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령님은 인격이시다.

 

왜 우리의 믿음이 항상 막연하기만 한가? 왜 힘이 없는가? 왜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는가? 성령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성령님을 바로 알아야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성령님과 가까워야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과도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성령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 기본이다. 기본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무시되기 쉽다. 기본이 잘되어야 너머지지 않는다. 깊이 발전할 수 있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버지라는 확실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라는 아주 확실한 인격적인 분의 개념을 가진다. 그런데 성령님이라고 하면 뜬구름잡듯 막연해진다. 그래서 믿음의 문제가 된다. 성령님의 개념이 확실하게 잡혀야,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게 되고, 성령님을 찾고 간구하며 느낄 수가 있게 된다.

 

성령님을 느끼면 예수님을 느끼게 되고, 예수님을 느껴야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을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이나 아버지를 느끼고 알 수 없게 된다. 성령님을 제외시키고는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합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 예수님을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에 대하여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성령님을 불러도 소용이 없다. 인격이신 분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불러야 성령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을 분명한 인격으로 인정해야 드디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발걸음이 시작된다.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님은 늘 부르면서도 성령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전혀 생동력, 생명력이 있을 수가 없다.

 

성령님이 이제 내 삶의 중심에 오게 해야한다. 성령님의 권위를 되찾아 드려야 한다. 성령님의 귀중함을 찾아 드려야 한다. 그분이 마음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성령님이 강대상의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 성령님이 예배의 모든 순서에서 감동감화시키게 해드려야 한다. 그래야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래야 내가 살고, 신앙생활이 살아난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귀하게 여기고, 그분에게 내 약함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이르키신다. 그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고, 그 사람 마음속에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된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을 몰라서도 아니고, 목회자의 수가 적어서도 아니라, 성령님을 외롭게 했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제쳐놓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그렇게 시시한 분이 아니시다. 이분을 항상 앞세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이 사역하시고, 그분이 말씀하시고, 그분이 나를 사용하실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그분에게 나를 드릴수록, 그분은 자신을 나에게 주신다.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할수록 그분도 나를 필요로 하신다. 내가 약할수록 그분은 강하게 역사하신다. 내가 작아질수록, 성령님은 커지시고, 내가 뒤로갈수록 그분은 앞장서신다. 사도바울도, 베드로도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성령님을 앞세우고 일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말로만 성령을 앞세우고 사실은 전혀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약하고 성도가 약하고, 성령님은 나타나지 못하신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기억하라. 이것을 삶의 철칙으로 세우라. 목회자라면 ‘내가 성령의 입술이 되게 해주세요. 성령이 주시는 감동만이 내 입술을 통해서 전달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간구하라. 그렇게 결단하는 순간, 간구하는 순간, 성령께서 바로 입술을 잡으신다. 그러면 목회자의 메시지가 좀 어눌해도, 앞뒤가 맞지 않아도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다. 그 메시지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자기를 기대는 사람을 쓰신다. 나는 못하고 성령님은 하신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쓰신다.

 

내 옆에 아주 강하고 나를 돕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 가까워지고 친해짐으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성령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다만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눈에 안보이지만 보이는 것처럼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으로 인정하고 입술로 그 사실을 시인하고 선포하라. 그분이 듣고, 내가 듣도록 입술로 선포하라. ‘나는 약하고 그분은 강하시고, 그분이 나를 도우시면 나는 하나님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고백을 자꾸 하라. 입술로 시인하라. 성령을 자꾸 의지하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자꾸 들어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그분을 인정하고 가까이 하고, 내 자신의 연약함을 그분에게 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늘 그분을 인정하라. 그분의 도움을 간구하라.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친하게 교제하라.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을 인격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면, 성령님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성령님도 이름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별개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은 성령님이 분명한 인격이신 분이라는 것이다.

 

2. 성령님의 지정의

 

1) 지(知)

고전 2:10-11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전지하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마음도, 우리의 깊은 마음도 아신다. 나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신다. 영의 차원은 시간의 개념이 없는 차원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차원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으면 얼마든지 과거를 치유할 수도 있고, 미래를 만들 수도 있다.

 

2) 정(情)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성령님이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은 성령님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이나 육성이 아니라,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분을 인격적인 분으로 대하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그분을 대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감정, 사모하는 감정을 가지고 간절히 고백하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인격이 가장 크게 상처를 입는 것은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이다. 인격으로 여기지 않고 기능이나 물건으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그동안 성령님은 얼마나 우리에게서 이러한 무시를 당하고 물건취급, 기능취급을 당해왔는가!

 

성령님과 교제하려면 될 수 있는 한 혼자 있는 시간을 내라. 그리고 오직 성령님과만 교제하려고 하라. 누구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고 도와주시려는 성령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라. 그분을 느끼려고 하라. 이것이 성령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 표현을 찾으라. 이러한 표현을 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기뻐하심을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러한 기쁨의 감정이 진정 내 기쁨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내 안에 가장 깊숙히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기쁨이야말로 내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그분을 기쁘게 하라. 그런 훈련을 하라.

 

롬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사랑은 전달되어야 한다. 주고 받아야 한다. 오고 가야 한다. 그래야 발전되고 성장한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려는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에게 사랑을 고백하라.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라. 사랑을 고백하라. 성령님은 매우 실제적인 분이다. 추상적인 분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분, 실제적인 분이다. 이 사실을 믿고, 인정하고 느끼라. 그리고 자꾸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하라. 우리의 일을 맡기라. 자꾸, 모든 일을 의논하라. 대화하라. 교제하라. 하나되라. 마음에서, 생각에서, 행동에서, 그분과 함께 하라.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면 그분은 기쁘게 우리의 의지가 되어주시는 분이다.

 

‘천국이 우리 안에’ 라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라는 뜻이다. 천국이 가까이 오심도 예수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오심이다. 성령 하나님과 한마음, 한 뜻이 되라. 이것이 천국이다. 거기에는 눈물이 있을 수 없고,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적기도를 깊이하면 시간도 초월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인 기도를 하면 모든 근심, 걱정이 분리되고 하나님 주시는 기쁨이 넘치게 된다. 이것이 천국의 생명이요 축복이다.

 

3) 의(意)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님은 의지를 가지고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령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성령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3. 성령님의 직분, 사역

 

1) 영원히 함께 거하심.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모시게 하신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심은 복음중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사건만큼이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구원하심만큼이나, 이 사건은 복음이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내것으로 이해하고 소유하게 된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의 모든 것에 대한 관문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내안에 다른 분이 계시기 시작함을 느끼게 된다. 내안에 두 인격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와 성령님이다. 이분은 나의 약한 것을 도우시러 오신 분이기 때문에 결코 나를 떠나시지 않으신다.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를 귀하게 여기고, 그분의 뜻을 느끼기 시작할 때, 성경이 새롭게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주님은 말구유에 오셨다. 현재 우리 마음은 말구유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러한 곳에 오신 성령 하나님은 더럽지만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계신다. 이 더러운 마음에 하나님이 영원히 계신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그러면서 우리가 필요해서 부르면 그때마다 도와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고 있는가?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2) 스승, 인도자.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들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오순절 성령께서 오신 다음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게 된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사람에게서 받으려 하지 말고, 성령님에게서 받으려 하라.

성령님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나를 다 아시는 분이다. 그분에게 나를 맡기면 얼마나 잘 인도해주실 것인가! 그분은 나를 가장 좋은 길로, 방법으로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을 만나라, 그분을 내삶에 초청하라.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 그분의 계획을 따르라. 성령님을 나의 군사, 나의 왕, 나의 인도자로 모시라. 성령님은 인격이시므로, 내가 요청하고 간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신다. 예수님도 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고 질문하셨고,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초청과 간구를 들으신 후에 치유해 주셨다. 성령님에게 의지를 보이라. 성령님을 향한 열망을 보이라. 고백하라. 내어보이라. 맡기고 부탁할 때, 그분이 움직이신다.

 

3) 예수의 증거자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예수님을 사람들은 알았고, 하나님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알았던 것은 전부 부분적인 것에 불과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이 오셔서 두려운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아버지로 소개해주셨다. 탕자의 아버지로 소개해주셨다.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시는 분으로 소개하셨다.

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알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 하나님의 중심으로 갈 수가 없다.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중심을 소개하셨다.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을 알리셨다.

그리고 다시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해주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에 대하여 바르게, 균형잡히게, 하나님의 참 마음을 전달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하여 기능적인 면보다, 전체적인 면, 그분의 인격,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이다. 성령님도 영이시고 인격이시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도록 사랑하시는 분으로 알지 않고 떡주시고 귀신 쫓아주시는 분으로 알아서는 안되는 것처럼, 성령님도, 은사를 주시는 기능적인 분보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하여 오신 인격적인 분으로 알고 인정해야한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자꾸 찾으라.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다. 십자가를 내 마음에 바로 세울 수가 있다. 성령님을 찾으면 찾을수록 성령님이 앞에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하나님 아버지가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랑해야 삼위일체 하나님 전부의 사랑을 알고 받게 된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성령님에게 사랑을 고백하라. 예수님을 향하여 기능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으로 알고 그분을 향하여 나아감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는 것처럼, 성령님에 대해서도, 기능적인 분으로만 알고 인격적인 분으로 알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알라. 인격적인 분 앞으로 도움을 받기 위하여 나아가라.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의 성도, 목회자가 약해지고 있다.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내면의 연약함을 치유받지 못하고 있다.

 

성령님을 자꾸 부르고 의지함으로 성령님에게 일감을 드리라. 일어나 일하시게 하라. 성령님을 알아야 예수님을 알게 된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어도 예수님을 잘 모르다가, 성령님이 오신 후에야 제대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성령님을 모시고, 일하시게 해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이 내것이 된다. 성령님을 찾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요, 예수님을 바로 찾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찾는 것이다.

 

4)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 내면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이 분의 손에 잡히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복되게 되어있다. 누구보다도 더 나를 잘 알고, 더 뜨겁게 나를 도와주려고 애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때마다, 시간을 내어서 성령님과 교제하라. 성령님에게 시간을 내어드리지 않고, 성령님과 교제하지 않음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어린 아이의 행복은 장난감이 아니라 엄마의 품에 있는 것처럼, 성령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성령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나, 성령님에게서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나를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성령님에게 안기는 것이요,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웬만한 일에는 세상으로부터 초월하고, 성령님과 연합하라. 세상의 그 어느것에도 너무 빠지지 말고 성령님에게만 빠지라.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이 주는 아픔, 슬픔, 기쁨, 쾌락등은 전부 지나가는 것들이고 위조품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내것이 아닌 것들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이 영원한 것이고 진정 내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바로 이러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 앞에, 우리 옆에 늘 와 계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세상에 민감하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이 좋은 것에 둔감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육과 이성만 있으면 되지만, 성도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이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담 못하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하여 오신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라. 성령님이라는 인격과 손을 잡으라. 다른 어떤 인격을 만나고, 다른 어떤 인격의 도움을 받기보다 성령이라는 인격을 먼저 찾고 만나고 도움을 받고 치유를 받으라. 그래야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초대교회의 사도와 같은 야성과 능력을 가지게 된다. 초대교회의 힘찬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성령님의 간섭을 받고, 통제를 받고, 인도를 받고, 능력을 받으라. 그러기 위해서 성령님을 바로 알라.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을 기능으로 여기지 말라.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 인격적인 분으로 알라. 성령님은 약품이 아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다.

 

5) 중보자

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님에게로 들어가야 우리의 기도가 위로 올라간다. 우리의 속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이 천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에게로 찾아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모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바로 성령님을 찾는 것이다.

 

6) 책망자

마음이 어둡고 무거운 것은 성령의 책망함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천국시민권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아야 방향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요, 영생을 가지고, 영생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늘 주님과 연결되고, 늘 성령님과 연결되어 살아야 한다. 늘 성령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만 천국방향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다. 잠시라도 이것을 놓치고 살면 안된다. 늘 성령님의 간섭과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땀을 흘려도, 그분의 지시를 받지 않고, 그분의 인도를 받지 않고 한 것이요, 마지막 하나님앞에서 ‘내가 모르는 일, 나는 너를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지시를 받으려 하라. 그렇게 될 때까지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 지시와 인도가 오면 그만큼 하라. 그리고 다시 인도와 지시를 기다리라. 아무리 큰 일이라도 주님이 모른다 하는 일을 하려고 하지말고, 조그만 일이라도 주님이 기억하고 칭찬하는 일을 하려고 하라. 아무리 큰 일이라도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은 모르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지시하셔서,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계획을 세우려고 하지말라.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기다리라.

 

4. 삼위 하나님의 역할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가지고 오셔서 나타내지 않으셨으면 그 사랑은 공중에 떠 있는 사랑에 지나지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타났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현시킨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공중에 떠 있지 않고 현실로 나타난 것,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런데 이 은혜가 그냥 갈보리에 있어서는 은혜가 은혜가 아니다. 이 은혜를 진정한 은혜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은혜가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밥상 위의 음식을 내가 먹어 내 안으로 들어와야 내게 힘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도 내 안으로 들어와야 영생이고 능력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이 성령의 교통하심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주님과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주님과 함께 내가 부활한 것이 그냥 말만이 아니라, 진실로 나의 사건으로 느끼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이시다.

 

성령님은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이분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만 가능하다. 내가 잘나서 믿음이 아니라, 내가 똑똑해서 믿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믿게 해주시고, 십자가를 느끼게 해주심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교통하심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선물이시다. 우리의 구원에 성령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 그 어느것도 우리의 구원에 빠져서는 안되는 귀중한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이 모든 것을 믿게 해주신다. 믿어지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귀하게 여기고 자꾸 불러야 한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님이 아니고는 예수님에게로 갈 수가 없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가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령님을 불러야 한다.

 

5. 삼위의 동격

 

1) 삼위 하나님은 동격, 동등 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얼마나 귀중한가. 예수님은 또 얼마나 귀중한가.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의 귀중함을 얼마나 무시하고 살아왔는가! 성령님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에게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 성령님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보다도 먼저 성령님을 부르라. 찾으라.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라. 부활의 빈무덤으로 나아가라.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령님을 찾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섭섭해 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제야 제 길을 찾았다고 기뻐하실 것이다. 성부성자성령에 어떤 계급장을 붙이지 말라. 삼위 하나님은 격이 같으신 분이다.

 

2) 서로 동등됨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높이는 관계이시며, 삼위는 언제나 함께 사역하신다. 서로를 높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섬김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섬기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섬기신다. 섬김으로 하나가 되신다.

 

3)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하셨다.

눅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예수님이 땅에 계셨을 때,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 예수님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셨고, 제자들과도 함께 하셨다. 그리고 우리와도 함께

하신다.

 

6. 삼위의 연합

 

1) 구원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연합작품이다.

 

2) 예배

예배도 삼위 하나님의 연합작품이다. 예배는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형식에 지나지않는다. 예배속의 성령의 감동은 십자가의 보혈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현대에 예배의 불이 꺼진 것은 성령의 감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배속에 생명이 없고, 용서와 위로가 없는 것이다.

찬양속에도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영적 찬양이 되어야 한다. 예배속에, 찬양속에 성령님의 감동이 없다면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메시지를 전할 때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성령의 감동이 그 입술의 말에 함께 하지 않으면 인간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서기관의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토요일 밤에 예배장소에 와서 간구하라. ‘성령님, 이 예배속에서 성령의 감동이 있게 해주세요. 예배속에 감동감화주시는 성령님을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이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물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약해집니다. 우리를 만나주세요. 성령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예배속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게 해주세요. 주님, 설교자가 내일 이 자리에 서서 말할 것인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나오는 말이 되게 해주세요. 그래야 저들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 목적을 이루게 해주소서.’ 이렇게 간구하라.

 

왜 예배가 형식적이 되는가? 성령의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몸이 와서 조금 감정적이 되다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지 못하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안도와 위로를 슬쩍 맛만 보고, 바다에 갔다가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예배속에 성령의 감동이 없기 때문에 성전 뜰만 밟고 왔다갔다 하게 되며, 믿음이 약해지고, 교회가 약해지고 성도가 약해진다. ‘하나님, 우리가 작은 교회지만, 우리의 예배의 모습, 우리의 속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모습이 작은 모형이 되어서 다른 곳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만족하겠나이다. 정말 하나님께 붙들리고 매어달려서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받아서 다른 교회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으면, 그래서 그들도 변화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나이다. 그러면 만족하겠나이다.’ 이렇게 간구하라.

 

1-2년안에 거둘 일을 하지 말고, 50-100년에 거둘 일을 하기를 원하라. 성령사역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하라. 먼 곳을 향해서 잔잔한 파도만 보내라. 보내고 보내고 보내면 언젠가 저쪽에 닿을 때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당대에 무엇을 이루려고 하셨다면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실 수도 있었을 것이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제자 몇 명만을 맑게 해주셨다. 맑은 제자 몇 명만 키우라. 멀리보고 사역하라. 성과와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결과는 성령님에게 맡기고 성령님과 함께 손잡고 일하는 자세를 가지라. 심는 마음으로 사역하라. 후대를 위하여 과실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사역하라.

 

3) 기도

유 1:20 ... 성령으로 기도하며 

기도에도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무엇에든지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으면 형식, 습관, 껍질, 틀만 있게 된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하여 간구하라.

 

7.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인식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

 

이 차이는 대단하다.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성령님을 그냥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만 안다면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다.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능적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그분을 사용하게 된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든 능력과 표적만 나타나면 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형편이 된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 나타나면, 그때는 내가 하는 것이 되고, 내가 영광을 받게 되고, 이를 위해서 자꾸 여러 가지 편법이 동원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정말 내가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분, 인격적인 분으로 알고 교제하게 되면 순수한 동기가 생기고, 과정도 맑게 되고 결과도 맑게 된다.

 

동기가 문제이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통하여 나의 목적을 이루려함과 인격이신 성령님을 만나, 그분의 목적을 이루려는 순수한 동기, 이것이 혼탁해짐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동기가 오염되면 과정이 오염되고, 과정이 오염되면 결과가 오염되게 된다. 바른 동기를 가지라. 성령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귐으로, 바르게 교통함으로 바른 동기를 가지라. 성령님을 부르고 찾으라.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라. 그러면 바른 과정과 결과를 얻게 된다.

 

과정이 오염되면 성령님과의 교제를 무시한 일방적인 사역을 함으로 결국 사단의 사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성령님의 능력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게 되며 하나님의 뜻과 위배된 사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바른 과정을 가지게 도면 계속적인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많은 가르침과 자신의 실수를 수정하여 나감으로 인하여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은사자의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의 능력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하여 나에게 주신 것이며, 능력이 자신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한강물 한드럼과 맑은 물 한잔과 어느것이 갈증을 해소하며, 어느 것이 목말라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을 주겠는가? 인간은 양과 크기를 따지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양이 아니라, 순수함이다. 순수함은 성령님이 우리를 쓸 수 있는 생명력이다. 순수함을 찾아나서라.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말고 순수한 일을 하려고 하라. 세례요한은 많은 일을 하지 않고 정확히 자기 할 일을 순수하게 하고 사라졌다. 나는 과연 하나님앞에 바로 서려고 몸부림을 쳤는가? 물량주의에 빠지지 말고 이러한 순수함에 몰두하라. 이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게 담긴다. 이런 사역속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치유가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이런 자세가 될 때,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한 것은 후대가 그 열매를 맺을 것이고, 그 때 그 열매는 나의 열매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나 열매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순수함에 매어달리라. 긴안목을 가지라. 열매를 거두는 일보다 씨를 심는 일에 매어달리라. 바로 서는 일에

매어달리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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