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 S. 벡스터 -

 

서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되, 령님을 대항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사람의 아들을 대항하는 말을 하면 용서를 받되, 누구든지 성령님을 대항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마 12:31,32).

 

우리 주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용서를 제시하는 복음 속에 포함된 단 하나의 두려운 예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으되 단 하나는 예외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죄가 더한(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라고 선언합니다(롬 5:20).

복음은, 자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시키신 주 예수님의 중재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또 구속(救贖)은 죄인들의 경험으로부터 저 가공할 죄들이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되”라는 위의 말씀과 같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하는 그 단 한 가지 예외적이고 두려운 죄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심사숙고해 보고자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죄를 깊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결코 지은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는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비통한 낙심 가운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그것을 피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에 관하여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하여 단 한번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및 그 관련 사건은 마태복음 12장 22-37절, 마가복음 3장 22-30절, 누가복음 11장 14-23절 세 곳에 약간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12장 22-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되, 령님을 대항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사람의 아들을 대항하는 말을 하면 용서를 받되, 누구든지 성령님을 대항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마 12:31,32).

 

이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문이 떠오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이 본문에 암시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2) 이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3) 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인가?

도대체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무엇이기에 그렇게 많은 의견들이 피력되고 있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혼동 가운데 빠져 걱정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실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거나 또는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름 아닌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종파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바리새인들”이었으며, 성경 문헌에 전문가였던 “서기관들”이었습니다(막 3:22)!

이 놀랄만한 사실은 어떠한 것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지를 즉시 가르쳐 줍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주색잡기(酒色雜技)나 살인 등 어떤 한 가지 특정 죄악, 불순, 또는 범죄도 아니며, 오랜 방탕과 폭력의 생활도 아닙니다.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 혹은 모든 사람들은 십계명에 관하여 말할 때 부자 청년 관원이 우리 주 예수님께 했던 말과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

 

도덕에 관한한 그들 각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백합화처럼 흠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었거나 거의 짓고 있다고 경고하신 대상들은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항은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분명히 어떤 형태의 성령에 대한 범죄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님을 대항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

아마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삼위일체 중의 한 분으로서 육신을 입고 오신 제2위(位)가 되신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성령도 삼위일체 중의 한 위(位)가 되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영향력으로서 인간들에게 역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신약성경이 점차로 전개되어 감에 따라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 자신은 성령의 개체성(個體性)을 알고 계셨으며, 현재의 우리가 충분한 계시에 비추어 그분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에 그분이 성령의 개체성을 분명히 암시하셨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성령의 개체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이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한 위(位)되심을 모르고서도 성령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다름 아닌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의 초점이었습니다.

 

31절을 다시 주목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되, 령님을 대항하여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하겠고” 그렇다면 모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중상하거나 모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옛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까? 그 종교적 위선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가 마귀들의 군주인 베엘제붑에 의하지 않고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 모독죄란 은혜롭고 거룩한 성령의 활동을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모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를 사단의 역사(役事)라고 말하는 것이 성령 모독죄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문맥을 감안하여 볼 때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성령 모독죄가 왜 무서운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성령 모독죄를 용서받을 수 없도록 만드는 요소는 바로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고의적이고 결정적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사악한 성령 모독죄가 단순히 무지 탓이었다면 그것은 즉시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의 사도 바울이 성령 모독죄를 지은 것은 무지 탓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한 그의 악감은 대단히 심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를 받았던 것은 그가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함은 나를 신실하게 여기사 사역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오히려 긍휼을 얻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하지만 우리 주님에게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관하여 경고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지 탓으로 성령을 모독한 것이 아니었으며, 문맥은 이것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행하시던 그 자애로운 기적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즉시 감지되었으며, 그러기에 그들은 자동적으로 “이분이 바로 다윗의 아들이 아니시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마 12:23). 그들은 주님에 의해 행해지는 기적들이, 대언자들에 의해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행하시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임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논리적으로도 명백하게 실증되는 문제였습니다.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내분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왕국이 서겠느냐?”(마 12:26).

이 말씀은 연역적인 논증이었습니다.

 

“또 내가 베엘제붑에 의해 마귀들을 쫓아내면 너희 자녀들은 누구에 의해 쫓아내느냐?”(마 12:27).

이 말씀은 대인논증(논자(論者)의 주의, 성격, 지위, 직업 등을 이용하여 그 이론을 변호하는 법-역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주님의 결론을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내가 베엘제붑에 의해 마귀들을 쫓아내면 너희 자녀들은 누구에 의해 쫓아내느냐?”(마 12:28).

그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를 마귀 탓으로 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모독이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살면서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셨고, 성령을 부어 주셨기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복되신 성부 및 성령과 영원토록 동등하시다는 사실이 실증되고 선포되었기에 그분의 사역을 마귀 탓으로 돌리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옛날의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모독한 것과 똑같이 현재도 하나님을 명백히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役事)이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역사(役事)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마귀에게서 난 것으로 돌리는 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이 성령 모독죄는 용서받지 못할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죄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킨 어떤 죄가 아니라 요지부동한 마음 자세에 기인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이 죄는 탕자가 “방탕한 생활로 자기 재산을 허비하며” 오랫동안 탐닉했던 그런 종류의 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죄는 이성적으로 완고하게 성령을 거역하는 죄라기보다 저질적인 욕망에 굴복하는 죄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극도의 패역한 일을 저지르고, 자기 생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지만 나중에는 이것을 통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을 펴서 읽어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더니”

 

감사하옵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타락한 탕아들에게도 베풀어질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종류의 범죄는 마태복음 12장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저지르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는 육신의 연약이나 영적인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참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는 확고한 마음 자세요,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겠다고 결심하고, 알면서도 고의로 영혼의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용서의 사랑의 광채가 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용서를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그런 종류의 죄가 용서를 미리 배제할까요? 탕자가 나중에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회개했으며,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나중에 자기 죄를 실제로 회개했듯이 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 자세를 나중에 회개할 수 없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그 바리새인들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지점에까지 실제로 도달했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미리 배제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회개를 미리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점에서 분명하면서도 신중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만큼 죄를 지었다든지 혹은 안 지었다든지 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점을 더욱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들이 그런 죄를 지었다고 잠시 가정합시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하나님의 참 빛을 고의적으로 완고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는 결국 회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말살되어 버릴 정도로 완고한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회개를 배제하는 까닭에 용서도 배제하는 죄의 상태가 곧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이러한 지점에까지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완고한 거절의 과정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으며, 이것이 결국 그 사람의 주인이 되면 회개의 가능성을 말살시켜 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회개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목회자로부터 저는 무서운 임종 장면을 지켜보았던 경험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죽어가던 그 사람은 죽음을 물리치려고 몸부림치면서 불쌍한 손을 무익하게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는 죽음과 그 너머의 두려움으로 인해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발광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지만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전에 발작적으로 다음과 같이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합니다.

“나는 죽기 전에 회개한다고 말했는데 회개가 되지 않아!

회개가 되지 않아! 나는 도무지 회개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가능성이 말살되어 버린 그 시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회개가 없으면 더 이상 용서도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죄도 아니며, 심지어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죄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묘사한대로, 하나님과 그 진리에 대하여 악한 마음으로 거부해 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마음의 상태입니다.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우리 주님이 대속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라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계속된 죄악들도 통회하기만 한다면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가능성이 말살된 상태의 영혼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이것은 마치 의사가 암을 용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란 하나님의 성령과 그 역사(役事)를 의식적으로 오랫동안 거부해 온 과정을 통해 형성된 요지부동의 마음 상태입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죄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마음속에 실제적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와 모든 경건한 덕목들을 생성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무서운 사실은 사람이 이와 같은 것들을 알면서도 미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과정이 시작되고 이것은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종말을 맞이하여 결코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때 그 사람 속을 비추었던 빛은 어두움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 지점에 실제로 도달한 사람은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는 빛을 미워하는 일을 영원토록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처럼 “믿고 떨기는” 하지만(약 2:19)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의 정점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대언자를 통해 과거의 열 지파 이스라엘 왕국 전체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호 4:17)

 

이런 지점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더 이상 베풀어진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밀납을 녹이는 태양은 동시에 진흙을 응고시킵니다. “버려두라” - 이것은 실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용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회개의 가능성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세 번째 질문을 다루기 전에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실제로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엄숙한 말씀은 허구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죄를 범할 수 있으며, 또 범해 왔습니다.

사탄도 그 죄를 범했습니다.

그의 최초의 범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범죄의 역사 가운데서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거나 흑은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지성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빛과 사람을 대적하는 죄를 짓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늘 스스로 죄를 지어 왔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죄를 지어 왔으며, 도저히 회개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전혀 용서받을 수 없고 오로지 불 호수 행(行)일 뿐입니다.

 

타락한 천사들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유전(遺傳) 따윈 전혀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범했으며,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이성적(理性的) 반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그들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용서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지옥뿐입니다.

바로와 헤롯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시의 종교적인 위선자들도 역시 이 죄에 매우 근접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면서도 고의적인 위선으로,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주님께서 그들 중 일부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었는지 우리는 궁금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도 역시 다음처럼 동일한 특징과 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심의 계획적인 억누름, 계속적인 기만과 사기, 완전히 비정상적으로 되어 버린 도덕성, 그래서 검은 것을 희다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마귀를 하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2편이 만일 세상 끝 날과 관계있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마치 세상의 권력자들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아마겟돈으로 가는 전조와도 같이 짓게 될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여간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다른 각도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즉, 자기가 혹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나 않았나 염려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실상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고민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이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입증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도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다가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며, 구원의 길을 알기 원하고,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소원하는 죄인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감정과 소원과 참회가 다 성령의 역사이며,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정로를 벗어난 그리스도인들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자기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우신 성령님께서는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를 받되...”

 

여러분 모두는 이 말씀 속에 포함됩니다!

 

고(故) G.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 중에는 범해질 수 없습니다.

그 죄는 한 시간 안에 범해지거나 한 행동으로 범해지지 않습니다. 그 죄는 시험기간(수습기간)이 끝날 때까지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취해진 자세의 결과입니다. 그 기간은 사람이 이생과 내생의 경계선을 넘어가야 끝납니다. 우리는 은혜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성령님이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하나님을 끝끝내 버리는 사람만 하나님도 결국 버리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진행되는 그 과정이 시작조차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는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세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연기(延期), 가정(假定), 가식(假飾).

 

성령의 내적인 활동에 의해 영혼들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각성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를 구원하는 복음의 진리와 주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연기합니다. 이렇게 하여 긴박감은 점차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될수록 미루는 일은 점점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는 영혼의 힘이 손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점점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영혼은 만성적인 무능(無能)으로 회개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는 영혼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기를 원하긴 하지만 그 시간은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들은 죄의 자각과 돌이킴, 회개와 다시 태어남(重生)이 인간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이르는 과정이 가식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게 솔직하지 못함으로써, 변화되지 않은 마음이 여전히 죄를 품고 있는데도 구원을 받은 것처럼 꾸밈으로써 발생합니다. 그들의 말의 실상은 이렇습니다. “물론 저는 복음을 믿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있어요.” 사람이 이런 치명적인 자기기만에 습관적으로 빠지면 급기야 그 마음은 처음에 잘못임을 알았을지라도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검은 것이 희게 되고, 횐 것이 검게 되며, 그 마음 자체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처음부터 거절하거나 배척하거나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악한 과정은 단지 연기하거나 가정하거나 가식하거나 하는 식으로 매우 완곡하게 시작되며, 그 이유는 거의 예외 없이 그 마음이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에 기인합니다. 오, 우리는 참다운 헌신을 사랑하는 구주께 드려,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들을 어리석게 장난하는 일을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끝내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변하고 마는 이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 세 가지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울, 헤롯, 이 세 왕이었습니다.

1. 이집트 왕 바로

 

먼저 바로를 생각해 봅시다(출 1 :14장).

 

첫 눈에 알아보게 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괴롭히려고 잔인한 계교를 꾸밀 만큼 악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연속적인 “재앙”이 퍼부어짐으로써 참되신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증명되었으며, 그러기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거역차기로 결심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인간이 알면서도 감히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고(故) F. B. 마이어(Meyer)의 글에서 인용한 다음의 문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압적이고 안하무인격인 자세로 묻는 바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집트의 절대군주들이 지녔던 무제한적 권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각 바로는 태양의 아들이었습니다. 바로는 가장 위대한 신(神)들에게 총애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또 그 신들과 함께 신전 깊숙한 곳에 앉아 똑같은 숭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의 생명을 걸고’라는 표현은 최고의 맹세였습니다. 이집트 온 땅에서 바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수족을 놀리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이집트는 바로 그를 위해 존재했으며, 다른 모든 인민들은 그를 위해 살았고, 고난당했고, 죽었습니다. 미지의 원천에서 흘러 토양을 비옥하게 했던 저 도도한 나일 강도 그를 위해 흘렀습니다. 그 엄청난 숫자의 사제들과 마법사들, 아전들도 그를 섬기며 수종들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보좌에 앉아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불쌍한 인민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백성들의 눈물과 신음, 그들의 속박의 울부짖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의 위엄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합당한 희생이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절대 군주는 최근에 자기 장군들을 통해 큰 승리를 획득했으며, 이 성공은 그의 오만을 크게 부풀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오만한 조소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가게 하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가게 하지 아니하리라.”(출 5:2).

이 대답의 핵심은 ‘듣고’(순종하고)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자기에게 청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지니신 분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것은 그의 속살을 찔렀던 것입니다. ‘나도 역시 신(神)인데 그런 나에게 이런 명령을 감히 내리면서 나보다 더 강하다는 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저 하나님이란 누구인가! 한 꾸러미의 노예들의 하나님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찌 저들이 감히 내 앞에서, 그리고 사제들과 아전들과 고관들 앞에서 하찮은 신(神)에 관해 입을 연단 말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으로서 교만하고 허세부리며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 치명적인 과정(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이르는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로의 마음이 18번이나 “강퍅해져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약 절반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고, 그 나머지는 바로 자신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개치 않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대적 반작용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 도전하며 자신을 강퍅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정욕대로”, “그들을 타락한 애정에”, “버림받은 마음에”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롬1:24,26,28).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탄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너희는 ... 못하리라.”(마 23:37-39).

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바로의 경우보다 덜 심각하긴 하지만 애처롭기로는 훨씬 더 한 것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경우였습니다.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초기의 약속 단계, 나중의 쇠퇴 단계, 최후의 실패 단계.

그의 출발은 우월한 신체, 높이 칭찬받을 만한 성격, 성령에 의해 갖추어진 특별한 영성, 자기 주위에 있던 경건한 사람들, 훌륭한 조언자인 사무엘 대언자와 더불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완고함과 하나님께 대한 거역은 그의 생애를 점점 더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급기야 제사장의 특권을 범하는 교만한 행동을 저질렀고(삼상 13장), 그런 다음에는 경솔하게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며(14장),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또 불순종함과 동시에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15장). 그런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소멸하였으며, 소인처럼 다윗을 시기하다가 결국 악마같이 그를 세 번이나 살해하려 하였고,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수개월 동안 그를 추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하나님의 성령도 그를 저버리셨고, 마침내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대언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도다.”(삼상 28:15).

 

그리고 그처럼 훌륭한 약속과 더불어 출발했던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물을 정도로 타락하였고, 결국 자살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사울이 우리 주님의 말씀하신바 그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는 그 죄에 이르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 왕

 

마지막으로 로마의 영주였던 헤롯왕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그의 경우는 두드러진 사례입니다.

마가복음 6장 20절에 기록된 대로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두려워하여 그를 주시하고, 또 그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일이 많으며, 그의 말을 달게 들음이더라.”

그러나 헤롯은 자기 형제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탐하여 불법적으로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헤롯은 요한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지 혜로디아를 통해 오는 죄의 음성을 듣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요한을 옥에 가두고,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17-19절) 성가신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에게서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과정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사건이 언급된 누가복음 3장 19,20절에서 누가는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과 “그 모든 일 위에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이 한 가지를 더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헤로디아를 기쁘게 하려고 요한의 목을 베는 일까지 자행했습니다(막 6:27).

 

하지만 이 때에도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죄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그 후에 헤롯은 예수님도 죽이려 했으며(눅 13:31),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 아침 빌라도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헤롯 앞으로 끌려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누가복음 23장 9절에는 헤롯이 “많은 말로 물어보았으나” 예수님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묵살되어 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분노와 좌절에 빠진 헤롯은 이제 “군병들과 더불어 그분을 무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사랑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요, 이것이 바로 그리로 가는 과정입니다.

 

거절된 사면장

미국 서부에 한 성실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카드놀이를 하다가 몹시 다투던 끝에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를 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소한 시비가 죽음을 부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을 사랑하던 친척들과 이웃들은 진정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이 다른 마을, 다른 도시에서도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서에 서명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바구니 가득 쌓인 진정서를 읽은 주지사는 그 청년을 사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성경을 들고 형무소로 찾아갔습니다.

주지사가 형무소 감방으로 가까이 갔을 때 청년은 벌떡 일어나 철장문으로 다가오며 소리쳤습니다.

“여기 오지 마시오! 보기도 싫소. 당신 같은 사람은 벌써 일곱 번이나 만났소.

나도 집에서 종교생활을 했단 말이요.”

 

“그러나 잠깐만 젊은이, 내가 젊은이를 위해 가지고 온 것이 있으니...”

 

“듣기 싫어요! 만

일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소.”

청년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젊은이...” 주지사는 간청하듯 말했습니다.

“내가 젊은이를 위하여 가장 좋은 소식을 가져왔소. 말 좀 하게 해주시오.”

“듣기 싫어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간수를 부르겠소.”

 

여러 번의 간청에도 청년은 주지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지사는 슬픈 마음으로 돌아서서 나왔습니다.

 

잠시 후, 간수가 오더니 “저, 지금 주지사님이 방문하고 갔는데...

그분은 자네의 사면장을 주머니에 넣고 왔으나 자네가 들으려 하지 않더군.”

 

“뭐라구요, 주지사님이? 오... 이런, 제게 펜과 종이를 좀 가져다주십시오.” 청년은 주저앉아 울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경외하는 주지사님,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주지사님께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지사는 그 편지를 읽은 후 그 편지 뒤에다 『이 사건에 더 이상 흥미가 없소』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청년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는가?”

 

“예,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내가 죽는 것은 살인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살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은 주지사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사면장을 거절한 결과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거절한다면 이보다 몇 천배 더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사실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다면,

거절한 그 죄는 결코 사함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힘으로 처리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벧전 2:24).

그 많던 모든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어졌습니다(엡 1:7).

영원히 씻어진 것입니다(히 10:12) .

 

“내가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

 

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사면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멸망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어리석은 청년과 같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예수님 믿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한다면 멸망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거절하여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면장을 거절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그 청년의 말과 같이,

“내가 멸망하는 것은 내 죄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

 

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 C. 백스터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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