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이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참으로 "진짜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현저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이 모습을 연구하기로 하자. 우리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지 않다면, 즉시 흥미 있고 유익 된 연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는 이 글의 제목인 "회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한 해답을 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얻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즈음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훌륭한 능력으로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실로 회심한 모든 심령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는 신성한 회심의 절대적이고 필요 불가결한 우주적 필요성을 믿는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고, 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야만인이든, 수크다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로마카톨릭교인이든, 다시 말해서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또는 교회에서의 직분이 무엇이든 또는 그의 신학적 신조가 무엇이든 간에 꼭 회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직통으로 지옥과 연결된 넓고도 영원한 길목에 있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모태로부터 기독 신자가 된 사람은 없다. 또한 누구든지 교육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도 없다.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교육으로 또는 물세례로 또는 어떤 종교적 의식으로 기독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 실수이며 엄청난 기만이며 영혼에 대한 사단의 기만술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성한 회심에 의해서 기독 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께로 향한 진실 된 회심이 절박하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이것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본다면 엄청난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자기 앞에 끝없는 영원한 내세가 펼쳐져 있는데도 불멸의 존재인 영혼이 자신의 회심의 엄숙한 문제를 거역한다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우매함인 것이다.


이 최대로 중요한 문제와 비교해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별로 견줄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우리 주위에서 분요하게 사람들의 생각과 에너지를 몰두시키고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일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심령의 중요하고도 엄청난 회심의 문제와 비교해 볼 때 한낱 저울 위에 묻은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상거래의 투자라든가, 모든 돈버는 계획이라든가, 이익 되는 투자의 흥미진진한 문제라든가, 모든 쾌락 추구 곧 극장, 음악회, 무도회, 당구, 카드놀이, 주사위 놀이, 경마, 사냥, 음주 등 이름 댈 수도 없는 수많은 여러 가지 일들 즉 이런 것들은 마음에 만족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이 추구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굴뚝의 연기이며, 가을 낙엽과 같이 모두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며, 후에는 고통스런 공허만 남긴다. 이런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그 심령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무시무시한 질문이다. 상거래의 흥분과 정치적 싸움(권력투쟁)과 야망과 돈벌이와 쾌락 추구 끝에는 무엇이 남는가? 왜 인간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누구든지 이 죽음의 문제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이 죽음과의 싸움을 피할 길은 없다. 우주의 모든 재물로도 무자비한 원수 사단의 손에서 한 순간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기술로도, 모든 애정 어린 친척이나 친구들의 염려와 그들의 모든 눈물과 한숨과 간구로도 그 무서운 순간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며, 공포의 왕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무서운 칼을 거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은 어떤 인간의 예술로도 처리 될 수는 없다. 그 죽음의 순간은 인간의 생활의 모든 아름답고 매혹적인 것들과 마음의 이음줄이 끊겨지면서 틀림없이 찾아온다. 즐겁게 지냈던 사랑하는 친구들과 매혹적인 일들과 모든 탐욕의 대상물들은 포기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이 천 개가 있다 할지라도 이 충격을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대면하여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무서운 신비이며, 엄청난 사실이며, 확실한 실제인 것이다. 이 죽음은 하늘 아래 모든 회심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죽음이란 년, 월, 일, 시, 즉 시간의 문제인데 그 시간 속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그림자 같은 것들을 굉장한 실재를 갖고 있는 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분계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성경에서 해답을 얻자. 성경 외에는 해답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헛된 사상으로 선뜻 대답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려 한다.
"먹고, 마시고, 그리고 내일 죽자!"
이 얼마나 허황된 자만심인가! 그것은 헛된 속임수다. 이것은 이 세상 신에 의해서 가려진 인간의 바보 같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불멸의 영혼이 소멸될 수 있단 말인가?
에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영혼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절대로 소멸되는 영혼이 아니다. 영혼은 틀림없이 영원히 존재한다. 회심을 한 사람이든, 또는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이든 영혼은 영원성을 지내고 있다.
오, 모든 사려 깊은 심령에 이 얼마나 무거운 생각인가! 어느 누구도 이 광대한 사상을 습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자.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의 단 한 구절이 만개의 인간 마음의 주장과 이론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은 소멸인가? 아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말에 주목하시라.
이 말은 오직 자신의 죄 속에서 죽는 사람과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기독도에게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한 대로 심판은 영원히 지나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영생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죽음 이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러면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 성경은 엄숙하고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1-15)

이 모든 것들은 말씀이 표현하는 한 확실한 것이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이의나 거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에게는 전혀 심판이 없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다고? 죽으면 끝이라고? 아니다. 오히려 불못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있게 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기 앞에 죽음과 심판과 불못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매순간의 맥박 소리는 점점 더 두려운 곳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독자께서 머지 않아 영원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내일 아침 태양이 다시 뜬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고, 회심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심판의 모습은 불못으로 나타날 것이요, 그것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이런 무서운 주제로 우리가 오래 상고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 따위 말이 사람들을 회심케 할 수 있겠는가?" 설사 이런 말이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회심의 필요성은 알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 올 절박한 위험은 알게 할 것이다. 다가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도록 권면은 할 것이다.


왜 축복 받은 사도는 벨릭스와 함께 "다가 올 심판"에 대해서 언쟁을 하였던가?(행 24장) 그것은 틀림없이 벨릭스로 하여금 그의 악한 길과 생활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설득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왜 청중들에게 영원한 곳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강조를 했던가? 왜 주님은 자주자주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을 말했던가?(막 9:48) 그것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위험을 알게 할 목적으로 하셨을 것이고 그러하므로 그들이 그 위험으로부터 도망하여 그들 앞에 제시된 소망을 붙잡고 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현명한가? 우리가 그분보다 더 온화한가? 우리가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낸 적이 있던가?
주님께서 당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주제와 같은 것을 독자들에게 강조한다고 해서 염려할 것이 있겠는가! 누구든지 회심하지 않으면 크고 흰 보좌 앞에 불가피하게 서게 되며, 불못에 던지운다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교묘히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위축되야 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바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회심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엄숙히 말하는데, 이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그 무엇도 이것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거역하게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어떤 걱정거리나 즐거움이나, 어떤 직업도 이 중요한 문제의 심각성에서 독자로 하여금 돌이켜 못 보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얻고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아니면 "사람이 자기 목숨과 바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 16:26)


오, 만일 당신께서 구원받지 못하고 회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대에게 지금 간청하노니,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회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도 최소한 이 문제를 알게 되기를 믿고 싶다. 그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그의 말씀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마 24:35)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와 인간과 악마라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다. 당신 앞에 두 길 중 하나가 놓여 있다. 지금 회심하든지 아니면 이후로 영원히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고, 이런 견해에서라면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회심하지 못한 자에게 말로나 글로나 지금 이 순간 다가오는 진노에서 벗어나 축복의 구세주에게로 도피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열의를 다해서 열렬히 강조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겠는가?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다. 그분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두 팔 벌리고 환영하고 계시다. 그리고 사랑스럽게 은혜의 말씀으로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않으리라"(요 6:37b)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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