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에 대하여

 

1. 주일과 안식일은 같은 말인가요?

 

성경에서 안식이라고 하는 요일은 정확히는 토요일오후부터 일요일오전의 시간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일곱째날을 기념하여 그날을 안식일이라 정하고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 안식하신 안식일 다음날을 기념하여 그날을 주일이라 정하고 예배하였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분명히 요일의 순서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과 의의면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구원(재창조)라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가 됨을 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안식일이라는 용어는 주일로 지금의 일요일로 부르고 구약의 안식일의 예배의 중요성을 그대로 신약의 주일의 예배에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던 청교들에 먼저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주일에 대한 의미해석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도신경은 무엇인가요?

 

사도신경이라 말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신경으로, 신앙의 기본적인 원리를 고백의 내용으로 담아낸 것을 말합니다. 본래의 용도는 세례를 받으려는 이들의 신앙고백을 확인하여 주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지나온 교회역사 중에 내용과 구성에 있어 지금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에 대하여 명확히 밝혀줍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예배의 전반부에 사도신경을 고백함을 통해, “우리가 믿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의 내용임을 공언하는 예배의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주기도문은 무엇인가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기도의 모델이 주기도문입니다(마6:9-13). 기독교 역사안에서 이 주기도문의 용례를 쉬이 찾아볼 수있는데, 주기도문의 내용을 그대로 낭송하였던 초대교회에서부터, 주기도문에 곡을 담아 찬양함으로 기도문을 고백하는 오늘날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모든 교회가 따라야할 기도의 모본으로 자리해왔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시며,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여 줌을 통해 신자의 마음을 겸비시켜 준다.

 

4.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왜 중요한가요?

 

성경의 예언대로, 시대가 종말로 가까와 질 수록 거짓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많아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시대가 지나갈수록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신적이며 혹세무민하는 말도 안되는 가르침에 속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재정의 원리에서 처럼, 믿고 있는 내용에 대한 재확인은 물론 그 외에 다른 가르침으로 미혹하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신앙의 고백은, 이 시대에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본래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신앙에 유익할 것입니다.

 

5. 새벽기도회가 굳이 필요한가요?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사의 초기의 인물인 길선주 목사의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의 시기에 시작된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를 세계에서 주목받게 하기에 충분한 특성이 되었습니다. 외국의 경우 새벽기도회 같은 예배를 드리기보다 Morning Devotion이라 우리에게 익숙한 큐티와 같은 개인경건의 시간을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라하신 성경의 말씀(행2:46)에 근거하여 회중의 모임으로 예배와 같이 새벽에 기도함이 주는 영적이고 육적인 유익은,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한국교회를 부흥시키시고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성도를 성장시키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하여 끊임없는 감사와 순종을 드리게 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6. 기도가 알고 싶은데요?

 

기도라 하면 때로 지나치게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우리가 하기에 힘든 것으로 생각하는데, 영적인 것은 맞지만 하기힘든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우리의 필요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왜 하여야하냐면, 하나님을 성도에게 기도하는 것을 명령으로 주시면서 반드시 지키도록 하셨고(마7:7-8), 이뿐아니라, 영적인 신자의 삶에서 시험에 들지않고 사탄의 방해를 이길 힘을 기도함을 통해 얻게 됩니다(엡6:12). 물론, 어느 정도의 신앙생활과 어느 정도의 기도생활을 하고나면, 그제야 기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되어, 기도훈련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초보의 수준을 벗어난 신자라면 기도를 이제 배우게 되는데, 먼저는 기도함을 통해 기도를 배우고, 다음으로, 말씀을 묵상함을 통해서 배우고, 다음으로 다른 이들과의 합심기도함을 통하여 기도를 깊이있게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이수했다하여 기도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본래의 목적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위한 준비가 되는 유익을 가지게 될 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기도의 훈련은, 기도를 통해 구하는 자신의 앞선 간구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최종의 인도와 뜻이 이뤄지게 될 겁니다.

 

7. 기도에서 아멘은 뭔가요?

 

아멘은 문자적 의미는 ‘진실로 그릴 될 것을 믿습니다’입니다. 따라서 앞선 명제에 대하여 동의함을 구두의 대답으로 하는 것이라 보면됩니다. 대표기도자의 기도에 대하여 자신와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제목을 담아 기도할 때 아멘함으로 그리될 것을 받아들입니다. 기도할때뿐 아니라 성경말씀과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맘깊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내용에 아멘함으로 동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지나치게 크게 아멘하거나 너무나 기계적인 반응으로 아멘하는 것은 함께 하는 예배의 분위기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므로 삼가해야 합니다.

 

8.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서야할 인간을 대신하여 서주신다면 얘기를 달라집니다. 마치 세상의 법정에 자신을 변호할 힘이 없는 피고를 대신하여 유능한 변호사가 대신하여 변호를 진행하듯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헤아리시는 예수님이 인간이셨기에 인간을 가장 잘 헤아리셔서 변호하여주신다면 우리의 심사와 처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한 비유뿐 아니라, 일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같이 예배에 나가는 자들을 대표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나아가 아뢰는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더욱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9. 예언기도는 가능한가요?

 

예언나 예언기도를 동일한 맥락에서 보는 있는데, 본래 예언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예언기도라 함도 장래의 일을 기도중에 알아 말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언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그의 백성에게 알려주시고, 그 알려주신 뜻을 반드시 장래에 이루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자의 이해의 차원에 머무는 사람들은 이런 장래를 말한다는 신비적인 경험을 동경하여 예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이는 일반 점치는 점술가들을 찾아가 점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요. 후자의 이해의 차원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린다는 본래 의미인 계시를 듣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깊이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우로 인해 듣고자 하는 예언기도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언기도가 더욱 건전하고 바르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10. 방언기도는 대체 뭔가요?

 

한국어에서 ‘방언’의 의미는 지역의 사투리를 의미하지만, 성경에서의 말하는 방언은 지역의 사투리(고전14장)은 물론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주님 나라의 말(행2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방언에 대하여 논쟁이 많은 것은 이상의 두번째에 해당하는 방언의 의미때문입니다. 신학자들간의 분분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실재 교회의 현장에서는 주님나라의 방언을 시행하고 또는 권장하기도 합니다. 실재로 이러한 문제는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왔습니다. 성경은 개인적으로 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하는 것을 권장하나,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공적인 자리에서 삼가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방언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건전한 이해의 정리라고 봅니다.

 

11. 금식기도은 어떤 때 하나요?

 

금식기도는 기도하면서 기도의 심각성과 진정성을 증대하기 위해 육신에는 곡기를 금하고 마음에는 하나님만을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금식의 두가지 가른 종류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금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음식에 대한 유혹으로 잘 참아내고 있음을 드러내어 금식하는 자신을 노골적인 뿐 아니라 은연중에라도 높이는 금식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금식이고, 금식을 시작하면서 부터 하나님의 뜻을 정말 바로 알고자 하여 금식하고 금식의 과정은 자신을 가려지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금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로 멀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친밀히 경험하고 싶다면 금식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정한 일시의 시간을 꼽아가며, 너무 배고파 자정이 되기를 눈빠지게 기다리며 하는 금식이라면 오히려 하지마시고 육체를 강건케 한 후 더욱 전력하여 기도하는 편이 낫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12. 성경의 장 절을 본래 없었다도 들었어요. 어떻게?

 

성경은 본래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을 찾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해, 1227년 켄터베리의 추기경이었던 스테판 랭턴이 먼저 장을 구분하였고, 1555년 프랑스 파리의 로버트 스테파네스가 절을 구분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단락이 구분되어있는데 이것은 사건의 한 단락을 구분하여 전체의 내용을 용이하게 보게 하여주기에 정말 유익합니다.

 

13. 한글성경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1832년에 귀츨라프 선교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던 성경은, 1882년 말에 최초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가 서상륜, 이응찬, 백흥준의 도움을 받아 우리말로의 번역과 제작이 시도되었다. 이때 번역된 성경은 누가복음이었습니다. 1884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수정이 미국성서공회가 번역 제작한 한문성경을 가지고 마가복음을 번역했습니다. 1887년에는 존 로스의 번역 작업에 매킨타이어의 협력이 가세되어 신약성경을 완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질 만큼 유명한 “예수성교전서”입니다. 구약성경은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된 후에 1911년에 완역되었습니다. 1936년에 구약성경이 개정되었고, 1938년에 신약성경이 개정되었고, 1956년에 개역성경이 발간되었고, 1998년에 개역개정판이 발간되었습니다.

 

14.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사이의 긴 공백기에 대해 궁금합니다.

 

약 400년간의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시기로,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용어로, ‘중간기’라 하여 많은 연구가 되어왔습니다. 실재의 역사적 년도는 BC 400년에서 BC4년까지의 시기도 보고있으며, 성경에서 이 시대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찾을 길이 없으나, 당대를 증거하는 역사적 자료와 이 시대 이후 기록된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시대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 중간기에 대한 상황의 정리가 가능합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패권을 각각 페르시아와 그리스와 로마제국을 순서대로 가졌었습니다. 마지막 로마제국 이전에, 오랜 제국통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유대민족의 독립왕조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다지 길게 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유대민족에서 일반적으로 각인된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 기대도, 당대에 민족주의적 열의에 투철하였던 열심당원의 등장도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찰이외에도, 하나님은 이 시대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자로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하셨고 이를 실질적인 준비로 산개된 유대민족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세상 중에 편만하게 하시는 작업을 손수 하셨습니다.

 

15. 성경의 내용이 뭐길래 반드시 읽으라는 겁니까?

 

성경은 신자의 삶과 신앙의 유일한 표준이고 절대필요한 양식입니다. 이런 성경은 담고 있는 것는 크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게 하는 약인 구약과, 하나님의 성취된 약속을 믿게하는 약인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좀더 상술하면,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을 상세히 기록함을 통해 실재로 오실 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수도 없이 반복하고 하는 반면, 신약은 기다리던 구원자가 오셨으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고, 죄와 불순중에 대한 심판을 목격하며, 믿음과 순종에 대한 복을 권면받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고, 다가올 주님나라를 대망하게 됩니다. 결국 성경이 없이는 신자가 없습니다. 성경이 없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수 없기 때문이죠.

 

16. 성경에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건이 많은데 어떻게 봐야하죠?

 

동일하고 유사한 사건들-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애굽피신과 이삭의 애굽피신, 한 여인의 향유사건과 마리아의 향유사건과 같은-을 보면서, 일반의 학자들은 여러학설을 내놓습니다. 다른 여러 문서을 종합하여 한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동일사건을 두번 넣게 되었다느니,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두번 반복하여 기술하는 문학적 표현방식이므로 원래를 하나의 사건으로 봐야하느니 등등 여러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을 분명히 독립된 별개의 사건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의 계명과 모압산에서의 계명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시간적인 차이뿐 아니라 제4계명의 안식에 대한 강조점이 시내산 계명이 하나님의 창조후의 안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모압산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을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임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시면 이에 충분히 동의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17. 동일한 한 사건을 다르게 설명하는 복음서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나요?

 

한 차량 접촉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합시다. 정면에서 그 사건을 목격한 이와 측면에서 목격한 이와 후면에서 목격한 이가 바라보는 차량의 접촉 각도가 다를 겁니다. 게다가 이들이 설명하는 사건에 대한 설명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러나 많으면 많을수록 그 다양한 모든 내용을 반영하여 내려지는 결론은 더욱 신뢰할 만하여집니다. 서론이 길었나요?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지만, 자신의 처한 입장과 고려할 입장은 그 기술된 사건의 내용에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오병이어의 사건은 유사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메시야의 힘을 드러내는데 주목하는 마태와 마가가 있다면, 무리를 염려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세상의 구원자를 강조하는 누가와 요한도 있기에 이 모두를 통해 우리를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차이에 대한 고려는 보다 공간적으로 입체적인 사건의 대한 이해를 돕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다른 복음서들의 존재는 유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 너무 뻔하지만 궁금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아담이 죄를 짓게 했나요?

 

선악과를 안 만들었으면 죄도 짓지 않았을 것을, 왜 만들어 죄를 짓게 하였는가 묻는 이들은 생각의 출발점은 대개가 은연중에라도 하나님을 자신의 수준에서 생각한다는 겁니다. 좀 생각해볼 말이지만, 선악과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하여 자신의 불편한 심사-왜 만들었을까-를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인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을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취하게 하였고 죄를 범하게 하였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선악과를 취할 수도 안 취할 수도 있는 결정을 아담(흙으로 지음받은 인류의 대표)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때문이었습니다. 이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등한 수준임을 결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편에서의 극진한 배려를 의미합니다. 그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는 결정을 택하였습니다. 아담의 이 결정은 바로 우리 모두의 결정었음을 결정일 것임을 우리는 본성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결정에 보이신 하나님의 반응은 내치시거나 버리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다른 길을 제시하심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결정으로 한 엄청난 죄의 대가를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하신 예수님을 대속의 희생제물로 삼아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적으로 의지없이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만나시고 교제하시려고 자유한 의지를 갖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뜻합니다.

 

 

교회생활에 대하여

 

19. 목회자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봐야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일차적으로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차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주의 종을 통하여 전하여 지는 말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의 공식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길”, “하나님께 내 입에 말씀을 두시어”등과 같았습니다. 이는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않는다는 의미한다는 점과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그 내용이 바로 하나님을 말씀하시고자하는 바임을 말하였습니다. 바로 선포되어진 선지자의 구두를 통하여 전하여진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여 전하여 주는 목회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문제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풀어주는 과정에서 목회자가 본인의 숨은 의도나 이익을 목적하여 설교를 한다면,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말씀선포 공식에 벗어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의 말씀에 대한 인정과 순종을 가지려는 노력과 버금가게 목회자의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와 성경의 핵심 내용인 복음에서 벗어나 전하는 말씀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으려는 비판적고 분석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20. 교회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 거듭남을 좀 설명해주세요?

 

거듭남은 쉽게 말해 다시 태어남을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와 전가된 죄로 이미 본성적으로 죄인이 우리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게 되는 순간, 이전의 속된 자아를 죽고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한 새로운 자아가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의 디고데모의 고민도 바로 이 거듭남에 대한 것이었을만큼, 정말 거듭난다고 하는 의미는 실재로 단어를 정의하는 차원을 넘어 반드시 경헝되어져 인지되어야 비로서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라는 말은 도대체 뭔가요?

 

성령충만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충만한 상태가 신자의 전인(마음과 몸을 모두 포함하는)에 드러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이 충만하면 그의 생각과 행위가 성령의 인도하는대로 되어집니다. 이런 성령충만의 상태적인 뉘앙스은 성령세례의 시간흐름안의 위치한 공간적인 뉘앙스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때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구분함이 필요합니다. 성령세례는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하게 될 때,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으로 이를 마치 세례를 줌과 같다 하여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어느교단에서는 반드시 성령세례의 경험을 신자된 이후에 해야 한다고도, 성령세례시에 반드시 방언이라고 하는 영적은사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실재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는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진정으로 영접한 순간에 성령세례를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옳지않지요.

 

22. 찬송가는 뭐고 복음성가는 뭐고, CCM은 뭔가요?

 

구약의 시편이 바로 찬송시입니다. 이 찬송시를 곡조에 담아 찬양하는 것이 찬송가이고요. 그래서 교회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미 초대교회때부터 성경의 시편을 담은 찬송가로 때로는 악기없이 때로는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해왔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찬송가라 함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과 삼위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을 담은 내용을 가사로 하는 곡을 말함은 물론, 예배와 예배자의 경건에 집중하도록 악기도 반주하며 다함께 소리내어 합창하는 곡을 말한다. 대체적으로 북미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한 한국교회는 미국찬송가를 많이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찬송가와 달리 찬양의 대상인 하나님을 높이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개인적 경험을 간증하는 가사를 가진 곡들을 복음성가라 하는데, 어려운 복음의 직접적인 내용을 주관적이기는 하나 경험한 확실한 복음의 은혜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전하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합니다. 때로, 너무 주관적이고 신세한탄적인 고백이 될 수 있다는 우려만 주의한다면 개인의 신앙과 공공의 예배에 유익합니다.

 

이 복음성가가 이 시대에 좀더 진보적으로 시대의 옷을 입은 것을 CCM이라고 하는데, 가사의 내용은 기독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곡은 일반의 음악의 장르에서 당대에 유행하는 대중음악의 경향을 담아 신세대 신자와 불신자에게 다가서려 하는 음악이 바로 이 CCM입니다. 현재 헤비메탈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록의 형식으로 복음의 내용을 가사에 담는 트렌드가 많은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분석하는데, 이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은 아직 조심스러운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23. 십일조가 뭡니까?

 

얻은 재물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바로 십입조입니다. 십일조의 유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일을 주었다는 데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하나님의 성전에 수종드느라 지분이 없던 레위지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법으로 정하여 수확의10분의 1을 제사장과 레위지파에게 주도록 명하신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형식적인 십일조를 드리는 이스라엘을 백성에게 십일조의 본질적의 의미를 회복하도록 혼내실 만큼 십입조를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대단한 중요한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십입조의 원래의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중 일분인 10분의1을 드려 나머지도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십입조에 대하여 아까와하거나 드리기를 꺼려하는 것은, 자신의 소산은 오직 자신의 수고에 의한 것이기에, 십일조는 교회에 내는 것은, 자신의 수고한 중에 조금을 하나님께 적선하여, 하나님의 일에 조금이나 도움을 주는 자신의 명망을 쌓는 행위로 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시는 것은 진정한 마음입니다.

 

24. 꼭 교회에 가야하나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교회가 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할 네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말씀의 선포와 구제를 포함한 봉사와 성도간의 교제와 복음전파하는 전도를 의미하는 선교입니다. 말씀의 선포라 함은 예배 중에 선포되어지는 주의 종을 통한 설교를 말합니다. 요즘같은 인터넷과 디지털방송의 시대에는 다양한 설교를 개인의 방안에서 시청하며 접할 수 있습니다. 대게의 경우 교회에 가기를 꺼리는 이들은 말씀의 선포만으로도 교회를 교회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모여 성도간의 교제함을 통해 자신을 교회의 지체로 여기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삼가하고 다른 지체를 존대하는 훈련을 없다면 교회를 교회일 수 없습니다.영적 지도자의 인도에 간섭을 받고 통제되기를 꺼려하는 맘도 실재로 교회에 나가는 것을 꺼리게 합니다. 때문에,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고집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이 시대에 더 많이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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