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는 왜 만드셨을까?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나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첫 번째 질문이 대부분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나무와 그 열매이다. 왜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있게 하셨느냐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열매를 따 먹을 것도 분명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있게 하신 것은 이미 타락을  전제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열매를 두신 이유는

첫째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음을 알게 하셨다.

인간이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로보트와 같은 아무런 의지없이 하나님에게 조종당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의지인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런  판단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두신 것이다.

 

두 번째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열매가 있게 함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은 방종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한 가지를 금하심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여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마치 기차가 두줄로 나란히 달리는 선로 위에서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잘못된  욕심까지를 향유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한하신 바른 자유만을 누릴 수 있음을 보이신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나 의식이 없는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분명 인격이 있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사랑이란 신실하게 상대를 선택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은 것을 판단하여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사랑의 중요한 행위이다. 그래서 진정한  인격을 가진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이기를 원하셔서 그 열매를 있게 하신 것이다.

 

동산 안에는 각종 나무들이 있어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잘못된 욕심과 판단은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진정한 자유를 주셨는데 그것을 방종으로 나타냄으로, 그 열매를 먹음으로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죽음을 받아들일 운명이 된 것이다. 이용남목사(장석교회) 

 

 

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나?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이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렸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산물로 제물을 드린 것과 양을  치는 사람이 양으로 제물을 드린 것에는 전혀 하자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싫어하시고 양으로 드린 제사만을 기뻐하셨는가?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미 말씀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하였고 아벨은 자기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하였다. 아벨의 제사가 첫 새끼임을 밝혔는데 가인의 것을 첫 열매라고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첫 열매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하나님은 곡식으로 제물을 드리려고 하면 토지 소산의 첫 열매를 드리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23장 19절에 보면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라고 하였다.

곡식이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첫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이다. 언제나 제일 먼저에 해당되는 것,  제일 귀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  하나님의 몫으로 드려져야 한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기록하였다.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중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하여 가인  때문임을 밝히셨다.

잠언 15장 8절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다른 우상이나 잡신들은 제물이 풍성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가인의 제사가 거절됨에는 그의 됨됨이에 문제가 있다.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이유를 하나 더 든다면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하였다(롬 14:23).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가인의 제사는 제사다운 제사가 될 수 없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거절당한 것이다.

 

  

누가 가인을 죽이나?  

 

동생 죽인 파렴치범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고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신 것을 분하게 여긴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창세기 4장 8절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하였다.

이제 피를 흘린 가인은 그 피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저주하셨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다. 언제나 범죄에는 마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공의의 하나님이 분명한 심판으로 보여 주셨다.

 

그러자 가인이 답하기를 14절에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성경은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네 명만 있을  것인데 어떻게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합리적인 인간들의 사고체제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신앙의 자세이다.

 

오늘 의문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로 답할 수 있다.

 

첫째는 심리적인 것으로 범죄자는 스스로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정죄한다는 것이다.

동생을 죽인 나  같이 파렴치한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 그러니 누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스스로 큰 두려움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인은 자신의 엄청난 잘못에 대해 스스로 죽어 마땅하다는 사형 언도를 내린 것이다.

 

두번째는 창세기 5장 4~5절에 보면 아담은 9백30세까지 살았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말에서  아담은 셋을 낳은 후 무려 8백년을 더 살면서 수많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기 때문에 이상적인 환경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자녀를 낳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동생을 죽였으니 다른 동생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가인은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말이 있다. 6장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하여  많은 질문이 있다. 사실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어 사용법과 유대교의 전통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히브리어 사용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신의 계열에 속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  말은 ”천사“ 혹은 ”천상적 존재“를 의미한다고 한다. 더욱이 구약성경 여러 곳을  보면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한 곳들이 있다. 욥기서 1장6절이나 2장1절, 38장7절 등 여러 곳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천사는 육체적인 몸이 없는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어떤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마귀의 지배를 받는 존재들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열한 자신들의 육적인 만족을 채우는데 서슴치 않았다.  이때부터 혼인에서 후궁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닌 저열한 피조물이였다고 주장한다.

 

여러가지 해석중에 제일 설득력이 있는 해설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 없이  세상적으로 악하게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신앙이 있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의 딸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이름이 알려진 아들로 가인,  아벨, 그리고 셋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이중에 아벨은 가인에 의하여 일찍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창세기 6장의  상황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성경이 가인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다. 유다서 1장 11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결국 가인같이 살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가인과  가인의 후손이 경건하게 살지 않았음을  추론해낼 수 있다.

반면 성경이 셋의 후손에 대해서는 아주 좋은 평가를 내린다. 창세기 4장 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여 셋과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믿음 안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 14절에서 19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Q1-1. 창세기부터 저희의 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궁창의 범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창세기 1장 14절에 보면,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창세기 1장 16절에는 또 별들을 만드시고’ 궁창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궁창에 대한 인식이 좁게는 대기권까지고, 넓게 생각해보면 큰 광명이 있는 태양을 포함한 태양계를 궁창의 범위로 보는 게 맞습니까?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주 전체를 궁창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A1. 어렵지요? 이렇게 불려나오니까 마치 청문회 나온 거 같아요. 청문회 불려나오면 목이 타거든요, 아무리 딱딱한 청문회라도 물 한컵 준비하는 게 입이 바짝바짝 마르니까 그게 예의같아요. 그렇죠? 고맙습니다.

 

성도들이 질문하는 것은 권리고, 목사가 대답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을 준비하면서, 진지하게 한국교회가 성도들이 질문하고 목회자가 대답하고, 이것이 진작 정착되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목사님들 실력이 많이 향상했을 거 같아요. 그렇겠죠? 그래서 우리 교회가 처음, 내가 아마 생각하기로는 외국은 잘 모르겠고, 한국역사에 목회자와 성도들이 한자리에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런 아름다운 모임은 한국 교회에 처음이 아니겠는가. 이 처음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 이어져서 우리가 계시록까지 다가가고, 이것이 소문이 나가지고 이웃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목사님들이 질문공세를 퍼부어가지고, 목사님들 마다 공부안하면 목회 못하게 그렇게 해야 정상이에요.

대답을 다 못한다 할지라도 질문해야 돼. 질문해야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진리에 대한 열정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사설은 길면 재미가 없죠?

 

여기 오늘 궁창 문제인데, 궁창이 그저 이렇게 보이는 대기권 정도 말하는 것인지, 범위를 넓혀서 태양이 걸려있다 하는 것까지 하면, 태양계까지냐 질문하셨는데, 그 앞에보면, 궁창이란 개념이 물을 사이에 두고 궁창위의 물이 있고 궁창 아래에 물이 있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죠? 어디 나오냐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실 때 1장 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있어.

그렇죠? 위에도 물, 아래도 물, 사이에 궁창이 있으면 대기권밖에 안되요. 그런데 문제는 뭐가 문제가 되냐면,

궁창에 두 큰 광명을 두셨다 하니까 태양이 있는데까지 올라간 거야. 그렇죠? 일반적으로 말할 때, 과학적으로 말한 게 아니고, 창조의 순서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가 미치는 부분까지 보면 좋겠어요. 태양이 있는 곳까지, 그렇게 하면 큰 문제가 없겠죠? 대답이 되었습니까? 추가 질문 있습니까?

 

Q1-2. 네, 태양과 달이 그 궁창에 두셨다하는 표현이 있는 거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한 해석도 이어져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요.

A1-2. 그러니까 궁창이란 것은 우리가 눈에 보는 궁창, 위에 두셨다는 것이지, 과학적으로 따져가지고 공간개념에 두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시야로 볼 때, 궁창, 하늘, 영어로 보면 firmament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냥 하늘 위에 하는 것이지 과학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때, 창공, 하늘, 궁창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죠. 거기서 오히려 1장 1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할 때, 그 천 할 때는 궁창이 아니에요. 궁창이 아니고 하늘, 하샤마임 할 때는 그건 진짜 큰 하늘이 되지만, 궁창이라는 것은 멀게 봐야 태양이 있는 곳까지 우리 시야가 미치는, 태양이 있는데까지 우리 시력이 미치는 게 아니고, 태양 때문에 보이는 거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고, 이것도 확대 해석 해서 어렵게 하는 것은 성경 본 뜻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좁게 볼 때는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이 있는 것처럼 할 때는 대기권까지 밖에 안 되겠는데, 광명을 두셨다는 것 때문에 태양계까지라고 할 수 있겠고, 넷째날에 해와 달과 별들 할 때도, 그 해와 달과 별들 하면, 자칫하면 별들이라는 것이 온 우주의 모든 별들까지 해석할 수 있는데 까닥하면. 그런데 해와 달과 별들이라고 하면 태양계 정도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에요.

 

왜 이런 말씀을 덧붙이냐 하면, 셋째날에 하나님이 하신 것이 바다에서 육지가 드러나라 하신 거죠. 물에서 뭍이 드러나라 했지, 물과 뭍을 창조하신 날이 없어요. 첫째 날도 아니죠? 첫째날에 물과 뭍을 창조하신 게 없습니다. 둘째 날도 아니죠? 그런데 이미 있단 말이에요. 물과 뭍이 첫째날, 둘째날에 창조하신 게 아니고, 셋째날도 아닌데 이미 있거든요. 그럼 이것을 어디다 어떻게 해야 하냐면 1절에서 봐야 돼.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할 때, 이 태초는 어쩌면 첫째 날 그 이전이에요. 첫째 날 그 이전, 흙, 땅, 돌, 이 뭍하고 물이 창조된 날이 없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걸 굳이 설명하려면 첫째 날보다 그 이전을 In the beginning, 태초 안에. 우리는 태초에 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쁘레쉬트라고 되어 있어요. 쁘라고 하는 것은 뭐뭐 안에라고 했기 떄문에 영어에서 In the beginning 그러니까 첫째날 그 이전 태초안에 땅이 존재했다는 걸로 봐야되는 거죠. 이런 것도 질문할 수 있는 거리인데, 우리는 대체적으로 1장 1절을 천지창조 제목절로 보고, 그 뒤에 전개한 걸로 봐왔는데, 저도 지난번에 샤론강좌할 때, 이 문제를 한번 다루었어요. 뭍하고 물을 창조한 날이 없거든요. 여섯째날 다 가도. 일단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나눠지고, 그 다음에는 이제 뭍이 물에서 드러나라고 할 때는 물하고 뭍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런 부분도 우리 교사들이 나거서, 혹은 청년들이 청소년 지도할 때, 혹시 나올 질문이기 때문에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Q2. 두 번째 질문입니다. 저희가 토론했던 내용입니다.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음받을 때 영생하도록 지음받은 것인지, 아니면 생명나무를 먹어야 영생하는 것인지, 그리고 타락한 후에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된다면 영생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생명나무를 열매를 먹어야 영생한다면 한번 먹으면 단수로 먹으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계속 먹어야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계시록 강의하실 때, 진주문 너머 생명나무가 나옵니다. 저희들도 생명나무를 먹게 될 때, 하나님 자녀들도 한번만 먹으면 되는 것인지, 자꾸 먹어야 되는 것인지?

 

A2. 죄송합니다. 제가 한 번도 안먹어 봐가지고. 저만 안 먹어본 게 아니라, 아무도 안 먹어봤어요. 그리고 앞에 질문이 더 중요한 건데, 아담이 완전한 존재였느냐? 하는 문제가 되겠죠. 사실은 불완전합니다. 미결정 상태,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선택에 의해 결정되게 될 미결정, 불완전 상태. 그래서 선택에 의해서 자기 결정이 나도록 지음받은 것이지, 완전하다고 볼 수 없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와 비교할 때, 비교적으로 완전하지만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을 말할 때, 세 가지로 보통 신학적으로 말하는데,

원상태인간. 그 아담처럼 선악과 따기 전 인간을 원상태 인간이라고 해요.

그리고 딴 이후의 인간을 죄 아래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새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진 이후의 인간을 은혜 아래 있는 인간,

이렇게 나누는데, 원상태 인간이라도 시험을 거치지 않은 거죠. 이를테면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불가마를 안 갖다온 그릇, 질그릇. 잘 깨지죠? 역시 땡그랑하고 제법 충격이 가도 안깨지려면 불도가니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 돼요. 시험을 거치지 않은 선택 이전의 상태기 때문에, 자기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존재이지, 아직은 완전하다면 타락도 안해야 되는데, 불완전한 상태, 순수하긴 하지만 불완전 상태다 라고 볼 수 있겠고, 또 여기에 그의 선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또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 열매를 먹으면 영생하느냐 물었는데, 두가지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 의미가 없는 질문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말은 있습니다.

성경에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그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렇죠? 지키게 한 목적이 뭐냐면, 죄를 지은 주제에 그걸 따먹고 영생할까 싶어서 따먹지 못하게 한다. 그럼 만약에 죄를 지었지만 그걸 따먹으면 영생한다는 말이죠? 못하게 했으니까 염려할 건 없을 거 같아요. 하나님께서 지키게 하면 확실히 지킬 모양이니까.

 

그다음에 우리가 진주문 열고 들어가서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되는데, 한번만 먹어도 영생하느냐? 아니면 계속 먹어야? 때마다 먹어야 되는지, 일년에 한번 먹어야 되는지? 이런 것은 언급이 없기 때문에 대답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질문은 되는데, 대답은 사실상. 한번 먹어보고 이야기 합시다. 일단 한번 먹으면 그뒤로는 틀림없이 영생할거니까 그 뒤로는 대답은 못하지만, 그 뒤에 염려해도 괜찮을 문제가 아닌가. 됐습니까? 고맙습니다.

 

Q3. 네 다음은 역청에 대한 질문입니다. 홍수 이전에 나온 역청을 통해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역청하고 틀린 것입니까?

 

A3. 굉장히 중요하고 또 좋은 질문인데, 역청이란 것이 만들어진 경위가 노아홍수 때에 동물들이 죽어서 그것이 다 원유가 되어가지고 그 찌꺼기가 역청이다 하는데, 그럼 노아홍수 이전에도 역청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질이 다른거냐. 질이 다릅니다. 그것은 역청으로 번역된 말이 우리 말엔 역청이란 말 하나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체페스하는 역청이 있고, 헤마르하는 역청이 있고, 코페르하는 역청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역청은 피치 아스팔트 같은 역청이고, 어떤 역청은 나무 진이에요. 나무 진. 끈적해 가지고 점착재료. 끈적해서 점착할 수 있는 재료가 있다면, 나무 진도 소나무 진같은 것 가지고는 안되요. 너무 작게 나오니까. 한국에 나무 진이 송진밖에 더 있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나무가 어마 어마한데, 거기서 나무진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서 지금 고무나무가 있어요. 그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고무를 가지고 우리 모든 신발은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 타이어 원료로 쓸 정도로. 자동차 타이어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때 나무 진같은 것도 엄청나게 많이 나올 수 있는, 그리고 그 외에 뭐 끈적한 것들이 여러 가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꼭 노아홍수 때 동물이 죽어서 원유의 찌꺼기 아닌 역청도, 끈적하고 뭐 방수, 점착재료가 되는 그런 물질을 말하는 것이고, 체페스, 코페르, 헤마르 이런 세가지 물질이 있었다고 하니까, 홍수 이전에는 역청이 없다는 것은 더 어려운 문제가 되겠죠? 됐습니까? 예. 고맙습니다.

 

Q4. 네 다음 질문입니다. 간단한 질문인데요. 4번 질문인데, 노아의 홍수 때 땅위의 생명은 다 멸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와 강의 생명은 그 부분에 없습니다. 그럼 그 생명은 저주라고 해야 될지, 죽음의 대상에서 심판의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동일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해야 되겠습니까?

 

A4. 사실 현상으로 보면, 육지동물들은 일단 먼저 가는 거죠. 코로 숨쉬니까. 창세기 7장 22절에 보면 코로 숨쉬는 것은 다 죽었더라 이리 되어 있어요. 코로 숨쉬는 것은 방주에 탄 것들 말고는 다 죽은 걸로 되는데, 따라서 이 재앙 자체가 물이 쏟아지는 홍수 재앙이기 때문에 수중생물은 당연히 뭐 물을 만난 것이죠. 다만 이제 혼란은 있었다고 봅니다. 증거가 뭐냐면 화석들을 볼 때, 생물, 화석 연료가 된 것 말고, 암석이나 퇴적된 암석 속에 나오는 화석을 볼 때는 물고기 화석이 많아요. 고동종류 물고기 화석이 많은데, 그것 보면 수중생물은 코로 숨쉬는 것보다 훨씬 낫지만, 그래도 생태계에는 엄청난 파괴가 있었다고는 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제일 많이 죽었던 것들이 민물 속에, 민물 강바닥에 있어가지고 떠내려간 것들, 떠내려가서 화석이 되는데, 암모나이트라든지, 오소세라스라든지, 삼엽충이라든지 각질이 있고 딱딱한 것들은 강에 있었더라도 물살에 떠내려가지고 매몰이 돼서 떠내려갔기 때문에 상당히 파괴가 일어났죠. 헤엄을 치고,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면 좀 나을건데, 물에 있으면서도 수영이 잘안되고 물살에 빨리 내려가는 이런 것들이 이제 그 고생대, 캄브리아기, 오르도피스기, 실루리아기, 페론기, 삼척기, 쥐라기 이렇게 하면서 그 아래 쪽에서 나오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런 육지의 수생생물이라고 할지라도 물에 헤엄치지 못하는 것들은 상당한 피해가 있지 않았겠는가 볼 수 있습니다. 추가 질문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넘어가죠.

 

Q5. 네 질문을 하고 나서 저희들 끼리 논의를 했을 때 좀 어리석은 질문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요, 아담과 솔로몬의 지혜를 비교하는 질문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아담이 이름을 어떻게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의 지혜를 볼 수 있고요, 솔로몬은 담장 밑의 우슬초로부터 백향목까지 논하고, 동물학, 식물학에 걸쳐서 여러 가지 지혜를 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으로는 아담이 월등하다고 좀 생각을 했는데요, 목사님 보시기에는 누구의 지혜가 월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5. 그 두 분을 불러다가 샤론교회 청문회 모셨으면 바로 실력이 드러날텐데, 뭐 말씀하신대로 아담은 타락이전이기도 하고, 모든 지혜, 모든 능력에 있어서 성경이 말할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받았다.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제 솔로몬이 동물학, 식물학, 뭐 조류, 어류학을 했다고 하지만, 이를테면 아담 때의 생물의 다양성이 더 풍성했다고 보는 거죠. 홍수때에 워낙 많이 파괴되었고, 자금도 수많은 생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그 홍수 이전 세계의 생물 다양성이란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죠. 그런 모든 것에게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 존재의미와 존재가치과 존재가치와 존재기능을 알아야만 그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아담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그런 존재고, 솔로몬은 타락을 했다가 성령의 은사로 반짝 조금 지혜를 받았다가 여자 때문에 홀랑 타락을 하는 그런 거니까, 솔로몬을 아담에게 비교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단, 아담에게서 우리보다 솔로몬보다 불리한 입장이 있다는 것은 역사책이 없었다는 거에요. 역사가 없었고, 어머니가 없고, 성경책이 없는 거죠. 그래서 아무 경험이 없는 것에서 전부 자기 선택에 의해서 미래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잘 모르는 거죠. 그래서 선택이전, 경험이전, 역사이전이란 것은 그런 면에서 불리하다는 겁니다. 반면에 우리도 사실은 역사를 갖고 있고 성경을 갖고 있지만, 역사를 공부안하거나, 성경을 공부안하면 내나 마찬가지에요. 안갖고 있는 거나. 그래서 전부 내가 경험을 하고 댓가를 지불하고 배우려고 하면 시간도 짧고 미련한 거죠. 그래서 빨리 성경과 역사를 공부해서, 옛사람들이 지불하고 남긴 역사적 교훈을 우리가 가짐으로 해서, 심지어 아담의 실수에서 솔로몬의 실수까지 다 배워서 옛사람들이 저지른 우를 다시 범치 않게 하는 것이 우리 목사들, 교사들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Q6-1.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조금 어려운 질문이라고 저희는 생각했는데요, 바벨탑 사건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연대계산이 가능한지 이런 질문이고요, 정확히 언제이고, 그리고 그 시대의 주요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바벨탑 사건이 있기 전에 언어가 구음이 하나였는데, 그 언어가 지금도 존재하는 언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지, 또 존재한다면 어떤 언어하고 가장 가까울지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고요. 제가 개인적으로 계산을 좀 해봤는데요. 근거는 창세기 10장 25절에 에벨이 욕단과 벨렉을 두 사람을 나누면서 세상이 나뉘었더라 그 부분을 근거로 해서 계산을 해보니까, BC2356년으로 계산을 해봤습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목사님께서 대답을 해주십시오.

 

A6-1. 이거 대답을 하면 박사학위 나옵니다. 이게 까다로운 문제인데 계산은 비슷해요. 제가 한 거하고 에벨하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인데, 에벨이 자기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벨렉이라고, 펠레크라 했는데, 이것은 그때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인데, 세상이 나뉘었다는 게 뭐냐.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나뉘었다는 것이냐 할 때, 그 뱌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되어가지고 나뉘었다 하면,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연대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고생을 하고 성경 연대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짧게는 2, 3년에서는 길게는 100년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어셔라는 감독이 계산했던 방법에 의하면 에벨이 태어났던 해가 BC 2281년 경 이렇게 되고, 벨렉이 2247년 경 이렇게 되는데, 어떤 사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아들이 태어나겠죠. 그렇겠죠? 그러니까 벨렉이 2247년에 태어난 것으로 계산이 되면, 그거보다는 이전에 다시말하면, 2247년 그 이전에 세상 나눠진 게 있어야 그걸 기념해가지고 아들 낳자마자 그 이름을 벨렉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볼 수 있겠고, 2250년 전후 이렇게 하면 되곘고요,

그리고 언어가 혼잡되었는데, 그 언어가 혼잡되기 그 이전의 언어가 어떤 언어였으며, 혹시 그 언어가 남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찾을 수가 없고요, 바라기는 한국어였으면 참 좋겠는데. 그러면서 우기죠. 이것이 본래 언어다 하면서, 세계 언어 이것으로 통일하자 하면 되겠는데,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거에요. 근거도 증거도 없고, 그 혹시라도 본토, 바벨탑 쌓던 그곳에 남아있는 언어였느냐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곳이 바벨론, 이라크 땅인데, 그 이라크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러면 혼잡되기 이전 구음이 하나였던 그거냐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다는 거죠.

 

Q6-2. 혹시 그 예전 유물이나 그런 자료들, 홍수이전 바벨탑 사건 그 이전의 그림 언어라든지 그런 게 전혀 없습니까?

 

A6-2. 지금까지 남아있는 문자는 설형문자라고, 쐐기 문자 들어보셨죠? 그게 상당히 오래된 것이고, 그림들이 남아있지만, 히브리인들은 그 자기 히브리어가 하나님 언어라 우겨요. 자기들이 우기면 우리도 우겨야죠. 우길만한 근거가 없는데.

 

이런 건 있습니다. 모세가 만약 오경을 기록했다면. 모세가 오경을 기록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안 갖고 있는 학자가 많아요. 많은데 모세가 오경을 기록했다면 대단한 문학적 실력이나 문법이 있어야 되거든요. 모세가 오경이란 책이 굉장한 책인데, 그러면 책도 없고 할 때, 아브라함 자손, 이삭, 야곱 자손들이 애굽 가서 430년을 살았단 말이에요. 그렇죠? 400년 살면서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어로 살았겠는지, 생활언어로 히브리어로 생활했을 것인가. 히브리어로만 안되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가서 40년간 처가살이로 비참하게 양치기하면서 히브리어 문법이 있어가지고 히브리문법으로 공부했다 이러기 어렵잖아요. 그리 생각하기가 객관적으로. 그럼 도대체 오경을 기록할 만한 모세의 히브리 실력이 어디서 나왔느냐 도대체. 히브리 학원이 없잖아요 그때는. 혹시 뭐 질문도 안한 걸 대답을 해가지고. 그래도 뭐 좀 난점이 되죠? 그런 저런 걸 들면서 히브리인들이 히브리어가 진짜 언어다, 히브리어는 하나님 언어다 이렇게까지 해요. 성경이 구약이 다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니까 그리 할만도 하겠죠. 그러나 이제 그런 뭐 객관적으로 어떤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될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아요. 어떤 언어가 가장 오래되었는지도 문자적으로 쐐기문자 그런 정도고 그림문자 그런 것이지, 확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이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고요. 학자들이 나와서 찾아볼만한 더 좋은 정보가 들어오면 다시 한번 그때 짚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Q6-3. (질문내용이 잘 들리지 않음)

 

A6-3. 그건 아브라함 시대죠. 아브라함하고 조금 그 정도 밖에 안되요. 모세는 그보다 한참 뒤인데,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이때 히브리어 문법 같은 게 나올 수 없거든. 그런데 그 히브리어하고 아람어하고 시리아. 아람어하고 문자도 비슷해요. 발음도 많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는 히브리인들만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발전하는데, 지금부터 3500년 전, 모세가 다른 것 다 놔두고 처가살이를 40년 했다고 해요. 미디안 이드로 집에 가가지고. 거기서 무슨 히브리어 문법을 배울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든지 만약에 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한다면 이건 대단한 문법이 있어야 되고, 대단한 어학 실력이 있어야.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발달해도 책을 쓰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그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00년 살았고, 모세는 그뿐 아니라, 미디안 가서 40년 살았는데, 언어야 40살까지 자기 어머니 영향으로 배웠다 할지라도 그 히브리어로서 오경을 기록할 만큼의 문법이 히브리 문법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건 굉장한 참. 지난번 제가 난제를 공부할 때도 그런 문제를 제기했는데, 우리가 관심가지고 또 학자들에게 좀. 이런 문제가 안티 크리스천들이 마구 들고 나올 수 있거든요. 그래서 준비를 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도 아직까지는 바벨탑 이전에 구음이 하나일 때 어느 언어인지, 어느 문자인지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 한참 이후에야 이른바 역사가 나오는 것이니까요. 이건 이른바 역사 이전 얘기입니다. 네. 다른 문제.

 

Q7. 네 다음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함의 참 자손에 대한 저주에 대한 얘기입니다. 창세기 9장 22절에서 27절까지 노아의 아들 함이 그 아비 노아의 벗을 것을 보고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함이 바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함의 여러 아들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 중, 이상하게 성경에서는 유달리 가나안만 이렇겍 강조하면서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함을 포함한 아들들이 다 저주를 받게 된다면 이해가 가게 되지만, 가나안만 저주를 받게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7. 네 충분히 문제가 될 만하죠? 왜 함이 범죄 했는데, 가나안을 저주했으며, 또 함의 아들 여럿이 전부 다 받는 것이 아니고 왜 가나안 혼자만 이렇게 저주했느냐? 그것에 대해서 설명이 없거든요. 그렇죠? 저도 몰라요 사실은. 천상 노아를 만나서 우리 할아버지니까 물어보면 좋겠는데 세상에 안계셔서 그렇긴 한데요, 이것은 노아가 저주한 것이 무슨 타당성이 있어서 그런 저주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아가 무슨 영감 받아 하나님 뜻을 좇아 저주했다 이런 것도 아니에요 사실은. 술 먹은 것도 잘못이고, 술 먹었다고 훌렁 벗긴 왜 훌렁 벗습니까?

그것도 잘못이고, 일어나서 뭐 또 저주한 것도 잘한 것도 아닌 거에요. 그것보다 더 잘못되는 게 있는데 백인들의 세상에서 뭐라고 하냐면, 그러니까 가나안 족속이나 흑인들은 노예로 삼아도 괜찮다. 그 말이 안 되는 말이죠?

그리고 가나안 자손, 후손 대대로 저주받은 게 아니고, 가나안만 한 사람이에요 한 사람. 그 한사람인데 우리가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어요. 무슨 얘기냐면 함이 그 가나안하고 둘이 가서, 여기 말이 나오진 않지만, 그 가나안이라는 아들하고 함이 부자지간에 같이 자기 할아버지의 훌렁 벗은 것을 희롱했을 수 있는 거에요. 뭐가 있으니까 가나안이 또 저주 받는 것이지. 이런 부분들은 성경에 명확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석연치 않게 하는 게 더러 있습니다.

저는 일단 노아의 그 저주 자체도 별로 정당성도 없고. 우리가 옛날에 경상도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보고 책망을 모질게 하면서 ‘빌어먹을 자식아’ 그러잖아요. 그렇다고해서 빌어먹으면 안되잖아요. 이렇게 하면서 저주를 하는데, ‘가나안은 형제들의 종의 종 되기를 원하노라.’ 그냥 종도 아니야. ‘종의 종되기를 원하노라.’ 이게 하나의 욕하는 자식들을 호되게 책망할 때하는 관용구처럼 썼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구속력이 있다든지, 그대로 무슨 운명을 결정짓게 하는 저주가 되었다는 것도 없어요. 그뒤에 가나안이 셈이나 야벳의 종의 종되었다는 그런 얘기 없거든요. 그런데 그걸 갖다가 나중에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을 가지고 막 적용해가지고 무리하게 해석한 건 많이 있습니다.

주석같은 것 보면. 제가 볼때는 그것까지 가면 안되고 제가 볼때는 노아 할아버지의 그저 감정으로 퍼붓는 그런 언어일 뿐이고, 그리고 그것도 온당치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는, 저주 받았다는 역사적 근거가 없거든요. 억지로 해석해가지고, ‘가나안 땅을 개간해가지고 셈족에게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했다. 그게 종의 종된 거다.’ 이게 무리한 해석 같아요. 확대 해석하지 말고 그냥 노아 할아버지가 술김에 아직 덜 깨서, 술이 깼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 술이 덜 깬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욱하면서 그저 자식에게 퍼부은 정도로 이렇게 하면 문제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그것은 영 어렵거든 천국가서 노아 만났을 때 제가 딱 물어보겠습니다. 유념했다가. 죄송합니다. 답이 시원치않아서.

 

Q8.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오늘날 비이스라엘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를 때, 여러 명칭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이 있고,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를 수 있고, 유대인이라 부를 수 있고, 또 세파라짐 유대인, 아슈케나지 유대인 등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히브리인이라는 뜻과 그리고 언제부터 이런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그 부분에 대한 질문입니다.

 

A8. 예, 이것도 참 아직까지도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데, 이브리, 혹은 히브리 이렇게 해서, 혹은 애굽 사람들이 세상 천한 것들 이런 사람을 말할 때 합비루라고 말해요. 이것이 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합비루다. 하고 현대 비평적 신학에서는 합비루야 말로 애굽사람들이 천한 것들, 떠돌이, 거렁뱅이 이런 것을 부를 때 합비루라고 부르는데, 합비루에서 점이 하나 탈락되어가지고 히브리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거의 정착되어가는 것 같이 갑니다.

 

그러나 전통적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통적 해석은 에벨 자손이다 하는 말에서 이브리가 나왔다는 거에요.

혹은 강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이런 말로 또 이브리 했다고 하는데, 에벨의 자손이란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지금 에벨 자손이란 말이 별로 익숙하지 않은데, 창세기 10장을 펴보겠어요?

창세기 10장을 펴보면 거기에 21절을 보면, 셈을 하면서 셈을 소개하죠. 셈을 소개하면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이렇게 하는데, 여기 지금 21절에 셈을 말하면서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말하는 것 보면 에벨이 유명한 거에요. 그렇죠? 에벨은 유명하고 익숙하죠? 셈은 생소하니까 익숙한 것을 불러가지고.

 

여러분, 한국에서 한국이 낳은 유명한 축구선수 박지성이란 사람 있죠? 박지성은 다 알죠? 박지성 아버지 이름은 잘 몰라. 그렇죠? 그러니까 박지성 아버지를 지칭하면서 박지성 아버지라 할 때 아, 그러는 것처럼. 셈이라는 오히려 사람들이 잘 몰라도, 에벨 온 자손은 다 안다 그 말이에요. 그 정도로 에벨이 유명해가지고 그 에벨 자손이다 하는 말이 에브리, 이브리, 히브리 되었다는 거에요. 발음이. 지금까지 여러 가지 학설 중에서 에벨 자손이다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겁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하는 것은 야곱의 자손들을 두고 하는 말이고, 유대인 하는 것은 유태인, 유다인 하는 것은 남왕국 사람들만 원래 말할 때 유대인인데, 북왕국은 이스라엘이고요, 세파라짐 하는 것은 스페인 쪽으로 가서 유럽에서 핍박받은 사람을 세파라짐 하는 것이고, 아슈케나짐 하는 사람들은 창세기에 보면 아스그나스 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냐면 창세기 10장에 2절 보세요. 10장 2절을 보면,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 라고 있죠? 그 줄을 그어봐요. 아스그나스라는 말이 아슈케나지입니다. 이걸 아슈케나지라고 해놓았는데 할아버지들이 아슈케나지들이 미국 사람들 발음이 시원치 않으니까 아스그나스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영원히 우리가 아스그나스와 아슈케나지를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지금 현재 카프카즈라고 코카사스라고 합니다. 흑해하고 카스피해 사이에 살고 있던 카자르 족속에 아스그나스가 있었어요.

 

이 아스그나스가 독일로 가가지고 독일에서 유대교를 믿은 사람들을 아슈케나짐, 아스그나스의 자손이다. 유대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아니고, 아스그나스의 자손이다. 다음에 종말론 할 때 이걸 다시 다 언급하게 될 겁니다. 이 사람들이 완전히 백인들입니다. 아스그나스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서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법조, 교육 전체를 잡고 뒤흔드는 아주 악한 사람들인데, 이게 아스그나스라고 해요. 유대인이 아닙니다. 가짜 유대인. 유대교로 개종을 했다가 기독교를 지구상에서 없애려고 하는데, 그런 세력들인데, 이게 아슈케나짐라고 하는 유대인들이에요.

 

Q9-1.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은 이집트 애굽에 관한 질문입니다. 성경에 창세기하고 출애굽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배경 역사가 되는 이집트의 역사가 나오는데, 바로라는 단어와 애굽이란 단어 외에는 저희가 별로 아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 14절부터 시작해서 바로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 후에 요셉이 총리로 있었을 때 바로가 나오고요, 출애굽때 모세가 활동을 할 때 바로가 나오는데, 그런 설명과 그리고 관련된 좋은 책들을, 이집트 관련 역사 좋은 책들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9-1. 이집트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면, 아마 다른 학문을 다 포기하고, 하마터면 성경까지도 포기하고 매달려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 중에 제일 오래된 역사고, BC 330년 경에 있었던 그 헬리오폴리스, 다시 말하면 이집트의 역사가 헬리오폴리는 제사장인데, 마네토라는 학자가 있었어요. 마네토가 이제 이집트 역사를 31 왕조로 나눕니다. 왕조만 31번 바뀐거야. 그러니 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르긴 해도 마네토 자기도 나눠놨을 뿐이지, 다 암기도 못할 겁니다. 따라서 저도 잘 몰라요. 저도 애굽 역사에 관심이 많고, 성서 배경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애굽 약사를 정리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학설이 분분하기도 하고, 고대 하도 오래된 고대이기에 히브리역사가 역사하고 신화하고, 신화인지 인화인지 전설인지 구분 안되고 복잡해요.

그리고 인도역사, 중국역사, 그리고 이 이집트 역사는 길고 복잡한데,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서 알려진 것은 창세기가 아주 후대에 기록되다 보니까, 아브라함 때는 그 애굽의 왕을 파라오, 즉 바로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사실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이 아브라함 때 누구 였는지. 연대는 아브라함의 연대가 대충 짐작되지만, 그때 바로라고 애굽 왕이니까, 후대에 기록하면서 바로하는데, 실제 아브라함 때는 바로라는 말도 안썼고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성경이 밝히지 않은 것을 굳이 꼭 알아야 되느냐. 꼭 알아야 될 이유가 있을 때, 꼭 그런 건 있습니다. 출애굽 연대 같은 것을 할 때는 또 지금 연구가 되어가지고 좀 밝혀졌지만, 아브라함 시대가 바로가 누구였느냐. 뭐 잡으면 사라의 가족들도 할 말이 많겠죠? 뭐 이름은 아직도 정확하지 않아요. 아브라함 때의 바로는 누구였는지. 예. 이상입니다.

 

Q9-2. 깊은 연관이 있는 힉소스 왕조라는 애굽때 왕조라던지, 출애굽 때 있었던 바로에 대해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A9-2. 힉소스라는 건 아직도 안 밝혀졌어요. 힉소스라는 왕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한 108년간 이집트를 통치하고는 셈족이었다는 것만,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에서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후에서 모세가 나타나고, 그 사이에 한 108년 정도를 통치했던 어떤 왕조가 있는데 그건 셈족 계열이에요. 이집트는 함족 계열이잖아요. 셈족 계열에서 어떤 족속이 왔는데, 이걸 힉소스라고 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도 몇 개 나오지만, 도대체 어느 민족에 속했는데, 이게 안 밝혀져 가지고, 지금 어떤 엉뚱한 학자는 그게 바로 힉소스왕조가 이스라엘 사람이다. 하고 이 10년 안팎 사이에 그런 무리한 주장도 나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권을 잡아가지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하고 무리한 연구가 나오는데 확실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아직도 연구 진행 중이고 더 어떤 자료가 나오면 몰라도, 지금까지 나온 자료로서는 어느 민족 출신인지 확실하지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시대는 출애굽 직전이니까, 계산하면 어느 정도 연도가 나올 수 있겠죠. 네 그 다음에.

 

Q10. 창세기 4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각각 유다와 요셉에게 축복할 때, 실로가 오시기까지 라는 내용과 그로부터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나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각 실로와 목자를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를 비교해 보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A10. 그것도 오해를 많이 낳는 부분인데, 그 실로라는 말은 샬롬이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평화가 올 때까지 해도 괜찮아요. 실로라고 인격적으로 갖지 않고 참 평화가 올 때까지 이렇게 해볼 수 있는데,

창세기 49장 펴볼까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홀이란 것은 제가 전에 한번 이야기했죠? 그건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고. 홀이라고 하면 안되고, 지팡이, 혹은 지휘봉이라고 해야 합니다.

홀이란 것은 이렇게 생겼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갈 때, 대나무를 가지고 양쪽에 이렇게 붙여가지고 종이가 있는 거에요. 여기다 무엇을 써요. 그리고 임금이 뭐라고 말할 때는 거기 주보처럼 있는 걸 보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신하가 갖는 걸 이걸 홀이라고 그래요. 지휘봉을 이렇게 홀이라고 하는 게 전혀 아닌데, 거꾸로 된 겁니다. 빨리 고쳐야 되는데 여전히 안 고치고 있어요.

 

홀이란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고, 어떻든 여기서 지휘봉, 왕의 상징인 권능의 상징인 지팡이, 이런 것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유다 지파에 왕권이 계승될 것이다 하는 것으로 봐야 하겠고요,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라고. 오시기라는 것은 원어에는 없는 건데, 높여서 말한 거에요. 오기까지라고 되어 있는데, 실로가 오신다고 하니까, 인격화해가지고, 어떤 인격체가 아니겠는가. 인격체라고 하면 다윗이나, 여호수아나,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 솔로몬이나. 그럼 실로하면 솔로몬이 더 가깝겠죠?

다윗은 전쟁을 했으니까. 그래서 더 나아가서 어떤 분은 이분이 메시야까지 연장되어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로라는 말 의미 자체는 평화야, 평화.

 

그 다음에 요셉지파. 24절에 보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하니까 이것이 왜 이스라엘의 목자가 다윗에게서 안 나고 요셉에서 나느냐?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잘 봐요. 이스라엘의 목자가 요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야곱의 전능자에게서 나온다는 거에요. 이해가 됩니까?

요셉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반석의 목자는 야곱의 전능자에게서 나온다 이렇게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겁니다. 그게. 되었습니까? 목자가 예를 들어서 이때 목자를. 글쎄요? 여호수아도 하나의 목자라고 할 수 있겠고, 백성의 지도자니까, 그래서 요셉에게서 난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이 나는 것은 요셉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반석인 야곱의 전능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봐야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참 목자가 나온다. 이렇게 하면 되겠죠? 그 다음.

 

Q11. 창세기에서 마지막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가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요셉과 아스낫, 살몬과 라합, 그리고 유다하고 며느리 다말, 뭐 이런 관계도 있고, 보아스와 룻 같은 이런 경우는 성경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고,

반면에 싯딤 사건이나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때 이방 여인을 취하는 모습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반쪽으로 나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고, 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배워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고르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주시고요,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하신 모습을 저희가 생각해 봤는데,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요, 또 제자들을 택하실 때도 좀 볼품 없는 제자들을 택하셨고, 예수님도 보면 낮은 모습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집안의 배경이나 믿음의 선택이 중요한 요건이 되겠지만,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이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고 초월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 네 그렇습니다.

 

A11. 이게 가장 실제적으로 본인들에게 관심사가 되겠죠? 그렇죠? 네. 이건 토론을 했답니다 청년들이 토론을 했는데 답이 안나와서. 요셉과 아스낫은 율법 이전이죠? 그렇게 하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율법 이전이니까. 가까운 동족이란 건. 이방이란 말이 없었어요. 아브라함 때만해도. 자기들이 종족 보존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요셉과 아스낫 하면, 요셉이 아스낫 말 듣고 우상숭배하는 그런 위인이 아니겠죠? 여기 이제 이방 여자를 취하지 말라 하는 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지 않습니다. 항상 여자 말을 듣는다는 거야 남자야. 여자 말 안 듣는 남자도 문제고, 여자 말 듣는 남자도 문제야. 문제는 남자죠? 그렇죠? 남자가 줏대머리 없어가지고 여자 말 듣고 우상 숭배 따라가면 그것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남편이 줏대머리가 있어가지고 여자 말 안 듣고 해도,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서 아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여자가 남편은 전도 못해도 아들은 반드시 우상 숭배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권리까지도 엄마에게 있으니까, 이게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여자를 완전히 변화시킬 그런 능력과 그만한 실력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시도를 안하는 게 좋겠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볼 때 우리 샤론교회 청년들은 이방인, 안믿는 처녀하고 교제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넘어가거나 하지 않을 거 같아요. 그 문제는 그 다음에 아들 낳은 다음이 문제라니까. 아들을 낳았을 때는 그 아들까지 아버지가 책임을 잘 못져. 그 엄마가 그냥 맘대로 할 수 있어. 그래서 저는 남성들을 안 믿는 여자하고 교제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되 믿음이 커가는 것 봐가지고, 충분히 자기보다 훨씬 더 믿음이 좋아졌다. 거듭난 거 보면 알거든요. 그거 모르면 나한테 데려와. 그래서 그렇게 된 걸 보고 결혼하면 되요. 저는 그렇게 결혼 사람을 여럿이 보았고, 제가 목회하는 동안에 그런 케이스가 많이 있었는데, 한건도 실패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안 믿는 처녀를 데려왔어도 교제해가지고 세례받게 해가지고 믿음이 생기는데, 나중에 보면 믿음이 더 좋아지는 거야. 여자 쪽이. 대부분 그렇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큰 염려없이 교제하는 건 할 수 있는데, 믿음도 안자라서 급해서 결혼부터 하면 안돼. 그건 아주 위험한 거죠. 그 이스라엘 백성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요, 딸을 믿지 않는 가정에 주었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다그치는 일이 별로 없어요. 딸이 가서 남편 전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막 주고 받고 하다보면, 그거 하나 하다보면 며느리도 데려오고 위험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요, 여성이 남편에게 영향이 크고, 자녀에게는 거의 절대적이라는 거에요. 이거 때문에 금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에는 이방인에게 섞이지 말라고 하는데 섞여가지고 속을 썩였어요. 그렇죠? 신약시대 와서는 이제 유대인하고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 하는데, 차별한다고 속을 썩이고 있어요. 자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헬라인 아무 장벽이 없이 그 장벽을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약에도 속을 썩이고 신약에도 속을 썩이고 참 이게 말이 안되요. 그래서 저는 지금 믿지 않는 남자라도, 믿지 않는 처녀라도 좋은 사람이 인격적이면 교제를 시작하라 하니까, 겁이 나서 또 못해 보니까. 여자들은 믿음 없는 남자는 죽어도 안 간다고 하고, 안 간다고 하면서 전도도 안하지, 총각들은 믿음 없는 처녀는 결혼 못하겠다 하니까, 자꾸 결혼을 못하는 거야. 그리고 너무 또 따지는 것 같애. 나이가 들면 자꾸 따질 수 있어. 콩깍지가 벗어졌기 때문에 따질 수 있는데 그렇게 따지다 보면 결혼을 못하는 수가 있는 거야. 그리고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늦어지게 되면 해도 하나가 잘 안돼요. 너무 늦어 굳어버리고 나면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이미 굳어버리고 나면 결혼한다 해도 하나가 안되 애를 먹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얘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했는데, 다른 건 다 믿는 거 같은데, 그 점은 안 믿는 거 같아요. 우리 교회에서 결혼이 너무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 애가 타는데, 너무 따지지 말고, 그런 정도 그저 보통 수준으로 공부를 해왔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그런 정도가 되면, 너무 믿음도 따지지 말고. 여러분, 믿음이란 것이 전혀 세월만 가지고 안되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자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너무 따지지 말고, 너무 믿음 다 따지게 되면, 이거 따지고 저것 따지고 하다보면 어려워요.

 

글쎄요. 여러분, 그 사도바울이 ‘너희를 택하심을 보라. 우리 중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다.’ 없는 거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 천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니까 너무 따지지 말고 근본이, 근본 바탕이 괜찮다 싶으면 살아가면서 서로 맞추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면에서 너무 따지지 않는 걸 좋아하는데, 우리 청년들이 너무 따지는 것 같애. 특히 우리 샤론교회는 또 귀가 높아가지고, 귀만 높으냐? 눈도 높아요. 눈만 높으냐? 이상도 또 높아. 그래서 이렇게 겸손 안해 가지고는 어렵지 않겠는가? 가끔 좀 낮으면 좀 쉬어지리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결혼한 사람이 아멘 하면 뭐해요?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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