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명단, 어느 것이 진짜인가?
복음서들은 열두 명으로 구성된 제자명단을 소개합니다(사도행전 참조).
그러나 그 열두 명의 제자명단을 가만히 살펴보면 열두 명이라는 숫자와 그들이 모두 유대 팔레스틴 출신의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만 빼고는 네 개의 복음서들이 모두 완전하게 일치하는 내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열두 명의 제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들을 찾아 아래와 같이 구별해 놓은 후 서로 비교해 본 다음 열두 제자의 이름이 왜 복음서들 사이에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의 제자명단(10:2~4)
시몬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빌립, 바돌로매,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가룟 유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 받은 세리 마태(9:9~10)
마가복음의 제자명단(3:16~19)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가룟 유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 받은 레위도 알패오의 아들(2:13~15)
누가복음의 제자명단(6:12~16)
시몬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
*마태복음의 세리 마태는 누가복음의 세리 레위(5:27~29)?
※사도행전의 제자명단(1:13)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요한복음의 제자명단(요1:40,43,45; 6:67,71; 11:16; 13:2,23,26; 20:24; 21:2)
안드레, 시몬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도마,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또는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 사랑하시는 제자.... 나머지는(?)
위에 기록된 열두 제자명단을 비교해 보면서 복음서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들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이 기술될 수 있습니다.
※어휘 참조: 열두 제자명단에 나타나는 ‘가나나’와 ‘셀롯, 그리고 ’가룟’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1)‘가나나’와 ‘셀롯’은 ‘열심당원’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서본문의 해당 각주에 설명이 되어 있으므로 참조할 수 있습니다.
(2)‘가룟’은 아람어의 ‘이스카리옷(위선자, 배신자)’에서 왔거나 라틴어의 ‘시카리옷(단도, 단검)’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셀롯 당원들 중에서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일단의 무리들을 ‘시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볼 경우 열심당 소속 단원 중 두 명이 예수의 열두 제자에 속했다고 보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바요나 시몬’에서 ‘바요나’의 어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호전적이고 급진적인 열심당 소속의 폭력적 성향을 지닌 제자는 세 명으로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아래 6번의 아랫부분 설명 참조).
(3)이와는 달리 ‘가룟’이 ‘그리욧(수15:25 참조)’이라는 지명의 축약된 발음일 수 있다고 본다면 ‘가룟 유다’라는 말의 뜻은 ‘그리욧 지역 출신의 유다’로 새길 수 있습니다.
[1]제자명단에서 확실하게 일치하는 점들
1. ‘열두 명’으로 이루어졌다는 수자의 일치(사도행전 제외)
네 복음서들이 모두 ‘열둘’이라는 수를 말할 뿐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활동하셨던 예수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바울도 제자들의 수가 모두 열둘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는 바울이 알지 못했던 것인지,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고 말했습니다(고전15:5).
열한 명에게 보이셨다고 했어야 옳은 표현이 아닐까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제자충원 이야기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의 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 유대 팔레스틴 출신 남성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출신지와 성의 일치
열두 제자들이 모두 남자들로만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하지만 본문상으로는 단정적으로 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어디에도 열두 제자들이 모두 남자들로만 되어 있다는 명백한 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명단에 여성이라고 볼 만한 이름이 없다는 점과 아울러 당시의 사회-문화적 여건 등을 종합해 볼 때 열두 제자들은 모두 팔레스틴 출신의 유대인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론은 ‘성서본문 이외의 다른 자료들도 함께 다루는’ 학술적인 방법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2]제자명단을 비교해 볼 때 나타나는 차이점들
1. 마가복음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서로 형제 사이가 아닙니다.
마가복음의 열두 제자명단을 읽으면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서로 형제지간인 것으로 수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다른 복음서들에 따르면 열두 제자들 중 시몬 베드로가 가장 먼저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안드레가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았고 시몬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았으며 그때 ‘게바’라는 아람어 별칭을 받았습니다(1:40~42). 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라는 헬라어 별칭이 주어졌습니다(마4:18; 10:2,5; 16:18; 눅6:14).
이런 차이는 요한복음이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는 측면과 요한복음 공동체의 독자적인 신학적 입장이 작용했으리라는 시각에서 볼 때 다른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열두 제자명단이 요한 공동체의 입장에 맞도록 수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나 요한복음 공동체의 생활지역이 팔레스틴 밖이었음이 분명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에도 아람어로 별칭이 주어졌다는 것은 헬라어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되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참작될 수 있습니다.
3. 마가복음에 따르면 열두 제자명단의 순서가 시몬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그 다음에 안드레와 빌립, 바돌로매와 마태, 도마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는 다르게 안드레를 두 번째에 놓았습니다.
바돌로매 이후의 순서에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서로 차이를 보입니다. 이름순서에 변화가 있다는 얘기는 제자들의 서열을 서로 다르게 본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돌로매 다음에 도마, 세리 마태의 순서로 놓았지만 누가복음은 마태를 세리라고 소개하지 않으며 마태 다음에 도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열두 제자들의 명단 자체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두 제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와 늘 함께 하던 세 명의 제자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서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 세계에서 서열문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공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른 복음서들이 주장하는 “베드로 먼저, 안드레 다음”의 순서를 요한복음은 완전히 뒤바꿔서 “안드레 먼저, 베드로 다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열두 제자명단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4.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 받은 세리를 마태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받은 인상이 크기 때문에 세리 레위의 이름이 세리 마태로 개명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을 뿐만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받는 인상에 의하면 세리 레위가 결코 세리 마태일 수 없습니다.
5. 마태복음에 의하면 야고보와 다대오를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다대오 이름 앞에 쉼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패오의 아들을 야고보로만 읽으라는 뜻입니다.
킹제임스역은 알패오의 아들이 야고보뿐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비잔틴 사본에 따라 ‘그리고 다대오라고 하는 레배오(and Lebaeus, whose surname was Thaddaeus)’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대오는 알패오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름 앞에 쉼표를 찍지 않은 우리말의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은 채 마가복음을 읽으면 다대오도 야고보의 아들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럴 경우 마가복음에 의하면 세리 레위까지 포함하여 알패오의 아들이 세 명인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막2:14).
하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은 야고보뿐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대오 대신에 셀롯 시몬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영향을 받은 채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셀롯 시몬이 알패오의 아들인 다대오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베대의 아들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제자명단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없이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누가복음은 그들의 아버지가 세베대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눅5:10과 비교).
그리고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누가복음은 유다라는 이름의 제자가 두 명임을 밝힙니다. 이때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를 다른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 한 유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밝혔는데 이름이 야고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야고보라는 인물은 모두 세 명입니다.
6. 마태복음의 열두 제자명단을 대할 때 다대오를 야고보의 형제로 읽을 경우 제자들 중 형제들은 모두 세 쌍인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다대오가 그들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됨으로서 두 명의 야고보가 서로 구별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시몬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입니다(1:42; 21:15,16,17). 그러므로 시몬의 형제인 안드레의 아버지도 당연히 요한입니다. 따라서 네 개의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세 명의 형제들과 세 명의 아버지 이름이 모두 나타나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아버지는 요나입니다. ‘바요나 시몬’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16:17).
여기서 ‘바요나’가 ‘바리욘→바룐’으로 발음될 수 있다고 볼 경우 그것은 아람어로 ‘폭도’라는 뜻을 갖는 어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열두 제자들 중 급진적이며 호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던 폭력성향의 제자들이 모두 세 명이나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실제로 대제사장의 귀를 칼로 잘라 버린 폭력성을 보인 제자가 바로 베드로였음을 요한복음이 전합니다(마26:51; 막14:47; 눅22:50→요10:10).
7.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따르면 열두 제자들 중 동명이인은 시몬과 야고보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시몬에게 베드로란 별칭이 덧붙었고 다른 시몬에게는 ‘열심당원(가나나인 시몬, 혹은 셀롯 시몬)’이라는 출신 그룹 명칭이 덧붙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명이인인 야고보를 구별하기 위해 그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그 이름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따르면 동명이인이 셋입니다. 시몬(시몬 베드로, 셀롯 시몬)과 야고보(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및 유다(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가 그들입니다. 누가복음은 두 시몬을 구별하기 위해 시몬 베드로라고 했고 다른 시몬에게는 셀롯 시몬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두 야고보를 구별하기 위해 다른 야고보에게는 그의 아버지가 알패오라는 것을 표시했으며 두 유다 중 한 사람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기명되었고 다른 유다는 가룟 유다로 표기되었습니다(사도행전의 제자명단과 비교 참조).
8.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이를 때까지 나타나는 ‘요한’은 세례 요한이며 21장의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은 열두 제자들 중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밝히지 않으면서 마태복음과는 다르게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사도 요한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의도적인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이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이었음을 말하면서도 사도 요한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다루지 않은 것은 어떤 오해가 생길까 봐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열두 제자들에 대한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학적 입장이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열두 명밖에 안 되는 제자명단을 기록하지 않을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이 왜 열두 제자들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았던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저자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선결과제가 생깁니다.
9.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첫 제자들로 부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 및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를 잡던 중이었습니다(마4:18이하; 막1:16이하; 눅5:1이하).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와 베드로는 세례요한의 제자로 있던 중에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자신들의 선생이 하는 말씀을 들은 후에 곧 스승을 바꾼 사람들로 나타납니다(요1:35~42참조). 21장에서 가서야 비로소 그들의 전직이 어부였음을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학술적으로 21장은 나중 시대에 요한복음 공동체의 지도자 그룹이 추가한 본문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21장이 없는 요한복음만을 볼 경우에는 베드로의 전직이 어부였다는 것도 추론하기가 어렵습니다.
10. 요한복음은 열두 제자명단을 소개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 없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 사랑을 받는 ‘각별한(?) 제자’가 있었음을 전합니다. 특히 그 제자는 예수께 다른 형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12) 예수의 모친을 모시게 됩니다(19:27).
이 부분에 대한 경우 해석의 수고를 할 것도 없이 ‘사랑하시는 제자’의 막강 권위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처형되실 때 십자가 곁에 열두 제자들 중 누구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께서 처형당하신 그 십자가 곁에 있었던 제자였다는 점도 부각됩니다(19:25).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그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다른 복음서들이 수제자로 묘사하고 있는 베드로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제자가 따로 있었다는, 물에 잠겨 있는 채 포를 발사하는 잠수함 같은 요한복음의 물밑 주장을 보게 됩니다.
11.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여러 특이한 내용들 중의 하나로 다른 복음서들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빌립의 전도를 받아 예수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대화 몇 마디 나눈 후에 곧 바로 예수를 향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향해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습니다(1:49).
12. 요한복음의 또 다른 특이한 사실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6)으로 잘 알려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와 매우 흡사한 신앙고백을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가 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11:27-주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또한 요한복음이 전하는 인물들 중 나다나엘은 벌써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초장에서 이미 그와 대화를 나누신 예수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요한복음은 제자명단의 역사적 가치를 드러내기 보다는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태복음이 전하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같은 수준, 혹은 그 정도의 고백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공동체가 예수를 향한 믿음상태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그림을 보게 됩니다.
[3]제각각 서로 다른 열두 제자 명단에 대한 질문 내용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열두 제자명단은 제각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명단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가감 없이 나타낸다면 어느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명단이 가장 진정성이 있는 진짜 명단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복음서들이 소개하는 열두 제자명단이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기록으로 남겨 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열두 명의 제자명단은 복음서들의 입장에서 제각각 편집한 내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네 개의 복음서들 중에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열두 제자명단이 역사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려고 할 때 이상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의 이름이 열두 제자명단에 없습니다. 여기서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열두 제자명단을 대할 때 왜 베드로와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이후 다섯 번째로 부름을 받았던 세리레위가 열두 제자명단에 없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한편 마태복음은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의 이름이 마태였다고 전합니다(9:9). 그러나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도 역시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레위였다고 전합니다(5:27). 그래서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이 마태였던 것이 아니겠느냐고 할런지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태복음 저자가 레위의 이름을 마태로 변경시키는 편집작업을 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복음서들은 왜 제각각 열두 명의 제자명단을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두 명의 이름이 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열두 명이 많아서 이름을 잘못 기억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제자명단이 제각각 입수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왜 복음서들은 열두 명의 제자명단을 서로 제각각 다르게 전하는 것일까요?
[4]서로 다른 열두 제자명단에 대한 해명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해석의 원리적 기본은 간단합니다.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열두 명의 제자명단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써 놓은 사실보도 목적의 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도 복음서 저자들은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을 갖고 믿음을 갖게 하거나 이미 믿는 믿음을 좀 더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성서본문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각 복음서 저자들이 제자들의 명단을 다르게 기록한 이유는 그들 각자의 입장과 처지, 신앙적 관점, 신학적 견해 등의 다양한 ‘자기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들은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내리고 기록한 예수 위인전이 아닙니다. 예수와 관련된 실제의 사실들을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실 그대로 가감없이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역사 다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이름이나 순서가 모두 똑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바심을 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복음서의 기록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요20:31)”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기록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복음서 저자들은 제각각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앙고백, 자신의 신학적 관점, 자신의 처지에서 가장 필요한 자료, 가장 필요한 이야기, 가장 유익하리라고 판단되는 말씀들만을 취사선택하여 편집한 ‘믿음의 책(요21:24~15참조)’을 썼습니다.
바울서신으로 분류되는 서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똑같은 이신칭의 개념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두 서신의 이신칭의가 독자들의 상황과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같은 의미를 갖고 적용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신칭의 신학사상 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특정의 신학적 사상이 적용된 특별한 상황과 그 사상이 대상하는 독자, 혹은 대상자들이 생활하던 지역 및 삶의 시간대 등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 사상이 똑같은 의미로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키에 해당하는 신학적 원리는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문에 해당하는 상황들은 서로 제각각입니다. 키의 역할을 해야 하는 신학적 원리는 역동적으로 기능하여 모든 삶의 상황에 적용되는 말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똑같은 모습을 띨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저자가 기록한 서신일지라도 서로 다른 별개의 본문으로 구분하여 따로따로 읽고 거기에서 오는 ‘서로 다른 감동과 은혜’를 별도로 받도록 각 책들을 ‘별개의 책’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서의 각 책들은 서로 다른 관점과 경험, 사상적 시각이나 종교적 견해 및 신학적 사상에 따라 독립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 66권을 하나로 꿴다는 발상은 어이없는 욕심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로 쫘악 꿰시길 바랍니까? 터무니없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성서의 각 책을 하나로 꿴다는 발상 자체가 헛된 욕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으로 꿰어서 누구보다도 말씀에 대한 지식이 확실하다는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내재된 욕심에서 나온 헛된 소망일뿐입니다.
한 권의 책 안에 포함되어 있는 서로 다른 66권의 책들을 독립적으로 대하며 각 책들의 독자성과 특별성, 그리고 개별성 혹은 개체성을 분명하게 존중하면서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서(書)를 하나님의 말씀인 경(經)으로 받는 “한 책의 사람”이 됨으로 말씀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감격과 기쁨을 누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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