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그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한 고통을 뜻한다. 죄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결과는 영혼에 그치지 않고 육신의 삶에 저주와 질병과 파멸을 가져다준다. 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더 허망하며, 삶에서 발생하는 온갖 저주와 고통의 배후에 죄의 영향이 영적으로 켜켜이 누적돼 있어 그 심각성을 알아도 스스로 떨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절망적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네 죄 사함 받았으니 평안히 가라’ 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음에도 늘 죄의식과 육체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해 우리는 번번이 넘어지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믿기 전의 죄와 결부시켜 심각한 번민과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창골산 -
이에 본고는 죄의 기원과 그 본질적 특성을 영과 혼과 육의 관점에서 원죄와 본죄와 자범죄로 구분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이어 이러한 죄의 결과가 영적·육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만들어 내는지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칭의의 내용을 소상히 살펴봄으로써, 죄의식과 죄책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찰하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신앙생활에서 자유와 권리를 회복해야 하는 당위성을 밝히고자 한다.
2. 죄의 시작
2.1. 죄의 정의
죄(罪)란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의 의도에서 벗어나 임의로 살려는 것을 말한다.1)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 모두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라는 의미다. 인간의 본성은 목적론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우선 모든 피조물과의 관련 속에서 아담은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창조되었다. 아담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살면서 어떤 역할을 성취하도록 지음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2) 결국, 불순종으로 인해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죄다.
기준이 있어야 죄가 성립한다. 도달 목표나 기준이 없는 것은 죄라고 규정할 수 없다. 성경도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한다(롬 5:13). 대체로 죄라 하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양심이나 도리에서 벗어난 일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죄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를 말한다. 그래서 율법을 집약한 십계명에서 하나님께 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 중 하나님께 대하여 불의를 행할 때 죄라고 하고, 인간에 대하여 불법을 행할 때는 악이라고 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목표와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죄라 정의했지만, 그 목표와 과녁에 관해서는 구약과 신약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죄를 규정하는 기준이 달라 죄에 대한 개념도 달라진다. 구약에서의 죄는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앙을 죄로 간주한다(요 16:9).
2.2. 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은 우선,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절대로 불의를 행치 아니하신다(욥 34:10).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그에게는 어떤 불의도 없으시다(신 32:4, 시 92:15). 하나님은 악에게 미혹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약 1:13).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죄악이 외부로부터 세상에 들어온 것은 명백하나, 그 기원이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그 어떠한 주장도 적절치 않다.
성경은 오히려 죄가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일군의 천사를 창조하셨는데, 그 중 한 무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여 타락하였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로서, 그 타락의 과정은 비유적으로 에스겔과 이사야가 언급한 적이 있다(겔 28:13-19, 사 14:12-15). 예수께서도 마귀를 태초(아르케, )부터 살인한 자로 규정하셨다(요 8:44).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감독을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자는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유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딤전 3:6). 타락한 천사의 속성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교만이다(유 6).
바빙크(Herman Bavinck)도 실은 죄가 영의 세계 즉 천사들의 타락에서 시작되었는데, 인간을 통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지적했다.3) 벌코프(Louis Berkhof)는 천사들의 타락을 초래한 죄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말했지만,4) 김기동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와와 아담의 범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천사의 죄를 표명한다.5)
인류에게 죄의 기원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아담의 범죄다. 영의 세계에서 온 유혹자 마귀는 뱀을 이용하여 하와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도 죽지 않는다고 유혹했다. 아담은 하와의 간청에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였고, 그것이 최초의 범죄가 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 죄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점과, 죄가 가져온 영원한 부패와 더불어 인류의 연대성 때문에 그 죄의 결과가 모든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점에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했으므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죄는 단순한 부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처벌이 뒤따르는 죄책으로서의 죄를 말한다.6)
2.3. 원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를 신학적으로 원죄(peccatum originale)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으로 창조하시지는 않았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만 해도 원죄는 없었다. 원죄는 하늘에서 타락한 천사인 마귀와 관련되어 있다.
우선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모든 생명체에게 하시듯 그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 명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추가하신 계명은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계명이다. 이로써 그들은 짐승보다 한 차원 높은 혼을 지니게 되고, 세월이 흘러 땅에 사람들이 충만하게 되었을 때 그 중 한 사람을 택하여 영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이때의 영은 천사와 같지 않고 경건한 자손(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지어진 영으로, 아담이라 한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인 아담을 영적 환경인 에덴동산에 이끄시고 영을 살게 하시려고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선악과 계명이다. 예수께서도 육체는 식물(食物)로 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영적 존재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셨다(마 4:4). 선악과 계명은 아담에게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고, 하나님과 사귐의 도구였다. 그 계명을 지키는 한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을 에덴에 함께 있게 하셨다.
마귀는 ‘디아볼로스’()라 하여 이간자로 불린다. 하나님과 사귀며 계명을 순종하는 아담을 하나님과 이간하기 위해 마귀는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유혹하였다.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아담보다 먼저 선악과를 먹었는데 이는 타락한 천사가 하늘에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사단적인 죄의 재판(再版)이었다. 아담이 범한 죄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죄를 범한 순서는 하와가 먼저지만, 아담의 죄가 원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영의 특성이 유전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 유여하시나 오직 하나의 영만 지으셨다(말 2:15). 그 영은 아담을 통해 넝쿨처럼 유전된다. 하와에게 있는 영도 아담에게서 온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와의 죄는 개별적인 죄로 유전되지 않고 아담의 죄만 전해지게 되었다. 즉, 아담이 범한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은 중지되고 마귀에게 속은 아담은 죄인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원죄다.
3. 죄의 전이와 결과
3.1. 죄의 전이
벌코프는 원죄(original sin)라고 명명하게 된 이유에 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원죄는 인류의 원초적인 뿌리로부터 파생된다. 원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생명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인간이 모방한 결과가 아니다. 원죄는 인간의 삶을 오염시키는 모든 실제적인 죄들의 내적 뿌리가 된다.7) 원죄를 아담이 범한 첫 번째 죄로 오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원죄’ 대신 ‘유전된 죄’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다.8) 원죄가 아담에게서 그 후손에게로 파생되어 나가는 과정은 유전적인 특성을 지닌다. 죄는 영과 함께 유전되므로 본질적으로 죄는 영적이다(롬 7:11). 이를 죄의 전이(轉移)라고 한다.
죄의 유전은 영의 유전과 맥락이 닿아 있다.
죄는 유전한다고 하고 영에 대해서는 창조설이나 선재설을 주장하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아담이 범죄한 이후 그 영향이 온 인류에게 미쳤다고 말하고, 칼빈(John Calvin)도 원죄를 영혼의 모든 부분에 퍼져 있는 인간 본성의 유전적 부패와 타락이라고 정의했다.9) 그러면서도 칼빈은 부모로부터 육체는 이어져도 영혼은 별도로 창조한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원죄를 생물학적인 유전적 견해로 이해하긴 어렵다는 말이다. 창조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무죄를 입증하기에 편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신령한 사실을 애써 부인하는 결과가 되어 성령이 하신 일을 인간적 사유(思惟)의 과정으로써 억지로 과학적 증명을 하려 한다는 흔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혈통을 통해 전이된다는 것이 유전설이다.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어 그 영을 유전함으로써 인류의 영이 아담 하나라고 하는 이 유전설은 터툴리안(Tertullianus)에 의해 제시되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오직 한 번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 이후의 종(種)의 전파는 인간에게 일임되었다. 하와의 영혼은 아담의 영혼 안에 포함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뒤에 창조사역을 중단하셨다는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그 허리에서 났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히 7:5) 등으로 이 학설은 지지를 받는다. 또 무엇보다도 영적 부패와 타락을 초래한 죄의 문제를 설명할 최적의 기초가 된다.10) 결국 유전설로서만 하나님이 인간의 영을 아담이라는 오직 하나의 영만 지으셨다는 말씀(말 2:15)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전이되었다)는 말씀(롬 5:12)을 설명할 수 있다.
3.2. 사망과 부패
마귀의 유혹을 받아 먹지 말라 한 계명을 범했기 때문에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경고대로 아담은 하나님과 단절되고 말았다. 이를 성경은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한다(엡 2:1). 곧,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야 할 존재가 스스로 살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사망 권세자 마귀의 종노릇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됨으로써 불순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의무가 발생했다. 이를 벌코프는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 또는 스스로 결단하여 율법을 범한 데 대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인 원초적 죄책이라고 말한다. 이런 죄책은 개인적이든 대리적이든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면 그 죄책이 제거된다. 생득적으로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칭의에 의해 죄책이 제거됨으로써 실제로는 처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11) 인류 계약의 머리로서 아담이 범한 죄에 대한 죄책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다. 이는 죄에 대한 형벌인 죽음이 아담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로 전이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롬 5:12-19, 엡 2:3, 고전 15:22).
아담은 죽었을 뿐 아니라 죄책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담이라는 영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생득적으로 부패를 물려받으며, 이 부패는 인간 성품의 모든 부분 곧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과 능력에까지 확대되었다. 아담 안에는 영적으로 선한 것이 더 이상 없고 다만 부패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영적인 선도 행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죄와 자아를 선호하는 태도를 바꿀 수도 없으며, 거듭나지 않는 한 아무리 작은 행위일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반응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이처럼 부패한 인간 성품에는 죄를 지으려는 본성이 있고, 이를 본죄라 한다. 본죄는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으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를 지으려는 악한 본성과 죄를 짓고자 하는 소원’을 말한다.12) 또한 그런 본성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난 행위를 자범죄라 한다.13) 죄인이기에 죄를 짓고자 하고 마침내 죄를 짓는 것이다.14)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자기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분으로 안색이 변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하셨다(창 4:7). 죄의 소원, 죄에 대한 소욕은 정욕이다. 김기동은 정욕을 음욕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육체에 속한 정과 욕심’의 바탕은 생육(개체성장)하고 번성(종족확산)하려는 육체의 본능이며, 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창조계명에 해당하므로 그 자체는 자연스럽다. 아담의 영이 죽음에 처한 이후 육체의 속성인 정욕만 남게 된 것이다. 정욕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것은 정상적이다.15)
하와는 유혹하는 자에 의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었다. 하와에게 들어온 사단적인 생각은 결국 선악과를 먹게 했고, 하와의 죄는 자범죄에 해당한다. 자범죄는 품행으로 저지른 품행죄로, 본죄에서 출발한다. 자범죄는 정욕을 이기지 못한 결과다. 미움이 진하면 살인하게 되고, 음욕이 강해지면 간음하게 된다. 또 욕심이 많아지면 도둑질하게 된다. 어린아이 때는 품행죄가 거의 없으나 나이가 들면서 품행죄를 짓게 된다. 율법은 품행으로 드러난 죄만을 정죄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음에 품었던 생각 즉 본죄까지도 죄로 여기심으로 품행만큼은 스스로 정결한 체했던 수많은 사람의 손에서 돌을 내려놓게 하셨다(요 8:1-11).
행동으로 나타난 죄인 자범죄는 정욕이라는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고, 이는 봄이 되면 새 잎이 나듯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혹 품행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생존하는 한 떨칠 수 없는 본능이므로 벗어나지 못한다. 만에 하나 육신의 정욕마저 강력한 억제력으로 발아하지 못하게 했다 해도 그 영이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면 영원한 죄인이다.
인간은 모든 부패와 퇴폐의 심연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에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죄의 삯은 사망,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롬 3:23), 히브리서 기자도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못 박고 있다(히 9:27). 이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 절망적 상태다.
3.3. 저주와 질병, 고통과 죽음
죄는 불순종으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불신앙이 죄다. 아담의 불순종이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단절을 지속하게 만든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이며,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를 ‘소외’라고 하였다.16) 죄를 범하여 소외된 인간에게는 심판과 형벌을 면할 길이 없으므로 두려움과 불안이 들어오게 된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죄를 근원적 불안으로 보았다.17) 존 칼빈은 죄가 사람을 전적으로 부패하게 하고 그 부패는 인간의 육체적 부분에도 확대되었다고 말한다.18)
죄가 육체에 어떻게 확대되었는가에 대해 김기동의 분석은 매우 명확하다. 그는 불신앙과 저주를 동격으로 간주하며 불신앙이 영에 대한 문제이듯이 육체에는 저주가 왔다고 말한다. 윤리적으로 반듯하게 살아도 불신자는 불신앙으로 인해 이미 그 육체에 저주가 와 있다는 것이다.19) 그는 영을 가진 사람이 이 음부 안에 불신앙으로 거할 때에 육은 이미 저주를 받았고, 불신앙으로 저주를 받은 사람은 그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가 임한 것이라고 간파했다. 그는 영에는 불신앙의 죄가, 육체에는 그 영향으로 저주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어떤 불신자의 육체에 나타난 소경이라는 저주는 그 영이 불신앙으로 인해 사망 당한 사실의 표시라는 말이다.
이 저주는 영혼이 가지고 있는 죄로부터 온 것이라 그가 육신이 죽어도 소경된 저주를 갖고 다른 산 사람의 육체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때는 역시 소경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 사람 역시 불신자로서 저주를 받아 벙어리였다면, 그의 육체에 나타나는 저주의 현상 중 벙어리는 자기 영의 불신앙으로 인한 병이고, 소경은 들어온 다른 저주받은 영적 존재(귀신)의 것이 된다. 김기동은 육체는 영혼이 거하는 장막인데, 불신자의 영혼인 귀신은 이 장막을 떠나는 것을 괴로워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기 영혼에 있는 저주를 갖고 다른 사람의 육체에 기어코 들어가려 하고, 그 때 살아 있는 불신자의 육체에 복합적인 저주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의 육체에 나타난 저주는 죄로 인한 형벌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이 사망 권세자 마귀에게 복종하면서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었지만, 욥의 경우처럼 마귀는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자에게는 저주를 그대로 두지만 청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하지 않도록 오히려 축복하시는 분이다.20)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되었다. 죄와 저주가 동격이듯이 구원과 치료는 같은 뜻이다.21)
죄의 저주가 육체의 질병으로 나타나는 이면에 생각과 정신의 영역에도 불안과 좌절, 고통과 슬픔이 들어차게 된다. 이는 삶의 기쁨을 잃고 정신적인 균형을 빼앗겨 참된 삶의 조화가 파괴되고 저주스런 분열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해체의 상태’에 들어가며 독초와도 같은 고통이 뒤따른다. 허무한 것과 부패의 굴레에 굴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소지니주의자 및 합리주의자는 죄와 죽음의 연관성을 부인했다.22) 지금도 자연 과학의 지지를 받아 죽음을 유기체로서의 인간 몸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아주 늙어서 기력이 완전히 쇠잔해져서 죽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며 사실상 훨씬 많은 사람이 질병과 사고 때문에 죽는다. 이에 따라 사고와 재해와 질병에 의한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4. 대속과 칭의
4.1. 대속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인간의 불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이 심판을 받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23)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심판을 받게 하셨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만인의 죄를 심판하셨다.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당하셨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셨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이시다.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가 심판과 형벌을 당해야 할 인간을 대신하여 오히려 심판과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저주를 의미하므로 모든 저주까지 종식시키셨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신 것이고, 이로 인해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전혀 부담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해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죄를 더 이상 죄라 여기지 않고 간과하신다(롬 3:25). 이는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의인(義認)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곧 이제는 믿음이 의의 기준이 된다. 칭의(稱義)란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신다는 법적인 뜻이다. 바울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했다(롬 4:5). 그러나 칭의가 인간의 본질까지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인간을 죄 없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있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위해 흘린 피로 가려지므로 그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24) 따라서 어떤 행위나 경건도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
칼빈은 칭의를 ‘의의 전가(轉嫁)’라고 말했다. 칭의에는 죄를 씻는 일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일이 포함된다. 우리 영에 있던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선택과 유기(遺棄)를 인정한다. 그러나 칼빈과 달리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구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을 대표하는 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구원 바깥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김기동은 하나님의 구원은 선택적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품속에서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로서 동등하시지만, 그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죽기까지 겸손하게 낮추려 하셨다. 죽음을 맛보는 육체 곧 인자(人子)가 되려는 데서 인간 창조의 뜻이 수립되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신 아들의 모양으로 지으신 것이다. 인류의 탄생은 하나님 아들의 겸손으로 말미암은 결과다.25) 그러므로 순전히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시는 일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일에 관련되므로 영적 존재로서 영원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 영이 영원히 죽게 되자 하나님은 인자가 되시는 아들에게 그리스도가 되게 하여 피 흘리는 죽음을 명하셨다.26)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자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대적한, 그리고 아담을 타락하게 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정죄하여 심판하셨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일으킬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대속의 형벌을 담당하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그를 의롭다 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히셨다.
김기동에 의하면,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인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와 하늘 보좌에 오르시는 과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다. 인간이 그러한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칼빈이 주장한 선택적 예정에 의한 구원 논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오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시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으로 나타난다.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다.
4.2. 칭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는 어디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단지 인간 구원을 가능케 했을 뿐 구원받은 사람들의 구원을 확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한 구원을 견고하게 한 것인가. 또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를 범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수많은 신자의 번민은 정상적인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칭의와 성화(聖化)에 대한 혼동이 아직도 산재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선 ‘칭의’는 ‘의롭다고 하다(justify)’라는 말로, ‘어떤 사람의 지위가 율법의 요구와 일치한다고 법적으로 선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27) 신약성경에서 통상적으로 발견되는 의미는 다른 사람의 의를 그 사람에게 전가함으로써, 즉 그가 내적으로는 의롭지 못하지만 그를 의롭다고 간주함으로써 의의 신분을 야기(惹起)시키는 것을 말한다.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로, 그 이전에는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조차도 법적인 행동으로서의 칭의를 성화의 도덕적 과정과 혼동하고 있었다. 종교 개혁 이후에야 비로소 칭의란 ‘예수의 의 가 믿는 자에게 전가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면전에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행위이며, 신앙에 의해 값없이 받는 것이요 순간적이고 완전하며 완성을 위해 죄에 대한 어떠한 추가적 보속 행위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리했다.28) 이처럼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죄인에게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동 즉 죄인에 대한 선언이지 중생이나 회심과 같은 갱신행위나 과정이 아니다. 칭의는 죄인과 관련되지만, 내면적 삶은 변화시키지 않는다. 칭의는 그의 조건보다는 신분에 영향을 주며, 칭의에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호의의 회복을 포함한다. 칭의 받은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롬 5:1-10)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된다(행 26:18).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고 영원한 기업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내포된 모든 권리를 죄인에게 회복시킨다. 그러나 성화는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새롭게 한다. 또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의 판결이 주관적으로 적용되지만, 내적인 생활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반면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 삶에서 일어나고, 점차 전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칭의는 한 번만 일어난다. 칭의는 반복될 수 없으며, 과정일 수도 없다. 이는 단번에 완성된다. 칭의의 정도 차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완전히 칭의되든지 전혀 칭의받지 못한다. 그러나 성화는 지속적 과정이며 현세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 칭의와 성화가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를 요인으로 가지지만, 성부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성령 하나님은 그를 성화시키신다.
그러면 칭의의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가? 죄의 용서가 있다(롬 4:5-8; 5:18-19, 갈 2:17). 칭의 시 부여된 용서는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하며, 모든 죄책과 형벌의 제거를 포함한다. 이는 칭의가 반복을 허용치 않는다는 사실과 어느 누구도 칭의된 자를 송사하지 못하며 그가 정죄를 면제받고 영생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말씀에서 연유한다(시 103:12, 사 44:22, 롬 5:21; 8:1, 32-43, 히 10:14).
그런데 신자들은 칭의를 받은 후에도 계속 범죄하여(약 3:2, 요일 1:8) 중죄를 범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칭의 받은 자는 죄인, 즉 칭의 받은 죄인으로 남아 있다고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해 날마다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마 6:12). 그러면 오늘날 이처럼 칭의 받은 신자가 법적으로 모든 죄를 사면 받고 죄책을 면제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책감과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느끼며 회개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5. 신자의 죄의식과 성결한 삶
5.1. 신자의 죄의식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신자에게 죄가 있을까? 한마디로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었을 뿐 죄인이란 본질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신자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했다.29) 칼빈도 성도는 죽을 몸을 벗어버릴 때까지 항상 죄가 있다고 말했다.30) 그는 믿는 자 속에 여전히 죄가 존재하지만, 그 죄가 지배력을 잃었다고 한다. 칼빈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해졌지만 다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믿는 자들이 유혹되어 넘어지고 범죄하는 것은 바로 그 죄의 흔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웨슬리의 의견도 일치한다. 신자는 어느 정도 영적인 사람이고, 어느 정도 여전히 육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중생한 자 안에 존재하는 죄의 흔적들은 마지막 심판 때 재림하신 예수의 발 앞에서 멸망당하기까지는 모든 사람을 여전히 유혹하여 죄 짓게 한다고 말했다.31)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들은 성화의 과정 속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부족한 죄인으로 발견된다고 보았다. 이와 동시에 그 죄의 세력은 중생한 자에게만큼은 지배력을 갖지 못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그러나 신자들도 죄로 멸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칼빈과 웨슬리의 답은 극명히 갈린다. 칼빈은 중생한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다시 탈락하지 않으며, 탈락한다면 진정으로 중생한 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칼빈은 에서와 같이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결국 용서받지 못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항구적이므로 끝까지 견인(堅靭)되어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중생한 자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생한 자라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흔들어 깨우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악으로 기울어져 어떤 욕망이나 기질에게 길을 내주게 되고, 결국 더 심화되면 믿음을 상실하게 된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림으로써 소극적인 내적 죄에서 외적 죄를 범하기까지 진행된다는 것이다. 결국 칭의를 받은 자일지라도 죄를 이기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고 타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초신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벌코프는 신자들이 죄의식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칭의 시 죄책을 제거하시지만, 죄의 유죄성은 제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32) 다시 말해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형벌의 가능성은 제거하시지만, 그가 범할 수 있는 여하한 죄의 내재적 죄책성은 제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죄를 고백할 필요를 느끼며 심지어 오래 전의 죄까지도 고백하려는 신자가 존재한다(시 25:7; 51:5-9). 즉, 죄를 고백하여 사죄의 위로적 확신을 얻으려는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성경은 칭의가 선행이나 죄의식의 완전한 비움 상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한결같이 가르친다. 우리가 칭의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믿음만 있고 신분은 의로운 자라 하는 인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영역이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5.2. 성결한 삶
믿음은 행위를 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칭의에도 의로운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골고다 언덕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한 강도에게는 구원을 얻을 어떤 행위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예수를 의롭다고 인정하고 의지했을 뿐이다. 이로써 그는 강도가 아니라 의인이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했다. 우리도 강도와 같다. 그러나 당장 죽지 않았으므로 강도와 같은 마음과 행위를 근절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성화라 한다. 벌코프는 성화를 “칭의 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로부터 해방하고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며 그가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자비롭고 지속적인 사역”으로 정의하였다.33)
성결한 삶은 과정이기에 점진적으로 변화를 창출하며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경은 권한다(고후 7:1). 칭의는 성결의 기초가 되며 성결보다 앞선다. 칭의 자체는 우리의 내면적 존재에 대한 변화를 야기할 수 없으므로 성결한 삶이 그 보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이 거룩함을 성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성령을 통해 값없이 거룩함을 일으키신다. 어떤 약한 신앙도 가장 완전한 칭의를 중개할 수 있지만, 성결의 정도는 그리스도를 붙잡는 인내의 정도에 비례한다. 이에 대해 김기동은 원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해결되고, 본죄는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자범죄는 훈련을 통해 억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34)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이전의 성격과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성품으로 생활하는 것이 성결한 삶이다. 바울도 마음은 선을 원하나 원치 않는 정욕이 여전히 남아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고 표현했다. 이런 갈등과 정죄를 이기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 예전처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다(롬 8:13).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따라서 칭의 받은 신자는 육체의 정욕이 싹트지 않도록 말씀과 능력을 항상 힘입어야 한다.
5.3.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성경은 두 가지 죄를 소개한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그것이다. 요한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를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하였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따라서 용서 받을 수도 없는 죄다.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가 되지 않는 죄는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죄,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을 부인하는 죄를 말한다. 적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에 속한 자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다(요일 2:22; 4:2-3).
또 요한은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 5:17)라고 하며,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6),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의 ‘범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가리키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것을 뜻한다. 믿는 자도 죄를 짓지만,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신자나 불신자가 다 같이 죄를 짓지만, 불신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고 있고, 신자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을 뿐이다. 믿는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자다(요일 1:8). 다만 믿는 자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위해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있으니 그는 온 세상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요일 2:1-2).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요일 1:9). 그러나 불신자는 불의한 상태로 계속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신자는 원죄가 사함받고 본죄와 자범죄를 성령의 인도와 훈련을 통해 줄여나간다. 그러나 불신자는 원죄가 해결되지 않은 채 죄를 쌓아가고 있고, 도를 닦으며 본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되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홀로 애를 쓰다 결국 멸망한다. 종교인들이 그 예가 된다.
6. 나가는 글
죄의 기원은 마귀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한 자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함으로써 온 인류 위에 죄로 왕 노릇한 자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마귀와 함께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죄로 인해 마음과 생각이 타락함으로써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종 노릇할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그의 공로를 힘입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죄 사함을 얻기 때문이다. 비록 육체에 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죄에 대한 유혹과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지만,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의 죄 때문에 멸망 받지는 않는다. 이는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담당하셨기 때문이며, 우리의 구원 자체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죄책감으로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구약에서 도피성을 향해 달려갔던 자들처럼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속히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습관적이고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갈 6:7-8).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이후에도 마귀는 여전히 죄로 인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하기 때문이다. 곧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하신 말씀(요일 3:8)대로, 상습적인 죄는 자기 영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마귀의 종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한다(롬 6:12-19). 영혼은 예수의 공로로 구원 받지만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준 자들에 대한 말씀이 그러한 경우다(고전 5:4-5).
그러므로 우리는 영과 혼과 육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온전히 거룩하게 보존되고(살전 5:23),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날마다 성결한 삶을 사모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해야 한다(딤후 2:20-21). 한 순간이라도 자신 속에 있는 죄로 인해 마귀의 영향력 아래 머물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며, 우리 속 사람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기를 사모하고 온전한 성결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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