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창세기가 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야웨가 땅과 하늘을 만들었을 때 땅에는 아직 들 에는 나무 한 포기 없고 풀도 없었다.

 

하나님은 땅에 인간 의 죄악이 가득 찬 것을 알고 땅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 하고 분히 여겨 땅에 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생명이 있는 모 든 피조물을 명말시켰다.
홍수는 40일간 계속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 주에 탄 노아와 그 가족과 각종 동물의 한 쌍 씩만이 구원 되어 아라랏산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을 축복했다.

이윽고 피조물 들이 다시 번창하여 인류는 동쪽 슈메르 땅에 정주하게 되었다.

 

그 때 온 세상은 말이 같았다.

 

그들은 불손하게도 벽돌로 하늘에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 설하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까지 모두 하나의 백성 하나의 말이었던 그들의 말을 혼란하게 하여 서로 말이 통 하지 않도록 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온 세상에 흩어지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를 세우는 일을 중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디아인이며 우르에 살았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 우르를 떠나서 하 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온 가족과 가산을 거느 리고 이주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신앙과 그 명령에 대 한 복종이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계 약에 의하여 그 자손이 번창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과 늙은 아내 사라 사이에 오랜 기도가 효험하여 장자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이 그 뒤를 계승한다.

이삭은 레베카와 결혼하고 에서와 야곱의 쌍동이를 낳는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형 에서는 사냥을 잘해서 들 에서 사는 청년이 되고 동생 야곱은 내성적이어서 집안에 만 묻혀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이삭은 잡아오는 짐승의 고기 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사랑했다.

 

어느날 동생 야곱은 계략을 꾸며서 형 에서에게서 장자 권과 부친 이삭의 분노를 사서 동쪽에 있는 친척 라반에게 로 도망갔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켈을 아내로 얻어 가나안 으로 돌아온다.

 

야곱은 또한 길르앗에서 흘러 요르단강으 로 들어가는 얍복 개울을 건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이겼 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다>의뜻) 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주어졌다.
민간 어원적 설명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의 유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열두 아들들 의 4대는 족장이라고 해서, 모두 유목민의 족장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12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2. 성서의 모델은 이집트인가 메소포타미아인가

 

창세기라는 이름은 70 인약에서 나온 것이며, 창세기 2 장4절의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창조하신) 순서는 위와 같다>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헤브라이어 원전의 명칭은 1장 1절의 <베레시스>(<태 초에>라는 뜻)라는 어휘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 말 성서의 창세기라는 명칭은 한문 성서에 유래된 것이다.

 

현존하는 창세기는 적어도 시대를 달리하는 세 가지 주요 사료층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로 돼있는 야훼이스트 사료층, 하나님의 이름이 에로힘 으로 돼있는 제사적 사료층의 세 가지이다.

 

이것은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포로 후, 기원전 5 세기에 모세 5경 전체를 편찬한 제사학파에 의하여 기록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제사학파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정리하고 지키기 위해서 계보, 연대, 날짜, 통계 등의 객관적인 기록을 즐 겨 쓰고 모든 사료를 편찬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체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하나 깊은 신한적 통창은 야훼 이스트 사료와 에로히스트 사료층이 훨씬 못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성립 당초의 유대교단의 신앙이 숨겨 져 있다.
제사학파에 유래되는 사료층 안에는 상당히 오래된 사료 도 들어있다.
내용은 만물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1장-11장), 족장들 의 역사(12장 -50장)으로 돼있다.

 

전자는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카인과 아벨, 아담의 계보, 홍수와 노아의 자손, 바벨탑과 셈의 계보,후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전설, 야곱의 전설, 요셉의 전설 등 으로 돼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4절 전반의 천지 창조설은 제사적 사료층에 의한 것이며, 그 원형은 <위로는 하늘의 이 름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없을 때에>하는 구 절로 시작되는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하 <에누마.에리슈 신화>였다고 생각된다.

 

창세기 3장에는 낙원의 상실이 얘기되어 있으며, 이것 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는 이야기이며, 메소포타미 아의 전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장은 도덕적 종교적 통창이 대단히 깊고 구약성서 중 에서도 가장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며, 어느 구약성서는 창 세기 중의 진주라고 극찬하였다.

 

불사와 금단의 열매에 관한 부분과 흡사한 내용을 가지 고 있는 점토판 문서가 이집트 제18 왕조의 이단왕 아벤 호테프 4세(BC 14세기)가 아멘신의 수도 테베의 하류에 세운 새로운 수도 아케토아텐, 현지명 텔.엘-아마르나와 앗시리아 왕 앗슐바니팔이 니네베에 건설한 왕 궁 부속의 도서관 자리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은 <아다파전설.이라고 불려진다.

 

그 대충 줄거리 는 지혜의 신 에아가 자기 종을 삼기 위해서 아다파라는 원인을 인간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에아에 의하여 초인간적인 지혜를 갖게 된 이 아다파가 에아의 질투 때문에 영생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다.
어떤 학자는 이 이야기가 3장의 원형이라고 하고 야훼 이스트가 그것을 순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소재는 메소포타미아로 소급된다 할지라도 제한된 적은 사료 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3. <성서>의 첫 부분에 숨겨진 신비

 

성서 중에는 <주해자의 십자가>라고 일러지는 난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성서의 첫 부분에 있는 창세기 1장 13절은 그 첫번째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천지 만물의 창조의 기사이며, 1장1절- 2장 4절상과 2장 4절하-2장25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고,

그 어휘, 문장, 사상 등으로 보아 전자는 제사적 사료층이고 후자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첫머리의 1장1절과 2,3절의 관계에 관해서 최 근에 많은 연구가 있다. 우선 여기서 원문을 보자

 

(1)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였다.

(2)땅 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 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여기서 제1절은 표제적 성격을 갖는 독립 구절이라고 보 는 전통적 해석이 일반적이고, 제2절에서 창조의 설명이 전개되고 창조의 소재인<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은 깊은 물> 이 어디서 왔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제사적 사료층은 창조를 무와 유의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혼돈과 질서의 대립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해석자는 제1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독립 구절이 아니라, 3절의 <하나 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하는 구절의 종속절이라고 해석한다.

 

2절은 상황 설명의 도입 구절, 3절은 주 구절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2장4절하-6절(야웨이스트 사료 층)의.

<야웨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웨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 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 시었다>는 구절과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화 <에누마.에리슈.의 첫머리의 한 구절 <위에는 하늘의 이름 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아직 없었을때.>하는 것과 같이 이 부분도 <야웨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 에, 땅에는 아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창조 설화에는 내용적으로 바빌로니아 신화의 다 신교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1장1절의 어순은 헤브라이어 원전에는 다음과 같이 돼 있 다. 숫자는 번역의 순서이다.

8 7 1 3 2 4 6 5 태초에 .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 을 . 하늘 . 그리고 을 . 땅

 

(<하나님>은 명사.남성.복수.형이 복수이며 의미가 단수인 것을 <경외의 복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짝을 만들 어 주리라>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자 아담 은 이렇게 외쳤다.
" 드디어 나타났구나!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 르리라!"
그래서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 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창세기 2장7-25절) 이것은 야웨이스트 사료층의 창세 기의 일부이다.

구약성서는 여러 시대를 통해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 어왔다.
유럽 중세기에는 <하와가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고 하는 속된 생각이 있었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성향을 갖는 하와는 남자보다 짐승 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인가보다.

 

창세기에 의하면 낙원에서 사는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었을 것이다.

 

알몸의 남녀(이것은 왼쪽에 아담이, 오른 쪽에 하와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사이에 뱀이 서려있 는 나무가 서있는(고대 그리스나 서아시아에서는 유혹을 상징했다)그림이 3세기초에 나타났다.

 

그것은 1920년 에 우연히 발견된 투라.

 

유로포스(북시리아의 안타오키아와 세르키아 사이)의 <그리스도교도의 집>의 세례실의 벽화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상실의 서막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로마의 라테라노 미술관 소장의 3-4세기의 석관 부조의 <하와의 창조> 장면의 묘사에도 보인다.

 

여기서 는 아담이 누워있고 그 발치에 하와가 서 있다.

 

<뱀의 유혹>이 미술의 테마로서 중세를 통해서 취급되 었는데 <하와의 창조>는 9세기경부터 다시 취급되고, 13 세기부터는 신학적 의의 때문에 아담의 창조 이상으로 자 주 취급되었다.

 

그럼 중세기의 속된 생각처럼, 하와는 과연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진 것일까.

성서는 하와가 아담의 어느쪽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언급은 없다.

아담이 깊이 잠든 사 이에 야훼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만들었다고만 했다.

하와는 아담의 심장과 평행으로 있는 갈빗대로 만든 것이므로 하와와 아담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동등 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하다.

시각 예술의 면에서는 아담의 오른 쪽 갈빗대에서 하와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서양 미술에 있어서 오른쪽과 왼쪽은 무엇을 의미할까.

 

 

5. 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창세기 11장 1-9절은 바벨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 았다. .

 

야훼게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 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땅으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 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혼란 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탑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 제1왕조(BC 19-16세기) 시대에 바빌론 주변에 세워진 인공의 거대한 산, 즉 지 그라드의 하나이다.

그 정상에는 제사때에 신이 하늘에 서 강림했다고 생각되었다.

 

헤브라이어의 바벨은 바빌리 의 변음이며 바빌리안 앗카도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 이며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던 것이 뒤에 그리스어로 바 뷸론이라고 불리게 되고, 다시 그 지방 일대가 바빌로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층탑은 메소포타미아 제 도시의 주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지고 파라밋 형태를 이루고 큰 토대 위에 보통은 7층으로 쌓아올린 햇 빛에 말린 벽돌로 돼있으며 각층 은 경사지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상 층에는 신전이 설치 되어있고 거기서 희생을 드리는 의식이 거행된다.
고대의 우르(현대명 텔.엘.무카이아르)나둘.운탄(현 대명 초가.잔빌)의 층탑은 특히 유명하다.

 

구약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유적 발굴조사의 결과 바빌론의 도성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이라는 뜻)의 북방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의 집>이라는 뜻)라고 하는 층탑으로 동정 되어 있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이었 으나 셈족의 침입으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 준공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그후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겨우 기 원전 6세기에 느브갓네살 2세(BC 604-562)에 의하여 수 축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성벽도 이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바벨탑 설화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며, 단순히 지 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민간 어원이나 전설이 아니라 인 간의 오만이 인간 상호간의 몰이해를 빚어내어 탑 건축 이 중단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의도는 바빌론의 탑의 기원에 빙자해서 홍수 후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엡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의 형제>(1867-1880)에서 인간의 가공한 바벨탑의 건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6. 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1872년 가을, 당시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유물 수리인 으로 있던 죠지 스미드(1840-1876)는 1853년에 모슬 주 재 영국 부영사의 동생 H.랫삼(1826-1910)이 니느웨의 앗슐.바니발 왕(BC668-626)의 왕궁 부속 도서관 자리에 서 출토한 점토판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중에서 한 단편의 기록이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기록돼있는 노아 의 홍수 이야기(J사료층,P사료층에 들어 있는 것이며 중 복과 모순이 있다)와 흡수한 것을 발견하고, 동년 12월에 새로 창설된 <성서 고고학회>에서 그것을 보고했다.

 

이 보고는 각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이것이 <길가메슈 서사시>의 본래의 부분인지 여부는 별 문제로 치고, 이것이 후일에 <길가메슈 서사시>의 제11 서판의 일부라는 것이 알려지고,

<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최대의 에피소드로서 각광을 받은 서판의 발견이 되었다.

 

죠지.스미드는 대영박물관에서 <앗사리아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H.C.롤링손이 간행한 착 쐐기꼴 글자 도판 의 제작 등을 도우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쇄기꼴 글자의 구조를 알게 되고 점토판 위에 기록된 고대 문학에 열중 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변견후 4년째인 1876 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단편들(랏삼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점토판 문서의 일부)의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후에 나는 반조각이 된 묘한 서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분명히 여섯 난으로 된 것이었다.

 

그 셋째 난을 보자 나는 배가 니 시르 산에 닿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비둘기 를 날려 보낸 일, 그것이 내려 앉을 곳이 없어서 돌아왔 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곧 이것이 <대홍수>의 갈디아(지 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와 같다)판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 다."

 

죠지.스미드는 신문사 등의 후원으로 다음 해 1873년 초에 현재 니느웨로 갈 수 있게 되어

1873년과 74년의 2회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지휘하고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다시 홍수 설화의 일부가 되는 대량의 점토판들 을 발견하였다.

 

그는 먼저 발견한 서판이 12매의 서판 으로 된 대문학 작품의 일부라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어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서사시라는 것을 알 았으나 세개의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주인공의 이름을 쉽게 해독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창세기 10장8절에 보 이는 영웅 나므롯이다.
엔키두는 우르크로 내려와서 그곳 생활 양식을 익힌다.

 

양자는 우르크시의 성문에서 격투를 한다.

 

서로 상대의 힘을 알고 우정을 맺어 그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가 되고 힘을 합해서 모험을 하게 된다.
길가메슈는 엔키두에게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할 계획을 의논한다.

 

결국 두 사람은 우르크의 장로들과 의논해서 여행의 수호신과 태양신 샤마슈의 허락을 받고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을 떠난다.
두 사람은 측백나무 숲의 산지기인 괴물 프와와를 죽이 고 측백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돌아온다.

 

사랑과 향락의 여신 이슈탈은 개선하는 길가메슈를 발 견하고 이 세상의 부를 약속하고 구혼한다.

여신의 불륜을 알고 있는 길가메슈는 이것을 거절한다.

그래서 분노한 여신 이슈탈의 저주로 하늘의 신 아누로 부터 하늘소가 파견되지만 두 사람은 이것을 격퇴하고 우 르크로 돌아온다.

다음에 여신 이슈탈은 친구 엔키두를 12일간의 병고로 눕게 하고 저 세상으로 빼앗아 가버린다.

비탄에 젖은 길가메슈는 처음으로 이 세상이 끝이 있다는 것과 인 생의 공허함을 깨닫고 불사의 약초를 찾아 방랑의 여 행을 떠난다.

 

그는 산과 들을 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고있는 인간의 조상 우도 나피슈팀이 살고 있는 행복의 섬을 찾아가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묻는다.
그는 신이 내린 대홍수의 위험에서 자기가 어떻게 피 했는지를 말한다.

 

신 에아의 말씀으로 자기는 네모진 배를 만들고 위험을 피할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길가메슈는 찾고 있던 해답을 얻지 못하고 낙심해서 돌아오려고 하자, 우도나피슈팀은 그의 아내의 권고에 따라 바다 밑에 있는

불로장생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 르쳐 준다.

 

길가메슈는 곧 바다 밑으로 가서 그 약초 를 얻고 기쁘게 그것을 우르크로 가지고 온다.

 

도중에 차고 맑은 샘을 발견하고 거기서 목욕하는 사이 에 이 약초의 향기에 끌려 온 뱀이 물 속에서 나와 이 약초를 훔쳐 달아난다.

 

길가메슈는 실망에 빠져 허무하 게 우르크로 돌아간다.
본문에는 이상의 줄거리에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첨가되 어 있다.

 

우도나피슈팀의 설화는 창세기 6장-9장에 기록되어 있 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흡사하다.

노아가 홍수가 빠졌 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려보낸 새가 까마귀와 비둘기인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보면 양자는 전혀 다르다.

 

<길가 메슈 서사시>에서는 대홍수가 일어난 것은 신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돼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인간의 죄가 만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여 내린 것 으로 돼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대홍수 이야기를 그 신앙에 따라 고쳐 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도나피슈 팀은 신에아가 특별히 불쌍히 여겨 가르쳐 주었기 때문 에 대홍수를 면한 것으로 돼 있는데,

노아는 의로운 사 람이기 때문에 방주를 타고 구원된 것으로 돼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의 원형은<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우 도나피슈팀 설화로 소급되고, 다시 이 설화의 원형은 슈메르의 서사시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파손이 많이 된 점토판 문서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인간의 창조와 왕국의 기원과 홍수 설화와 슈르파 크와이며 경건한 주스트라가 배를 타고 이 난을 면한 이 야기이다.

 

전승은 주스트라->아도나피슈팀->노아,로 이동된 것으 로 생가된다.
<길가메슈 서사시>는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애호되고 많은 조각과 그림 등의 테마가 되었으며,

또한 서사시 전편을 통해서 볼수 있는 이른바 동양적 허무주의는 구 약성서의 전도서로 계승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바빌로 니아의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그리고 소아시아를 통해 서 그리스에도 전해진 문화 교섭의 역사를 해명하는데 도 중요한 연구 사료가 된다.

 

 

8. 노아가 도달한 아라랏산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 의 생각이 나셔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에 빠지기 시작 하였다.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막혀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멎었다.

 

그리하여 땅에서 물이 줄어들기 시 작한지 150일이 되던 날인 7월17일 배는 마침내 아라랏 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창세기8장1-4절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걸친 노아의 홍수 설화는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돼 있지 않다.
방주에 실려진 짐승들 이야기도 홍수의 원인이나 기간 등도 오랜 야훼이스트 사료층과 새로운 제사적 사료층이 섞여있으며 중복과 모순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편찬자가 천지 창조 설화와 같이 오래된 전승을 버리지 않고 남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전해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읽고 노아의 방주에 관심을 가졌 던 것은 물론이다.

 

이 설화를 테마로 그린 화가도 많고 교회당의 장식으로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를 조각한 조각품도 많다.

 

아라랏산 과 노아의 방주에 관해서는 저 유명한 마르코 폴로도 언급 한 것처럼,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삼아 왔다.
노아의 방주가 최후로 도착했다고 하는 아라랏산은 어디 있는 산일까. 지도를 보자.

 

흑해와 카스피해의 두 바다 사이에 아르메니아지방이라고 하는 고원지대가 있다.

 

높은 봉우리가 많고, 이것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 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이라크 평야를 적셔주고 있 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어느 높은 산 이 아라랏산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터 키령에 있다.

 

그 최고봉은 5,156미터나 된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 주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산 아라랏에 오르려 고 했다.

 

1929년에는 도이치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 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 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세기의 원문에는 <아라랏산들>이라고 돼 있으며 한 봉 우리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지대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헤브라이어의 아라랏은 앗카 도어의 우랄루두(<높은지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반 호수지방의 고원지대를 가리켜 이름지어진 것 이며, 기원전 8세기경에 그 땅에는 우랄루두 왕국이 번영 하고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야훼이스트 사료층이 기록 된 시대와 맞먹는다.

 

오늘날 우리는 니실산이나 아라랏산 이나 방주의 도착지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슈메르 의 홍수 설화에는 산 얘기가 없다. <홍수층>쪽이 확실한 고고학적 사료의 증거가 되고 있다.

 

 

9.이스라엘 민족사의 시작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이루고 있는 헤브라이즘의 담당자였던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 유가없는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원 제 20세기의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는 깊은 안개 속에 싸여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년의 여러가지 연구는 이에 관해서 고고학의 여러가지 성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마리문서>(BC 18세기), <누즈문서> (BC 15세기),<아라락 문서>(BC 15세기), <우가리트문서.(BC 15-14세기),<보하스.쿄이문서>(BC 14세기)등이 그것이다.


창세기 12장 이하에 전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12장-25장), 이삭(25장-26장),야곱(25-36장)등에 관한 족장 설화는 오랫동안에 걸쳐 구전되어 온 구비를 근거로 한 전승들이며, 이 전승들이 야훼이스트의 손으로 새로운 문맥과 수식이 가해지는 것은 기원전 10세기로 소급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현존하는 모양으로 완성한 것은 바빌로니아 포로시대(BC 6세기)나 그 이후라고 상정되는 제사적 사료층의 기록자와 그 밖의 약산의 가필자들이라고 생각된다.

 

족장 설화는 19세기 말경까지는 후대의 창작의 반영이라고 했으며,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신화적인 인물로 쳤으며,

그리고 수수께끼에 싸인 부족의 조상이라고 여겨져 그 사실성이 부정되는 일이 많았다.
그 후 오리엔트 고고학의 진전에 따라, 특히 1925년 이후의 고고학적 제 발견에 의하여 그 내용이 일변하였다.

 

즉 족장 설화와 메소포타미아와의 지리적 역사적 관계가,

특히 족장 설화의 역사적 배경이 기원전 2천년대 초기에서 중엽에 걸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의 생활 관습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고

전승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사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장 설화는 출토된 여러 사료와의 관련으로 역사적인 테두리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족장들의 연대에 관해서 1950년 이후의 주요 견해들을 대별하면, 기원전 2천년대 전반기로 치는 설과 기원전 2천년대 중엽 이후의 아람인의 이주와 결부시키는 설로 나뉘고, 양자는 학계의 쟁점이 돼 있다.

 

전자는 <마리문서>나 <누즈문서>등을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전반의 어느ㄸ로 잡는가는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이와 반대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중엽이후로 주장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C.H.골든 등이 있다.
그는 <누즈문서>와 창세기에 전해지고 있는 족장시대의 관습이 평행되고 있는 예를 들어서, 그리고 <우가리트 문서>를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아마르나=미케나이시대로 잡는다.
골든의 견해에 관해서는 뒤에 소개하겠다.

 

 

10. <족장설화>에는 어떤 역사 배경이 있는가

 

족장 설화는 전승되는 소재들을 제공한 시댜와, 그것이 전승된 시대 및 그것들이 문장으로 기록되고 편찬된 시대를 포함한 이른바 세 가지 성격의 시대의 기록이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의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자체가 족장들의 생애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족장 설화들의 핵심에 이스라엘 민족의 여명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역사적 개요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부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유목민 집단이 남러시아의 습지대에서 파상적으로 남하하여 서아시아로 침입하고, 그 일족은 아나트리이와 고원지대 하티를 정복하여 힛타이트 왕국(BC 1700경-1200경)을 세 우고, 아시아의 원주민 속에서는 이란 서쪽 경계의 산간에 있던 카시드인이 바빌로니아를 검거하여 그 땅을 약500년간 지배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이북지방에 있던 원주민 후르리인은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인도.이란어파의 일부인 미탄니인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 미탄니 왕국(BC 15-14세기 중엽)을 세웠다.

 

미탄니인이 기마술이 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오리엔트의 대부분은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불안 동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불안 동요 가운데 소아시아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지방을 거쳐 시리아.팔레스타인지방에서 다시 남하해서 나일 강의 델타 지대까지 침입하여 그 땅의 아바리스를 근거지로 삼아 기원전 18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서 1세기 남짓한 사이에 이집트의 태반을 지배한 것이 <힉소스>라고 하는 혼송 민족 집단이었다.


힉소스의 민족 구성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고 아시아의 후르리인을 기간으로 하고 거기에 옛부터 고대 오리엔트지방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셈어족 등을 포함하는 혼성 민족군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후르리인과 셈어족이 기원전 17세기 전후의 오리엔트 세계에 있어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그 땅을 활동 범위로 했던 것이다.
그후 힉소스가 침입해서 1세기 후인 기원전 16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에서는 힉소스의 지배에 반항하는 이집트인의 세력이 발흥하고, 테베 출신의 아하메스가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뒤에는 북진하여 페니키아 연안까지 빼앗아 힉소스 세력을 완전히 타파했다.
이렇게 해서 아하메스 1세(BC 1567-47)는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제 18왕조(BC 1567-1320)의 기틀을 잡았다.
이 해로부터 이집트 역사 뿐아니라 오리엔트 전체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아시아의 분열된 여러 나라 사이에서 신왕국 시대로 들어가서 이른바 제국주의적 침략을 해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약 200년 간 여러 나라의 우의에 섰다. 이 사이에 시리아.팔레스타인지방은 이집트 신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 할례는 언제 왜 시작했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처음에 아브람이었으나,

후에 하나님 야훼는 아브람과의 계약을 맺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였다.
하나님과 노아와의 계약의 증표는 무지개였고 아브람과의 증표는 할례였다.

 

할례란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는 의식이며, 할례를 행하는 풍습은 옛부터 셈족이나 함족(이집트인) 사이에 보급되어 있었고

성인의 표시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대 이스라엘인은 여기에 전혀 새로운 의의를 발견했다.

 

남자가 출생하면 8일째 날에 할례를 베풀고 명명하는 관습이 그것이고, 지금도 이것은 엄수되고 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계약의 증표를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언어학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개명은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갱신을 뜻하고, 또한 인간의 생애의 중요한 계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명의 갱신도 뜻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1-4절에 기록돼있는 야훼가 아브람에게 내린 축복과 저주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말하는 족장 설화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175세의 천수를 누리고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손으로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아브라함 부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 교도의 마음 속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계속 살아있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사료 비판에 관계없이 창세기에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2. 왜,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떠났는가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셈으로부터 계산해서 10대째가 되며 데라의아들이고, 나홀과 하란의 두 동생이 있었다.

 

가나안 땅으로 이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으나,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의 도시 하란까지 가서 그곳에 주저앉게 되었다.

 

아버지 데라는 여기서 250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왕비라는 뜻)는 창세기 20장 12절(E사료층)에 의하면 아브람은 이복 누이동생이지만

그 출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창세기 11장 27-30절의 기록은 혈통이 가까운 부족 사이의 이합 집산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래의 이름은 아마 원래는 부족의 이름이었던 것 같으나 확증은 없다.
아내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과 재산과 물건들을 가지고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고 한다.

 

아브람 일족이 메소포타미아의 변경인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한 것은 그곳에서 안주할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얼마후 그들 일족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 야훼를 위해서 제단을 쌓지만,다시 남하하여 네게브 지방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지방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갔다.

 

아브람은 이집트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오.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당신의 남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고 당신만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 덕으로 죽음을 면하고 대접도 받을 것이오"(창세기 12장 11-13절).
과연 그들이 이집트로 들어가자 이집트인들은 사래의 미모에 매혹돼 버린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아내 하와를 빼놓고 사래는 세계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집트 왕의 신하들도 절세 미인 사래를 보고 매혹되어 그녀를 왕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그녀는 왕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사래가 왕궁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그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 일체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아내 사래는 무사히 남편 아브람에게 돌아왔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양 문명은 종래 주장된 것처럼 두개의 다른 문명이 아니라 동부 지중해라고 하는 공통된 지반에 세워진 유사한 구축물이라는 것을 원사료를 구사해서 강조하는 C.H.골든은 족장 설화와 우가리트의 <케레트 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일리앗>의 세가지가 모두 빼앗긴 아내를 다시 찾는 모티브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3.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 누이인가?

 

아브람은 이렇게 이집트 왕에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창세기 20장 1-18절(E사료층)과 26장 6-11절(J사료층)에도

나온다.
전자에서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으며,후자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마찬가지로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있다.


이 세가지 이야기는 아마 원래는 하나님의 사실이었는데 그것이 변형하여 현존하는 설화가 된 것인 듯하다.
1925년에서 31년에 걸쳐 언어학자인 동시에 고고학자로 유명한 E.키에라(1885-1933)가 지휘한 바그다드 아메리카, 오리엔트 연구소 및 하버드 대학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티그리스강 동부의 구릉지대의 고도 누즈(바그다드 북쪽 약 240km )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그 결과 그 땅에서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수천의 점토판 문서들이 출토되었다.


그후 이들 점토판 문서들의 해독과 연구에 의하여 족장 설화의 사회적 배경의 일단이 밝혀졌다. 이 문서들은 후르리인의 서기에 의하여 바빌로니아어로 쓰여진 것이며, 그중에는 본래의 후르리어도 자주 사용되어 있다.

 

문서들의 대부분은 기원전 15세기나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조금 뒤에 쓰여진 것이며, 후르리인의 법률 문서가 많이 들어있으며, 그 내용은 족장 설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누즈는 고앗카드시대에도 가슬이라고 해서 작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는 후르리인이 살았고 그 지방의 중심지였다.
후르리어는 카프카스어에 속하며 인종적으로는 아르메니노이드계라고 한다.

 

후르리인은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의 기록에 나오며,그리고 우르 제3왕조 시대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들은 기원전 3천년대 후반에 카프카스산맥의 남쪽,즉 아르메니아지방의 반 호수 부근에서 티그리스 강 동쪽으로 침입해서 점점 서쪽 시리아지방으로

이동하고, 다시 남하하여 가나안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기원전 2천년대를 통해서 셈어족과 함께 고대 오리엔트에서 가장 세력을 떨쳤다.
그들의 문화나 관습의 대부분은 아무르인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의 왕국을 세우지 않았으나 힉소스 이후 가나안에 새로운 문화 요소를 만들어내고 흑적 이색의 선상 문양으로 나타낸 물새나 태양의

장식이 있는 토기에 의하여 그들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는 <호리족>(창세기 14장 6절,기타)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탄니 왕국의 지배 아래 있던 후르리인의 법관습에 의하면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누이가 되어 이중의 연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이중의 연분에 의하여 아내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중의 연분은 혈연 관계가 있을 경우에 더욱 많았으며 좋은 집안의 여자라면 같은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아내가 좋은 집안의 여자이고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도 존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바그다드와 페르샤만 중간, 유프라테스강에서 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텔.엘=무카얄(역청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이 있다.
1854년에 J.E.테일러에 의하여 이 이름없는 황폐한 언덕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고향 칼디아 사람들의 우르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우르의 유적은 1918년에 C.톰슨이나 H.R.H.홀 등에 의하여 소규모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그후 1922년에서 34년 걸쳐 대영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의 공동 출자로 L.울리 경의 지휘 아래 발굴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성과가 많았다.

 

그 조사에 의하여 그곳이 슈메르의 도시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우르의 도시 영역은 길이 1.2킬로 미터,너비가 800미터나 되는 다수 불규칙한 타원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에는 방어 시설이 설치되고 드문드문 성문이 있었다.
우르에는 우바이드 기(B.C.4천년대)이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문화가 번창했던 흔적이 보인다.
채문 토기,원통 도장,진흙 토기(terracatta)등은 선사시대의 풍요했던 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후에 우르는 대홍수에 의하여 유실되어 버렸다.

 

이 대홍수는 두께가 2.4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덮여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홍수는 바빌로니아 평원 일대를 덮친 격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홍수 전설을 낳았고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설화는 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우르 제1왕조(BC 26세기)는 슈메르의 패권을 잡고 있었으며<우르 왕릉군>은 당시의 높은 물질 문화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같은 슈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슈에게 패배해서 당분간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다시 우르 제3왕조(BC 21세기)가 번영을 되찾아 전바빌로니아를 지배하여, 그 문화를 엘람,시리아에 전하고 모든 왕은 성문 법전<우로난므법전><슈메르 법>등)을 제정했다.

 

이어서 바벨로니아 전역은 바빌론 제1왕조(BC 19세기-16세기)아래 통일되는데 우르는 자주 슈메르인의 반란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후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우르는 재건되고 지그라드의 복구 공사등도 있었으나 페르샤 시대에 다시 쇠퇴하여 기원전 4세기 경에는 폐허가 되고 만다.
우르 제1왕조 및 제3왕조의 수도였던 우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르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한 神域과 이 신역을 포함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그리고 그 성벽 바깥 쪽에 펼쳐지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우바이드 기의 취락의 유적 위에 몇번이나 다시 세워진 작은 언덕 위의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그 운하에 따라 성벽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제방이 있다.
달의 신 난나르와 그 배우신 닌가르의 신전은 시가지보다도 한층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흙벽돌의 거대한 담에 싸여 있었다. 신역에는 몇군데의 신전이 있고 각 신전에는 관청과 창고가 붙어있었다.
신전과 지그라드가 우르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우르의 도시지역 중앙 북쪽에는 신역이 있었다.
1927년에 우르 제1왕조나 제 2왕조 시대라고 추정되는 <우르의 왕묘군>이 발굴된 것은 신역의 동남쪽이다.
메스.카람.두그의 왕묘에서 황금제 그릇,투그,촛대,은제 띠,단검 등 막대한 부와 정교와 기술을 말해주는 많은 유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바르.기 왕의 고분 현낸 문서를 근거로 창세기 23장34장 10,21절,42장 34절,이사야서 23장 8절 등을 비교 논증하고 있다.

아래에 그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


아브라함도 하타이트 왕의 비호 아래<우가르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에서 가나안으로 온 호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23장 6절의 <영감님>을 70인역이 <왕>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고,이것을 프토레마이오스 시대<왕>이 아니라 호메로스에 나오는 의미의 <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그것은 즉동부 지중해적인 의미의 <왕>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위에서 말한 창세기의 제 기록이나 아마르나 = 미케네 시대의 국제 환경을 더듬어 아브라함이 상업 활동을 했던 것을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우르 중에서 갈디아인의 우르라는 지명이 오직 한 군데 뿐이라고 할 수는 없고,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인 우르는 갈디아의 우르가 아니라

<우가리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라고 하며, 그곳을 하란 근처에서 찾는다.
이상의 여러 점에서, 왕들의 서사시로서의 족장 설화는 틀림없이 왕실을 찬양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돼 온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즉 갈디아인의 우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우르가 아니고, 크세노판이 언급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의 이웃이라고 하는 북방 갈디안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사야서 23장 13절의 갈디아인의 나라는 바빌로니아의 남부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북방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며,Hald는 아르메니아/우랄어 것 같지 않다.

 

 

16. 갈디아인의 우르는 어디인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다 자리잡고 살았다(창세기 11장 31절).
갈디아인의 우르는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도시,현재의 이라크의 나사리아 근처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전승은 우르의 도시보다도 오히려 하란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결부되어 있다.

 

현재의 시리아 국경에 가까운 터키 령,유프라테스강의 지류 베리크 강변에 <하란>이라고 하는 아랍인 한촌이 있다.

 

그 근처는 예전에 바빌로니아-소아시아-이집트를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통상의 중심지였다.

 

이 하란과 창세기의 전승과의 연결은 아브라함의 조상의 이름이나 형제의 이름과 하란 근처의 도시들의 이름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구약성서의 족장들과 기원전 2천년대의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있던 도시들과의 관계를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C.H.골든은 하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슈에서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번영했던 우가리트에 보실 근처와 선도(義道)에서 59명의 정장한 순장자의 유해가 발견되고, 두 대의 손수레와 그것을 끄는 소와 은제의 배 모형도 발견 되었다.


슈브.아드 왕비의 고분에서는 수금과 황금이나 청석금등을 사용해서 만든 머리 장식품이나 목걸이 등이 나왔다. 수금은 각각 숫소와 암소와 숫사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L.울리경은 이것은 각각 베이스,테너,앨토의 표시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왕묘에서는 노는 방법은 모르지만 조개껍질을 상감한 게임 판이나 <우르의 군기>라고 불리는 조개껍질을 상감한 군기 등이 출토되었다.
<우르의 군기>는 각각 출정과 개선의 그림으로 나뉘어 있으며, 예술 작품으로서도 훌륭하며 역사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고,당시의 전투 광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것이다.


우르의 왕묘군-대지하 고분군-의 발견은 종래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확실한 비문이 없기 때문에 왕묘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풍년제>에서 사랑의 여신 이슈달과 곡물의 신 다므즈의 역할을 하는 제관의 분묘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나일강 유역에서 온 망명자의 분묘라고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왕묘는 지하 깊숙히 만들어졌고 발굴 조사를 하려면 지하수가 넘쳐서 곤란하다.

 

1천년 이상이나 지난 고대 은나라 왕묘와 흡사한 <우르의 왕묘군>에 이어지는 발견은 앞으로 다시 있을 것의 옛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갈디아인의 우르는 골든 경의 말처럼, 과연 <우라>일까. 앞날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17 .악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소돔<둘러싸인 곳>이라는 뜻과 고모라<깊다><물이 많다>는 뜻의 도시들은 아라바의 저지 습윤한 땅에 있던 가나안인의 다섯 도시 중에 들며,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 롯은 백부 아브라함과 헤어져 비옥한 요르단의 저지 소듬으로 옮겨 살았다.
소돔과 소모라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의 내습을 받고, 소돔의 왕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다행히 난을 면했다(14장2-22절).

 

그후 이 도시의 악덕이 심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 불 비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롯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천사의 경고에 따라 소돔에서 도피했으나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어겨서 뒤돌아 봤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은 두 딸과 함께 요르단 동쪽의 산지로 피해서 동굴 속에 살았다고 한다.
사해 서남 연안의 이 이른바 소돔 가까이에서는 1952년에 칼리(Kali)공장이 세워지고 1955년에는 질소공장이 신설되어 사해 개발을 위해서 조업하고

있다. 1957년에는 광대한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과거 큰 지진에의하여 땅이 내려앉고 천연가스와 석유가 폭발했기 때문에 도시들이 화염에 싸여 사해의 수중에 침몰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해 남부 수중 수심 1.8미터 정도의 얕은 부분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장소라고 한다.


오늘날 사해의 남단에 가까운 서안 지역 남북 10킬로미터,폭 2.4-5킬로미터,높이 216미터의 암염 산이 있다.이곳은 아라비아어로 제벨.우스돔(소돔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둥근 봉우리들로 돼 있다.

 

그 근처의 도로흙은 염분이 말라 백색으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슭에는 풍화 작용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이상하게 생긴 암염기둥이 여러개 서 있다.

 

제벨,우스돔의 북쪽 기슭 한 모퉁이에 있는 사람 형상의 암염 기둥이 <롯의 아내의 소금기둥>이라고 한다.

 

이 기암이 뒤를 돌아다 보는 부인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리라.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는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누가복음 17장 32절). 영어의 소도미 (sodomy,異色)는 악덕의 도시 소돔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돔은 죄악과 악덕의 형용사가 되어 부패한 지도자는 <소돔의 백성>(이사야서 1장 10절),<소돔과 포도나무> (신명기 32장 32절)등으로 불리고,

또한 예루살렘의 죄악이 심함을 <소돔의 죄> (에스겔서 16장 49절)라고 표현했다.
성서를 통해서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죄악과 하나님의 형벌의 귀감으로 인용되고 있다.

 

 

18.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는가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과연 실재했을까
1976년 11월 1일 <요미우리 신문> 석간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 쎈트루이스에서 10월 29일 개최된 세계 종교학회연차 회의의 강연에서 로마대학의 죠반니 페티나드 교수(고고학)가

<시리아의 고대 유적에서 출토한 셈어로 기록된 점토판 중에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고 발표하여 관계자를 흥분시키고 있다고 한다.

 

단 한장의 점토판이기는 하지만 이 보고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구약성서 이외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보고자 페티나드 교수는 이미 10년 이상이나 시리아 북서부 텔.마르디크 지역에서 고대 에블라 왕국의 유적의 발굴 조사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에블라 왕국이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4월 1일자<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조간은 로마대학의 파테오.마티에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대가 12년전부터 발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동 조사대가 도시 에블라에서 약 1만5천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문서를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7월 2일자<아사이 져널 특집 고대의 부르는 소리>(제18권 26호)에는 스기이사무씨가 <모습을 드러낸 에브라 왕국 - 기원전 20세기의 도시국가)라는 귀중한 논문을 보냈다. 이하 이에 근거해서 <에블라왕국>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에블라 Ebla는 이블라 Ibla라고도 표기하며 셈어로 <목장>이라는뜻이다.

 

이것은 이 지방의 주민이 유목민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적은 지금의 알레포의 남남서 70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거의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 라타키아(고대 우가리트는 이곳 북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와 알레포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으며 알레포 남쪽에 있는 하마와 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텔이라는 것은 시리아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 도시의 폐허를 가리키며,이곳의 윤곽은 거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아크로폴리스를 이루고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어 있다.


이 유적은 몇개의 층으로 나뉘고 가장 오랜 층은 대략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경까지의 것으로 추정되고,이것을 제1기라고 한다.
제2기는 대략 기원전 2300년에서 2000년 내지 1900년경,제3기는 대략 기원전 1900년에서 1700년경의 것이다.
이 중에서 왕궁이나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고 제3기의 신전은 특히 중요시 되고 있다.
처음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제3기의 신전 발굴 등에 주력했다고 한다.

 

제3기가 되자 에블라는 타민족의 내습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단히 견교한 성벽을 쌓게 되었는데 그 성벽도 발견되었다.
1만 5천장에 달하는 점토판 문서는 이 제3기의 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궁정 도서관에 붙은 두개의 작은 방에서 점토판이 나왔고, 이 도시는 앗카드의 나람신 왕(BC 24세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약탈되고 소각당했으나 폐허 밑에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에블라의 국명은 이미 기원전 24세기로 소급되는 아카드 왕조의 조상 사르곤 왕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나라의 존재 자체는 여러 비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블라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쐐기꼴 글자는 유프라테스강 중류 오른쪽 강안의 폐허 텔.하리리에서 출토된 <마리문서>(BC 18세기)의 예로 보아서

아마도 마리의 말과 같은 아무르(구약성서의 아모리)어 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함무라비 왕조시대(BC 18세기)의 말과 같은 서북 셈어족의 말이다.

 

따라서 <에블라 문서>는 <마리 문서>보다 오래된 것이 된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라는 연대와 북시리아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생각해보면

<우가리트 문서>의 경우처럼 1만 5천 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중에는 북서 셈어족 이외의 셈어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19.고대 이스라엘인은 어떤 신을 섬겼는가

 

전승에 의하면, 족장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왔다.

 

족장들의 지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전승(창세기 12-25장)은 헤브론, 이삭 전승(25-26장)은 브엘세바,야곱 전승(25-26장)은 베델,세겜,드단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주요 무대가 중부 팔레스티나의 일정한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각지에는 어디나 옛부터 가나안의 성소가 있고 각 족장은 이 땅에 제단을 쌓았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기록은 족장들의 각 전승이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연결되어 생성,형성,전개된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각 족장의 전승은 원래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전승의 재료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의히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대를 거쳐서 만들어지고 편찬되어 현재의 문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 전승과 관계가 있는 무대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어느 것이나 중기 청동기시대의 중부 팔레스티나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창세기의 전승에 의하면,족장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7장 1절28장 3절,35장 11절,43장 14절,48장 3절,출애굽기 6장 3절,에스겔서 11장 5절),엘.요르욘(높으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4장 18절-24절),엘오람<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21장 33절),엘.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뜻),창세기 16장 13절),엘.베델(베델의 하나님의 뜻).창세기 31장 13절35장7절),엘.베르테(계약의 하나님)의 뜻.(판관기 9장46절)등이 그것이다.


이 하나님의 호칭의 공통되고 있는 <엘>에라는 어간은 원래 셈어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였다.
한편 엘은 가나안의 만신전(Pantheon)의 주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가리트 문서>의 발견 해독 연구(50항 참조)에 의하여 엘은 또한 가나안 종교의 특정한 신격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엘은 여신 아슈라와의 거룩한 결혼으로 얌,모토 등의 신들을 낳았다.

 

엘은 조물주,왕,신들과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백발의 노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엘은 폭풍의 신 바알에 의하여 가나안의 만신전의 왕좌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이것은 엘을 주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이미 가나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각 엘은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결부되어 있다.

 

그들의 신들은 생성 번식을 기원하는 자연신이고 지연신이었다.
비옥한 땅 가나안의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족장들이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도이치의 위대한 구약학자 A.알트(1883-1956)가 말하는 <족장의 신>이라는 신의 타입을 남긴 것이었다.


알트는 족장 전승이나 기타 구약성서의 전승에서 볼 수 있는 신의 호칭, 즉<아브라함의 하나님>(창세기 28장 13절31장 42,53절),<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삭을 돌보시던 두려운 하나님>(창세기 31장 42.53절)<야곱의 하나님>(창세기 49장 24절)등의 호칭에 족장시대부터 전해진 옛신의 호칭을 보고,이 신의 이름을 짓는 방법에 족장 종교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의 이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신은 신의 현현을 체험한 족장의 이름과 결부시켜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엘이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신은 족장 개인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자는 산, 강,나무,돌 등의 일정한 땅과 결부되는 <토지신>이고,후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특정 인물과 결부되는 <인격신>이다. 이 인격신이야말로 후대에 전해진 역사적 신이다.


이렇게 신이 일정한 토지와 결부되는 토착신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에게 현현하는 특징이 바로 족장들의 종교와 모세의 종교와를 연결시키는 이스라엘 종교의 큰 특징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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