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아니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계 5:13)

 

그러나 유독 사람을 예배하는 존재라고 말한 것은,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니 당연히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잘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의미

예배란 "하나님 보좌 앞의 이십사 장로와 생물들과 온 우주의 만물들"처럼, 

"찬양하고, 경배하고, 존귀와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예배할까?

당연히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피조물은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보여야 하나님을 예배할 텐데 보이질 않으니 어떻게 예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제물을 바치거나 절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런 것 모두를 금하십니다. 

신상을 만드는 것도, 제물을 바치는 것도 금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막막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란 육신적 수단을 배제하라는 말입니다. 

육신은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고, 탐욕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고 "순수한 영과 진실성"을 가지고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진정 마음(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경외감과 감탄과 찬송"을 오직 하나님께만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12:2)

​산 제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약에서처럼 죽은 짐승으로서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순종하는 삶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몸(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예배 드리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날마다의 삶"을 통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제물 된 삶으로 

"하나님께 존귀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위적인 "내 의"로 하는 선행은, 말 그대로 "내 의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행실은 "내 의" 가 아닌, 주님 안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행실은 정말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거듭나지 않은) 믿음의 장성함에 이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신들의 욕구"만을 채우는 "엉뚱한 일"들을 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은 말씀이 가장 왜곡되어 있는 시대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타락한 육신의 열매"들이 교회 안에서 맺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일류 대학에 들어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세상의 방식으로라도 사업에 성공하고 부자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알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고위직에 올라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꼭 더 크게 교회당을 지어놓아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더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모여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영광이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타락한 인류 모두가 갖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본적인 것들을 가지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육신)의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뿐"이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착한 행실은 아무나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종을 통한) 착한 행실을 스스로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이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 그에 대한 칭송은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을 통한) 착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도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 의(생명)"의 문제가 십자가에서 해결되지 않은 "죽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육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부터 나오는 계산된 착한 행실은 있을 수 있으나 정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착한 행실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육신이 자기 안위를) 위하는 마음, 즉 "타락한 이기적인 마음"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통하여 무엇인가 세상적인 득을 보려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묵묵히..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착한 일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삶의 현장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매주 한두 번씩 교회당에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사실 예배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예배하기 위해 충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형제들이 교회당에 열심히 모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충전을 잘 해야 빛을 비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적인 것들을 나누기 위한 교제가 아닌, 형제들과 믿음과 은혜를 함께 나누기 위한 교제여야만 합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라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기듯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하고 존귀하신 주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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