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가장 난해한 책이며, 많은 오해와 억측을 낳게 한 책이다. 확실히 본서는 보통 책과는 다른 책이다. 

언어는 때로 은밀하고, 상징은 종종 별스럽다 못해 괴팍스럽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학자들이 각기 다양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먼저 유대의 묵시문학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한다. 

그 결과, 상징적 환상 및 은어들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유대의 묵시문학은 국가와 개인을 나타내는 신화적 동물들의 기괴한 상징을 들을 포함하였는데, 요한계시록은 신약에서 그러한 유대 묵시문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일한 성경이다. 한편 유대교나 기독교의 묵시문학들은 악한 시대를 위한 위로의 책으로 알려졌다. 요한계시록도 이러한 맥락에서 고군분투하는 신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는 책이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자신의 상징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박해받는 성도들과 박해자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주적인 투쟁에 관한 장엄한 회화적 언어들의 박진감은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 나타난

사상들의 인상적인 표상들을 통해 초대교회의 공통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1부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성경의 명칭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문서의 첫 낱말이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계시록’이란 명칭도 본서의 첫 낱말인 ἀποκάλυψις에서 취해진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란 명칭은 2세기경부터 본서의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본서의 정확한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본서의 첫 구절이 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ς χριστοῦ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요한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 아마도 2세기의 사람들은 ‘계시’가 요한에 의해 선포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이라고 불렀던 듯하다.

4세기 이후 사본들에는 이 명칭에 새롭게 ‘신학자’라는 의미의 τοῦ θεολογοῦ가 첨가되어 ‘신학자 요한의 계시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θεολογοῦ라는 말은 예언자를 가리키는 προφήτης와 동의어로서, ‘하나님의 고지(告知)를 전하는 자’를 뜻하기 때문에, 본서의 명칭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계시’란 말은 ‘숨다’란 뜻의 καλύπτω와 ‘드러남’을 나타내는 전치사 ἀπό의 결합형으로서, ‘하나님 편에서 비밀로 간직해 오던 사물을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타락한 인류에게 가리어졌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요한에게 천사들을 통하여 계시된 것이 본서이다.

 

Ⅱ.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1) 진보적인 견해

신약성경 중에서 요한 문서에 속하는 다섯 권이 저자 문제에 있어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3세기 초 이후로 요한의 기록이 아닐 것이라는 회의적인 견해가 거의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Gaius, Dionysius, Eusibius, Cyril, Chrysostom, Theodoret, Nicephorus).

 

그들은 먼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문체를 비교하였는데, 거기서 문체와 용어상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요한계시록의 문체는 문법을 무시한 불완전한 문장과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독특한 면을 보여준다. 즉 요한계시록의 요한 저작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체상의 독특성이 히브리어로 사고하고 아람어로 말하며, 헬라어를 썼던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고 파악하고 본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보다도 더 히브리적인 사고에 젖은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두 번째로 본서의 요한 저작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내용상의 차이점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표현함에 있어서 요한복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천상의 영광이라는 상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현실적인데 비해,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이고 종말론적이다. 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전자는 내적이고 정신적인 데 반해, 후자는 외적이고 가현(假現)적이다. 뿐만 아니라, 박해에 대해서도 전자는 원리적인 데 비해서, 후자는 구체적이며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세 번째로 저자의 신분에 관한 문제이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저자가 자신을 여러 차례 밝히고 있지만(참조, 요 13:23 ; 19:26 ; 21:17, 20 등),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종 요한’(계 1:1 ; 22:8)이라고 한 외에는 일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더욱이 하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이 된 12사도의 이름에서도(참조, 계 21:14~20) 저자 자신은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저자는 전체적으로 자신을 열두 사도 이외의 어떤 인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 요한 저작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네 번째로 역사적인 문제로서, 사도 요한은 일찍이 순교하여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상의 이유로 요한을 요한계시록의 저자로 생각지 않는 학자들은 요한 이외의 인물들에서 본서의 저자를 찾으려고 한다. 먼저 본서의 저자로 장로 요한을 생각하는 학자들은(De Wette, Ewald, Holtzmann, Harnack, von Soden, Moffatt) 에베소 교회에서 시무했던 장로 요한이 교외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마가복음의 저자인 요한 마가가 본서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Spitta, Weiss). 이들 학자들은 마가가 초대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에 용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Juelicher, Charles) 본서 자체가 예언서로 불리었고(참조, 계 1:3 ; 22:7), 당시 교회는 예언자라는 직분이 있었으므로(참조, 고전 12:28), 아시아의 어떤 예언자 요한이 본서의 저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진보적인 학자들의 주장은 추측에 의한 단정일 뿐 신빙성은 없다. 더구나 그들의 견해는 요한계시록이 위서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한 결론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2) 전통적인 견해

초대교회 이후 계속된 요한계시록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려는 견해들은 교회사를 통해 명멸의 고비를 겪으면서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먼저 외증으로 순교자 Justine의 인용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동방 교회의 Papias와 더불어 요한계시록을 처음 인용한 학자로 알려졌으며, 본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그 후 Jerome도 요한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저자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다 유력한 외증으로 Irenaeus는 본서를 가리켜 ‘요한이 본 환상’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요한의 제자인 Polycarp의 제자였다. 또한 서방 교회에서는 Tertullian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요한 저작설을 최초로 주장하였는데, 그는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을 자신의 저작 속에서 인용하였다. 결국 많은 문제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요한 저작설에 대한 보수적 견해는 여전히 유력하였다(Alford, Meyer, Godet, Harrison, Zahn).

 

다음으로 내증을 보면 저자는 네 번이나 자신이 요한이라고 밝혔다(참조, 계 1:1, 4, 9 ; 22:28). 물론 비평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본서에 언급된 요한이 사도 요한 이외의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하게 대두되었던 장로 요한설도 ‘파피아스’의 보고 이외에는 증거가 없으며, 다른 사람이 요한의 이름을 도용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또한 비평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본서의 저자 요한에게서 사도적 자의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도 인정된다. 하지만 그것은 요한이 겸손한 때문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 것이다. 더구나 본서의 분위기는 요한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그만큼 본서 분위기는 급박하고 독자로 하여금 위기감과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또 요한복음과 비교하여 문체와 내용면에서 차이점을 보인다는 것이 비평학자들의 지적이지만, 동일한 저자라고 해서 똑같은 용어와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요한계시록의 상황은 요한복음과는 전혀 다른 상황, 곧 성취될 종말론적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따라서 두 책 사이에서 차이점이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요한계시록에 대한 사도 요한의 저작권 문제는 비평학적 연구의 여지를 남기지만,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였다는 견해는 여전히 유력하다 하겠다.

 

2. 수신자

요한계시록은 엄격하게 구분하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소아시아의 7교회에 보내진 서신이다(참조, 계 1:11). 그리고 그 수신자는 요한이 밝힌 바와 같이 명확하고,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되었다. 하지만 당시 소아시아에는 이들 7교회 외에도 많은 교회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이들 교회들보다 크게 성장한 교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7교회만을 수신자로 택한 것은 상징적인 수를 중요시한 본서의 성격상 요한이 7이라는 완전수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서는 당시 실재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통해서 전 세계 교회로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요한이 말년에 사역한 교회들로서, 로마의 대로(大路)를 잇는 요지에 위치하였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과의 연고지 문제와 더불어 교통의 요지로서, 소아시아의 입지 조건을 생각했던 듯하다.

 

Ⅲ. 기록 연대

 

요한이 계시를 받은 곳은 본서에 밝혀진 대로 밧모섬이다(참조, 계 1:9). 밧모섬은 에베소와 고린도 중간 바다에 산재한 군도의 하나로서, 면적 40㎢ 정도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채석장(採石場)이 있는 황무지로, 당시 죄인들을 유배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으며(Clement), 지금도 이 섬에는 ‘계시의 동굴’이라는 요한과 관련된 고적이 남아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결정함에 있어서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본서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요한을 유배시킬 만한 기독교 박해가 언제 일어났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학자들의 생각은 갈라진다. 즉 초대교회사 속에서 교회가 겪은 혹독한 박해는 ‘네로’(Nero)와 ‘도미티안’(Domitian) 시대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본서의 기록 연대도 자연히 이들 두 시대로 좁혀진다.

 

먼저 요한이 네로 시대에 유배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54~68년경으로 본다(Tertullian, Jerome, Hilgenfeld, Lightfoot, Westcott, Salmon). 이들 학자들은 몇 가지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는데, ①계 11에 언급된 성전 측량에 대한 기사는 아직 성전이 파괴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최소한 70년 이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②계 17:9~11에 언급된 일곱 왕에 대한 기사는 눅 2:1의 ‘아구스도’에서부터 계산하면 제6대 네로 시대가 되므로, 이 시기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고 한다(Stuart, Ewald). ③계 13:18의 짐승의 이름에 대한 상징수 666은 히브리어 내지 라틴어로 ‘네로’(NRON)를 기본수로 환산한 숫자이므로, 요한계시록의 기록 시기는 네로의 재위 기간이었다고 주장한다. ④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는 바울이 요한을 본받아 7교회에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 점으로 보아, 요한이 바울 이전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기 연대설 못지않게 유력한 견해가 도미티안 박해 시기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이 견해는 조기 연대설이 포함한 여러 가지 난점들을 해명하면서 고대와 현대 비평학자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였다(Irenaeus, Melito, Clement, Origen, Eusebius, Zahn, Moffatt, Alford, Rist, Harrison, Thiessen). 이들 학자들은 첫 번째로 본서에 나타난 교회의 상태가 에베소 교회의 초기 상태와는 비교도 안 되는 타락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조기 연대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매우 부유한 것으로 묘사되었다(참조, 계 3:17). 만약 이 기사가 정확하다면, 본서는 결코 네로 시대의 기록일 수 없다. 왜냐하면, 네로 시대에 라오디게아는 지진으로 인해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어느 정도의 부를 누릴 정도라면 시일이 흐른 도미티안 시대가 어울린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에베소 교회의 니골라당(참조, 계 2:6)에 대한 언급은 바울 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이들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세 번째로 이들 학자들은 네로의 박해와 도미티안의 기독교 박해를 비교하여 본서의 내용과 부합되는 것은 도미티안의 박해였다고 주장한다. 즉 네로의 박해가 국부적이었던 반면에, 도미티안의 박해는 제국 전반에 걸친 박해였다(Irenaeus, Eusebius). 따라서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박해의 여파가 미친 시기는 도미티안 시대의 박해 기간이었다. 더욱이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사실은 유배가 도미티안 황제의 형벌 방식이었다는 전승(Eusebius)에도 어울린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도미티안의 박해 시기인 95, 96년경이 된다 하겠다.

 

Ⅳ. 기록 목적

 

1. 기록 당시의 상황

‘도미티안’의 통치는 극심한 재난과 함께 시작되었다. 도미티안은 Vespasian의 아들로서, 그의 형인 Titus 다음의 후계자였지만, 그를 불신한 ‘티투스’의 장기 집권으로 81년까지 실권을 갖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까지 화산 폭발과 지진 등 재난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1년에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한 도미티안은 자기도취에 빠져 로마 백성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다. 물론 다른 황제들도 신격화된 예는 있지만, 대부분 본의 아니게 숭배를 받았을 뿐이며, 사후에 원로원에 의하여 비로소 신격화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미티안은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신격화하였으며, 83년에 어린 아들이 죽자, 그 아들을 신으로 선포하고 아들의 어머니를 여신으로 선포하였다. 이 같은 신격화와 그에 따른 터무니없는 명칭들과 있을 수 없는 능력들에 대한 찬양 등은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이미지 속에 잘 반영되었다. 한편 로마의 역사가들은 도미티안 치하에서 행해졌던 교회에 대한 박해를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는 자기를 숭배하지 않고 유대 풍습을 받아들이며, 그에게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를 귀양 보내고, 기독교 신자들을 사형에 처하였다(Eusebius). 이처럼 그는 가시적인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유대인의 성경을 받아들이거나, 그리스도교의 예수를 전하는 자들을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지로 보냈다. 물론 그의 박해 대상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대인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더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유세비우스’는 도미티안을 가리켜 ‘하나님에 대한 증오와 적의에 있어서 네로의 계승자이며, 우리를 두 번째로 박해했던 자’라고 하였다.

 

2. 기록 목적

요한계시록은 기록 당시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 제국의 박해로 암운이 드리워진 교회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로마 관헌의 억압에 대한 절박한 위험은 교회의 생존에 계속적인 위협을 가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 사이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팽배했던 까닭에 기독교인들은 격려와 경고가 필요했다. 즉 그들에게 절망으로 인해 포기하기 쉬운 믿음을 지켜 주는 격려와 외적인 박해와 내적인 배교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필요했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의 내용 속에 명확하게,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교회들에 대한 격려는 자신들의 적을 심판하고 교회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두었다. 요한계시록에 수록된 아시아 교회들에 대한 모든 권면은 그리스도의 출현에 관계된 구절들로 묘사되었으며, ‘내가 속히 임하리니’(계 3:11)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본서의 목적은 격려와 권면이요, 중심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준비’라 할 수 있다.

 

Ⅴ 특징 및 구조

 

1. 특징

 

1) 문학적인 특징

요한계시록은 포로기 이후 발생한 유대의 묵시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특징은 유대의 묵시문학보다 더 통일되고 체계화되었으며, 그리스도 중심으로 완성되었다.

 

구체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면,

 

첫 번째로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숫자로 엮어진 신비한 책이다. 계시 전체가 상징으로서, 그 하나하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숫자들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과도한 상징적 묘사는 아마도 로마의 박해 아래 놓인 교회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듯하다.

 

두 번째로 문학적인 구조는 선과 악이 투쟁하는 이원적인 체제로 진전된다. 악의 세력의 총수인 지상의 왕은 한때 선을 핍박하여 격심한 고통을 주지만, 종내 멸망하여 심판을 받는다. 반면에 선은 비록 핍박을 받지만, 최후의 승리와 복락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합치되어 새로운 세계를 이루며 일원적인 대단원으로 끝을 맺는다.

 

세 번째로 요한계시록은 당시의 상황과 상징적인 요소, 그리고 이원화된 주제의 대비로 인해 문장이 특이하다. 요한계시록의 극적(Dramatic) 윤곽은 유대 묵시문학에서 취했으며, 시적 음률 역시 히브리적인 요소를 취하였다. 또한 본서는 문법적인 오류가 많기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각 절 내의 단어 수를 일정하게 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문법을 무시한 경우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법적인 오류에 대해 학자들은 저자 요한이 헬라어에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Westcott, Lightfoot), 혹은 아람어로 저술한 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까닭이라고도 설명한다(Torry).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받은 계시로서 환상에 심취된 상황이었고, 묵시문학의 제한된 체계에 맞추어야 하는 이중적인 부담 때문에 문법적인 오류가 발생했으며, 조급한 상황이었으므로 면밀한 수정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Harrison).

 

2) 신학적인 특징

요한계시록의 신학 사상은 말세적이고 내세적이며, 개인적이다. 특히 이러한 신학적인 특징은 신•구약 중간기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한 근간이 되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전편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의 묵시문학과 대조된다. 즉 요한계시록은 유대의 묵시문학을 답습하면서도 이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수난이 일찍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강조된 것은 다른 묵시문학과 궤를 달리하는 점이다.

 

또한 본서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장차 재림하셔서 심판자로 군림하시는데, 이러한 주권자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장엄한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본서가 성자와 관련된 신관, 그리스도관, 메시아관, 종말론, 그리고 성경론, 마귀론 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본서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를 부각시켜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구조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숫자와 묘사들이 수 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감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적 특징은 본서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크게 구분하면 3단락으로 나뉘고, 그 중에서 본론은 7개의 소단락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7종의 환란의 7종의 환상도 본서의 구조적 요소들이다.

 

 

제2부 요한계시록의 특별 주제들

 

Ⅰ. 니골라와 니골라당

니골라는 요한계시록 외에 다른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나타난다(참조, 행 6:5). 그는 소위 일곱 명의 집사 임명에서 가장 나중에 언급된 사람이다. 그의 집사 임명과 함께 기독교 공동체는 새롭게 조직되었으며, 행정적인 면에서 원시 공동체로부터 독립하였다. 이 일곱 명의 지도자들 가운데 네 명의 전승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았는데, 예를 들어, 스데반은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빌립과 브로고로도 바울 서신과 요한 문서에서 언급되었다. 니골라는 바로 이들 네 집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계 2:15의 니골라당과 행 6:5의 니골라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전승사적인 맥락에서 니골라 집사와 니골라당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1. 집사 니골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집사들은 우선 헬라어를 사용하는 완전한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니골라는 안디옥 출신의 개종자였다. 당시 헬라주의자들은 대체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불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방당한 이후 사마리아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물론 니골라가 이 선교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니골라는 헬라주의자로서, 이들의 선교 여행에 동참했으리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헬라주의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차이점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과 구분된다. 먼저 그들은 율법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과는 다른 성경 해석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보다 덜 엄격한 정결 규례를 지켰다.

 

또 다른 차이점은 마지막 때에 있을 메시아 대망에서 나타난다. 헬라주의자들은 마지막 때 있을 이방인들의 회개를 감안하여 우주적이 구원을 생각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면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는 생각으로 포교를 계속하였다.

 

니골라의 경우도 이러한 헬라주의적 특성이 엿보인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율법의 타당성을 반대했다는 사실이 전승에서 집요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그는 다른 헬라주의자들보다 율법에 대해 적대감을 더 갖고 있지도, 덜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 헬라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보다 오히려 금욕적인 경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유대인들에 의해 오히려 배척되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에게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었는가 하는 문제의 경우, 바울은 결혼해도 좋지만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에 반해 니골라는 그리스도인이 결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그 또한 실제로 결혼을 포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Clement).

또한 그는 영지주의적인 금욕주의자들의 교부였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는 영지주의 내에서 정결법을 영적으로 해석하였다고 한다(Irenaeus). 하지만 니골라가 내세운 주장들이 니골라당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 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다. 단지 당시의 어떤 단체들이 혁신적인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대표자를 내세웠던 사정을 고려할 때, 니골라당 또한 니골라의 금욕주의적인 주장들을 내세웠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니골라당

니골라당은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에서의 사역과 가르침 때문에 요한으로부터 정죄 받았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동일한 부도덕과 우상 숭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니골라당은 비록 그들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아디라 교회 내에도 있었던 듯하다(참조, 계 2:20~25). 이렇게 볼 때, 요한이 편지를 보낸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세 곳이 니골라당의 영향을 받았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그들의 행위가 교회와 그리스도에 의해서 미움을 받았다. 버가모 교회의 경우는 니골라당을 추종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자칭 여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용납되었고, 또 그녀가 그리스도의 종들을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었다. 특히 그녀의 이름은 아합의 악명 높은 베니게인 왕비 ‘이세벨’에게서 온 것으로, 그녀의 특별하고 이단적인 지도력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여하튼 요한의 정죄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니골라당의 정체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가르쳤던 발람(참조, 민 25:1~2 ; 31:16)처럼,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이간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는 이단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심오한 비밀들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지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교회들 가운데서 요구되는 사상과 행위에 상반되는 우상 숭배나 부도덕과 같은 이단적인 행위들을 실행하였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특징은 1세기말의 영지주의적 특징과 유사하다. 더구나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거부했다. 따라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니골라당은 니골라로부터 시작된 영지주의의 한 종파였다고 하겠다(Kraft, Zahn).

 

Ⅱ. 메시아 사상의 발전

 

1. 구약성경의 메시아관

구약성경은 메시아 대망 사상을 하나의 흐름으로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일관된 메시아관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만큼 구약의 메시아관은 통일되지 않았고, 때때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로서, 그때에 모든 이방은 징벌을 당하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왕국이 지상에 실현되는데, 그 통치자가 곧 메시아인 것이다. 그러므로 포로기 이전까지만 해도 메시아는 현세적인 이상적 왕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 이 같은 민족적 메시아 왕국관은 사라지고 개인적인 메시아관이 이를 대치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개인의 회개가 강력하게 장려되었다. 포로기 이후의 메시아관은 개인적이며, 영적인 풍토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신분과 메시아가 할 일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는 바가 없다. 더구나 다니엘서와 같은 구약의 묵시문학에서 보여주는 메시아 사상의 중심은 하나님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왔다.

 

2. 신약성경의 메시아관

하나님 중심의 메시아관, 즉 유대인들의 메시아 기대와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조화시킬 수 없는 간격이 발견되었는데, 이 간격이 곧 갈보리의 비극으로 발전한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선명하게 메시아의 내면성을 천명하였다. 그는 분명히 왕이지만,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왕은 아니었으며, 그는 무력으로 이방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는 자의 마음을 지배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세에 초연한 인격이 아니라, 고난의 종으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만민의 구주가 되셨다. 한편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으나, 중간기에서 일시적이지만 레위지파로 대치된 적이 있었다(참조, 에녹서와 마카비서 등).

 

그러나 예수에게서 다윗의 계보는 재확인되었다. 또한 그가 구약에서의 넓은 의미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 즉 제사장과 예언자와 왕의 삼권을 이행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서 구약성경의 진정한 메시아의 그림자는 성취되었고, 또한 만왕의 왕으로 천명되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아관은 1세기를 통해 점차 확실해졌고, 요한계시록은 그 기반을 따랐다.

 

3. 요한의 메시아 사상

요한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계 5:5)로 나셨으며, 그는 어린양으로 친히 대제사장이 되는 동시에 제물이 되시고, 또 속량 받는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분으로 나타난다(참조, 계 5:6, 10). 또한 그에게 있어 메시아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신다(참조, 계 19:16).

 

이러한 요한의 관점은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명칭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 등의 공식 이름 외에 ‘하나님의 아들’(계 2:18), ‘인자’(계 1:13), ‘사람의 아들’(계 14:14) 등 다양한 메시아적 명칭, 그리고 ‘어린양’(계 5:6, 12 ; 6:1),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계 1:5), ‘거룩하고 진실한 자’(계 3:7), ‘충성되고 참된 증인’(계 3:14), ‘다윗의 뿌리요, 자손’, ‘광명한 새벽별’(계 22:16) 등의 명칭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신분과 사역을 가리킨다.

 

특히 요한은 메시아 사상의 초점을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맞추었다. 즉 그리스도는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으로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려 28회나 나타난다. 이 점은 유대 묵시문학의 성격과 다른 것이며, 영혼을 구원하고 죄를 대속하심을 대강령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또한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대속물일 뿐더러 그의 백성의 인도자이시다. 이 점에서 요한이 본 계시는 외경의 계시와 유사하다. 죽으신 어린양이 부활하시고, 영원히 성도들을 인도하신다(참조, 계 14:4).

 

그리고 어린양의 이 같은 대속의 원리는 사랑이었다(참조, 계 1:5). 즉 메시아로서, 오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에서 탁월하신 것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보이신 사랑에서 탁월하신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묵시문학적 메시아 사상의 중심이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신약성경의 묵시문학적 메시아 사상에 이르러 대속의 희생, 곧 사랑으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Ⅲ.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요한계시록은 보통 ‘묵시적’이라고 불리는 문헌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개 묵시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B. C. 200~A. D. 100년 사이의 성경 세계에서 번창했던 일련의 저서들에 적용된다. 때문에 묵시문학의 한계를 정확하게 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학자들이 묵시문학을 분류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특징 때문이다. 대부분의 묵시문학적 문헌들은 과거의 어떤 특출한 인물에게 하늘의 중재자가 신적 신비를 알려 주는 형식을 취하며, 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환란의 때를 종식시키고 악을 멸절시키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대부분의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악의 세계와 싸울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하여 비관적이다. 그래서 역사의 혼돈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우주적 세력이 생생하고도 때때로 기괴한 상징들로 묘사된다.

 

1. 묵시문학의 유형

묵시문학은 역사와 신학의 관계성 속에서 현재의 역사적인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형성되었다(Ladd). 그리고 계시의 주된 역할은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았으며, 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연기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설명은 종교적이거나, 아니면 철학적인 전망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기본적인 요소들을 구분함으로써 묵시문학의 유형을 분류할 수 있다.

 

먼저 묵시문학은 항상 종말론적이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체제를 종결시키기 위하여 이 시공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시는 미래의 어떤 일정한 기간을 다룬다. 둘째, 묵시문학은 이원론적이다. 즉 묵시문학의 요소에는 하나님과 사탄이 존재하며, 별개의 두 시대가 대립한다. 예를 들어, 세속적이고 악한 현시대와 영원하며, 완전히 의로운 미래의 시대가 있다. 전자는 사탄의 지배 하에 있으며, 후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감독 아래 있다. 두 세계는 곧 현재의 가시적인 우주와 하늘에서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완전한 세계이다.

 

이 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함께 묵시문학의 시간관은 엄격한 결정론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즉 묵시문학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한 시간표에 따라, 그리고 미리 결정된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결정하신 대로 움직여 나간다. 결국 묵시문학의 유형은 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철학적인 유형을 띠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특징들로 구분되는 예가 많다.

 

2. 묵시문학의 문학적 특징

Russell은 묵시문학의 문학적 특징을 ‘성격은 은밀하고, 형태는 문학적이고, 언어는 상징적이며, 저작권은 익명적이다’고 단정하였다. 그의 파악은 매우 정확하며, 오늘날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먼저 상징적인 언어 및 숫자 등은 묵시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상을 자유롭게 펼쳐 나갈 수 있도록 가장 기괴한 것의 상징들이 규범이 되었다. 어떤 특정한 상징들은 해석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징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류(類)의 놀라운 상징들이었다. 더욱이 도래할 세계에 대한 상징의 경우 환상가들은 전적으로 상징에 의지했으며, 그것이 아니고서는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제약을 타개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들도 있다.

 

다음으로 묵시문학은 거의 예외 없이 익명(匿名)이다. 묵시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고, 오직 그의 저술을 고대의 어떤 유명한 인물이 저작한 것으로 가장했다. 그 결과, 과거의 역사는 예언으로 다시 기록되었다. 비록 상징적인 묘사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사건의 전개는 실제 저작의 시대까지도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학자들은 이러한 묵시문학의 특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인들의 시간관념과 결부시켜 설명한 ‘러셀’의 견해가 가장 보편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졌다. 즉 그는 히브리인들이 과거와 현재를 일치시키고, 어떤 의미에서 묵시자가 고대의 명사(名士)의 영적 재현이 된 같은 시대 사람이라는 강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묵시문학이 상징적이고 익명적인 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였다고 설명하였다.

 

3.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으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묵시문학인 다니엘서와 짝을 이루는 신약성경의 묵시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을 폭넓게 사용한다든가, 계시의 주된 수단으로 환상을 이용한 것, 이 시대의 종말과 새 세계의 극적인 도래 등은 모두 묵시문학적 주제들로서,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으로 보게 하는 근거들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과의 유사성 못지않은 상이성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일반적인 묵시문학이 익명의 저자인데 반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분명히 밝힌다(참조, 계 1:1, 4, 9 ; 22:8). 그는 독자를 얻거나 현재의 의미를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역사 속에 있는 어떤 유명한 인물을 찾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며, 따라서 그의 메시지가 권위적이며,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묵시문학적 관련성은 요한의 역사관과 동시에 일반 묵시문학과의 차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1) 요한계시록의 역사관

요한계시록의 역사관은 표준적인 묵시문학과 다르다. Von Rad는 묵시문학과 예언이 각기 다른 역사관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묵시문학가에게 있어서는 현세가 악하며, 무의미하다. 현세란 종말 직전에 있을 가장 중요한 마지막 시기를 향하는 순간적인 막간에 불과하다. 대조적으로 요한계시록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속량적 행위를 시발점으로 삼는다. 요한은 세계 역사의 개괄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개입에 대한 전주곡으로 제시하지 않고, 어린양의 두 차례에 걸친 강림에 의하여 한계가 지어진 기간으로 해석한다. 즉 요한이 제시하는 세계 역사란 초림에서부터 재림에 이르는 구체적인 역사이다. 따라서 한 예언적 속량사의 전망을 지닌 저자가 곧 임할 심각한 핍박을 대비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준비시키고 또 격려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간의 상이점

본서와 묵시문학 사이에는 위에서 예로 든 익명성 여부만이 아니라, 묵시자들이 대체적으로 현시대에 대해 부정적임에 반해, 요한이 매우 균형적으로 현시대를 바라본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즉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의 위대한 행위는 충성된 자들을 위하여 사탄에게 승리하는 속량사적인 것이었다고 가르친다. 또한 요한은 도덕적인 위기를 하늘의 해석자에게 맡기지 않고 종말론적인 진리를 공개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스스로 설명하고, 놀랍게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목회서신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적 유형에 속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묵시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도 없다 하겠다. 그래서 Kuemmel은 ‘요한계시록이 비록 묵시문학으로 간주되지만, 신약성경의 틀과 한계 내에서라야만 저자의 메시지가 지닌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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