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신비로운 교리

 

삼위일체 교리는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가장 신비롭고 어려운 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리에 관한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경우는 성경에서 계시한 것과 같이 신격의 내적 본질에 관해서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세 위격 교리는 성경의 독점적인 진리이며 자연적인 이성의 영역 밖에 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이 교리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는 측량할 수 없다. 연약한 인간 지성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온전한 설명을 하려는 것은 대양을 찻잔 안에 담으려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명백하고 단순한 방식, 즉 유한한 지성과 언어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이 교리에 관한 진리를 설명할 수 있고 교회사의 여러 시기에 널리 퍼졌던 오류와 이단들에 대항해서 이 교리를 지킬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 교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계시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우리 자신의 의식 또는 물질 세계에서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완벽한 유비 또는 유사점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 주제가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신성한 것(가장 깊고 무한히 의롭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본질)이기에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에 따라 적절히 계시하신 모든 것에 대해 참된 겸비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확신 가운데 받으려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자, 섭리자, 만물의 최종 치리자 이시기에 오직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8).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의 기초이자 근간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첫째로, 하나님은 이성적이며 의로운 영이시고, 그의 속성 안에서 지혜와 존재와 능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다고 계시한다. 둘째로, 성경은 하나님은 세 위격(three persons)으로서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한다. 이 세 위격은 본체로서는 한 분이시고 사고와 목적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통일체로 존재하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면 각 위격은 창조, 섭리, 구속, 은혜의 사역에 있어서 구별되는 역할을 지니신다는 것과, 이러한 사실이 그분의 사역의 모든 영역에서 그 행사를 지배한다는 것은 더욱 명확하다. 결과적으로 위격의 본질을 다루는 교리는 모든 참된 신학과 철학에 심각한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성육신, 속죄 등과 같은 기독교 신앙 체계에 사활이 걸린 교리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떠나서는 바르게 이해될 수 없고 이 교리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져 있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분리시키는 가장 구별된 표지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성경을 형성한 계시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사실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위격에 관한 약간의 제한된 진리에만 도달하게 된다. 모든 철학적 사고들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들은 자연 종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위격의 통일성을 넘어서는 더 높은 개념을 가질 수 없다. 어떤 체계들에서는 유일한 한 하나님을 믿는 일신론을 발견한다. 다른 체계에서는 많은 개별적인 신들을 믿는 다신론을 보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이방 종교나 철학적 사고 체계에서도 결코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 개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사실, 초자연적 계시를 떠나서는 인간의 의식과 경험 안에는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님(삼위일체이시고 성육신하시고 구속하시며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서도 없다.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지식은 점진적이라는 것을 잘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계시는 본성을 통해 주어졌다. 따라서 그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편견 없는 마음을 지닌 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직관적 진리이다. 사람은 자신이 의존적이고, 책임 있는 존재인 것을 알며 이에 자신이 의존할 수 있고 또한 보고해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해 긍정한다. 그는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한 자질들이 그 분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따라서 하나님을 그의 속성들 안에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한 인격적인 영으로서 안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계시에 있어서 두 번째 국면은 구약 시대에 주어졌다. 

이 시대에는 사람의 직관과 자연을 통해 주어진 계시에 있어서 큰 진보가 있었다. 하나님은 특히 은혜의 하나님 및 죄인들의 구속주로 드러나셨다.

 

세 번째 국면은, 현재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국면인데, 신약에서 주어진다. 

즉,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제시된다. 각 위격은 창조와 섭리와 구속의 사역 가운데 구별된 부분을 수행하신다. 워필드 박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구원 계획의 구성요소들은 신성의 신비로운 본질에 자리잡고 있다. 그 본질에는 본체의 절대적 통일성을 지닌 구별된 세 위격이 계신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는 구원 계획의 시행을 따라서 드러났다. 그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도록 보내셨고, 아들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돌아가신 후 그의 구속을 사람들에게 적용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신적 본질에 관한 이러한 근본적인 사실에 관한 공개는 구속에 관한 오랜 약속이 실제로 시행되어야 하는 때가 이를 때가지 지연되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지상에 실제로 나타나시고 그의 부재중에 대표자로 세우신 성령을 보내어 나타나게 하심으로서 말씀보다는 사실로 무엇보다 먼저 성취되었다.”

 

출처: Studies in Theology, Chapter Ⅲ, "The Trinity,"

저자: 로레인 뵈트너(1901-1990): 미국 장로교 신학자, 미주리 린덴(Linden)에서 출생

역자: 한은광

 

 

2. 삼위일체 개요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는 기록되어있다. 

삼위일체의 뜻은 셋의 연합 즉, 세 거룩한 위격의 연합이다.

이 주제에서 사용하는 위격은,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구별된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은 진실 되지만 불가해한 신적인 존재에 대한 특성을 나타낸다. 삼위일체의 교리에는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다. 아리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완전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구별되어 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본성 및 존엄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쳤다. 사벨리우스주의는 신격 안에 하나의 위격 이상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였고, 아들과 성령은 단지 신성의 미덕 또는 기능 정도로 생각했다. 소시니안주의는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에 불과하고, 성령은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유니테리언주의는 신성의 영광과 속성을 아버지께 국한시킨다. 그들은 그리스도나 성령을 참으로 신성한 존재로 생각지 않았다. 이들의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의 교리는 지켜졌고 현재 수많은 그리스도인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성경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마 28:19). 다른 곳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으로 구분된다(고후 13:14). 신격의 첫 번째 위격은 하나님, 아버지, 곧 만물이 그에게서 난 자로 일컫는다. 두 번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 곧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은 자로 일컫는다(고전 8:6). 세 번째는 성신,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보혜사로 불린다(요 16:8).

 

아버지는 무엇으로부터 나신 것도 아니고, 아들이나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도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다(요 1:14; 3:16).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난 존재는 아니지만,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고,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시다. 그는 아들의 영이시며 아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시다(요 15:26; 롬 8:9, 14; 벧전 1:11).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낳음과 나심 등의 단어들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신격의 첫째 및 둘째 위격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우리의 둔한 머리로 이해하도록 표현된 가장 적합한 단어들일 뿐이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아들의 참되고 뛰어난 신성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에 대해서 성경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롬: 9:5)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도마는 그분을 예배하며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불렀다. 이 세상은 아들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골 1:16). 하지만 그것들은 아들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히 1:12). 모든 사람은 아들에 의해 심판 받을 것이다(요 5:22, 27).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그에게 기도드렸다(행 7:59). 하늘의 지극한 예배는 그에게 드려진다(계 5:12-13). 성령 또한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5:3-4 에는 성신이 하나님으로 정확하게 불린다. 성령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며 또한 하나님이시다(고전 2:10-11). 성령은 세례(마 28:19)와 사도의 축복(고후 13:13)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되고 있다.

 

이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게끔 만들려는 목적으로 가르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는 한분의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분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한 명이며 동시에 세 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재와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한분이시다. 그리고 위격 및 존재로는 셋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는 그, 그의, 그를 이라고 한다. 아버지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나는, 내, 나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부를 때는 당신, 당신의, 당신을 이라고 한다.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의 용어가 사용된다. 세례요한이 주님께 세례를 주었을 때는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이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물에서 올라오실새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우리는 요한복음 14:26 에서 신격의 세 위격을 모두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 “보혜사곧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인간을 창조하실 때 신격의 모든 삼위가 함께 하신 것 같이, 인간의 구속에서도 그들 모두 함께 하신다. 아버지는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아들은 그의 양 떼를 위해 그의 목숨을 바치셨다(요 10:17-18).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모든 진리로 이끄신다(요 16:8, 13). 신격의 세 위격 안에서는 본성과 속성과 영광의 놀랍고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교통이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가 내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4-15).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으로아버지를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아버지도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를 거부하고 아버지께만 경배한다면, 또는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지 않고 단지 피조물로 여긴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신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됨 가운데 계신 삼위 하나님, 그리고 삼위 안에 계신 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여기서 나타난 교리는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과 연관된다. 정통파 신자들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성령을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성경에서 계시한 대로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경배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탁월한 신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신성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장 오래된 책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를 암시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창세기의 첫 구절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복수 형태로 사용되어 있다. 욥기 35:10 에서도 조물주 라는 히브리어가 복수 형태로 사용된다. 전도서 12:1 에서도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복수 형태이다. 이사야 54:5 에서도 조물주와 남편 두 단어 모두 복수 형태이다. 말라기 1:6 에서도 주는 복수 형태로 사용된다. 창세기 1:26 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구절을 본다(참조, 창 3:22). 구약 성경에서 이러한 단서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아들과 성령에 대한 신성과 인격을 증명하는 모든 주장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입증한다. 만약에 삼위의 각 위가 구별되고 신성하다면,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처: Theology for the People, Sprinkle Publications.

저자: 윌리엄 플러머(1802-1880): 미국 장로교 목사, 저자, 펜실베니아 그린스버그 출생

역자: 우선동

 

 

3. 한 본질이며 삼위이신 하나님

  

우리는 신비중의 신비인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해서 논해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이 진리에 대하여 반대했던 사람들은 맹렬하게 이 믿음의 조항을 공격했다. 고대의 교회는 이 조항에 대해서 항상 고백해왔으며 사벨리우스주의자들과 아리우스파와 발렌티누스 학파에 대항하여 이 진리를 변함없는 진리의 기둥으로 옹호하였다. 반대파들은 교리적으로 서로 상당 부분 불일치하면서도 거룩한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데 있어서는 서로 연합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소시니안주의, 재세례파, 소시니안 알미니안자들, 그리고 오류를 지지하는 자들과 대항해야 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에 대하여 교회가 신실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교회는 단호하게 오늘날까지 이 진리를 수호하였고,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까지 그 진리 안에 굳게 서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 교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묵상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자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 인간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한 계시하실지라도 단지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며 그 교리의 작은 조각 내지 외부 가장자리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신자는 주께서 계시하여 보여주신 것 그 이상으로 또는 그들의 이성의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서 더 알기를 바라거나 또는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든 믿는다. 그들은 인생이 도달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할 뿐이다(딤전6:16).

 

둘째, 사람에게 수여하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대상과 관련된 언어 및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이 세상의 표현의 방식으로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선이며 전능함이다. 이는 인간의 방식(anthropropathos)을 따라 하나님의 방식(theoprepos), 즉 신의 차원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로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계시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와 말씀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인간의 말로 파악이 가능한 문제들에 집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신적인 것들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파악이 가능한 일들과 표현들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방식을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언급하시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셋째, 거룩한 삼위일체는 자연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경에만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만을 언급해야 하며 성경의 증거를 단순하게 믿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지혜를 높일 수 없다. 그는 모든 인간의 이성을 제쳐두어야 하며 또한 파악 가능한 대상과 비교되는 그러한 모든 상상들을 피해야 한다. 이러한 비교들은 이 신비한 주제에 대하여 빛을 비추어 주어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애매한 결과를 내거나 그릇된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 주께서 글을 쓰는 나를 거룩하게 하시고 인도하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읽거나 듣는 당신을 인도하여 주시기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하나의 본질: 우리는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심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5-6);“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갈3:20);“하나님은 한 분이시오(딤전2:5). 반드시 오직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스스로 자족하신 한분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심지어 이교도들 중에 가장 지적인 사람들 역시 이 사실을 인정하여 왔다. 우리 시대에 가장 야만적인 이교도들조차도 어떤 종교의 외적인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유일한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한다. 이교도들 중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고 인식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러한 인식은 아마도 천사들의 존재를 아는데서 비롯되었거나 또는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복수의 이름 및 거룩한 삼위일체 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온 것 같다.

 

신적 위격에 관한 정의: 

하나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신적 존재는 삼위의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시고 이것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었는데 – 이단들이 여기에서 얄팍한 구실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 성경에서는 위격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정의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tes hypostaseos autou, 곧, “그의 위격의 형상”(“그 본체의 형상” - 개역 개정)을 언급하는데, “히포스타세오스”(위격)은 “지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를 언급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가 살아계시고 지적이시며 다른 존재와 그 어떠한 부분도 공유할 수 없는 철저하게 독립적인 분을 언급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물론 천사들과 사람들 역시 결론적으로 인격체로 언급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신적인 실체들이 위격들로 불리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 방식으로 인간으로서는 불가해한 신의 차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1:3 의 경우처럼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의 위격의 분명한 ‘형상’으로 표현되듯이 신의 위격들 중에 한분이 추상적인 감각, 곧 신의 존재의 외부에 있는 어떤 분처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빌립보서 2:6에서 “하나님의 모양”이라고 표현된 경우처럼 (개정 개역에서는 “하나님의 본체”로 번역됨), 그 위격이 신의 존재와 연합된 상태에 있음을 구체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양” 안에 계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과 실재를 지니신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다. 종의 모양이 인격체와 근본 존재, 그리고 특징을 지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비슷하게 인격체와 근본 존재, 그리고 속성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신적 본질은 삼위로 구성된다: 이 한 분의 신적인 존재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되 곁에 나란히 있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위격이 다른 위격 덕분으로 존재하거나 또는 낳거나 발생하는 식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신적인 존재 내에 세 위격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반박될 수 없다. 이 사실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 분명하다.

 

첫째로, 삼위일체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에서 나타난다.

 

(1) 엘로힘은 하나 또는 두 인격체를 언급하는 복수 형태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의 복수성을 항상 나타낸다. 성경은 셋을 언급할 때 우리는 한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다는 가르침을 확신해야 한다. 엘로힘은 거의 단수로 사용되는 일이 없으며 둘의 개념으로는 결코 쓰이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복수로 사용된다. 우리는 오직 한 하나님을 계심을 알며 그의 존재에 관해서는 복수적인 차원의 이름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삼위로 계심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2) 게다가 “엘로힘”의 복수 형태는 복수 동사, 형용사, 또는 대명사와 함께 사용된다. 즉, 이 단어에는 복수가 항상 따른다. 다음과 같은 본문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하나님(엘로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창2-:13)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엘로힘)이시오”(수24:19);“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Creaters)를 기억하라”(전12:1);“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사54:5);“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원어는 “엘로이카”인데 복수 형태로 되어 있다).

여호와와 엘로힘 이라는 이름은 종종 여호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합쳐서 사용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이 두 이름은 삼위로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가리킬 때 서로 접속되어 사용된다. 언제든지 하나님, 엘로힘이라는 복수의 이름이 단수의 개념으로 사용될 때에는 그 위격들이 한분으로 간주된다. 이는 “페리코레시스”(신격 내에서 각 위격 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신성한 위격들이 내적으로 함께 공존하며 신의 실재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또한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둘째로, 삼위일체는 또한 성경 본문에서 증명된다.

 

(1) 주님께서 자신을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존재로써 자기 자신을 언급할 때가 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3:22);“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창11:7).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복수 형태를 사용하여 언급하는 것은 삼위를 계시하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히브리어 원어에서 전도서 12:1에서 “창조자들”로 언급된다.

 

(2) 성경 본문에서는 주께서 자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치 다른 인격체를 언급하듯이 말하는 때가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창9:24).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세 천사 중 한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 ‘여호와’이셨다. 땅 위에 나타나셨던 그분은 비를 하늘의 주님으로부터 내리게 하셨다. 비를 내리시게 하신 분 뿐만 아니라 비를 그 비를 부르신 분은 둘 다 ‘여호와’로 언급되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분으로서 여기서 언급된 분들은 두 분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 성자와 성부, 곧 신격의 제 2위격과 제 1위격이신 분이시다. 아들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며, 아들은 그의 아버지 대신에 행하신다(참조, 요 5:19)

 

셋째로, 당신의 내적인 확신을 굳건히 하기 위해 믿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을 상고하라. 그 구절들은 하나님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위격에 있어서 셋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의 성호가 그의 백성들의 복을 위해 선포될 때 “여호와”가 세 번 반복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각각의 반복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은혜 언약를 행사하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특별히 결합되고 있다. 보호하심은 성부와, 은혜를 나타내심은 성자와, 화평을 주시는 것은 성령과 연관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3:14에서 삼위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여호와 이름의 반복은 삼위를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번의 반복은 또한 이사야 6:3 에서도 볼 수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신약성경에서도 이 본문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참조, 요12:41;행28:25). 더욱이 다음의 본문들을 고려하라.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사61:1);“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사63:7,9);“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사63:10);“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

 

신약에서도 명백한 증거가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7). 이와 같이 우리는 신의 실재 안에 세 위격이 계시는 것을 관찰하였다. 

 

출저: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Vol. 1, Reformation Heritage Books.

저자: 빌헬무스 아 브라켈 (1635-1711): 화란 신학자이며 화란 제 1차 개혁의 대표. 화란 레위바르덴에서 태어남.

역자: 이진일

 

 

4. 성경에 밝히 드러난 삼위일체 교리

  

오직 살아계시고 참 되신 하나님 한 분만 계신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박 중에 하나는 삼위일체 교리는 삼신, 즉 세 신을 믿는다는 오해에서 온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사실 다신론의 온갖 모든 모양 및 삼신론을 변함없이 반박한다. 성경과 우리의 이성과 양심은 자존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존재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 하나님 안에는 신성한 모든 성품과 완전한 것들이 귀속되어 있고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뉠 수 없다는 사실에 완전하게 동의한다. 

 

구약과 신약은 공통적으로 한분 하나님을 가르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의 구절들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십계명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윤리와 신앙의 원천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고 뛰어난 계명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이렇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성경은 오직 한 분으로 계신 하나님을 선언하고 있다.

 

한분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유니테리언주의가 독점하고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삼위일체 교리 역시 분명하게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 한분 하나님은 신론의 기본 원리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한분 하나님 외에 다르게 가르치는 체계는 결코 참될 수 없다.

 

하나님은 내적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우리가 아는 한,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잘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이다: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 위’(三位)가 있으니,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이 세 위격은 권능과 영광에서 동등하시며,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하나님이다"(문답 6). 여기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신"(Ghost)이라는 단어는 "영"(Spirit)으로 바꿔 쓰는 것이 낫다. 신(ghost)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한때 육체를 가졌다가 현재는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로 있는 영을 가리키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결코 어떤 형태나 신체를 지니신 적이 없다.

 

우리는 성경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한 하나님만을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성경은 이 한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도 동등하게 분명히 가르친다.

 

(a) 성부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고전 8:6),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 1:1),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벧전 1:2),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막 14:36; 요 11:41, 17:11, etc.).

 

(b) 성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권세를 지니셨음을 확신하였고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요 5:18). 또한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특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했다(참조, 막 2: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속성들이 그리스도께도 속한다.

 

거룩성: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고후 5:21),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히 7:26).

 

영원성: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히 1:8),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생명의 근원되심: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불변성: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11-12).

 

전능하심(Omnipotence):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주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전지하심(Omniscience):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요 16:30),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마 9: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요 6:64),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Col 2:3).

 

편재하심(Omnipresence):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창조(Creation):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요 1:10),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죽은 자를 일으키심: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7-29).

 

모든 사람을 심판하심: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1-46).

 

기도와 경배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눅 24:51-52),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니"(행 7:59),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3:18),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이 구절들은 이사야 45:22과 예레미야 17:5와 비교될 수 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며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17:5).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는데, 삼위일체의 기독교 교리가 맞든지 아니면 성경 그 자체가 모순이 된다. 또는 성경이 하나의 신보다 많은 신들을 인정하는 것이든지, 또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나이다.

 

앞에서 살펴본 거룩성, 영원성, 생명의 근원, 불변성, 전능, 전지, 편재, 창조, 섭리, 부활,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 기도, 예배 등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것들로서 이는 그의 신성을 가장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만일 이러한 속성들을 어떤 피조물에게 돌리고 있다면 그러한 자세는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c)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세례 의식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그리고 사도의 축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에서 볼 때,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신성에서 절대적으로 동등하신 분이시며, 또한 모든 능력과 복의 원천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동등하신 분으로 간주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들 중에도 성령을 비인격적이고 신비스러운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하나님의 영향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성경은 한분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성령에 대한 언급들은 구별된 위격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보통 하나님의 힘이나 영향력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약이라는 더 진보된 계시의 빛 앞에서 성령의 구별된 위격은 명확하게 관찰된다. 신약에서 성령은 더 이상 신적인 힘이나 영향력으로 여겨지지 않고, 신성을 지닌 위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점은 다음의 구절들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2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 10:20),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 이 구절에서 성령은 "보혜사"(난외주에는 "변호자"Advocate로 표기되어 있다)로 불린다. 즉 인도자, 교사, 지도자, 후원자 등과 같이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돕는 자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의 특성에 따르면 성령은 반드시 위격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는 병행 구절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니라"(요일 2:1)가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 여기에 쓰인 성령 훼방죄라는 것은 성령보다 나은 어떤 신적인 존재에게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즉, 모든 가능한 죄악들 가운데 성령에 대해 짓는 죄는 그 본질과 결과에 있어서 최악의 죄이다. 따라서 이는 성령의 위엄과 신성을 내포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기록된 것들이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그 말씀을 하셨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비교, 렘 31:33-34과 히10:15-17; 시 95:7-11과 히 3:7-11; 사 6:9-10과 행 28:25-28).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창조의 역사 초기에 무질서에서 질서를 이끌어내신 사실을 읽는다(창 1:2). 성령은 노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셨다(창 6:3). 성령은 특정 사람들을 선지자로 준비시키셨다(민 11:26,29). 성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민족으로서 지도하셨다(느 9:20). 성령은 이사야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다(사 61:1). 성령은 에스겔을 일으키어 포로 된 자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겔 3:12,15).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기사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일어났다(눅 1:35). 성령은 세례 받는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그의 공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셨다(마 3:16). 성령은 제자들에게 보혜사와 교사가 되어 주실 것을 약속되었다(요 16:7-13). 성령은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들을 세계 선교사로 준비시키셨다(행 2:1-42). 성령은 한 쪽으로 가려는 바울을 막으시고 그를 다른 쪽으로 보내셨다(행 16:6-10). 성령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나눠주신다(고전 12:4-31). 성령은 사람들의 영혼을 중생키시는 초자연적인 사역을 수행하신다(딛 3:5, 요 3:5). 성령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감동시키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기록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벧후 1:20-21). 중생과 거룩함의 역사에 있어서는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을 주의 백성의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적용하신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진전하는 교회의 일들을 지도하신다. 성령은 물질세계의 질서와 그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서는 믿음과 거룩에 있어서 “창시자"Author가 되신다.

 

성경 전반에 걸쳐 성령은 그분 자신의 마음과 의지와 능력을 지니신 구별된 위격으로 제시된다. 

세례는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성령은 끊임없이 두 위격, 곧 성부와 성자와 협력하시지만 그분의 위격은 구별된다. 그렇지 않으면 혼선이 빚어질 수 있다. 성령을 지칭할 때 "그, 그를, 나, 나를"과 같은 인격 대명사들이 쓰이는데 이는 오직 어떤 인격체에만 신중하게 쓰이는 대명사이다. 이러한 대명사들은 (성경의) 산문의 글에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무인격체를 의인화시키는 경향으로 치부할 수 없다. 2에 2를 더하면 4가 되는 것이 분명하듯 성령은 의식과 의지와 능력으로 일하시는 살아계신 대리자라는 사실은 가장 명확하고 확실하다. 성령의 인격성을 확증한 후 성령의 신성을 부인할 사람들은 매우 적다. 성령이 피조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격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성령의 신성도 받아들이는 것이 확실하며 따라서 성령의 인격성을 받아드리는 자들은 성령의 신성을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를 단지 사람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 대부분의 이단들은 성령은 단지 힘이나 영향력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용어는 서로에게 대상이 되는 구별된 위격들을 가리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향해 취하는 여러 다른 관계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 않는다. 즉, 그 용어는 피조물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창조주, 보존자, 후원자와 같은 용어들과 유사하지 않다. 도리어 그 용어는 서로 구별되는 서로 다른 주체에게 해당한다. 즉, 그 용어는 각 위격이 서로를 향해 지니는 인격적인 관계들을 분명히 드러낸다.

 

(a) 그들은 서로의 위격에 대해 

"나는, 당신은, 그는, 그를"과 같은 대명사는 상호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b)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그가(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

 

(c) 성자는 성부께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d)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는 그들의 대리자로서 성령을 보내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와 같이 신격 내의 삼위는 서로 구별되기 때문에 한 위격이 다른 위격들에게 말할 수 있고,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사랑할 수 있으시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령은 성령을 보내시며, 성자는 성부께 기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각 위격에게 기도할 수 있다. 세 위격은 행동하시고,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으로서 수행하시며, 각기 특별한 사역을 하신다. 우리가 구별된 위격을 말하는 이유는 각 위격이 자신에 대해 "나"라고 말하고 다른 위격에 의해 ‘너’라고 불릴 수 있고, 활동의 주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위격의 활동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단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통합일 뿐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명제를 말할 수 있다.

(1)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2)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구별된 위격이시다. 우리는 위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를 충분히 밝힌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뿌리를 둔 교리요 교회의 믿음 안에 들어가 있는 교리이다.

 

출처: Studies in Theology, Chapter III, "The Trinity"

저자: 로레인 뵈트너(1901-1990): 미국 장로교 신학자, 미주리 린덴(Linden)에서 출생

번역: 최정식

 

 

5. 신격 내에서의 신성한 질서

 

삼위일체 교리를 논의함에 있어서, 전문적인 용어인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란 영원 전부터 신격 내에 존재해왔던 그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분들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생명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똑같은 본질이며, 그럼에도 각기 동일한 속성들과 능력들을 소유하신 가운데 동일한 영광 가운데 계시다고 말한다. 이는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와 관련된다.

 

경륜적 삼위일체란 세상 속에 드러내신 삼위일체를 의미하며, 특히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일과 관련된다. 이는 하나님의 외적인 부가적인 사역들로서, 삼위일체의 사역으로 연결되는데, 창조, 구속, 그리고 성화가 있다. 이것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필수적인 사역 밖에 있는 것들로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수행해야 하는 책임이나 강제성은 전혀 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구속의 계획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내의 다른 위격들 사이에서 어떤 언약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사역의 구분이 있고, 각 위격은 그 사역의 특정한 일을 자발적으로 담당한다. 첫째로, 아버지에게는 주로 창조의 사역과 이와 더불어서 그가 아들에게 주신 일정 수의 사람들을 선택하는 일이 주어진다. 둘째로, 아들에게는 구속의 사역이 주어진다. 그는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언약의 머리, 그의 백성의 대표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책을 떠맡으시고 그들에게 내려진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해당되는 충분한 고난을 감당하시기 위해 인성을 입으신 사람이 되셨다. 따라서 그 분은 말씀 안에 요구된 바들, 곧 공의의 요구들을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20).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원래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그들의 조상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가지고 있었던 책임이었으나, 그는 그 율법을 범함으로써 모든 인류는 죄책과 멸망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들은 자기 백성의 대표자요 언약의 머리로서 그 법을 완전하게 지키기로 언약하셨다. 그는 스스로 그의 백성과 동일하게 되신 후 그들에게 내려졌던 형벌을 갚으심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 분은 그들의 왕과 구원자로서, 또한 친히 세우실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끄시고, 그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신다.

 

셋째로, 중생과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객관적인 속죄를 각 개인의 심령 속에 적용하는 사역은 성령께 주어진다. 성령께서는 영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들 안에 믿음과 회개를 일으키며, 죄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이 일을 하신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구속이란 성부께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시고, 성령께서 적용 하시는 순수한 은혜의 사건이다.

 

한편, 특정 사역들이 각 위격에 맞게 특별하게 속하게 되지만, 오직 같은 본질이며 한분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 됨이 너무나 밀접하기 때문에, 각 위격들은 다른 위격들의 사역에 어느 정도 동참하신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도다”(요 14:11)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도다”(요 14:9)라고 하셨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도다”(고후 5:19).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성령을 통해) 오리라”(요 14:18).

 

찰스 핫지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 따르면, 아버지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들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성령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존하시며, 아들은 모든 것을 지탱하시고 성령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이러한 사실들은 삼위일체의 위격들이 외적인 부가 사역들을 함께 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들은 현저하게 아버지께 속하고, 다른 일들은 아들에게, 또 다른 일들은 성령께 속하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는 창조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신다. 아들은 구속하시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의 영역과 기능들이 다를지라도, 그 분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위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에 다른 위격들이 다양한 비중으로 참여한다. 사실, 신격의 세 위격들은 구속사에서 세 개의 시대 가운데 각각의 역할을 이어왔다. 아버지의 시대는 창조 때에 시작되었다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들의 시대는 비교적 짧은 시기이지만 구속이 객관적으로 성취되는 중요한 시대이다. 그 시대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더불어 시작되어 오순절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시대는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고, 종말까지 계속된다.

 

우리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역사와 관련해서 구속의 역사와 또한 일반적인 세상의 통치에 분명한 절차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버지께서는 처음 세상을 구상하시고 창조하신 일을 하셨고, 아들은 아버지가 하신 일에 의존하고 종속하심으로써 세상을 구속하셨으며, 성령께서는 시간 적으로 그 후에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일에 의존하고 종속하심으로써 구속을 적용하신다. 특히 구속 사역,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사역에도 논리적인 순서가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사역이고, 둘째는 아들의 사역이고, 셋째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학적으로 삼위일체의 위격들에 대해 진술할 때에도 항상 이 순서를 따른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일하신다(요 17:8; 롬 8:3; 딤전 5:9; 롬 5:1).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해서 일하신다(롬 5:5; 갈 5:22-23; 딛 3:5, 행 15:8-9)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분 보다 크지 않다(요 13:6). 예수께서 비천한 상태에 계실 때 그의 인성의 관점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나 보다 크시다”(요 14:28)고 말하실 수 있었다.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3:23).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머리인 것 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다(고전 11:3). 삼위의 두 번째 위격에 대해 언급될 수 없는 내용들이 성육신 하신 아들에게는 언급되어진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지혜가 자라났고(눅 2:52) 심지어 그분의 공생애 말기에서는 언제 세상이 끝날지 알지 못하셨다(마 24:36). 우리가 초과 은혜의 사역이라고 칭하는 구속 사역, 즉, 의무가 아니라 순수한 은혜와 사랑으로 시작된 구속 사역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아들이 사실상 공식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게 되신다. 그 다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고, 그 분들을 위하여 행하시고, 그 두 분을 계시하시는 성령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고 그 분의 백성의 심령 속에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과 영적인 조명으로 역사하신다. 아들이 아버지께 종속되시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되시는 것은 신격 안에서의 그들의 본질적인 삶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단지 창조와 구속 사역에서의 역할 또는 활동 양태와 관련된다.

 

아들이 아버지께,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되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동등함과 전혀 위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러한 우선성과 종속에 대한 유추는 인간들의 가족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들 수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 관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등한 관계라고 말한다.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즉, 남자의 영혼만큼 여자의 영혼은 귀중하다. 하지만 가정과 국가에서는 우성성과 종속이 드러나는데 그 중에 남편은 대변자와 대표로 인정된다. 브렌톤 그린 박사(Dr. W. Brenton Green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물론 율법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남편과 아내는 전체의 반반이며 서로 동등하다. 그러나 비록 이러할지라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내의 지위는 남편의 지위와 구별되고 그 지위에 의존한다. 이는 아내가 인성에 있어서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성에 있어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동등하다. 그 이유는 그 둘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의 역할이 남편의 역할보다 덜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다. 분명히 여자가 남자보다 성품과 지능과 신체의 어떤 기능에 있어서 훨씬 더 잘한다. 심지어 여성만이 최고의 필요에 의해 행할 수 있는 기능들도 있다. 또한 오직 아내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들이 있고, 오직 남편이 감당해야 하는 필수적인 기능이 있다. 이러한 기능 중에 주된 기능 한가지는 그들의 일상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구성하고 있는 ‘한 몸’에서 ‘머리’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든 말든, 그러한 관계는 그들의 완벽한 동등 됨과 모순되지 않는다. 지금 이 경우는 삼위일체의 경우는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다. 하지만 존재 방식과 사역에 있어서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종속된다. 그러므로 남편과 관련해서 아내는 두 번째 지위에 있을지라도 이는 전혀 열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속 사역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언약을 통해 각각 특별한 일을 담당하는데 그들의 일은 사역이 진행됨에 따라 나타난다.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첫째가 되시고, 아들은 공식적으로 둘째가 되시며, 성령은 공식적으로 셋째가 되신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삶 안에서는 그 위격들의 완전한 동등성이 유지된다

 

출처: Studies in Theology, Chapter Ⅲ, "The Trinity,"

저자: 로레인 뵈트너(1901-1990): 미국 장로교 신학자, 미주리 린덴(Linden)에서 출생

역자: 박세봉

 

 

6. 근본 교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전13:13)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신약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한 분 참되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된다. 그리고 한 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는 쉽게 입증된다.

 

첫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참된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을 함께 지니시며 서로 교통하는 영원한 세 위격을 지니신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예배하는 자는 단순히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신에게 예배하는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 및 절대적인 신성을 부인하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떠한 죄인도 구원받을 수 없다. 아버지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배제하고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아버지는 그분의 택한 자들의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기로 영원 전부터 뜻하셨다(엡1:3-6). 아버지, 아들, 성령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성자께서 성육신하시기로 서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교회의 구원은 아버지께서 이루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오래전부터 우리의 구세주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린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을 위하여 행하신 선한 일을 그들의 마음에 실제로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도 동이하게 필요하다. 죄를 각성하게 하고 죄인에게 구원받는 믿음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성령께 달려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디도서 3:4-6을 유의하여 읽어보면, 세 위격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구절에서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딛3:6).

 

셋째, 삼위일체 교리는 근본 교리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다양한 필요들이 거룩하신 삼위의 구별된 사역에 의해 충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 끊임없이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간직된 충만한 은혜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시급하고 실제적인 요구가 아닌가?(요1:16).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공급받으려면, 중보자가 앉아계시는 보좌로 나아가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항상 신선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도록 분부를 받지 않았는가?(유1:21)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과의 교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만약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고후4:16; 엡3:16) 만약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지 아니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중보”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떻게 되겠는가?(롬8:26-27).

 

성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우리 몸의 부활처럼, 성 삼위일체 교리는 신앙해야 하는 신비들 중의 하나이다. 이 신앙에 제시되는 첫 번째 진리는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이성으로 발견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진리는 한 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곧 세 분의 관계 가운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아는 것은 첫 번째 진리처럼 그분의 말씀의 권위로 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계시에 대하여 논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대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초월적인 거룩함을 다루고 있고 또한 무한히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분에 관계되어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내용에 철저하게 국한된다. 과학, 철학, 경험, 관찰, 또는 추론으로는 이 존귀한 영역에 대하여 조그마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삼위일체의 단일성: 성 삼위일체는 한분의 삼위일체이다: 

다시 말해서, 삼위일체는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참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안에서 본질적인 연합에 의하여 함께 존재하는 세 위격을 말한다. 이 세 위격은 동등하고 똑같이 영광스럽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앞서거나 뒤처지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위대하거나 덜하지 않다. 세 위격은 그들의 언약적인 직무 안에서 그리고 그 사역에 의해 우리에게 증거된다. 이 세 위격이 영원한 언약에 의하여 어떻게 우리에게 관여하고 역사하는지를 믿고 아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고 의무이다; 하지만 우리는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연합되어 있는, 신격의 모든 위격을 동일하게 경외하지 않는 가르침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삼위일체의 진리를 모르고, 붙들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러한 기독교는 없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공식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아담 후손의 마음 안에는 경건이 있을 수 없다. 마치 망원경과 같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서 그것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그 어떤 교리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고린도후서 13:13의 축도에서, 사도는 은혜, 사랑, 그리고 교통의 근원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한다. 이 축도의 독특한 특징을 무시하면 안 된다: 

축도의 순서는 특별하다. 그리고 그 호칭은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아들이 아버지 앞에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신성한 위격들은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으로 호칭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으로 호칭되었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은 신앙의 고백(마 28:19)이나 송영(유 1:24-25)이 아니라 축도이기 때문이다. 송영은 찬양에 속한다; 축도는 축복의 말이다-송영은 성도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도에게 내려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 

따라서 축도는 삼위일체 교리가 생명 있는 경건의 실체와 발전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위일체 교리는 단순한 사색의 주제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전달하는 모든 통로와 관련된다. 삼위일체의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고백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놀랍고 엄중한 사실이다. 그들은 유니테리언교도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삼위일체 교리를 열광주의와 광신주의의 한 종류로 취급한다. 아무튼 축도는 은혜, 사랑, 교통이라는 복음의 세 가지 위대한 단어 안에서 기독교의 복된 특권을 요약해 준다. 이 세 가지의 신성한 선물들은 신격의 각 위격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각각의 선물은 삼위의 독특한 사역 안에서 주어지지만, 우리는 각 위격의 관여 범위를 추적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한분이 아닌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각각의 선물은 모든 위격들에게 속한다. 은혜는 아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성령에게 속한다. 사랑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과 성령에게 속한다. 우리의 교통은 성령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한다.

 

은혜 - 복음의 위대한 단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가 아버지와 성령 모두에 속해 있다면, 왜 독특하게 은혜를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가? 그 이유는 구속의 경륜 안에서,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은혜라는 단어는 모든 서신서에서 바울이 사용한 특별한 단어이다: 때로는 “너희 심령과 함께”라는 표현이 덧붙여지기는 하지만 바울의 여덟 개의 서신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로 마무리된다. 은혜는 복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 중의 하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이것은 신인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칭호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나타낸다: 그는 “주”(the Lord)이시다. 그렇다. 그는 “주 중의 주”(the Lord of lords)이시다. 또한, 이 “예수”라는 칭호는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을 나타낸다: 그는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그의 직임을 나타낸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 오래전부터 약속된 메시아, 중보자이시다. 사도가 모든 믿는 형제들을 위해 축복하며 말했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한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고 그의 백성의 머리가 되신 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비천한 상태에 굴복하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겸손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을 때, 주의 백성이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를 보니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였고, 이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더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4, 16). 여기에서 은혜는 구속받은 자의 영혼에 역동적인 힘을 공급하시는 신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히 4:16)를 발견한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히13:9). 그리고 그 은혜에 의하여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히12:28) 있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딤후2:1)로서 거기서 우리는 힘을 얻게 된다.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는 약속에 의하여 모든 환난과 핍박에서 우리를 돕는 은혜의 능력을 공급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는 권면을 받는다. 살펴본 구절들은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의 근원으로 하여 연결된 은혜의 역사로서 영혼에게 주어지는 신성한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왜 하나님의 사랑이 두 번째 순서로 나오는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이것은 구속의 경륜 및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 주어진 순서이기 때문이다. 

첫째, 주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취득한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 또는 중보 사역으로서, 이로 인해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로부터 진노를 거두시고 화해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백성들에게서 결코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통치자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사랑 또는 호의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구속의 근원이며 시발점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다루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아버지의 이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그 사랑에 참여하게 하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성령의 교통하심: 

“성령의 교통하심”.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공의로운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를 획득하여 주었고, 우리를 위해서는 성령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헬라어로 교통은 교통(communion) 또는 소통(communication)으로 표현된다. 성령과 소통함으로, 우리는 거듭나게 되고, 믿음이 주어지며, 우리 안에서 거룩이 역사하게 된다. 생명, 빛, 사랑, 그리고 자유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유익들이다. 우리가 성령과 소통하지 않고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익들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3:13-14). 따라서 자신의 백성들과의 성령의 소통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성령의 ‘교통’으로 표현되는 헬라어는 “동반자, 교제”를 의미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공유하신다. 은혜는 사랑으로 인도하고, 사랑은 교제로 인도한다. 또다시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적인 순서를 보게 된다. 오직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의 식적으로 은혜가 수여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진 후에야 지적이며 참된 교제가 가능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되고,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통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그 영혼 안에 임재하여 거하시게 된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표현은 성령이 위격인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비인격적인 원리나 영향력과 교통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묶여 있는데 이는 성령이 신성한 위격인 것을 입증한다. 더욱이 이 표현은 성령이 친교와 대화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엡 4:30). 영원한 삼위를 구분하여 말씀하는 것은 그들은 우리로부터 동등한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은혜, 사랑, 교통하심의 선물을 삼위로부터 떼어내어 구하지 않았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가 그분의 백성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였다. 신약 성경은 신성한 삼위가 신자의 마음에 동등하게 임재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말씀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에 대해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거하신다: 주 예수께서 모든 은혜의 근원으로서 그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랑의 원천으로서 그 안에서 거하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모든 영적인 섬김을 위하여 그와 교통하시며 그에게 힘을 주신다

 

출처: Studies in The Scriptures, Chapel Library.

저자: 아더 핑크(1886-1952): 목사, 순회 성경 교사, 저자, 영국 노팅햄에서 출생

번역: 이진일

 

 

7. 유익을 주는 교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자신들을 신자들에게 계시하고 그들과 개별적이며 구별된 방법으로 교류하며 활동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성령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성전으로 삼고 거하신다(고전 6:19). 이로 보건데, 하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으로서 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을 삼위 하나님으로 높이고 섬기는 자들은 이생에서 참으로 경건하고 이후에도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이처럼 이 진리는 가장 유익하며 본질적이다. 우리는 신성한 위격들의 순서를 따라서 사람이 어떻게 이 신비한 진리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보여주려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물 및 그들의 구원의 근원으로 여긴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그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높이고, 또한 영원하며 불가해한 구원에 참여자가 되도록 하신 것을 안다. 또한 모든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그를 통하여 있고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도 안다. 

둘째로, 그들은 아버지께서 그의 완전한 의와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지혜와, 은혜를 베푸시는데 있어서, 그리고 자유함과 놀라운 자애를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어떻게 그의 유일한 사랑하는 독생자를 택자들을 위한 보증인으로 지정하셨는지 인식한다. 이러한 계시의 목적은 구원에 대한 그들의 체험을 향상시키려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아버지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죄에 떨어지도록 정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아버지는 택한 자들에게 온 세상을 유업으로 얻어 소유할 수 있도록 정하시고 그의 섭리로 그들의 유익과 혜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유지하고 다스리신다. 

넷째, 그들은 아버지께서 구속의 언약에 따라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사람의 모양을 취하게 하시고 우리의 보증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신 사실을 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율법 아래 두시고 그 아들의 완벽한 순종에 의해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도록 하셨으며, 이에 택한 자를 그들의 죄책과 형량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나아가 그들에게 영생을 얻을 권한을 부여하여 주셨다. 

다섯째, 그들은 아버지께서 택자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중생시키시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거룩의 길로 인도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을 안다. 

여섯째, 그들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주의 자녀와 상속자로 삼으시고, 따라서 그들을 주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돌보시는 것을 안다. 이러한 확신은 신자의 마음에 어린아이 같은 자세를 갖게 하며 그 영혼을 겸손하게 한다. 그 영혼은 참 자유를 누리면서 “아바, 아버지”(갈 4:6)라고 부르짖으며 기뻐한다. 그 영혼은 자기 자신 및 삶 전체를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고 모든 것을 맡긴 채, 그분의 손에서 나오는 것으로 받아 살며, 아버지이신 주께 자신의 모든 필요와 소원을 아뢰고, 기꺼이 아버지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아버지를 섬긴다.

 

아들에 대해서는, 

첫째, 신자들은 아들이 택한 자들을 아버지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지닌 보증자인 것을 안다. 

그들은 그러한 온전한 분을 보증인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에 감탄한다. 

둘째, 그들은 그들을 향한 아들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된다. 아들은 구속의 언약 가운데 위대한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보증인으로 주셨다. 

셋째, 그들은 아들이 때가 차매 자신을 겸허하게 하여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택자들을 형제라고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들의 속성을 취하셔서 그들이 아들과의 교통과 교제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을 안다. 

넷째, 그들은 그가 마치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것처럼 순수한 자원하는 사랑으로 그들의 죄를 감당한 사실을 안다. 그들은 아들이 참으로 기꺼이 그들이 받아야 할 형량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서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든 것을 안다. 

다섯째, 그들은 아들이 그들을 자신에게 연합시켜 영적인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안다. 이에 아들은 머리이고 그들은 지체이며, 아들은 신랑이고 그들은 그의 신부이다. 따라서 아들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여섯째, 그들은 이처럼 아들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아버지께 바치며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히 2:13)고 말씀하신 것을 안다. 그들은 이것이 구원의 원천이며, 하나님의 모든 완전한 것들이 창조의 사역 및 섭리의 보존 사역과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더욱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나타난 것을 안다.

 

성령 하나님은 다양하고 자비로운 방식으로 신자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영원전부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작정하신 모든 것들과 아들이 그들을 위해 수고하여 얻어 놓으신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적용하시고 그것들에 참여시키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자들의 마음 속으로 성령을 보내시며 성령은 그들을 성전 삼아 그들 안에 내주하신다. 택자들을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택자들이 중생하기 전에는 본성 상 다른 이들처럼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유 19)였다. 그들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상태였고 하나님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살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죄악 됨과 저주받은 상태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들은 구원 및 영적인 삶과 무관하였고 이러한 것들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의 모든 활동 및 몸의 모든 지체의 활동은 오직 세상에 속한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든 종교 활동은 단지 양심을 평정시키기 위해 기계적인 특징을 띄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에 안주하며 빛과 영성과 참된 경건에 속한 것들을 미워하였다. 특히 그러한 것들을 접하게 될 때는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즐거움의 순간이 택자들에게 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빛을 비추시어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혜택에 참여하게 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 2:12).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이 어떤 방법과 어떤 과정으로 성령을 받는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질문: 신자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가? 아니면 그들과 소통하는 성령 그분을 받는가?

답변: 

(1) 신자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은 신격에 속한 무소부재와 같은 그러한 임재가 아니다.

(2) 또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성령의 역사의 대상으로 삼는 외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3) 또한 성령의 은사들, 곧 믿음, 소망, 사랑 등을 나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4) 오히려 신자에게 주어진 분은 성령 자신으로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신자들 안에 거하신다. 

 

이때 성령의 내주하심은 그들 안에 특별한 방법으로 되는 것으로서 그들의 마음의 한계를 무한하게 넘어선다.

 

첫째, 이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 거하심을 알려주는 성경 구절들로 인해 분명하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벧전 1:11).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얼버무리는 주장: 성령의 은사들은 성령 그분과 같은 것이다(행 10:44-45).

답변 :

(1) 성령이 언급되는 구절들을 보면, 항상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위 구절의 앞부분의 맥락을 보거나 다른 유사한 본문들을 보면, 이는 은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 그분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주장은 설 수 없다.

(2)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성령의 은사들은 가르치거나 인도하거나 위로하거나 증거하거나 중생시키거나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성령 그분은 이러한 것들을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역사하시거나 나누어 주실 수 있다.

(3) 성령의 은사는 불신자들에게도 주어진다(히 6:4). 이 은사들은 성령의 내주하심과는 달리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따라서 우리는 성령 그분의 위격은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하면서도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자를 성령의 전이라고 부르는 성경 구절로부터 확증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하나님의 은사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리라”(출 29:45).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시 76:2).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시 80:1). 성령께서는 이전에 성전에 계셨듯이 신자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은사만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인격적으로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

 

셋째, 신자는 무하하신 분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무한한 욕구가 있다. 

성령의 은사들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것들로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며 또한 분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요 17:23). 이처럼, 신자는 단지 성령의 은사들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 그분을 받은 것이다. 

 

출처: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Vol. 1, Reformation Heritage Books.

저자: 빌헬무스 아 브라켈 (1635-1711): 화란 신학자이며 화란 제 1차 개혁의 대표. 화란 레위바르덴에서 태어남.

번역: 스데반 황

 

 

8.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통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 본성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우리는 어둠인데, 어찌 빛과 어둠이 교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생명이시요 우리는 죽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우리는 악을 품고 있는 자인데 어찌 이 둘의 화합이 가능하겠는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엡 2:12), "자기 무지 속에 갇혀 마음을 굳게 한 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엡 4:18). 지금 이 둘은 뜻이 같지 않으므로 동행할 수 없다(암 3:3).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리 벌어져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교제나 교통은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처음 관심을 잃어버렸고, 우리에게는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였듯이, 하나님은 그에게 접근할 그 어떤 길도 계사하여 주지 않으셨고,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죄인은 평강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어떤 일도, 주께서 계시하신 그 어떤 속성도 그러한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그 어떤 작은 빛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담대함을 얻고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엡 3:12). 이 담대함과 당당히 나아감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하심과 나타나심에 의해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던 간격이 사라졌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과거의 방법을 완전하게 폐하시고 “휘장 곧 그의 육체"(히 10:20)을 통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따로 마련해 주셨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엡 2: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3-14). 이 새로운 기초와 토대 위에 서 있는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죄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죄인들이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 것은 놀라운 경륜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 언급해 보자. 교통은 둘 사이에 맺은 연합 관계에 근거하여 각자의 좋은 것을 기쁘게 나누는 상호 소통이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가 그러했다. 둘은 사랑 안에서 긴밀히 소통했다(삼상 20:17). 사랑의 연합이 둘 관계 속에 있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모든 문제를 공유하였다. 사랑은 영적인 것들 안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러한 교통을 누리는 자들은 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인하여 가장 뛰어난 연합을 지닌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연합은 지극히 소중하고 뛰어나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통은 하나님의 자신 안에서의 소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과 또한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가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는 주께서 요구하시고 받아들이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연합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 교통은 두 가지 면이 있다. (1) 완벽과 완성: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점과 모든 부분에서 주님을 우리의 최상의 목표로 삼고 그분을 의탁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모습 그대로 뵐 때의 즐거움이 그러하다. (2) 시초와 미완성: 우리가 은혜로 받은 완전한 것의 첫 열매 및 첫 부분이 그러하다. 본 글은 후자만 다룰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지극히 거룩하고 영적인 방식을 따라 주고받는 이 상호 소통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예수의 보혈 안에서 확증된 평화의 언약을 근거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통에 힘써야 하며, 또한 우리 주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한다. 우리 주께서는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를 대적의 자리에서 교통과 사귐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고, 따라서 말씀을 기록하신 주님과 주의 자비의 말씀을 읽는 자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맛보게 되면서 더욱 주의 구원의 충만함을 사모하게 되고 영광 안에 그분을 더욱 영원히 즐거워하게 된다.

 

성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 교통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성부와 구별된 사귐을 맺고, 성자와 구별된 사귐을 맺으며, 성령과 구별된 사귐을 맺는 것이다. 성도들이 각 위격과의 구별된 사귐을 가질 때 각 위격으로부터 특별한 유익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먼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요일 5:7, 흠정역)는 말씀을 전해준다. 하늘에 계시는 세 위격은 우리에게 증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세 위격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실까?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과 그분의 보혈 안에서 신자들의 구원을 증언하시고, 그리고 사도가 그곳에서 다루고 있는 칭의와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피와 물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자, 그들이 그 증언을 어떻게 하실까? 세 위격으로써 각각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 증언하실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증언하시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 자, 각 위격은 그 증언을 따로 구별하여 하신다. 성부께서 증언하시고, 성자께서 증언하시며, 성령께서 증언하신다. 즉, 그들은 세분의 구별된 증인들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여러 증언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과 다양하게 교통하게 된다. 이렇게 이러한 증언을 주고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서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다.

 

사도는 신자들에게 분배되는 은사와 은혜를 언급할 때 그 원천이 각 위격과의 구별된 교통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12:11). 이 말씀들은 성령을 언급하고 있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의 말씀은 주 예수님을 언급하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의 말씀은 심지어 성부를 언급하고 있다(엡 4:6). 이처럼 은혜와 은사는 각 위격과의 개별 관계에서 부여되고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 및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또한 동일하게 구별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하나님께 우리가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성취되는데 있어서 세 위격이 구별되어 관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만 언급되는 표현도 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여기서 “~와”는 구별하면서도 합치는 접사(접사(接辭)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의 말씀은 그 교통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가 그 영혼과 함께 거하는 것을 뜻한다. 때때로 아들만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이다. 때때로 성령만 언급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성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 위격과 구별된 교통을 가지는 것은 성경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도들의 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하나님과의 교통을 향유하는 방법과 수단은 영적이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정식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그 안에서 은혜를 받아 그 영혼이 은혜롭게 표출되는 것이다. 즉, 믿음과 사랑과 신뢰와 기쁨 등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의해 표출되고 그 안에서 성도들은 주와 교통하게 된다. 이제 이것들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외적으로 표출된다. 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에 따른 엄숙한 기도나 찬송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성경이 이 모든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구별하여 연결시키는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필자는 특별한 경우들을 좀 더 언급하겠다.

 

1. 하나님과의 교통은 성부와 나누는 교통이다: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과 순종 등을 성부께 특별히 구별하여 드린다. 

성부는 그들을 향하여 특별하게 활동하는 식으로 특별하게 드러나신다. 그러면 성도들이 이끌림을 받아 반응하게 된다. 성부께서는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이를 증언하실 때 아버지는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 그가 증거하실 때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해 증거하실 때) 아버지는 그 증거 안에서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다음 구절이 확증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요일 5:10).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은 아버지의 증언을 신용으로 하여 아버지의 사랑의 모든 목표들이 이루어지도록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당장 아버지를 향해 믿음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 다음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 즉, 아들에 대해 증언하신 아버지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를 믿으라는 것이며, 이에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고 덧붙이신다. 즉,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최고 진리자”(the prima Veritas)로서 그의 권위 위에, 또한 그 권위로부터 모든 신성한 믿음이 궁극적으로 굳게 서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은 각 위격이 특별하게 표현되는 식으로 위격적으로 고려된 것이 아니라 신성 전체를 포함하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고려되고 있다.

 

이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증언과 권위가 있고, 우리의 믿음은 뚜렷하게 아버지께 고정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자께서 “또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덧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부와의 구별된 교통은 또한 사랑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의 말씀에서 언급된 사랑은 성부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성부를 향해서 지녀야 할 사랑이다. 성부는 여기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놓여 우리의 애정을 앗아가는 세상과 대비되고 있다. 즉, "아버지의 사랑"은 성부를 향해서 드러내야 할 성도들의 사랑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사랑을 야기하는 작용인(efficient cause)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대상과 객체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는 자기의 ‘영광’이라고 부른다(말 1:6).

 

좀 더 이 주제를 확장해보자. 이러한 은혜들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정식 예배를 통해 특별히 아버지에게 드려진다.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벧전 1:17)의 말씀과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15)의 말씀은 아버지를 향해 드려진 것을 뜻한다. 특히 무릎 꿇음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서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보편적인 자발적 순종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방법이기도 하다. 주님은 "내게"라고 명령하셨고,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사 45:23)고 말씀하신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24-25절에서 주님은 그들이 주를 공의와 힘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선언하신다. 그러하다! 때때로 예배는 온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Orderly)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예배를 훨씬 더 제약된 의미로 받아들이고 기도로 표현하면서 기도할 때의 가장 분명한 신체적(Bodily)인 무릎 꿇는 자세를 기도로 비유하고 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목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 좀 더 큰 의미를 알려준다(엡 3:16-17).

 

예배의 의무에 있어서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은 모든 신성함과 모든 선함의 원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뚜렷하게 향한다.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 그의 기도를 드릴 때에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표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구별하여’ 표현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살전 3:11). 그 앞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송축할 때 성부와 성자를 구분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엡 1:3-4). 신령한 예배에 대한 여러 특별한 구절들이 대단히 많이 있지만, 다 나열할 수 없다. 그 내용들은 뚜렷하게 아버지의 위격을 향해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보여준다.

 

2. 하나님과의 교통은 또한 성자와 관련된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구별된 나에게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너희는 하나님(성부)을 믿으라"의 말씀은 초자연적인 신성한 믿음이 성부에게 향하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또 나를 믿으라"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서 그가 세상의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를 무시하고 믿지 않던 바리새인들에게 끔찍한 경고가 내려졌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이 말씀에서 믿음은 아들만을 소유하는 의미에서 아들을 즉각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그에 대해 증언하신 대로 그리스도가 아들인 것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요일 5:13; 참조, 요9:36))이다. 그렇다. 그 믿음의 대상으로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뚜렷하게 구별하며 신뢰하며 의뢰한다. 특히 믿음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빈번하게 강조된다. 하나님, 곧 아버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곧 아들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는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 아들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요 3:36).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 6:29; 참조, 요 6:40; 요일 5:10).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는 말씀이 놓여 있다.

 

사랑에 대해서는 필자는 단지 사도 바울의 엄숙한 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이는 결코 부패하지 않는 신성한 사랑으로 예배의 자세로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성자에게 드려지고 있다.

 

좀 더 이 주제를 확장해보자. 온갖 종류의 순종과 규정된 예배에서 작용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특히 성도로부터 마땅히 나와서 특별히 아들에게 향하는데 엄숙한 송영에서 풍성하게 드러난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다음은 더 큰 영광을 성자께 드린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아버지와 아들(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은 함께 제시되고 있지만, 두 분이 각각 모든 거룩한 예배 및 존귀를 영원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한 존재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죽어가던 스데반은 그의 믿음과 소망을 특별히 주 예수께 고정시킨 가운데 엄숙한 기도를 드린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이는 또한 스데반이 인자이신 예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지닌 것을 알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처럼 사도는 주 예수를 예배하는 것을 성도의 특징으로 삼는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을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로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이신 우리의 중보자께서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마땅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3. 하나님과의 교통은 또한 은혜의 성령과 관련된다. 

불신의 큰 죄는 결국 성령을 반대하고 그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신은 성령의 사랑에 대해 구별되어 말하는 내용을 안다(롬 15:30). 사도는 또한 엄수한 축도에서 성령께 직접 간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러한 축도는 원래 간구이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그분의 이름이 세례를 시행할 때 지정되기 때문에 모든 정규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마 28:19).

 

이제 지금까지 다룬 것들을 요약하자. 우리의 영혼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구별되게 나아감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은혜를 전혀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의무와 순종을 행할 수도 없다. 이제 이러한 방법이나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출처: “Of Communion with God the Father, Son, and the Holy Spirit"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W. H. Goold, Vol. 2 (Edingurgh: T&T Clark, 1862).

저자: 존 오웬 (1616-1683): 회중 교회 목사이며 신학자. 영국 옥스퍼드셔, 스타드햄프톤에서 태어남.

번역: 최정식

 

 

9. 삼위일체의 구원 사역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본문에서 우리의 구원과 관련한 삼위일체의 동역에 대해 첫째 교훈을 배워보도록 하자.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을 빼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구세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것은 맞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그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신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가 몇몇 사람들이 빠진 이러한 오류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그 때에 주께서 홀로 오시지 않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삼위일체의 존귀한 다른 위격들과 함께 우리의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신다.

 

우리의 본문이 묘사하는 그대로 현장을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하늘로부터 누구에게 표징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표징이 예수님께 임하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다(요 1:33). 예수께서 물에서 나오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생긴 보이는 모양으로 그에게 내려오시더니 그에게 임하신다. 요한은 성령께서 마치 그 이후부터 예수님의 동반자가 된 것처럼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 1:32)고 말한다. 이는 참으로 그러했다. 그 비둘기가 그리스도께 내려와 머무는 그 때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라고 하신다. 이 소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으로서, 그는 육체적인 모양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이전에 인간의 귀로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던 놀라운 말씀으로 나타내셨다. 아버지는 성령처럼 자신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지 않으시고 귀에 나타내셨다. 아버지께서 분명하게 하신 말씀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시작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연합을 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되었다.

 

자, 죄인들이여! 

만일 당신이 이전에 이러한 자세를 지닌 적이 한 번도 없을지라도, 오늘 이후로 겸손히 그리고 경외함으로 지극히 영광스러운 삼위일체의 모든 세 위격에 대해 생각하라.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는 하늘에서의 자기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시려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이에 우리는 복수의 칼을 피하여 그의 뿌려진 보혈 아래에서 쉴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그의 위대한 구속 사역을 보여준 것을 아는가? 그는 요한에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께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의를 완성시켰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세례는 모든 의의 완성에 대한 상징 또는 그림인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무슨 일이 발생하였는가? 첫째, 그는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요단 강 아래 잠겼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하여 자신이 이 땅에서 죽기까지,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기 위해 오셨음을 가장 분명한 세례의 상징으로 제시하셨다. 실제로 때가 되면 그는 죽어서 장사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장사를 상징하기 위해 물결치는 물 아래로 잠기셨다. 하지만 세례는 단지 사람이 물에 잠기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물 위로 일으켜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익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세주께서 물에서 일어나시는 것은 그의 부활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세례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죄인들을 위해 죽고, 그들을 위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나는 죄인을 위해 간청하기 위해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내 죽음은 그들의 죄악을 제거해 줄 것이고, 나의 부활은 그들의 의롭다 함을 완성키실 것이다.”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이여, 가서 믿음으로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구세주를 바라보라. 그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을 보고, 그가 사흘 만에 일어나시는 것을 보라. 40일 후에 그가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아 하늘로 오르시는 것을 보라. 그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과 승천은 모든 의를 성취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당신은 구원을 받는다.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받는 세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영혼을 죽음으로 쏟아 부으심으로써 당신을 위해 피의 세례를 받으셨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유용한 것은 당신의 고통이 아니라 주의 고통이다. 복의 비결은 당신의 존재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의 행하심으로서 당신이 그 위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을 것이다.

 

자, 필자는 당신이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읽었던 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성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의 성령이셨다. 만일 당신이 구원 받고자 한다면 이는 성령께서 당신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과 같은 마음을 주셔야 가능하다.

 

필자는 당신이 거룩한 경외함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여 그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시는 신비하고 전능한 분을 생각하기를 바란다. 당신은 본성적으로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오직 성령께서 당신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실 수 있다. 당신은 본성적으로 영적인 맹인이다. 오직 성령께서 당신에게 영적인 눈을 주실 수 있다. 심지어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의 수고마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취하셔서 당신에게 계시하여 주시기 전까지는 당신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보혈은 당신에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그의 성령으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도록 하여 당신을 믿도록 이끌지 않으시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결코 바라보지도 않을 것이며 신뢰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항상 우리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하는 느낌을 갖도록 하라. 이는 우리가 선 그 자리가 특별하게 거룩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에 대해 거스려 말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엄중하게 경고하신 것을 기억한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우리가 성령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하도록 하자. 성령은 살리시는 영이시며 가르치시는 영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보존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에 참여하도록 만드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복되신 성령께도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능력이 영원토록 돌려져야 한다.

 

우리는 동일한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첫째, 아버지는 예수를 그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동등할 수 있으며 동일하게 영원하시면서 그럼에도 아버지의 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우리는 이 깊은 심연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소위 아버지의 “영원한 나으심”에 의해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이해도 하지 못하며 설명도 할 수 없는 신비인 것을 고백한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그를 그의 아들로 부르시는 것처럼,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성경이 언제나 그에 대해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본문에서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그의 아들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본다. 거룩한 삼위일체 내에서 신성한 위격들이 각각 서로를 향해 어떤 놀라운 사랑을 지니는지 보라! 그들은 서로에게 신성한 다정함과 만족으로 바라보니 이 얼마나 복된가! 그들의 관심에는 결코 불일치가 있을 수 없다. 이는 그들이 한 마음이며 목적에 있어서도 하나이고 모든 면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다.

 

자, 죄인들이여! 필자가 당신의 마음을 특별하게 이끌어 닿게 하는 요점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아들 및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매우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 사실이다. 이는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의 사랑하는 아들 때문에 당신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에 아들이 대표하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일 당신이 주께서 택한 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의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자들을 묶어주는 연합의 끈이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일부로 여기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때문에 역시 당신을 기뻐하신다.

 

이처럼 당신은 당신을 위해 고통 당하시는 아들이 있고, 그의 속죄 제사의 공로를 당신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이 계시며,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당신을 매우 기뻐하시는 아버지가 계시다. 이 진리를 다르게 표현해보면, 아버지께서는 잔치를 배설하시고, 아들은 잔치이며 성령께서는 초청을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식탁 주변으로 손님들을 모아 오신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아버지는 은혜의 샘이고, 성자는 은혜의 채널이며, 성령은 우리가 흐르는 샘에서 물을 떠서 마시는 컵이다. 필자는 당신이 요단 강 기슭에서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물에서 나오셨다. 그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머무신다. 필자는 당신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내가 그를 기뻐하노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이후 필자는 당신에게 요한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이 있다.

 

출처: A sermon published on Thursday, April 18, 1912, at the Metropolitan Tabernacle, Newington.

저자: 찰스 스펄전(1834-1892): 교회 역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영국 침례교 목사. 영국 에섹스 켈베돈에서 태어남.

번역: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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