교도, 침례교, 퀘이커교도, 개신교도, 칼빈교도 와 다른 종파들은 초기 뉴잉글랜드에 반대했고, 18세기 중엽까지 미국에서 행해진 휴일에 강하게 반대하였다.”(The Origins of Christmas,: Rick Meisel Dec. 19, 1993, p.4-Quoting from a 23rd Dec. 1983 USA TODAY article)

 

그러나 점차 많은 이주민들이 크리스마스 풍습을 가지고 왔다. 조합교회 신자인 헨리 바르드 비쳐(Henry Ward Beecher)는 1874년 그의 뉴 잉글랜드에서의 소년시절에 대해 적었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이국의 날이었고, 그래서 나는 잠잠해야 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우리 동네에는 감독파의 교회가 있었고, 나는 그들이 상록수를 꾸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왜 그들이 나무를 교회에 가지고 왔는지 궁금했지만 어디서도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얼마후 나는 그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나온 로마 의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1800년 초에 몇몇의 뉴욕 역사 협회(New York Historical Society)의 설립자들은 크리스마스 전통을 부활시켰다. 그전에 메사추세츠 주에서는 12월 25일날 일을 쉬는 것도 불법이었다. 1659년 메사추세츠에서는 그것이 금지 되었고, 그후 22년 동안이나 그 법은 남아 있었다. 보스턴에서는 1870년까지 학교는 12월 25일에 문을 열었다. 1836년까지 알라바마(Alabama) 주가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휴일로 선포하였다. 그후 시민 전쟁(남북전쟁)까지 어느 주도 선포하지 않았다. 1885년에서야 비로소 모든 노동자 연맹들은 크리스마스에 쉴 수가 있었다.   

 

19세기 잉글랜드와 미국의 사회적 영적 혁명은 불가피하게 청교도주의에서의 이탈을 가져왔다. 1841년 영국에서 영국 정기 간행물 펀치(Punch)는 크리스마스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때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는 2년후 챨스 디킨슨(Charles Dickens)의 크리스마스 캐롤의 영감이 되었다.

 

챨스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은 1871년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시간과 계절에 따른 미신이 없다. 확실히 우리는 크리스마스라는 교회법상의 의식을 현재 믿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그것이 라틴어든 영어든 써있거나 노래되더라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단지 경멸할 뿐이다.

둘째, 우리는 특정한 날을 구세주의 탄생일로 여기는 타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미신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권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언제 발생했는지 발견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신은 우리 구세주의 탄생일을 정해 버렸다.” (Spurgeon, C.H. "Joy Born At Bethlehem," A semon: delivered on a Lord's Day Morning, December 24th, 1871. Metropolitan Tabernacle Puppit, pp.697-698)

 

크리스마스의 관습과 전통들은 나중에 종교적이기 보다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바벨론 상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크리스마스 때 모든 품목을 훨씬 많이 팔았다.

당신은 계속 바벨론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사겠는가?(계18:10-1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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