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 내 마음은

기도할 때 내 마음은 바다로 갑니다.
파도에 씻긴 흰 모래밭의 조개껍질처럼 닳고 닳았어도
늘 새롭기만 한 감사와 찬미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저 수평선 끝까지 빙그레 웃으시는 나의 하나님

기도할 때 내 마음은 하늘이 됩니다.
슬픔과 뉘우침의 말들은 비가 되고
기쁨과 사랑의 말들은 흰 눈으로 쌓입니다.
때로는 번개와 우박으로 잠깐 지나가는 두려움
때로는 구름이나 노을로 잠깐 스쳐가는 환희로
조용히 빛나는 내 기도의 하늘
이 하늘 위에 뜨는 해. 달. 별, 믿음. 소망. 사랑

기도할 때 내 마음은 숲으로 갑니다.
소나무처럼 푸르게
대나무처럼 곧게 정직한 한 그루 나무로 내가 서는 숲
때로는 붉은 철쭉꽃의 뜨거운 언어를
때로는 하얀 도라지꽃의 청순한 언어를 피워 내며
한 송이 꽃으로 내가 서는 숲
사계절 내내 절망을 모르는 내 기도의 숲에 서면
초록의 웃음 속에 항상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 (이해인).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Herr, lehre uns beten !

라 인 마 인 한 인 교 회
(2003년 2월 8일)

기 도 의 단 계 들 (Schritte zum Beten)

한처음에 우리를 사로잡은 순간이 있습니다
(Am Anfang steht der Augenblick, der uns innehalten laesst)

지금 나는 산꼭대기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 봅니다:

세상이 이렇게 오묘할 수가! 매일같이 내가 아옹다옹하는 세상이 손바닥만 하다니!

잠깐, 길가에 저 꽃들 좀 보게나! 그 향기가 나를 매혹시킵니다.

마치 금사슬을 엮어 짠 듯한 꽃부리와 꽃잎들, 푸르른 꽃나무잎을 나는 봅니다: 이렇게 놀라운 작품이 있다니! 눈길 한번 바꾸고 보니, 세상이 딴 판일세!

그리고 마침내, 나는 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그는 나를 끔찍하게 생각해 줍니다.

나는 그에게 머물며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란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구만!

그렇지만, 우리를 사로잡는 것에는 이렇게 멋진 장면만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고 싶은 일에서 당장 손을 떼도록 강요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일로 아무 꺼리낌없이 지나치던 일들이, 갑자기 문제투성이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힘이 다 빠져 갑니다. 건강도 좋지를 않습니다. 문제들이 저를 압박해 옵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던 인간관계들이 흔들립니다.'

우리를 사로잡은 이 순간에, 이제까지 죽어라고 쫓아가던 일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일. 다른 사람에, 또 같은 일의 다른 측면에 눈길을 돌립니다. 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측면을 마음써서 다시 바라볼 기회- 이것은 비관적인 상황에서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나쁜 상황을 뛰어넘고 싶을 때, 우리는 주위을 한번 더 둘러 봅니다: '우리 주변사정이 어떻게 돌아 가는 지,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지, 우리가 진정 귀 기울이고 관심을 쏟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 이럴 때 우리가 기도드릴 수 있다면!

기도를 잘 드릴 수 있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각자 다른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인형과 장난감들을 상자 속에 넣어 구석에 쳐박아 두듯, 기도도 어딘가에 집어넣은 다음 어디 있는 지 조차 잊고 삽니다. 어떤 이는 기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당장 눈 앞에 밀려오는 일감 때문에 틈을 내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참 기도 많이 했지 ... 이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 " 또 다른 어떤 이는 기도의 능력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기도에 열심인 사람을 비웃습니다: "기도가 뭐에 말라 비틀어진 거야. 입술로만 똑같을 걸 백날 지껄이면 뭐해,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데". 그러나 (비록 형식을 달라도) 기도없는 종교는 없으며, 예수님도 기도를 자주 드리셨고,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에 (누가 18,1), 우리는 기도로 향하는 우리 마음, 기도가 끄는 매력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기도 -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요? 책읽기처럼, 글쓰기 처럼, 숫자 셈하기 처럼 기도도 배울 수가 있는 걸까요?

예, 그렇습니다. 누구나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앉는 법을 배우듯이. 걷는 법을 배우듯이. 말하는 법을 배우듯이. 사람들끼리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는 이런 일들을 시도해 봅니다. 우리는 첫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아 가고자 합니다. 말하는 법을 배우고, 단어 단어들을 어법 (語法)에 맞게 짜맞추어 봅니다. 몸가짐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가를 생각하면서 행동하듯이, 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지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가 이미 성인이지만, 살아가면서 항상 새로 배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도도 이와같습니다. 이미 기도를 드릴 줄 알지만, 우리는 이렇게 첫걸음 부터 새로 배워 봅니다. 그리고 기도로 이룰 수 있는 것들을 긴장감어린 심정으로 기대해 봅니다. 사실 기도는 아주 작은 단계 단계들이 모여서 이루어 집니다. 이 작은 단계들이 우리 인생에 평생 친구로 될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였듯이, 길 하나가 훤히 뚫리는 일도 아주 작은 시작이 있음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인생길.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에, 기도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우리에게 안겨 줄 것입니다.

예수님과 늘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누가 11,1). 이것은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드린 간청이 아닙니다. 경건한 유대교 전통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도를 알고, 일상생활 속에서 기도를 드리며 살았던 사람들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수준높은 곳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돌이켜,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첫발자국을 다시 떼어 놓았습니다.

하나: 하나님과의 연결고리 찾기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정성어린 대화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부터 벌써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에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거기서 대화란 말이 성립합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까요?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내 말을 들어주는 이 아무도 없는 데다 대고,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요?

기도드리면서 우리는 그에 걸맞게 행동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우리 소원들을 우리 아닌 다른 이에게 옮겨 놓는 건가요? 몸가짐과 말 (입술) 과 정열이 함께 어우러져 기도에 녹아드는 기도는 어떻게 경험되는 겁니까?

기도는 뜻이 있는 일인가, 기도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영적으로 짚어나갈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속이 후련해지는 대답을 나는 드릴 수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 나도 기꺼이 실험해 보렵니다. 나는 이제 실험에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기도드리기를 시작한다면, 아직은 어두운 데서 손으로 더듬더듬 찾는 것 같고, 혀가 짧아 더듬더듬거리듯 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기도드리고 또 기도드리기 를 멈추지 않고 계속 시도한다면, 나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빈껍데기만 줍든 지, 아니면 인생의 열매를 맺든지! 이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향한 물음을 이전과 다르게 던질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기도로 연결되는 고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 부모님이요, 우리는 하나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에게 받은 이미지를 무조건 이 부분에 이입 (移入) 시키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고마움과 보살핌을 많은 받은 한편, 아직까지 치유받지 못한 상처, 알게 모르게 겪은 고통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모님이란 영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우리에게 진정 유익한 것이 무엇인 지 아는 분이고, 이 선과 유익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분이란 믿음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말을 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걸기 (Gott ansprechen)

주님, 주님께 말을 붙여도 될까요?
저는 아직 주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모릅니다.
때때로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때때로 주님이 아주 가까이 계심이 너무 너무 실감나요.

주님, 어떻게 하면 주님께 말을 걸 수 있나요?
주님은 저를 이미 아십니다.
주님은 제가 누구지 확실히 아십니다.
주님은 저를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니다.

주님, 저는 제 자신이 어떤 사람인 지 모를 때가 자주 있어요.
다른 이들은 저를 보고
'이런 사람이다' 하기도 하고, '저런 사람이다' 하기도 합니다.
저는 한 때 '이런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기억이 때때로 납니다.
한 때는 또 '저런 사람' 이 되려고 애썼던 기억도 나고요.
저는 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있답니다.
채우고 싶은 소원도 여러가지 있고요.
저는 타고난 소질도 있고, 취미도 가지고 있지요.
제 곁에는 좋아하는 친구도, 미워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주님, 제 인생이 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제 인생살이 속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천천히, 그리고 하나 하나씩.
저를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싶어요.
제가 주님 안으로 들어갈 때,
제게 무슨 일이 생길 지 참으로 궁금하답니다.
저는 이 변화를 주님과 같이 찾아 나가고 싶어요.
주님과 이야기 나누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이에 적합한 언어들을 찾을 수 있게 가르쳐 주세요, 주님.
(M. Dornisch u. a., Baukasten Erwachsenenkatechese, 1992. Muenchen. S. 15).

둘: 친구에게 말하듯 하나님과 이야기하기
기도를 특별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기도와 거리가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기도를 쉽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박하고 투박한 말투면 어떻습니까? 세련되고 다듬어진 말, 여기 저기서 긁어모은 말보다, 거칠어도 가슴에서 우러나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드릴 때 쓰는 말 만큼만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해진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말로 드리는 기도와 우리 생활이 두동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유창하게 기도드리는 사람을 부러워 말고, 또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범하게 받아 들여 봅니다. 기도가 몸에 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에서 우러나는 특별한 경험을 차츰 차츰 하게 됩니다. 이런 실험을 할 사람은 누구나 전제조건 하나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늘이 도우셨네! (Gott sei Dank!) - 어떤 일이 마음먹은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잘 돌아갈 때 우리가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 맙소사! (Ach Gott!) - 일을 엉뚱하게 그르치거나, 어떤 일에 도움이 필요하지만 속수무책 (fassungslos) 일 때 한숨지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들을 기도를 시작할 때에도 쓸 수 있습니다. 기도에 쓰는 단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거기에 담긴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보통 쓰는 말이라도,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으면,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담아 의식적으로 드린다면, 이 말들에 우리 모습을 알짜배기로 담아 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시편을 하나 읽고 나서 거기에 씌여 있는 단어 단어를 마음에 와닿은 순서대로 하나 하나씩 외치는 것으로도 간절하게 기도드리기도 한답니다.

물론 규칙적으로 드리는 기도라면,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침시간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날을 이 날 예정된 일과 이 날 처리해야 할 일에 파묻혀 돌아가게 하기 전에, 단 몇 분 동안이라도 묵상하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눈을 뜨자 마자, 그 날에 모든 것을 단 하나라도 시작하기 전에, 잠자던 그 모습, 잠자던 그 자리에서, 그날의 가장 첫 순간 순간들을 하나님께 바치며 기도드리는 일은 놀라운 은혜가 됩니다. 내게 밀려오는 일들이 처음부터 나를 유린하게 내버려 두기 보다는, 내 스스로 잠시 생각할 여유를 찾아 봅니다:

오늘 네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내게 밀려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내가 불안을 느끼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결정을 내리기에 골머리를 앓는 일들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을 오늘 만나게 될 것인가?
그들이 네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무슨 목적을 도움을 구하려는가?

이런 생각에 바탕하여 하나님과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듯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 지를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감사드립니다.

기꺼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이 무엇인 지를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는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간구합니다.

내게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 지를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저는 깊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H. Reimer u. a., Leben Entdecken. Ein Buch fuer Konfirmanden, Gueterloh, 1992).

물론 나는 대낮에 일상생활을 잠시 멈추거나, 저녁시간에 하루를 되돌아 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다. 다만 단 몇 분 동안이라도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곧 영적으로 해방된 시간, 영적으로 해방된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런 뜻에서 기도는 모두 영적인 것입니다. 결국 기도의 성패 (成敗) 는, 일상생활의 호흡을 가다듬으며, 영적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려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나누는 이 대화가 때때로 깊이 있게 이루어 지지 못합니다. 때로는 거룩한 두려움 (die heilige Furcht) 이 기도를 방해합니다. 미미한 인간인 내가 일상생활에 사로잡힌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어떻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종종 하나님을 내 규격에 맞추려 하지 않는가요?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내 모습에 개의치 않으렵니다. 바로 이런 일상생활로부터 기도를 시작합니다. 내가 머무는 자리가 시궁창이든, 어엿한 사무실이든, 책들이 가득 쌓인 서재나 도서관이든, 차들이 넘쳐 흐르는 길바닥이든 속된 말로 해골이 복잡하든 - 그 어떤 장벽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진 영적인 공간과 시간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와 거리를 두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내가 말을 걸 만한 자리에 머물러 계십니다. 성서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놀랄 정도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주셨으며, 사람들은 하나님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 말씀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말씀"이 더 많이 나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책입니다.

물론 이런 전통도 확실히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한 분이시기에 사람이 그 이름을 단 한번이라도 불러서는 안 된다는.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주 친근하게 "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도드리는 제자들을 이렇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기도드릴 때, 이렇게 하여라": '아빠, 사랑하는 아버지 ...' (마가 14,36; 갈라 4,6-7; 로마 8,15-16 참조).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깊은 신뢰감과 애정이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성서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듯이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도 역시 이와 똑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저 절대적인 초월자일 뿐만 아니라, 부모님같은 애정과 정성을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마태 7,11 참조). 신뢰심을 한껏 담아 자식이 부모님을 부르듯이, 내가 아직 모르는 내게 유익한 것을 아실 부모님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듯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를 불러 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소서.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듯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하소서.
우리가 매일같이 일용할 빵을 우리에게 주소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했듯이
우리 빚을 용서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악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속하였음이니다.

셋: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기
자기 인생이 지닌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누구나 진지해 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계기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감사드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기도에 담긴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불평을 털어 놓으며, 남에게 말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깊은 곳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지를 깊이 깊이 고민하는 것도 기도에 담긴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무 부담없이, 들어주는 상대방 가슴에 가시가 되는 일 없이, 불평과 불만이 들어있는 속마음을 내보일 사람이 곁에 있다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사람은 다른 사람 형편을 잠시동안 제 일처럼 받아줄 수 있겠지만, 언제 어느 때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간절히 구한 것이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일은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것처럼 느껴지거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침묵하시고 멀리 계신 듯 느껴집니다 (시편 13,1: 야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55,4-5: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이럴 때 기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를 배우게 된다 (Not lehrt Beten)." 그렇지만 고난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은 기도드리기 조차 힘들 때가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경건한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종종 합니다. 평소에는 누구 보다도 경건하고 또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곤고한 처지에 빠지고 보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해 초조합니다. '욥의 시련이 남의 일이 아니구나' 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누구나 최소한 한번 이상 이런 일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숨결. 손길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없어집니다. 호소하면서, 아니 탄식하면서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공동번역). 시편 22편은 이런 장탄식으로 시작됩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던 시간에 예수님도 의문에 가득 찬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태 27,46).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 하나님을 고발하는 것 - 이것 역시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깊은 관계가 이런 것까지 허용합니다. 우리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관계를 제공하셨습니다. 기도야말로 이런 연관관계를 표현할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어떤 위기나 뒤쫓김이 있더라도 인간은 오로지 "주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만 기도드리면 될 뿐이라고. 여기서 간과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곧 사람이 자기 인생의 어두운 측면에서 조차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알아차릴 능력 (믿음) 을 갖추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너무 가볍게 보아넘긴다는 말입니다.

성서에는 이렇게 탄식하며 호소하는 전통이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은 삼분의 일 넘는 분량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하나님께 항변하는 양식을 가리켜 탄원시/ 탄식시 (Klagelied) 라고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께만 자기형편을 마음놓고 털어놓을 수 있다는 고백에 근거합니다. 이런 바탕에서 있는 우리도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정말 너무 심합니다 (Es ist einfach zu viel).

벌써 3주째 되어 갑니다, 주님,
제가 이 수많은 일에 짓눌려 질식할 듯 지낸 온 지가.
밤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낮에는 신경이 곤두 서 있습니다.
실수를 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처리할 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장동료가 병가를 낸 후로는
그가 할 일까지 제 몫이 되었습니다.
정말 너무 심합니다, 주님!
이제 저는 제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다 더한 일도 잘 해냈는 데 ...' 하는 위기감마저 듭니다.
이꼴을 보고 직장상사가 저를 뭐라고 평하겠습니까?
보여 주소서, 주여, 무엇을 우선 처리해야 하는 지를!
내일 처리해도 될 일에 오늘부터 벌써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오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해 주소서.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때마다 제게 주소서.
일벌레가 아니라 일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 주소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권능 안에 저를 살게 하소서: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고후 12,9) 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제가 설 자리 하나 없음을 고백합니다.
(K. D. Thompson, Herr, Sieh Dir meinen Schreibtisch an. Gebete im Buero, Stuttgart, 1978).

이와 다른 경험이 또 있습니다. 탄식거리가 기뻐할 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신바람이 납니다. 뜻밖에 닥친 고난 (고통) 이 뼈아프면 뼈아플수록, 이같은 역전이 주는 기쁨은 더욱 더 커집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탄식과 탄원은 홀연히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나 감사로 전환됩니다. 때로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이 단절은 우리를 구석진 곳으로 밀어붙이던 근심거리가 우리도 모르는 능력에 의해 우리도 모르는 방법으로 사라졌음을 일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아주 좋은 증거입니다. 이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곤고와 고난 속에 하나님께서 목적과 섭리를 심어 놓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우리가 눈과 마음으로 보고 감지 (感知) 하는 통찰력 보다도 하나님은 헐씬 더 뛰어난 분임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 4,6-7).

넷: 내 입은 다물고 들려오는 음성를 듣기
기도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나는 지금까지 말해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 와 닿은 것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측면이 또 있습니다. 곧 기도란 "잠잠해 지는 것, 영적 평정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말을 듣기 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기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덴마아크에서 목회자로, 철학자로 활동한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기도가 엄숙해지고 내면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나는 말이 점점 더 적어진다.
마지막에는 말이 아주 없어진다.
나는 말하기와 점점 더 거리를 멀리 하게 되고
듣는 자가 되어간다.
나는 기도란 우선 말하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기도란 단순히 묵묵히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 음성에 귀을 기울이며 마음문을 여는 것임을.
정말 그렇다.
기도는 내가 말하는 것을 내 스스로 듣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도란 잠잠해 지는 것이며, 잠잠한 가운데 귀을 쫑굿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입술로) 기도드리던 자가 하나님 음성을 듣고자 (귀로) 기도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 세상은 각가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간을 잠시도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음성을 듣기가 정말 간단하지 않습니다. 라디오, 전축, 텔레비젼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끌 수 있지만,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속마음에서 일어나는 정리되지 않은 소리를 끄는 작업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마음과 귀와 생각을 열어 놓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특히 성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 오시는 지를 증거해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 우리의 가난하고 좁은 마음은 크고 넓은 하나님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뜻을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담긴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 주시며, 우리 인생길에 길라잡이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가 하나님 음성을 듣는 데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말은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수용할 자세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잠잠하고자 합니다, 주님,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렵니다.

저는 잠자코 있으렵니다.
주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이해하고 싶기에.
저는 잠자코 있으렵니다.
그리하여 만물들에 다가가서
주께서 만드신 하나 하나에 다가가서
그 속에 담긴 주님 음성을 들으렵니다.
저는 잠자코 있으렵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들려 오는 많은 소리들 가운데서
주님 음성을 가려 내렵니다.
저는 잠자코 있으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를 위해 마련해 두신 말씀을
경탄하며 들으렵니다 (Joerg Zink, Christsein Heute, S. 13).

성서를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 시작해야할 지 망설여집니다. 그럴 때 나는 신약 복음서를 권하고 싶습니다. 예를들면 누가나 요한복음입니다. 사실 어디냐 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읽을 때, 욕심을 너무 많이 내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말씀과 만나는 일은 양(量)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질(質)이 아주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단락 하나를 읽는 게 좋습니다. 우선 말씀 앞에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그리고 생각에 깊이 젖어 보십시오. 한꺼번에 한장 전체를 또는 더 많이 읽는 것보다, 이것을 나는 권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스스로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내 경험으로 보면 어떤 부분은 아주 나중에서야 비로소 깨달아집니다. 또 한 때 깨달았던 것이 나중에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 읽은 부분에서 단어 하나라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족합니다. 이미 아주 좋게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말씀을 묵상하면,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어질 것입니다:

나는 무엇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는가?
내 자신을 위해 기도드린다면 무엇을 간구할 것인가?
내게서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또는 무엇을 위해서 나는 각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할까?

하나님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 놓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또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하늘을 올라가는 듯한 짜릿한 맛을 우리에게 줍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항상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을 통해 때때로 우리는 이미 굳혀진 우리 생활방식, 이미 세워진 우리 계획, 진작부터 내려진 우리 결정을 다시 한번 시험대 위에 올려놓게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보이면, "쓰레기를 내보이는 법을 배우고, 그 스레기를 치우고, 새로 창조되는 그 빈 자리에 하나님 음성을 채워나가는" 불편함이 따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를 부족함이나 거부당한 상태에 못박혀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 보다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못한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품어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복음사업에 동역자로 끼워 주십니다.

기도를 드리는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 - 내 가족, 내 이웃, 직장동료들을 한번 둘러 봅니다. 우리 국민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위해 기도드리며, 세계에 정의가 바로 서기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이렇게 기도 드리다 보면, 우리 교회와 전체 교회들, 그리고 내가 인생에서 위임받은 과제들이 분명히 눈에 들어 옵니다. 기도는 이렇게 내가 설 자리를 찾아 줍니다. 하나님 앞에 설 자리를. 그리고 사람들과 세상 앞에 설 자리를. 이리하여 기도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를 가꾸는 자가 됩니다 (창세 2,15 참조).

그러므로 기도는 단순히 경건함이나 신앙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닌 욕구를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안겨주실 선물을 바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지닌 인간적인 욕구를 신앙에 맞게 승화 시키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며, 그리스도를 닮아 갑니다. 이런 뜻에서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곧 "이제는 내가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바치시는 것" 입니다 (요한 4,10; 갈라 2,20 참조).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곧 예수이름으로 기도드릴 때,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한 기도가 어떤 기도일 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곧 우리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 지녔던 관심사를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 청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소원이나, 우리에게 긴급한 사정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기도를 끝내지 않게 됩니다. 기도드리기에 앞서 또는 기도를 드리며,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실존을 깊이 들여다 봅니다. 잠망경으로 깊은 바다 속,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 보듯.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지만, 기도드리는 사람은 자기 내면 깊은 곳을 정직하게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자신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형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책임의식을 지니도록 해 줍니다. 우리 감각과 의식이 우리 인생을 포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예민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속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과 천국의 신비함에 눈뜨게 만듭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요한 1,14)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 각 사람과 모든 피조물에 미치는 그 날을 바라 보게 됩니다.

기도를 어떻게 더 드릴 수 있을까?
기도라는 말에는 온갖 아름다운 표현이 덧붙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 (전화통화), 하나님을 향해 스스로를 여는 것,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 영혼 (생명) 의 호흡 ... 그렇지만 어떻게 이것을 실감할 수 있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각자 그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앞서 기도로 향하는 길을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이정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길을 가는 일은 우리 각 사람 몫이지요. 그래도 어떻게 하면 이 길을 계속 걸어가 기도에 맛들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방향제시 몇 가지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친구들이나 교우들끼리 작은 그룹을 만들어서, 기도드리며 얻은 경험을 서로 나누어 봅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기도를 드려 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는 인간적인 공동체 형성이나, 하나님과 만난다는 측면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건한 기도에서 얻어지는 영적 부요함에 이르도록 스스로를 자극하십시오. 성서에는 천년이 넘도록 쌓아 온 기도의 유산이 가득 차 있습니다. 수도원과 공동체들에는 아름다운 기도문들 뿐만 아니라, 기도와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만난 경험들이 풍부하게 쌓여 있습니다. 이것들을 찾아내는 여행을 떠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과 만났던 사람들이 지녔던 경건성과 영성을 각자 제 것으로 만드십시오.

찬송가/ 복음성가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써 놓은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기도가 가득 담긴 보물창고입니다. 마음을 열고 찬송을 드리면,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곧 우리 하나님이 됩니다. 찬송가/ 복음성가는 가락있는 기도랍니다. 특히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외워 부르면, 그리고 자주 부르면, 기도와 찬양이 어우러지는 멋진 경험이 됩니다.

기도를 잘 드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기도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기도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기도란 게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인간 내성. 영성 깊은 곳에서 솔직 담백하게 우러나는 인격이 묻어있는 기도지요. 이런 기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기도 앞에 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보다는, 우리 사정. 우리 형편이 먼저 눈에 띄는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기도드리는 마음도 성령님의 역사요, 기도드리는 내용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 8,26-27).

하나님,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제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주님께 상담을 구해 본 지가.
주님과 접촉하는 일을
지금 어떻게 시작을 해야 좋을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머리 속에는
아주 많은 상념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것들이
생활속에서 저를 짓누릅니다.
어떤 일들은 주님과 저 사이룰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인생의 의미와 위로와 목적이
주님안에 있다고 한다면,
주님, 제게 등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주님 찾는 여행길을
중단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
제 인생이 변화받을 수 있는
환상과 더불어 끈기를 허락하소서.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늘 새롭게 시작하게 하소서.
하나님, 제게 머물러 주시고, 저를 축복하소서. 아멘.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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