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유대 계시문학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나 더 통일되고 체계화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완성되었다.

문학적 특징 중의 하나는 상징과 숫자에 있다. 요한계시록 전부가 상징의 나열로 되어있고(숫자 또한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난해하며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알려져 왔다.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해석자들에 따라 갖은 설명이 구구하며 갖은 오해와 실제적인 문제가 많이 생긴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의 해석방법이 다양하므로 등장하는 숫자들의 해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요한계시록의 계시적 방법은 환상으로 이 환상들은 갖가지 상징들로 되어있고 이 상징들 -내적으로는 요한계시록에 신비성을 주고, 외적으로는 박해자와 정면충돌을 피함이 목적이다- 은 숫자와 색깔, 동물 및 기타 사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이 모두 상징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곱 교회(1:4)는 요한계시록의 수신자가 되는 실제적인 교회이다. 이처럼 상징과 실제가 공존하여 있기에 해석하는 이들은 이를 잘 구분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일곱이란 수를 기본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일곱이란 수를 54회 사용하며, 일곱 교회,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 눈, 일곱 뿔, 일곱 천사, 일곱 나팔, 일곱 우뢰, 일곱 복, 일곱 머리, 일고 면류관 등을 볼 수 있다.

 

7개의 사건들을 한 단위로 하는 환상 그룹이 7개나 되며(Rist), 전체를 7부로 나눌 수 있으며(Hendrikson), 7장(場)을 한 막(幕)으로 하는 7막의 드라마로 되어 있고(Bowman), 7삽경군(揷景群, 7:1-17; 10:1-1; 11:1-4; 12:1-17; 13:1-18; 14:1-20; 17:1-18:24). 그리고 13장의 666은 불완전한 인간의 수가 모인 환난과 저주와 사단의 수이다. 11장 3절의 7,000은 1,000을 7배한 것으로 아주 많음을, 21장 16절의 12,000 역시 1,000을 12배 한 것으로 다량을 의미하며, 7장 4절과 14장 1절의 144,000 또한 1,000을 12배한 것에 12배한 것으로 많고 완전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말씀하셨으며 이 예언의 말씀을 읽을 때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숫자 666의 비밀(계 13:18)에 대한 말씀인 것을 주목할 때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의 해석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입장은 비성경적인 입장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숫자들의 해석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요한계시록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계시록의 숫자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들에 대해서 상징(Symbol)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실체(Reality)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 속에서 수(Number) 해석의 오류를 생산하여 여러 이단사상이 파생되고 있어 목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위협을 안고 있다.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숫자들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은 계시록 전체의 전개과정(기, 승, 전, 결)을 이끌어가며 계시록의 짜임새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데 一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 「일곱」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곱 촛대, 일곱 교회, 일곱 영, 일곱 눈, 일곱 천사, 일곱 재앙,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머리 등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완전수로 하나님의 수인 3과 자연의 수인 4의 합으로 완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이와 같이 숫자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독특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 의미와 상징을 고찰하려는 시도는 숫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한 하나님의 의도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진 수의 의미와 상징과 수철학

 

히브리 숫자

구약성경은 히브리인들의 수 사용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숫자를 기호로 표시한 것이 아니라 대게 말로, 즉 문자로 표시하였다. 알파벳 글자를 산수용 숫자로 사용하는 일은 마카비 시대 화폐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이것은 후대 유대인들이 자음 글자를 수의 기호로 썼다는 증거이며 구약성경에서 숫자를 나타내는 말은 항상 철자를 생략하지 않고 정확하게 썼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옛날의 둥근 서체의 히브리어 자음 22개가 위의 숫자들과 대치되었다. 즉 1에서 9까지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아홉 자 ?(알렙)에서 ?(테트)까지, 10에서 90까지는 그 다음 아홉 자 ?(요드)에서 ?(차데)까지, 100에서 400까지는 마지막 4자 ?(코프)에서 ?(타우)까지로 표시했다. 500에서 900까지는 ?에다가 100에서 400까지의 기호를 합한 것으로 각각 표시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미형 알파벳들이 500에서 900까지 각각 표시되었고 1000은 단위 수위에 점을 두개 찍은 것으로 나타냈다. 이 외에 모든 숫자들은 모두 적당한 문자의 조합에 의하여 표시되었다. 그러나 15와 16을 나타낼 때 10+5(??)와 10+6(??)의 발음은 하나님의 성호(????)와 비슷하므로 9+6(??)과 9+7(??)로 나타내어 “야웨”의 이름을 줄여 쓴 “??”와 “??”를 의식적으로 피하도록 하였다. 이상의 히브리어 알파벳의 수치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구약성경 수의 제 용법

수의 기본적 또는 피상적인 기능(the basic & superficial function)은 수효나 혹은 분량이나 급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기호로써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수의 기본적이고 표면적인 사용 외에도 그들의 종교성 문학에서 그들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귀중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 신성한 수로서의 그 내용적 또는 본질적 기능(the substantial & essential function)을 하고 있는 실제의 예들이 구약성경의 산문(散文)과 시문(詩文)들에 잘 나타나고 있다.

 

산문에서의 수

구약성경의 산문에서 수가 쓰인 용법은 주로 관용적-점증적 용법(the climactic & idiomatic uses)과 의식적-상징적 용법(the cultic &symbolic uses) 그리고 형용사적-수사학적용법(the adjective & rhetoric uses)이 있다.

 

관용적-점증적 용법

고대의 모든 셈족의 종교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의 산문들 역시 일련의 수를 접속적으로나 비접속적으로 사용하여 이야기의 진행 및 예상을 이끌어 간다. 그 표준형식은 1, 2와 3, 4와 5, 6이며 그 다음에 7에 이르러 변화나 끝맺음이 이루어진다. 창세기의 창조 법식도 정확히 이러한 방식이 노정되며 창세기 2장 2절, 8장 4절 그리고 출애굽기 16장 27절 등 그런 예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제의적-상징적 용법

구약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예배의식에 관련해서 어떤 특정 수가 빈번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들 숫자들이 본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중요시되는 사물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묵시문학에서는 각 시대를 특징짓는 몇 개의 숫자들이 나와 있는데 이것들은 단순히 각 시대의 산술적(算術的) 존속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일정한 책들은 숫자들은 그 개개의 상징을 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쓰였기 때문에 숫자들의 상징을 이해함으로써 묵시문학과 예언문학을 비롯한 역사문학과 모세오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형용사적-수사학적 용법

구약성경에서 숫자가 수효나 수량이나 숫자를 나타내는데 쓰이지 않고 형용사나 문학적 수사(修辭)로 전용된 경우가 있다. 배제민 교수에 의하면 “70”이란 숫자가 아들이란 낱말과 쓰일 때에는 “70”이란 수효를 나타내지 않고 “이상적(理想的)”이란 뜻을 나타낸다. 그러한 예로는 “야곱의 70아들”, “기드온의 70아들”, “아합의 70아들”, “노아의 70아들” 등의 표현들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들의 수가 70이 넘거나 70에 미달해도 아들이 70명인 것처럼 나타내었다. “야곱의 70아들”이란 표현은 야곱의 자손이 70명이라는 것을 뜻하지만 이것보다도 야곱에게는 이상적인 수에 달하는 자손들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아들의 수는 70이었다.


시문에서의 수

구약성경 ⅓이상이 히브리 시(詩)이다. 물론 시문에서도 수가 기본적-표면적 용법 외에도 관용적-점증적 용법과 제의적-상징적 용법을 포함하고 있으나 시문에서의 수는 대구법(對句法) 또는 병행법(竝行法)의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히브리 시문학에 나타난 수 해석의 기초이다. 이러한 수의 시적 병행은 「X」대「X+1」로 나타나 있다.

아카드어(Akkadian)와 우가릿어(Ugaritic), 서북방계 셈어(Samitic) 그리고 히브리어에서의 수는 병행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時作) 상의 병행법 양식규범에 따르면 동일한 형태의 명사를 대응하는 두 행(行)을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가진 수사가 대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A”구절에서 X라는 숫자를 놓고 “B”구절에서 X+1이라는 두 번째 숫자를 놓는 방식이 구약성경 시문학의 표준적 용법이 되었다. 구약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수열이 포함되어 있다. 즉

 

X=1// X+1=2(시 62:11; 렘 3:14; 욥 33:14)

X=2// X+1=3(욥 33:29; 사 17:6; 호 6:2; 암 4:8)

X=3// X+1=4(민 14:18; 잠 30:15; 암 1:3; 2:1)

X=4// X+1=5(사 17:6)

X=5// X+1=6(왕하 13:19)

X=6// X+1=7(욥 5:19; 잠 6:16)

X=7// X+1=8(미 5:5)

X=1,000// X+1=10,000

 

이 경우는 이들 수의 산술적 성격보다는 시적 성격에 대한 통찰을 문제로 삼았다(신 32:20; 삼상 18:7; 21:11; 29:5; 시 91:7). 이상과 같이 구약성경의 산문과 시에 나타난 숫자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현대인의 소위 과학적인 숫자 개념과 판이하게 다르며 따라서 구약성경의 연대나 숫자 운산(運算)은 현대인의 계산방법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의 의미와 상징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숫자들은 그 종류와 용례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들과의 연관성을 찾는 의미에서 구약성경과 계시록에 동시에 등장하는 숫자들만으로 그 연구범위를 제한하여 살펴볼 것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1”

구약성경에서 숫자 “1”은 기본수이며 모든 다른 숫자들이 이 “1”에 의존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 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1”은 시작을 뜻하며 그것 자체로서 완전해서 그 어떤 다른 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어떤 수와도 독립하여 홀로 서있어 독특하며 불가분을 표시한다.

 

“1”의 의미는 기수(基數)로써는 “통합(Unity)”을 서수(序數)로써는 “제일(Primacy)”을 의미하여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결론을 맺는다.한편, 클라렌스 라킨은 숫자 “1”은 하나님의 일치성을 상징한다(막 12:32; 요 10:30; 엡 4:4-6)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에서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분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의 일곱 가지 일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2”

클라렌스 라킨은 “2”를 혼인을 통한 “연합”을 상징하는 “연합의 수”로 본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단 키슬러는 “2”를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와 그 밖의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나눔”이나 “분리”를 의미한다고 본다.

한편, 이상과 같은 “2”라는 수사는 없으나 의미상 “2”를 지시하는 내용은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창 1:7), 아담과 하와(창 3:20), 내 백성과 네 백성(출 8:32), 옛 언약과 새 언약(렘 31:31-32), 가인과 아벨(창 4:1-2), 이스마엘과 이삭(창 16:11), 야곱과 에서(창 25:25-26), 와스디와 에스더(에 1:9),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창 3:15) 등 허다하다. 이상과 같이 “2”는 “구분(division)과 분리(separation)”, “차이(difference)와 보안(replacemen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3”

E. W. 벌링거는 “3”은 입체적, 본질적, 전적, 완전한 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한 하나님 안에 세 분”이 계시기 때문에 “3”은 신성과 관련 있는 숫자이다. 천사들은 “거룩, 거룩, 거룩”-삼위일체의 한 분 마다 하나씩-이라고 세 번 외친다(사 6:3).

창세기 18장 2절에는 동일한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1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밝혀 준다. 아브라함이 한 사람인 동시에 세 사람인 그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숫자 “3”은 “신성의 충만함”을 나타낸다. 한편, 단 키슬러는 성경 내에서 숫자 “3”은 “부활(復活)”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왕상 17:21-22), 수넴여인의 죽은 아들(왕하 4:16-36),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사람의 시체(왕하 13:21) 3명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3”의 의미는 거룩한 완전수(perfect)이며 완성수(completeness)로써 “연합 및 협력(union)”, “부활(resurrection)”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립된 후 “3”이라는 숫자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4”

클라렌스 라킨은 “4”를 “세상의 수”라고 말한다. 에덴 동산에서 흘러나온 강은 네 방향으로 나뉘어져 있다(창 2:10-14). 에스겔은 환상 중에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진 천사를 보았다(겔 1:5-10). 환상 중에 다니엘이 본 세상의 큰 세력은 바빌로니아,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넷이었다. 놋제단은 각기 네 면과 네 뿔이 있었다. 단 키슬러에 따르면 “4”는 첫 번째 창조(創造) 혹은 육(肉)과 관련이 있다.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육체를 의미한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빛들에 대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창 1:14)” 4가지가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때 창조하신 “사람, 육축, 기는 것, 공중의 새(창6:7)” 4가지와 관련하여 말씀하셨다. 창세기 7장 23절에 같은 내용이 나타나는데 육축 대신 짐승이 사용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4”는 특별히 지상세계와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4”는 “세상 수(world number)”이며 “창조수(creation number)”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5”

 

단 키슬러는 “5”는 “은혜”를 의미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민수기 3장 46-48절에 나오는 “5세겔”은 구속(속죄)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불된 5세겔은 우리가 구속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의미한다. 성막에 있는 놋제단은 길이가 5규빗이고 넓이가 5규빗이었으며 5가지의 기구들과 관련이 있었다(출 27:1-3). 성막 울타리는 5규빗 높이였다(출 27:8). 은혜는 성도를 사방에서부터 안전하게 안에 넣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5”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wonderful grace)를 상징하는 “은총”과 "구속(redemption)”의 의미를 가진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6”

클라렌스 라킨는 “6”을 “인간(人間)의 수”라고 정의한다. 아담은 제 6일에 흙으로 만들어졌고, 엿새 동안 일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히브리인 노예의 봉사 기간은 6년이었고, 땅은 6년 경작한 후 7년째에는 휴경(休耕)하게 되어 있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6일간 기다렸다(출 24:15-18).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리고 성(城)을 얻기 위해 6일간 여리고 성을 돌고 7일째 함락시켰다(수 6:1-20).

 

솔로몬 보좌에는 여섯 개의 계단이 있었다(왕상 10:19).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의 모형인 느브갓세살 왕이 자신의 형상을 본 떠 금 신상을 만들어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였는데(단 3:1-30), 이것은 장차 짐승(적그리스도)이 나타날 때에 그 앞에서 거짓 선지자가 사람을 명하여 만들게 될 “짐승의 형상”의 상징인 것이다(계 13:13-18). 단 키슬러는 “6”은 사탄과 관련된 숫자이며 사람에 대한 사탄의 영향과 사탄의 악한 행위와 거짓 예배를 의미한다고 본다. 십계명 중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로 살인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8:44)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6가지를 했다.

 

“①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② 번제(燔祭)를 드리고 ③ 화목제(和睦祭)를 드리고 ④ 앉아서 먹고 ⑤ 마시고 ⑥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6).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6가지 식욕(食慾)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민 11:4-5)을 품었다. 느브갓네살의 신상은 광이 6규빗이었고, 6가지 악기가 연주될 때 모든 사람은 신상 앞에 절하도록 되어 있었다(단 3:1-5). 벨사살 왕과 귀인들은 6가지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단5:4). 이상과 같이 “6”은 완성(完成)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부족하다. 인간은 제6일에 창조되었고 그래서 “6”은 인간의 표시 숫자가 되었다. “6”은 “인간의 불완전성(human incompleteness)”을 의미하고 인간의 미완성(未完成)의 슬픈 상태를 반영하는 “인간 수”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7”

클라렌스 라킨은 “7”을 “완전함” 혹은 “계시의 완성을 나타내는 수”라고 말한다. 이 수는 3과 4의 합이다. 이 수는 하나님의 수인 동시에 세상의 수로써 성경에서는 다른 어떤 수보다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클라렌스 라킨은 구약성경에 “7”이 등장하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안식일은 한 주의 마지막 날인 칠 일이었고, 에녹은 아담의 칠 대 손이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칠 일간 은혜 기간이 있었으며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칠 년간 봉사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칠 년씩의 풍년과 흉년이 들었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제사장이 백성들 앞에 서서 행진 했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서 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

 

성막(聖幕) 안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 금 촛대가 있었으며, 땅은 육 년간 경작한 후 칠 년째에는 휴경하였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칠년 걸렸으며, 완성 후 칠 일간 잔치를 열었다. 욥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으며, 욥을 방문한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칠 일 낮과 칠 일 밤을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후에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마리의 수송아지와 일곱 마리의 숫양을 번제물(燔祭物)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다. 제물의 피는 속죄소 위에 일곱 번 뿌렸고(레 16:14), 하나님이 명한 일곱 절기 가운데 몇은 칠 일간 계속되었다.


단 키슬러도 “7”을 “완전”, “온전” 혹은 “끝맺음”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7"을 완전한 끝맺음과 관련해서 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에 이를 때에 마치니(창 2:1-2)”. 하나님께서 일주일이 칠 일이 되도록 하셨다. 레위기 23장 15절에 「채우고(온전하게 하고)」라는 말이 “7”과 같이 나옴을 볼 수 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소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레 32:15)”

 

"7"이란 숫자는 여리고 성의 완전한 파괴와 관련이 있다.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① 남 ② 여 ③ 노 ④ 유 ⑤ 우 ⑥ 양 ⑦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21). 스가랴서와 다니엘서에서는 “7”이란 숫자가 강조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장 2-3절에는 계약의 “7” 부분이, 그리고 출애굽기 6장 6-8절에는 이스라엘의 7중(重) 약속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7”은 “신적 충만(divine fullness)”, “만족(satisfaction)” 그리고 “완성(perfection)”과 “완전(completion)”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8”

“8”이란 숫자는 “새로운 탄생의 숫자”라고 단 키슬러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사내 아기들은 생후 8일째 할례 받을 것을 명령하셨다(창 17:11-14).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백성, 즉 유대 민족 중에서 끊어져 버렸다. 그러면 할례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할례(割禮)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할례로 말미암아 옛 아담의 혈통에서 끊어져 새로운 민족이 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클라렌스 라킨은 말한다.


노아 홍수 때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은 여덟 명이었고, 이스라엘에 새로운 질서를 불어 넣은 다윗은 이새의 여덟째아들이었으며(삼상 16:10-11), 문둥병자는 제 팔 일에 깨끗함을 얻어 새 사람이 되었다(레 23:11).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은 제 팔일, 즉 안식일 다음 날에 흔들었고(레 23:11), 50일 후 같은 날(안식일 다음 날)에 오순절을 지켰다(레 23:16). 장막절은 칠 일 간 지켰으며, 제 팔일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었다(레 23:36).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8”은 “부활”과 “새 시작” 즉 “새로운 질서”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10”

단 키슬러는 “10”이 율법 중에 십계명(출 20:3-17)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 후에 취한 사라의 여종 하갈(바울은 하갈을 율법에 비유했다)의 예를 들어 “율법”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클라렌스 라킨도 “10”이 “율법”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출애굽기 26장 1-3절은 성막의 앙장 열 폭을 보여주는데 이 열 폭 양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또한 그렇게 하신 “율법”을 의미하며, 그렇게 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은혜를 가져왔다. 율법은 가난하여서 기업을 팔아야 하는 자의 기업 무를 친척을 허락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의 기업을 무를 때에 성을 장로 열 명 증인으로 세웠다(룻 4:1-11). 여기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인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롬 3:21).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0”은 “완벽한 하나님의 질서(a completeness of divine order)” 및 “인간의 책임(human responsibility)”을 나타낸다. 이 “10”이 신성수(神聖數)로써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역시 다른 신성수 곧 “3”과 “7”의 합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12”

단 키슬러는 “12”를 “신의 능력, 다스림, 혹은 권위(權威)”를 의미한다고 본다. 심판에 해당하는 숫자 “11” 다음에 오는 숫자로써 모든 것에 대한 심판을 능가하는 능력을 하나님은 갖고 계신다. “12”는 “4”의 3배수이다. “3”은 “부활”이며 “4”는 “창조”이다. 그러므로 “12”는 “창조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다스림의 존칭을 표시한다. 부활이 없이는 창조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는 논리적이고, 간단하고, 쉽고, 그리고 명백하게 보인다.


창세기 1장 16절에 해는 낮을 달은 밤을 다스리게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해로 12시간을 달로 12시간을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12”는 신성하고 완전한 하늘의 숫자 “3”과 물질적이고 유기체적인 것을 상징하는 땅의 숫자 “4”로 이루어져 있다(3×4=12). 그러므로 “12”는 “통치” 혹은 “지배”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12”는 “완전한 통치(perfection of government perfection)”를 상징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40”

노아의 홍수 때 비가 사십 주야로 내렸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40년, 사막에서 40년,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 가나안에 들어갔던 열 두 정탐꾼은 40일 동안 정탐했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은 각각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은 40일간 이스라엘을 조롱했다. 니느웨 성은 40일간 회개했다. 엘리야는 40일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가 산 위에 있을 때 40일 동안 시험을 받았다(출 24:18; 32:1). “10”의 4배수가 40이다(4와 10은 자연인과 율법의 숫자이다). 율법 아래의 자연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험에 빠진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의 의미와 상징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1”


요한복음 17장 20-22절에서 예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일치(하나 됨)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생활의 한 마음, 한 목적, 한 목표를 갖도록 기도하셨다. 이 구절을 근거로 단 키슬러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숫자 “1”은 “일치”를 의미한다고 했다. E. W. 벌링거는 “1”의 의미에 대해 기수(基數)로는 단일성(Unity)을 서수(序數)로는 최고(Primacy)를 상징한다고 했다. 요한계시록에는 서수로써의 숫자 “1”이 등장한다(계 1:11; 17; 2:8; 22:13).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2”


단 키슬러는 “2”를 성경에서 “나눔”이나 “분리”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마가복음 6장 41절에 “2”는 “나눔과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충성된 증인(證人)의 수로 “2”가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은 민수기 13장의 충성된 증인 여호수와와 갈렙을 상기시킨다.


한편 클라렌스 라킨은 “2”를 “연합의 수”로 본다.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가 연합하는 것에 대한 예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엡 5:31-32), 그리스도 안에서 두 성품의 연합(눅 1:35), 두 마리의 새(레 14:4-7), 두 마리의 염소(레 16:5-22)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贖罪)로 이루어진 죽음과 부활의 연합,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마 10:2-4) 둘 씩 짝을 지어 전도여행을 떠나게 하심(막 6:7), 공정한 심판을 위하여 필요한 두 개의 증언대(證言臺)와 두 증인, 대환난기(大患亂期)에 증언할 “두 증인(계 11:3)”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3”


클라렌스 라킨은 “3”은 거룩한 것과 관련하여 자주 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수”이다. 성경에서의 예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와 사람에게 있어서는 영, 혼, 몸의 세 부분,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의 주요 세 절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洗禮)를 베푸는 것(마 28:19), 사도들이 축복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것(고후 13:14), 예수님께서 세 번 시험을 받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셨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시고 부탁하신 일, 그리고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를 세 번 본 일 등을 들 수 있다. “3”은 또 예수님의 부활(마 12:38-40)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한 증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태생, 땅을 다스리실 왕 중의 왕으로 높임을 받고 계시고,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 네 생물은 전능자에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재앙을 예고하는 나팔이 세 번 울리고,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와 같은 세 영이 나온다(계 16:13-14). 바벨론에 세 종류의 재앙, 곧 사망, 애통, 흉년(계 18:8)이 내릴 것이 예언되어 있고, 세 부류의 사람들 즉 왕들, 선원들, 장사꾼들이 자시들의 몰락을 통곡하고 있다.


한편 단 키슬러는 예수님의 개인 공생애 가운데 죽은 사람 3명 곧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5), 회당장 야이로의 딸(눅 8:41-55), 베다니의 나사로(요 11:43-44)를 살리신 일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세 여인(막 16:1,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일, 삼층 누각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를 바울이 다시 살린 일(행 20:7-12) 등 수많은 성경구절을 제시하여 “3”은 “부활”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4”

 

클라렌스 라킨은 “4”를 “세상의 수”로 본다. 이 세상 나라들에게 내려질 네 가지 심판은 전쟁, 기근, 질병, 지진이다(마 24:6-7).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내리실 무서운 심판은 칼, 기근, 유해한 짐승, 질병의 네 가지이다. 이 외에도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로는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본 네 귀를 메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행 10:1-12),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의 네 토양(마 13장), 요한계시록의 사탄의 명칭 -곧 용, 옛 뱀, 마귀, 사탄(계 20:2)- 과 네 뿔을 가진 금단(계 9:13) 등이 있다. 단 키슬러에 의하면 “4”는 첫 번째 창조 또는 육(肉)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는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육체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5”


클라렌스 라킨은 “5”를 “분리의 수”라고 명명(命名)한다. 이 숫자는 성경에서 그다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5”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의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의 보리떡 다섯 개가 있다. 단 키슬러는 “5”가 “은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요한복음 1장 17절에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사 9:6)으로 표현했다. 벌링거도 “5”가 “은혜의 수”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6”


클라렌스 라킨은 “6”을 “인간(人間)의 수”라고 정의 한다. 그는 짐승의 수인 666에 주목한다. 이날에 사람들이 신격화(神格化)된 사람과 그의 능력을 찾을 때이며, 인자(人子)이신 주님을 몰아내는 때이며, 상업적인 이유(계 13:13-16)로 짐승을 경배할 때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人間)의 날이며, 일곱보다 하나 모자라는 여섯으로 상징된다.

 

단 키슬러는 “6”은 사탄과 관련된 숫자이며 사람에 대한 사탄의 영향과 사탄의 악한 행위와 거짓 예배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요한계시록에서 여섯 번째 나팔이 불어졌을 때 사람들은 여섯 가지 거짓 우상 -금(金), 은(銀), 동(銅), 목(木), 석(石)의 우상과 귀신(계 9:13-20)-에게 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7”


단 키슬러는 “7”을 완전(完全), 혹은 끝맺음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 일곱을 택하여 교회의 구제사업을 맡겼다. 그러나 일곱이란 수의 깊은 뜻은 요한계시록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주님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부터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쓴 편지로써 일곱 교회의 사자인 일곱별에게 보내는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하였는데, 그 봉인들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양에 의해 떼어졌다.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고 또 다른 일곱 천사는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대접을 땅에 쏟았다. 짐승의 머리는 일곱이고, 용은 일곱 머리와 일곱 뿔을 가졌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50회 이상 나타나고 있다. 벌링거는 “7”을 영적인 완전을 나타내는 위대한 수라고 단언한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기적 -물이 포도주로 변함(2장),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침(4장),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고침(5장), 오병이어(6장), 소경을 고침(9장), 나사로를 살림(11장), 물고기를 그물질하여 잡음(21장)- 이 나온다. 이것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였다는 “표적”의 완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의 일곱 가지 은사, 에베소서 4장의 일곱 가지 단일성, 야고보서 3장의 일곱 가지 지혜의 특징 등도 내용상 수적으로 “7”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8”


클라렌스 라킨은 “8”은 “새로운 질서(秩序)의 수”로 본다. 제 8일은 새 주간의 시작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칠일(토요일)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에 시작되는 새 주의 첫 날인 팔 일(주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주의 부활은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안식과 새 창조, 즉 영의 거듭남을 가져왔다. 단 키슬러는 “8”은 “새로운 탄생의 숫자”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약속의 아들로 8일째 할례(割禮)를 받았다(창21:4). 하나님의 자녀들은 약속의 자녀들이다.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탄생을 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10”


클라렌스 라킨은 “10”을 “세상의 완성의 수”로 본다. 이 숫자는 세상을 나타내는 수 “4”와 인간의 수 “6”을 합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열 손가락이나 열 발가락으로 암시되는 십진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 숫자는 완전수로 간주되어 십계명 등에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이 본 짐승(계 17:3, 12)의 열 뿔과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형상의 열 발가락, 그리고 다니엘이 본 넷째 짐승의 머리에 돋은 열 뿔은 10개국의 연합으로 뭉쳐진 이방의 세력을 나타낸다. 이 10개국 연합은 이 세상에서의 이방 통치의 완성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이다.


한편, 단 키슬러는 “10”이 율법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로마서 4장 15절에는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했다. 갈라디아서 5장 19-20절에 나오는 육체의 일 가운데 10번째 것이 분냄(진노)이다. 예수님은 율법아래 태어나셨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전5:7). 그 양은 그 달 10일째 취해졌다(출 12:3). 또 열 드라크마의 비유(눅 15:8)라든가 열 므나를 맡은 열 명의 종과, 주인에게서 열 고을을 맡은 한명의 종(눅 19:13, 17)과 열처녀의 비유 등 신약성경 곳곳에서 “10”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12”


“12”는 하나님의 수인 “3”과 세상의 수인 “4”의 곱으로 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 “12”가 쓰인 예를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되시던 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일, 열 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열 두 살 난 딸이 병 고침을 받은 일 등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는 열 두 개의 뿔이 있는 면류관을 쓴 여인이 기록되어 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열 두 진주 대문과 그 문을 지키는 열 두 천사,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도성의 성벽에는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외어 있다. 그리고 생명수의 강의 양편에는 열 두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가 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열 두 사도가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 19:28).


단 키슬러는 “12”를 “신의 능력, 다스림, 혹은 권위”를 의미하는 숫자로 보았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였는데 열 두 광주리는 기적이사를 베푼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1년을 12달, 낮을 12시간, 밤을 12시간으로 만드셨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 “40”


클라렌스 라킨은 “40”을 “시험의 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막 1:12-13). 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까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다.

 


성경에 나타난 주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용례


앞에서 다루었듯이 숫자가 대부분의 경우 직설적으로 해당 수치를 표현하는 기호로 쓰였지만 특정사실에 근거하여 각 숫자에 독특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독특한 상징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경우도 있다. 특히 묵시문학의 상징과 암시로 가득 찬 요한계시록의 경우 이런 용례가 두드러진다. 그러면 이제 직?간접적으로 각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 성경구절의 해석을 위하여 각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용례를 살펴보면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기본수(基本數)


1(창 1:5; 마 23:9; 요 8:41) 하나님의 유일성(唯一姓), 모든 수의 첫 숫자, 유일(唯一), 절대, 통일, 개시(開始).
2(창 2:24; 신 17:6; 엡 5:31) 인간이 남녀 둘로 나뉘어 창조됨, 증언에 필요한 최소 숫자, 나눔, 조화, 증거
3(사 6:3; 마 28:19)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심, 예수의 왕, 제사장, 선지자의 3중직(三重職), 하늘, 완전
4(창 2:10; 사 11:12) 땅의 기본 범위(동서남북), 사계절, 땅, 세상 만물, 피조물, 원창조, 세상에 속한 자연인
5(창 45:22; 삼상 17:40) 피조물의 수인 4에 하나님의 수인 1을 더한 수, 은혜, 축복
6(창 1:31; 신 15:12; 수 6:3) 완전을 상징하는 7에 가장 근접했으나 완전이 못된 수, 불완전, 불안, 긴장, 반역
7(창 2:2-3; 레 23:3; 25:8) 천지창조의 완성기간, 완성(完成), 종결(終結), 안식(安息), 전체, 성취
8(창 17:12; 마 28:1; 벧전 3:20) 원창조 곧 처음 창조를 두 배로 한 수, 재창조(再創造), 새 출발, 구원받은 자
9(마 18:12, 13; 눅 15:8) 완전수에서 하나 부족한 수, 미완성, 부족

10(창 18:32; 슥 8:23) 기본수의 종결, 만수(滿數), 완전, 전체, 편만(遍滿), 전존재
11(창 10:15-18; 행 1:26) 선민 지파의 총수에서 하나 부족한 수, 선택의 반대인 유기, 심판과 징벌
12(창 35:22-26; 계 21:12-14) 선민의 지파 총수, 구원받은 성도의 공동체


복합수(複合數)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숫자의 의미와 상징

 


요한계시록의 구조


요한계시록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조(構造)를 알아내는 일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요한계시록의 정확한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기록목적(記錄目的)과 배경(背景)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Domitian, AD 81-96)에 의해 핍박받던 당시 교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교회가 때로 극심한 박해를 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하면서 교회의 보호와 견인이 결국 주님의 재림(再臨)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교회를 핍박하는 악인(惡人)들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진노(震怒)를 내리실 것인지를 다양한 상징(象徵)들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교회(敎會)에 대한 보호(保護)와 악인에 대한 심판의 구도(構圖)를 가진다고 예상할 수 있다. 즉, 요한계시록은 교회와 악인의 각각의 운명(運命)을 제시함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환란 중에서 희망(希望)을 가지게 하고, 악인들로 하여금 회개(悔改)를 촉구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다.


요한계시록 전체구조에 대한 과거의 분석들은 계시록의 문학적이고도 수사학적인 특성을 무시한 구조분석이어서 당시 구조를 구성한 원리에 대한 선지식이 없이 계시록을 나름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히브리서나 헬라 문학구조인 교차대구구조나 문학적이고도 수사학적인 구조분석들이 시도됨으로 계시록의 구조를 정리하고자 한다.

 


피오렌자(E. S. Fiorenza)의 교차대구구조


하바드의 교수인 피오렌자(E. S. Fiorenza)는 계시록을 1세기 수사학의 교차대구구조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A. 서론 및 인사말 1:1~8
B. 소아시아 도시들의 수사학적 상황 1:9~3:22
C. 인을 뗌: 출애굽에서의 재앙들 4:1~9:21, 11:15~19
D. 입에서는 달았다가 배에서는 쓰게 된 책: 공동체에 대항하는 전쟁 10:1~15:4
C'. 바벨론/로마의 압제로부터의 출애굽 15:1, 5~19:10
B'. 악으로부터의 해방과 하나님의 세계적인 도시 19:11~22:9
A' 결론 22:10~22:21


이 구조는 요한문서의 일반적인 구조를 잘 분석해 주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들에도 나타난다. 특히 그녀는 전체구조를 서로 대칭시켜 분석함으로 계시록도 당시 수사학의 일반적인 문서 기록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 구조는 전체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개략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계시록 구조 이해에서 적용된 일곱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나선형적인 반복(recapitulation)의 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또한 C-D-C'가 계시록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종합적이어서 그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보캄의 문학적인 구조


St. Andrews의 신약 교수인 보캄은 피오렌자가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한 중심에 위치한 일곱 시리즈에 초점을 맞추어 일반 문학 형식을 따라 분석을 시도하였다.


서론 1:1~8

일곱 교회를 향한 일곱 메시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와 교회들에 대한 최초의 환상 1:9~3:22
세 개의 일곱 시리즈와 두개의 삽입들로 이어지는 하늘에 대한 최초의 환상 4:1~5:14
일곱 인들 6:1~8:1; 8:3~5
숫자배열: 4+1+(1+삽입)+1
※ 삽입은 심판에 제기된 이슈(7:1~16)와 답을 줌(7:17)
일곱 나팔들 8:2; 8:6~11:19
숫자배열: 4+1+(1+삽입)+1
※ 삽입(10:1~11:13)은 9:20~21에 제기된 이슈에 대한 답
악과의 충돌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 12:1~14:20; 15:2~4
일곱 대접들 15:1; 15:5~16:21
숫자배열: 4+3(삽입 없음) 이유: 심판의 급박함을 알림
음녀 바벨론 17:1~19:10
바벨론으로부터 새 예루살렘으로 전환 19:11~21:8
신부 새 예루살렘 21:9~22:5

결론 22:6~21

 

보캄은 피오렌자나 최근 학자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계시록의 문학적인 구조를 밝혀내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분석의 장점은 4~16장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묘사로 나오는 일곱 시리즈를 잘 분석함이다. 특히 그는 일곱 시리즈에 존재하는 수사학적인 구성 사이클을 정확하게 분류해 냄으로 일곱 시리즈를 통해 보여주려는 심판의 모습과 완전함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묵시문학적인 특징과 문학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수사학적인 계시록의 특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였다. 계시록이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회람용 서신으로 보내졌으므로 수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Poythress의 수사학적인 구조(Rhetorical Structure)


Ⅰ. 서문 1:1~3
Ⅱ. 인사말 1:4~5a
Ⅲ. 본문 1:5b~22:20
A. 감사 1:5b~8
B. 주요부분 1:9~22:5
1. 네가 본 것 1:9~20
2. 지금 있는 것 2:1~3:22
3. 앞으로 있을 것 4:1~22:5
a. 주기 1: 일곱 인 4:1~8:1
b. 주기 2: 일곱 나팔 8:2~11:19
c. 주기 3: 상징적인 인물들과 추수 12:1~4:20
d. 주기 4: 일곱 대접 15:1~16:21
e. 주기 5: 바벨론의 심판 17:1~19:10
f. 주기 6: 백마 심판 19:11~21
g. 주기 7: 여덟 번째와 결정적인 행동: 새 예루살렘 21:9~22:5
C. 마지막 교훈들과 권고들 22:6~20
Ⅳ. 마감하는 인사 22:21


그의 처음 분석은 수사학적인 서신서의 성격과 주기들의 평행의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특히 계시록 1:19에서 네가 본 것, 지금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을 따라 잘 분석하였다. 그러나 너무 간략하여 계시록의 몸체부분을 잘 드러내지 못함으로 더욱 복잡하고 구체적인 구조를 다음과 같이 확장된 구조로 분석해 준다.


Poythress의 확장된 구조는 계시록의 중심인 복잡한 부분을 수사학적인 교차대구구조를 통해 잘 분석해 주고 있다. 그의 두 번째 분석은 서로 부분에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반 수사학 구조로 분석한 결과 서문과 인사말 부분이 잘 들어나지 않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추가를 한다.

 

1. 주기 1: 일곱 인 5:1~8:1

a. 장면: 보상하는 자 5:1~14

b. 여섯 심판들 6:1~17

a'. 교회를 위한 약속 7:1~17

bb. 일곱 번째 심판 8:1

2. 주기 2: 일곱 나팔 8:2~11:19

a. 장면: 보상하는 자들 8:2~6

b. 여섯 심판들 8:7~9:21

a'. 교회를 위한 약속 7:1~17

bb. 일곱 번째 심판 8:1

 


이러한 구조를 살펴보면 요한이 얼마나 정교한 구조와 문학적인 기교와 기법들을 사용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보면 요한이 환상을 보면서 바로 계시록을 기록한 것보다 오랫동안 묵상하고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당시 문학인 수사학을 따라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특히 Poythress교수의 서신서 구조를 따른 수사학적인 분석과 교차대구법에 따른 메시지의 구성은 이러한 저자의 각고한 노력을 보여 준다. 결국 계시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바른 관점을 이 구조는 어는 정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통해 우리는 계시록이 하나님의 계시록 수사학적인 구조를 따라 구성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요한은 자신이 본 환상을 당시 문학 이론인 수사학과 묵시문학을 사용하여 계시록을 기록하여 자신이 섬겼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을 해석할 때 유기적인 계시의 특성을 이해하여 접근하고 계시록이 주려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밝혀내야 한다.

 


요한계시록 묵시문학의 특징들과 수의 의미

 

묵시문학의 특징


묵시문학은 BC 200년에서 AD 100녀 사이에 나타났던 문학으로 묵시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존 콜린즈의 정의를 빌려보면 “해설체의 글을 가진 계시문학의 한 장르로써 타계적(他界的)인 존재에 의해 인간 수용자에게 계시가 주어지되 종말적 구원을 내다보는 의미에서 시간적(時間的)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초자연적인 세계와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공간적(空間的)인 초월적(超越的) 실재(實在)를 나타내 보이는 문헌(文獻)”이다.


예언과 비교되는 묵시문헌의 장르상의 특징에 대해 조지 래드(George E. Ladd)는 첫째, 숨겨진 세계의 비밀과 의인들의 고난의 이유와 천국 도래의 때와 방법 등을 주로 꿈, 환상, 천상여행 등의 수단을 통해 전달하는 묵시적인 특징(revelaatory character)이 있다.


둘째, 꿈과 환상 혹은 천생여행 등을 저자가 실제로 체험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기교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인위성(人爲姓 artificial nature)을 그 특징으로 한다. 셋째,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용해서 위장된 권위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가명성(假名性 pseudonymity)의 특징이 있다. 넷째, 과거의 역사를 예언의 형태로 재해석(再解釋)한 유사예언성(pseudo-prophecy)의 특징이 있다. 다섯째, 예언에 비해 더 심한 상징을 쓴다는 점에서 과격한 상징주의(symbolism)의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묵시는 내용상 다음과 같은 종말론(終末論)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궁극적 악(惡)의 원리와 궁극적 선(善)의 원리, 어두움과 빛이 우주 속에서 서로 투쟁한다는 우주적 이원론(二元論)과 고통과 사망의 현시대(現時代)의 의(義)와 생명(生命)을 올 시대를 대조하는 종말론적(終末論的) 이원론(dualism)의 특징이 있다. 둘째, 현 역사는 망하고 미래의 종말이 와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점에서 역사와 종말의 긴장을 상실한 특징이 있다.

 

셋째,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믿는다는 면에서 궁극적 낙관주의(樂觀主義)를 드러내고 있지만 현재의 역사에 관한 비관주의(悲觀主義 pessimism)의 특징이 있다. 넷째 의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에 아무리 합당한 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예정된 코스가 될 때에만 도래한다는 숙명론(宿命論 determinism)의 특징이 있다. 다섯째 의인들이 아무리 바라 살아도 현재의 역사는 별로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피동윤리(ethical passivity)의 특징이 있다.

 


묵시문학으로써의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비밀(“속히 될 일”, 1:2; 4:2)을 몰래 특정한 그룹들에게만 전해주려는 성격을 지닌다. 저자는 자신의 글을 “묵시”로 부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보내서 “지시하신”것이라 한다(1:1). 여기 “지시하신”이란 말은 정확하게는 “은근히 나타내다”, “상징으로 표시하다(σημα?νω, to indicate)”는 뜻이다. 귀 있는 자만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2:7, 11, 17, 29; 3:6, 13, 22) 지혜 있는 자만이 본서에 나타난 상징과 암호(暗號)를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상징들이 있다. 저자는 자신이 상징을 사용하고 있음을 상징해석(象徵解釋, 1:20; 4:5; 5:8; 12:9; 17:9-10, 12, 15, 18)과 직접 언급(17:7, 9)을 통해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엔 구약에서 온 것(바벨론, 아마겟돈, 발람,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용 등)도 있고 유대 묵시문서에서 온 것(붉은 달, 흰 두루마기, 어린 양, 짐승 등)도 있으며, 수신자들의 이해와 경험에 근거한 요한계시록 특유의 것(백마와 그 탄자, 하나님의 성전, 아이를 밴 여인 등)도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많은 상징들 중 숫자로 표현된 중요한 상징들은 일곱 교회, 묵시적인 네 말 탄 자(6:1-8), 144,000(7:2-8; 14:1-5), 두 증인, 사흘 반(11:9, 11), 짐승의 수 666(13:18) 등이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묵시적인 숫자들


묵시적인 전승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숫자들은 예언자가 그의 책을 기록할 때에 부여했던 정확한 의미와 결합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1:4, 11), 일곱 영(1:4; 4:5; 5:6), 일곱 촛대(1:12, 20; 2:1), 일곱 별(1:16, 20), 일곱 봉인이 찍힌 책(5:1),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 양(5:7), 일곱 천사의 손에 있는 일곱 나팔(8:2 이하), 일곱 천둥(10:3), 일곱 대접을 통한 일곱 재앙(15:1, 7; 16:1 이하)과 같이 “7”이라는 숫자가 가장 빈번히 나온다. 이 숫자는 신의 섭리의 완전성과 포괄적인 충만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7”의 반을 의미하는 “3+1/2”은 완전수와 구분되어 3년 6개월(12:14 = 42개월, 11:2; 13:5 = 1260일, 11:3; 13:5), 혹은 3일 반(11:9, 11)이 의미하에 제한된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그리고 “4”라는 숫자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평면으로 되어있는 땅의 네 모퉁이에(20:8) 천궁을 떠받치고 자연의 폭력을 제압하는(7:1-2; 9:14-15) 천사 넷이 서 있다(7:1). 요한계시록에서 “4”는 우주적인 질서와 관련된다.

 

숫자 “12”는 완전함을 상징한다. 열두 주춧돌이 있는 성벽과 열두 진주로 된 열두 대문이 있고(21:12-14, 21) 새 예루살렘은 사로와 세로가 같고 각각 12,000 스다디온(21:16)이다. 12지파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데(7:5-8), 12의 배수인 144,000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의 완전수가 표현된다(7:1-8; 14:1-5).

다음 장에서는 이상의 숫자로 나타난 상징과 그 숫자의 의미들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그 숫자들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기여하는 바를 주석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들의 의미와 상징


요한계시록의 계시적 방법인 환상들은 상징들로 되어 있다. 이 상징들은 글자 그대로 볼 것이 아니고 다시 해석하고 풀어야 할 것들이다. 이 상징들은 숫자와 색깔과 동물 및 기타 사물로 분류되어 진다. 그 중에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의 상징적 용례들은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다.

 

1/2(8:1) 긴장된 한 순간
1/3(8:7) 일부분
1/4(6:8) 보다 적은 일부분
2(11:2, 4; 13:11) 지상의 증인(2는 구약에서 증인이 되는 수(신 19:15)이다)
3+1/2(11:9, 11; 12:14) 성도의 증거 및 환난의 기간(완전수 7의 절반은 짧은 기간을 상징, 단 9:27에서 유래)
4(4:6; 5:8; 7:1) 땅의 수(동서남북, 땅의 사방)
5(9:5) 제한된 재앙의 기간(메뚜기의 생존 기간)
6(13:18) 사탄의 수(7에 1이 부족)
7(54회 나옴) 완전수, 성수(3+4=7, 천+지=완전)
8(17:11) 새로운 국면의 시작(7을 1주기로 볼 때 8은 다음주기의 시작이 됨)
10(12:3; 13:1; 17:3, 12, 16) 세상군왕의 세력, 세상만수(6+4=10)
12(21:12, 14; 22:2) 3×4=12, 천지합수(天地合嫂), 완전수, 이스라엘의 수
24(4:4; 5:8; 19:4 등) 12+12, 신국의 증인(2×12=24)
42(11:2; 12:5) 3년 반(42개월)
144(21:17) 성도들의 성의 크기(12×12)
666(13:18) 사탄의 수, 부족의 수, 적그리스도의 수
1000(10:2, 3, 4, 7) 세상에서의 오랜 기간(10×10×10)
1260(11:3; 12:6) 3년 반(1260일)
1600(14:20) 세상적 넓은 면적, 4×4×100=1600
12000(21:16) 성도들을 용납할 만한 넓이(12×1000)
144000(7:4; 14:1) 구원 받은 자의 수의 많음, 완전함(12×12×1000)
200000000(9:16) 멸망 받을 자의 수의 많음(2×10000×10000)
만만이요 천천(5:11) 다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7”

 


요한계시록의 구성의 원칙과 숫자 “7”과의 관계

7을 구성상의 원칙으로 삼은 것 외에도 개념을 설명하는데 사용한 것을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랍비 유대교에서도 7을 구성의 원칙으로 사용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은 유대교적인 배경을 많이 가지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의 일곱 가지 내용(마6:9-13), 일곱 가지 비유(마13:3-50), 일곱 가지 화 있을진저(마23:13-29)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요한계시록의 문학적인 구성은 유대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곧 일곱이라는 수사(數詞)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양상을 표로 나태내면 다음과 같다. 이 중 일곱 교회를 포함하여 몇 가지의 주석적 고찰을 통해 7이 내용에 기여하는 바를 알아보려고 한다.

 


일곱 교회(1:4, 11; 2:1-3:22)의 주석적 고찰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1:4) 당시 로마 정부의 지배하에 있는 소아시아 서부에 있는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는 아시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요충지대를 이루어 지리적으로 중요하면서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7”은 하나님의 창조를 위한 칠일(창 1:31-2:3)과 일곱 인(5:5)과 일곱 나팔(8:2)과 위한 일곱 대접(15:7) 등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따라서 일곱 교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움직이심을 위한 것이다.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1:11) 요한은 영적 상태에서 신비 체험을 했는데, 이 체험한 내용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전달하라는 명령을 하늘 음성을 통해 받았다. 일곱 교회의 선택의 중요성을 설명한다면 이 도시들은 대체로 황제숭배의 중심지였고, 편지를 회람하기에 편리한 지역에 있었고 요한이 이 교회들과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곱 교회는 문자적으로 에베소는 “온전히 목적된”, 서머나는 “몰약”, 버가모는 “숱한 결혼”, 두아디라는 “고통의 향기”, 사데는 “붉은 자들”,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 라오디게아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 이 땅의 교회에서 하나님은 아무런 권위가 없고 사람들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 교회 상황(2:1-3:22)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인자 같은 이의 환상(1:13-16), 일곱 교회 환상(2:1-3:22), 천계의 환상(4:1-22:3)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중 두 번째인 일곱 교회의 환상은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실황을 그대로 소개하는 서신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환상은 현상학적인 환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1장 4절에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로 명시되어있고 1장 11절에 일곱 교회의 명단이 나온다. 2장부터 이 명단의 순서에 따라 편지를 구성하는데 편지의 구조는 거의 다 비슷하게 현황 소개(칭찬), 권고, 경고(책망), 약속(축복)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내용은 교회의 실정에 따라 예수님께서 적절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다르다.

 

여기 일곱 교회 편지들은 일곱 교회에 각각 보낸 것을 모은 것이 아니고 매 교회마다 이 일곱 편지들을 함께 보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곱 편지들의 끝에 나오는 공통된 말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이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도 교회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각 교회마다 일곱 편지를 함께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수신자가 한정되어 있는 편지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교회, 어느 개인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요, 신탁으로 모든 교회, 모든 신자들은 일곱 교회의 모습에서 자아의 현상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 일곱 편지들은 대게 ① “기록하라”는 명령, ② 그리스도의 모습, ③ 교회에 대한 칭찬, ④ 책망, ⑤ 경고, ⑥ 이기는 자의 상급, ⑦ 깨우치는 말 등 일곱 가지 항목으로 공통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주님은 언제나 그 교회의 형편을 잘 아시며, 그 교회에 대한 합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합당한 말씀을 하시며 합당한 상급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일곱 교회의 각 상황과 그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연구해 현대 교회의 현장에서 적용함으로써 각 교회가 교회의 원형을 구현토록 해야 하겠다. 일곱 교회의 특징과 상징, 그리고 주님이 그들에게 하신 칭찬, 책망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에베소 / 전통적인 교회
선행, 인내, 악에 대한 배격, 교회질서 확립, 주를 위한 성실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퇴보함
전통 고수에는 열심이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등한시하는 교회

서머나 / 가난하나 부요한 교회
영원한 부를 누림
물질에 초연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교회

버가모 / 우상숭배한 교회
고난과 순교의 위기에서 믿음을 굳게 지킴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있음
혼탁한 세태와 결탁한 교회

두아디라 / 악한 여선지자의 교회
사랑, 신령한 봉사, 믿음, 회개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좇음, 우상숭배, 행음
많은 이단에 심취되어 진리를 떠난 교회

사 데 /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교회
몇 사람이 영적 순결을 지킴
극도의 형식주의, 영적 무기력, 행함이 없는 믿음
그릇된 교리, 형식주의에 빠진 교회

빌라델비아 / 연약하지만 충성스러운 교회

적은 능력으로도 철저히 순종함
말씀을 잡고 바른 신앙을 견지하는 교회

라오디게아 / 부요하나 가난한 교회
미지근함, 교만함, 영적 가난, 영적 수치, 영적 소경 세대를 좇아 인기를 누리며 물질적 부를 누리는 세속화된 교회


일곱 영(1:4; 3:1; 4:5; 5:6)에 대한 주석적 고찰


그 보좌 앞에 일곱 영(1:4) 일곱 영은 4절의 하나님과 5절의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일곱 영이 위치하고 있는 제 2위의 신적 존재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영” 즉 “성령”이라고 크라프트(Kraft)는 주장한다. 성령을 일곱으로 말한 이유는 스가랴서에서 성령을 일곱 눈으로 비유했기 때문이다(슥 3:9; 계 5:6). 7은 완전과 성결을 상징하는데 성령의 위(位)는 단일하시되 그의 속성과 권능은 완전하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일곱이란 완전수로써 표현한 것으로 일곱 영이란 완전하신 성령이란 뜻이지 성령이 일곱이란 뜻은 아니다. 반 델 모일렌(Van Der Meulen)은 일곱 영이란 뜻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수의 은사(恩賜)들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을 가리킨다(사 11:2)고 하였다. 스가랴 4장 2절의 존재에 있어서는 하나의 등대이나 기능면에서는 일곱 등불인 것과 같이 실체와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이나 하나님의 역사의 강화된 기능과 움직이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은 일곱인 것이다.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5:6) 일곱 눈에서 그 눈은 시력과 지력과 지혜를 상징한다. 4장 5절에서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해석된 것처럼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해석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에 소속된 성령의 모든 권능을 말하는 것으로 고린도전서 2장 10-11절에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와 요한계시록 2장 23절의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등에서 언급된 성령의 특성이다.

 


일곱 사자(1:20)의 주석적 고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1:20) 계시자 자신의 친절한 상징 해석으로 “사자(?γγελο?)”라는 말은 천사로 번역될 수도 있으므로 그 교회의 수호천사(단10:13-14; 20-21)를 가리킬 수도 있고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한편 요한계시록은 교회 사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인격화한 표현이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점에서 교회의 사자는 그 교회와 동일시(2, 3장)되기도 하고 구별(1:20)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γγελο?는 “사자”라고 번역되었으므로 일곱 교회 사자들은 각 교회를 주관하고 치리하는 당시의 최고 지도자로 감독이나 장로, 목사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


요한계시록은 결정적으로 현 우주와 역사가 종결되고 신천신지(新天新地)가 개시되는 대종말이 도래하기 직전의 말세에 상당 기간에 걸쳐 대환난이 있을 사실을 상호 점진적으로 강도를 더해가며 연속하는 관계에 있는 일곱 인, 나팔, 대접의 환상으로 보여 준다.이들은 각각 7중으로 된 재앙을 한 단위로 하는 3대 7중 재앙인 동시에 각 재앙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각 재앙의 마지막 재앙이 곧 다음 일곱 재앙 전체를 내포하게 되어 결국 전체가 하나의 재앙이기도 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 7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관련된 숫자로 점진적 사역의 완성 및 종결과 그로 인한 안식 또는 점진적 사역으로 완성된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이며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숫자로 이 일련의 3대 7중 재앙은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오염된 세상을 완전하게 종결시키실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결국 창조와 심판 모두 하나님의 섭리임을 보여 주고 있다(롬 11: 36).

 


일곱 인(5:1)의 주석적 고찰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5:1) 요한은 유대교에서 중요문서나 증서, 유서, 매매증서를 인봉하는 전통(사 29:11; 단 12:4, 9)을 따라 두루마리를 일곱 인으로 봉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 철저한 비밀이 보장되었다는 말이며 이제부터 전개될 하늘나라의 비밀이 7단계 문학구조를 통해 완전무결하게 폭로될 것이라는 뜻도 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받아 인을 떼심(5:5)은 계시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계시의 내용대로 집행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시, 구원, 심판의 세 가지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일을 하실 수 있는 이가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다윗의 자손이 되사 우리의 짐을 맡아지시고, 하나님 앞에 서신 자로서 계시(啓示), 구원(救援), 심판(審判)의 책임자이시다.

 


일곱 나팔(8:2)의 주석적 고찰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8:2) 나팔(σ?λπιν?)은 본래 하나님이 직접 역사에 간섭할 때 그 사실을 알리는 신호(출 19:16, 19; 사 27:13; 욜 2:1; 습 1:16)로 사용했다. 그밖에 군대 신호용(슥 9:14-15)도 있고 종말에 대한 경고의 나팔(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도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는 나팔이다.

 


일곱 대접(15:7)의 주석적 고찰


네 생물 중 하나가 …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15:7) 마지막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진노가 가장 극렬하게 실현될 것을 경고한다. 5장 8절의 금 대접은 성도들의 기도를 나타내는 향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복의 재앙으로 가득 찬 대접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금 대접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엄격성(嚴格性)과 확실성(確實性)을 강조하는 말이다. 대접들을 쏟는 것은 마지막 재앙으로 종말을 표현한다. 인(印)은 1/4을 나팔은 1/3을 말하나 대접은 종말의 전부를 말한다.


일곱 대접 재앙은 일곱 나팔의 재앙의 순서와 내용이 비슷하다. 그런데 나팔 재앙 때에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 긴 막간(10:1-11:13)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막간 없이 계속된다. 대접 재앙은 나팔 재앙에 비해 좀 더 적극적이며, 결정적(決定的)이며, 전면적(全面的)이며, 최종적(最終的)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대접 재앙은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나팔 재앙과 동일하고 이런 재앙의 대부분은 출애굽 때의 재앙(출 7-10장)을 모형으로 삼은 형태를 보여주는데 두 환상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래드(George E. Ladd)는 일곱 대접 재앙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간접적(間接的)인 목적을 가진다고 한다.

 


붉은 용의 일곱 머리와 일곱 면류관(12:3)의 주석적 고찰


한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12:3) 어린 양(예수)은 일곱 뿔 일곱 눈(5:6)인데 붉은 용(사단)은 일곱 머리 열 뿔이다. 어린 양의 일곱 뿔 일곱 눈은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성령님을 가리키고(5:6) 붉은 용의 일곱 머리 열 뿔은 이 세상의 일곱 적그리스도와 열 왕을 상징한다(17:9-12).

 

7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사단은 이것을 참용(僭用)하여 하나님인 듯이 오만한 태도를 취한다. 용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은 간접적으로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들이 그 머리들로 세상 나라를 대표함으로 그것을 자기 안에 총괄하고 있는 그 용은 그의 왕관도 지니고 있으며 그것으로써 이 세상의 우두머리로 증명된다.

 

용의 머리에 씌어진 이 면류관은 선한 싸움의 승리자에게 씌어지는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강탈과 찬탈한 허식의 관(δι?δημα)이다(13:1; 19:12). 이 용의 모습은 당시 소아시아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로마 정부와 이교도들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용은 사단을 상징하는데 비록 일곱 면류관을 썼을지라도 이는 승리를 뜻하지 않고 다만 권세를 참칭(僭稱)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 면류관은 승리의 월계관이 아닌 오만한 권위의 왕관인 것이다. 그것은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9:12)에게 대항하는 주제넘은 면류관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2”

요한계시록에서 “2”가 나타나는 곳은 다음과 같다.

 

이 중 두 증인만 주석적 고찰을 통해 알아보겠다.

 


두 증인(11:3)의 주석적 고찰


두 증인에 대한 본문은 내용상 크게 두 증인의 증언(3-6)과 두 증인의 죽음(7-13)으로 나눌 수 있다. 권성수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두 증인을 문자적으로 보지 말고 상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4절의 등식(等式) 즉 “두 증인=두 감람나무=두 촛대”를 제시하는데 이 등식이 두 증인이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라고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두 증인이 본문의 두 촛대가 계시록적 이미지로 보았을 때 교회(1:20)이기 때문에 두 증인을 교회로 해석한다.


박수암 박사도 두 증인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두 증인은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의 기능을 가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2라는 수는 증인의 수(신 17:6; 19:15)이므로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증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았다.박윤선 박사도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킨다는 상징적 해석을 취한다. 그 근거로써 “이 땅에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는 말씀이 스가랴 4장 14절과 관련되어 있음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3”


요한계시록에서 “3”이 등장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보리 석 되와 세 더러운 영과 새 예루살렘의 세 문에 대하여 주석적 고찰을 하면서 “3”이 내용에 기여하는 바를 알아보고자 한다.

 

보리 석 되(6:6)의 주석적 고찰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6:6) 본 절은 심한 불경기와 기근의 결과로 오는 비참한 현실을 암시한다. 한 되(χοινι?)는 약 1.08리터의 곡식으로 한 사람의 하루 소비량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마 20:2)이다. 그런데 노동자는 그 돈으로 평상시에 밀 한 말을, 보리의 경우에는 세 말을 살 수 있었는데 기근으로 인해 밀 한 되, 보리 석 되 밖에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일반 시세의 10배의 비싼 값이다. 더군다나 밀과 보리는 노예나 빈민이나 처벌받는 병사나 또는 가축이 먹는 가장 값싼 곡물(왕하 7:18)로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보리 석 되라는 것은 생필품의 부족과 물가폭등을 의미한다.

 

세 더러운 영(16:13, 16)의 주석적 고찰


개구리 같은 새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16:13) 개구리(β?τραχο?)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부정한 동물로 규정된다(레 11:9). 용은 12장 13절의 붉은 용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이 용을 옛 뱀, 사단이라고 부르며 짐승은 13장에 나오는 바다의 짐승과 땅의 짐승을 가리킨다. 세 더러운 영이 하는 일은 이렇다.

 

용과 짐승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계략을 세우고 이것을 실천시키는데 거짓 선지자가 활약한다. 거짓 선지자는 입으로 선전하고 설득시키는데 주력하여 사람들을 기만하고 유혹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마귀의 삼위일체로 그들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 하나씩 나타난다. 즉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새 예루살렘의 세 문(21:13)의 주석적 고찰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21:13)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회막을 중심으로 사면에 진을 친 것(민 2장)처럼, 에스겔이 바라본 새 예루살렘의 모습(겔 48:30- 34)처럼 요한은 새 예루살렘도 네 면 -동, 북, 남, 서의 순서로- 으로 각각 세 문이 있어 열두 문이 있음을 서술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4”


요한계시록에서 4는 네 생물(4:6, 8), 네 천사(7:1; 9:14), 땅 네 모퉁이(7:1), 사방의 바람(7:1), 금단 네 뿔(9:13), 네 말 탄 자(6:1- 8)에서 나타나는데 이 중 네 생물과 땅 네 모퉁이에서 4가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주석적 고찰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네 생물(4:6, 8)의 주석적 고찰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4:6) 요한이 본 네 생물의 모양은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 같았다. 사자는 용기와 왕적 권위를 송아지는 힘(왕상 7:25)을 사람은 지혜(창 1:27)를 독수리는 민첩을 상징함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네 생물이 하나님의 전지전능 같은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것과 같은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다. 이광복 박사는 세 가지 면에서 네 생물의 의미를 분석하였는데 원리적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특성과 하나님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이고, 상징적 의미로는 이 땅의 아름다운 보석을 총동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명(21:10-17)하듯 뛰어난 생물을 표시한 것이며, 적용적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당할 성도의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곁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4:8), 보좌를 수호하며, 심판을 도우며(6:1, 3, 5, 7), 보좌를 운행하는 존재들로 보좌 바로 옆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를 호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땅 네 모퉁이(7:1)의 주석적 고찰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7:1) 여기서 네 모퉁이는 지구를 정사각형의 평면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우주관에서 땅의 사방 끝으로 전 세계를 의미한다. 땅 네 모퉁이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예언한 이사야 11장 12절의 “땅 사방에서”와 동일한 의미의 표현으로 온 세계를 가리킨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땅 네 모퉁이가 온 세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데 동의하나 피터 럭크만은 이사야 40장 22절 -지구가 둥글다고 말씀하셨다- 와 누가복음 17장 -지구의 양면이 동시에 낮과 밤임을 말씀하신다-을 근거로 동, 서, 남, 북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5”


요한계시록에서 “5”가 등장하는 곳은 9장 5절과 10절의 다섯 달과 17장 10절의 다섯 왕이 있다.

 

다섯 달(9:5, 10)의 주석적 고찰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9:5) 마귀적인 황충의 임무는 악한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는 것으로 5개월의 기간으로 한정된다. 이 기간은 메뚜기가 사는 기간 -5개월- 에 의해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 그 기간은 메뚜기의 침략의 위험이 상존(常存)하는 건조기(봄에서부터 늦은 여름까지)와도 일치한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숫자가 다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이 다섯 달도 묵시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5”라는 숫자는 “충만, 완전”을 상징하는 “10”의 절반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한계시록에서 종말 전 고난의 철저성과 완결성을 충만하게 표시할 때는 “10일 동안의 환난”이라고 했다(2:10). 그러므로 5개월의 고난은 장차 올 대환난에 앞서서 일어날 예비적 작은 환란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고난은 전면적,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시대적으로 발생하는 고통을 의미한다.


그 수의 출처(出處)가 무엇이든 그것은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이 악(惡)에서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한정된 기간을 나타내며 이 재앙은 이유 없는 잔인한 행위가 아니라 악이 하나님의 심판 없이 무한정으로 계속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 주는 것이다.

 

다섯 왕(17:10)의 주석적 고찰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17:10) 17장과 18장은 그리스도 일을 반대한 이교도의 아성(牙城)인 로마, 곧 큰 음녀(淫女)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다. 17장에서 붉은 짐승 위에 앉은 음녀에 대한 환상을 소개한 후(1-6절) 요한은 그의 상징들을 상세히 풀이한다.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인데, 다섯은 이미 망했고 하나는 있으며 또 하나는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가장 간단한 해답은 요한은 계승되는 로마 황제들 속에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짐승이 최후로 출연하기 전에 또 한 왕이 잠시 동안 통치해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한 다섯 황제는 Augustus(BC 30-AD 14), Tiberius(14-37), Claudius(41-44), Nero(54-68)이다.

 

그리고 현재 있는 자는 Vespasian(69-79)이며 아직 이르지 않은 자는 Titus(79-81)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해석은 Augustus를 첫 황제로 간주하는데 사실상 그의 전임자 Julius Caesar가 이미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과 Nero와 Vespasian 사이에 잠간 통치했던 세 적수의 황제들을 생략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이다. 다섯 왕은 이미 망하였고 하나는 지금 있으며 마지막은 다가올 것이라는 것은 바로 임박한 마지막 때를 선포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6”

요한계시록에서 6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네 생물의 여섯 날개가 등장하는 4장 8절이다.

 

여섯 날개(4:8)의 주석적 고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4:8) 이사야 6장 2절의 스랍들처럼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다. 날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신속성을 의미한다. 이사야에 나오는 스랍의 여섯 날개 중 둘은 얼굴을 가리고(두려움과 겸손), 둘로는 발을 가리고(존귀), 둘로 날았다(활동). 날개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한 것은 통찰력과 지혜를 가리킨다.이광복 박사의 여섯 날개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원리적 의미

① 두 날개 → 말씀에 신속히 순종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성경 의 법적 증인 용어

② 두 제자 → 주님도, 세례요한도 제자를 파송함에 있어서 둘 씩 짝지워 보내심

③ 두 증인 → 대 환난기의 전반에 에스라 같이 회개를 촉구하 는 하나님의 추수의 종들

 

상징적 의미

① 얼굴을 가림 → 영광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성부 하나님)

② 두 발을 가림 →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아는 겸손 (성자 하나님)

③ 날아서 다님 → 성령의 인도로 지칠 줄 모르는 신앙의 향상 (성령 하나님)

 

적용적 의미

① 얼굴을 가림 → 나는 죽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 내는 충성된 성도의 생활

② 두 발을 가림 →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감사하며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는 성도의 겸손

③ 날아서 다님 → 신랑되시는 주님을 사모하는 신부로 양육시 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충성과 봉사 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

                        헌신적 생활


예배적 의미

① 얼굴을 가림 →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겸손의 자세

② 두 발을 가림 → 발은 때 묻은 죄를 상징, 때 묻은 죄를 회 개하는 자세

③ 날아서 다님 → 날개는 지속적인 활동을 의미하는데 열심 있는 봉사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666”


짐승의 환상의 제 2장면으로 땅에서 짐승이 나온다. 이 짐승은 언뜻 보면 어린 양과 같다. 그러나 말하는 입을 자세히 보면 용의 입과 같다. 이 짐승의 중요한 임무는 사람을 유인해 첫 번째 짐승을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 수단으로 이 짐승은 거짓 예언자적 행동을 한다. 그래서 이 짐승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며, 만든 우상으로 말을 하게 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리그 이 짐승에게 굴복하는 사람에게만 “666”의 표를 주어 생필품을 구입하게 한다. 그 반대자들은 자연히 생존권(生存權)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 “666”의 정체는 무엇일까? 본 연구자는 밧모 섬의 요한에게 계시된 장차 되어질 역사적인 종말의 사건 중에서 짐승의 표인 666의 비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을 위해 상징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 두 부류의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그 두 해석의 비교와 통찰을 통하여 “666”의 실제적인 의미에 더 다가서는 시도를 해 보았다.

 

666(13:18)의 주석적 고찰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13:18) 요한계시록에 특별히 지혜가 요청되는 때가 있는데 그 것은 본 절과 17장 9절의 숫자를 풀이하는데 필요하다. “지혜(σοφ?α)”는 대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조항의 한 항목(5:12)으로 나오고 “총명(νουν)”은 이성적인 판단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과 “666”의 숫자는 우리 인간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동원해도 결정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신비(μυστηριον)”이다.


비더울프(W. E. Biederwolf)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666을 헬라어 알파벳을 사용하여 라테이노스(Lateinos)란 말로 라틴제국을 의미하며 로마제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존슨(Alan F. Johnson)은 666을 부정한 악의 삼위일체 또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완전한 모방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았다. 핸드릭슨(William Hendricksen)은 666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적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보았다.

 

이 외에도 666을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개벨라인(A. C. Gaebelein), 세이스(J. A. Saiss), 트란스(T. F. Torrance), 모리스(C. L. Morris), 엘렌(J. Ellun) 등이 있다. 그들은 666을 암호라기보다는 부정한 악의 삼위일체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완전한 모방(模倣)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로 본다.


이광복 박사는 “666” 자체를 놓고는 상징이나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본문의 내용을 볼 때 표 받는 대상이 나오고 위치가 명백하게 나오므로 상징이나 영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666의 사건은 대환난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전 3년 반은 표를 받도록 권장하는 유혹이 난무하는 거짓 평화시대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경제 사회에서 고립시켜 나갈 것이며, 후 3년 반에는 예비처의 보호성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강제로 받게 될 것으로 종말에 짐승이 통치하는 후 3년 반에 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면 경제 활동이 금지될 것을 의미하므로 사고파는 것이 금지되는 것은 영적 내지는 상징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144,000”


시온 산의 144,000(14:1)이 인 맞은 자 144,000(7:4)과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큰 무리(7:9)가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가에 대한 주장들을 비교하여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144,000(14:1)에 대한 주석적 고찰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14:1)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은 7장4절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 그들은 환난을 통과하기 위해 봉인되어 땅에 있다가 그 다음 나타나는 14장 1~3절에는 휴거되어 하늘에 올라가 있다고 하였으며, 어거스트 반 린(August Van Ryn)은 대환난 동안 구속받은 이스라엘의 십사만 사천이 육체적인 죽음을 면하여 그들의 구원주인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에 들어가는 7장에서 본 바로 그 성도들로서 7장에서는 그들이 환난 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그 시련의 때를 통과한 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을 7장 4절에 하나님의 인 맞은 자의 무리와 동일하게 봄으로써, 이들이 대환난의 전 3년 반 동안 전도의 사명을 받은 유대인의 무리라는 이론이다.

핸드릭슨(William Handricksen)은 7장 1-8절은 이 땅 위에서 싸우는 교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하늘의 승리한 교회의 모습은 7장 9-17절이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14장은 승리한 교회가 축복받고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남을 진술하고 있고 십사만 사천은 사탄의 거짓을 용납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렌스키(R. C. H. Lenski)는 이들은 7장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십사만 사천명은 구속함을 받은 보편적 추수라고 하였다.

 

모리스(C. L. Morris)는 이 완전수의 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를 의미하며 모든 성도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이들은 지상에서 원수들의 박해를 받았지만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늘나라에 오게 된다고 하였으며, 존슨(Alan F. Johnson)은 14장은 7장보다도 사건을 한층 더 진전시키고 있는데 그 무리의 구성원들은 동일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달라져 있다고 말한다.

 

7장에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인치심을 받고 사탄의 공격에 대해 준비가 다 되었다. 다음에 한 무리(순교당한 자들)가 하늘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섬기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14장에서는 구속된 자들 전부가 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반복은 예배의식의 한 형상이라고 하였으며, 왈부르드(John F. Walvoord)는 바람직한 견해는 이 장의 십사만 사천을 7장의 십사만 사천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으로 그 숫자가 처음 언급되는 때는 대환난이 시작되는 때로 보이며 14장에서 박해가 있는 그 공포의 날에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으며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때 시온 산의 어린양과 함께 서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을 7장 4절의 인 맞은 자와 동일하게 보는 견해로 문자적인 의미로써의 유대인의 인 맞은 자 십사만 사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의 총칭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요한의 환상은 7장 초두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인 맞은 자 십사만 사천 명이 9절 이하의 흰옷 입은 무수한 무리고, 그리고 14장에서는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의 첫 열매로 묘사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레드(George E. Ladd)는 십사만 사천은 7장 9~17절의 인 맞은 사람들의 숫자가 동일하고 여기서 이들은 그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속받은 자들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하였으며 마운스(Robert H. Mounce)는 십사만 사천은 앞으로 있을 환난들에 대비하여 인침을 받고 같은 수인 십사만 사천이 마지막 시련을 넘어서 안전하게 서있는 것은 한 사람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으로 요한의 상징들은 유동적이므로 두 집단을 굳이 같은 무리로 동일시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7장의 두 번째 환상에 나오는 무수한 무리와 일치하며 둘 다 전 역사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의 완전한 전체를 묘사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을 7장 4절의 인 맞은 자 십사만 사천과는 구별되며, 7장 9~17절의 흰옷 입은 무수한 무리로 보는 견해로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의 전체를 묘사하는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144,000명과 14장 1절의144,000은 동일한 무리로 단순히 유대 지파나 유대인 성도들만이 아니라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총칭한 완성된 교회로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144,000이라는 표현이 신앙의 정절을 상징하고 영적 순결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성도들뿐이고 그들은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된 자들로 첫 열매는 하나님께 구별된 것을 상징하기에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수 “10”


요한계시록에서 “10”은 10일 동안의 환난(2:10), 붉은 용의 열 뿔(12:3), 첫째 짐승의 열 뿔과 열 면류관(13:1), 붉은 짐승의 열 뿔(17:3, 7, 12, 16), 열 왕(17:2)에서 나타난다. 그 중 10일 동안의 환난과 열 왕에 대해서 주석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10일 동안의 환난(2:10)의 주석적 고찰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2:10) 서머나 교회에게 주어진 이 말씀은 요한 당시 로마의 모진 핍박을 받은 기독교인들의 실상을 증명해주는 말씀으로 서머나 교회가 앞으로 더 큰 고난을 받을 것을 예시한다.

 

여기서 서머나 교회의 환난의 기간을 10일로 제한했는데 김철손 박사는 “10일 동안의 시험”을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그 기원은 다니엘 1장 12, 14절에서 찾을 수 있다. 다니엘서는 거의 문자적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나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하므로 10일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요한계시록에는 “10”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대체로 고마 황제의 강력한 세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12:3, 13:1, 17:3, 7, 12, 16)이라고 덧붙인다.

 

박윤선 박사는 날수(日數)를 햇수(年數)의 상징으로 보고 이 “10일 동안의 환난”을 로마의 디오크레시안(Diocletian) 황제 아래서의 10년간(303-312)의 혹독한 핍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한편 이상찬 박사는 이 “10일 동안의 환난”을 네로(Nero) 때로부터 디오크레시안(Diocletian) 황제 때에 이르기까지의 약 250년간의 환난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엉거(M. F. Unger)는 짧은 기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섬머(Summers)는 십일은 극단적이며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는 수로 정의한다. 여러 주석가들이 이 “10일 동안의 환난”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한 반면 렌스키는 본문이 환상에 관한 논란 문제가 아니므로 10일은 이광복 박사는 역사적으로 해석하면 서머나 교회의 짧은 핍박의 기간을 의미하며, 예언적으로 해석하면 서머나 교회가 순교시대를 예표(豫表)하므로 초대 교회가 받은 짧은 핍박 기간을 의미하며, 응용적으로 해석하면 전 세계 교회가 각기 처한 상황에서 받을 핍박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열 왕(17:12)의 주석적 고찰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17:12) 천사는 열 뿔은 아직 왕관을 받지 못한 열 왕이라고 해석해 준다. 그들은 권세를 받으면 그것을 짐승에게 주어 짐승과 함께 어린 양과 싸울 것이다.

 

열 왕은 로마의 황제가 아닌데 그 까닭은 로마 황제와는 달리 아직 나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바벨론의 멸망을 애도(哀悼)하는 18장 9절의 세상의 왕들도 아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그들은 부활한 네로의 통솔(統率)아래 동쪽으로부터 집단적으로 침입해 오는 파르티안 총독들로 풀이한다.


백위트(Beck- with)는 열 왕을 적그리스도에게 굴복(屈服)할 세상 열방의 모든 권력을 나타내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10이라는 수는 상징적인 것으로 완전을 가리킨다. 그것은 특정한 열 왕이나 부활한 로마제국의 10개의 유럽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로버트 마운스는 주장함으로써 숫자 10의 문자적 해석을 거부한다.

 

김철손 박사도 “10”이 충만수, 완전수를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현실적으로 실수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열 왕의 상징적인 해석을 두둔한다. 그는 열 왕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강력한 집권력을 가지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자들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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