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이다.

우리의 삶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의해 인함을 받도록 길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가!

안으로 향하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는 위로 향하는 기도가 오히려 우리를 짓누르고, 또 밖으로 향하는 사역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떤 제자가 아바 요셉(Abba Joseph)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가능한 한 계율도 지키고, 금식도 하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데 까지 마음속에서 모든 악한 생각을 제하고 모든 나쁜 의도들도 없애버리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러자 아바 요셉은 일어서서 두 손을 하늘로 향하여 뻗었다. 그의 손가락은 마치 열 개의 등불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자신을 불 속에 넣어 완전히 변화 받지 않는가?” 

 

단순한 기도

 

“할 수 없을 만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기도하라” (Dom Chapman).

 

우리는 오늘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기도를 회피한다. 기도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싫어한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 것이고 또 하고 싶기도 하지만, 뭔지 모르게 우리와 실제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고통을 체험한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을 살펴봐야 한다. 그것은 현대의 고학력자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것으로서 기도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실제로 기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삶이 멋지게 조율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기도에 따르는 철학적인 문제들을 연구해야 하고 기도의 위대한 전승을 더 잘 이해하는 등 선행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거나 또 그런 문제들을 다룰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이다. 마치 마차를 말 앞에 매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대수학이나 자동차 공학처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우리는 ‘높은’ 위치에 앉아서 껏을 능숙하게 다루겠지만, 막상 기도를 하게 디면 오히려 우리는 ‘낮아지고’ 통제권을 조용히 넘겨주고 무능한 자처럼 된다. 에밀리 그리핀(Emilie Griffin)이라는 사람은 “기도하는 것은 기꺼이 소박해지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진실로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내 기도의 동기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나는 그룹 기도를 할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기도했던 내용들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나의 기도가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중심적인지 깨달았고, 더 이상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기도의 동기가 순수해질 때까지 절대로 기도하지 아노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위선자가 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내적인 영혼의 추구가 실제로는 나의기도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제의 진실은, 우리 모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타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며,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며, 사랑스럽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복잡 미묘한 동기로 우리는 기도한다.

 

솔직히 말해서, 영원의 이편에서는 선과 알을 절대로 구분하지 못하며 순수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을 나누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명하거나 순수하거나 믿음이 충만하거나 어떤 것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개념이다. 우는 은헤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또한 은혜로 기도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신 것은 기도는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오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의 자녀들이 맹렬한 요구를 우리에게 나아오는 경우가 있다. 종종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이기적이거나 지속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가 어찌되었건 그들이 우리에게 나아온다는 그 자체가 단순히 기쁜 것이다.

 

기도의 문제도 그러하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히 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제쳐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실제로 기도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소에서 이 문제들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있는 그대로 기도하라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며 또 우리의 기도를 있는 그대로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나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나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초보적인 기도의 형태인 단순한 기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이다.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서 있는 아이들처럼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요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좋고 나쁜 것을 가려내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나누고 간청할 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장 동료나 이웃 사람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는 좋은 날씨나 먹을 양식과 건강 따위를 달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필요의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한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자만, 허영, 가식, 거만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아량, 관대함,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다.

 

우리는 수많은 실수도 저지른다. 그리고 범죄 한다. 종종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서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기도한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쓴다. 그런대 우리는 다시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사실 ‘단순한 기도’ 는 때때로 ‘다시 시작하는 기도’라고 불린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가장 흔한 기도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옛날 목이 곧은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모세를 생각해 보라.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이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 기사 나로 그 집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 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민11:11-12).

 

또 ㅜ자기를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에 대하여 앙갚음을 한 엘리사를 생각해보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왕하2:24). 시편 기자는 대적들의 아이들이 끔찍하게 죽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네 어리 것 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 하리 로다”(시137:9).

 

반면 이러한 자기중심적 기도 한복판에는 그 사람들의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기도의 내용들도 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조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세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합의 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ㅣ32).

 

또한 자기를 놀리던 아이들을 저주해서 죽게 했던 엘리사가 하루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넴 여인을 만나 그에게 자비를 베풀며 예언한 것을 생각해 보라.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4:16). 또 앞서 언급한 그 시편 기자가 여호와께 마음으로 부르짖어 이르기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라.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 있다. 단순한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아뢰는 것이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없다.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스러운 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한 자세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는다(요일3:20).

 

단순한 기도는 초보적인 기도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기도이지만 계속해서 우리는 기도를 드린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한 기도이다. 존 달림플(John Dalrymple)의 지적은 옳은 말이다. “우리는 이런 기도 이상은 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필요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특히 ‘현학적인’ 사람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애쓴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단순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는 논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진심으로 기도 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기도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때이다. 기도의 진기한 경험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한 기도’를 설명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서론적인 사실 외에 이론을 뛰어넘어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단순한 기도를 실제로 어떻게 드릴 것인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면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가볍게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알아 가는 데 있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로 들어오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런 기도를 멸시하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없다” 고 우리는 신음한다. “내가 졸업하면..” “내가 부서의 장이되면...” “내가 회사 사장이 되면...” 또 “내가 담임목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이라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불 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어라고 말씀하셔야 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직장이던 가정이든 동료 친구 가족 그 누구와 함께 있든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밤잠을 못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실망을 이뢸 수 있다. “왜 접니까? 왜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길을 잃고 하나님께 자유로이 불평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외치기도 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 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 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 하나이다”(렘20:7). 이 장면에서 나는 예레미야가 하늘을 향하여 주먹을 흔들며 기도하는 모습을 가끔씩 상상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분노와 좌절과 실망까지도 완전하게 처리하실 수 있다. C. S. 루이스는 말하기를.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라고 했다.

 

우리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속임수를 믿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기도가 숭고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활동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의 체험들이 올바른 기도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고 쉽게 단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영성이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위를 다니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한시도 벗어남이 없이 살아가셨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일상적인 생활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올바른’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라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고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라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올 때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도를 빼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단순한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제언

 

기도에의 경이로운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먼저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첫째로,

기도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라는 것이다.

단순한 기도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 점에서는 누구나 동일한 입장이다. 상처를 입고 파산한 사람들도 건강하고 부유한 사람들과 똑같이 자유롭게 이 기도에 동참할 수 있다. 귀용(Guyon)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기도, 즉 주님과 단순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에게도 어울리고 우둔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어울린다. 그저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이런 기도, 이런 체험은 그 목표가 주님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맡기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둘째로는,

이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가 지금까지 부족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도가 아예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갈망, 그 자체가 기도이다. 메리 클레어 빈센트(Mary Clare Vincent)는 말하기를 “기도에의 욕구가 기도이며 그것은 욕구의 기도이다”라고 했다. 때가 되면 그 욕구는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 행동은 욕구를 증가시키게 된다.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라.

또한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기도로 마음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기도가 부족한 것까지도 하나님께 내어 놓기만 하면 된다.

 

정반대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또 하나의 제언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기도하려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영적인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로 너무 강렬하게 기도하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적인 생활에는 진보의 원리가 존재한다. 조깅하는 사람들을 택해서 마라톤 선수로 뛰게 하지는 않는다. 기도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영적인 탐욕’의 죄이다.

 

만일 당신이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하루에 열두 시간씩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대신 단지 몇 분만이라도 할애해서 모든 정력을 거기에 쏟아 넣으라.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기도해 왔다면 하나님께 단지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 “이제 좀 쉬어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힘이 언ㅅ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정말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게다가 영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들조차도 기도하기를 자주 웃고 놀고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르는 제언을 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악한 일을 행하고 있을 때조차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분노와 욕망, 교만과 탐욕, 야심 따위와 싸우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도로부터 격리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까지도 말해야 한다.

 

우리의 불순종까지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만큼 강하신 분이다. 죄는 분명히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다. 하지만 죄를 피하는 것은 우리를 더욱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에밀리 그리핀(Emilie Griffin)이 말하기를 “주님은 우리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때 우리를 가장 사랑 하십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별로 중요한 사건이 없는 일상적인 기도에 먼저 힘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은 우리를 압도할 수 있지만 우리를 진정한 기도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131:1-2). 게다가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고요히 잠자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새롭고 신선해서 우리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게 된다.

  

마음의 변화

 

기도에 관해 쓰여진 많은 책에서 ‘단순한 기도’는 종종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이 점을 늘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마 그 책들을 쓴 사람이 경건한 사람들이어서 ‘단순한 기도’가 갖는 자기중심적인 면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아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자칫 이기주의나 자기도취로 빠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늘 우리의 경험을 합리화하고 조직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고 싶은 것만을 듣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바울이 묘사한 것처럼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숭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롬1:25).

 

이 견해는 이치에 맞다. 그러한 위험은 정말로 존재한다. 그러나 요셉 슈미트(Joseph Schmidt)가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정도(正道)에서 생기는 위험이다. 그러므로 주의는 기울여야 하지만 돌아서서는 안된다.” 그렇다. 우리는 돌아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며 정직하고 숨김없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당연히 기도의 중심이요. 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혁이 일어난다. 천천히 그리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게 중심이 옮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다가 우리가 그의 생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바뀐다. 마음의 변화와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이러한 역사가 이 책의 주요 관심사이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기도

사랑의 주님, 정말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종종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집중도 잘 되지 않습니다. 고집도 셉니다.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주님, 주님의 긍휼로 제게 필요한 것만큼 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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