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압 족속에 대하여
롯의 두 딸은 적당한 배우자가 없음으로 인해 자손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해서 그와 동침하였다.
그 결과 롯의 맏딸이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모압이다 (창 19:30-38).
이 모압은 후에 요단강 동편에서 한 민족과 국가를 이루었던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모압 족속은 사해 남동쪽 해안의 고원지대(해발 약 915m )에 정착하였다.
모압의 서쪽 경계는 비스듬히 사해와 요르단 단충 계곡에 까지 이르렀으며,
일반적인 북쪽 경계는 아르논 강(오늘날의 '와디 엘-모집')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강할 때에는 더 북쪽에 위치한 헤스본까지 확장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모압에서 경작이 가능한 땅은 이 아르논강 유역과 고원의 서쪽 부분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한 지역뿐이었다.
남쪽 경계는 제레드 시내 (오늘날의 '와디엘-헤사')였는데, 가파른 둔덕이 자연스럽게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후에 이 지역은 동쪽으로 가면서 점점 더 건조해지다가, 결국에는 사막이 되고 말았다.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매우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정착했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도시화는 초기 청동기 시대에(B.C 3000-2300년경)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요단강 동편의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모압에도 초기 청동기 말까지(B.C 2300-2100년경)
상당수의 주민들이 거주하게 되었다(참조. 신 2:10-11).
견고한 성벽을 가진 성읍들이 수원지 근처 언덕에 건축되었으며, 농업 지역이 성벽 바깥 쪽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모압은 고대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지나 남북으로 뻗어 있던 도로망(무역로) 때문에 분명히 많은 혜택을 누렸다.
B.C 2000년 말까지 모압의 많은 지역은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철기 시대(B.C 1200년)가 시작되면서 에돔과 암몬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압에서는 독립된 왕국이 세워졌다.
이 시대에 요압은 특히 남쪽과 동쪽 경계에 건축되었던 일련의 요새들에 의해 방어되었다.
그리고 소석회를 발라 만든 저수지 시설이 팔레스타인에 도입되고 바위를 뚫어 수로를 만들게 됨으로써,
모압 족속은 넉넉한 자연수를 공급받아-특히 동쪽의 사막 지역까지-안정되게 번영할 수 있었다.
가나안 정복에 앞서 하나님은 롯 자손의 기업이 되어야 할 모압을 침공하지 말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셨다(신 2:8-9).
하지만 좌압을 비롯한 조그만 주변 왕국들의 통치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전진해 오는 것을 그들의 권력에 대한 명백한 위협으로 보았다.
그래서 모압 족속을 정복하고 그 땅을 관할하고 있던 아모리 왕 시혼은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민 21:21-30).
그 후에 모압 왕 발락은 미디안 제사장들과 함께 술사 발람으로 하여금 행진해 오는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도록 유혹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민 22-24장 , 참조. 수 24:9, 삿 11:25).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 종교와 접촉함으로써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고 말았다(민25장).
임종 직전에 모세는 사해 북동쪽이 위치한 모압 영토인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벧브을 맞은 편에 있는 모압 땅에 장사되었다(신32:48-49.34: 1-6).
룻기를 보면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관계가 비교적 평화로왔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사실은 사사 시대 동안 두 민족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계속되었음이 분명하다.
삿3:12-30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징계를 받아 18년 동안 모압을 섬기다가,
베냐민출신의 사사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함으로써 비로소 다시 안식을 찾았다.
모압은 사울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면서 물리쳤던 민족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삼상 14:47).
한때 다윗은 사울로부터 도망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모합 왕에게 그의 부모를 미스베에 피신 시켜 줄 것을 호소 하였다(22:3-4).
하지만 후에 그는 모압을 정복하고, 은과 금을 전리품으로 취했으며(삼하8:11-12,대상 18:11),
조공을 요구하였다(18:2).
솔로몬은 이방의 여러 공주들과 결혼함으로써 이방과 많은 동맹 관계를 맺었는데, 거기에는 모압 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왕상 11:1).
그런데 이러한 아내들은 관례적으로 그들 자신의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에 모압의 신 그모스를 위한 '산당'을 건축했으며(7절),
그 스스로 그모스 숭배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33절).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는 오므리 왕가의 아합 왕이 통치할 때(B.C 869-850년경)까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모압 비문은 이 기간에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에 대한 반역에 성공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유다와 에돔의 도움을 받아 모압으로 진군하였다(왕하 3:4-27).
이때에 선지자 엘리사는 모압이 진멸되고 그 땅이 약탈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스라엘진에 대한 모압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메사는 포위를 당하였다.
절망 중에 그는 왕이 될 맏아들을 그모스에게 번제로 드렸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은 후퇴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27절).
대하 20장은 베들레헴 남부 지역에 대한 모압 동맹군의 공격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동맹군은 내분을 일으켜 상호 간에 교전함으로써 자멸하고 말았다.
당시의 다른 팔레스타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압은 계속해서 앗수르와 바벨론의 지배에 시달리게 되었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도모했던 저항과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모압 족속이 부르짖음과 절망으로 가득찬 피정복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예. 사 15•16장. 렘 48장).
모압에 대한 이러한 예언은 또한 아모스(암2:1-3)와 스바냐(습 2:8-9),
그리고 에스겔(겔 25:8-11)의 예언 가운데도 나타나고 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모압 여인과의 결혼을 포기해야 했다(스9:1-2. 느13:1-3, 23-27).
후에 모압 영토는 나바티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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