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neu'ma(프뉴마) : 바람, 호흡, 생명, 영,성령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뉴마(Aeschyl., Hdt. 이래)는 프네오(pnevw: 바람이 '불다', 숨쉬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1) 바람

이 단어의 어근은 공기의 기류로서의 역할을 하는 활력을 의미한다. 이 어근의 의미를 근거로 하여 프뉴마는 첫째로 바람을 의미한다. 이 바람은 폭풍, 일반적인 바람, 미풍, 심지어는 수증기일 수도 있다. 바람은 기후, 건강, 성격에 영향을 미치며, 자연적인 것으로도 간주되고 신적인 것으로도 간주된다.

 

2) 호흡

프뉴마는 숨을 쉬는 호흡을 의미한다. 여기서 호흡은 콧김을 내뿜는 것에서부터 헐떡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한다. 프뉴마는 시적으로 사용될 때는 피리 등을 불므로 인간의 호흡이 내는 소리를 의미한다.

 

3) 생명

호흡은 생명의 표시이다. 프뉴마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개념에 의해 생명이나 생물을 의미한다.

 

4) 영혼

프뉴마는 생명의 원리로서 프쉬케(yuchv, : 영혼)와 매우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프뉴마는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는 몸 안에 제약되어 있고, 마지막 숨과 더불어 몸을 떠나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5) 전이된 의미로 '영'

프뉴마는 전이된 의미로 상호간의 관계에서 오가는 영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 성읍의 정신이나, 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이나, 다양한 형태의 자극을 의미하기도 한다.

 

6) 예언적인 '영'

예언과 예언적인 시에서 프뉴마는 자극시키고 열심을 내게 하며, 채워주고, 영감을 주는 영이다(참조: 제사장들, 시인들, 선지자들). 프뉴마는 또한 고상한 웅변술의 언어, 연사의 사로잡는 힘 등을 가리킬 수도 있다.

 

7) 신적인 '영'

근본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프뉴마는 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예: 종교 음악에서). 그러나 헬라 세계에는 인격적인 성령의 개념이 없다. 신적인 영은 내재적인 것이다.

 

8) 신과 '영'

스토아주의에서 프뉴마는 우주적 능력이나실체이다. 따라서 프뉴마는 신 자체의 존재나 현현을 의미한다.

 

9) 프뉴마의 의미의 비헬라적 발달

유대교의 영향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프뉴마는 두 가지 의미로 발전되었다. 한편으로 프뉴마는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적극적인 우주론적 또는 구원론적 영이나 신으로 의인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프뉴마는 주술사들이 선하게 또는 악하게 조작하는 악마적인 주술적 세력을 뜻하게 되었다. (참조: F. Hauk; Walter Bauer; J. H. Thayer).

 

[헬라어 어근 프뉴-(pneu-)에서 영을 뜻하는 신약 성경적 단어가 유래하였는데, 이 어근은 '공기의 힘 있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이 어근의 파생어들은 다음의 의미들을 가진다.

 

프네오(pnevw)

(일반적으로 바람과 공기에 대하여 또한 악기로) '불다' blow, (또한 살아있다는 의미로) '호흡하다' breathe, '향기 따위를 발산하다' emit a fragrance, etc., '열, 분노, 용기, 자비심 따위를 발하다' radiate heat, anger, courage, benevolence, etc를 의미한다(이 단어의 의미는 모두 공기의 요소 위에서 산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프노에(pnohv)

(바람이) '붐' blowing, '호흡' breathing(특히 헐떡거림), (신에 의한) '영감' inspiration, '증기' steam, '증발' evaporation을 의미한다.

 

에크프네오(ejkpnevw)

'숨을 내쉬다' breathe out, '(바람이) 그치다' blow out, '호흡을 그치다' stop breating(즉 죽다 die), '숨을 그만쉬다' get out of breath, '바람 불기를 그치다' stop blowing를 의미한다.

 

엠프네오(ejmpnevw)

'숨을 들이키다' breathe in, '호흡하고 있다' be breathing, '살아있다' be alive, '어떤 것에 입김을 내뿜거나 들이키다' blow on to or into something, '북돋우다' inbreathe, '영감을 주다' inspire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대단히 중요성을 띠는 단어인 프뉴마(영 spirit)는 이 프뉴-(pneu-)에 접미어 -마(ma-ma)가 첨가되어 형성되었으며, 이 단어는 이러한 행동의 결과, 즉 '공기를 움직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것은 특별한 본질로 간주되고, 공기의 내재적 힘에 기본적인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그런데 전 소크라테스 학파[pre-Socratic school] 이전에는 이 단어의 용례가 입증되지 않았다.) 그 의미는 '바람' wind이나 '호흡' breath이었으나 점차 이와 관련된 개념들의 기능을 지니게 되어 헬라니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중요성을 지닌 용어로 사용되었고, 여전히 다소 유물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는 생명을 지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따라서 호흡을 중단하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Aesch., Pers. 507). 5세기 이후로 헬라의 의사들은 이에 바탕을 둔 생리학을 발전시켰으며, 그리고 나서 곧 사람의 정신적 본유적(本有的) 프뉴마(pneu'ma)와 그가 호흡하는 공기를 대조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작품에서 이 프뉴마(pneu'ma)는 배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성숙한 개체를 만들어내는 형성적 힘이었으며 게다가 사람의 경우에 있어 영혼이 몸을 다스릴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이미 이 단어는 프쉬케(yuchv, 영혼Soul)의 의미와 유사하였으며 후자가 순전히 기능적 용어였는데 반하여, 프뉴마(pneu'ma,)는 본질로 간주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에서 프뉴마(pneu'ma,)는 의미와 사상과 언어적인 면에서 프쉬케(yuchv,)의 기능들을 이어받았다(일부 스트오 철학자들은 심지어 이 단어를 인간 특유의 지력을 뜻하는 누스[nou'", 3563]와 동일시하기까지 하였다).

 

스토아 철학은 또한 그것을 창조시의 각기 다른 실재들에 부합하는 기본적인 원리로 간주하였으며 동시에 이 단어가 실재들을 제각기 구별짓는다고도 생각하였다. 따라서 공기나 불같이 극히 미세하게 짜여진 본질로서 이것은 세상을 강하적(降下的) 단계로 정렬했으며, 이것이 없었더라면 세상의 존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영묘한 모양으로 로고스(Logos), 곧 하나님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불로서 사람의 영혼이었다.

 

이것은 물질적인 프뉴마(pneu'ma,)로서 식물을 형성했으며, 습관적인 프뉴마 (pneu'ma,)로서 생명이 없는 물상들(inanimate objects)과 일치하였다. 이로부터 이 단어는 제 5의 요소(또는 '본질' quintessence)로 간주되어졌는데, 이미 '공기' 대신에 4가지 요소들 중 하나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플루타아크(Plutarch)와 몇 명의 다른 사람들은 널리 사용된 기능적인 용어 에핍노이아(epipnoia, 영감 afflatus)를 폐기해 버렸는데, 이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 때문에 그랬던 것같다. 그런데 이 단어는 여러 유형의 몰아적 영감에 관한 플라톤의 학설의 토대가 되었던 단어이다(Phdr. 244ff.; 참조 265b). 그 대신에 그리고 분명히 플라톤(Plato)에 의존해서, 그들은 '영감' inspiration을 뜻하는 말로 프뉴마(pneu'ma,)를 사용하여, 그것으로 인간을 채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언할 수 있게 하는 물질적인 본질로서 간주하였다.

 

이 예언적인 프뉴마(pneu'ma,)는 자연히 '열정적인' enthusiastic 환상적인, 악마적인, 거룩한(히에론), 심지어 신성한 것으로까지 생각되었다. 파피루스(Papyrus) 발굴물 들은 이 단어가 대중 종교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며(언제나 마술과 예언에서 사용됨), 소위 미드라스 기도문(Mithras Liturgy, ed. A. Dieterich, Eine Mithrasliturgie, 19233, 4, 14, 21)에서 이것은 4가지 요소들 중에 나타나며, '거룩한 것' 그리고 '불멸의 것' 그리고 그것을 받는 사람을 필멸의 본성을 초월하는 곳에로 끌어 올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점에서 이것은 아마도 예언적 황홀과 유추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단어는 헬라의 비문들과 파피루스 문헌들에서(역시 후대 작가들, 예, Iamblichus, De Mysteriis 2, 3, 10) '영' spirit, '귀신' demon의 의미로 발견된다. 확실히 이 단어가 이런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은 근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유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형용사 프뉴마티코스(pneumatikov", 4152, 접미사 이코스[ikov"-ikos]는 '~에 속하는' pertaining to을 뜻한다)는 이 다어의 어근인 명사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전 소크라테스 학파(the pre-Socratic school) 이후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데오프뉴토스(qeovpneusto",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inspired by God)는 드물게 나오며 헬라 시대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그 후 점(占)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단 이 단어가 지혜에 사용된 오직 한번의실례는 예외이다(참조, M. Dibelius and H. Conzelmann, the Pastoral Epistles, Hermeneia, 1972, 120). -E.Kamlah.] (p2-811-812*).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프뉴마(pneu'ma,)의 히브리어 상당어로는 거의 항상 루아흐((j"Wr)가 사용되었다. 단지 3회만 프뉴마(pneu'ma,)가 네샤마(호흡 breath)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더욱이 70인역본에서 루아흐를 번역할 때 프뉴마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마소라 본문에 루아흐(j"Wr)가 377회 나오는데, 그중 264회는 프뉴마(pneu'ma, 4151)로 번역되었고, 그 다음으로 가장 자주 사용된 단어는 아네모스(a[nemo", '바람' wind)로서 49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루아흐의 배후에 있는 사상은 공기처럼 만질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움직일 것이라는 기묘한 사실이다. 동시에 이 단어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움직인 그 자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움직임으로 분명해지는 힘(energy)인 것이다. 그러므로 루아흐의 기본 의미는 대강 '(바람이) 부는' blowing이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 그러므로 루아흐((j"Wr)의 모든 용례들 중의 약 삼분의 일에서 이 단어는 만질 수 없는 바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때 하나님은 이 바람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나온다(창 8:1,암 4:13사 40:7시 104:4[H103:4].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아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람의 방향' the direction of the wind(예, 겔 37:9겔 41:16-20)과바람의 덧없는 특성으로 인하여(참조, 시 78:39[H77:39]) 은유적으로, '무가치한 것' nothing, 존재하지 않음 nothingness(예, 전 5:15, 70인역본 아네모스)을 의미한다.

 

2) 사람(겔 37:8, 10, 참조, 겔 38:9)의 경우와 짐승들(전 3:19, 21 등등)의 경우에 호흡하는데 있어서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호흡은 개인(삿 15:19)이나 무리(민 16:22)의 생명력을 의미하며 이 호흡은 우상들에게는 없으나 하나님(시 33:6[H32:6])이나 메시야(사 11:4)에게는 없지 않다. 하나님은 호흡을 주시며(참조, 사 42:5) 호흡을 보호하시나(시 31:6[H30:6]) 자유로이 호흡을 다시 취하시며(시 104:29[H103:29]) 그렇게 해서 호흡은 하나님께 돌아간다(전 12:7). 생명력으로서 호흡은 강도면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며, 여기에서 호흡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호흡이 수반하는 활력(vitality)이 지배적인 개념이다.

 

호흡은 번민(창 41:8)과 근심(창 26:35)에서 극단적인 절망에 이르는 감정들로 인하여 악영향을 받기도 한다. 호흡은 의심(민 5:14)이나 노(anger, 삿 8:3)로 거칠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생생하게 나타내주는 '주의 콧김' the blast of his nostrils(출 15:8욥 4:9)이란 구절에서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가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이 사람 Man에 관하여 언급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즉 이 방법은 사람의 인간적 속성들을 모두 적절하게 분류하는 임상적 방법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한 사람을 찾아서, 그가 행하는 것, 즉 동료 인간들에게 대한 그의 품행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가 보이는 태도를 평가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을 받아들인다.

 

구약성경의 접근방법은 구체적이어서 구약성경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용어들은 우리들 주변 세상의 평범하고 가시적이며 분명한 현상들에서 취해진 것이다. j"Wr에 함축될 의미는 공기의 움직임을 수반하면서 행해지는 호흡이 모든 인간 행위에 내재해 있는 생명력의 외적 표출인 것이다.

 

이것은 보다 큰 정도이든 작은 정도이든 힘(energy)을 필요로 하는 행위 및 힘을 정해진 경로에 따라 경주되도록 하는 행동의 경우에 해당된다(예, 스 1:1, 누구의 마음을 감동시키다. 즉 그에게 결정을 내리게 하다). 이 경우에 마음(spirit)은 계획이나 의도와 동의어 일 수 있다(사 19:3). 겸손하거나(잠 16:9) 교만하거나(전 7:8), 참거나(전 7:8) 조급해하거나(잠 14:29)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행동, 정죄를 당치 않으며(시 32:2[H31:2]), 충성되며(시 51:12[H50:12], 시 78:8[H77:8], 고난으로 굽어지고 통회로 꺾였을 때 구원을 얻기 위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며(시 34:19[H35:19], 시 51:17[H50:17]), 불순종하는(호 4:12사 29:24) 등의 하나님에 대한 사라의 행동에 해당된다.

 

'영' spirit은 자주 '마음' Heart과 함께 나타나며(예, 출 35:31-35) 두 단어가 지니는 사상은 비슷하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마음이 사람의 심중에 거하지만 사람이 가진 영의 숨결처럼 덧없고 요동하는 천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데에 차이점이 있다. 마음은 사람의 목표, 그의 결의, 그리고 그의 용기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반면에 영이란 사람의 생명력이 흐르는 방향 즉-황홀한 행동까지도 포함한-그의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자기 표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영이란 용어는 사람과 짐승을 구별지워 주는 사람의 고귀한 속성에 대하여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영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

 

약 100개의 구절에서 영(spirit)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예, 창 1:2)이나 여호와의 신(예, 사 11:2)이라 불리우나, 반면에 사 31:3에서 '영' spirit은 육체 즉 단순한 피조물들의 무력함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이러한 주의 권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시 139:7[H138:7]).

 

이 하나님의 영은 사람에게 강력하게 임하기도 하며(삿 14:6삼상 16:13 등등), 그를 '옷입히기도'하며(삿 6:34 등등), 그에게 임하고(겔 2:2 등등), 그에게 강림하고(왕하 2:911:2 등등) 그를 몰아대기도 한다(삿 13:25),

 

이 구절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압하는 강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이렇게 함으로써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경우와 같이 그가 어떤 황홀하고도 초자연적인 행위를 행하거나 선지자들의 직분과 발언을 행할 수 있게 된다(N.B. '예언하다' prophesy로 번역되는 이 동사는 영으로 인하여 조성된 황홀경을 의미한다. 예, 민 11:25-27삼상 18:10, 선지자의 직분의 의미로는 왕하 2:9느 9:30을 참조하라. 선지자들의 발언의 뜻으로는 민 24:2과 겔 11:5등을 참조하라. 선지자들의 무아경적 환상의 의미로는 겔 3:12겔 8:3겔 11:1, 24 참조하라). 게다가 이 영은 어떤 것이든 황홀경적 발언의 근원으로(예, 삼하 23:2), 심지어 성막 건축 때 사용된 장인(craftsman)의 기술의 근원으로(출 31:3), 또는 실로 어떤 뛰어난 능력의 근원으로(단 6:3) 묘사되고 있다.

 

3) 심지어 파멸적인 악(악한 Evil)도 하나님이 보내신 영인데 그 이유는 구약성경에 관한 한, 하나님과 무관한 악령의 세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삼상 16:14, 15, 16, 23, 사 29:10왕상 22:21이하).

 

4)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은 영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 32:15-20에 따르면(참조, 사 44:3), 하나님은 비처럼풍성함, 즉의 와 평안과 안전을 가져올 여호와의 신을 하늘로부터 내리 쏟으심으로써, 교만한 자들과 자만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완결지을 것이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임명되어, 천국의 평강의 상황 속에서 완전한 성실함과 의로움의 통치권을 행사하실 다윗 David의 후손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전체로서의 백성에게(겔 11:19이하, 겔 18:31이하, 겔 36:26이하, 겔 39:29)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게(시 51:10[H50:10]) 경건한 새 신(a new spirit)을 주심으로써, 백성들의 우상 숭재와 재차 타락함을 치유해 주신다(호 4:12, 참조, 사 29:24) 에스겔은 이것을 다름 아닌 죽은 자로부터의 이스라엘의 부활이라고 선언하며 그의 죽음은 불신앙으로 야기된 것이라 선포하고 있다(겔 37:1-14).

 

여기에 나오는 환상은 이 구절 전체 예언이 암시하듯이, 전체로서의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는 각 사람들의 개인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서의 후반에 나오는 장들은 이와 똑같은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주의 종은(11장에서 이미 묘사된 바 있음) 주의 통치의 축복을 확대시키어 이방인들을 축복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취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은사 중에서 성취된 거룩한 언약인 것이다(사 59:21, 참조, 욜 2:28이하).

 

마찬가지로 과거 출애굽 당시의 구원 시기는 모세(Moses)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 것으로 특징지워졌다. 실로 전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생겨났던 것이다(사 63:11-14).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들은 이 언약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보고 있다(학 2:5,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하시는 성령이 그들을 보호하신다. 슥 4:6, 구원은 군대로부터나 어떤 인간의 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예언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나 불가해한 성령이 언약과 연관맺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언약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적의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살’壘© 그의 거룩하신 뜻에 매우 합당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5) 헬라적 환경의 영향을 받은 유대 사상에서 영은 거룩하게 사람에게 불어 넣어진 생명력(vital force)으로서, 그의 존재의 독특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영(the spirit)은 용어(terminology)에 관한 한, '혼'(영혼 Soul)과 구별되지 않으나 영은 오히려 몸(the body)과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몸은 땅에 속한 것이며, 영은 하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지혜서 15:11, 이에 대한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것에 대한 랍비적 증거[rabbinic evidence]는 E. **, TDNT Ⅵ 375-89에서 발견된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몸은 혼을 가두는 곳이거나 혼을 미혹하여 죄로 빠뜨리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에 반하여 필로(Philo)는 육체(flesh)를 영을 내리 눌러서 이 땅의 족쇄에 가두고 있는 '짐' burden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육의 소욕은 영을 살리기 위하여 거부되어야 한다(Gig. 31ff).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또한 영을 하나님의 본질의 일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거으로서, 당연히 이 영의 창조주로부터 명백히 구별되는 것으로 본다는점에서 이에 대응하는 헬라적 견해와 구별되었다. 영은 불멸성을 가졌으며(지혜서 12:1, 희년서 23, 26-31,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39:4 이하) 후기 단계에서 또한 영은 선재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6) 쿰란 본문들에서 영은 인간이 지혜롭게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1QS 5:21, 24) 그의 삶을 영위할 때, 그 모습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므로 영을 배신하는 것은 결국 죄를 행하는 것이다(1QS 7:18, 23). 다시 말해서 '영' spirit은 인간의 삶의 기본적 방향을 표현했다.

 

다양한 형용사들이 예를 들어서 '깨어진' broken(1QS 8:3), '배신한' apostate이 영에 적용될 수 있었으며, 영은 집단적으로 '하나님 진리의 교제의 영' the spirit of the fellowship of [God's] truth, 즉 죄를 속량해 주는 '정직과 겸손의 영' the spirit of uprightness and humility(1QS 3:7f.)으로 역시 볼 수 있었다. 이 영은 하나님 자신이 독실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간주되거나(1QH 12:11, 13:19 등등), 그의 모태(his mother's womb)로부터 그의 마음속에 생겨난 특별한 통찰력(1QS 4:31, 15:22 등등)으로 생각되었다. 즉 이것은 종말론적 선물이었거나 영원전 부터 미리 예정된 것이었다.

 

7)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영들' spirits 중에 거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왕상 22:21ff.에는 그의 면전에 들어온 한 영에 관한 설명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 복수형은 유대 사상에서 줄곧 천국 존재들에 대한 집합적인 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예,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15:4, 6). '영들' Spirits은 또한(형용사 '악한' evil을수반하든 안하든간에) 유대교에 아주 잘 알려진 귀신들을 의미했다(예, 이디오피아 에녹서 15:6-10). 이와 관련되어 묵시 문학 전체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사람들을 죄짓도록 유혹하는 하나님의 적들인 사단 Satan과 그의 악력들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유혹이라는 개념은 랍비 문헌에서 점차 덜 두드러지게 되었으며 이 문헌에 보면 귀신들은 사람들의 건강을 해하였으며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8) 세상의 역사상 여러 시대들을 오르마즈드(Ormazd)와 악령 아리만(Ahriman) 간의 투쟁 단계들로 간주했던 이란의 우주론의 영향을 입어, 쿰란 본문들은 두 천사 또는 두 영, 즉 하나는 '의로움' righteousness이나 '빛' light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사악함' iniquity이나 '흑암' darkness의 영이라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확립해 놓으신 선악의 원칙들로서 이 둘은 영원한 갈등 속에 이 세상에 갇혀 있었다(1QS 3:13-4:26). 그 영들은 각각 선행이나 악행의 수행원들을 거느렸으며 수행원들도 마찬가지로 영들로 묘사되어졌다. 이러한 교휸은 열 두 족장의 언약, 가령 유다의 언약, 아셀의 언약 6, 르우벤의 언약 3에도 반영되어 있다.

 

9) '하나님의 영' spirit of God(예, 이디오피아 에녹서 91:1), '신성한 영' divine spirit(필로)과 (랍비 문헌에서처럼) '거룩한 영' holy spirit은 때로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영을 의미했다. 그러나 특히 이것은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역사, 예를 들면 창조(지혜서 1:7, 12:1 등등)와 특히 예언(예, 집회서 48:12)을 실행했던 영적인 실재를 의미하였는데, 이 영적인 실재는 인간과 독립된 것이다. 랍비들은 이 영이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말하는데 이 구약성경은 모두 이 영에의해 언급되었다고 믿는다. 강조점은 메시야가 성령의 특별한 권능을 가지시리라는 이사야의 약속(레위의 언약 18, 7, 11 등등)과 마지막 날에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성령을 쏟아 부으실 것에 관한 요엘(Joel)의 예언에 있다(시빌신탁 3:582ff.).

- E. Kamlah.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프뉴마는 신약성경에서 379회 나오며,

 

1) '바람',

2) '숨, 호흡, 생기',

3) '영, 영혼',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는 생명의 원리.

4) '육체를 떠난 인간의 영혼',

5) '인간보다 높고 하나님보다 낮은 영',

6) '귀신이나 더러운 영',

7) '성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 F. Hauk; Walter Bauer; J. H. Thayer).

 

[초기의 유대 사상에서와 같이 프뉴마(pneu'ma)는 인간이 통상적 관찰과 인간의 통제 영역을 넘어선 실재 영역인 영적인 영역과 사람을 결부시키는 것으로 체험하는 힘을 의미한다. 프뉴마(pneu'ma)는 이러한 광의의 정의 내에서 꽤 넓은 범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프뉴마(pneu'ma)가 단연 가장 자주 사용된 것은(250회 이상) 하나님의 영 곧 성령, 즉 근원이자 본질인 하나님께 가장 직접적으로 속해있는 힘을 언급할 때이다.

 

1) 인간의 영(The Human Spirit)

프뉴마(pneu'ma)의 의미 분산(spectrum of meaning)의 한 결과로 이 단어는 인간의 영, 혹은 더 좋게 말해서 영적인 영역에 속하여 영적인 영역과 상호 작용하는 한에 있어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서 프뉴마(pneu'ma, 4151)는 신약성경에 대략 40회 정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이 가장 직접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인간의 모습이며(롬 8:16갈 6:18빌 4:23딤후 4:22몬 1:25히 4:12약 4:5),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접하여 화답케 하는 전(全) 인간의 차원(마 5:3눅 1:47롬 1:9벧전 3:4)이며, 영계 문제들에 대단히 민감한 인간적 인식의 영역(막 2:8막 8:12요 11:33요 13:21행 17:16고후 2:13고후 7:13)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영역에 관하여 언급함에 있어서, 흔히 이 용어가 사람의 영을 언급하는지, 또는 그의 본질의 이러한 차원을 통해서 그가 체험하는 어떤 특별한 힘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온 어떤 영이나 힘을 의미하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않다ㅏ. 따라서 다음과 같이 그 뜻이 애매모호한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막 14:38, 병행구 마 26:41-이 용어가 시 51:12에서 이끌어낸 것으로 아마도 성령을 의미하는 것 같다. 눅 1:17, 80, 눅 9:55(D), 행 18:25도 필경 성령을 뜻하는 듯하다(참조, 롬 12:11). 롬 8:15롬 11:8고전 4:21고전 6:17고전 14:14, 32, 고후 4:13고후 12:18갈 6:1엡 1:17엡 4:23, 디후 1:7, 계 22:6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인간의) 영이 개인의 소유물인 양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런 이것은 기자들이 사람의 영을 육체 속에 감금된 신성한 불빛(진정한 '나' I) 즉 '육체 기관 속에 있는 영' the ghost in the machine(헬라 철학을 보다 잘 나타내 주는 인류학)으로 상상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단순히 이간이 자기 안에서 경험하는, 그와 저편을 관계시키는 힘, '저편 가운데 있는 차원인 영적 영역에 속하는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자연스럽고 쉬운 방법인 것 같다. 눅 8:55(참조, 삿 15:19), 롬 8:16고전 2:11고전 5:5고전 7:34고전 16:18고후 7:1살전 5:23(참조, 신 6:4)의 구절들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에서도 프뉴마(pneu'ma, 4151), 루아흐를 하나님의 입기운(살후 2:8, 참조, 요 20:22), 생기(the breath of life)(계 11:11계 13:15)로 보는 고대 히브리 사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역시 죽음을 영의 포기로 여기는 것(마 27:50눅 23:46행 7:59)은 육체 기관(the machine)으로부터 영의 해방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全) 인간의 형상화가 끝나는 육체적인 몸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사람은 죽음으로써 물질계(the realm of the physical)에서와 영계(the realm of the spiritual)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며, 영계에서만은 계속 존재하나 가시적인 세계에서 전(全) 인간의 형상화가 중단되는 육체적인 몸은 단지 시체(a corpse)가 될 뿐이다(약 2:26).

 

이에 반하여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직면하는 위험은 사람이('육신에 따라서' according to the flesh) 감각과 혼의 세상 수준에서만 살 뿐이며('성령에 따라서' according to the spirit) 영의 수준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삶을 영위하하지 못함으로 해서 몸이 죽을 때, 전(全) 인간은 육신의 파멸 중에 죽게 된다(참조, 고전 15:42-50)는 것이며, 바울은 고전 5:5에서 분명히 이 위험에 대항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은 전적으로 영계에 속하는 바 단순히 프뉴마(pneu'ma, 4151, '영' spirit)라 생각되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눅 24:37, 39, 딤전 3:16히 12:23벧전 3:18이하, 벧전 4:6). 바울은 또한 사람이 이 생에서 여전히 사는 동안, 그의 몸을 일시적으로 떠나서 영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면전으로(고전 5:3골 2:5)나, 천국에로(고후 12:2-4,낙원 Paradise) 투입시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자의 두 구절들은 감정이입적 관심사와 동료 의식에 대한 진지한 표현들일 뿐이며 후자의 구절에서 분명히 바울은 스스로 그 체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2)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Evil Spirits and Good Spirits)

사람들을 괴롭히는 신비한 세력들을 악령들과 귀신 Demon들로 생각하는 것은 1세기의 세계관에서 당연한 것이었다(40히 이상이 그런 의미로 나오는데 그 중 주로 즉 30회가 공관복음서에 나오며, 사도행전에 8회 나오며 제 4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예, 마 8:16막 1:23, 26이하, 막 9:25눅 4:36눅 11:24, 26, 행 19:12이하, 행 19:15이하, 딤전 4:1계 16:13이하, 계 18:2). 이 악한 세력은 이 세상의 영 또는 신, 즉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특별한 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고전 2:12고후 4:4엡 2:2, 참조, 고후 11:4요일 4:6, 사단 Satan).

 

이것들은 모두 영계로부터 나온 인격적인 힘의 체험으로 이해되었고 그것들이 하나님 및 동료 인간과의 완전한 관계를 손상시키고 방해하므로 악하거나 부정하다. 그러나 신약성경 기자들이 이렇듯 분명하게 나타나는 악령을 하나님만큼 강하다고 하는 이원론에 빠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항상 악령들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것으로 나타나며 사자들을 통하여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권능에 지배를 받는다. 사실상 예수께서 마지막 때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증거로서 보이신 것은 마귀를 내어 쫓으시는 사역에서의 악령들을 제어하시는 이 효과적 권세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마귀의 최종적 패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예수께 암시했기 때문이다(막 3:23-27, 병행구 마 12:25-29눅 14:17-20마 12:27이하, 참조, 눅 11:19이하, 눅 10:17이하).

 

영계로부터 와서 인간 세상에서 활동하는 다른 세력들은 선한 영들, 즉 천사 Angel들로 생각되었다(행 23:8이하, 히 1:7, 14, 히 12:9). 그러나 바울(Palul)과 요한(John)은 특히 그러한 영들을 체험하는 것의 애미함과 선과 악을 구별짓기 위하여 영들을 분별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고전 12:10고전 14:12고후 11:4살전 5:19-22살후 2:2요일 4:1, 3, 6). (인간의) 영과 성령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된 애매함을 비교하여 보라.

 

3) 예수님과 성령(Jesus and the Spirit).

(1) 우리가 가능한한 충분히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뒤이은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Q전승들(마 3:7-12눅 3:7-9, 눅 15-8)은 일반적으로 최초의 것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요한(John)을 심판 Judgement의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의 선포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실행하실 분이 곧 오시리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으며, 아마도 주로 그런 사실에 중점을 둔 것 같다.

 

특히 장차 오실 분은 엔 프뉴마티 아기오 카이 퓌리('성령과 불로' in holy spirit and fire)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요한이 불 Fire)로 주는 세례 Baptism에 관하여만 언급했거나, 바람(=프뉴마)과 불로 주는 세례에 관하여만 단지 언급했다는(오순절 Pentecost에 비춰볼 때 첨가되고 변화됨) 말들은 더 이상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요한의 메시지는 (알곡과 쭉정이에 관한 것, 마 3:12) 심판에 과난 것만이 아니었으며 장차 오실 분의 세례는 어떤 의미에서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행한 언약이었다. 아마도 어느 정도 요한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쿰란 공동체 프뉴마(pneu'ma, 4151)를 순결하게 하고 정결케 하는 힘으로 이미 언급하고 있었다(특히 1QS 3:7-9, 4:21).

 

요한의 비유는 신구약 중간기의 묵시적 기대 안에서 두드러지게 대두되던 주제의 한 변화, 즉 메시야의 비애에 대한 믿음, 환란과 고통-'메시야의 산고'-의 시기가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장 잘 이해되어진다(SBⅠ 950,예, 단 7:19-22, 바룩이서 25:30). 따라서 '불' fire은 '심판' judgement과 '정결케 함' purification을 의미할 수 있으며(예, 암 7:4말 3:1이하, 말 4:1) 프뉴마(pneu'ma, 4151)도 마찬가지이고(예, 사 4:4렘 4:11이하) 강과 홍수는 저항할 수 없는 암도적인 재앙을 생생하게 묘사했다(시 69:2, 15, 사 43:2). 특별히 이 세가지 요소가 사 4:4사 30:28단 7:10에서 어떻게 조화되었는지 주목하여 보라, 그러므로 요단강(the Jordan)에서 (아마도 침수에 의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마지막 때 환란의 대단히 강력한 상징=성령과 불세례=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거대한 기류와 같은 하나님의 불같은 프뉴마(pneu'ma, 4151)이었다.

 

요한의 세례로 상징된 심판에 순복함으로써 심판을 받을 책임이 있음을 용인했던 사람들은 메시야의 비애를 심판의 영과 소멸의 영으로 정결케 되었음을 체험할 것이다(사 4:4). 그러나 자신들의 죄를 부인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성령과 불로 베푸시는 장차 오실 이의 세례를 열매맺지 않는 가지들과 쭉정이를 태워버리는 횃불로 경험할 것이다.

 

(2) 그러나 예수께서 그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견지에서 이해하심은 별개의 것이었다. 이 사실은 예수 전승의 두 곳에서 아주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귀신 추방자(an exorcist)로서 성공하신 것에 대한 설명과 예수께서 성령 감화를 의식하심에 관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예수께서 귀신 추방자로 성공하심에 대한 설명은 막 3:22-29과 Q(마 12:24-29 병행구, 눅 11:15-23, 사단 Satan)에 나타나 있는 네 다섯 가지의 논쟁적인 말씀 군에 보존되어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마 12:28, 병행구 눅 11:20을 진정으로 역사적인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령'(마태복음)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나 '손가락'(누가복음, 손 Hand, art. cheir 신약성경 2)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아주 고르게 조화되어 있지만, 그러나 '성령' Spirit을 본래적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유력한 듯하다(참조, J. D. G. Dunn, Jesus and the Spirti, 1975, 45f.).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심에 대한 주장을 구체화하고 있다. 헬라어에서의 강조점은 두 어구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에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의의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천국의 임재는(예수님의 선포에서 특징적인 점) 성령의 효과적인 권능 면에서 규정지어졌다.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미 진행 중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때의 성령의 권능이 분명히 마귀의 권세를 정복하는데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당신의 성령껫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주기도문[Lord's Prayer]의 제 2의 기원인 설득력이 없에 나타난 누가복음의 이문을 참조하라).

 

둘째로, 예수께서는 성령께로부터 미증유의 권능을 부여받으셨음을 주장하고 계신다.

즉 귀신들을 쫓아내는 다른 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사역은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지 못했다(마 12:27, 병행구 눅 11:19).

 

예수님의 귀신 축출은 아주 효과적인 것이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통치 권한이 예수님 자신의 소유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이와 동일한 예수님의 자기 이해가 마 3:27에도 함축되어져 있다. 예수께서 사탄과 최종 전투를 시작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이 내용은 막 3:28, 병행구 마 12:31이하, 눅 12:10에도 함축되어 있는데, 이 구절들은 자주 부활사건 이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되나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없다(J.D. G. Dunn, op, cit., 49-52). 예수님의 귀신 출출 사역에 대한 공박에 대응하여 처음 언급되어진 듯하기 때문에(막 3:30에서 그렇게 주장함), 이 구절은 예수님의 귀신 축출에 대한 이해를 다시 증거하고 있다. 그 사역은 성령의 권능으로 분명하게 시행되었으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성령의 권능에 관한 종말론적 결말이 있었다(참조, blasfhmevw, 987, 모욕하다).

 

② 예수께서 성령 감화에 대해 의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하신 놀라운 정도로 권세있는 주장('나는 ...에게 이르노니' But I say..., 마 5:22 등)과 예수님이 자신을 선지자 Prophet로 이해하셨다는 점에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특히 막 6:4, 병행구, 마 13:57, 참조, 요 4-44, 눅 13:33).

 

성령은 그 당시의 유대교에서 원칙적으로 예언의 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장은 사실상 성령의 감화를 입은 주장이었다. 그리고 랍비들(rabbis)은 성령께서 말라기(Malachi) 선지 이후 이스라엘에서 물러나셨다가 마지막 날에만 다시 그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실상 종말론적 선지자임을 주장하고 계신 것이었다(특히 신 18:15, 18이하, 사 61:1이하를 참조하라).

 

사실 예수님 자신이, 사 61:1 이하의 말씀이 자기 자신의 사역에서 성취된 것으로 보셨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데 가령 눅 4:18이하에 그런 사실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이 자기의 사역을 가난한 자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첫 두세개의 산상수훈(the first two or three Beatitudes)과 마 11:15 병행구 눅 7:22에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

 

이 구절들이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라는 것을 문제삼을 사람은 거의 없을 거이사.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있다. 즉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과 사역의 효과를 마지막 때의 기름부음 받으심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기셨다(모든 복음서들이 확증하듯이, 아마도 요단강에서 기름부음 받으신 것 같다. 아래 4를 참조하라).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녔다.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이미 실현되었다. 가난한 Poor 자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파함은 예수께서 병고치는 사역보다 그에게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가난한 자에게의 복음 전파는 마 11:5절에 실려있는 내용의 절정이다). 성령께서 예수님과 유대를 맺고 있으므로 예수님 자신이 복음 전파 사역의 실족하게하는 원인의 일부가 되셨으며(마 11:6) 이처럼 성령의 권능을 입은 예수님 자신이 종말론적 의미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의 사역이 심판의 견지에서보다는 오히려 종말론적 축복의 견지에서 성령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 11:5, 병행구 눅 7:22에서 세례 요한에게 예수께서 보이신 반응은 의도적으로 사 29:18-20사 35:3-5과 사 61:1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이 세 구절 모두에 내포되어 있는 심판의 위협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철저하게 배격하지는 않은 듯하다. 예수께서 자기 복음 사역을 또한 불같은 심판을 면하게 하려는 입장에서 보았다는 몇가지 제언들도 있다(눅 9:54눅 12:49막 9:49마 10:34-6 병행구, 눅 12:51-53, 도마복음 10, 16, 82). 그리고 눅 12:49-50의 병행구는 예수께서 그의 죽으심을 불같은 세례, 즉 메시야적 비애의 고통으로 예상하셨음을 암시한다(참조, 막 10:38이하, 막 14:27, 36 그리고 예수께서 그의 복음 전파 사명을 이해하심에는 아마도 단 7장과 사 43장의 영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복음 사역 초기에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으심을 세례 요한의 설교에 입각하여, 즉 성령 세례로 보셨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자신을 성령 분배자, 즉 성령 세례자로 보셨던가? 그 대답은 확실치 않은데, 이는 예수께서 거의 확실히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을 기대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했는지 혹은 특별히 영광스런 인자로 재림하기에 앞서서,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구상하셨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부활 이전의 것으로 나오는 구절인 막 13:11은 매우 제한되어 제자들의 고난과 핍박의 체험만을 가리키고 있다. 행 1:5은 예수님의 말씀임을 확증해 주는누가의 해석일 가능성이 높으며, 더 엄밀히 말해 오순절 Pentecost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4-16(아래 7을 보라)장의 성령에 대한 약속은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에서와 같이, 원시 전승의 핵심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뜻과 유언이 담긴 눅 22:29은 예수님의 사상 속에서 성령과 천국이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다는 견해와 역시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보더 더 깊이 예수님의사상과 예수님의 자기 이해를 통찰할 수는 없다. 왜나하면 단순히 그 당시의 영감설을 반영할 뿐인 대수롭지 않은 막 12:36을 제외하면, 어떤 것이든 성령에 관한 말씀 그 자체를 자신있게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견해.

 

4권의 복음서에서 이미 예수님 자신의 교훈에 내포된 예수님과 성령 간의 관계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강화되었다. 복으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전적으로 유일하게 성령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탄생 아니 오히려 그 분의 잉태는 인간 아버지의 힘을 빌지 않고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졌다.

 

즉 마 1:18-25에서는 예수께서 임마누엘 예언(사 7:14)을 성취하신다. 눅 1:35은 셰키나(Shekinah, 여호와의 광운)에 관한 언급으로 아마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그 이상의 말씀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조, 요 1:14).

 

예수님과 성령간의 관계에 대한 세레 요한의 메시지는 기독교인들의 오순절 (Pentecost) 성취에 맞도록 마가가 조정했으며(막 1:8, 심판에 관한 모든 언급은 빠져있다) 네번째 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세례 요한을 단지 그리고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증인으로 소개하기 위하여 고쳐진 것이다(요 1:19-34).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메시야의 역할에 임하셨다고 밝히고 있다(막 1:11마 3:17눅 3:22요 1:33, 참조, 요 3:34).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께서 성령의 이끌림을받아 시험을 받을 나가셨다고 강조하고 있다(막 1:12마 4:1눅 4:1).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를 몇 개의 문장에 집약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약속(막 1:8)을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고(막 1:10) 그리고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막 1:12) 사건을 한데 묶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권능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공관 복음서 전체가 인정하고 있다. 논쟁적인 말씀들(앞의 3(b)) 이외에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사야서에서 인용해온 구절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이 견해를 보강시키고 있다(마 12:18=사 42:1, 눅 4:18=사 61:1, 또한 행 10:38도 참조하라).

 

예수님을 성령 분배자로 묘사함(막 13:11, 병행구 마 24:20눅 21:15)은 Q 말씀 마 7:11을 편집한 눅 11:13('좋은 것' good things 대신 "성령" Holy Spirit을 사용)과 위대한 사명을 공식화한 마태에의한 다른 방법으로(마 28:19), 그리고 요한에 의한 보다 자세한 방법으로 부활 이후의 말씀인 눅 24:49과 행 1:5, 8이 포함됨으로써 강화되었다(아래 7을 참조하라). 예수님의 부활 후 사역은또한 행 1:2에서 성령이란 말로 특징지어지며 요 20:22과 행 2:33에서는 성령의 부음이란 말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말은 분명히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복음서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단지 영적인 모범으로나 첫번째(기독교적) 카리스마적 표본으로 묘사하는데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확실히, 누가(Luke)는 특히 눅 4:1, 14과 눅 10:21에서 보다 독특한 카리스마적 용어로 예수님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러나 누가조차도 예수님을 무아경에 도취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으며, 이점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이를테면 사도행전에 나온 베드로의 사역간 어떠한 유사점도 우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 사역의 보다 강한 카리스마적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을 복음서 기자들이 삭제해 버렸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빈디쉬[H. Windisch]가 그렇게 본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영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계셨으며 성령의 말씀을 하셨으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폐기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한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진정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두 권의 성경 기록(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고안해 낸 어떤 도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 도식에 의해 예수께서는 정확히 말해서 성령과 관련하여, 옛 시대인 이스라엘과 교회 시대로 인정된 새로운 시대간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권능에 의한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예언의 영의 산발적인 재출현과 관련하여 나타난다(눅 1:15, 17, 41, 67, 눅 2장).

 

이는 예수님 홀로 무대의 중앙을 채우시기 이전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계시의 영력과 생명력의 최후의 격발(flare-up)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성령 강림의 결과로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눅 1:35눅 2:49)이 되셨고 보다 완전한 아들 관계에나 보다 높은 단계의 아들로서의 사명에 들게되셨고(시 2:7를 인용하고 있는 눅 3:22, 이것은 원문에 대해 논증을 야기시킬 만큼 원문을 완전히 변형시킨 것임, 행 10:38) 그 안에서 예수께서는 아들의 원형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신다(눅 4:1-14, 참조, 롬 8:14-17갈 4:6이하, 갈 5:18). 그러나 승천하심으로써만이 예수님은 완전한 아들의 신분에 들게 되었고 메시야의 직무를 받게 되었으며(행 2:36행 13:33)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은 성령의 주 곧 스스로 기름 부으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죽으심과 높이심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이다(행 2:33).

 

5. 초대 기독교 공동체들과 사도행전에서의 성령.

 

'성령' Holy Spirit은 신자를 변화시키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며 그를 인도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이 어구에 정관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없다). 이런 사실이 사도행전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입증되는 곳은 없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그 효력 면에서 거의 명약관화한 힘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성령의 권능은 초대 교회에 대해 기록한 누가(Luke)의 설명의 세가지 중요 대목에서 나타난다.

 

1) 회개하도록 변화시키는 권능으로서의 성령.

정확히 말해서 기독교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최초의 성령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누가(Luke)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첫번째 오순절날에 예루살렘 Jerusalem에서 이런 성령 체험이 처음 일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이 성령 체험의 장소와 시기가 부인되어야할 실질적인 이유는 없다(오순절 Pentecost). 그 체험은 분명히 대단히 극적인 체험이었으며, (환상적 요소들과 방언들을 포함하여) 성격상 확실히 황홀한 체험이었다.

 

이 체험으로 인하여 제자 집단은 자신에 차고 활달한 종파로 변화되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고 곧 오실 인자로 믿는 믿음을 전파하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였다. 누가(Luke)가 사도행전의서장들에서 이 초대교회의 분위기를 대체로 파악했지만, 강력하게 특징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는 종말론적 열렬한 감정을 거의 전부 빠뜨리고 있다.

 

아마도 이 첫 성령 체험은 그 후 성령을 받는데 있어서의 어느 정도의 본보기를 보인 것으로 이해되었다(행 11:15이 암시하는 바와 같다). 즉 성령은 우수한 종말론적 선물이었으며, 성령을 소유하는 것은 마지막 날의 메시야 공동체에 속한 사람의 표적이 될 것이다(여기에서 베드로의 첫번째 설교의 절정을 이룬 성령에 대한 약속이 비롯된 것이다. 행 2:38이하).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고, 또 그가 성령을 받아들였는지는 그 사람의 뚜렷한 변화로 결정될 것이며, 이 변화는 보통 황홀의 나타남으로 판단되어진다(아마도 이런 광경은 행 4:31에 언급된 황홀한 체험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 후의 초대교회 복음 선교의 위기나 불확실한 순간에 특히 구하여진 것은 성령의 수용과 소유였으며(행 9:17행 11:15행 15:8행 18:25행 19:1) 이는 영력이나 황홀경의 분명한 시현으로 입증되었다(행 8:15-19행 10:44-47행 19:6). 누가는 감동된 발언(예언과 방언)에만 주의를 환기시키지만, 그러나 그것은 누가에게는 예언이 성령의 표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인 것ㅇ 같다(아래(b)와 6(a)를 참조하라).

 

누가도 성령에 대한 이러한 초기의 평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령은 그것의 임재가 그러한 뚜렷한 결과 없이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로 황홀적 현상과 결합되어 있다. 행 8:12이하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와 행 19:1이하의 에베소인들의 경우, 바로 성령의 부재 때문에 문제의 복음서 기자들은 매번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행 10:44이하에서 고넬료와 그의 일행의 경우와 행 18:25(참조, 롬 8:11)에서 아볼론의 경우 성령이 분명히 임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이미 종말론적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입증한다(여기에서 행 11:15-18의 논거가 유래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그가 성령을 세례에 연결시키는지(그가 행 8:12이하와 행 19:44이하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하지 않음) 회개에 뒤따르는 선물로 보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누가에게 '성령의 은사'란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성령을 받는 자에게 그 영향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성령에 대한 누가의 견해는 일찍이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열광주의적인 이해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서(행 9:31과 행 13:52은 아마도 형식적인 면에서만 예외인 것 같다) 그 활력을 자극시키고 불러 일으키기는 했지만, 바울의 신학적 입장과는 그다지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다.

 

2) 예언의 성령.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의 경우 성령은 감동받은 발언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이었다. 옛 시대에 다윗 Divid과 선지자들을 감동시켰던 동일한 권능이(행 1:16행 3:18행 4:25행 28:25) 요엘(Joel)이 예언한 바와 같이(행 2:17이하, 참조, 욜 2:28-32), 이제 종말론적 풍성함으로 부어졌다.

 

모세 Moses의 오랜 소망이 성취되었으며, 주의모든 방백들은 선지자들이었으며, 주께서 그의 영을 그들에게 베푸셨다(민 11:29)는 흥분된 느낌이 행 2:17이하와 행 4:31에 스며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확실히 행 2:4행 10:44이하와 행 19:6에서 성령의 오심을 암시한 것은 감동받은 발언이었다. 회개를 하지 않는 곳에서 이 성령의 권능은 위기와 구원의 순간에 방언과 연설시에 대담성을 부여해 주는 감동의 파동으로 경험되었으며(행 4:8, 13, 행 4:29-31행 7:55행 13:9)보다 일반적으로 성령은 효력있는 증거와 효과적인 교훈을 할 수 있는 힘으로 이해되어졌다(행 5:32행 6:10행 18:25).

 

그러나 이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져서, 모든 이가 특별한 경우에 성령의 채우심과 감동받은 발언이 넘쳐나옴을 경험할 수 있게 되면, 재빨리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예언의 영을 보다 충만하게 부여받았거나, 적어도 보다 정기적으로 성령에 감동받아, 예언하게 되었음을인정하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공동체에는 정착한 선지자들과 방랑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을 것이다(행 11:27이하, 행 13:1행 15:32행 20:23행 21:4행 21:9-11). 특별한 명사구 플레레스 프뉴마토스('성령으로 충만한' full of the Spirit)는 (누가가 보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동사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41, 67, 행 2:4행 4:8,31, 행 9:17행 13:9]와는 구별된다) 특별한 '헬라주의자'들의 어원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행 6:3, 5, 행 7:55행 11:24, 하지만 눅 4:1도 참조하라). 이 경우에, 이 명사구는 보다 지속적인 성령 체험과 성령 감동의 나타남을 의미할 수 있거나 단순히 동사구의 한 변형일 수 있다.

 

누가는 성령을 두드러지게 예언의 영으로 보는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옛 시대에는 기꺼해야 매우 산발적으로 나타난 은사가(눅 1-2장) 새 시대에는 모든이의 특권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여기에서는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라는 구절을 행 2:18에 나온 요엘의 인용문에 첨가시킴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누가(Luke)가 성령을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행해진 이적들 중 어느 것과도 연관짓지 않는 것(그러나 이런 관계가 행 2:19행 2:43행 4:30이하 그리고 행 6:8에 함축되어 있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성령이 예언과 함께 연관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아주 지배적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밖에 우리는 단순히 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누가는 행 2:17이하, 행 2:4, 13과 행 19:6에서 예언과 방언을 구별지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예언은 그 성격상 반드시 황홀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는 점과 행 20:22과 행 21:4에서 의미가 상충하는 예언들의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복음 선교의 지도자로서의 성령.

성령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충만하여 성령의 초기 지도력에 저항할 수 없는 권위의 영기를 부여하는 거룩한 능력으로 분명히 체험되었다(행 4:31행 5:1-10행 6:10행 8:9-13행 13:9-11). 스데반의 사후 성령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움직임에 따라 성령은 훨씬 정식으로 복음서 기자들을 끊임없이 그들 앞에 개방되어 있는 새로운 발전으로 이끄는 복음 전파의 능력으로 이해되었다(행 8:29, 39, 행 10:19행 11:12행 13:2, 4, 행 15:28행 16:6이하, 행 19:21, 참조, 행 7:51).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황홀한 환상들이 확대된 것도 확실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측히 행 9:10행 10:3, 7, 행 10:10-16행 16:9이하, 행 22:17이하) 그러나 이러한 환상들은 성령에 기인된 것은 아니었다(그렇지만 행 2:17를 참조하라).

 

누가(Luke)의 진술에서 널리 선교할 것을 강요함은 애당초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특징지었다(행 1:8행 2:5-11,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언급하는 것으로서의 오순절[Pentecost]의 감동받은 발언). 그래서 더욱 공식적으로 구성된 교회 지도자 직분인 장로나 감도직(감독 Bishops)도 역시 행 20:28(참조, 행 15:28)에서는 특별히 성령에 기인된 것이다.

 

하지만 높임 받은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기본적인 신학적 문제는 명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를 성령을 나누어 주신다는 말로 소개하지만(행 2:33), 그 후 성령과 그리스도는 행 16:7의 "예수의 영" the Spirit of Jesus에 대한 불가사이한 진술에서만 결합되어져 있다.

 

6. 바울 서신에서의 성령.

 

신약성경 기자들 중에서 바울(Paul)이 가장 '성령의 신학자'라는 직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그 당시 혹은 실로 그 때를 전후하여 수세기 동안 어떤 다른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성령에 관한 더 원숙하고도 완전하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근본적인 표적으로서의 성령.

초대 그리스도인의 경우처럼(앞의 5(a)) 방루의 경우에도, 성령의 은사는 개인을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고전 6:17), 그리스도의 지체(롬 8:9, 참조, 고전 2:12고후 11:4살전 4:8)로 만드는 것, 즉 그리스도의 아들 직분을 나누어 갖는 자가 되게하는 것이다(롬 8:14-16갈 4:6). 성령은, 말하자면, 높임 받은 주님 대신으로 주님의 재산을 떠맡아 관리하고 있는 청기지인 것이다(고전 3:16고전 6:19이하).

 

그리스도의 삶의 시작을나타내 주는 것은 믿음을 인하여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은사는 아브라함 Abraham에게 한 언약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며 따라서 칭의에 대한 또 다른 명칭(갈 3:14고전 6:11)-다시 말하여 '능력의 특성' the character of power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의의 은사-인 것이다(참조, E. Ka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1969, 168-82). 달리 말해서, 각 개인들이 한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은 한 성령으로 세례받고 한 성령으로 흠뻑 젖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고전 12:13).

 

정확히 말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그리고 신세대와 구세대를 분별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였다(롬 2:29롬 7:6고후 3:6-8갈 4:29빌 3:3). 성령은 모세가 일시적으로 향유했으며(고후 3:13-18), 예레미야가 멀리서부터 단지 예언을 했을 따름인(렘 31:33이하를 언급하는 고후 3:3, 참조, 엡 2:18)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직접성을 구성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에서, "성령"은 인간들에게 손길을 내뻗쳐 이들과 적극적 관계를 확립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의미에서 "은혜" grace와 거의 같은 동의어이다(예, 롬 3:24고전 15:10고후 6:1갈 1:15엡 2:8).

 

바울에게 있어서도 역시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이 한 생명에 영향을 주거나 들어가는 것이 그 영향의 결과에 의해 분별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경우에 성령의 현현은 카리스마적 발언이요 행위였다(고전 1:4-7갈 3:5, 참조, 앞의 5(a)).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께 용납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침잠되며, 고통을 가볍게 하는 기쁨을 누리는 엄청난 체험이었음이 분명하다(살전 1:6).

 

또 다른 경우에도 그것은 예수님의 중요성을 조명하는 체험이었거나(고전 2:10-12고후 3:14-17고후 4:6갈 1:12, 15이하, 참조, 엡 1:17엡 3:5) 율법과 죄의 권세가 가지는 치명적 영향으로부터 해방의 체험이었거나(롬 8:2고후 3:17) 성령의 홀연한 임재로 극적인 품행이 변화의 체험이었다(고전 6:9-11). 바울이 고전 12:13의 생생한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체험의 일부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며, 그리고 바울이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하여 상품이나 문서에 부착된 인 Seal에 성령을 비유할 때에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후 1:22엡 1:13엡 4:30).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이 구절들을 세례와 관련지어 왔지만, 바울이 회상하고 있는 것은 성령 그 자체에 대한 생생한 체험일 가능성이 보다 높다(예, 고전 2:4 이하, 살전 1:5).

 

2) 종말론적 성령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 성령은 이미 옛 시대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새 시대의 능력으로서, 그로 인하여 옛 것을 끝내 버리거나 옛 것을 완전히 무효한 것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새 시대의 권능과 빛에서, 옛 시대 안에서 그리고 옛 시대를 통해서 살아갈 수 잇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므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시작된 사역을 완수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보증금(down-payment)이자 보증서(guarantee)'인 것이다(고후 1:22고후 5:5엡 1:13 이하, 선물 Gift). 성령은 마지막 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것의 '첫번째 열매'(ajparchv, 536)인 것이다(롬 8:23, 희생제사 Sacrifice, 씨 Seed). 성령은 신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의 첫번째로 분할받는 것이다(롬 8:15-17롬 14:17고전 6:9-11고전 15:42-50갈 4:6이하, 갈 5:16-24엡 1:13이하). 이것은 또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성령의 선물은 구원받아 성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되는 평생 동안 계속되어질 과정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고후 3:18살후 2:13, 참조, 롬 8:28롬 16:16갈 6:8엡 3:16이하).

 

(2) 현재의 신자의 삶은 옛 시대와 새시대 사이의,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간의, 신자의 마음 속에서 작용하여 그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얻으려 하고 있는 사망과 생명의 권세들 사이의 긴장과 심지어 전쟁 상태로 특징지어지고 있다(롬 7:14-25롬 8:10롬 8:12이하, 갈 5:16이하).

 

(3) 하나님의 구속 활동의 최종적인 달성은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로 이미 시작하신 것을 완결짓는 것이며, 전(全) 인간을 완전히 다스릴 때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즉 이 때에 몸이 부활 Resurrection하는 때, 곧 신자가 전적으로 새 시대에 속하며,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으며, 전적으로 성령의 다스림 하에 놓인 '영적인 몸' spiritual body이 되는 오직 그 때일 뿐이다(롬 8:11, 23, 고전 15:44-49고후 5:1-5엡 1:14). 결과적으로

 

(4) 바울 서신에는 성령의 제 2혹은 제 3의 은사라고 뚜렷하게 구분할 만한 근거가 없다. 성령은 항상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고 그 구원 과정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능력이라는 본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바울 서신에는 살 Flesh과 성령간의 종말론적 대립과 전쟁 상태로부터 신자를 풀어주는 이생에서의 성령의 은사를 찾아볼 여지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현시대에서 성령의 활동은 성취나 완전한 승리로 특징 지워지기 보다는 소망 Hope으로 특징지어지며 동시에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분명하게 발음되지 않은 이 세상적인 약삼 Weakness의 신음인 것이다(롬 826이하).

 

3) 성령 안에서의 삶.

바울에 있어서, 신자는 성령의 권능 안에서 삶을 영위할 책임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자기의 성격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주조하도록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신자가 스스로 성취하는 것('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겸손히 개방함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자신을 통하여 성령이 산출케 하도록 허락하는 것('열매')을 말한다(고후 3:18갈 5:18-23, 참조, 롬 8:28롬 9:1롬 14:17롬 15:13, 30, 고후 6:6갈 6:1골 1:8).

 

특히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기의 일상적인 행동을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 즉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으로, '성령으로 자기 삶을 정돈하는 것'으로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롬 8:4-6롬 8:14갈 5:16, 18, 25, 참조, 롬 8:13갈 6:8). 바울이 성령께서 매일 인도해 주신다는 이러한 체험과 종래의 바울의 종교적 관습을 특징지었던 율법의 규례서를 대비시키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롬 7:6고후 3:6갈 5:1, 16).

 

환언하면, 엄밀히 말해서 바울은 성령을, 율법이 돌판 위가 아닌 마음에 기록될 것이며, 사라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성경과 각 시대의 전통이라는 고나례법에 의거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적 소망의 성취로 체험했던 것이다(롬 12:2렘 31:31-34을 암시하는 고후 3:3). 마찬가지로, 예배와 기도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예배식이나 외적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는 엄격히 하나님의 영 안에서 혹은 그 영에 의한 예배로(롬 2:28이하, 빌 3:3, 참조, 엡 2:18,22) 특징지어졌으며, 기도 prayer는 정확히 성령 안에서의 기도로 특징지어졌다(엡 6:18, 또한 롬 8:15이하 롬 8:26이하, 고전 14:14-17갈 4:6을 참조하라).

 

4) 카리스마적 성령.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함께 공유되는 은사라는 점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신자들을 끌어 모으는 구심력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적 삶은 성령을 함께 나누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한 성령 안에 공동으로 참여함으로써(koinwniva, 2842, 코이노니아)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다(고전 12:13고후 13:14엡 4:3이하, 빌 1:27빌 2:1, 친교 Fellowship).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교회든지 그 교회가 계속적으로 존속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유된 성령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성령은 항상 유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공동체를 성숙시킬 수 있는 은사(cavrisma, 5486, 카리스마타)라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려고 한다(롬 12:4-8고전 12:14-26고전 14:12, 26, 엡 4:11-16).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시련들을(사람이 성취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진 것으로, (인간의 잠재력이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힘의 표현으로, (개인의 교회나 그의 능력 확대를 위하여가 아닌) 공동선(Common good)을 고양시키는 봉사의 행위를 특징짓고 있다(고전 12:4-7). 이러한 카리스마타(cavrisma, 5486)는 바울이 롬 1:11고전 12:8-11과 고전 14:26에서 언급하고 있는 개인적 행위나 발언일 수 있으며, 롬 12:6-8고전 12:28가 엡 4:11에서와 같이, 보다 통상적인 사역일 수 있다. 특히 성령은 설교로 표현되고자 한다. 즉 교회를 세우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바로 예언인 것이다(롬 12:6-8고전 14:1-5, 고전 14;13-19, 또한 고전 2:13이하, 고전 7:40고전 12:3을 참조하라).

 

이는 불신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성령으로 감동받은 설교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성령을 구심력으로 뿐 아니라 원심력으로 경험했다(롬 15:16-19고전 2:4이하, 고전 14:24이하, 고후 3:4-6엡 6:17살전 1:5). 바울이 성령의 카리스마타(cavrisma, 5486)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카리스마타가 그 범위나 표현상에서 제한을 받지 않을까라는 바울의 유려를 설명해 주고 있으며(엡 5:18이하, 살전 5:19이하, 참조, 엡 4:30)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혹은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식별하지 못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남용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를 설명해 주고 있다(롬 12:3고전 2:12-14살전 5:19-22, 참조,고전 12:3살후 2:2).

 

5) 그리스도의 영.

바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특징지어져 왔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성령의 영역에 완전히 들어가셨다(롬 1:4, 참조 롬 8:11). 게다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5:45)고 말하기도 하였다. 환언하면 높임받은 그리스도는 이제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으로서 체험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령을 떠나서는 체험될 수 없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결합시키는 매개체인 것이다(고전 6:17). 성령을 가진 사람들로써 단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에 속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롬 8:9, 14). 반대로, 성령은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체험되어진다. 성령은 이제 그리스도를 떠나서 특징지을 수 없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데에서 나타난다(고전 12:3).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특별히 예수께서 행하신 아바(Abba)라는 기도의 재현이다(롬 8:15이하, 갈 4:6). 종말론적 성령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신자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시키는데에서이다(고후 3:18).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롬 8:9갈 4:6빌 1:19, 참조, 살후 2:8). 옛 시대에 성령을 특징지었던 무형적이고 비인격적인 능력이 더욱 선명하게 정의되고 인격화 되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성령의 활동을 분별할 수 있는 기본적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고 또 사용되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취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교회를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7. 복음서와 요한 서신에서의 성령.

 

성령은 요한의 신학에서 상당히 중요성을 지닌다. 그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몇가지 점에서 그 이전의 신약성경 기자들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특히 성령의 새 생명을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중)생(요 3:5-8요일 3:9), 새 창조 Creation(요 20:22창 2:7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동사, 겔 37:9, 지혜서 15:11), 생명을 주는 물 Water과 생명을 주는 떡 Bread(요 4:14요 6:63요 7:38이하)과 기름부음(기름을 붓다 Anoint, 요일 2:20, 27) 등의 매우 생명력이 충만한 비유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와 같이 요한의 기록에서도 성령은 그의 오심의 영향으로 인하여 발견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런 이유 때문에 요한일서(요일 3:24요일 4:13)에서는 성령이 직접적으로 내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생활을 시험하시는 것들 중이 하나로 나온다.

 

또한 요한이 성령을 생생하고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을, 성경 해석자들은 요 1:33요 7:38이하, 요일 2:20과 같은 구절들을 세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주저하게 될 것이다. 요 3:5(물)은 요한에게 있어서 세례가 하늘로부터의 출생에 관여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고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하겠지만 요한이 마음 속으로 이 두가지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실로 요 6:63이 주의 만찬 제정시의 말씀들을(요 6:53-58) 지나치게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데 대한 항변으로 생각될 수 있듯이, 요 13:10은 세례와 성령을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항변일 것이다. 요한의 성령론에서 보다 독특한 것은 성령과 그리스도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1) 요한의 기독론이 매우 고상하나(성육신한 로고스이신 예수) 그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음을 주목할 만하다(요 1:32이하, 요 3:34).

 

2) 요한은 예수님의 성령의 선물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더욱 더 밀접하게 연관짓고 있다. 곧 승천하신 예수님의 영을 받는 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내어주신 바된 그의 육신을 먹는 것이다(요 6:51-58요 6:62이하). 성령(=물)께서 오시는 것은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편으로부터이며(요 7:38이하, 요 7:38은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강조되었으며, 아마도 이 구절은 요한의 의도적으로 기록한 구절이라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요 19:34), 영혼이 돌아가신 분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인 것이다(요 19:30), 성령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분은 새로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요 20:22). 요한이 엄격하게 연대기적으로 보도하기 보다오히려 요 20:22(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선물이 유일한 신학적인 단위를 이루고 있다)에서 신학적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요 20:22과 사도행전 2장을 연대기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3) 인격과 선교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됨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 other Paraclete라고(요 14:16) 밝힘으로써 명쾌하게 표현되며,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은연중에 첫번째 보혜사로 나오기 때문에(참조, 요일 2:1) 보혜사는 아들이 죽자마자 아들의 현존과 사역을 계속한다(요 14:16-28, 중보자 Advocate), 또한 달리말해서,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아들의 영, 즉 아들이 씨가 되는 것이다(요일 3:9, 24, 요일 4:13). 이와 같이 바울의 경우에서처럼, 성령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과 일치되어지며, 성령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할 때에 한해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다(요일 4:1-3요일 4:6요일 5:6-8).

 

요한이 '보혜사'(paravklhto", 3875, 파라클레토스)란 명칭을 어디에서 도출해 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성령에 귀속시키는 여러가지 역할들을 한 단어로 표혀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 명칭을 만들어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법적인, 그리고 중보적인 기능과 가장 유사한 것들이 후기 유대 천사론과(참조, 특히 욥 16:19욥 19:25욥 33:23, 26, 1QS 3:20, CD 5:18, 1QM 13:10),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의 성령 이해에서(막 13:11행 5:32) 발견될 것이다. 단일어 파라클레토스(paravklhto", 3875)를 번역할 경우, '보혜사' 보다는 개역 표준 성경의 'Counsellor 상담자'로 번역하는 것이 매우 정확하면서도 매우 포괄적이다(참조, paravklhto", 3875 파라클레토스, 신약성경의 논술을 참조하라)

 

보혜사에게 귀속된 주요 기능은 증거자, 계시자, 해석자의 역할이다. 즉 이것은 원래 주어진 교훈을 상기시키는 것과 새로운 진리로 이끌어 들이는 것(요 16:12이하, 참조, 사 42:9사 44:7요일 2:27) 모두를 포함한다. 이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새로운 계시와 원래의 교훈이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성령의 역할은 단순히 본래의 교훈을 처음 제시된 바대로 반복하는데 그치는 것도 아니며, 옛 것과 전적으로 무관한 새로운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옛 것에 현대적 중요성을 부여하여 이를 재해석하고 옛 것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새 것을 계시하는 것임을 암시해 준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자유로우면서도 신중을 기한 것은 해석자인 성령의 이런 역할을 예증해 준 것이며,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현재 받은 영감을 자유롭게 다루면서도 이전의 계시를 신중하게 다루는 것 사이의 조화가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양자를 조화시키려는 태도가 요 4:23이하의 참된 예배의 기술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들과 의사 교환을 하고 교제를 나누는 성령이신 것처럼, 사람들도 성령의 자유함 가운데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명확한 계시에 따라서 예배드려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요 16:8-11에 기술되어 있는 선교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신영어성경 번역은 유용한 주석으로 이용된다. 이 구절은 고전 14:24이하와 함께,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요한이 중대한 죄로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참된 가치, 즉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임은 주목할만 하다. 반면에, 사람들이 제자들의 성령에 감동받은 복음 선교에 응할 때, 그들의죄는 사함을 받는다(요 20:22이하).

 

8.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에서의 성령.

성령이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는 곳은 없다.

 

1) 목회서신(Pastorals)은 성령을 현재적인 실재로 자각한 정도가 앞의 경우보다 훨씬 덜함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은 딤전 3:16에 간직된 초대교회의 공식적 문구에서 예수님의 높임 받는 생활 방식으로 언급되어 있으며(참조, 롬 1:4고전 15:45, 벧전 3;18), 딛 3:5에서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중생과 갱신의 권능으로 언급되어 있다(참조, 행 2:33,요 3:5-8).

딤전 4:1에서는 성령이 이 '나중 시대' 이전 시대에 예언의 고취자로 나온다. 딤후 1:7은 롬 8:15과 대단히 유사하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성령의 나타남은 보다 형식화되어졌고, 제도화되어졌으며(딤전 4:14딤후 1:6), 성령은 새로운 진리로 끌어들이는것보다 오히려 전통을 보전하는 권능인 것이다(딤후 1:4).

 

2) 히브리서는 초대 교회 복음 선교의 카리스마적 활력을 상기시키며, 회개는 연전히 성령과 교회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종말론적 힘에 참여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히 3:7히 9:8과 히 10:15의 진술 내용은 성령을 성경 Scripture에 영감을 불어 넣는 자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음성으로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은혜의 새로운 관계가 오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은혜의 영이 상실되어 버린다고(히 6:4이하, 히 10:29) 히브리서가 격렬하게 경고하고 영원하신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있었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주장한데 있다(히 9:14).

 

3) 약 4:5은 분명하게 하기 보다는 혼란스럽게 한다. 이 구절은 어떤 성경을 가리키는가? 고대 히브리 사상에처럼, 이 구절은 인간의 영을 하나님의 숨결로 언급하는 것인가(창 6:3욥 33:4) 아니면 신약성경에서 보다 자주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회개시에 주어지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인가?(S. S. Laws, "Does Scripture Speak in Vain? A reconsideration of James iv 5", NTS 20, 1973-74, 210ff).

 

4) 베드로전서의 성령에 대한 이해는 신약성경을 훌륭히 대표하고 있는데-여기에는 성령이 예언의 영(벧전1:11), 복음 전파에 영감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이요 복음의 권능(벧전 1:12)이며,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을 따로 택하시며(벧전1:2) 고난과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권능(벧전 4:14)이며, 죽음을 초월한 삶의 존재방식(벧전 3:18벧전 4:6)으로 나온다.

 

5) 유 1:19-20은 매우 바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신자들은 분명히 성령을 지닌 사람들이며, 반면에 자신들의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자랑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영적이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참조, 고전 2:12-3:4). 바울서신을 제외하고는 유다만이 독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참조, 고전 14:15엡 6:18).

 

6) 신약성경에서 벧후 1:21의 성령의 감동에 대한 견해는 영감을 마음과 뜻을전폭적으로 압도적인 성령에 순복하는 것으로 보는 보다 전형적인 헬라 사상에 가깝게 접근하는 견해이다.

 

7) 요한계시록의 예언자는 그가 영감과 환상을 성령께 받았다고 말하며(계 1:10계 4:2계 14:13계 17:3계 21:10계 22:17), 성령의 지시대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계 2:7, 11, 17, 29, 계 3:6, 13, 22). 이 예언자는 아마도 일곱 영의 상징으로 하나님의 영을 언급하는 듯하며(계 1:4계 4:5, 수 Number), 이는 특히 그가 또한 일곱 영들을 높임받은 예수님의 영들(성령)로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계 3:1계 5:6). 아마도 이 예언자의 가장 흥미로운 진술은 "예수의 증거"를 "대언의 영"이라고 하는 것이며(계 19:10),

이는 추정컨대 예언은 언제나 예수 전승과 그리스도에 대한 초대 교회의 증거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하며, 또 그에 의해 판단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인 것 같다. 또한 계 11:11도 주목해보라. 이 구절에서 프뉴마(pneu'ma, 4151)는 부활한 생명의 호흡,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미혹시키기 위해 흉내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온다. - J.D.G.Dunn.] (p2-815-828*)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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