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총론 

제 1 장


서 론

1. 서론의 방법

성경같은 책이 이 세상에 없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의도된 책이며 결코 오류가 없는 수 많은 증거들에 의해 신적 권위를 확증해 주는 책으로서 성경은 유일한

책이다.

구약 “서론”이란 성경 39권이 올바로 이해 되도록 그 고대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데 적용되는 용어이다.그것은 성경의 여러 책에 언급된 언어,관습,역사적 상황,인물,장소,사건을 다룬다.
①언어:원래 구약 성경이 쓰여지게 된 히브리어와 아람어 및 성경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 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셈어 연구(아람어,앗수르어,페니시아어,우가릿어,수리아어).
②역사:히브리 백성들의 역사와 그들이 접하고 살았던 인근 국가들의 역사 연구.
③종교및 문화:고대 이방인 저자들과 현대 고고학의 발굴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비 히브리인 국가들의 종교와 문화 연구.
④성경 각 권의 저작권:누가 썼느냐하는 문제는 그 책의 의미와 신빙성에 중요한 의미를 미친다.
⑤편집연대:성경 각 권이 편집된 정확한 연대,혹은 근사한 연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에 종종 실마리를 제공한다.
⑥역사적 상황: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영감된 저자가 말씀을 선포한 그 역사적인 상황과 그 당시의 문제를 연구.
⑦원문비평:필경자의 실수나 오류가 현재 우리에게 보전된 사본에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각권 의 원본 연구.
⑧본문의 완전성:성경 각 권이 그것에 의해 주장되는 바 대로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는지,혹은 다른 사람들의 글이 그것과 함께 결합되었는지를 검토한다.
⑨본문의 전승사:성경 각 권이 어떻게 여러 사본군(群)으로 복사되고 전수되었으며,그 이후 유대주의와 기독교를 거쳐 성경이 어떻게 고대의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어 왔으며 결국 활자의 발명후 히브리어 원본자체가 인쇄되었는지를 연구한다.


2.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다양하나 통일된 한권의 책”(a single composite whole,즉 Scripture)으로 보았다.구약이 비록 하나님의 무오한 지도하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 저자들을 매개로 하여 쓰여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 저자가 된다고 그들은 보았다(갈3:8,

벧후1:20).영감을 받은 사도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저자가 되신 하나님의 의도를 중요시 하였다.
신약저자들은 전(全)히브리어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보았다.일반적으로 우리는 구
약성경은 준비요,신약성경은 그 성취라고 말한다.구약은 씨앗이요,신약은 그 영광스런 결실이다.
참으로 나사렛 예수께서 구약이 예언한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행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다.구약성경은 예수와 그의 교회가 섭리적 존재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한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신약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의 위대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의 구원계획을 전시하는 일관성 있고 통일성이 있는 유기체임을 증명하고 있다.

3.셈어군

헬라어는 시간을 표현하는데 정확한 반면 히브리어는 시제 보다는 오히려 행동의 방식에 주된 강조점을 두는 것이 다른 점이다.구약성경의 계시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 히브리어 동사와 구문의 특성에 정통하여야 한다.여러 셈어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볼때 그것을 쓰는 나라들의 지역적인 위치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나누는 것이다.동부 셈어는 악카드어이며 바벨론어와 앗수르어로 나누어졌다.남부 셈어는 아랍어와 에디오피아어,암하르어(Amharic,현대 에디오피아어)로 구성된다.북부 셈어는 아람어 군을 총괄하는데 그것은 주로 동부 아람어계와 서부 아람어계로 나누어 진다.서부 셈어는 우가릿어,페니시아어,가나안어로 구성된다.


제 2 장

구약성경의 영감성

1.성경의 독특한 영감성에 대한 증거

첫째로 구약성경 39권의 밑바닥에 흐르는 의미깊은 통일성이 있다.그것은 구약이 편집되기까지 수세기가 지났지만 유기적인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다.그것은 하나의 마음,저자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자연 스럽다.
둘째로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오직 히브리 종교와 기독교만이 논리적으로 옹호할수 있는 인식론(종교지식의 학문)을 제공한다.성경을 떠난 4천년 동안의 인간 연구와 철학적 탐구의 결과가 무엇인가.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수 있고 우리의 생애를 위한 그의 뜻을 알수 있는가?오직 그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할때 뿐이다.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결코 할수가 없다.성경이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로 우리에게 그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관찰하여야 한다.성경은 스스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 계시임을 증거한다.그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즉“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만약 한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그가 이 지식을 우리에게 확실히 부여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원문의 무오성

다음으로 우리가 물어야할 질문은 이 책은 어떤 종류의 기록인가?그것은 여러 종류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만약 이 기록된 계시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인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신빙성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을 성취할수 없을 것이다.만약 성경이 진리와 오류를 섞어둔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은 다른 책인 코란,베다,우파니샤드,아나덱트,일리아드,오딧세이 등과도 겉은 것이다.인간이 성경의 진리에 타당한 판단을 내리려면 그는 하나님과 영혼의 영적 가치들에 대해 성경이 아는 것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알아야 한다.그러나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여야 한다.만약 그 계시가 쓸모있고 신빙성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은 인간의 오류있는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오한 것이어야 한다.

3.사본의 전승이 무오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오류에서 벗어났다는 무오성은 성경책들의 원본에 해당된다.그것들은 모든 실수와 무관하다.하나님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나 거짓을 쓰게 하실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성경의 텍스트는 어떠한가?그것 역시 모든 종류의 오류에서 벗어난

것이어야 하는가?원본을 처음 복사할때 펜을 약간 잘못돌린 것과 사본을 사본하면서 전수되어 가
는 중에 더 많은 실수들이 생기게 되었다.이런 경우는 거의 피할수가 없는 일이었다.원본을 무오하게 복사를 할수 있다고 보증하는 것은 기적과 다름이 없다.오늘날 원문 비평가들은 구약 성경의 초기 사본들에서 많은 종류의 사본상 실수를 발견하였다.이것들은 메시지 자체를 왜곡시키며 그 참뜻을 전달할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심각한 것인가?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수가 없다.그 분은 자신의 계시를 전달할수 없기 때문에 후세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올바로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만약 그분이 성경의 표준판과 권위있는 사본들을 복사하는 서기관들에게 어떤 억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메시지를 왜곡시켰을 것이다.만약 그메시지가 오도되면 기록된 계시를 주신 그 전체적 목적이 무효로 돌아가버리게 된다.왜냐하면 이렇게 왜곡된 성경은 진리와 오류의 잡탕이므오 인간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기 보다는 인간의 판단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이전 시대의 모든 문학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히브리어 성경의 전수에 있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었다면 똑같은 모순과변화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이사야서 두 권이 사해 근처의 쿰란 동굴 1에서 1947년에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이전에 알려진 가장 고대의 사본(A.D.980)보다 약 1000년 이전의 것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 표준판과 비교해볼때 95%이상의 단어에 일치한다.나머지 5%의 차이는 펜을 잘못돌렸는지 스펠링을 다르게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4.영감 교리에 대한 성경의 자체 증거

성경은 스스로 그 무오성을 주장하고 있는가?종종 성경은 그 무오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할수록 성경은 그 스스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르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벧후 3:16).
“…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5.하등적 영감관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신 정통주의적 접근을 하는 자들은 성경에 있는 교리적 진실과 오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소위 그리스도의 마음을 제시한다.진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선언들중 많은 것이 소위 “그리스도의 마음”과 너무나 크게 충돌하고 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1).등 그의 진술중 기록된 몇가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어떠했겠다는 철학적인 개념을
세우고 동일한 자료에 기록된 다른 진술들의 신빙성에 대하여는 그것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그 진정성을 부인해 버리는 것은 전혀 일관성이 없는 일이다.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요,하나님의 말씀중 인간의 마음이 승인해 주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참된 종교적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부적당하고 신빙성이 없는 도구임을 보았었다.성경이 인간을 판단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성경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을수 없다.
전형적인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은 성경을 단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정도로만 보는 것이다.성경의 텍스트가 인간 저자에 의해 쓰여졌으며 모든 인간들은 죄에 빠졌고 오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경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이 틀림이 없다고 말한다.이와같은 성경관은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역사적 오류들을 향해 문호를 개방하며 모세,이사야,다니엘과 나머지 글들의 진정성에 대해 합리주의자들이 고등비평을 하는 것을 용인하게 돤다.성경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 모든 실수와 오류가 있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진다.신정통주의의 신학자들은 성경 기록의 진실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고등비평의 공격을 옆으로 돌리고 초자연에 대한 과학적 반박앞에서 기독교 메시지의 의의를 살리려고 노력하다가 계시 자체의 성격에 대해 역설적인 견해로 빠지고 말았다.그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 성격 자체에 있어서 성경화 될수 없다는 견지를 지지한다.


6.성경의 난제를 다루는 법

사실 우리에게 전수된 성경의 텍스트는 성경 무오의 교리에 도전을 하는 듯이 보이는 난제들을 가지고 있다.이와 같은 어려움들중 어떤 것들은 본문 비평학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해결이 된다.
이런 문제를 다룰때 두가지의 가능한 방법이 있다.첫째는 그 개개의 난제가 풀릴때까지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무오성을 중지시키는 것이다.새로운 문제가 생길때마다 그것이 만족스럽게 해결될때까지 성경은 의심받는 위치로 강등이 된다.이러는 동안 신자는 성경에 대한 의심이 풀릴때까지 영혼의 고통과 힘든 의심의 고리에 묶여 있게 된다.둘째는 명백한 불일치 앞에서도 성경 기록의 무오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잡고 후일의 연구가 답을 확실하게 제시할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오직 성경의 신적인 기원이 성경 현상을 설명해 준다고 믿으며 나사렛 예수와 함께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무오성을 붙잡고서 제기된 모든 문제가 결국 해결될때까지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성경의 신적 권위를 확신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 무오성에 대한 의심이 풀려 질때까지 기다리는 자가 어리석고 합당치 않게 보인다.그것은 종종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절차를 밟는 다기보다는 우유 부단한 자세로서 하나의 전제에서 다른 것으로 논리성이 없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명백하고 분명한 상이점이 성경에 있다면(특히 원본에서 확증될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신앙을 버려도 좋은 이유가 될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와같은 것이 증명될때까지 혹은 이와같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역사나 과학에서 오류가 있는 것이 법률적 증거의 법칙에 따라 확증이 될때까지 성경을 믿는 자는 그것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전제를 잊어서는 안된다.그동안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와같은 오류는 법정에서 만족할 정도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제 3 장

히브리어 사본들과 초기 역본들


1.가장 초기의 히브리어 사본들

(1)기독교 이전의 사본들
기독교 이전의 사본들은 주로 사해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 놀라운 사본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다.이 사본들이 발견된 여러 동굴들이 사해의 북동쪽 해안을 따라 와디 쿰란의 깊은 계곡(the canyon
of the Wady Qumran)가까이에 위치하고 있기 떄문에 이를 쿰란의 자료들이라 말한다.사해 사본을 구분할때는 먼저 동굴의 번호를 제시하고 성경책 각 권의 약자를 뒤따라 적으며 그 후에 사본들이 빛을 보게 된 순서에 따라 어깨 위에 글자를 써서 동일한 책의 다른 사본들과 구별을 할수 있도록 한다.예를 들면 사해 사본 이사야서 두루마리(Isaiah Scroll)는 1QIsa 로 쓰며 이것은 와디 쿰란의 첫 동굴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이사야서 사본이란 뜻이다.히브리 대학의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전문적으로 1QIsb 로 알려져 있다.동굴 1과 4에서 출판된 성경의 단편들 외에도 수 천개의 파편들이 재발견 되었고 그중 380개 이상의 다른 사본들이 확인 되었으며 그중 약 100개가 구약 성경의 단편으로 알려졌다.동굴 2에서는 약 180개 이상의 단편들이 발견되었으며 그중의 1/4이 성경 단편이다.동굴 11에서는 다섯 개의 두루마리가 발견 되었으며 그것은 레위기의 일부,시편을 발췌한 하나의 두루마리,욥기의 아람어 탈굼,외경 새 예루살렘 묵시록이다.

ⓐ사해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a):이사야서 66장이 모두 있다.(B.C.150-100)이 중요한 텍스트는 맛소라 텍스트(MT)와 동일한 사본계(manuscript family)에 속한다.가끔 이것은 70인역(LXX)의 읽기를 지지해 주기도 한다.그리고 MT와 다른것 대부분은 명백한 서기관의 오류에 기인한 것이다.
ⓑ하박국 주석(1QpHb):제 1장과 5장만을 주석했는데 절들 사이에 군데 군데 주석 노트가 있다(B.C.100-50).인용된 하박국 텍스트가 MT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있고 차이점이 있기는 하나 성격상 차이는 별로 없고 서기관의 오기로 볼수 있다.그러나 아주 드물게 차이점들중 LXX이나 혹은 다른 역본들을 지지하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
ⓒ히브리 대학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b):주로 이사야41-66장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B.C.50년경)
이것은 1QIsa보다 MT에 더 가까이 있다.
ⓓ1Q레위기 단편들:19-22장의 몇절을 담고 있다.(약B.C.4세기-de Vaux,Burrows/B.C.2세기-Cross)이 사본은 MT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그것은 古히브리어(paleo-Hebrew)필체로 쓰여졌다.
ⓔ4Q신명기 B:32:41-43은 산문이 아니라 시로써 半行으로 쓰여졌다.세곳에서 LXX을 지지하고 MT와 다르다
ⓕ4Q사무엘서 A:사무엘상 1,2장을 다루며 27개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B.C.1세기경)몇곳에서 LXX와 일치하고 MT와 다르며 또 어떤 곳은 둘다 반대한다.
ⓖ4Q사무엘서 B:사무엘상 16,19,21,23장이 담겨져 있다.(B.C.225년 혹은 그이전)이것은 MT보다 더 모음을 시사하는 자음(matres lectionis)을 적게 쓰고 있다.이 텍스트는 MT와 다르고 LXX을 일관성있게 지지하고 있다.

ⓗ4Q예레미야서 A:크로스에 따르면 고대풍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4Q Ⅻ-A(Ⅻ는 소선지서 사본을 가르킨다):크로스는 B.C.3세기의 초서체로 쓰여졌다고 한다.
ⓙ4Q Qoha :2세기의 초서체 전도서로서 크로스에 따르면 최소한 3세기나 혹은 그 이전의 자료에서 나왔다고 한다.
ⓚ4Q 출애굽기:제 1장의 단편으로서 LXX을 지지한다.
ⓛ4Q 출애굽기:제7,29,30,32의 부분들을 담고 있으며 古히브리어 필체로 쓰여졌다.이 사본은 상당한 부분에서 MT와 다르고 사마리아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과 일치한다.
ⓜ4Q 민수기:사마리아어 형태를 확장하여 사각형의 히브리어로서 기록되었다.사마리아 사본이나 MT놔 다르며 LXX과 일치하고 있다.
ⓝ4Q 신명기A:제 32장 (모세의 노래)
ⓞ11Q 시편:동굴 11에서 발견된 시편의 사본으로서 헤롯시대에 유행한 규격적인 책 글씨 형태로 복사되었다.각 페이지의 하부 1/3이 유실되었다. LXX의 시편 151편을 포함하여 33개의 시편이 보존되어 있다.4개의 독립된 파편들이 네개의 시편들 일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총 37개가 된다.

위와같은 쿰란의 자료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수 있다.
①원 맛소라계(the proto-Masoretic):여기에서 현재의 우리가 가진 히브리어 자음 텍스트가 나왔다.
②원 70인역계(the proto-Sepuagintal):후대의 70인역이 나오게 된 원래 헬라어 번역의 히브리어 전신(the Hebrew Vorlage).
③원 사마리아계(the proto-Samaritan):히브리어 오경의 후대 사마리아 텍스트를 위한 기초를 형성하였다.
④중간계(a neutral family):이것은 위의 세 계통의 갈등하는 전통사이에서 다소 중도를 지키고 있는 계통이다.


(2)기독교 이후의 사본들

①대영 박물관 오리엔탈4445(British Museum Oriental 4445):오경의 사본으로서 A.D.850년 후경으로 추정되는 자음 텍스트이며 모음부호는 약 1세기 전후에 첨가되었으며 대부분의 창세기와 신명기는 유실되었다.
②케이어렌시스 사본(Codex Cairensis C):대소 선지서를 포함하고 있으며 A.D.895년 아론 벤 아셰르에 의해 복사되었다.
③소선지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MS):A.D.916년에 쓰여졌다고 한다.바벨론 구둣점이 찍힌 이 사본은 크리미아에 있는 츄퓨트칼러에서 피르코비취가 발견하였다.
④레닌그라도 사본 B-19A:구약성경 전권이 여기에 담겨 있으며 벤 아셰르 맛소라 텍스트에 있다.이것은 A.D.980년 MS(그후로 분실됨)를 A.D.1010년에 충실하게 복사한 것으로서 오늘날 히브리어 성경의 표준 텍스트가 되는 킷텔의 Biblia Hebraica 제3판의 기초가 되었다.
⑤사마리아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이 판의 최초 사본들은 아직까지 나블루스(Nablus)에 있으며 사마리아 분파주의자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어 있다.이 사마리아판은 MT와 6천가지 정도 틀린 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활자의 차이에 불과하다.그러나 약 1900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MT와 다르면서 LXX와 일치한다.(예,족장들의 나이)사마리아 오경의 사본들중 그 어느것도 A.D.10세기 이전에 쓰여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3)히브리어 성경중 오래 전에 출판된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들

①시편의 볼로냐판(Bologna Edition of the Psalter),1477년
②구약 산시노판(Soncino Edition of OT),1488년
③구약 제2 봄버거판(Second Bomberg Edition of OT),1525-26년


2.구약 성경의 초기 역본들

(1)헬라어 역본들

①70인역:이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50-150년에 번역되었다.

ⓐ라일랜드 파피루스 458(Rylands Papyrus 458)은 신명기 23-28장(B.C. 150)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미이라로 싸서 우리에게 보존되어 왔다.
ⓑ쿰란동굴 4에서 아래의 단편들이 나왔다.파피루스로 쓴 레위기 단편은 표준 LXX와 아주 일치하나 “여호와”를 표기할때 kyrios 대신에 IAO를 사용한다.가죽에 쓴 레위기 단편은 26:2-16절을 담고 있으며 후대 LXX와 열개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가죽에 쓴 민수기 3:30-4:14절의 단편이 있는데 LXX와 아주 드물게 다른 헬라어를 사용하나 원본에 있는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체스터 비티 파피리(The Chester Beatty Papyri)는 이집트의 옥시린커스(Oxyrynchus)에서 발간되었다.♯Ⅵ는 약 A.D.150년 경의 것으로서 민수기와 신명기의 부분들이다.♯Ⅶ(약 A.D.230년경)은 파유믹 콥틱어로 주석이 되어 있으며 이사야서의 부분이다.♯Ⅴ(약 A.D.270)는 창세기의 부분들이며,♯Ⅳ(약 A.D.359)는 창세기 9:1-44:22절이 기록되어 있다.
ⓓ파피루스 911은 이집트에서 나온 것으로 A.D.3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되며 초서 언셜체로 기록되었고 창세기 1-35장의 부분들을 담고 있다.
ⓔ소선지서 프리어 헬라어 사본 V(Freer Greek Manuscript V)은 와싱턴에 있으며 33개의 파피루스 잎을 종합한 것으로 A.D.3세기 후반의 것이며 애굽인의 손으로 기록되었고 호세아서를 제외한 모든 선지서의 텍스트를 거의 전부 담고 있다.
ⓕ오리겐의 헥사플라(Origen's Hexapla)는 A.D. 240년 경에 쓰여졌다.그 당시에 사용되던 LXX의 사본들사이에 많은 상이점들이 있었고 또 LXX에 히브리어 텍스트의 어떤 부분들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여섯개의 평행칼럼으로 헬라어 구약성경을 써내려갔다.(1)히브리어 원본,
(2)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함,(3)아퀼라의 직역한 헬라어번역,(4)시마쿠스의 헬라어 번역,(5)70인역 자체,(6)데오도션의 헬라어 번역.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것이 헬라어 번역에 나타나면 오벨리스크(수평으로 구별하는 일획)을 삽입하고 메투벨루스로써 달아주었다.히브리어에 있는 것이 70인역에 나타날 경우에는 별표나 메투벨루스로써 표시를 하면서 헬라어 번역을 다른 칼럼들 중에서 하나에 삽입해 두었다.
ⓖ히시키우스 개정판(the Hesychian Recension)은 70인역 텍스트를 애굽에서 히시키우스 감독이 개정한 것인데 Q에 있을수 있는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어떤 초기의 사본에도 남아 있지 않다.
ⓗ루시안 개정판(the Lucianic Recension)은 사모사타와 안디옥의 루시안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후대의 사본중 베네투스사본에만 남아있다.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은 거의 신구약 성경을 다 담고 있는 놀라운 사본으로 A.D.325-350년에 쓰여졌다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Aleph)은 구약 부분은 상실되었지만 신약 전권을 담고 있는 사본이다(약 A.D.375-400).어떤 부분은 바티칸 사본을, 일부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닮았다.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A)은 또 하나의 중요한 신약 텍스트로서 약 450년경에

쓰여졌다.그것은 근본적으로 애굽타입의 텍스트이지만 헥사플라 형태와 몇가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②후대 헬라어 역본들
ⓐ아람어 역본은 폰투스(Pontus)출신 아퀼라에 의해 쓰여졌다.그는 유대교에 개종한 자요 랍비 아키바(Aqiba)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그의 작품은 A.D.130년에 출판 되었으며 아주 엄격한 직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인정되었다.아퀼라의 번역은 인용으로나 단편으로 남아 있는데 특히 열왕기와 시편 90-103편에서 찾아볼수 있다.
ⓑ시마커스 역본(Symmachus Version,약 A.D.170년경)은 아주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유지하면서도 좋은 관용어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데오도션의 역본(Theodotion's Version):약 A.D.180년 혹은 190년 은 새롭고 참신한 번역이 아니라 초기의 헬라어 역본을 개정한 것이다.지금도 그것이 LXX이었는지 혹은 다른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논재의 여지가 많이 있다.다니엘서의 경우에 있어서 데오도션 번역은 원 LXX의 번역과 상치된다.이는 그것이ㅐ 초대 교회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히브리어 원본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2)아람어 탈굼들

바벨론 포로중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버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당시의 국제언어인 아람어를 쓰기 시작했다.그때 아람어는 바사 왕국이 설립된 후부터 바사 정부와 그 하에 있는 종속국 사이에서 주된 의사 소통의 매개체였고 정치와 상업에 있어서 국제 언어가 되었다.유대인 회중들이 그들의 히브리어를 점점 잊어가기 시작하자 회당 예배 시간에 읽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해 줄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口傳이 수세기를 계속되면서 특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A.D.138년에 추방이 된후에는 이 아람어 의역을 글로 쓸 필요가 생겨서 탈굼(targum,해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①옹켈로스의 토라 탈굼(The Targum of onkelos,A.D.3세기경)은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그것은 아쿨라 헬라어 번역을 한 폰투스 출신 바로 그사람으로 여겨지는 어떤 옹켈로스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그것이 동방에서 나온 것이고 후대헤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통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한다.
②조나단 벤 우지엘의 선지서 탈굼(The Targum of Jonathan ben Uzziel)은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까지 이야서에서 말라기까지를 다룬 것으로 A.D.4세기에 편집되었고 바벨론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졌다.그것은 옹켈로스보다 히브리어 텍스트를 번역함에 있어 훨씬 더 의역을 하며 자유롭게 한다.
③익명의 요나단의 토라 탈굼(The Targum of Pseudo-Jonathan)은 A.D.650년경에 나왔고 옹켈로스와 미드라쉬 자료들을 섞은 것이다.
④예루살렘의 토라 탈굼(The Jerusalem Targum)은 A.D.700년 경에 나왔다.


(3)라틴어 역본들

①구 라틴어,혹은 이탈라 역본(2세기 동안 편집되었고 약 A.D.200년경에 완성된)은 히브리어로부터 직역을 한것이 아니라 70인 역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따라서 이것의 가치는 “방계번역”이라는 데만 있다.그것은 초기의 70인역 텍스트를 밝혀 주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②제롬의 벌게이트(Jerome's Vulgate,A.D.390-404)이것은 서방교회에서 권위있는 라틴어 성경을 거

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그후 수세기 동안 그것은 이타랄와 함께 평행칼럼으로 출판되었고 16세기 중엽 트렌트 총회에서 벌게이트의 삭제된 부분들을 다시 회복하라는 결정을 내려 1590년 식스타인 판을 출판하고 곧이어 1592년에 수정 증보된 클레멘타인판이 나오게 되었다.


(4)수리아어 역본들

아람어 옹켈로스 탈굼이 형성되던 그때에 수리아의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동부 아람어 방언으로 다소 표준 성경번역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신약성경을 번역할때는 헬라어 원본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①페쉬타(단순한) 수리아어(the Peshitta Syriac)구약 성경은 4세기 수리아어 문헌들에 이미 인용이 되기 때문에 2세기 혹은 3세기 편집된것이 분명하다.처음에는 구약성경이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이 되었으나 후에 70인역과 좀더 가까워지도록 만들기 위해 몇번의 개정이 있게 되었다.페쉬타는 에뎃사의 감독 랍불라의 권위하에 개정되어 출판된후 수리아어를 쓰는 교회에서 공식적인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약 A.D.400)
②수리아어 헥사플라(the Syric Hexapla)는 다른 기존 구약성경 번역중 유일한 것이다.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째 칼럼을 번역한 것으로 텔라의 감독 폴의 후원으로 A.D.616년에 출판되었다.


(5)다른 역본들

①애굽 설형문자로부터 내려온 방언으로 콥틱어 역본이 있는데 기독교 시대에 그것이 많은 헬라어를 빌려쓰게 되었으며 헬라어 알파벳으로 쓰여졌다.성경을 번역한 언어는 사히딕어(Sahidic,남부 방언),혹은 보하이릭어(Bohairic,멤피스와 델타에서 사용)으로서 LXX의 히시키아 개정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그것은 히브리어에서 직역한 것이 아니고 헬라어에서 번역하였다.
②에디오피아어 역본(the Ethiopic Version)은 4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최초의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③아랍어 번역들은 하나의 권위있는 역본으로 표준화되어 본적이 없지만 대부분이 LXX으로부터 만들어졌다.사디아 가온(Saadia Gaon)의 아랍어 번역만이 중요한 예외이며 유대인으로서 그는 히브리어 텍스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④알메니아 역본(The Armenian Version)이 처음 나온 것은 5세기 초엽인 것같다.그것은 레위파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⑤윌필라스가 만든 고딕원본(the Gothic Version by Wulfilas).은 약 330년에 출판되었으나 구약 부분도 남은 것이 별로 없다.


(6)수 개국어 대형 성경

①콤플류툼 폴리글로트(the Complutensian Polyglot)는 최초의 것으로서 콤플류툼,혹은 알칼라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그것은 시메네스(Ximenes)추기경의 후원 하에 교황의 승인으로 1522년에 출판되었다.
②안트베르프 폴리글로트(the Antwerp Polyglot)는 스페인의 필립 2세의 성원하에 8권으로 1569-1572년에 나오게 되었다.
③파리 폴리글로트(the Paris Polyglot)는 1645년에 나타난 것으로 안트베르프판의 텍스트를 따르나 사마리아 오경과 사마리아 아람어 역본,페쉬타,그리고 아람어 역본을 추가하였다.

④런던 폴리글로트(the London Polyglot)는 이탈라,에디오피아어 시편과 아가서 역본,아포크리파(헬라어,라틴어,수리아어,아랍어),오경에 대한 익명의 요나단이 쓴 탈굼,그리고 바사 역본까지 다 포함 하였다.그것은 1656-1657년에 브리안 왈톤 감독에 의해 여섯권으로 편집되었다.


제 4 장

구약성경의 하등비평

성경의 저작권과 순수성 문제를 다루는 고등비평과 하등비평은 우리에게 불완전한 사본들에 기초하여 원본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잔존하고 있는 사본들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 즉, 다른 단어나 문장에 근거한 것인가를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1. 사본이 지닌 오류의 형태

무엇보다 필경사가 저지를수 있는 오기의 형태들을 분석하고 오류들이 어떻게 생기게 되는가 를 관찰하여 살펴보자. 가장 평범한 오류를 제1쿰란 이사야서(1Qlsa)에서 예중을 제시한다.
① 중자(重子)탈락(haplography) : 중복되어져 써야할 글자 하나, 한 음절, 혹은 단어를 한번만 기록한 것이다. 이사야 26:3 BeKa BāṬeḤuW는 “당신을 그들이 신뢰할 것이다” 이는 “당신을 신뢰함; 너희는 신뢰하라) 대신에 쓴 것이다.
② 중복오사(重複誤寫, ditography)는 한번만 써야하는 것을 두번 쓰는 것이다. 이사야 30:30에 있는 HṦMY̒ HṦMY̒ (듣게 하다 듣게 하다)는 MT의 HṦMY̒(듣게 하다) 대신에 쓴 것이다. 즉, 한번 써야 할 것을 두번 썼다. 에스겔 48:16의 MT는 원래 ḤMṦ M’WT(5×100)으로 써야 하는데 ḤMṦ ḤMṦ M’WT(5×5×100)로 썼다.
③ 글자의 순서를 바꿈(metathesis): 글자나 단어의 원 위치를 거꾸로 만드는 것이다. 이사야 32:19 HY‘R(삼림)은 MT의 H‘YR(성읍) 대신에 사용된 것으로써 문맥에 뜻이 잘 통한다.
에스겔서 42:16은 명백하게도 ḤMṦ M’WT QNYM (500척)인데, MT의 자음 텍스트는 ḤMṦ ’MWT QNYM(5규빗 척)으로 읽고 있다(맛소라 학파에서도 그 난외주에 500척으로 교정하고 있다).
④ 합성(fusion): 두 개의 다른 단어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으로 아모스 6:12의 BBQRYM(소들과 함께)는 원래 BBQR YM(소들로써 바다를, 즉 사람이 소들로써 바다를 가겠느냐?)를 가리킬 것이라고 제시한다. 라이핀스는 이사야 3:15의 MLKM(MT의 자음 텍스트에 따르면, 그 뜻은 “그들의 왕”)을 인용하여 원본이 문맥에 따라서 MH LKM(어찌된 일이냐?)일 것이라고 한다.
⑤ 나눔(fission): 하나의 단어를 두개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사야 2:20에 MT는 LḤPR PRWT(쥐구멍)은 두루마리에 있는 LḤPRPRWT(뾰족뒤 쥐<두더지?>, shrew-mice)로 수정되어야 한다.
⑥ 동음이어(homophony) :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종종 LW(그에게)를 L’(not)으로 대치시킨다. 이사야 9:3에서 MT와 두루마리는 둘 다 HRBYT HGWY L’ HGDLT HŚMḤH(당신은 백성을 번성케 하셨나이다. 당신은 기쁨을 크게 하지 않았습니다)는 HRBYT HGWY LW HGDLT HŚMḤH(당신은 백성을 번성케 하셨나이다. 당신은 그를 위해 기쁨을 크게 하셨나이다)로 수정하는 것이 더 좋은 뜻을 드러내어 준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L’와 LW가 둘다 lō로 발음이 되는 데 있다.
⑦ 비슷하게 보이는 글로 읽음 : 약 B.C. 600년부터 ד(달렛)와 ר(레쉬)가 아주 유사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종종 바뀌어 졌으며 이런 현상은 특히 代名詞에서 나타났다. 창세기 10:4의 “도다님”은 역대상 1:7에서 “로다님”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로데 사람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더 좋은 독법으로 알려졌다. 또 ו(와우)와 י(요드)가 B.C. 150년부터 아주 유사하게 쓰여졌으므로 이사야서 두루마리조차 구분하기가 종종 어렵게 되었다.
⑧ 유사한 끝(homoeoteleuton) : 이것은 필경사의 눈이 하나의 끝에서 다음에 나오는 유사한 것

의 끝으로 바로 넘어가버림으로 중간 구(句)를 생략해 버리는 것이다. 호모에오텔유톤이란 헬라어로서 “유사한 끝”이란 뜻이다. 이것의 예를 들자면 이사야 4:5 두루마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BR’ YHWH ‘NN (YWMM W‘SN WNGH’Š LHBH LYLH KL ‘L KL KBWD ḤPH WSKH THYH LṢL) YWMM MḤRB. (생략된 단어는 괄호 안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필경사의 눈이 YWMM(날에)에서 둘째 YWMM 으로 뛰어 넘어버려 그 사이에 있는 13개의 단어를 생략하게 되었다.
⑨ 단어가 우연히 생략된 경우 : 삼상 13:1의 MT는 “사울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세였다”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LXX이나 다른 역본들도 여기에 숫자를 기록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본문비평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⑩ 모음을 자음으로 잘못 읽는 경우 : 히브리어 글자 알렙, 헤, 와우, 요드 는 초기에는 자음으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모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알렙(א, ’), 헤(ה, H), 와우(ו, w), 혹은 Y(י, 요드)는 발음은 되지 않으나 모음용 자음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마카비 시대에 이 모음들은 점차 확대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람어를 모든 생활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히브리어 발음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본문 비평의 법칙들

제1법칙 : 더 오래된 독법에 우선권을 둔다. 이 법칙은 더 오래된 사본이 최소한 후대의 것만큼 신빙성이 있고 기이한 것이나 특출한 없는 곳에 적용된다.
제2법칙 : 더 어려운 독법에 신빙성이 있다. 이유는 필경사가 원본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것보다 더 쉽게 하고 단순히 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제3법칙 : 더 짧은 독법일수록 신빙성이 크다. 이유는 필경사가 성경 어느 부분을 삭제하기보다는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중간탈락과 호모에오텔류톤의 경우에 이 법칙은 적용이 안된다.
제4법칙 : 모든 차이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독법이 신빙성을 지닌다. 시편 22:16(MT 22:17)에 있는 K’RY YDY WRGLY는 맛소라 학파에 의해 지적된 바와 같이(Kā’aRiY) “사자와 같이 내 손과 내 발을” 이란 뜻을 지닌다. 콤풀류툼 수 개국어 성경(the Complutensian Polyglot)에 있는 히브리어 칼럼에는 K’RW로 되어 있고 Ka’RuW로 발음이 되는데 그 뜻은 “그들이 구멍을 뚫었다”이다. 어느 것이 역본의 독법에 있어서 상이점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가? 아마 둘째번 독법인 듯하다. 왜냐하면 LXX, 페쉬타와 벌게이트와 제롬의 히브리어 시편까지도 “그들이 뚫었다,” 혹은 “찔렸다”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시마커스는 그것을 “묶으려고 한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K’RY나 K’RW 중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제5법칙 : 폭넓은 지역의 지지를 받는 독법이 우선권을 가진다. 따라서 LXX, 이탈라, 콮틱의 지지를 받는 독법은 페쉬타와 사마리아 판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힘이 없다. 왜냐하면 이탈라와 콥틱이 LXX의 자매번역이며 이 모두가 알렉산드리아 개정판 그룹에 속하는 반면 페쉬타와 사마리아 판은 서로 약간 다른 본문의 전통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마리아 판과 LXX과 같이 너무나 다른 두 전통에 의해 지지를 받는 독법은 MT보다 더 원본에 가깝다는 결론이다.
제6법칙 : 저자의 문체와 어투에 가장 가까운 독법이 우선권을 가진다. 이것은 가능성에 대한 발언일 뿐이지만 두 개의 다른 독법이 문맥상 똑같은 가능성을 지닐 때, 하나가 저자의 평상시의 사고구조를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그가 항상 쓰는 문체와 약간 다르게 들린다면 저자에게 신빙성을 두어야 한다. 오늘날 성경을 난도질하는 본문 비평가들은 이 법칙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오용하고 과용하여 고대의 저자가 무엇을 말했을 것이냐 말하지 않았을 것이냐에 대해 주관적이고 억지의 판단을 내림으로써 문단에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집어넣었다.
제7법칙 : 교리적 편견이 없는 독법에 우선권을 둔다. 예를 들자면 탈굼과 LXX은 하나님을 인간의 모양으로 표현하지 않은 후대의 유대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몸이나 지체

나 격정을 가진 것으로 암시하는 표현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런 요소를 감소시키는 경향을 우리는 “반―신인동형적 표현”(antianthropomorphism)이라고 한다.
3. 본문비평 방법의 요약

다른 증거들이 MT로부터 확실하게 떠났으나( 그 떠난 것이 단순히 번역자의 해석이 아닐 경우에) 그 두 가지 독법이 다 그럴듯한 경우에도(위에서 제시한 법칙들 중 하나가 다른 독법을 명백하게 지지해 주지 않는한) 우선권을 MT에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비평의 사본의 작업에 있어서 필경사 자신이 심리적 형편을 올바로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오류가 있다면 이 오류가 어떻게 해서 필경사의 손으로부터 이러나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의 작품의 다른 곳에서 관찰되는 바와 같이 그의 성격이나 정신적 습관에서 일어나는가?

4. 쏘페림의 작업, 탈무드, 맛소라 학파

쏘페림이란 “서기관”들의 계통으로써 최고의 서기관인 에스라 아래에서 그 첫 출발이 있었다(이 용어 자체가 서기관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 성경 텍스트를 보호하는 인정된 협회였다. 그들이 활동한 기간은 B.C. 400년에서 A.D. 200년 까지 였고 그들의 업적 중 위대했던 것은 히브리어 성경의 순수한 텍스트를 그들이 가진 사본의 자료들이 허락하는 데까지 순수하게 만들어 표준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가상적인 개정판 위원회를 구성하였을 것이며, 그들은 그 당시의 공식적인 성경 출판 위원들이었으며 그들의 손으로 만든 성경의 모든 사본들이 표준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쏘페림 중에서 특이한 것은 소위 말하는 티쿠네 쏘페림으로서 그 뜻은 서기관들의 교령(敎令으로서 모두 18개가된다. 그 중에 반―신인동형적 성격(제7법칙)을 지니고 있다. 예로써 창세기 18:22에 “여호와께서 서셨다”를 “아브라함이 여전히 서 있었다”(한글 개혁 성경도 이렇게 번역함)로 바꾸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사무엘상 3:13의 전통적인 텍스트는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LHYM)을 저주하였다 인데, 이것을 바꾸어 그들이 “자신에게”(LHM ― 알렙과 요드를 삭제함)저주를 자청하였다로 만들었다(개역도 이렇게 번역함).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쏘페림이란 용어는 B.C. 5세기에서 3세기에 일했던 초기의 서기관 그룹에서 구체적으로 해당이 된다(에스라로부터 쏘코의 안티고누스까지). 그들 후에 주고트(Zugoth, 본문학자들의 팀들)가 B.C. 2세기에서 일해 왔다(요세벤 죄제르로부터 힐렐까지). 제3구룹은 탄나임(Tannaim, 암송자들, 혹은 교사들)인데, 그들은 힐렐의 죽음부터 유다 한나시(Judah Hannasi)까지 있었다. 이 세 구룹의 가르침들이 미쉬나, 토세파, 바라이도스(Baraithoth), 그리고 미드라쉬에 담겨있다. 약 200여명 이상의 탄나임들이 이 작품들에 언급되어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랍비이거나 라반(Rabban, 선생)이란 칭호를 갖고 있다.
미드라쉬(Midrash)는 B.C. 100년에서 A.D. 300년 사이에 집대성이 된 것으로 그 뜻은 본문연구, 혹은 본문해석이다. 그것은 dāraš라는 데서 나왔다. 그 뜻은 ‘연구하다’, ‘찾아보다’ 이다. 그것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할라카(Halakah, 절차, 진행)는 토라만을 설명한 것이고, 하가다(Haggada, 선언, 혹은 설명)는 여러 가지의 잠언, 비유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구약 전체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들은 가장 초기의 회당 설교 중 남은 것을 보전하고 있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 텍스트로부터 수많은 인용을 하고 있으며 MT와 약간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문 비평에 제법 중요하다.
토세푸타(Tosefta, 첨가, 혹은 부록)는 A.D. 100년에서 3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미쉬나와 밀접하게 연결된 탄나임의 가르침과 전통을 집대성한 것이다. 전통에 따르면 랍비 아키바(약 A.D. 100)가 그의 미쉬나 편집에서 삭제한 원래의 미쉬나의 부분을 담고 있다고 한다. 랍비 아키바는 암기를 쉽게 하기 위해 그것을 축소시켰다.
탈무드(Talmud, 가르침)는 A.D. 100년에서 500년 사이에 발전된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부분으로 구성된다(반복, 혹은 가르침)는 A.D. 200년 경에 완성이 되었다.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며 모든 구전된 율법(모세가 그의 70장로에게 입으로 말한 것으로 여겨짐)과 전통들과 성경의 설명들을 압축한 것이다. 그것은 목차로 분류가 되는데 농업, 절기, 여인, 사회법과 범죄법, 제사와 거룩한 것들, 그리고 부정한 것들을 다룬다. 이것들을 다시 63개의 소책자로 세분된다. 미쉬나를 만드는데 공헌한 성인들이 탄나임(Tannaim)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쏘페림 중 맨 후대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의 주요 부분은 게마라이다. 이것은 아람어 단어이기 때문에 게마라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람어로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것은 미쉬나를 확대하여 주석 함으로써 각 소책자에 첨가 사항을 담고 있다.
맛소렛츠(Masoretes)는 A.D. 500년에서 950년 사이의 학자들로서 구약성경 텍스트의 최종형태를 결정한 자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불려진 이유는 그들이 정확한 모음과 액센트, 그리고 이레 적인 스펠링을 가진 희귀한 단어들의 수에 대한 구전(masoah)을 기록으로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쏘페림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실제적인 자음들을 흘뜨리지 않고 두었다. 그들은 옛날의 단어를 대치하는 새 단어에 속한 모음을 삽입하고 난 외주에다 아주 조그만 글씨로써 새 단어 자체의 자음을 삽입하였다. 예로써 이사야 28:15에 나타나는 단어의 뭉치는 KY-‘BR이다. 정상적으로 쓴다면 KiY―‘āBaR(그것이 지나간 후에는)로 읽혀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케티브(kethib) 독법이라고 한다. 케티브란 아람어로서 “기록된 것”이란 뜻을 가진다. 즉, 자음이 시사하는 단어란 뜻이다. 그러나 맛소렛들은 미래완료시제(imperfect tense)가 KiY(때) 다음에 따라와야 하기 때문에 ‘BR아래에 모음을 붙여 Ya‘aBōR(그것은 지나간다:현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난 외주에는 조그만 글씨로 Y‘BR로 썼다. 이것을 케레(qerē, 아람어로서 “읽으라!”는 뜻이다)라고 부른다(일반적으로 케티브는 K, 케레는 Q로 간략하게 만들어 쓰고 있다).
케레 독법 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칭하는 여호와이다. 이 이름은 聖四文字 YHWH(הוהי)로 기록되었다. 원래의 발음은 YaHWeH(야훼)이었다. 느혜미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들은 제3계명을 생각하여 그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야훼’라는 이름 대신 “주”(’aDōNāY, 아도나이)라는 칭호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것을 맛소렛들은 ‘아도나이’의 모음을 JaHWeH의 자음 아래에 삽입하였고 그 결과 “JeHōWāH, 여호와”로 부르게 되었다. 이 케레를 잘못 이해하여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 학자들은 “여호와”로 읽는 것이 올바른 줄 알고 그렇게 발음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사실 야훼인데 열렬한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으로 올바른 발음으로 수정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그 잘못이 그냥 승인되었다.
마지막 맛소라(Final Masorah)는 대부분 책에 나타나는 절, 낱글자 등과 같은 것의 수에 대한 통계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중간 단어와 중간 낱글자를 가리켜주고 있다.
본문비평과 연관된 것으로 맛소라 개정판이 가진 나머지 두 개의 특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구약성경 텍스트 안에 있는 15개의 점을 친 단어들인데,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소위 대회장으로 불려지는(에스라가 세운 것이 명백하다)학자들이 판단해 볼 때 삭제되어야 하거나 혹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예로써 민수기 3:39에 있는 단어, “그리고 아론”에 점을 찍어 두었는데 이것은 아론 자신이 이 인구 조사에서 계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기호는 글자를 정상적인 줄 위에 걸어놓은 것이다. 이것은 네 곳에 나타나는데 맛소라 학자들은 쏘페림의 결정을 따라 이 글자들의 진실성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사사기 18:30에서 원래의 글자는 분명히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인데 모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여분의 눈(N, nun)을 삽입하여 “모세”로부터 “므낫세”(MeNašeH)로 바꾸게 되었다.


제 5 장
구약성경의 정경

캐논(canon)이란 똑바른 막대기, 혹은 잣대를 뜻한다. 히브리어 성경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여겨진 것이 39권이다. 로마교에서는 외경(Apocrypha)을 14권 추가하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를 야기시킨다. 구약성경 안에 있는 여러 책들이 언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하여 정경으로 여겨져 수납되었는가? 먼저 우리는 히브리어 정경에 대하여 삼 구분(율법서, 선지서, 기록)하는데 대해 설명을 듣기로 한다.

1. 히브리어 정경의 구분

헬라어 역본(LXX)의 편집자는 제목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 율법책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역사책 :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에스드라서 1,2(첫 권은 외경이고 뒤에 것은 정경 에스라서이다), 느혜미야서, 토비스서, 유딧서, 에스더서.
③ 시가서와 지혜서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④ 선지서 : 소선지서 ― 호세아서, 아모스서, 미가서, 요엘서, 오바댜서, 요나서, 나훔서, 하박국 서,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
대선지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바룩서, 애가서, 예레미야의 편지, 에스겔서, 다 니엘서(수산나, 벨과 용, 세 거룩한 아이들의 노래를 포함함).
⑤ 보충적인 역사서 : 마카비 1,2서

맛소라 텍스트에 있는 각 권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⑴ 율법서(혹은 오경)
⑵ 선지서(Nebi’īm) : 전선지서―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상하 ; 후 선지서(혹은 대선지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영어성경에 있는 순서와 같이 12개의 소선지서가 있다.
⑶ 기록들(Kethūbim, 헬라어로는 Hagiographa<거룩한 글들>) : 시가와 지혜서―시편, 잠언, 욥기 (그러나 레닌그라드 사본은 시편, 욥기, 잠언의 순서로 되어 있다)
⑷ 두루마리 혹은 매길로트(Megilloth) : 아가서, 룻기, 애가서, 전도서, 에스더서(그러나 레닌그 라드에서는 룻기, 아가서, 전도서, 애가서, 에스더서 순으로 되어 있다).
⑸ 역사서 : 다니엘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역대기 상하.
그러나 꼭 언급되어야 할 사실은 MT를 구성하고 있는 각 권들의 순서는 후대의 분류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는 기독교 변증가들이 구약성경에 호소할 때 더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초기의 구분법은 위에 제시한 39권과 동일한 내용을 갖고 있으나 24권으로 배열이 되었다. 즉, 사무엘 상하와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들이 각각 한권으로 계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2권의 소선지서도 한 권으로 간주되고 에스라서와 느혜미야서도 하나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A.D.1세기 말경에 책을 쓰면서 22권의 성경책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룻기를 사사기와,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를 예레미야서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어쨌든 본질적으로 볼 때 39권이든, 24권이든, 22권이든 히브리어 정경에 기본적

구분은 동일한 것이다.
2. 안티레고메나

이 시점에서 안티레고메나(Antilegomena, 반대하여 말해진 책)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미쉬나에 따르면 A.D. 2세기에 어떤 유대인들 사이에 아가서, 전도서, 에스더서의 정경성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잠언에 대해서도 의심을 제기하였다. 게마라(Gemara)에 따르면 에스겔 역시 그 권위에 있어서 토론이 되었고 그 반대설은 A,D, 66년에 마무리 지워졌다. 샴마이의 제자들은 B.C. 1세기에 전도서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나 힐렐학파에서는 강력하게 옹호했다고 한다.
에스겔에 관한 문제는 그 책의 마지막 10장에서 후일의 성전과 예배의식이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 사이에 상당한 불일치가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또 그것들이 스룹바벨이 세운 두 번째 성전이 아닌 아직도 미래의 성전에 속한 것이라는 반박이 있다. 어쨌던 엘리야가 땅에 다시 와서 이 모든 난제들을 믿는 자에게 풀어줄 것이 확실하게 기대되고 있었다.
잠언에 대한 반박은 몇 가지의 모순이 있는 개념들에 대한 것이다. 예로써 26:4-5에 있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와 같은 것이다.

3. 맛소라 정경에 대한 고대의 증거들

이제 예루살렘에 요세푸스(A.D.37-95)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구약성경이 22권으로 구성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앞에서 암시한 바가 있다. 그의 저서 『앞피온 반박』(Contra Apionem)에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수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다 포함하는 오직 22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 신적인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모세의 책 다섯 권과 선지서 13권, 그리고 나머지 책(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인간의 바른 생활을 위한 교훈을 담은 것)을 언급한 후에 그는 아주 중대한 선언을 하였다. 요세푸스가 진술한 이 말에는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이 담겨 있다.
⑴ 요세푸스는 맛소라 사본과 같은 분류방식으로 히브리어 성경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 세 구분 속에 있는 정경의 총수를 22권으로 제한한다.
⑵ 정경은 크세르크스(B.C.464-424)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스가 통치한 이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즉, 말라기 이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⑶ 중간사 시대(B.C.425-A.D.90)까지는 정경 22권 안에 그 어떤 보충적인 자료도 포함되지 않았다. 합리적인 고등 비평가들은 마지막 두 가지 점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요세푸스와 같은 오래 전의 저자가 제시한 증거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다니엘서나 에스겔서, 아가서, 시편 중의 많은 것들이 말라기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A.D. 1세기의 학식이 풍부한 유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요세푸스가 외경 자료들(에스드라 1서부터 마카비 1서까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진술을 비추어 볼 때 그가 그것을 단순한 역사적인 자료로서 사용한 것이지 신적으로 영감 있는 책으로 다루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3세기에 오리겐(254년에 죽음)은 구약성경이 22권으로 구성되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데, 그것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 <6:25>)에 있다. 이것은 요세푸스와 맛소라 사본이 22권으로 분류한 것과 동일한 목록이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예레미야 서신을 포함한 것인데, 아마 그것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렇게 한 것이다. 오리겐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A.D.160-250)은 현존하고 있는 책을 남긴 라틴 교

부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정경이 24권으로 구성된다고 언급하였다. 포이티어 힐라리(Hilary of Poitiers)는 22권으로 계산하고 있다. 제롬은(A.D.340-420) 『갈레아우스 서문』에서와 또 다른 곳에서 오직 22권만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으며, 외경들은 2차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외경의 정경성 문제

로마 교회와 헬라 정교회가 14권으로 된 외경의 정경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개신교 신학자들도 알렉산드리아 정경이 소위 팔레스틴의 정경으로 불려지는 것과(22권 또는 39권)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증거를 살펴볼 때 이 주장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외경을 두둔하는 자들은 LXX 안에 있는 외경이 14권의 외경을 포함한 알렉산드리아 정경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LXX에 있는 모든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의해서 조차 정경적인 것으로 여겨졌는지는 결코 확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것과 정 반대되는 증거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1세기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종 그는 “팔레스틴 성경”에서 인용하지만 외경에서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이것은 만약 우연히 어떤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 이 알렉산드리아 정경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대형의 알렉산드리아 정경 이론과 일치될 수가 없다.
둘째로 아퀼라의 헬라어 역본에 외경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A.D.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는 사실이다. 유추해서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편집할 때 제롬처럼 정경적이라고 여기는 것 뿐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그들의 구약성경 판에 포함하도록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또다른 근거가 최근 쿰란 동굴4에서 발견되어졌다.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인 그곳에서는 팔레스타인 정경이 권위 있는 것으로 확실히 받아들여졌는 데도 두 개의 외경서, 즉 시락의 지혜서와 토비트서가 발견되었다.
종종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70인역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종종 호소하는 학자들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70인역이 외경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신약의 사도들이 그 때 편집되어 있던 모든 LXX의 권위를 다 인정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팔레스타인 정경 외의 작품들에 대해 호소하는 학자들이 있다. 윌더보어(Wildeboer)와 토리(Torrey)는 단지 추정적인 것들 몇 개를 포함하여 외경들을 인용한 것이나, 암시하는 모든 가능한 것들을 모아보았다.
외경을 두둔하는 두 번째의 주된 논거는 교부들이 이 책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대교회의 몇몇 저술가들이 그랬던 같이 보인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은 아주 명백하게 그것들의 정경성을 반대하고 있다. 지지하는 편에 있는 사람들을 들자면 클레멘트 1서와 바나바 서신의 자자와 그리고 제롬보다 나이가 좀 적은 동시대인이었던 히포의 어거스틴이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이 단지 표면적이며, 혹은 추정적이라고 수정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애매하게 외경을 두둔하고 있는 태도와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아다나시우스(Athanasis, 350년에 소천)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세우는데 챔피언이었음을 동서 교회가 다 인정한다. 그의 제 99번째 서신에서 그는 “교회에서 수납된 특정 책들과 그 수에 대해”토론을 한다. 제 4항에서 그는 “구약성경은 22권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책들을 열거해 간다. 그것은 맛소라 있는 것과 동일한 책들이고 개신교 성경에 있는 것과 거의 순서가 일치하고 있다. 6,7항에서 그는 성경 외의 책들(외경 14권)다루면서 그것들은 “정경에 포함도지 않았으나”단지 “읽도록 지정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는 외경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콘스탄틴노플에서 692년에 열렸던 제2차 트룰란총회) 서방교회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권 중 어떤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헬라 교회에서는 1672년

에 예루살렘에 모여 외경 중 4권을 정경으로 줄이게 되었다(지혜서, 시락의 지혜서, 유딧서, 유딧).

5. 정경성의 기준

먼저 최근에 제시된 몇 가지의 부적한한 기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아이히혼(J.G. Eichhorn, 1780)은 세월이 정경성을 시험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말라기서 이후에 쓰여진 모든 책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이론은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않던 야살의 책(수 10:13, 삼하 1:18)과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와 같은 수 많은 고대의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② 힛지히(F. Hitzig, 약 1850)는 히브리어를 유대인의 정경기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락의 지혜서, 마카비 1서가 비록 히브리어로 쓰여졌는 데도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다니엘서와 에스라서에 있는 아람어 부분들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준다.
③ 윌더보어(G. Wildeboer)는 토라와 닮은 것을 후대 책들의 정경성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것을 무효화시키는 다른 기준들을 많이 소개하였다. ⒜ 정경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져야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 고대역사를 다루든지(룻기나 역대기같이), 혹은 ⒞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에스라서, 느헤미야서). 혹은 ⒟ 고대의 유명했던 사람, 즉 솔로몬, 사무엘, 다니엘 혹은(아마) 욥과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야 한다. 혹은 ⒠ 국민과 서기관의 감정에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에스더). 이 시험의 기준들은 우리를 당혹케 한다. 윌더보어의 원래의 기준을 생각해 볼 때 어덯게 나단 선지자의 말씀(대하 9:29), 이사야가 쓴 웃시야의 행적(대하 26:22), 혹은 예레미야의 요시야 애가(대하 35:25)가 토라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정경성의 문제에 대해 어떤 다른 타당한 기준을 기대할 수 없음을 지적해야 한다. 만약 정경성이 자유주의 학자들이 의심없이 가정하는 것처럼(로마 교회도 “교회는 성경의 어머니이다”라는 자가모순의 주장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인간의 결정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어느 것이 권위가 있어 받아들이고 어느 것이 없어 배척해야 함을 결정할 수 있는 기계적인 시험과정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계시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계시를 영감하여 기록하고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영감된 책 속에 정경성이 내제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뿐일 것이다. 어린 아이가 다른 수 많은 성인들로부터 자신의 부모를 구렵해낼 때 그는 어떤 새로운 부모상을 투사해 넣지 않고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관계를 단지 인정할 뿐이다.

6. 정경의 기원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대로 그것을 하나님의 영감된 계시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이 책의 기원에 대한 좀더 합리적이고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찾아보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구약정경을 셋으로 나눈 것(예: 토라, 선지서, 그리고 케투빔 등 제서)을 여러 책들이 편집되어 가던 세 가지의 각각 단절된 과정의 경과로 본다. 즉, 토라는 B.C. 850년에서 모여지기 시작하여(최초로 기록된 문서), 750년과 650년 사이에 있었던 후대의 문서를 결합하여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 신명기가 오경 가운데서는 정경성을 공인받은 첫 단위가 되어 왕과 백성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왕하 23:장). 바벨론 포로 시대에(587-539년) 예식과 제사 부분이 에스겔의 영향을 받은 레위족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 그들의 활동이 에스라 시대까지 내려오게 되었다(에스라도 그 일원이었다). (느헤미야 8:1-8은 모드 토라를 “모세의 율법책”으로 여기고 처음으로 회중 앞에서 읽은 기사가 나타난다. 그 “모세의 율법책”이란 것은 일부가 방금 완

성된 것이며 대부분의 것은 모세가 죽은지 최소한 500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것이다). 어쨌든 에스라의 청중들은 이 혼합되고 위조된 다섯권의 책들을 정말로 모세가 직접 쓰고 또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것으로 믿게 되었다.
두 번째 부분인 선지서는 B.C. 300-200년 사이에 권위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점점 집대성이 되게 되었다. 그 이전일 수가 없는 이유는(고등비평 이론을 따를 것 같으면) 이사야서, 요엘서, 스가랴서, 그리고 몇몇 다른 선지서 어떤 부분들이 B.C. 3세기까지 기록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둠(Duhm)과 같은 학자는 이사야서의 어떤 부분이 B.C. 2 세기, 혹은 1세기까지 기록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번째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상황 하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대충 B.C. 200년이라 알려지지 않은 때에 정경적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케투빔은 선지서 들을 수집하기 시작할 때까지 모아지지 낳았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쓰여지지 않았다. 문서 비평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B.C. 168년 경에 편집이 되었기 때문에 케투빔은 B.C. 150년까지는 거두어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이 30년이 지나야 정경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부분을 일차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정경화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B.C. 150년 내지 100년 경이었지만 최종적인 인준은 A.D. 90년 잠니아 회의까지 연기되었다. 이상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경의 형성 이론이다.



제 6 장
오경 문서설의 역사

스피노자는 1670년에 Tractatus Theoligico-Potitcus에서 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써 3인칭 “그”를 제시하였다. 모세가 썼다면 “나”라고 했어야만 했다. 또한 모세는 신명기 33장에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오경을 마지막으로 편집한 자라고 스피노자는 주장하였다. 이 제안이 그의 생전에는 거의 무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라프, 쿠에넨, 벨하우젠에 의해 문서설을 결정짓는데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1. 초기의 연구진행

오경이 다양한 문서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하나님)만이 나타나고, 2장에는 여호와로 언급되어진다. 『모세가 창세기를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원래의 메모들에 대한 추측들』에서 그는 두 가지의 다른 기사를 제공하는 두 개의 다른 기록들을 자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아이히혼(Johann Gottfried Eichhorn)이 1780-1783년에 출판한『구약서론』(Einleitnng)으로 넘어가서 창세기 전체와 출애굽기의 첫 두장(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한데까지)을 여호와 문서(J)와 엘로힘 문서(E)로 나누었다. 그는 서로 다른 “평행기사들”과 “중복들”(예;홍수에 대한 “두 기사”)을 두 가지의 자료로 연결시키고 각각의 특징들을 분리시켜 내었다. 처음에는 모세가 이 “모세 이전”의 기록된 자료들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그의 『구약서론』에서 오경이 모세 시대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그 당시 점점 유행해 가던 견해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J-E의 구분이 오경 전체에 미치게 되었다.
다음에 더 베테(Wilhelm M.L. De Wette)의 신명기 연구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서론』에서 그는 오경 중 그 어느 것도 다윗 이전의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명기는 열왕기하 22장에 따르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표식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왕과 제사장이 함께 수도밖에 있는 모든 예배처와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곳을 폐쇄할 목적으로 뭉치게 되었다. 예배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모든 왕국의 부분들을 더 가깝게 정치적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며, 경건한 자들의 모든 헌금을 예루실렘 제사장들의 금고에 쏟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부의 캠페인을 위해 된 것이며, 그것을 발견한 것은 어떤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의 연대를 621년(요시야 종교개혁 연대), 혹은 바로 직전으로 고정을 해준다. 이리하여 D문서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기원에 있어서 J나 E와는 전혀 별개이며 “여호와가 선택할 도시”라는 언급(12장)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경의 자료가 세 가지 문서로 구성이 되었다 ― E(가장 초기의 것), J, 그리고 D(7세기문서).
오경의 단편 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로마 카톨릭 신부였던 게데스(Alexander Geddes)였다. 게데스는 많은 파편들이 솔로몬 시대에 토라로 편집이 되었으며 그들 중에 어떤 것은 모세 시대의 것이었거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것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에발트는 『창세기의 구성』에서 창세기의 본질적 기초는 모세 때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아이히혼이 주장한 바 히브리어 텍스트에 있는 반복과 표제들을 다른 저자의 작품이라는 이론을 비판하면서 초기 아람의 작품들(저자의 통일성이 불문시 되는 것) 이 셈 문장의 중심적인 특징인 이 반복 표제를 사용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책『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가 개인적으로 십계명(출 20장)과 가장 오래된 법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창세기 14장과 민수기 33장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초기의 자료들도 사사 시대에 살았던 익명의 한 유다 족속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의 책에 추가되었다. 솔로몬 시대에 기원의 책(a Book of Origins)이 E 문서의 대부분 자료를 포함하여 어떤 익명의 레위인에 쓰여졌다. 세 번째 보충이 된 것이 모세의 전기형식으로 9세기(엘리야 시대)에 만들어 졌다. 그 후에 선지자 해설자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웃시야 시대(8세기 중엽)에 한 유다 지파 사람이 나타나 여러 곳에서 “야웨”라는 이름을 등장시키고 최종의 편집자로서 모든 자료를 재구성하였다. 에발트가 1840년에 쓴 작품은 실제적으로 보충이론으로부터 결정체이론(the crystallization theory)으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은 각 시대의 편집자가 모세의 자료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작품에 여기저기 뜯어 붙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수정을 가져왔다.
위에 언급된 보충 이론 자들 중 두 번째 인물은 볼릭(Friederich Bleek)이다. 그는 1822년 문서 분석을 여호수아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종래의 다섯 권으로 된 오경 개념을 떠나 육경(Hwxateuch)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모세의 전통은 그 최종적인 기록 형태에 있어서 육경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1836년 그는 창세기 연구를 통해 그 중 몇 문단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으로 인정해 주었다. 통일왕조(약 10세기) 때에 어떤 익명의 편집자가 창세기의 가장 초기 형태를 수집함으로써 첫 번째 보충이 시작되었다고, 두 번째 보충은 요시야 왕 시대(약 B.C. 630년, 혹은 620년)에 신명기를 편집한 익명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 졌는데 그가 여호수아서를 육경의 형태로 만들게 되었다. 블릭은 후에 구약 서론을 출판하고 그 재판을(1865년)영어로 번역하여 내어놓았다(1869년). 이 작품에서 그는 그 당시 문학 비평이 지니고 있던 극단적인 이론들을 비판하였으나 전체적인 문서주의자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지혜롭지도 않고 정당치도 않게 많은 양보를 하였다.
프란츠 딜리취(Franz Delizsch)는 에발트나 블릭보다는 훨씬 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1852년에 출간된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그는 오경 중에서 텍스트 자체가 모세의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나머지 율법들은 진정한 모세의 전통을 제시하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시기까지 제사장들에 의해 명문화되지 않았다. E 문서 중 모세의 것이 아닌 부분은 언약의 책을(출 20:23-23:33) 다 모은 엘리에셀(아론의 세째 아들)에 의해 아마 편집되었을 것이다. 조금 후에 다른 편집자가 신명기를 포함하여 여기에다 보충을 하였다. 델리취는 구약성경 중 거의 전 권에 걸쳐 훌륭한 주석을 만들어 내었다.
1853년에는 후벨트(Hermann Hupfeld)분수령적인 작품 『창세기의 자료』(Die Quellen der Genesis)가 나왔다. 이것은 “문서설의 역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먼저 E 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한 결과 두 개의 구별된 문서가 있음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E2로서 문체, 어휘, 주제에 있어서 J와 너무 흡사하며, J에서 발견되는 자료들에 대한 암시들을 종종 하고 있는 것으로서 엘로힘 기자의 작품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E 를 구분하는 것이 후벨트에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 예나의 일겐(Kari David Ilgen of Jena)이 창세기는 17개의 다른 문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두 명의 엘로힘 저자와 한 명의 여호와 저자가 있다고 1798년에 발표하였다. 후펠트는 문서설에 있어서 새로운 흥미를 학자들에게 불어넣었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기본문서인 E1이다. 1866년 그라프가 누구보다도 먼저 논쟁을 제기하였다. 그라프는 그의 선생 류스(Eduard Reuss)와 같이 오경에 있는 이 제사규례가 신명기 보다 (B.C.621)더 후에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D가 J와 E의 법들을 반영하긴 하지만, P의 율법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P의 규례들을 포로 시대 때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B.C. 587-539). 물론 P에 있는 역사적인 부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라프가 만든 “문서들”의 순서는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P, E, J, D와 율법적인 P의 순으로 되었다. 그는 E가 J에 의해 추

가되었으며, 요시야 시대에 E-J가 D의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한다.

2. 문서설의 네 문서 요약 소개

① J 는 남조 유다에서 어느 익명의 저자에 의해 B.C. 850년 경에 쓰여졌다. 그는 개인의 전기에 특히 관심이 깊었으며 한 인물, 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끔 신인 동형적으로 그린다(즉, 마치 그분의 몸, 신체 각 부가 있고 또 인간처럼 정서가 있는 것으로 묘사함). 또한 그는 선지자처럼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지나 제사나 의식에는 거의 흥미가 없다.
② E 는 이스라엘의 북조에서 무명의 저자에 의해 B.C. 750년에 쓰여졌다. 그는 설화체에 있어서는 J 보다 좀더 객관적이며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 관심이 적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것들(혹은, 이름들의 기원, 이스라엘 문화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관습들)에 더 집착하였다. 창세기에서 E 는 의식과 예배에 관심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서술한다(J처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신인 동형적 접촉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 E 는 모세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 높여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신인 동형적인 양태로 교통하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약 B.C. 650년에 무명의 편집자가 J와 E를 결합하여 J-E 를 만들었다.
③ D는 요시야 왕이 B.C. 621년에 부흥을 일으킬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지도를 따라 공격적인 개혁의 프로그램으로써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유다 왕국에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높은 곳”(high places)에 있는 그들의 지방성소(신당)를 그들의 모든 제사와 종교적 헌물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도록 하는데 있었다. 이 문서는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의 영향을 강하게 입고 있다. 이 신명기 학파의 사람들이 후에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제기하였다.
④ P 는 에스겔의 성결법전(레 17-26장 : 약 570년, H로 알려져 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이 되었고 에스라는 가장 후대의 제사문서를 율법에 첨가시켰다. P는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기원과 조직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족보와 제사제도, 희생의 세부사항들과 기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3. 문서설의 변증법적 발전 개요

① 아스트룩은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자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J와 로 구 분했고, 이 아이디어가 아이히혼에 의해 더 체계화되었다(J보다 E가 더 이전 것임).
② 더 베테는 D가 요시야 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했다(B.C. 621).
③ 후펠트는 E를 초기의 E1(혹은 P)과 후대의 E2(J를 더 닮은 것임)로 구분을 하고 문서들의 순 서를 P E J D로 만들었다.
④ 그라프는 P의 율법적 부분이 가장 후대의 것으로서 포로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부분은 좀더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그의 문서 순서는 J1 E D P2 이다.
⑤ 벨하우젠은 문서설을 완전히 다듬고 J E D P 를 체계적이고 진화론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문서설의 발전과정에서 모순과 역전이 있었음을 관찰해 보자.
⑴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저자를 가리키는 것인데(아스트룩, 아이히혼), 각 저자는 자 신의 관심, 문체, 어휘를 가지고 있다.
⑵ 동일한 하나님의 이름(엘로힘)이 또 다른 저자를 가리킨다(후펠트). 어떤 E 구절들은 그 관심, 문체, 혹은 어휘에 있어서 J와 다르지 않은 것도 있다.
⑶ 관심과 문체에 있어서 J와 가장 다른 그 엘로힘 저자는(P) 가장 초기의 것임이 틀림없다(야훼

가 엘로힘 보다는 후대의 이름이다).
⑷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P가 가장 초기의 것이 아니다. 가장 후대의 것이다(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히브리 종교가 원시적인 다신론에서부터 제사장 중심의 유일신으로 발전했다는 진화 론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⑸ J 는 물론 E 보다 후대의 것이다(그라프까지의 모든 비평가들). 그러나 J는 실제적으로 E 보 다 앞선다(쿠에넨과 벨하우젠).
벨하우젠의 가설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반박한 학자는 프린스톤의 그린(William Henry Green)인데, 그의 Unity of the Book of Genesis(New York: Scribner, 1895)와 Higher Criticism of the Pentateuch(New York: Scrobner, 1896)는 두 책 모두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나왔다. 그는 풍부하고 섬세하게 제시된 가설이 성경 텍스트의 실제적인 자료와 얼마나 상충되며 또한 비평적인 기준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지 드러내었다.


제 7 장

20세기의 오경 고등비평


아이스펠트(Otto Eissfeldt)는 그의 책 <육경의 개요(Hexateuchsynopse,1922)>에서 스멘드(Julius Smend)가 <육경의 기원에 대한 연구(Die Erzåhlung des Hexateuchs auf ihre Qullen untersucht,1912)>에서 명명한 J1 과 다소 유사한 기본자료 L을 J에서 발견해내었다고 생각하였다.이 L을 가나안의 생활양식에 완전히 적대적인 유목민적,레갑인(Rechbite)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그는 L이 엘리야 시대(약 B.C. 860)에 등장하였고 사사들과 사무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L과 약간 유사한 것이 새로운 문서인 K(겐 족속,즉 Kenite를 가르킴)이다. 이것은 모세의 생애중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이스라엘과 겐 족속과의 관계를 다룬다.이것은 모르겐스테론(Julius Morgenstern, The Oldest Document of the Hexateuch,1927)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는 이것이 열왕기상 15:9-15에 있는 아사왕의 종교개혁에 기초가 되었다고 가정하였다.(약 B.C.890)

1.하나님의 이름이 문서의 기준으로서 정당한가?

이미 1893년에 클로스터만(August Klostermann, Der Penateuch)은 맛소라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승하는데 있어서 무오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문서의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MT와 LXX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던 요하네스(Joannes Dahse,"Textkritische Bedenken gegen den Ausgangspunkt der Pentateuchkritik"<오경비평의 초기 전제에 대한 본문 비평적 의심들>, 1903)에서 LXX이 180회 이상이나 야웨를 데오스(하나님)로서, 엘로힘(하나님)을 퀴리오스(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MT가 이름을 전승함에 있어서 문서설주의자들이 시도한 바와 같이 아주 미묘하고 정확한 자료의 구분을 하는데 기초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는 위너(Harold M. Wiener)가 LXX인과 MT사이의 동일한 차이점을 1909년에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구절들 중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료구분을 한다는 것은 비실제적이고 무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레이든 대학 교수 후계자 어드만스 (B.D. Eerdmands)는 70인역의 통계에서 제시된 이 논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리된 문서들을 찾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레위기의 의식들 중 많은 것들이 모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구나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전설들의 근본적 통일성이 그라프-벨하우젠 학파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그러므로 어드만스는 문서설 학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라프-쿠에넨-벨하우젠의 이론의 정당성을 부인하였다.
노르웨이의 학자 모빙켈(Sigmund Mowinckel)은 양식 비평에서 J-E의 문서설을 공격하였다. 그는 E가 북조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임도 부인하였다. E는 가끔 여호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출애굽기 3:14이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야웨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절은 여호와가 히브리인들에게 이미 알려졌음을 전제한다고 말했다.
올브라잇(W.F. Albriht)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말을 하였다. 예를 들면, 사무엘서부터 열왕기까지 보다 오경이 편집상의 차이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받아들

여진 텍스트에서 흠이나 불일치되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또 다른 자료와 문서를 계속 찾아내는 것과 가정적인 분석을 계속 넓혀 가는 것에 대해 많은 경고들이 이미 있었다. 문학적-역사적 문제에 대해 이렇게 주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항상 의심을 사게 되고 비합리적이 된다고 말했다.

2. J, E, P가 분리된 문서로 출발했다는 점을 반박함
헤르만 궁켈(Herman Gunkel)은 양식비평을 이렇게 정리한다.
⑴ 옛 시대의 문학사를 정확하게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기록된 문서들의 발전과정을 일관성 있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텍스트 자체의 자료들이 상충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라프-벨하우젠의 가설이 제시한 가상적 문서들에 대해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⑵ 오경문학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 접근은 문서설주의자들의 분석 비평적 관심이 아니라 종합적 창의적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원래의 자료들이 구전 상태에 속해 있었던 여러 종류들의 양식들을 찾고 포로기 혹은 그 후기로 가정되는 최종적 기록형태의 시기까지 있었던 이 구전의 단위들이 각각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3)종교 사학파(relionsgeschichtliche Schule)의 방법론을 실습하는 자로서 궁켈은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이방의 인근 국이 믿고 표현한 그 종교와 문헌들의 현상중 대조가 되는 것들을 연구했고 그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을 통하여 이 다른 형태들이 어떤 생활의 상황에서 나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계속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창세기는 그 대부분에 있어서 사가들을 집대성한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후대에 기록된 형태로 최종 마무리될 때까지 상당히 유동적인 구전을 통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 이후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 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사실 고고학에 의해 여태까지 발견된 히브리어 파편 중 최초의 것은 게제르 월력(Gezer Calendar, 약 B.C. 925)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근국가에서는 그보다 이미 수세기 전에 모든 종류의 문학작품을 기록된 형태로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반도에 있는 터어키 옥(玉)을 채집하던 셈계의 가난한 광부들도 B.C. 1500년 경에 이미 초서체의 알파벳 비문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 땅 북부에 툭 튀어나온 우가릿에서도 알파벳으로 된 그들의 이방 종교의 경전을 갖고 있었다.
1931년 코펜하겐의 페더슨(Johannes Pedersen)은 『구약성경의 구성』(Die Auffassung uom Alten Testament)이란 책에서 문서설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① 여호와와 이브람 사이의 대화, 소돔과 관련된 주기(싸이클), 야곱과 에서의 설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와 같은 J와 E의 이야기들은 포로 후 시대까지 현재의 기록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아주 옛날의 것들이다(즉, 이 범주에 있는 J와 E의 구성 요소들은 문서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850, 750년 보다 훨씬 더 고대의 것이며 또한 제사적 문서만큼이나 후대의 것이다).
② 일반적으로 J와 E를 구분하는 것은 고대 셈계의 설화에 서양의 관점을 억지로 집어넣고 이스라엘인들의 심리적 작용에 무리를 가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③ D 문서를 문서설 주의자들과 같이 엣 요소와 새 요소로 엄격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신명기에 편만한 반―가나안적 경향은 신명기가 포로 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는 포로 귀환 후에 비로소 D가 그리는 바와 같은 독자적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명기가 요시야 통치 때 편집되었다는 성을 버리게 한다.
④ P 문서로 말하자면 그 체계적 배열과 어투의 스타일에서 그것이 포로 후기의 작품임을 명백히 알 수 있지만 많은 율법적 규례들에 있어서 포로 이전의 상황들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법들의 경우는 다욱 그러하다. 우리는 벨하우젠이 모세의 자료에서 분리시키려고 하던 B.C. 850년 문서와 B.C. 750년 문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토라의 최초 단위가 출애굽기 1-15장에 있는 모세의 진실과 유월절 전설이었다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3. J가 E보다 앞선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1920년 『신명기와 십계명』이란 책에서 켄너트(R.F. Kennett)는 J가 아니라 E가 가장 최초의 기록된 문서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B.C. 650년에 북조 이스라엘의 혼혈백성들에게 의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J는 그 얼이 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정당성을 지닌다는 곳에 대한 반박으로 남부 헤브론에서 쓰였다고 했다. 그 연대는 615년이었다. 이 J는 아마 예레미야 8:8에 예레미야가 언급한 바가 있는 “그러나 보라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이 썼도다”라는 문서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4. E가 J 후대의 문서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폴 볼츠(Paul Volz)와 루돌프(Wilhelm Rudolph)는 1933년 『해설자로서의 엘로히스트:오경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란 표제로 공저를 내었다. E의 단락들을 세심히 재검토한 후 그들은 독립된, 그리고 일관성 있는 E 문서라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단지 J의 일부이거나 혹은 보충일 뿐이다. 볼츠는 J와 E를 구분하지 말 것과 구 보충가설과 유사한 것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하였다. 창세기에서는 우리는 단 한 명의 이야기 기록자(J)를 만날 뿐이며, E는 자기 내용 몇 개를 삽입했을지도 모를 후대의 J편집자일 뿐이다. P는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았으며, 그는 단지 법규들의 기록자요, 창세기 1, 17장과 같은 교리적 부분을 편집했을 뿐이다.

5. 신명기는 요시야 시대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반박

다 베데(De Wette)가 신명기를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하고 요시야 왕게게 B.C. 621년에 봉독한 책이라고 주장한 후 신명기의 요시야 시대설은 모든 하우젠 학파에 의해 “현대 학문연구의 확실한 결과” 중 가장 확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벨하우젠 역시 그의 『서문』(Prolegomea)에서 선언하였다. “신명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과학적 결과를 올바로 평가하는 모든 학자들은 신명기가 발견된 것과 같은 때에 구성되었으며 그것이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한 세대 전에 있었던 요시야 종교개혁의 규칙을 만들었다.”

6. 신명기의 초기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1919년 케겔(Martin Kegel)은 『요시야의 종교개혁』(Die Kultusreformation des Josias)을 쓰고 신명기 연대를 621년으로 잡은 것이 건전하지 않다고 하였다.
1924년 에딘베라의 웰치(Adam C. Welch)는 B.C. 7세기에 “단일성소에 대한 율법”을 공포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된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D 안에 있는 율법 규정 중 많은 것들이 후대 유대의 왕정정치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의 논문에서는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때 신명기와 언약의 책(출 20-23장)을 포함한 핵심적 율법들을 소유한 조직된 공동체였음을 주장하였다. 모세 율법의 다양한 지역적 전통들이 통일왕조를 세우는 문턱에서 사무엘에 의해 종합되었다(참조, 삼상 10:25). 이 배경은 사경(四經)의 배후 자료들이 다양한 요소를 가지며 연속성이 없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해 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예루살렘의 카우프만이 P가 D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D와 그리고 그와 상관된 문학만이 중앙화 사상의 영향력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 아이디어가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요시야는 그것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유대주의는 중앙성전과 선택된 도시의 이미지로 받게 된다. 이 당시에 발전된 제사장 법규들이 이주

된 아이디어를 침묵으로 외면해 버렸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7. 신명기의 후대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다 흩어져 정착한 후에 모든 남자들이 그들의 가정과 농토를 버려두고 1년에 세 차례 이상씩이나 수 일 혹은 수 주 동안 단지 몇 개의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예식에 참석하도록 법관들이 법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지도 하의 유대인 남은 자들이 땅에 새로 정착한 후 신명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만약 신명기가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새로 정착하고 아직 다함께 모여 살고 있을 그때를 명백히 그르치고 있다면 이 구체적 규례들은 신명기 자체가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그 때와 배경<신1:1-4>,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부 직전에 모압 평지에 모여 있을 때<약 B.C. 1400년>에 쓰여졌다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싶다. 그러나 휄셔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휄서의 이 결론에 대해 페더슨은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신명기에 편 만한 반가나안 성향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시대의 반외국정신을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페더슨 역시 이와 같은 반가나안 정신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즉 철저하게 썪은 가나안인들의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일 그때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경 비평과 벨하우젠 가설에 대한 20세기 학계의 동향을 이렇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최저선에서 살펴볼 때 이 시대는 19세기의 문서이론이 세워둔 산뜻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를 붕괴시키는 시대였다. 그라프―벨하우젠 체제를 지탱해 주던 대부분의 기둥들이 거의 다 무너지고 그것으로는 오경의 자료(데이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벨하우젠을 공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세 책의 기원에 대한 보수주의의 견해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문서설을 지탱하고 있던 요새들을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그들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인근나라들과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에 그들의 종교적 신조들을 기록으로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이 B.C. 500년 혹은 그 후대까지 그들의 신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믿고자하는 태도이다.


제 8 장
오경의 저작권

1790년대에 초연신론(혹은 理神論)의 승리로 시작하여 19세기에 헤겔의 변증법과 다윈의 진화론을 거쳐가면서 모세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판결들이 내려졌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학자들이 오경에 있는 옛 구절들 중 몇 가닥의 실마리들을 모세의 것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나, 기록된 현대의 오경에 대해서는 그 전부가 포로 후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모세 저작권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에 들지도 못하였다. 이것은 이미 1800년대부터 기정화된 사실이며 문서설 이론가들이 그 때부터 모세를 구전의 문맹자로 몰아붙여 버렸다. 앞의 두 장(6,7장)에서 문서설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문서설의 시작과 발전을 다룬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벨하우젠의 접근법이 그 시초부터 어떤 약점과 오류를 안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1. 벨하우젠 이론의 약점과 오류

① 문서설은 미묘한 순환논법으로 특징지어졌다. 즉, 그것은 결론을 중요한 전제로 삼고 있다. 이 전제는 물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서양 지성인들의 신조였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것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해주지 않았다. 더구나 그것은 성경 안에 담긴 모든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과 혹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 항상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설명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② 벨하우젠 이론은 텍스트 자체의 증거 위에 서 있다고 단언하면서도 텍스트 자체의 증거가 그 이론에 상반되면 곧 회피해 버리고 만다. 예를 들자면, 문서설주의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구약성경의 역사책들은 포로 후기까지 P의 규례나 기록된 모세의 법전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모세의 율법과 P의 규례들에 대한 수많은 구절들과 언급들을 제시하면, “이 모든 언급들은 포로 후에 이 책들을 재구성한 제사장 계의 서기관들에 의해 후에 삽입된 것이다.”라도 대답한다. 즉, 그 이론을 입증하는데 사용된 증거뭉치들이 그 이론과 상반될 때는 다 거부된다. 달리 말하자면, 그 이론이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가정된 바로 그 자료에 의해 부인될 때 즉시 편집자, 혹은 삽입자 등의 고장 발견 수리 팀에게 전화를 하여 구호를 요청한다. 이와 같은 회피전술을 가지고는 그 결과의 건전성에 신빙성을 얻을 수가 없다.
③ 문서설주의자들은 히브리 저자들이 문학사에 알려진 다른 저자들과 달라서 그들만이 하나의 하나님 이름, 주제와 상관없이 하나의 문책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여 한 사상에 대해 동의어를 여러개 쓸 수 없으며, 단 하나의 주제와 관심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밀톤과 같은 한 명의 저자가 알레고로(L’Allegro) 같은 즐거운 시들과, 실락원과 같은 고상한 서사시(epic poetry)와 아레오파키타(Areopagitica) 같은 번뜩이는 산문 에세이를 쓸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만약 그가 고대의 히브리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즉시 ABC 복합자료 가설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④ 고고학적 증거로서의 히브리어 성경을 다룸에 있어서 주관주의적 성향이 나타난다. 19세기의 박사들이 비역사적인 것으로 일축한 수많은 성경구절들이 후대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확증되었다. 오늘날도 그때처럼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이 성경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학자들은 갖고 있다. 올브라잇의학문적 노력으로 말미암아 구약성경의 평판이 신빙성 있는 과거의 기록으로 높

아지게 되었다. 수많은 책들과 논문들로써 그는 성경의 기록을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그 비평가들로부터 옹호해 주었다.
⑤ 벨하우젠 학파는 이스라엘 종교가 다른 것들과 같이 단순히 인간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진화론의 산물로서 설명이 될 수 있다는 순수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⑥ 교묘하게 본문을 다르게 착색하며, 그 구절을 문맥에서 도려내어 “차이점”을 드러낸 후 그 어떤 조화의 가능성도 배제해 버리면서 추정된 차이점이 문서의 다양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참고, 시스라를 죽이는데 대한 “두 개의 기사” 사이에 있는 추상적 차이점에 대해 파이퍼는 말하기를 사사기 5:25-27은 야일이 시스라가 우유를 마시고 있을 때 망치와 못으로 죽인 것을 제시하나 사사기 4:21은 시스라가 자고 있을 때 죽였다고 한다. 실제적으로 5:25-27은 시스라에게 충격이 가해질 때 그가 마시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파이퍼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J와 E 사이에 “상이점”을 구분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⑦ 비록 다른 고대 셈계 문학들은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사를 진술해 가는 기술로써 반복과 중복을 여러 번 해나가고 있지만, 히브리 문학만은 다른 저작권을 드러냄이 없이 이와 같은 반복과 중복이 있을 수 없다고 비평가들은 전제하고 있다.
⑧ 벨하우젠 학파는 현대 유럽의 비평가들이 고대 히브리 문학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서도 각 문서들의 편집연대를 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고정시킬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자신감에 빠져 있다.
⑨ 그들은 3400여년이나 후대에 살고 있는 학자들이 고대의 자자들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더 잘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요약한다면, 벨하우젠의 가설이 과학적 공안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특별히 편집자에게 비약을 한다거나, 순환논법을 따른다거나, 기초도 없는 전제를 따라 의심스로운 추론을 하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그 방법론이 과연 법정 앞에 설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2. 모세 자작권의 적극적 증거들

오경 본문을 심사숙고해 보면, 외증과 내증의 모든 증거들이 모세의 저작권이라는 사실에 가장 부합하다. 간단명료하게 꾸밈없이 이 결론에 이르는 몇 가지 증거들을 열거해 본다.

⑴ 성경이 모세의 저작권을 증거하고 있다.

① 오경 자체는 모세가 그것을 작성했다고 입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 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7:1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출24:4). “(그가)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7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34:27).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노정은 이러하니라”(민 33:1-2).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주고”(신 31:9).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31:11).
② 구약성경의 다른 책에서도 이와 같은 언급을 발견하게 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 7절에서는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이라고 말한다.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수 8:31).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돌 위에 기록하매”(32절). “네 하나님 야호와의 명을 지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왕상 2:3).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왕하 14:6, 신 24:14을 인용한 것으로 이 사건은 약 B.C. 796년으로 추정된다). “만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왕하 21:8, 므낫세의 통치를 언급함. B.C. 696-642년). 다른 언급들은 요시야 시대 이후로 구약성경에서 발견된다(물론 벨하우젠의 가설에 따르면 신명기는 출판되었고 J E 에 속하는 것이 된다). 토라의 저작권은 항상 개인적으로 모세에게 돌려졌다.
③ 신약성경 역시 모세 자작권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마태복음 19:8에 “모세가 너희 마음을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말을 믿겠느냐”(요 5:46-47).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요 7:19).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행3:22, 신 18:15에서 인용). “모세가 기록하되”(롬10:5, 레 18:5 인용).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거짓말이나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문서설을 믿겠는가?(즉, 모세가 율법을 아직 쓰지 않았음을 믿겠는가?). 마가복음 12:26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모세에게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하셨다고 진술하고 있다.

⑵ 다른 내증들

① 출애굽 기사에 대한 목격담은 그 사건 후 수세기가 지난 후에 살았던 사람의 지식 범주밖에 있으며 그 사건을 실제적으로 보고 참여한 사람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로써 출애굽기 15:27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엘림에 12개의 샘물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다고 말한다. 민수기 11:7-8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먹이기 위해 주신 만나의 모양과 맛을 이야기해 준다.
②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저자는 마치 출애굽에 동참한 사람처럼 애굽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애굽의 이름에 대해 익숙하다.
오경의 애굽적 배경을 최근에 다룬 것 중 가장 야심적인 작품은 야후다의 책이다. 그는 여기에서 애굽에 있는 요셉과 모세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는 단지 빌린 단어들에만 자신의 영구를 제한시키지 않고 원래는 애굽이었는데 히브리어로 번역된 상당수의 숙어와 말의 변화를 토론하였다. 창세기 41:40을 KJV은 이렇게 번역하였다. “내 온 백성이 네 말에 복종하리라.” 이것을 직역하면 “네 말에 따라 모든 나의 백성이 키스하리라” 야후다는 애굽어에서 sn(키스하다)이 “음식”과 연결될 때는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 사용됨을 밝혔다. 궁중관리들의 칭호들, 바로와 대화할 때 쓴 공손한 언어 등은 모두 애굽의 용법에 충실한 것이다.
이와 반면에 후대에서는 애굽 왕의 이름이 “바로”라는 칭호를 앞에 붙이지도 않고 불려졌다. 이것 역시 그 당시의 애굽 용법이다. 예로써 열왕기상 11:40에 시삭(애굽어로 Sheshong)이 언급되어 있다. 7세기 후반과 6세기 초로부터 히브리의 역사 편찬가들이 정확한 애굽의 용법을 벗어나 자유롭게 바로 라는 칭호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③ 토라의 저자는 가나안 땅에 관한 외부인으로서 팔레스타인 밖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기사에 언급된 계절과 기후는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고 애굽의 것이다(예로써, 출애굽기 9:31-32에 있는 우박재앙과 연관된 곡물생산의 순서를 보라. 델리취는 이 사건이 1월 하순이나 2월 초순에 있었음을 이것이 지적해 준다고 말했다).
언급된 식물과 동물들도 팔레스타인의 것이 아니고 애굽, 혹은 시내반도의 것이다. 싯딤나무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볼 수 없고, 애굽이나 시내 반도의 토종이다. 그것은 고유한 사막의 나무이다. 이 나무를 가지고 성막의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성막의 바깥 부분을 덮어주는데 사용된 가죽은 tahash가죽(출 25:5;36:19)으로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애굽과 시내 반도 부근의 바다에서만 발견된 팔레스타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시내 반도 부근의 바다에서만 발견된다. ④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그 배경이 사막이다. 벨하우젠이 가정하는 것처럼 조상들이 이미 1000년 전에 정착한 농경문화가 배경이 아니다. 성막을 예배의 중심장소로 크게 강조하고 있

는 것도 저자가 만일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이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선전과 성막은 많은 중요한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성막은 계속 사막을 돌아다니는 유목민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성막의 재료들을 기자는 여러 장에 걸쳐 아주 세심히게 배열하고 있다. 열 두 지파가 사면으로 성막을 둘러싸고 성막이 중앙에 있도록 한 것은(민2:1-31) 모세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여 다른 어느 시대에도 어울리지 않는 대형이다.
⑤ 특히 창세기에서 우리는 B.C. 2000년―1000년대에 있었던 옛 습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누지(Nuzi)에서 발견된 법조문들은 B.C. 15세기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하녀가 합법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관습(아브라함과 하갈)과 운명 때 구두로써 유언을 하는 것 (이삭이 야곱에게)과 상속권을 주장하기 위해 가족 드라빔을 소유하는 것(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치는 것, 창 31장)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또 다른 글들을 통해 창세기 23장에 있는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살 때 행했던 거래의 관습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하게 되었다.
⑥ 도한 언어에서 고풍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여성 3인칭 단수는 HY’ 대신에 HW’ 로 쓰여졌다. 처녀도 N‘RH 대신에 N‘R로 쓰여졌다. 어떤 학자들은 오경의 히브리어와 8세기의 저자, 예를 들자면 아모스 같은 사람의 글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두 가지 요인을 여기에서 염두해 두어야 한다.
첫째로, 구약성경이 맛소라 시대에 보전이 될 때까지 발음과 알파벳 형태가 모음이 없는 자음 알파벳에 의해 변화됨으로 상당히 애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자음으로만 쓴다면 구 영어(Old English)도 엘리자베드 시대의 영어와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토라를 모세 이후 시대의 젊은 사람들에게 중심적으로 가르친 교육 때문에 마치 코란이 13세기의 아랍어 문체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후대의 히브리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오늘날까지도 아랍어는 620년 모하멧이 사용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이 모든 특징들은 ①-⑥에 이르러 모세 저작권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이것들은 벨하우젠의 이론, 즉 9세기에서 5세기까지 점차적으로, 단계를 따라 편집되었다는 것이 허구임을 드러내어 준다. 증거의 법을 따라 판단한다면 문서설은 실제적 데이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기각되어야 한다.
⑦ 전 오경을 관통하는 놀라운 통일성과 그 점진적 발전을 묶어주는 고리들이 있다. 물론 계시의 단계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중복과 반복이 어느 정도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문서설주의자들도 현재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오경의 최종형태는 가상적인 편집자가 질서와 배열을 잘 해두었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통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9 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상이점과 중복

1. 여호와와 엘로힘의 상이점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인근에 있는 이방의 종교문화들이 가장 중요한 신을 오직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렀는지 의심스럽다. 바벨론에서는 수메리아의 신들 이름을 악카드어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벨은 엘릴이며 누남니르였다. 아눔은 알룸,신은 난나, 에아는 엔키, 우투는 사마쉬, 우쉬타르는 이난나 혹은 텔리툼이었다. 우가릿에서 바알은 알리얀으로, 엘은 랏트판, 코사르 바 하시스는 하임으로 불렀다. 아스트룩과 아이히혼 시대에는 셈계와 애굽의 자료(data)들이 사실상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한 자료구분 이론이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름을 자료구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맛소라 사본(MT)과 70인역(LXX)에 나타나는 이름의 차이에 근거하여 반박을 할 수 있다. MT가 여호와와 엘로힘을 전수하는데 아무런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데 근거한 이 문서의 분리 관정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것이 제시해 준다.
토라 전반에 걸쳐 야훼와 렐로힘이 흩어져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즉, 엘로힘(능력, 강함, 최고를 가리킴)은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류 전반에 주가 되시고 전능하사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오직 엘로힘만이 창세기 1장에서 적합하게 된다. 그 주제가 창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 명칭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 주제가 하나님께서 행위언약을 아담과 하와와 은혜로 맺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럽에 있는 지도적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 몇이 벨하우젠의 출애굽기 6:3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포기하였다. “야웨가 여태까지 모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E의 관점이 아니다. 모세는 그가 자기 백성에게 돌아갔을 때 정말 자기가 보낸 분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요청하고 있다…그 대화 전체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2. 어투와 문체의 차이

출애굽기 8장에서 “그리고 아론”이 나타날 때마다 P에 법규가 만들어질 때까지 발명되지 않은 비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서, 밧단-아람(P 이름)이 창세기 31:18(E 문단)에 나타날 때 18절 하반부는 P에 돌리고 나머지 4-45절은 E에 돌려 밧단-아람은 P에만 나타나고 아람-나하림은 J E와 D에서 사용된다는 그들의 가설을 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 속에 답을 넣고 대답을 이끌어내는 순환논법일 뿐이다.
문서설주의자들은 고대 히브리의 저자들이 표현방법에 있어서 다양성을 띨 수 없었다는 아무 증거도 없이 가정하고 있고 다양성이 나타나면 바로 다른 저작권으로 연결시켜 버린다. 그러나 다른 여러 나라의 문학에서도 숙련된 저술가들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동일 저자가 강조와 신선함을 위해 다양한 표현을 쓸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예로써, 출애굽기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것을 거절할 때 세 가지의 다른 동사가 열 재앙 앞에서도 완고한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특별히 중요한 것을

강조하거나 부연해 준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을 때나(창 35:8), 라헬이 운명할 때 단순표현으로 처리한다. “그녀가 죽고 장사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창25:8), 이삭(35:29), 야곱(49:33)과 같은 족장들의 경우에는 그 표현 형식이 더욱 장엄하고 길다. “그는 기운이 진하여 죽고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며 그의 아들들이 그를 장사하였다.”

3. 중복기사와 평행기사

문서설 초기부터 중복기사와 평행기사는 여러 자료가 오경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되었다. 두 개의 창조기사와, 홍수기사가 여러 가지로 얽혀 있는 것과, 이삭의 세 가지 이름 등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전통을 어설프게 묶은 결과로 여겨졌다. 후대의 편집자가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묶었기 때문에 수많은 불일치가 텍스트에 남아있게 되었고, 비평활동을 통해 과학적으로 분산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런 해부활동은 복합저작권 이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었다.

요셉을 애굽에 판 기사가 두 가지라고 한다. J기사는 이스마엘인이 사고(37:25), E 기사는 미디안인이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창37:28). 이 두 가지 이름은 저자가 그 시대를 잘 알고 있었음을 오히려 변증해 준다. 즉, 미디안인들은 이스마엘 족속 중 한 지파였다. 사사기 8:24은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와 그들의 부하들에 대해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였지만(창25:2), 이스마엘 족속과 그두라 족속이 둘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던 관계로 북 아라비아에서 서로 결혼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브라함이 그의 처 사라를 그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바로(창12:10-20)와 그랄의 아비멜렉(창 20:1-18)에게 빼앗긴 두 기사가 동일한 전설을 다른 형태로 보존한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동일한 실수를 두번 다시 범하지 않고 똑같은 유혹에 단 한번만 빠진다는 가설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특히 아브라함은 두번 다 큰 부를 가지고 나왔던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것이 두번 나타난다. 창세기 16:4-14에 있는 첫째 기사는 J에(이스마엘 낳기 전에 어떻게 나갔느냐 하는 것을 보여줌), 창세기 21:9-21은 E 에(이스마엘이 이미 소년이 되었을 때 집을 나간 기사) 돌려졌다. 사라와 하갈이 수년간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두 사건이 다른 때,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사실이 아닌가. 역사는 위인들의 생애에 반복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는가. 아다나시우스 감독은 세 번이나 유형을 당하지 않았는가? (A.D. 335, 339, 356―문서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 역시 세 가지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편집자가 마지막으로 다양한 전통으로 묶었다고 하지 않을까?).

4. 중복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서 히브리어의 문체

중복 이론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히브리어 문체의 성격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알리스는 히브리 저자들이 널리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세 가지의 문체적 특징을 지적하였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문장구조, 중요사항의 반복, 그리고 평행법이다.
① 평행문장은 종속절, 혹은 독립절을 단순 접속사 그리고( ו, we)로서 연결시키는 특징적인 히브리어 표현구조이다. 창세기 1:14에서 인도-유럽 언어는 목적절로 표현하여 “징조와 계절을 나타내기 위하여(in order to) 하늘의 궁창에 있으리라”로 썼겠지만, 히브리 저자는 “하늘의 궁창에 빛이 있으라…… 그리고 그것들을 징조와 계절이 되어라”로 나타난다. 또한 이사야 6:7을 “볼지어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너의 불의는 제하여졌다. 그리고 너의 죄는 속함을 받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사야가 전달하고 싶었던 점은 “보라 너의 불의가 제거되고 너의 죄가 대속되기 위하여(in order that)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다.”이다.

② 둘째 특징은 중요한 기사를 약간 달리 반복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에 대한 하나의 예를 홍수기사와 연관하여 이미 제시하였다. 거기에서 3가지 중요한 강조점의 반복이 분할론 자들에 의해 마음대로 요리되었으며, 나머지 기사들은 복합 자료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음을 보았다. 이와 약간 유사한 것이 출애굽기에 열 재앙이다. 어떤 경우에는 재앙이 다섯 가지의 특징적 부분으로 충분히 기술되었다. 즉, 경고, 명령, 집행, 중보기도, 끝 이러한 순서로 되었다. 자료 재평가에 있어서 이것들을 하나씩 꾸러미로 만들어 가상적인 저자에게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이다. 이리하여 경고와 끝은 J, 그리고 명령과 집행은 P에게 돌려졌다. 그러나 좀 약한 재앙에 있어서는 그 설명이 짧아서 따른 여러 자료로 나누기가 힘든 경우가 있다. 이 재앙과 악질 재앙은 J와 E에게 돌림이 없이 P에게만 할당되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배열됨으로써 J는 일곱 재앙을, E는 오직 네 재앙(다섯 번째 것은 경고만 있고 실행이 안되었다)을 알고 있는 격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 자료들 상호간에 재앙의 횟수가 전혀 일치하지 않게 되며, 열 개의 재앙을 알기 위해서는 각 순서가 다른 문서에 있는 정보를 알 필요가 있게 된다.
③ 세 번째 특징은 시적(詩的)평행법(平行法)이다. 평행법이란 평행구절이 균형을 이룰 때 갖는 전문용어이다. 예로써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땅”은 “세계”와 “충만한 것”과 “그 안에 거하는 자”가 평행을 이루며 동의어를 이루고 있다.
그린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문서설”로 분석함으로써 이것에 대해 멋진 예증을 제시하였다. 벨하우젠의 기교를 풍자하면서 그는, A자료와 B자료를 나누고 그 둘이 두 아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그 중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몫을 받아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써 극빈에 빠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A만이 형님과 동생으로 나누며 B는 그들의 나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A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간청을 하여 유산을 받으며 여전히 그 나머지는 아버지가 갖고 있다. B에 따르면 그 아버지는 유산을 먼저 자기 뜻대로 나누어준다. A는 탕자가 아버지의 이웃에 살았으며 방탕한 생활로 빈궁에 빠졌다고 말한다. B에서는 그가 먼 나라로 가서 모든 재산을 써버리지만 어떤 방탕에 빠진 것 같지는 않다. 그린은 드라이버(S.R. Driver)가 한 그대로 따랐으며 A와 B의 특징적 단어들을 골라내고 또 서투른 편집자가 잘못된 장소에 이것들을 집어넣은 것을 지적함으로 끝을 맺는다. 벨하우젠 학파의 방법론을 철저히 통달하고 그는 마치 그 조합의 인준 멤버가 된 것처럼 그의 재료들을 다루면서 그것의 인위성을 드러내어 주었다.


제 10 장

자료구분의 기준으로서 후대 단어들과 아람어 영향


20세기의 20년대에 프린스톤의 윌슨(Robert Dick Wilson)은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소위 희귀한 단어들을 모두 뽑은 후 그 결과를 통계자료로 출판하였다. 이 자료에 의한다면 모든 성경은 후대의 것이며 그 하나도 초기의 것이 없다. “희귀한 단어들”이 탈무드에서와 같은 뜻으로 나타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통계를 비교해 보자.

비평가의 연대 희귀어 탈무드
P문서 B.C. 550-450 192 53.1%
D문서 B.C. 621 154 53.2%
H문서 B.C. 570-550 48 50.0%
E문서 B.C. 750 119 48.7%
J문서 B.C. 850 162 44.4%
예레미야서 B.C. 620-580 278 32.1%
이사야 1-39장 B.C. 740-680 121 22.3%
이사야 40-66장 B.C. 550-300 62 25.8%
다니엘서 B.C. 168 47 29.8%

이 통계를 분석해 볼 때 가장 후대에 쓰여진 책으로 알려진 (비평가들의 연대 추정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인용된 아홉 가지 중 밑에서 세 번째로 퍼센트(비율)가 낮으며 가장 초기의 것인 J는 44.4%로서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P보다 2-3세기 더 일찍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E문서는 P보다 5% 더 이하로 떨어진다. 이와 반면에 P보다 1세기나 더 앞선 것으로 여겨진 D는 P와 거의 같은 비율을 갖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이 접근법 자체가 불건전하며, 그 논거가 정당치 않음이 명백하다. 포로 후기의 에스라서 1-6장은 비록 B.C. 450-370년으로 비평가에 의해 연대 측정이 되었지만 16.7%밖에 되지 않는다. 말라기서(B.C. 430) 역시 23.1%로서 낮은 비율을 갖고 있다. 이것을 B.C. 850년 작품으로 여겨진 “여호와 문서”의 44.4%와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식의 연구방법을 완전히 기각시켜 버려야 한다. 이는 그것이 부조리한 결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1. 후대 작품의 기준으로서의 아람어 영향

카우취의 저서에는 『구약성경 안의 아람어 영향』에는 구약성경에 있는 약 350개의 단어가 확실히, 상당히, 혹은 아마 아람어에서 온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 350개의 단어 중 윌슨은 100개가 그 어느 아람어 문서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1926년까지의 현황), 그 나머지 250개 중 135개는 A.D. 2세기 전의 아람어 문서에서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 나머지 중 115개 는

그 이전의 문서에서 발견이 되며, 75개는 바벨론어, 아람어, 페니시아어, 혹은 에디오피아어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카우치가 열거한 이 350개의 아람어 영향에 대해 전체적으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 단어들은 기존하고 있는 아람어 문서에 나타나는 것보다 약 7세기 더 오래된 히브리어 책에 나타난다. 사실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람어 작품들이 안타까울 정도로 적다. 그러나 히브리어 단어를 아람어 영향으로 구분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학적 추측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보다 확고한 기초 위에서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비평가들이 아람어 영향에 근거해서 포로 이전 작품 중 약 1,500개의 절을 포로 후 시대의 것으로 돌려버릴 것을 기억할 때 이 단어들이 아람어였다는 것에 대해 기록으로 제시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유한 아람어가 히브리어와 구별될 수 있는 어떤 언어적 특징이 있는 것이 이런 증빙자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문제시된 단어가 일곱 개의 명백한 자음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던지, 동일한 어근이 다른 셈어에도 존재한다면 한 단어가 원래부터 아람어였다가 히브리 저자가 빌린 단어인지 아니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1 장

전 선지자 시대와 선지자 시대의
히브리 역사에 대한 벨하우젠의 재구성

이스라엘 종교가 거대 근동 아시아에 있던 비 이스라엘인 국가들의 종교와 거의 유사하게 발전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많은 유추를 해내었다. 그래서 애굽에서는 혼합주의의 과정 속에서 유사한 신들을 한 신의 여러 양상으로 보면서 애굽인들은 초기의 다양한 다신 숭배로부터 제 18왕조에 의해 단 일신 숭배에 아주 가까이 가게 되었다. 그 때 아몬―레(Amon-Re’)는 최고 신이 되고 다른 모든 신들은 그의 휘하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애굽 종교의 전성기를 이룬 아크나톤 왕(King Akhnaton)의 유사 유일신론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 바벨론에서는 마르둑 신이 최고의 자리로 올라가고 나머지 모든 신들이 그 아래에 굴복하는 유사한 발전과정을 보게 된다. 헬라에서는 호머의 화려한 다신론이 후대 크세노파네스와 플라톤의 유일신론적 철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유일신앙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일반적인 진화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비교종교학에 근거한 이 논리는 실제적인 자료를 추정해 볼 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역사적 판정은 이것이다. 이스라엘만이 국가적 차원에서 유일신론적 종교를 가졌다. 이것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종교가 다신론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오직 이스라엘에서만이 다신론이 유일신론에게 길을 비켜주었는가? 저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구약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바 이 유일신앙이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였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합리적 설명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히브리 종교적 천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릇된 종교적 배도로 백성을 이끌어갔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이웃들의 다신론을 쉽게 받아들이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 관계를 깨뜨리는 자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바벨론 포로가 되기까지(B.C. 587년) 북쪽의 열 지파가 먼저, 그리고 남쪽의 두 지파가 따라서 깊은 인근 나라의 신들을 깊이 섬겨가며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떠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음을 구약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영원히 거기에 빠져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속 은혜를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여 억제시켰기 때문이다.

1. 벨하우젠이 본 전 선지자 시대

비교종교학의 원리를 따라 문서설 건축가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원시적인 면을 찾아냈다. 예로써, 야곱이 벧엘에서 돌을 베개로 삼고 잔 기사에서 희미하게 비친다고 한다. 돌을 섬긴 것은 야곱과 라반이 길르앗에서 세운 돌무더기 배후에도 깔려 있음이 틀림없다. 우상숭배에 잘 빠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가나안인들로부터 신당을 취한 후에 동일한 의식을 따랐다는 사실은 그들이 분열왕조 시대 후반기까지도 돌을 섬겼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아브라함은 나무를 숭배했다. 뇔디케 같은 비평가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숙소를 “마므레 상수리 나무”에 짓는 것을 창세기 14:13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모세 후 시대의 여선지자 드보라가 거룩한 종려나무 곁에 자기 막사를 짓는 것을 언급하고, 또다른 정령숭배의 흔적은 모세가 지

은 것으로 돌려진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출 20:25에서 여호와께 세운 돌은 징으로 쪼갠 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안되는가? 그 제단에 제사의 상징을 그려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인가?(징으로 쪼갠 돌을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 직전에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나타나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혹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돌은 그 원래의 상태 속에 신(daemon)을 간직하고 있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도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물론 비교종교학자들은 둘째번 설명을 따르고 있다.
문서설이 히브리 역사를 재구성한 것에 따르면 이스라엘 종교 초기에는 우상숭배와 다신 숭배가 많이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숭배는 모세에 의해 용인된 것이라고 한다. 그 우상이 여호와 자신을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황소 우상을 세웠을 때 강력한 반박이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록된 명령이 있었다면 결코 그가 송아지 우상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야도 여로보암의 송아지에 대해 아무런 정죄를 하지 않았다(약 B.C. 860-850). 즉, 그는 우상을 빌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엘리야가 외친 설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열왕기상 13장에 따르면 엘리야보다 앞서 살았던 한 무명의 유대 선지자가 벧엘에 있는 여로보암의 우상과 제단에 대해 단도직입적인 정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아모스 선지자도 그 송아지에 대해 정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모스 3:14에 있는 에브라임의 종교의식에 대한 심판의 선언과 충돌된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리라.” 모세의 놋뱀은 히스기야 시대까지 국보로 성소에 보전되어 왔는데(왕하 18:4), 벨하우젠 학파는 이것이 레위 지파의 보호자로 신봉된 우상이었다고 확신한다. 8세기에 들어와 선지자들의 유일신론이 유다에 퍼지고 지배적인 신앙이 됨으로써 히스기야가 그것을 부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객관적 증거도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평가들에 따르면 초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록된 율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수메리아인, 바벨론인, 앗수르인, 힛타이트인들은 모세 때나 혹은 그 이전에 이미 그들의 법을 명문화시켰는 데도 이스라엘 인들만이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경에 있는 규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소위 J의 의식적 십계명으로 불리는 것이다(출 34:11-26). 이 단락이 십계로써 아무런 서론적 형식없이 시작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열 가지 계명이 아니고 오직 여덟 가지뿐이며, 히브리인들이 850년까지 가장 중요한 법을 기록할 때 살인, 간음, 절도, 사기, 그리고 부모를 멸시하는 것에 대한 규례를 모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이다. 이런 범죄에 대한 규례들이 베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약 B.C. 1700)과 힛타이트, 수메리아 법전에는 아주 상세하게 다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소위 십계라고 불려지는 것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문서주의자들은 전 선지자 시대에 종교적 발전이 있었음을 본다. 즉, 전 선지자 기간에는 족장 시대의 조잡한 다신론으로부터 히브리 지파들이 야웨에게 그들의 충성을 다 바쳐가는 단일신론으로 성장에게 그들의 충성을 다 바쳐가는 단일신론으로 성장해 간다. 야웨는 그들의 민족 신이 되었다. 이 신이 이미 여러 신들을 배경으로 깔고 있었음을 엘로힘(Elohim)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신의 복수 어미-im에 나타난다(그러나 이것은 위엄의 복수이다). 사사 시대에 입다가 암몬인들에게 이 용어로 말을 하고 있다(삿 11: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던지 쫓아내시면 그 땅을 우리가 얻으리라”(여기에서 입다는 신학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공명정대하게 말하고 있다). 다윗 왕까지도 사무엘상 26:19에서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불지 못하게 함이니이다”(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깃발 아래서 일하라”는 것에 대한 고대의 표현일 뿐이다. 유일신론적 신명기학파 저자도 이런 식의 말을 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입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라”(신 28:36). 여기서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은 거짓된 이방 종교가 지배적인 땅에서 종으로 산다는 뜻이다).
벨하우젠 학파는 호세아 3:4에 있는 바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낼 것이다”라는 것을 해석하면서 우상숭배와 연관된 주장들과 드라빔이 호세아 시대에는 합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는 왕과 제사와 기타 등등은 이 절에서 그것들과 함께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맥을 잘 살펴볼 때 이 절에 열거된 모든 의식들이 저자에 의해 불법적이며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조를 세우지 않았으며, 레위인이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예루살렘 제단에서 규례를 따라 제물을 드리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자의대로 들린 것 등을 언급한다. 그 다음 절에서는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참 하나님과 참 왕인 다윗에게로 돌아오며 모든 성결과 거룩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과거와 같은 범죄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진술하고 있으므로 이 절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정당하지 않다.

2. 벨하우젠이 본 선지자 시대

선지자들이 제사제도를 반대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문서설의 건축가들은 몇 가지의 증빙 텍스트가 필요했고, 또 그것들을 문맥에서 벗어나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였다. 이리하여 8세기와 7세기의 위대한 선지자들이 피로써 희생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모세의 인허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부인하게 되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사용되는 네 가지의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있다.

① 아모스 5:21-26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 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 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 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식굿은 성막, 기윤은 성물로 번역 됨).

문서설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핼 때 “출애굽 광야생활에서 한번도 하나님께 희생과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모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었다. “너희가 그때 내게 희생을 드렸느냐? 그래 그랬지.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추하고 받을 수없는 것이었느냐(지금 너희들이 내게 바치는 곳과 똑같았다). 너희들도 모세 시대와 똑같이 우상을 몰래 섬기며 지고 다니지 않느냐!” 이것이 아모스가 이 장에서 전개해 가는 논리의 흐름에 잘 일치한다.

② 미가서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 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 하실 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 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미가가 제사제도를 반박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으로써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옛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현대 자유주의 사상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다. 문맥을 살펴볼 때 미가는 그 당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삶과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면서 종교적인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무리 값지고 풍부한 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일상 생활에서 주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며 진실되이

살지 않을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제물로써 순종이 없는 생활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주의 뜻에 우리를 바친 후에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사제도를 반박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경건의 대용품으로서의 의식문제만을 다루고 있음을 보게된다.

③ 이사야(1:11-17)는 동일한 선상에 있는 또다른 하나의 선지자의 선포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 양의 번제와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벨하우젠 학파는 이것을 해석하기를 피의 제사는 헛된 것으로 제거되어야 하며 공적이 될 수 있는 선행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선언으로 본다(현대의 모범적인 자유주의자가 기대하는 바도 이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잘 못되었음을 15절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만약 이 앞 절에 있는 언급들이 피의 제사 그 자체를 금하는 것이라면 여기서는 기도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서 금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똑같은 표현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계몽된 현대의 자유주의자도 선지자 이사야가 기도를 금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치료해주는 관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기도는 유익할 뿐 아니라 권장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④ 예레미야 7:22-23
“대저 내가 너의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 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비평가들이 볼 때는 하나님이 제사제도에 대해 모세에게 말한 바가 없다는 것을 예레미야보다 더 명백히 말한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말할 여지도 없이 P의 자료들은 아직까지 J, E, 혹은 D에 첨가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레미야는 그와 같은 말을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지자가 여기에서 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분석해 본다면 그것이 출애굽기 19장에서 인용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처음으로 영포(令布)하기 전에, 십계명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 말씀을 주셨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이나 번제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유월절 양도 제단에서 잡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그는 언약의 조건으로서 절대적이고 무조건 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다. 그 후에 제사규례를 모세에게 제시하였다. 예레미야의 동시대인들은 참된 경건 대신에 의식을 대치시켰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희생의 제단에 피로써 죄를 속죄하는 대책을 주기 전에 그의 도덕법에 절대적인 순종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와 동시에 예레미야는 그의 예언의 다른 부분에서 제사제도에 대해 열렬한 지지를 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렘 17:19-27;31:14;33:11,18).
일반적으로 볼 때, 요시야의 종교개혁 이전에 지방 성소가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있었다는 그 역사적 사실이, 모세의 율법이 그것들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라고 문서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B.C. 621년에 있은 후에도 우상숭배를 하는 산당이 유다에 계속 있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낀다(참고, 겔 6:3).


제 12 장
벨하우젠이 재구성한 제사장 시대의 히브리 역사


벨하우젠의 가설에 따르면 유대 왕조가 몰락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에 더 이상 정치적인 독립을 이룰 수가 없어서 그들의 종교적인 기구를 국가의 존속 기초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레위 지파의 직업적 제사장 계급이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의식들이 최종적으로 P문서에 수록이 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는 모든 신자에게 어떤 표준적인 규칙들이 전혀 없었고, 단순하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문서설에 따르면 제사장 계급을 아론의 가족에게 한정시키는데 있어서 발전의 흐름이 명백히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제사장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다 열려 있었다(“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출 19:6, J-E 구절). 실제적으로 출애굽기 19:6은 이스라엘이 모든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에 대해 하나의 민족으로서 가진 역할을 말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히브리인의 중보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벨하우젠에 따르면 그 다음 단계는 신명기로 대표될 수 있다(B.C. 621). 신명기 27:12-14에는 레위 지파가 그리심산의 비탈에서 다른 지파와 함께 서 있으며 다른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그룹 사이에 있는 골짜기에 선택된 레위 그룹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레위 제사장들”이었고(9절) 그들은 하나님이 쏟으시는 일련의 저주를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골짜기에 구별된 구룹의 사람들이 아론계의 제사장들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이 열왕기상 8:4에서도 제사장들과 레위인 사이에 구별을 암시하고 있다.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며”(쿠에넨은 이 절을 신명기적 문맥에서 잘라내어 P에게 돌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이 이론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아론의 가문이 레위 지파 중에서 우월권을 갖게 되며 그 발전이 시작된 때는 바벨론 포로기였다. 이 이론은 아론 자신이 한 명의 가공의 인물로서 원래 모세와 출애굽의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였다는 주장으로 지지된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론의 이름이 나타나는 많은 J 구절들(예; 출 4:14-16,27-30)을 처리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들은 최소한 13곳에서 나타난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J의 문맥에서 끄집어내어 P가 삽입된 것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아론은 J에서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는 명제를 만들고 자축(自祝)을 하였다. 또한 제사장직을 포로 후기로 밀어내는 것은 포로 전 유대역사에 언급된 유명한 대제사장들, 즉 여호야다(왕하 12:9), 힐기야(왕하 22:4,8), 스라야(왕하 25:18)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런지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제사 문서가 후대의 것이라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그 규례들과 의식들 중 그 어느 것도 포로 이전의 작품에서 언급되지 않았다고 종종 주장한다. 포로 이전의 저자들은 전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P 문서 안에 담긴 자료들은 예루살렘 멸망(B.C. 587) 후에 작성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드라이버는 “포로 전기에서는 P가 있는 흔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드라이버 자신이 신명기 14:3-20을 다루면서 방금 인용된 그 말을 좀더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여기 신명기에 있는 긴 문단은 레위기에 있는 것에 관한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이며 그것은 D가 P에서 빌려온 것이거나 혹은 제사장들의 정결규례의 묶음인 것이다. 그것은 P가 D에서 취한 것은 아니다. 이곳의 문체는 D보다는 P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P의 일부는 신명기가 쓰여질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것이 신명기에서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15:1은 레위기 25:2-7에서 명한바와 같이 면제년의 규례를 말하고 있다. 신명기 24:8의 말씀, “너는 문둥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싸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행하되 곧 네가 그들에게 명한대로 너희는 주의하여 행하라”는 제사장들에게 이미 주어졌던 모세법의 문둥병자에 대한 규례가 존재한고 있었음을 명백히 선언해 준다. 신명기에서 P의 법을 명백히 지적해 주는 또다른 구절들은(레위기 11, 13-15, 17-19장, 그리고 민수기 18:20-24이다. 만약 이것들이(드라이버가 제시한 바 대로) P를 정경화하기 전에 기존했던, 그야말로 오래된 법이라고 한다면 “이 옛 법들은 우리가 레위기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그 차이점에 대해 논란할 여지가 없고 레위기의 법들이 포로 이전 시대에 있었다는 논증도 백지화 된다.”
신명기에만 P 율법에 대한 이 언급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 2:11-12은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시르 사람들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민수기 6:1-21(P)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그것이 나실인의 제도에 대해 언급한 단 하나의 구약성경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금한 것은 민수기 6:3(P)에서 발견된다. 또한 아모스 4:5에서는 레위기 2:11(P)에 있는 제도를 명백히 암시하고 있는 “유교병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을 정죄하고 있다. 번제, 소제, 화목제와 같은 P의 특징적 용어들이 모두 아모스 5:22에 나타난다. 또한 우리는 낙헌제를 보며(참고, 레 7:16-18;22:18, 민 15:3―모두 P구절), 아모스 5:21에서는 성회를 보게 된다(레 23:36, 민 29:35).
이 모든 언급들(신명기에 암시된 것 포함)에서 합리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이미 B.C. 755년에 P 뿐 아니라 D도 기록된 율법의 체계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선지자 자신에 의해 여호와의 율법으로 명명되었고(암2:4) 그의 청중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권위 있는 율법의 체계로 수납되었다는 점이다. 아모스나 다른 어느 선지자 학파의 대표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신학이나 제사의식에서 새로운 변혁이나 새 가르침을 시도하지 않았다. 파이퍼와 아이스펠트는 아모스에 있는 이 증거의 힘을 피하기 위해 이 모든 율법에 대한 암시들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라프, 쿠에넨, 벨하우젠이 자신 만만하게 주장한 것과 정반대가 되는 궁여지책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P의 규례가 그 어느 히브리 문학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논리는 성경 본문의 증거에 기초한다고 주장하지만 본문이 그 주장을 반박할 때는 그것을 후대의 삽입이라고 호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것과 연관되어 한 문서가 기록된 연대는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모든 언급들을 종합하여 확정하는 방법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어떤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것은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이 검정 방법을 “제사 문서”에 도입한 결과 그것이 포로기 보다 훨씬 이전에 작성되었다는 것에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제 13 장

오경의 고대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벨하우젠의 가설이 구약성경에 대한 역사성을 판단할 때 19세기의 입수한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유감스럽게도 빈약했으며 그 당시의 무지에 근거하여 고고학적인 신빙성을 깎아 내렸다. 예로써, 이런 주장이 있었다. 모세 시대에는 팔레스타인에는 글씨가 없었으며, 그러므로 오경은 B.C. 10세기, 혹은 9세기까지 쓰여질 수 없다고 하였다. 역사적인 정확성이 결여된 것으로 여겨져 그 성경 문서가 후대에 쓰여진 것이며 저자가 가짜였다는 것으로 재천명이 되었고, 문서설 이론가들이 냉소하며 내린 판단들이 기초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세대에서 미국의 고고학계를 대표하는 올브라잇(W.F. Albright)은 벨하우젠 학파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1941년에 그는 말했다. “고고학적 자료와 비문에 기록된 자료들은 구약성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절들과 진술들의 역사성을 확립시켰다. 역사성이 부인되고 그 개연성의 의심을 받은 것보다 확증된 수가 수 십배 더 크다.” 동일한 논문에서 그는 계속 말했다. “벨하우젠이 아직도 우리 눈에는 19세기의 최고 성경학자로 보이지만 그의 관점은 케케묵은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태어난 초기에 대해 그가 찍은 사진은 슬프게도 왜곡된 것이었다.” 좀더 최근의 저자 존 웰더(John Elder)는 말한다. “고고학이 일어난 것은 역사가와 정통주의 신자 사이에 있는 교착상태를 부수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조금씩 조금씩,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한 문명에서 또다른 문명으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나감에 따라 오직 성경 안에만 담겨 있던 그것들이 고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회복하게 되었다. 성경에 담긴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이 발굴되었고 성경계시의 유일성이 새롭게 발견된 고대 민족들이 종교에 의해 대조와 비교의 방법으로 강조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이 성경은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반박한 곳은 하나도 없다.”
다음 몇 페이지에서 우리는 문서설을 신봉하는 자들이 오경의 정확성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비평 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발견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가설 1 : 글씨가 다윗 왕조 전에는 이스라엘에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기록은 가질 수가 없었다.
반박 : (1)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서는 B.C. 925 년에 쓰여진 게제르 월력(the Gexer Calendar)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어느 학도의 습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10세기의 이스라엘에서는 서도(書道)가 너무나 잘 알려지고 널리 보급되어 어린 아이까지도 배우고 쓸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증해 주었다.
(2) 우가릿 혹은 라스 샤므라 토판은 1929 년 새퍼(Schaeffer)가 발견한 것으로서 B.C. 1400 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30개의 알파벳으로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히브리어에 가까운 엘, 바알, 아낫, 아세라, 모트 등과 같은 신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상황을 특징 지워 주는 타락한 다신론을 보여주고 있다.
(3) 다음은 B.C. 1500년 후반의 세라빗 엘카팀의 터키옥 채굴장에서 찾아낸 알파벳 비문이다. 이 비문을 쓴 사람은 애굽에 채용된 셉족 광부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추론은 모세 이전의 셈족들이 글자를 널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하층의 사람들도 읽고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좀더 최근에는 동일한 시내 반도계의 활자체로 쓰여진 항아리가 하조르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발견으로서 이 알파벳 체가 모세 시대에 팔레스타인까지 퍼져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가설 2 :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대한 기사는 신빙성이 없으며 종종 비역사적이다. 뇔드게(Nöldeke)는 아브라함이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부인하기까지 하였다.

반박 : (1) 남부 수메리아의 우르 시는 레오날드 울리가 철저하게 발굴하였다(1922-1934). 그는 아브라함 시대로 추정되는 B.C. 2000년의 높은 문화를 간직하고 있던 그 찬란했던 도시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었다. 중류층의 시민들도 약 10개 내지 2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가 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잘 유지되고 있었고 교과목으로서는 일기, 쓰기, 산수, 종교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그 도시가 수메르의 우르인지에 대해 질문이 야기되고 있으나 좀더 북쪽에 동일한 도시가 있었다는 증거는 아직도 미약하다.
(2) 아브람(Abram)이란 이름이 B.C. 16세기 경의 토판에서 발견됐다. 악카드어 토판 B.C. 1554년 바벨론의 아미짜두카 11년에는 아바라마(Abarama)라는 농부가 소를 임대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두 토판도 이 동일한 사람을 아밤라마(Abamrama)로 부르고 있다.
(3)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으로 온 것에 대해 세겜과 벧엘에서의 발굴은 그 도시들이 아브라함 시대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9세기의 저자였다면 그 족장이 후대에는 유명하게 되었으나 B.C. 20세기에는 없었던 도시에 머물렀다고 하였을 것이다.
(4) 옛날 학자들은 창세기 13장이 비역사적이라고 공박했다. 그 근거는 요단 계곡에는 아브라함 시대에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넬슨 글룩은 최근에 요단 계곡에서 70개 이상의 유적지를 발견해 내었고 그 중 어떤 것은 B.C. 3000년의 것이었다.
(5) 창세기 14장은 ⓐ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꾸며낸 것이며, ⓑ 아브라함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타인까지 먼 원정이 있을 수 없었으며 ⓒ 요단 강 동편으로 진군할 수 있는 도로가 없다는 것에 근거하여 뇔르게가 역사성을 부인하였다.
ⓐ에 대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후에 발견된 바에 따르면 엘람 왕조가 수메르와 악카드를 일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이 왕들 중 어떤 자들은 “쿠드르”(Kudur, 종)란 이름으로 시작이 되며 엘람의 여신 중 라가마르로(Lagamar)로 명명된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쿠드르―라가마르라는 왕이 이때에 침략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해 궁겔, 올브라잇 기타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4장의 기사가 B.C.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진정한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올브라잇은 결론을 짓는다. “이 장이 어떤 역사적인 상황에서 쓰여졌는지 확증할 수는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아주 고대의 것임은 분명하다. 성경 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몇 개의 단어들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제 2세기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설 3 : 제사 법전을 만든 것은 이스라엘 종교에서 가장 후대의 것이며, 포로 후기의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율법이 B.C. 5세기까지 결코 만들어질 수가 없다.

반박 : (1) 1901년 수사에서 드 몰간(De Morgan)과 쉐일(Scheil)이 발견한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은 범죄에 대한 심판과 계약 위반에 대한 손해 배상에 있어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있는 법규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다. 이 유사한 법들 중 많은 것들이 많은 것들이 벨하우젠에 의해 P로 분류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mišpāṭīm 에서 그 유사성이 발견된다.
(a) 레위기 19:23-25은 과수원을 심을 때 그 주인은 5년이 되기까지 그 과실을 먹을 수없도록 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 #60도 과수원을 심은 소작농은 제 5년이 되기까지 그 실과를 먹을 수없게 되어 있다(그 동안 그는 그 소유주로 하여금 추수의 반 이상을 갖도록 해야 한다).
(b) 레위기 20:10은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이도록 하였다. 함무라비 #129는 간음한 쌍방이 왕의 용서를 받든지 혹은 남편에 의해 그 부인이 용서를 받기 전에는 물에 빠뜨리게 되어 있다.

(c) 민수기 5:11-28은 남편에 의해 그 순결을 의심받는 아내가 정죄를 받든 무죄를 받든 간에 그 절차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쓴 물”을 마셔 만약에 범행을 했을 때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 함무라비 #132는 간음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내가 한 것으로 의심을 받을 때 강에 던져져 가라앉으면 죄가 있고 떠오르면 무죄하게 되었다.
(d) 레위기 20:12은 한 남자가 그의 며느리와 간음을 하게 될 때 둘 다 사형을 받게 되어 있다. 함무라비 #155는 이 경우에 그 시아버지만 사형을 당한다. 아마 그 며느리는 가족의 머리되는 사람을 감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e) 레위기 24:19-20은 남의 몸을 상했을 때는 동일한 상처를 가해자에게 주라고 한다(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함무라비 196, 197, 200은 사회 계층이 동일할 때는 쌍방에게 동일한 형벌을, 피하자가 하층 계급일 때는 단지 돈으로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유사성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P형태의 법이 모세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모세 이전 수세기 전에 이미 그런 법들이 바벨론에 성행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법전과 언약의 책(출 21-23장) 사이에 가장 많은 유사점이 있다. 출 21:2-11 과 #117 ; 출 21:15과 #195 ; 출 21:16 과 #14 ; 출 21:22-25 과 #209-213 ; 출 21:28-36 과 #250-252; 출 22:7-9 과 #120 ; 출 22:9 과 #267 ; 출 23:1-3 과 #1-4. 이 증거들은 물론 이 규례들이 B.C. 800 년에 생긴 것보다 모세 시대에 생겼을 가능성을 더 지지해 준다.
(2) 모세의 율법이 비평가들에 의해 후대로 여겨진 이 문제에 대해 브로우스(Millar Burrows)는 이렇게 말했다. “모세에게 돌려진 율법들의 사회적, 도덕적 수준이 그 시대에 비해 너무 높은 것이라고 학자들이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바벨론, 앗수르, 힛타이트와 애굽의 사자의서(Book of the Dead)에, 그리고 애굽의 초기 지혜문학에도 높은 수준이 있음을 보게 된다.”라고 말했다.

가설 4 : 민수기와 여호수아에 기록되어 있는 요단 동편과 팔레스타인 정복기사는 조잡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며 2000년대 후반의 지배적인 상황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반박 : (1) 애굽 제 12왕조 저주문 텍스트는 오경과 여호수아서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이 역사성을 띠고 있음을 확증해 준다. 이것을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것은 B.C. 1920년의 것으로서(지금 베를린 박물관에 있으며) 1926년 세트(Sethe)가 발견한 그릇들이다. 그 그릇 안에는 여러 가지 글들이 인각되었다. 둘째 것은 B.C. 1820년의 것으로서(지금 브루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포세너(Posener)가 1940년 발견한 인각된 동상 그룹들이다. 이 물건들에는 팔레스타인의 도시들과 나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들은 애굽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2) 1887년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텔 엘―아마르나 토판은 B.C. 1400-1370년의 것으로서 팔레스타인과 수리아의 왕들이 애굽 왕실에 악카드어 쐐기문자로 편지를 보낸 뭉치이다. 이 편지들은 그 당시 무서운 침략자들이 약탈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애굽의 군대가 한시 바삐 도착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민수기 21:1-3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정복한 지역이다. 아마르나 편지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19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렇듯 이 토판들은 1400-1380년의 가나안 정복의 상황을 가나안인들 자신들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3) 1896년 테베에서 페트리가 발견한 메르텦타(Merneptah) 왕의 이스라엘 기념비는 B.C. 1229년의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 나라를 “이스라엘”로 언급한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애굽의 비문이다. 애굽의 왕(대 라암세스의 아들)을 칭송하면서 여러 나라들과 지방이 그 비문의 끝에 수록되었다. 그 나라들은 메르텦타의 무적 군대에 의해 정복을 당했거나, 블레셋의 아스글론, 아얄론 골짜기 가까이에 있는 게제르, 팔레스타인 북부 끝(라이스-단 가까이), 야노암, 이스라엘(한 종족을 가리킴), 그리고 호리 족속의 땅이 수록되어 있다. 만약 메르넢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틴 북부까지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았다면 이미 이스라엘은 B.C. 1229년에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명백해진다. 이 결론을 피할 수있는 유일한 길은 창세기의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몇 이스라엘인이 야곱의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결코 이주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제 14 장

창 세 기(1)

창세기(Genesis: 헬라어로 시작이라는 뜻)는 70인역이 이 책에 붙인 이름이다. 히브리어로는 베레쉬트(תישׁארב: 태초에)라고 한다. 창세기란 시작, 기원이란 어원이다.
저자는 모세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7:23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언급이 있다. 창세기는 약속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이 기록되어 있고, 그 약속이 출애굽의 사건과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모세가 처해 있던 그 독특한 상황 역시 그의 저작권을 옹호해 준다. 그는 약속의 땅에서 수립될 신정정치에 대한 헌법을 써야 했다. 그런 상황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성 통일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족보와 하나님께서 맺은 언약을 정확하게 기록해야만 했다. 모세가 이 책을 만드는데 사용한 자료들은 5,6세기 전의 것으로서 야곱이 애굽에 오기 전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는 성령의 지배를 받은 편집자로서 일을 하였다.

1. 창세기 개관

Ⅰ. 인류의 시작(1:1-11:32)
A. 천지창조(1:1-2:3)
B.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2:4-25)
C. 죄의 침입과 그 결과적 타락(3:1-4) : 은혜언약의 제정
D. 홍수 전 족속들과 족장들(아담에서 노아까지, 5:1-32)
E. 죄악 세상의 홍수심판(6:1-9:29)
F. 노아의 후손과 근동 아시아의 초기 족속들(10:1-11:32)
Ⅱ. 아브라함의 생애(12:1-25:18)
A. 아브라함의 소명과 믿음으로 언약을 수납함(12:1-14:24)
B. 언약의 갱신과 확증(15:1-17:27)
C. 소돔에서 롯을 구출함(18:19:38)
D. 아브라함과 아비멜렉(20:1-18)
E. 약속의 아들 이삭의 출생과 결혼(21:1-24:67)
F. 아브라함의 후손(25:1-18)
Ⅲ. 이삭의 생애와 그의 가족(25:19-26:35)
A. 에서와 야곱의 탄생(25:19-28)
B.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아 넘김(25:29-34)
C. 이삭과 아비멜렉 2세(26:1-16)
D. 브엘세바의 논쟁(26:17-33)
E. 에서의 결혼(26:34, 35)
Ⅳ. 야곱의 생애(27:1-37:1)
A. 부친의 슬하에 있는 야곱(27:1-46)
B. 야곱의 유랑생활과 여행(28:1-22)

C. 수리아에서의 야곱과 라반(29:1-33:15)
D.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야곱(33:16-35:20)
E. 야곱과 에서의 후예(35:21-37:1)
Ⅴ. 요셉의 생애(37:2-50:26)
A. 요셉의 소년(37:2-36)
B. 유다와 다말(38:1-30)
C. 애굽에서의 요셉의 출세(39:1-41:57)
D. 요셉과 그의 형제들(42:1-45:15)
E. 애굽에서 부자상봉(45:16-47:26)
F. 야곱의 마지막 날과 유언적 예언(47:27-50:14)
G. 완전한 용서를 형제들에게 확증하는 요셉(50:15-26)

개요를 보고 느끼는 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얼마나 세심하고 체계 있게 전 족장시대를 다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창세기 1장과 현대의 과학적 증거

⑴ 제6일 창조와 세계의 연대
창세기 1장을 읽고 보면 창조의 과정이 24시간을 하루로 하는 6일만에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최근에 개발되고 있는 핵물리학은 방사능 광물질들이 부식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지구의 연대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되었음을 확증하는 듯이 보인다. 물리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우라늄 238은 45억년을 거쳐야 16번의 중간상태를 거쳐 안정된 광물로써 더 이상 방사능 작용에도 분해가 되지 않는 206까지 온다는 것이다.
도대체 균일 설에 의하면 50억 년도 더되는 이 지구의 나이와 창세기 1장에 있는 창조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것은 히브리어 욤(םוֹי, yōm<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날들”에 대해 세 가지의 이론이 성경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① 첫째 학설은, 욤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을 하루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3-2:3은 하나님께서 우주적 파멸을 당한(아마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남으로 생긴 것임) 우주를 그 혼돈에서부터 창조로(창 1:1에 기록됨) 완전히 회복한 완전한 1주일을 기록한 것이 된다. 이 해석에 대한 근거는 이사야 45:18에 있다고 주장된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구를 “헛되이”(혹은 “공허하게” : 히브리어 보후<וּה?, bōhū>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창세기 1:2의 “공허함”과 똑같은 단어이다.
② 욤은 계시적 하루를 말한다. 문자 그대로 6일 동안에(혹은 전창조의 드라마가 모세에게 환상가운데 6일의 환상적 날로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음)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에게 자신이 어떻게 창조를 하셨으며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신비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엄격하게 연대적으로 묘사되었다고 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 문체들을 만든 것이 제 4일까지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햇빛이 있어서 살 수 채소를 만든 후에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조의 여러 단계와 양상들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 관찰자가 볼 때 논리적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에 빛을 주고 계절을 관장하는 태양과 달을 소개하기 전에 관찰자가 서 있는 땅의 표면을 먼저 기술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란 뜻이다.
③ 욤은 창조적 과정에 있어서의 지질학적 연대나 혹은 한 무대를 뜻한다. 이것은 19세기의 지질학자로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들, 특히 도손(J.W. Dawson)과 다나(James Dana)에 의해 제시된 설명이다. 이들에 따르면 욤이란 용어는 문자적 24시간의 하루가 아니고 한 “무대”와 동일한 것이다. 종종 욤은 이런 뜻으로 사용될 수가 없고 히브리어의 용법에 따르면 문자적 하루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적 증거에 기초하여 창세기 1장의
욤은 단순한 문자 그대로의 24시간 하루를 뜻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한다.
첫째로, 욤은 창세기 2:4에서 방금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된 엿새 동안의 모든 창조적 과정을 언급하는데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욤)에 천지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하늘과 땅을 창조한 단계가 방금 기록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날”은 첫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전 과정을 뜻하는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타당하다.
둘째로, 창세기 1:27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 6일에 모든 땅의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그가 고독을 느끼기까지 에덴 동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땅의 짐승들을 함께 교제를 나루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붙여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가 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아담이 외로워하시는 것을 보시고 그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빗대를 뽑아 인간 아내를 만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브를 아담에게 데려와 그의 새로운 인생의 배필로 주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 모든 기사들이 제 엿새 째의 24시간 동안에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창세기 1:27은 아담과 이브가 창조의 마지박 날 끝에 지음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날자적 24시간의 하루들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기간의 단계를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⑵ 성경의 창조설과 현대의 진화론
다윈의 이론은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 의미 깊은 신적 활동에 대해 아무런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그는 단지 태초의 기본 재료만을 공급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을 본 것이다. 사실 그에 자연적 선택 이론에 따르면, 창조라는 것은 없고 다만 발전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전적으로 배치되는 견해이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이 증거에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이 너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적 철학 역사에 있어서 지나가는 현상으로 일축해 버릴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해야 겠다. 우리는 다음 네 가지의 관점에서 약점들을 다루려고 한다.
① 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적 선택설의 기본적 가장들이 증거와 정반대가 된다. 수십년동안의 힘든 연구의 결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한 종(種) 안에서 개인들은 약간씩 서로 다르지만 이 차이점들이 그 다음 세대에 구체적으로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멘델(Gregor J. Mendel)의 방대한 연구가 제시한 점은, 한 종(種) 안에서 가능한 변화의 범위는 엄격하게 제한되며 새로운 종들의 발전을 향한 어떤 과정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종의 키가 큰 완두콩들의 종이 그 키에 있어서는 개체에 따라 다를지라도 큰 것의 후손은 작은 것의 후손보다 일반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선택적인 품종개량에 의해 한 종 안에서 어떤 특징을 특별한 종족으로 만들 수 있지만 어떤 품종개량가도 넘어갈 수 없는 엄격하게 제한된 영역이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는 결코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멘델의 작업은 다윈의 자신의 이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우연한 변종”이 결코 있을 수 없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
② 발생학(혹은 태생학)의 자료에 근거한 다윈의 논증은 명백한 오류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모태 안에서 태아가 자라갈 때 그 진화된 과거를 다 재현하여 수태된 난자가 커지면서 점점 더 복잡한 기관과 지체를 만들어 간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자면, 인간 태아기의 내장 대상부(袋狀部)는 고기의 아가미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기의 형태로부터 진화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류(類)의 추론은 인간의 내장기관이 그 어떤 태아기의 단계에서도 아가미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지 않음에 대해 전혀 외면을 하고 있다. 사실 반복이론이 태아 안에서의 실제적 발전과정과 일치하고 있는지 알아내기가 힘이 든다. 예를 들자면, 호흡기관은 모태 안에서 태아가 형성되기 시작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발달해 간다. 그러나 전(前) 인간적 상태에서 추정적 조상이 전혀 호흡기관이 없이 살았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태아의 머리 크기는 신체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소위 전 인간적 조상들로 추정이

되는 자들의 머리는 다른 부분에 비교할 때 상당히 작다. 또한 태아의 단순 기관들이 점차적으로 복잡하게 되어간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눈은 몇 가지 서로 다른 부분들이 마지막으로 결정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 몇 가지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 마지막으로 결합된 것이다.
태생학의 자료들 중 그 어느 것도 기계론적인 자연적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지혜로운 창조주에 의해 의도된 계획과 목적이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 태아의 성장에 있어서 성장의 관정이 잘못되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전적으로 새로운 기관이 생겨 바람직한 구조를 가지는 것이 발견된다. 때로는 이 “이중적 확증”(double assurance)의 기관들 중 두 서너 개가 질서 있게 움직여서 태아에게 적절한 발전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설명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그것들을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돌릴 수가 없다. 오히려 신적 지혜의 개입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어떤 태아가 적절하지 않게 발전하여 생존할 수도 없거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결함이 있는 표본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결과가 아주 비극적이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윈 파의 전제에 따르면 이 악성 목적론(dysteleology)의 느낌조차 설명할 도리가 없다. 철저한 다윈주의자는 그의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것들이 더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③ 다윈의 생물학의 자료에 대한 이론은 창세기 1장에 있는 그 숭고하고 단호한 선언과 비교할 가치가 없다. 창세기에 따르면, 모든 동식물은 전능하시고 전지 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뜻을 따라 형성되고 그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그들의 모든 발전은 그의 계획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모든 구조적 유사성(예를 들자면, 인간과 하등 순위의 척추동물 사이에 있는 유전관계를 시사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골조적 유사성 등)은 살아 있는 조직으로부터 기계적으로 작동하여서라기 보다 밖으로부터(혹은 위에서) 역사 하는 직접적인 힘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만족스러운 것 같다. 인간의 척추 끝에 있는 미저골(coccyx)과 같은 명백히 쓸모 없는 퇴하부분에 있어서까지도 우리는 그 어떤 꼬리를 가지고 다니던 유인원(類人猿)으로 그 계보를 흝어갈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퇴화 품들은 수많은 척추동물 종족들을 만든 창조적 힘(혹은 하나님의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일반적, 혹은 기본적 계획을 입증해 줄뿐이다.
④ 모든 생명의 부류들과 질서들이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기계적으로 진화되어 갔다는 다윈의 이론을 현대의 과학자들이 포기해 버리면서 새로운 타입의 진화론, 즉 급속한 진화의 양자이론을 다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진화는 실험실에서 쓰는 방법론이나 설명과 같이 엄격한 기계론적 원칙들로써 증명을 도무지 할 수 없는 철학적 카테고리 안에나 끼워질 수 있는 급격한 변화와 돌연변이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다윈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지질학이나 생물학적 연구를 꾸준히 수 십 년만 하게 되면 수많은 종류에 목(目)과 문(門) 사이에 있는 그 갭(gab)을 메울 수 있는 인간상태의 생명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연구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신론적인 기초 위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즉, 다윈의 공식을 따라 자연적인 선택의 기계론적 과정을 받아들이든지, 혹은 새로운 진화론인 돌연 출현설에 집착을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물질은 영원하지 않으며(무신론자들이 가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무에서(ex nihilo) 창조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들은 모든 진화의 과정을 하나님께서 지배하시고 계획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과학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다윈의 주장과 같이 태초에 진화를 시작하게 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기독교적 계시를 완전히 부인해 버린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철학적 세계관으로서의 진화론은 영적 실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까지 반박해 버린다. 그 모든 주도적 사상가들은 결코 불확실치 않은 용어들을 구사해 왔다.


⑶ 인류의 고대성
유사 이전 인간의 화석과 유적들(古器物)을 1850년대 처음으로 발견한 후부터 인류는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는 이론이 창세기 기록과 조화를 이루는데 문제가 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소위 스완스콤 인간(Swanscombe man, 영국), 피세칸스포로스(Pithecanthropus, 자뱌), 시난스포로스(Sinanthropus, 중국) 등 은 약 200,000년 전으로부터 500,000년 전에 이르기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인류(Homo sapiens)와는 괄목할 만한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고생물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두개골과 치아의 차이들이…… 고릴라와 침판치 사이에 있는 유전인자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일반적으로 수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50,000년에는 100,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네안델타인(the Neandertal)에 대해서도 클락은 말하기를,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의 골격의 차이는 너무나 분명하며 그것은 다른 그룹의 영장류(靈長類)와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초기의 인간들은 그들의 생각구조에 넣어서 단순히 원숭이와 같다고 일축해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석기, 예를 들면 돌 화살촉이나, 돌도끼 머리를 가지고 살았을 뿐 아니라 숯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식사를 위해 불을 사용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베즈웰(Buswell)은 말하기를 “인간이 얼마나 오래 전에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성경이 시사하는 바는 없다.” 이 평가는 지나치다. 우리가 창세기 5장과 10장에 있는 연대표에 수많은 갭을 허락해 준다 하더라도 수 백세대가 여기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고 보는 것은 비합리적이다(그래도 이것은 아담이 B.C. 200,000년에 있을 수 있었겠다 는 것을 가정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마태복음 1:2-17에 있는데, 모두 42번의 계보 중(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약 2000년 동안) 오직 일곱 개의 가능한 고리가 빠져 있을 뿐이다. 혹은 비율로 따지자면, 약 1/6정도이다. 아담과 아브라함 사이에는 원래 1,980세대가 있었는데, 그 중 오직 19 혹은 20세대만이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그 기초가 너무나 약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B.C. 200,000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을 지극히 의심스럽게 볼뿐이다.
① 『웨스터 민스터 성경사전』은 창세기 5장과 10장의 족보에 대한 세 가지 가능성을 열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아무런 갭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세대를 말하는 것이라면, 아담으로부터 홍수까지는 총 1,656년이며, 홍수에서 아브라함의 탄생까지는 290년이다. 이것을 합하면 총 1946년이 된다(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이 해석은 모호하다. 이는 총계를 텍스트 자체가 언급하지 않으며, 홍수 이전 세대를 10세대로 그룹을 짓고 홍수 이후 세대도 그렇게 한 것을 보면, 마태복음 1장의 세 번의 14대를 만든 것같이 의도적으로 체계화한 것처럼 보인다(마태복음 1장에서도 여섯개 혹은 일곱 개의 고리가 빠져 있다). 더구나 누가복음 3:36에 있는 아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창세기 10:24에는 빠져 있다.
② 그 족보는 단지 아브라함의 조상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들만을 기록하고 실제로 기록된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가 빠진 것 같지는 않지만 상당수가 빠져 있다. 공식 “A가 B를 낳았다”는 것은 B자신이, 혹은 B의 조상 중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어떤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할아버지가 종종 손자를 낳았다고 말하는 히브리적 어투에서 충분히 허락이 된다. 빌하의 손자들이 그녀의 아들들이라고 역대상 7:13은 말하고 있다. 수세기를 살았던(약 900년, 혹은 그 이상) 족장들의 나이들은 그 개인들이 실제로 살았던 햇수로 보아야 한다. 이 견해는 아담에서 아브람까지를, 물론 어느 정도 고리가 빠져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어림잡아 5000년 혹은 6000년 정도로 본다.
③ 혹은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이름들을 한 개인과 장자법을 따를 그 직계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의 생애를 계속 더해 가기 때문에 아담의 탄생에서부터 홍수까지가 총 8,227년이 된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930년을 살았다고 할 때 그것은 아담과 그 직계가 선두에 서서 총 930년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 때가 끝날 때쯤 셋의 가문과 아담의 가문이 대체되면서 셋의 직계를 통해 912년을 다스리게 된다(창 5:8). 따라서 아담이 태어난 후부터 에로스가 지도력을 갖게 될 때까지는 1,842년이 된다. 이 이론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점은 추방된 가인을 제외한

다면 셋이 아담의 직계 중 장남으로 소위 셋의 방계가족이 실권을 잡기 전에 아담의 직계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지 추측을 할 수 없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두 번째 해석이 셋 중 가장 바람직한 듯하다. 첫 번째 해석은 물론 명백한 애굽의 역사와도 상치된다. 애굽은 최소한 B.C. 3500년에까지 거슬러 가며 그것도 홍수 후부터이다.
피세칸스토포스, 스완스콤인, 네안델탈인, 그리고 나머지들(크레마뇽인)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인류들을 아담 시대 이전의 종족들로 보며 아담의 언약에 동참하지 않은 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문화적 유적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아담 이전의 피조물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었는지(삼분법에 따르자면 영을 가졌는지)에 대해 계속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 1:26이 암시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질적으로 다른 존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창세기 1:26-27에 있는 “사람”으로 번역된 것이 히브리 원어로 ’Adam임을 주의하라). 아담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오직 아담과 그의 후손들만이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았고 하나님 자신과 같은 영적 속성을 물려받았다. 로마서 5:12-21은 모든 인류가 아담 이후에 생겨났으며 최소한 문자 그대로 그로부터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그가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안약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과(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첫 인간)아담 이전의 인류와는 아무런 유전 관계가 없음을 사사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크로마묭인의 골격이 호모 사피엔스에 아무리 가깝다 할지라도 이 동굴의 인간들이 참으로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은 현재 인류의 원조가 되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지만 하나님에 의해 멸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창세기 1:26-27대로 하나님의 영적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인간이며 과학은 이것을 부인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제 15 장

창 세 기(Ⅱ)

이 장에서는 만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창세기 안에서 특별히 문제시 되는 구절들을 집중적으로 토의하는데 목적을 둔다.

1. 아담의 역사성과 타락

우리가 아담과 이브(에덴동산에 있는 뱀)에 대한 기사를 문자 그대로 역사로 다룰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신화나 우화로 여긴다. 가상적인 이야기로서 인간의 도덕적인 타락을 드러내고자 기록된 것으로 그들을 본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역사적, 과학적, 혹은 철학적 기초 위에서 절정적이고 명백한 반박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것에 대한 비판들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서 5장의 권위를 결국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들어오고 그 한사람으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즉, 온 인류가 한 아버지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는 로마서 5장이 허구가 된다. 여기에서 아담은 그리스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하면, 아담 역시 그러해야 한다. 또한 바울은 창세기 2장의 기사와 창세기 3장에 있는 유혹과 시험의 사건을 문자적인 역사로 여긴다. 디모데전서 2:13-14에서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고 여자가 꾀임을 받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하였다. 또 한 가지 가능한 것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참된 기사가 구전에 의해서 모세 시대까지 전수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영감된 그 기록이 문자적인 아담과 이브에 대해서 말해 주며 그 기사가 신화적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알란 리차드슨과 같은 현대 저자들은 창세기 1-11장에 있는 설화 자료들을 신약성경의 비유에 비교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는 특징적인 서론을 가진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와 같다.”항상 거기에는 듣는사람에게 설명되어야 하는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었으며, 그 가르침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에화를 쓰곤 하였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에 있는 설화와 족보는 전혀 이같은 구조를 지니지 않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세상과 인류의 시작을 어떤 유사한 것과 같다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비유는 그 자체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유추를 가지고 나온다. 즉,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왕국과 같다”든지 “‘우주적 홍수는 우주적 홍수와 같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비유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므로 리차드슨의 해석은 지지될 수가 없다.

2. 노아의 방주와 홍수

창세기 6-8장에 있는 “대홍수”에 관해서 벨하우젠은 벨하우젠은 그럴듯한 근거하에 이것을 J와P로 나누었다는 것을 이미 지적 했다. 세계적인 대변혁이 있었다는 증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홍수가 세계적 성격을 지녔다. 레오나드 울리가 우르에서 발견한 두터운 홍수 퇴적층은 B.C. 4000년대

(B.C. 3800)로 추정되었으나 그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홍수 퇴적층은 스테폴 랭돈이 키쉬(Kish)에 발견한 거수 하나밖에 없다. 또다른 키쉬, 슈류팍, 우르, 라기쉬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고고학적인 유적과 퇴적층의 흐름에 따라 판단할 때 1000년 후에 범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 같다. 아직까지 위에서 언급한대로 B.C. 38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퇴적층을 발견한바가 없으나 키쉬에서는 B.C. 2800년대의 지층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죠지 라이트(George F. Wright)는 그 당시 인류가 유프라데스 지역에 제한되어 있었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전멸했기 때문에 홍수는 유프라데스 유역에만 제한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비추었다. 또한 그는 애굽과 팔레스타인, 시실리, 프랑스, 영국의 지질학적인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창세기 6:17에는 이렇게 해석되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죽으리라” 지리학적인 모든 영역들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또 창세기 7:9에는 “천하에 있는 모든 높은 산”(ASV)이라고 했다. 그러면 어찌 중동지역에만 해당되겠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난 세기의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ch)나 금세기의 루폴드(H.C. Leupold)와 같은 신중한 주석가들은 창세기 7장을 단순히 한 지역에 국한된 홍수로 해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램(Ramm)의 요약에 따르면, 우주적인 홍수를 반박하는 엄청난 과학적 문제들이 있다고 한다.
⑴ 히말라야 상봉을 덮으려면 현재 지구상에 있는 물의 8배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⑵ 그렇게 많았던 물이 없어지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이는 그것이 빠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물이 어떻게 없어졌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는 그 많은 물들이 대기 속으로 증발했다거나 땅의 지하로 빠져나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⑶ 모든 식물들이 1년간을 소금물 속에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아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바닷물과 빗물이 아주 희석하므로 물론 염두가 낮아졌겠지만 치사량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모든 바다의 생물들도 거의 멸망했을 것이다.
⑷ 프랑스의 오베르류에서는 원추형의 화산암 흔적과 재를 발견하였는데, 그것들은 홍수보다도 수 천 년 이전의 사건이었는 데도 홍수에 의해서 씻겨 졌거나 어떤 영향을 받은 증거도 없다.
아마 ⑴과 ⑶의 문제점들은 특별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및 재창조적 사역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⑵의 문제는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있음직 하지 않다. ⑷의 난제는 별 어려움이 안된다. 화산 폭발이 노아 홍수 이전에 있었다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정된 연대는 그 이전일 수가 없다. 혹은 화산암과 재가 물에 의해서 쉽게 처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홍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주 흥미로운 증거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지구의 양쪽 반구(hemispheres)에 있는 여러 흩어진 장소에서 땅이 깊이 금이 간 것을 찾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레윙클(A.M. Rehwinkel)은 그의 책 『홍수』에서 이 거대한 지구에 금이 간 자리들 가운데 어떤 곳은 상당히 높은 곳이고, 어떤 곳은 그 깊이가 140-300피트 정도나 되는 곳인데 여기에서 아주 이질적인 포유류 동물들을 찾았다고 한다. 완전히 뼈를 가진 동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 동물들은 이 구덩이에 산채로 죽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뼈들에게서 풍화작용의 현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들이 방해석(方解石)에 의해서 굳어졌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물 밑에 간직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어떤 학자들은 홍수로 말미암아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온 인류가 멸망했는지에 대해서 문제를 야기시켰다.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함, 셈, 야벳의 후손들을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종족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동물 군들을 살펴볼 때,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이미 오래 전에 분리되었음을 시사해 줌으로 그곳의 사람과 동물들을 방주에 있었던 사람과 동물들과 일치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노아의 가족들은 오직 거룩한 땅, 즉 근동, 중동 및 지중해 연안에 있는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한다. 이 제언은 성경의 증거를 비추어 볼 때, 3가지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로, 홍수 기사에 시사된 바와 같이 전 인류를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충돌이 된다. 창세기 6:7을 보면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

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또한 17절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여기에서 히브리어 ’ereṣ 를 지구라기 보다는 땅으로 번역한다 해도 전 인류를 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둘째로, 창세기 기사에서는 홍수를 보내는 그 이유가 인류의 죄악된 상황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 준다. 창세기 6:5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 11절은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며(히브리어, wattishshāḥēt̶패괴), 강포(ḥāmās̶상처를 입히는 폭행)가 땅에 충만한지라.” 오스트렐리아와 극동 아시아의 조상들이 중동에 있는 사람들 보다 도덕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수 심판에서 면해준 것 같지는 않다. 성경은 모든 인류가 정죄 아래 있다고 명백히 선언한다(예, 롬 3:19,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신약 복음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팔레스타인에 가까운 나라들과 먼 나라들을 구분하여 어느 쪽이 더 높은 도덕성을 지녔다고 말할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셋째로, 우리는 전 인류가 홍수 때에 전적으로 모두 다 멸망하였다는 신약성경의 명백한 확증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후서 3:6, “그때 있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한다. 베드로후서 2:5과 비교하라. “엣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 마태복음 24:38-39에 보면, 그리스도 자신도 노아의 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또 하나의 대단히 중요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지구에 있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 퍼져 있는 홍수에 대한 구전과 기록된 전통이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수메르인, 바벨론인, 앗수르인들은 히브리인들과 유사한 전통을 즐겼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홍수 이전의 문화가 꽃피었던 곳에 가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팀베우스』에 기록된 바, 애굽의 전설이나 마네로의 역본은 그 지형적인 설명이 비옥한 삼각주에 아주 유사하다. 류칼리온과 피라의 헬라 전통은 근동 아시아에서 빌려온 것 같다. 아파미아에 있는 노아의 전통 역시 그들의 주화에 방주를 새긴 것을 볼 때 이 대홍수 사건을 반영해 준다.
비평가들은 방주가 모든 동물들을 싫기에는 너무 작았다는 것 때문에 이 기사가 신방성이 없다고 한다. 한 규빗이 24인치라고 할 때 방주는 길이 600피트, 넓이 100피트, 높이 60피트의 규격이다. 그것이 상자모양으로 만들어 졌다고 할 때 그 용량은 3,600,000 피트 자승이 되며, 혹은 2,000마리의 차에 해당된다. 현재로서는 양보다 더 큰 육축으로서는 290종이 있다. 양보다 작고 토끼정도의 크기의 육축은 757종, 토끼보다 더 작은 것은 1,358종이 된다. 이 종둘이 한 쌍씩 이 방주 안에 편안히 들어가고도 사료를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많은 수의 동물을 수 개월 동안이나 먹인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 홍수가 오직 메소포다미아와 아랄―카스피안(Aral-Caspian) 저지에만 국한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 모든 종류의 동물 중 그 대표들을 보존하라는 명령과 상충되게 된다. 홍수가 세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동물들이 방주에 들어간 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된다.

3. 창세기 10장에 있는 열국들

언어학적인 관계를 살펴볼 때, 창세기 10장에 나타나 있는 여러 열국들의 족보와 고대 근동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는 괄목할 만한 불일치가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가나안이 함의 후손으로 6절에 소개되었으나 B.C. 2천년대의 가나안 인들은 서부 셈계 방언을 말했다고 한다(히브리어는 이것의 한 지류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종관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

자면, 독일계의 비시고트(Visigod)인은 스페인 어를 쓰게 되었고, 오스트로고트는 이탈리어를 쓰고, 독일계 프랑코족은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프랑스어를 로르만인들은 영국에서 영어를 쓰게 되었다. 이와 같이 B.C. 2천년 대에(3000-2001)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함족들이 그들의 언어가 무엇이든 지간에 셈어를 쓰는 이웃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가나인 들을 함의 후손으로 소개한 것은 모세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보존되었던 정확한 역사적 전통에 근거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가나안 인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시대로부터 셈어를 썼기 때문에(참고, 창 31:47) 가나안 인을 셈족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또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스바(Sheba)가(7절) 함과 셈(28절)의 후손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마 틀림없이 스바인들은 원래 함의 후손이었으나 점진적으로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셈족 이웃들과 혈연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주로 셰계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7절과 28절은 둘다 옳다.
8절과 10절에서 구스는 바벨론의 니므롯의 아버지로 소개되었으나 그의 이름은 에디오피아와 연관되어 있다(참고, 사 11:11, 겔 30:4, ASV 난외주). 이 나라는 애굽인들에게 K;š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아마 퀴쉬(Kūsh)로 불리었을 것이다. 6절에서는 그를 함의 아들로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지역임을 말해 준다. 이와 반면에, 아라바아의 알 암란(Al Amran) 부족은 에덴에 있는 제비드(Zebid) 지역을 퀴시(Kūsh)로 부른다. 또한 바벨론 근처에는 키쉬(Kish)로 불려지는 중요한 도시가 있는데 여기서 니므롯(Nimrod)이 나왔을 것이다. 이 모든 증거들을 종합하여 엉거(Unger)는, 힘계(系) 구스인은 원래 남부 메소포다미아에 살았는데 여기에서 니므롯은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거기에서 구스인들은 아라비아에 있는 예멘 지역까지 뻗치게 되고, 그 후 홍해를 건너 에디오피아(현대의 수단)를 침입하여 그들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바사인들이 카르다고를 점령하여 속국으로 만든 것이라든가, 노르웨이 출신의 노르만 인들이 프랑스의 노르만디, 영국의 색슨, 시실리의 무슬림을 정복한 것보다는 더욱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B.C. 7-6세기에는 헬라인들이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거주하였다. 어떤 권위 있는 학자들은 창세기 10장에 있는 구스가 애굽의 중간 왕국 때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경계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별로 알려지지 않은 큐수(Kushu)족이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조그만 부족이 창세기 10:7에 언급된 모든 나라들(대부분은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함)을 위협할 수 있었으며 그들이 원래 바벨론 저지에 살고 있었던 구스인들이 아니었다고 하면 어떻게 니므롯의 배경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 장에 있는 이름들과 악카드 비문에 나타난 것과의 사이에 아주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다. 야벳의 후손으로서 고멜은 기미리아(Gimirriya), 혹은 기미라이(Gimirrai)로 동일시되었고, 그들은 코카서스 주변에서 내려와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갑바도기니아에 거주하였다. 마다이(Madai)는 메대의 조상이었고 헬라의 야반(Javan)이었다. 두발(Tubal)의 후손은 타비리(Tabari)였는데 그는 약 B.C. 1100년에 디글랏 빌레셀 Ⅰ세와 싸웠고 메섹의 후예는 무슈키(Mushke)로서 9세기에 살멘에셀 3세와 전쟁을 하였다. 그들은 다 동부 소아시아에 살고 있었다. 마곡의 후손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었는지 현존하는 기록은 없다. 더라스(Tiras)에 관한 한 그는 투트세노이(Tursenoi), 티레니아(Tyhrrenis)인의 조상으로 알려진 것 같다. 그는 에게 지역에 처음으로 거주하게 된 펠라스기아(Pelasgia)인 이었다. 고멜계통의 아스그나스(Ashkenaz)는 아스쿠스(Ashkaz), 혹은 스키디안(Scythin)으로 확인되었는데, 그는 북쪽으로부터 코카서스를 거쳐 근동 아시아에 침략했고 앗수르인과 바사인과 헬라인들에게 무서운 숙적이었다. 리밧(Riphath)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도갈마(Togarmah)는 잠정적으로 남서부알메니아에 있는 테가람마(Tegarama)로 확인되었다. 야반 계통의 엘리사(Elishah)는 알라샤(Alashia)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구브로와 동일시된다. 그것은 또한 깃담으로 알려졌다. 달쉬스는 사르디나에 있는 지명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고 또한 스페인하고도 연결된다. 로다님은 아마 소아시아 북쪽에 있는 트로이 근처 지역인 다르나니와 연결되는 것 같다. 다르나나는 다르나니아 인들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역대상 1:7에 있는 평행 3절에 나타나는 바 로다님으로 쓰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분명히 로데 셈에 있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아브라함과 창세기 14장

⑴ 아브람(Abram) 이란 이름은 B.C. 2000년대 초기의 쐐기문자 기록에 나타난다.
⑵ 우르와 하란은 B.C. 21세기에 아주 번창한 도시였다.
⑶ 세겜과 벧엘은 그 당시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와 같이 요단 계곡에도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었다.
⑷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침입 국의 왕 이름들이 그 당시 인물과 일치하며,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타인까지의 원정은 방대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 엘람의 힘이 국제 세계에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⑸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사려고 하던 방법은 2000년대의 헷족속의 법과 일치한다. 엉거와 페인은 아브라함이 22세기에 태어나고 팔레스타인에 이민 온 것은 21세기 였으며 그 당시는 우르의 제 3왕조 때였다(B.C. 2070-1960)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함무라비가 시날 왕, 아므라벨 왕(창 14:1)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B.C. 1700년을 함무라비 통치의 중간시기를 잡는 학설이 나왔다.

5. 요셉과 힉소스

요세프스(A.D. 90년)로부터 힉소스 왕조가 애굽을 다스리고 있을 때 요셉이 바로의 궁전에서 일했다고 전해진다. 힉소스는 주로 셈족의 배경을 가진 자로서 아시아의 침입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목민 집단으로서 처음에는 북부 애굽에서 살기 시작하여 점점 무서운 힘으로써 남부 애굽까지 지배권을 뻗쳐가게 되었다. 멤피스를 정복한 후 수도로 정하였고, 제 15왕조와 제 16왕조를 세웠다. 마네토(B.C. 250)는 그들이 약 500년을 지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들이 150년 이상을 다스리지 않았을 거라는 증거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아마 B.C. 1900년 경에 애굽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B.C. 1730년 경에 애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연대기에 따르면(출애굽 연대를 B.C. 1445년으로 잡고 애굽에 거주한 것을 430년이라고 할 때)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일하고 있을 때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간 연대를 약 B.C. 1870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힉소스 왕조가 일어나기 전 94~140년 사이로 잡을 수 있고, 요셉은 제12왕조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와 같은 요소들은 요세프스의 전통이 신빙성이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힉소스인과 히브리인들은 둘다 가나안어를 쓰고 아시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호간의 깊은 연대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마네토 기록에 따르면 가장 초기의 통치가 중한 사람의 이름은 살리티스(Salitis)인데 그 이름은 셈어로 샬리트(shallit, 통치자)와 너무나 큰 유사성을 가진다. 셈계의 이름이 북부 애굽에 있는 몇몇 도시 이름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숫곳(출 12:37), 바알스본(출 14:2), 믹돌(출 14:2) 등이다. 따라서 바알스본이란 이름은 북쪽의 주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창세기와 출애굽기 1장의 본문은 요셉을 환영한 바로가 셈계통의 사람이 아니라 본토 출신의 애굽인이라고 명백히 사사한다.
첫째로, 애굽을 다스리던 왕조는 아시아 출신의 그 외국인들을 멸시하였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잔치석상에서 영접할 때 그는 그의 식탁의 손님으로 초대하기보다 그들끼리 않도록 하였다. 창세기 43:32에 따르면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힉소스의 통치자들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그들은 이미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고 있었고 또 그쪽 출신이었으며 애굽을 다스릴 때로부터 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에 이민을 온다든가 방문한 다른 셈계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이 구절에 제시한 바 같이 인종적인 편견을 가졌다기 보다 뜨거운 환영의 자세였을 것이다.
둘째로, 요셉 시대에 애굽을 다스리던 사람들은 목축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창세기 46:34은 이렇게 말한다.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애굽의 여러 문서들을 통해 충분히 확증되었다(그들은 그들의 항아리에 소는 그리지만 양은 결코 그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힉소스 출신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힉소스는 후대의 애굽인들에 의해 “목축하는 왕들”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 당시 보좌에 앉은 자는 본토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이 바로 앞에서 호감을 살려고 그들이 양치는 자들이란 것을 빼고 소를 소유했다고 강조했다(창 46:31-34).
셋째로, 죤 리(John Rea)가 소개한 바 같이 출애굽기 제1장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의 제 18, 혹은 제 19왕조라는 일반작인 가정과 절대로 조화될 수 없는 자료들을 제시한다. 이 증거들을 우리가 고려하기 전에 제 18왕조가 시작될 때 아모스 왕이 모든 힉소스 인들을 애굽에서 쫓아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그들을 팔레스타인에 있는 샤류헨 섬까지 추격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인들은 힉소스 인들의 친구요, 동맹 자이기 때문에 왜 그들도 쫓겨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어떤 근거 하에서 아모스 하의 민족주의적 애굽인들이 힉소스 인과 히브리인들 사이에 구별을 두었는가? 힉소스가 오랜 동안 다스리던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힉소스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갖고 애굽인들에 대해서는 좋은 태도를 가졌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넷째로, 출애굽기 1:8-10까지 있는 바로의 말은 본토 애굽출신 입에서 나온 말 같지 않다. 만약 이스라엘인이 애굽인 보다 많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힉소스 출신의 무사계급보다 많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왕이 생각한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 시기에 정부의 원수와 힘을 합하리라는 것은 이스라엘인이 애굽인 아닌 사람들과 힘을 합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센 땅이라는 격리된 곳에서 애굽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서 말한 자가 힉소스인이었다면 그 왕이 의미했던 바가 우리에게 이해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 때문에 애굽 사람들과 너무나 친하게 되었기 때문에 연합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은 힉소스 왕조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리고 그가 히브인들로 하여금 그의 건축작업을 위하여 노예로 삼고 일을 시켰을 것이다.
다섯째로, 이 마지막 대목에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는 출애굽기가 1:11에 언급된 라암세스의 도시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와 같이 라암세스에서의 강제 복역은 모세 출생 이전에 있었다. 이것은 다음 장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출애굽이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가정하는 바와 같이 B.C. 1290년에 일어났으며 모세가 그 당시 80세였다고 하면, 그는 1370년에 탄생한 것이 되거나 혹은 제19왕조의 라암세스가 애굽의 보좌에 앉기 전 약 60년 정도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일한 성 가운데는 라암세스 2세의 이름을 따라 세워진 도시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타니스 도시가 제18왕조 사이에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로운 점이 있다. 따라서 히브리어 기록의 정확성을 가정하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비둠과 라엠세스를 건축하게 한 것은 애굽의 제18왕조 초기가 아닌 힉소스 왕조였다는 것이다.


제 16 장

출 애 굽 기

명칭 : 히브리어 웨엘레 쉐모트(תומשׁ הלאו, Weēlleh shemōt) 그 뜻은 “그리고 이것들은~의 이름들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출애굽기 1;1의 첫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출애굽기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식케 하셔서 큰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속박의 땅에서 구속하시며, 한 국가의 단위로 그들과 은혜언약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그가 아브라함과 맺으신 옛 언약을 어떻게 성취시키겠는가를 연관시켜 설명한다.

1. 출애굽기 개관
Ⅰ.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사람의 훈련(1:1-4:31).
A. 모세의 배경 : 잔혹의 박해(1:1-22)
B. 왕자 됨과 초기 교육, 처음 40년(2:1-14)
C. 연단과 두 번째 40년(2:15-25)
D. 호렙 산의 소명(3:1-4:31)
Ⅱ. 승리의 은혜 : 속박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5:1-18:27)
A. 열 가지 재앙(5:1-11:10)
B. 구원의 여섯 가지 유형(12:1-13:22)
① 유월절 : 갈보리의 상징(12:1-13:22)
② 홍해를 건넘 : 신앙에의 돌입(세례, 14:1-15:27)
③ 하늘에서 내린 만나 : 생명의 떡(성찬, 16:1-36)
④ 갈라진 반석 : 생명의 물(17:1-7)
⑤ 르비딤 : 세상에 대한 승리를 맛봄(17:8-16)
⑥ 장로들을 세움 : 신앙의 교제를 위한 조직(18:1-27)
Ⅲ. 성결의 보증(19:1-31:18)
A. 언약의 약속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종, “거룩한 나라, 특별한 백성”(19:1-25)
B. 언약에 합당한 거룩한 삶의 기본 원리들 : 십계명(20:1-26)
C. 타인에 대한 행위에서의 거룩한 삶(언약의 책) : 3대 절기(21:1-23:33)
D.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거룩한 삶(성직과 제사의 형태 및 성막의 구조, 24:1-31:18)
Ⅳ. 인간의 실패와 죄에 대한 회개(32:1-33:23)
A. 반역, 배교, 우상 숭배 :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짐(32:1-35)
B. 회개, 징벌 및 모세의 중보기도(33:1-23)
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 제자를 통하여 계속되는 용서(34:1-40:38)
A. 은혜 언약에 재확인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34:1-40:38)
B.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들 : 안식일과 성막(35:1-19)
C.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려는 회중의 서약(35:20-39:43)
D. 주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형태(40:1-38)


2. 모세의 어린 시절

투트모스(Thutmose, B.C. 1539-1514) Ⅰ세의 통치기간에 태어난 모세는 그의 부모가 3달을 숨겨 키우다가 애굽의 학정에 못 이겨 아기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 강변에 버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바로의 딸이 발견하게 섭리하신다. 바로의 딸 핫셉슈트(Hatshepsut)는 모세를 물에서 건졌다하여 이름을 “모세”라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 왕자로 키우게 된다. 모세는 40년 동안을 애굽의 궁정에서 모든 학술(기하학, 천문학, 철자법, 문법, 역사, 의학 등) 을 배우게 된다.

3. 애굽의 체류한 기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체류한 기간은 430년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가나안과 애굽에 거주한 기간을 포함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출애굽의 가간이 215년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러므로 요셉의 일생을 힉소스 시대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215년 이론이 신빙성이 없음을 다음 몇 가지로 예를 든다.
첫째, 창세기 15:16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의 예언이 있는데, 그의 후손이 외국에서 압제를 당한 후에 “4대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절은 이방의 압제자들이 4백 년 동안 그들을 “괴롭히리라”고 하신 13절 바로 뒤에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에 100세에 낳았기 때문에 100세를 1대로 하여 4대가 된다.
둘째, 출애굽 세대에 있어서 눈에 띠는 여러 가계(家系)의 형태가 단지 3-4대만 연결되어 나타나지만(예를 들면, 출 6:16-20에 의하면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 10대 이상을 이루는 가계도 있다. 대상 7:25에는 요셉과 여호수아 사이에 9-10대 이상의 세대가 나타난다(에브라임―레바―레셉―델라―다한―라단―암미훗―엘리사마―눈―여호수아). 열 세대가 단지 215년과 일치될 수는 없으며(특히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긴 수명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그것은 430년의 기간과 아주 잘 맞는다.
셋째,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 70-75명이 200만 이상의(민 2:32에서 군대의 603,550명이라는 점을 판단해 볼 때) 나라로 증가했다는 사실이 215년 거주설에는 불합리하다.

4. 출애굽의 연대

열왕기상 6:1에 솔로몬 성전은 그의 재위 제4년, 즉 출애굽 480년 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47-1421)의 재위 제3년인 1445년으로서 출애굽의 정확한 연대가 될 것이다. 또한 사사기 11:26에 기록된 입다(Jephthah)의 기록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그는 길르앗 땅에 대한 자기들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암몬 족속들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그 땅을 오랜 동안 소유해 왔었다는 사실을 그 족속의 침입자들에게 일깨운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향촌들과 아로엘과 그 향촌들과 아르논 연안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한지 삼백 년이어 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입다의 시대는 분명히 사울 왕의 시대보다 더 앞선 때였으므로 이것은 확실히 이스라엘 정복의 연대를 B.C. 14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이 연대에 대해서 더 분명한 확증은 사도행전 13:19-20에 나오는 바울의 설명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멸하실 때에 그들의 땅을 450년 동안 기업으로 주시고, 이 일 후에 선지자 사무엘의 때까지 사사를 주셨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 기간은 출애굽 그 자체(히브리인들이 출애굽할 당시)와 여호수아 영도 하의 정복과 사무엘의 생애 및 995년 경 다윗의 예류살렘 성 정복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3장의 450년이 B.C. 1445년으로부터 995년까지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 연대를 현저히 후기로 잡는 것은 사도행전 13:19과 크게 모순된다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5. 계약과 십계명

십계명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그 계명의 규약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속행위로 설명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불순종에 대한 가장 엄중한 경고는 가장 풍성한 은혜의 약속과 결부되어 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사랑의 뚜렷한 요소가 5경의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도 신명기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대한 신자의 사랑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참되고 생명력 있는 신앙의 필수적이고도 불가피한 행위로서 거룩한 삶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런데 그 거룩한 삶 그 자체로써는 구원을 줄 수 있는 공로가 되지 못한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의 형식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신명기 5:15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부가적 동기부여이며, 제 10계명에서는 집보다는 아내가 먼저 언급된다. 신명기 5장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향한 훈계적인 강론 가운데서 나타나며, 반면에 출애굽기 20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다. 그러므로 후자가 정확하며 또한 본래적인 말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6. 성막의 영적 의미

출애굽기의 상당 부분이 성막에 대한 설계와 그 구조에 대한 여러 가지 조항을 기록하고 있다(25-28, 30, 35-40장). 이러한 조항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관계가 있는 모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성소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의미 깊은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① 뜰(hāṣēr, 하세르)의 바깥 벽은 폭 100규빗인데, 길이 50규빗으로 주변을 둘러싼다. 이 뜰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로 구별하며 또한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을 구분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동일한 원리가 나중에 솔로몬과 헤롯 성전에서 엄격하게 준수된다. 그 벽을 넘어 안뜰로 들어가는 모험을 시도한 어떤 이방인에게 죽음의 벌로 위협하는 헬라 비문이 발견되었다.
② 성막 자체는 가로, 세로가 10규빗(1규빗은 45.5cm) 되는 큰 천막(’ōhel, 오헬)이었으며, 그것은 성소와 지성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③ 장막 바깥뜰과 휘장문(māsāk, 마삭) 혹은 “바깥 휘장” 앞에는 큰 제단 혹은 놋으로 입힌 번제단이 있으며, 여기서 모든 제물, 즉 번제(zebāḥīm, 즈바힘)와 소제(minḥah, 민하)가 바쳐지는데, KJV에서는 “소제”를 고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④ 놋제단과 입구 휘장 중간에는 놋으로 만든 큰 세수대야인 물두멍(kiiyyōr, 키요르)이 있는데, 여기서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손을 씻어야만 했다. 이것은 아마도 세례로서 신자들에게 설명되고 보증이 된 그리스도의 보혈의 정결케하는 능력을 상징했을 것이다. 성막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다.
⑤ 성소(qōdesh, 코데쉬)는 가로, 세로 각 20규빗, 10규빗인데, 거기에는 세 가지, 거룩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십계명, 만나를 담은 항아리,<출 16:33>,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 17:10>).
⑥ 북쪽에는 떡상(shulḥān weleḥem pānīm, 슐헨 베레헴 파님, 임재의 떡)이 있는 데, 안식일마다 좋은 밀가루로 만든 새 떡 12개가 놓여졌다. 그것은 분명히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으며, 살아 있는 희생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한다.
⑦ 남쪽에는 일곱개의 등잔으로 된 등대(menōrah, 메노라)가 있었는데,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으며, 그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환전한 사역을 수행하시며,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증거의 빛을 밝히도록 하신다(슥 4장).
⑧ 서쪽에는 금으로 된 작은 단이 있는데, 향단(mizbaḥ miqtār, 미즈바 미칼)이라 하며, 이 단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 짖는 안 휘장 앞에서 분향하는 데만 사용되었다. 이 금향단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유효적인 기도를 상징했을 것이며, 또한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했다(계 8:3).

⑨ 안 휘장(pārōket, 파로케트)은 찢어져야만 했던(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처럼,마27:51) 그리스도의 육체의 장막(히10:20)을 상징했다.
⑩ 지성소(qōdesh qodāshīm, 코다쉬, 코다쉼)는 가로, 세로 10규빗으로서 그 속에는 언약궤와 속죄소가 있다.
⑪ 언약궤(תי??? ן??, 아론 하베리트), 이것은 길이 2.5규빗이며 넓이는 1.5규빗으로서 금으로 그룹 둘을 만들어 날개를 높이 펴서 서로 얼굴을 보게 덮개를 향하게 하였다.
⑫ 속죄소(ת???, 카포렛) 이것은 속죄한다는 뜻의 kippērp에서 나온 말이다. 특히 KJV는 “시은소”라고 번역했다. 대제장은 속죄 일에 여기서 피를 뿌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앞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했다(히 9:12). 그러므로 이 궤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으며, 이 궤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는” 하나님의 발판이었다(출 25:22, 시 80:1). 이 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출 16:33, 민 17:10)가 들어 있었다. 이것들은 나중에 그 속에 넣어진 것이 분명하다(히 9:4). 그러나 이 궤는 은혜 언약과 율법을 상징하는 십계명의 두 돌비를 담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사무엘 시대(삼상 6:19)나, 아니면 적어도 솔로몬 시대(왕상 8:9)에 그 궤 안에는 두 돌비만 남게 되었다.


제 17 장
레위기, 민수기

Ⅰ. 레위기

명칭 : 히브리어 와이크라(Wayyiqrā’, 그리고 그가 부르시고)로 책명을 정함. LXX은 “레위 지파에 관한 일”이란 의미로서 “류이티콘”(λευιτκόν )이라 한다.

1. 레위기 개관

Ⅰ. 제사법(1:1-7:38)
A. 번제(1:1-17)
B. 소제(2:1-16)
C. 화목제(3:1-17)
D. “부지불식간”의 죄에 대한 속죄제(4:1-5:13)
E. 속건제(5:14-6:7)
F. 번제 및 제사장의 제사(6:8-23)
G.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희생의 처리(6:24-7:27)
H. 요제 및 거제(7:28-38)
Ⅱ. 제사장의 헌신(8:1-10:20)
A.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헌신(8:1-36)
B. 대제사장 아론(9:1-24)
C.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10:1-20)
Ⅲ. 오염에서의 분리(11:1-15:33)
A.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11:1-47)
B. 산모의 정결 규례(12:1-3)
C. 문둥병에 대한 규례(13:1-14:57)
D. 분비물로부터의 정결(15:1-32)
Ⅳ. 속죄일(16:1-34)
Ⅴ. 제사의 장소 및 피의 고결성(17:1-16)
Ⅵ. 실제적인 거룩 : 부정(不貞), 불결, 우상숭배를 금지한 율법(18:1-20:27)
Ⅶ. 제사장의 거룩과 제사장의 의무(21:1-22:33)
Ⅷ. 거룩한 집회들 : 안식일,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23:1-44)
Ⅸ. 헌신의 상징들과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24:1-23)
Ⅹ. 안식년과 희년(25:1-55)
Ⅺ.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26:1-46)
Ⅻ. 서원과 십일조(27:1-34)

2. 레위 입법에 기본 원리

레위기에서는 모세나 아론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38번이나 열거된다. 이 말은 그만치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과, 모든 제사 제도가 히브리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레위기 26장에는 이스라엘이 믿음에서 떠나 점차 배교하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과 다시 귀환할 것(32-45절)을 암시함으로써 차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고한다. 레위기 전반에는 5가지 기본 원리가 있다.
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 거룩을 지켜야 한다. ㉡ 대속의 속죄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이는 죄인의 멸망해야할 생명을 대신하여 무죄한 생명이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은혜로만 가능하다. 예배의식에 대한 모든 규례나 제사는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③ 거룩한 백성은 영적으로 여호와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결혼의 결속에 대한 모든 위배사항과 모든 성적 음란을 엄격히 금해야 한다. 그들은 더럽고 썩은 것에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④ 부패하지 않거나 속히 부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이것은 누룩, 젖, 꿀, 돼지고기, 여러 가지 재료로 섞어 짠 천(아마나 양털 등) 등을 제외시켰는데, 이러한 것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혼합시키는 것을 상징했다.
⑤ 거룩한 해(年) 거룩한 숫자인 일곱으로 나타냈다. 그래서 ⓐ 일곱째 되는 날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 일곱째 되는 해는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이며, ⓒ 칠 년이 일곱번 지난 쉰 번째 해는 희년으로 거룩하게 했다. 희년에는 저당된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했다. ⓓ 유월절은 아빕 월(Abib)의 두 번째 일곱째 날인 제14일 밤에 지켜졌다. ⓔ 무교절은 그 다음 칠 일 동안 거행되었다. ⓕ 오순절은 곡식 단을 흔드는 제사를 지낸 후에 거행되었다(즉, 50일 째 날). ⓖ 제7월 즉 티시리 월(Tishi)은 세 가지 거룩한 관례로 인하여 특히 신성시되었는데, 그것은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등이다. ⓗ 초막절은 7일 동안 거행되고 마지막 집회를 위하여 제8일을 추가하였다.

3. 히브리력의 세 가지 주요 절기

A. 유월절(pesaḥ, 페사흐)과 무교절(maṣṣōt, 마쏘트) (4-5절)
1. 유월절 : 아빕월(5월) 제15일 밤
① 목적 :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함.
② 의식 : 어린 양을 죽이고, 그 피를 우슬초로 인방에 뿌리며, 그리고 나서 그것을 가족과 함께 구워 먹는다.
③ 모형적 의미 : 그리스도의 십자가(고전 5:7)
2. 무교절 : 아빕월 제15일부터 22일까지(6절)
① 목적 : 출애굽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발효시키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 실한 헌신을 상징한다.
② 의식 : 둘째 날(즉, 아빕월 제 16일)에 단의 첫 열매를 바치는데, 그 단은 그 해에 추수한 보릿단이다. 또한 이 단과 함께 번제도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다. 제15일과 22일은 성회로 모이는데, 그것은 안식일이며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다.
B. 오순절 혹은 칠칠절(shebū’ōt, 슈브오트) : 시반월(3월) 제6일 혹은 보릿단 바친 후49일째 날.
1. 목적 : 추수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
2. 의식 : 성회로 모임. 요제를 드림(누룩을 넣은 밀가루로 만든 떡둘), 번제를 드림(어린양 일 곱, 수소 하나, 수양 둘), 집회 시에 번제와 속죄제를 추가함(민 28:27).
3. 모형적 의미 : 신약 교회에 성령께서 강림하심(행 2장).
C. 장막절 혹은 초막절(sukkōt, 수코트) : 티시리 월(7월) 제15일부터 22일까지.
1. 목적 : 광야를 방황한 것을 기념하며, 모든 추수를 마친 것을 즐거워하기 위해.

2. 의식 : 제15일과 22일에 성회로 모임, 번제를 드림(매일 수소 7-13마리, 수양 둘, 어린 양 열넷), 속죄제를 드림(수염소 하나), 초막에 거함, 한 손에는 에트로그 혹은 시트론을, 다른 손에는 룰랍(lulab) 혹은 과일 다발(무화과와 버드나무로 만든)을 들고 찬양함.

피 제사의 6가지 차이점


Ⅱ. 민수기

명칭 : 히브리어 베미드바트(Bemidbār, 광야에서)이며, LXX은 아리쓰모이(Arithmoi)이다.

1. 민수기 개관

Ⅰ. 시내 광야에서 시작되는 여행 준비(1:1-10:10)
A. 군대의 계수와 행군의 위치 지정(1:1-2:34)
B. 레위족속의 계수와 임무(3:1-4:49)
C. 진에서 불결을 몰아냄 : 문둥병 규례, 손해 배상, 피소된 간부에 대한 재판(5;1-31)
D. 나실인(전 생애를 헌신한 모형), 축도(6:1-27)
E. 열 두 지파가 성막에 바친 예물들(7:1-89)
F. 레위 지파의 성결과 직무의 위임(8:1-26)
G. 첫 유월절을 지킴(9:1-14)
H. 구름 기둥과 나팔신호(9:15-10:10)
Ⅱ. 시내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10:11-14:45)
A. 여행의 첫 단계 : 행군이 시작되다(10:11-36)
B. 다베라와 기브롯 핫다와에서의 불평(메추라기),칠십인 장로의 예언(11:1-35)
C. 모세를 대적한 아론과 미리아메 대한 심판 : 미리암의 문둥병이 치료 됨(12:1-16)
D. 열 명의 장탐꾼의 보고 이후 가데스에서의 큰 반역(13:1-14:45)
Ⅲ.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 광야까지(15:1-21:35)
A. 소제와 속죄제의 규례, 신성모독자와 안식일 범한 자에 대한 죽음, 옷에 다는 술(15:1-14)
B. 고라의 반역과 아론의 제사장 직임의 정당성(16:1-17:13)
C. 레위족과 제사직무와의 관계, 제물과 가난에서의 그드르이 몫인 십일조(18:1-32)
D. 부정한 것을 정결케하는 물(19:1-22)
E. 미리암의 죽음, 반석을 두 번침, 에돔족이 통과를 반대함,아론의 죽음(20:1-29)
F. 일곱번째 불평과 구리뱀, 모압 도착(21:1-20)
G. 첫 정복 : 시혼과 옥의 패배(21:21-35)
Ⅳ. 모압 족속과 발람의 만남(22:1-25:18)
A. 발락이 발람을 고용함(22:1-14)
B. 발람의 세번의 축복과 이스라엘의 승리 예언(23:1-24:25)
C. 바알브올의 죄(25:1-18)
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26:1-36:13)
A. 정복 계획과 땅의 약속(26:1-27:23)
B. 제사와 서원에 괸한 율례(28:1-30:16)
C. 미디안 족속에 대한 복수(31:1-54)
D.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에게 요단 이편의 분할 분배(32:1-42)
E. 애굽에서 모압까지 여정 요약(33:1-56)
F. 가나안 분할 계획(34:1-36:13)

2. 기본적 원리
가나안을 정복한 젊은 세대는 그들의 부모의 경우보다 수가 더 적었지만 그들의 믿음이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던 것과 행군 질서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씀이 실나게 하는 것이다.

3. 인구 계산의 신빙성

합리주의자들은 민수기의 통계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라고 항상 반대 해왔으며, 그것을 흔히 제사장학파의 날조라고 취급하였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 없는 가설은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진정성이 결핍된다. 민수기 1:46에 나오는 603, 550 이라는 수가 평균 다섯 명을 가진 처음의 603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3,015명이라는 남자의 인구가 엄청난 숫자로 인하여 애굽 왕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출애굽기 1:9에 바로가 한 말이 나온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이 견해의 주장들은 엘렙(’elep)을 “가족복합제”(family complex)나 “씨족”으로 이해하여 군대에 참전한 숫자를 다섯명이라기 보다는 오십 명까지 높였다. 그러나 이렇게 계산한다고 해도 사람이 거주하는 애굽의 삼각주 중앙에 사는 상당수의 인구에 가까스로 해당되는 30,150명의 전투력이 될 뿐이다. 더욱이 출애굽기 12:37과 같은 J문서의 구절조차 민수기 1:46 (600,000)과 거의 같은 수를 기록하며 또한 J―E문서로 알려진 민수기 11:21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확실한 것은 출애굽기 38:25 에 기록된 100달란트 1,775세겔이라는 속전 ―1인당 반 세겔씩― 의 총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민수기에 나오는 엘렙이 문자 그대로 천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그 어떤 객관적인 본문해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민수기에 기록된 인구조사가 군대의 수를 60만 보다 적은 수라고 하는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양보하더라도, 그렇게 엄청난 이주민(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약250만)이 시내 광야에서 40년간 살아 남을 수 있었으리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시내 반도가 현재보다도 덜 메말랐었다고 여긴다 해도(왜냐하면 출 17:8에 나오는 아말렉 족속과 같은 크고 강한 종족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 엄청난 소떼와 양떼가 경작지가 없는 광야에서 양육된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인 반대 주장에 대해 대답할 때, 이스라엘의 이주에 대한 모든 기사는 자연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물리적인 불가능이었다는 점을 명백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세의 역사를 회고하는 히브리 문학(시 78:24, 느 9:20 등)에서와 같이― 그런 큰 무리를 지키심은 하나님의 기적적이며 초자연적인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게 된다. 만나를 내리시며(출 16:35),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출 17:6), 모든 무리에게 공급하기에 넉넉히 내려준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어떤 기적과 같이 명백하고 확실한 기적의 기록이다. 합리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는 절충할 수 없는 철학적 편견을 성경에다 강요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250만 명의 무리가 행군대열을 갗추는 데에 거의 온 종일이 걸릴 것이며, 그러므로 해가 질 때까지 한 마일도 전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민수기 33장 등에서는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행진대열을 구성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의 길이는 전적으로 대열 그 자체의 형태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들이 대로의 경계를 지켰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는데, 이는 그들이 주로 사람이 살지 않은 땅을 거쳐 이동했기 때문이다. 각기 약 50만이 되는 네 개의 군단(민10:14-20) 그들의 대열을 일제히 구성하고, 또한 4시간 내에(예를 들면, 오전 6시에서 10시까지) 행군준비를 갖추며, 그리고 다시 진을 치기까지의 4시간 동안에(거기에 또한 2시부터 6시까지의 4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족히 10마일을 가게 하는 데엔 아주 적합했을 것이다.
민수기 3:43에 나오는 처음 난 자의 수가 60만 명이 넘는 성인 남자에 비할 때 너무 많다고 하여 민수기 기록의 신빙성에 반론도 있었다. 사실상, 한 가족마다 남자나 40명 이상씩 있지 않은 이상 그렇게 큰 집단에 처음 난 자가 22,273명 이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딜리취(Delitzsch)가 지적한 바와 같이(Pentateuch, 3:9-13), 이 주장은, 처음 난 자를 거룩히 하라고 요구했던 율법(민 3:46-47)은 소급해서 계산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그 본문에서는 출애굽 사건과 인구조사가 실시되던 때인 이 사건(13개월 후의)사이에서 태어난 자 외의 어떤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는 시사를 하지 않는다. 성인 남자의 수를 603,550명으로 잡는다면, 20-30세의 남자의 수는 약 190,000명 내외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해마다 새로 결혼하는 수가

평균 약19,000명이 되는 셈이다. 이런 숫자에 비추어 볼 때, 그들 중 대부분은 18개월 동안 두번 임신할 것이며, 즉 남자 22,000명을 초과하는 수가 태어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다.
또다른 반대주장이 있다. 민수기 11:31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가 내렸다는 사실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2규빗 높이로 땅에 쌓인 메추라기의 양은 이스라엘의 70,000끼 분의 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 본문은 메추라기가 2규빗 높이의 무더기를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고, 몰아치는 바람이 메추라기를 지면에서 2규빗(약 3피트)의 높이로 내려오게 하여 고기에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이 쉽게 그것을 잡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한다.
문서설의 비평가들은 모세의 저작권에 대해 반론하기 위하여 많이 인용하는 “본문의 증거”에 대하여 한마디 말을 한다. 모세가 민수기 12:3을 자신에 대해서 기록했을리 없다는 것이다(“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만약 모세가 참으로 온유했다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이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New Bible Commentary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성령의 영감 아래서 글을 쓰는 모세는 자신의 죄와 약함을 가장 분명한 말로 기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자신의 강한 점, 온유함 등을 또한 기록하지 않았다면 성경은 그 놀라운 객관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 절의 내용]은 이 장을 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델리취는 이렇게 주석 했다. “이 말은 당시의 모든 상황을 충분하고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필요블가결하고, 또한 모세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성격에 대한 언급이므로 아주 객관적이며, 소명의 순간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그가 변질하지 않았음을 간절히 논술하는 기사이다.” 그리고 나서 델리취는 계속해서 칼멧(Calmet)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자만심 없이 자신을 칭찬하듯이, 다른 곳에서는 겸손하게 자신을 나무랄 것이다.”


제 18 장
신 명 기
명칭 : 히브리어 하더바림(םי????, haddebārīm)은 “그 말씀들”이라는 뜻이며, LXX은 듀테로노미온(Deuteronomion)이라 하여, “제2의 율법”, 또는 “두 번째 율법수여”라고 하였다.

1. 신명기 개관

Ⅰ. 첫째 담화 : 역사적 서언(1:1-4:49)
A. 호렙에서 모압까지의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인도하심(1:1-3:29)
B. 새 세대가 율법 지키기를 훈계 받음(4:1-40)
C. 요단 이편의 도피성에 대한 약속(4:1-40)
D. 이담화의 역사적 배경(4:44-49)
Ⅱ. 둘째 담화 : 이스라엘이 사랑해야 할 율법(4:44-26:19)
A. 기본적 계명들(4:44-11:32)
① 십계명과 후손에게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사랑(5:1-6:25)
② 신실한 순종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계속적인 감사의 기억(7:1-11:32)
B. 예배와 거룩한 생활에 대한 법규(12:1-16:22)
① 참된 예배와 우상숭배를 막는데 필요한 규약들(12:1-13:18)
② 음식, 안식일, 절기에 대한 규례들(14:1-16:22)
C. 재판 : 특별한 범죄에 대한 처리(17:1-26:19)
① 우상숭배로 인한 죽음, 상고절차, 왕의 책임(17:1-20)
② 마술과 거짓 예언에 대한 벌(18:1-22)
③ 우연한 살인을 위한 도피성, 협잡과 위증에 대한 벌(19:1-21)
④ 전쟁과 공격에 대한 규칙들(20:1-20)
⑤ 시체 돌보기, 포로된 여인, 상속과 가정교육, 나무에 달린 시체처리(21:1-23)
⑥ 잃은 소유물에 대하여, 이성(異性)의 옷을 입지 말 것, 종자나 동물을 혼합하지 말 것 ⑦ 결혼, 순결, 몸조심, 정결에 대한 규례(22:13-24:5) (22:1-12)
⑧ 경제 및 사회정의에 관한 규례(24:6-25:19)
⑨ 관리업무, 성물, 십일조의 규례(26:1-19)
Ⅲ. 셋째 담화 : 경고와 예언(27:1-31:30)
A. 에발 산에서 율법이 기록되고 그 규례가 암송되어야 함(27:1-26)
B. 국가에 대한 축복과 징계의 조건(이스라엘에 임할 미래심판의 예언)(28:1-68)
C.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회고, 믿음에의 권고(29:1-30:20)
D. 기록된 율법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위임함(31:1-20)
Ⅳ. 모세의 노래 :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32:1-30)
Ⅴ. 마지막 임무와 고별(32:44-33:29)
A. 모세의 마지막 권고(32:44-47)
B. 모세의 죽음의 가까움을 알리심(32:48-52)
C. 이스라엘 각지파에 대한 모세의 마지막 축복(33:1-29)
Ⅵ. 모세의 죽음과 그의 사망에 대한 기사(34:1-12)

2. 신명기의 기본적 원리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마음에 율법을 진지하게 부과하려는 것이며,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실하게 응하기를 그들에게 강력히 요구하려는 것이다. 다음은 특별한 강조점이다.
① 하나님의 영성(靈性)과(4:12,15,16) 그의 유일성 및 통일성(4:35,39;6:4;7:9;10:17)이 설명됨.
② 언약으로 맺어진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법률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사랑의 관계이다(4:37;7:13;33:3).
③ 믿는 자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 사랑은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된다(6:5;7:8;10:12,15;11:1,13,22;13:3;19:9;30:6,16,20).
④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우상숭배로서, 이것은 아주 엄하게 다루어지고 금지되었다(6:14,15; 7:4; 8:19,20; 11:16,17,20; 13:2-12;30:17,18).
⑤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들의 긴밀한 관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야 한다(7:6; 26:19; 28:9). 이 거룩은 부정한 음식을 금하게 하며, 희생예배는 정해진 성소에서 행하도록 제한하였다. 또한 이 거룩은 이웃에 대한 사랑 및 가난한 자와 특권이 없는 자들9과부, 고아, 레위인, 외국인)을 돌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⑥ 언약에 대한 신실성에는 물질적 축복이 약속되었으나 언약에 대한 무시나 위반에는 물질적 재난, 손실, 궁극에는 포로의 형벌이 주어지리라고 했다(28-30장).
⑦ 독특한 훈계가 이렇게 나타난다. “기억하라, 그리고 잊지 말라!” 옛것에 대치시키려고 “새로운 진리”에 대한 어떤 연구를 착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데, 이는 모든 것이 절대자이시며 또한 변함없는 진리의 근원 되시는 분에게서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신명기의 모세 저작권

신명기의 고등 비평에 대해서는 7장에서 이미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신명기의 편집에 대해 문서설자들이 주장한 B.C. 621년 설은 벨하우젠의 시대 이후로는 많은 합리주의적 비평가들에 의해 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이런 20세기의 학자들은 신명기의 기원을 요시야 통치 시대로 보는 드 베테(De Wette)의 이론이 본문 자체가 말하는 내적 증거와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난 20여년 동안, 2천년대 후반 헷족이 지배하던 시대에, 피지배국의 왕들과 정복군주 사이에서 체결된 종주권 조약의 구조에 대한 방향으로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메레디트 클라인(Meredith Kline)이 지적한 것처럼, 헷족 시대의 전형적인 종주권 조약서는 다음 사항들로 구성되어 있다. ⑴ 서문(신 1:1-5), ⑵ 역사적 서언(신 1:6-4:49), ⑶ 법조 항들 혹은 주요 조항(신 5-26장), ⑷ 저주와 축복(신 27-30장), ⑸ 계승조약 혹은 언약의 연장 증거를 요청하며, 본문을 보관하여 회중 앞에서 조약을 정기적으로 읽는다(신 31-33장). 이 2천 년대의 “언약양식은 하나의 출발점으로서는 더욱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B.C. 2천 년대의 거대한 제국의 멸망 후까지 남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옛 형태는 통일 왕조 이후에는 더 이상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보수주의 견해 : ⑴ 신명기는 B.C. 8세기의 성경기록 선지자들(the writing prophets)이 나타나기 이전에 기록되었음이 틀림없다. ⑵ 그것은 또한 히브리 왕조가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B.C. 931년보다 앞선다. ⑶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했던 거의 그 시대와 가장 잘 조화된다. 맨리(G.T. Manley)는 이 증거를 훌륭하게 검토해 왔는데, 본문 자체의 연대는 모세 후기의 기원설을 배제한다고 강력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오늘 날과 같으니라”(kayyōwm hazzeh)라는 표현인데, 예를 들면 2:30에 나타난다. 이 구절은 모세 시대 이후 많은 기간, 분명히 여러 세기가 경과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 왔다. 모세가 모압 광야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에게 연설할 때로서, 모세 시대의 마지막 때의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 두 번째,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절은 “요단 저편”으로서, 그것은 요단 계곡 동편을 말할 때 나타나는 말이다(1:1). 만약 이 책이 정말 모압 땅에서 기록되었다면, “요단 저편”(‘ēber hayyardēn, 에벨 하야르덴)이라는 말은 가나안 땅에 대해서만 적합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그것이 르우벤과 갓 지파의 땅인 길르앗의 동편에 대한 말이라는 사실은 본서의 저자가 유다나 이스라엘 땅에 살았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추론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상, 에베르 하야르덴이라는 말은 요단 서편에 대해서도 때때로 언급되는데, 적어도 세번은 나타난다(3:20,25; 11:30). 이것은 모압 광야에 있던 모세와 같이, 동편에 거주하는 어떤 저자를 가리킬 것이다.

4. 8세기의 선지자들보다 신명기가 앞선다는 증거

신명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명칭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Yahweh the God)이다. 만약 이 책이 7세기나 그 이후에 기록되었다면, 이 책에는 그 앞 세기에 고전적 히브리 신학을 체계화시켰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의 신학적 용어가 방영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요시야와 동시대인 예레미야의 사역기간 중에 가장 유행되면 하나님의 명칭을 반영했어야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 통계는 전혀 그와 반대인 것을 보여준다. ⑴ 호세아서에서는 엘로힘(םי???, ’elōhim)이 15번, 여호와가 35번 나타나는데 비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겨우 네번만 나타난다. (2) 이사야 1-35장에는 “만군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는 매우 자주 나타나는데 반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겨우 세번만 나온다. (3) 예레미야는 독특하게 “만군의 주”(만군의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가끔 신명기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사실은 포로 후기의 선지자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만약 신명기가 포로 직전인 요시야 시대나 혹은 포로 후기인 에스라 시대에 쓰여졌다면, 이 두 시대에 유행하지 않던 하나님 명칭의 사용을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신명기에서는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포로 전후의 선지서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명칭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출야굽기 3: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에서 나타나고 출애굽기 15:2과 18:4에도 나타난다.

5. 왕국의 분열보다 신명기가 앞선다는 증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여러 종족들을 언급한 방식이다. 만약 신명기가 B.C. 931년의 왕국분열 이후에 쓰여졌다면, 그러한 분열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가 본문에 나타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 종족이 분열된 존재로 묘사되지만 모두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나라에 있었던 것이다(1:13,15; 5:23; 12:5,14: 29:10; 31:28). 이 구절들에게서 저자는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의 분열을 인식하고 있었다고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6. 가나안 정복보다 신명기가 앞선다는 증거

신명기에는 계층부분이 없으며, 사회적 상황은 바벨론의 경우에서 보다 훨씬 더 시골답고 농업적인 공동체의 상황과 조화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세의 입법은 깊은 종교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법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법으로 말해지며 이스라엘은 그것을 전심으로 준수해야 했다. 신명기 12-26장을 이루고 있는 346절에 대해 살펴보면, 반 이상이 도덕적 종교적인 성격의 내용이며, 93절은 그 땅에 정착하는 일에 관계되는 특정한 명령을 다룬다. 신명기 속에서 매우 특정적인 내용이 권고, 경고, 축복의 약속 등이 바벨론 법전에서는 완전히 빠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복잡한 법질서에 사용되었을 것 같은 엄격한 문체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비교적 도시화된 사회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연로하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여러 해 동안 자신이 개인적으로 지도해 온 백성들에게 하는 말과 또한 그들이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경험을 그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우리가 듣는 듯하다.
이스라엘의 신앙보존에 관한 신명기에 나타난 입법의 형태와 요시야 시대 사이의 모순을 우리는 다시 한번 회상한다. 신명기 13:1-18과 17:2-5은 신앙을 떠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또한 그것은 여호와가 세운 나라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므낫세(요시야의 조부) 시대에 그러한 법들이 만들어 졌다거나 부활되었다 생각하기는 어렵다. 요시야 개혁과 관련해서는 이에 대한 실제적 언급이 없다. 드라이버(Driver)까지도 “그것들이 강력히 시행되던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상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위너(H.M. Wiener)가 지적한 것처럼, 이상주의 자들은 일반적 기초 위에서 고상한 기준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에의 침해를 다루기 위한 절차를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신명기의 이러한 구절 속에는 대단히 명확한 절차가 규정되어 있는데, 13장에서는 특히 초기의 상태를 가정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 수여자는 이 율법의 규정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것이 전쟁을 유발한다 할지라도 국가 전체의 협동에 의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신명기 12:2-4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 하고”가나안의 모든 신당을 파멸하라고 명한다. 분명히 저자는 이러한 신당파괴가 저자의 시대에 실제로 있었으며 가능했던 것으로 간주했다. 여호와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먼저 그 땅에서 그러한 우상숭배의 상징들을 제거해야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자세는 B.C. 7세기나 솔로몬 이후 시대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에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계층에는 우상숭배가 만연되어 있었다. 왕조제도가 성립되기 이전 시대에 속하는 사사기의 기록에도 이러한 신명기적 조항의 존재가 암시된다. 따라서 바알의 단과 그 구역을 부수어버리는 기드온의 행위(삿 6:25-32)는 그가 그러한 계명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또한 이 행위에 대한 아버지의 변호는 그가 그의 아들의 행위가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제 19 장
여호수아서, 사사기, 룻기

Ⅰ. 여호수아서

이 책의 명칭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중심 인물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었다. 본서의 주제는 세상을 정복하며, 약속된 기업을 위하는데서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불가학력적인 힘에 관한 것인데, 약속된 그 기업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며, 그 분과 맺은 언약관계를 깨뜨리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지 않을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1. 여호수아서 개관

Ⅰ. 땅의 정복(1:1-12:24)
A. 여호수아의 거룩한 임무(1:1-9)
B. 요단 강을 건너기 위한 준비, 정탐꾼이 라합에 의해 구조됨(1:10-2:24)
C. 요단 강을 건넘(3:1-4:24)
D. 길갈에서의 할례(5:1-15)
E. 여리고 정복, 승리의 확신(6:1-27)
F. 아이에서의 실패, 죄를 제거함, 궁극적 승리(7:1-8:29)
G. 에발 산의 제단, 율법을 엄숙히 낭독함(8:30-35)
H. 교활한 기브온 족속과의 동맹<세상에 처음으로 말려듬>(9:1-27)
I. 남쪽 가나안의 정복, 기브온의 전투(10:1-43)
J. 북쪽 가나안의 정복(11:1-15)
K. 여호수아의 전투 요약(11:16-12:24)
Ⅱ. 기업의 분배(13:1-22:34)
A. 분할에 관한 여호수아의 교훈(13:1-7)
B. 요단 강 동쪽 지파에 대한 할당(13:8-33)
C. 요단 강 서쪽 지파에 대한 할당(14:1-19:51)
D. 도피성에 관한 약속(20:1-9)
E. 레위 지파의 성읍에 관한 약속(21:1-45)
F. 요단 강 동쪽 지파가 그들의 땅으로 떠나감(22:1-34)
Ⅲ.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수아의 마지막 임무(23:1-24:33)

2. 저자 및 저작 연대

이 책은 여호수아 자신에 의해 쓰여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단일 저자에 의해 끝까지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여호수아가 직접 기록하였다(24:26). 그러나 본서에 포함한 갈렙의 헤브론 정복(15:13-14; 삿1:1,10-20), 웃니엘의 드빌 정복(15:15-19; 삿 1:1, 11-15), 단 지파의 레센 정복(19:47) 및 여호수아의 장례 기사(24:29,30) 등의 기사는 모두 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발생한 일로서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여호수아가 생전에 남긴 본서의 주요부분에 이를 첨가하였다.
본서에 집필 연대도 일단 그 주요 부분의 경우는 여호수아 말년인 B.C. 1390년 경이지만 기타 추가된 부분의 연대는 그 이후로 추정된다. 그런데 본서에서 시돈이 큰 성읍(11:8; 19:28)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두로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은 점을 볼 때 두로가 아직 큰 성읍으로 성장하기 이전인 B.C. 12세기에 본서의 추가부분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들이 옛날 이름인 ‘시돈 사람’으로 호칭되고 있는 점도 B.C.12세기 저작설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볼 때 본서는 그 주요 부분은 B.C. 1390년 대에 완성되고 추가 부분은 B.C.12세기 이전 그리고 블레셋이 팔레스틴 땅을 침입하기 시작한 이후에 추가되어 최종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대부분 학자들은 그 최종 완성 연대를 웃니엘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대(B.C. 1370-1330년)의 말기로 보고 있다.

3. 텔 엘 아마르나 서신

1887년에 우연히 아멘호텝 4 세(Amenhotep Ⅳ)의 옛 수도였던 아케타톤(Akhetaon)의 자리에서, 고대의 외교서신 문서를 완전한 묶음으로 발굴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점토 비문에 바벨론 설형문자로 쓰여졌는데, 이 문자는 애굽 제 18왕조 시대에 국제적 서신 왕래에 사용되던 언어였다. 콘더(C.R. Conder)는 이 비문 내용에 대한 예비조사에서 그것은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을 정복한 것과 관계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가나안 번역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1890년 그는 “히브리인의 승리의 기념비적 계시”라는 논문을 소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 서신왕래 문서에 집중시켰다. 같은 해에, 짐머른(H. Zimmern)은 단언적으로 주장하기를, 아마르나의 서신에서, 우리는 정말 히브리인의 가나안 침공에 대한 바로 그 당시의 기록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얻었다고 했다. 이러한 초기의 연구가들은 예루살렘 왕 아브디 헤파(‘Abbi-Ḥepa)가, 가나안 침공 자들은 그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점령했다고 놀라면서 바로 에게 보고하는 서신 속에서 “하비루”(Ḥabiru)라는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지적했다. 윈클러(H.Winckler)는 이것을 더 연구함으로써 설형문자 SA.GAZ와 관계되는 침공 군은 하비루와 동일한 것으로 확신했다. 가나안의 여러 군주가 모든 상황을 페니시아에 있는 시돈에 보내는 서신 속에는 SA.GAZ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매우 빈번히 발견된다.
바벨론에서 뿐 아니라, 나중에 마리(Mari)와 누지(Nuzi)에서의 발견은 이미 B.C. 2천 년대 초기에 메소포다미아 계곡의 역사 속에서 하비루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것은 엘람 왕조(Elamite dynasty)의 와라드신(Warad-Sin)과 림신(Rim-Sin)에서 뿐 아니라, 함무라비의 바벨론이나 짐리―림의 마리에서 나온 악카드어 텍스트 및 라르사(Larsa)의 림신의 수메르어 비문 등에 언급된다. 이 이름은 때때로 “전사”라는 한정된 의미로 나타난다. 헷족의 문서나 옛 바벨론 문서에 보면, SA.GAZ의 군대는 국가로부터 정기적인 양식을 배급받았으며, 그들은 왕실수비의 임무를 맡았고, 국가간의 조약을 보호해 주는 신을 예배했다고 나타난다. 보가츠코이(Boghazköi)에서 나온 헷족의 문서는, 하비루와 SA.GAZ는 동일한 사람이라고 명시했는데, 왜냐하면 텍스트 속에서 이름의 형태가 비슷하게 나타나며 또한 SA.GAZ의 신들이 하비루의 신들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마리(Mari)의 한집에서는 그들이 야파―아다드(Yapah-Adad)와 같은 사람에게 고용된 용병으로 나타난다. 하비루라는 이름의 어원은 “넘어가는 사람”, 혹은 동사 아바르(‘ābar, 통과하다)에서 나온[땅을] “통과하는 사람”이라는 기본적 의미를 나타난다.
그러나 하비루라는 말은 본래 사회적으로 하층계급을 가르킨다는 말에는 틀림이 없다. 메레디트 클라인(Meredith K;ine)은 지적하기를, 알라라크에서와 같은 경우에는, 하루비가 정부의 공무원으로서 시 행정의 수뇌나 혹은 전차소유주(maryannu)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들과 평화 협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단순히 종이나 일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음을 말해 줄 것이다. 클라인은 개인적으로 하비루를 자기들의 용역을 용병으로 팔았던 전사종족의 동족집단이라고 생각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정착하여 지주가 되거나 관리가 되었다고 했다. 알라라크에서와 같은 경우에,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의 사람들과 문화적으로 통합되어서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비 셈족(non-Semitic)계통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클라인은 하비루족이 이스라엘 히브리 족과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잘 연결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이 결론은 아마르나 문서들의 자료를 바르게 취급하지 못한다.
그린버그의 주장은, SA.GAZ는 가나안 땅 전역의 여기 저기에서 비교적 작고 비동족적인 집단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여지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여호수아서의 기사에서는 이와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여호수아서의 우리는 열 두 지파로 구성된 큰 군대가 한 마디 명령아래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이 말해져야 한다. 하나는, 그 편지들은 B.C. 1400년으로부터 아크나톤(Akhnaton)의 통치 후반부까지 전부를 포함하는 독립된 넓은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비교적 소규모의 군사행동을 암시하는 듯한 하비루 활동에 대한 그러한 언급들은 대출정(大出征)이 끝난 후시대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둘째, 하비리는 큰 세력을 가지고 그 땅에 진입해 왔으며 일순간에 그 땅의 많은 부분을 정복했다고 그 편지들 중의 상당수가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편지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아브디-헤바로부터 온 EA 286번 편지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나의 주, 왕이 살아 계실진대, 그 사절들이 갈 때 나는 이렇게 말하겠나이다. ‘왕의 땅이 사라졌도다! 제 말이 들리지 않는가요? 모든 통치자들이 사라졌고, 나의 주 왕은 단 한 사람의 통치자도 거느리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여, 궁수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군대를 보내 사 그 땅을 잃지 않게 하소서! 하루비가 왕의 모든 땅을 약탈하나이다. 올해에 궁수들이 있으면, 나의 주, 왕의 땅은 그대로 남으려니와, 궁수가 여기에 없으면, 왕은 그것을 잃으리이다!” 다시 EA 288번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간청한다. “왕의 땅을 돌아보소서. 왕의 땅이 잃게 되리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며, 내게는 대적이 있나이다. 세일 땅과 심지어 갈멜 산 땅에 대해 말하자면, 그 모든 땅에는 평화가 없고 나에게는 대적이 있을 뿐이니이다.” 그가 팔레스타인 중심지역의 정복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여호수아 출정의 제2차 구면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은, 아마르나 서신의 하비리는 여호수아 군대의 히브리인과 동일시된다고 확신했다. 에드워드 메이어는 『고대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인 혹은 이스라엘인과 아마르나 시대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던 아마르나 비문에 나오는 하르비를 실질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르나 기록에 의하면 애굽과 서신왕래를 했던 성읍들은 므깃도, 이스글론, 악고, 가셀 및 예루살렘 등이었다고 그가 지적하는 증거와 같이, 엄밀하게 말하면 그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후기에 정복한 성읍들이었다. 한편, 뵐(F. Bōhl)이 『가나안인과 히브리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진군으로 이미 함락되었거나 아니면 여호수아 군대의 대열에 합류했던 그러한 성읍들의 ―여리고, 브엘세바, 기브온, 헤브론 등과 같은 성읍들― 서신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세겜 근처에 있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여호와와 더불어 민족의 언약을 세운 일과 관련하여서 예루살렘의 아브디 헤파가 하비루에게로 변절하는 도시국가를 비난한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아니면 우리가 하비루에게 세겜 땅을 줘버린 라바유(Labayu)와 같이될 것인가?” 만약 여호수아와 세겜인들 사이에 어떤 비공식적 협약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유력한 도시 부근에서 이러한 종교 집회가 개최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없었을 것이다.

4. 여호수아서의 긴 날

여호수아서 10:13에 보면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이라고 기록되었다. 만약 실제로 지구가 자전을 24시간 동안 멈추었다면, 가공할 만한 대변혁이 모든 항성과 지구상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는 반대주장이 있었다. 이 긴 날에 대한 애굽, 중국, 힌두의 자료들이 긴 날을 말하고 있음을 밝히는 연구가 있었다. 해리 림머(Harry Rimmer)는 말하기를, 몇 사람의 천문학자들은 천문학적 계산에서만 하루가 빠져 있다고 했으며, 하바드 연구소의 피커링(Pickering) 교수는 이 누

락된 하루를 여호수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찾았으며, 예일(Yale)의 토튼(Totten) 박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램(Ramm)은 이 보고를 입증할 만한 기록물도 입수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카일(Keil) 델리취(Delitzsch)의 『구약성경 주석』은 주장하기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그 날이 초자연적으로 연장된 것처럼 보였든 아니 였든 간에, 그 날의 연장은 실제로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의 일을 그 날에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태양이 평균적 비율로 움직이지 않았다면(즉, 지구가 자전하지 않았다면), 정확한 시간 계산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또다른 가능성을 첨가했는데, 하나님께서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연장하셔서, 빛의 굴절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보통 정해진 시간 이후에도 눈이 보는 것을 가능케 하셨다고 했다.

5. 가나안 족속의 멸절

여리고나 아이의 함락과 같은 경우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 주민들을 전멸시켰다고 여호수아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조치에 대한 책임은 히브리족에 있지 않고(만약 이 기록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원시적 기질을 지닌, 반야만적인” 이스라엘은 종교적 발전이 퇴보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런 잔인한 행위를 했다고 하는 몇몇 관용주의자들의 빈번한 주장에 비추어 볼 때, 위의 내용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을 때, 여호수아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본문은 매우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속에서 살도록 허용된 가나안 족속이 있는 한,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예리하게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들은 가장 타락한 형태의 다신주의와 성적 문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의 타락한 주민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게 악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을 심하게 오염시켰다.

Ⅱ. 사사기

책의 제목은 히브리어로는 쇼페딤(Shô-peṯim)으로서 재판관, 행정지도 자를 의미하며, 또한 LXX역시 크리타이(Kritai)도 재판관을 의미한다.

1. 사사기 개관
Ⅰ. 이스라엘의 부분적인 가나안 정복(1:1-2:5)
Ⅱ. 가나안족의 남은 자들이 살아 남은 이유(2:6-3:6)
Ⅲ.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와 웃니엘에 의한 구출(3:7-11)
Ⅳ. 모압의 에글론의 압제와 에훗에 의한 구출(3:12-30)
Ⅴ. 삼갈의 공적(3:31)
Ⅵ. 하솔의 야빈의 압제 및 드보라와 바락에 의한 구출(4:1-24)
Ⅶ. 드보라의 노래(5:1-31)
Ⅷ. 미디안족의 압제와 기드온에 의한 구출(6:1-8:35)
Ⅸ. 아비멜렉의 내력(9:1-57)
Ⅹ. 돌라와 야일 의 다스림(10:1-5)
Ⅺ. 암몬족의 압제와 입다에 의한 구출(10:6-12:7)
Ⅻ. 입산, 엘론, 압돈의 다스림(12:8-15)
ⅩⅢ . 블레셋의 압제와 삼손의 공적(13:1-16:31)
ⅩⅣ. 미가의 제사장과 단 지파의 이동(17:1-18:31)
ⅩⅤ. 기브아에서의 잔악한 행위와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19:1-21:25)

2. 저작 연대

내적 증거는 초기 왕조 시대를 가리키지만,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이전으로서 B.C. 990년 경이다. 18:1이나 19:1에 나오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표현은, 또다시 불화와 재난이 그 나라를 괴롭혔던 분열왕국의 불행한 시대 이전이다.
초기 저작설의 한 가지 난점은,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원어에는 ‘땅’이<the land>)이 사로집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고 하는 사사기 18:30의 기록에 의해 제기된다. 만약 이 구절이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사마리아 왕국 북쪽을 차지한 732년의 앗수르 정복을 가리킨다면, 이 구절은 아무리 빨라도 8세기 후반의 산물일 것이다.
영거(Unger)는 주장하기를, 이 구절은 후에 어떤 미심쩍은 의도를 지닌 편집자에 의해 삽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영(Young)과 스타인무엘러(Steinmueler)는 “땅”(’ereṣ)이라는 단어가 본래의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것은 “언약궤”(‘ārōn)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로 기울어지는데, 이것은 단지 글자 한 자의 변화를 수반할 뿐이다(마지막 ץ[tsadhe] 대신에 ן[nūn]으로). 그렇다면 “언약궤를 빼앗김”이라는 수정된 구절은 엘리가 죽던 해에 실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재난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 지파가 있던 이스라엘의 북쪽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과 얼마나 많은 연관성이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세번째이며 보다 단순한 주장은, “땅의 사로잡힘”이라는 말은 사사 후기 시대의 어느 시기에 잔인한 국경지대의 싸움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군사적 패배와 추방에 대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북쪽에 있던 단지파 도시들의 주민들은, 그들 자신이 그 이전에 살던 주민들로부터 그 땅을 정복했을 때처럼, 외국의 침략자에게 침략 당했을 것이다(삿 18:27-28). 이와 같이 해석된 사사기 18:30은 단순히 단 지파의 땅에 대한 언급이며, 그러므로 제작 연대를 다윗 통치 후의 어느 시기로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3. 저자 및 저작의 통일성

저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 본서의 목적은, 몇몇 저작의 주장과 같이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은혜를 영화롭게 하려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뮐러는 지적하기를 14명의 사사들은 너무 잘 배열되어 있어서 웃니엘과 삼손은 그 배열은 차음과 나중에 나타나지만,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보통 둘씩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삼갈(3:31)은 에훗에 대한 간단한 첨가어로 나타나며, 바락은 드보라와 짝지어져 있으며, 그리고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관계가 있다.

4. 연대기의 문제

사사기 10:7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라는 기사는, 삼손과 입다는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고 분명하게 말해 준다. 왜냐하면 암목 족속의 압제와 블레셋 족속의 압제는 거의 같은 시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페인(J.B. Payne)은 B.C. 1381년의 웃니엘의 통치로부터 B.C. 1050년에 끝나는 사무엘까지의 가장 중요한 여섯 사사들의 통치에 관한 기본적 연대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연대계산법의 정당성은 사사기 11:26에 나오는 입다의 말로써 입증되었는데, 여기서 입다는 이스라엘의 헤스본 정복과 암몬과의 싸움 사이의 기간을 300년으로 계산한다. 이것은 요단 넘어의 정복 기간을 대략 B.C. 1400-1100년으로 인정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사기 그 자체 속에는, 사사들의 전 기간에 대해 긴 연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사통치 시대 중 어떤 것들이 조금도 중복되지 않았다고 할 이유가 없다.


5. 사사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고고학의 공헌

애굽의 권위가 최소한 B.C. 12세기까지는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팔레스타인을 지나가는 주요 상업도로를 통하여 애굽의 세력이 유지된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블레셋 족속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그들이 팔레스틴 남서 해안에 처음 정착했던 시기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B.C. 1195년 경 애굽 해군이 블레셋 족속에게 거둔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메디넷 하부에 있는 라암세스 3세의 비속으로 인하여 많은 비평가들은 애굽 사람에 의해 블레셋 족속이 패배해서 팔레스타인 해안선을 따라 처음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론 내리기를, 1195년 이전에 블레셋에 대한 모든 언급은 창세기 21장이든, 여호수아 13장이든, 사사기 3장이든 간에 반드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성경의 기록과 같이 그랄에서 블레셋 족속을 발견했을 수가 없다(창 21:32,34; 26:1,814,15,18). 그러나 블레셋 족속의 침략자들이 라암세스 3세에 의해 팔레스타인 해변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는 거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성경구절들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블레셋은 카프토림족, 케프팀족, 케리티트족 및 펠레티트족 등으로 구성되는 이질적 무리였다. 이들 여러 집단들은 그레데 섬으로부터의 연속적인 이주의 물결을 타고 넘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미노아 시대까지도 그레데 섬의 주민들은 아브라함의 시대 이전의 매우 모험심이 많은 상인들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상업적 목적을 위하여 팔레스타인 해안선에 무역 중심지를 설립하도록 많은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6. 입다의 딸의 제사

입다는 그의 “경솔한” 서원(11:30,31)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딸을 제단 위에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 분명하다. “번제”라는 단어는 올라(‘ōlah)인데, 다른 곳에서는 불로 완전히 태워버리는 피제사라고 한다. 그러나 카일과 델리취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문자적인 인간제사라고 하는 이러한 해석은 본문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하지 않다.
① 인간제사는 아브라함의 시대 이후로(그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에 의해 수양으로 대체되었다) 여호와께 대한 범죄며 혐오스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레위기18:21;20:2-5 및 신명기12:31;18:10에서는 강력하게 비난하고 또 금지된 것으로 항상 이해되었다. 아하스 시대(B.C. 743-728)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 중 누구도 인간제물을 바쳤다는 증거가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입다가 그러한 죄를 범하고 혐오스런 행위를 함으로써 주를 기쁘게 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② 그의 딸에게 두 달 동안 애곡이 허락되었는데, 그녀의 생명의 상실이 가까워졌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처녀성(버툴림)을 몹시 슬퍼했었다(삿 11:37-38).
③ 39절에는 입다가 서원을 한 후에 그의 딸을 “번제”로 바치고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이러한 말들은 핵심을 대단히 빗나갔으며 또한 어리석은 관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의 남은 생애가 장막문에서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바쳐졌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연결된다. 이 경우에 그 상황의 비애감은 입다의 딸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다의 혈통이 끊어지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입다의 유일한 자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딸은 그녀의 처녀임을 그렇게 슬퍼한 것이다. 여기에 인간 제사란 나타나지 않는다.

Ⅲ. 룻기

본서는 각 페이지마다 중심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윗의 혈통에 비이스라엘 계통의 피가 섞였음을 설명해 주는 다윗 왕의 가계에 나타난 한 일화를 말하려는 것

이다. 이 책은 또한 회개한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의 교제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 하시는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넙ㄹ은 가를 가르쳐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는 고멜(gōēl), 즉 친족 구원자의 역할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1. 룻기 개관

Ⅰ. 모압으로의 이주와 체재(1:1-5)
Ⅱ. 룻과 함께 유다로 돌아오려는 나오미의 결정(1:6-18)
Ⅲ. 베들레헴에로의 슬픈 귀향(1:19-22)
Ⅳ. 어려울 때의 친구 보아스(2:1-18)
Ⅴ. 보상법에의 호소(3:1-18)
Ⅵ. 보아스가 고멜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임(4:1-10)
Ⅶ. 약속과 번영(4:17-22)

2. 저작 연대

자유주의 학파의 비평가들은 요시야 통치보다 늦은 연대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룻이 신명기 25장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들에게 의하면 신명기는 요시야의 개혁 직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 비평가들은 포로 기간인 B.C. 550년 경으로 그 연대를 추정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이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에 대한 느혜미야의 엄격한 율법강요에 반대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며, 100년 정도 더 늦은 시대로 생각했다. 이 책이 신명기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브라잇(W.F. Albright)은 요시야 이전 시대에 우선권을 두고 있음을 주목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알레만-플라크(Alleman-Flack)는 그의 주석에서, 보아스와 룻의 결혼에 대해 기록한 법률적 용법은 과부결혼에 관한 오경의 법보다 훨씬 이전 단계를 나타낸다고 하는 밀라 버로우즈(Millar Burrows)의 설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올브라잇은, “우리는 룻기의 대부분을 7세기 이후로 추정할 수 없으며, 룻기의 기본이 되는 시적인 문장에 대해서는 9세기만큼이나 초기로 보는 것이 매우 가능하다고 말한다.

3. 본서의 기본적 교훈

룻기의 기본적 교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본서는 앞으로 있을 축복의 확장을 예시해 준다. 즉, 회개하고 여호와를 믿으면, 이방인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놀랍고도 예기치 못할 하나님의 섭리는 메시야의 왕적인 혈통 속에 이방인의 혈통이 포함되었음을 또한 나타내 준다(마 1:5).
③ 친족 구원자는 그의 친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임무와 자격을 충족시키는 고엘(gōēl), 즉 메시야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 그는 육친이어야 한다(그리스도도 처녀에게서 태어나심으로 육친이 되셨다).
⒝ 그는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을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4:10 ―그리스도만이 죄인에게 대한 값을 치룰 수 있는 공로를 지니고 있다).
⒞ 그는 잃어버린 기업을 다시 사려고 해야 한다(4:9 ―-그리스도는 자원하여 그의 생명을 내어놓았다).
⒟ 그는 죽은 친족의 아내와 결혼하려고 해야 한다(4:10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관계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룻기라는 이 작은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관하여서는 구약 중애서 가장 교훈적인 책이다.

제 20 장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Ⅰ. 사무엘 상하

목적은 히브리 왕조의 설립을 기록하려는 것이다. ⑴ 왕을 세운 사람, 사무엘의 생애, ⑵ 언약을 잊고 폭군이 된 신실치 못한 왕, 사울의 생애, ⑶ 메시아를 배출하게 되는 영속적이고도 정당한 왕조를 세운 신실한 신정국의 왕, 다윗의 생애 등이다.

1. 사무엘 상 개관

Ⅰ. 사무엘의 생애와 블레셋으로부터의 구출(11:1-7:17)
A. 사무엘의 어머니와 그이 찬송(1:1-2:10)
B. 성전에서의 사무엘의 훈련(2:11-3:21)
C. 실로의 재난과 엘리의 죽음(4:1-22)
D. 블레셋 족에게 법궤를 빼앗김(5:1-6:21)
E. 법궤가 이스라엘로 되돌아옴(7:1-17)
Ⅱ. 사울 왕의 흥기(8:1-15:35)
A. 왕을 원하는 이스라엘의 청원(8:1-22)
B. 사무엘이 사울 에게 기름을 붓고 승리로써 정당성이 입증됨(9:1-11:15)
C. 사무엘의 마지막 연설(12:1-25)
D. 블레셋에 대한 사울과 요나단의 승리(13:1-14:52)
E. 아말렉 정벌과 사울의 불순종(15:1-35)
Ⅲ.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흥기(16:1-31:13)
A.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다윗이 궁궐로 들어감(16:1-23)
B.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함(17:1-58)
C. 다윗이 사울의 질투를 피하여 도망함(18:1-20:42)
D. 다윗의 유랑(21:1-30:31)
E. 길보아 산에서 사울의 마지막 전투와 그의 죽음(31:1-13)

2. 사무엘하 개관

Ⅰ. 유다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생애(1:1-14:33)
A.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함(1:1-27)
B. 헤브론에서의 즉위, 아브넬과의 전투(2:1-32)
C. 아브넬의 변절과 요압에 의한 죽음(3:1-39)
D. 이스보셋이 암살됨(4:1-12)
E. 국가적, 종교적 연합을 이룩함(5:1-6:23)

F. 다윗과 세운 하나님의 언약 : 메시야적인 왕(7:1-29)
G. 다윗이 통치권이 약속된 땅의 끝까지 확장됨(8:1-10:19)
H. 밧세바와의 범죄와 그의 회개(11:1-12:31)
I. 암몬의 죄악과 압살롬의 복수(13:1-14:33)
Ⅱ. 다윗 시대의 마지막 단계(15:1-24:25)
A. 압사롬의 반역과 궁극적 승리(15:1-18:33)
B. 다윗이 권력을 회복함(19:1-20:26)
C. 기근 및 사울의 후손에 대한 기브온족의 복수(21:1-14)
D. 블레셋과의 후기의 전쟁(21:15-22)
E. 다윗의 찬송시와 최후의 유언(22:1-23:7)
F. 다윗의 용장들의 목록(23:8-39)
G. 백성을 계수한 다윗의 죄, 성전자리에서 재앙이 멈춤(24:1-25)

3. 저작 연대

합리주의 자들은 이 책을 주로 두 가지 문서(Pfeffer) 혹은 가능하면 세 가지 문서(Eissfeldt)를 편집한 것으로 분석한다. 그들이 솔로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중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들과 한께 “신명기 학파”의 편집자에 의해 약 B.C. 550년 이전에 추가된 것이다. 사무엘서의 어떤 부분에는 초기 연대라고 하는 충분한 증거가 나타나며, 파이퍼(R.H. Pfeiffer)와 같이 문서를 구분하는 비평가까지도 이 책 중 가장 초기의 것을 제사장 아히마아즈와 같은 10세기 저자의 것으로 돌릴 수 있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다른 부분들은 포로기와 같은 후기의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사무엘상 6장과 7장에는 레위기에 대한 언급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경 비평에서와 같은 동일한 분석 방법이 사용되는데, 비슷한 기사와 동일한 기사를 분리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여러 시대의 저자를 밝혀 내는데 있어서 서로 사이에 그러한 “모순”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왕조를 설립하는 일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대립적인 입장이 주장되고 있는데, 사무엘 상 7장 및 8장의 입장(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결핍된 것을 하나님께서 비난하시는 내용을 기록함)과 사무엘이 기름 붓게 될 왕에 대한 은혜스러운 축북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는 9장(특히 16절)의 입장 등이다.
이러한 비평가들이 잘못 이해한 점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그릇된 동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무라신다고 해도, 그 사실로 인하여 그 백성들이 잘못 선택한 새 통치 형태에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 세우신 인간적인 기구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인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스럽게도 하나님은 그녀에게서 난 아들 솔로몬을 그의 아들 중 가장 영광스러운 다윗의 계승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다윗 이후 시대에 속하는 부분을 잘 분별할 수 없지만, 사무엘서의 저자가 이전에 기록되어진 자료를 사용했음은 의심할 수 없다. 그 예로서는 사무엘하 1:18에는 야셀의 책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다른 문서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사무엘, 나단, 갓 등이 편집한 “다윗의 행적”을 포함한 공문서들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4. 본문의 보존

다른 성경보다도 사무엘 상하의 본문은 맛소라 개정판(Masoretic recension)에서 잘 보존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 전신 사본에는 가끔 공백 부분이 있다(아마 벌레가 먹었거나 아니면 너무 많이 사용되어 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것은 사무엘상 13:1에 나오는“해”(years)라는 단어 앞에 있는 숫자가 빠졌다는데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서의 70인경을 연구해 보면, 맛소라 사본의 전통보다는 전신사본이 다소 더 나은 상태였음을 나타내주므로, 이 두 책에

대해 고등비평을 사용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쿰란(Qumran)동굴에서 발견된 몇 가지 중요한 단편들은 MT 보다는 70인경에 조금 더 가까운 히브리어 본문을 담고 있다. 또 사무엘상 12:11에는, 12세기 사사들 중의 한 사람인 압돈 이라는 이름에서 아인(ע, ‘ayin)이라는 글자가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ןדבע, ‘-B-D-N이 아닌 ןדב, B-D-N 으로 나타나므로 맛소라 사본은 “베단”(ן??, Bedan)으로 모음화했다.

5. 소위 기사의 모순

첫째로, 사무엘의 종족적인 배경으로. 사무엘상 1:1에서는 엘가나를 에브라임 지파로 주장하고, 역대상 6장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사무엘상 1:1에서는 엘가나의 지파소속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다만 그의 거처에 대한 지적뿐이었고, 율법에 의하면, 레위 지파는 12 지파 속에 흩어져서 48개의 레위 지파의 성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라마 다임이나 라마가 레위 지파가 살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다.
둘째로, 다윗이 사울 왕에게 소개되는 두 가지 기사이다. 하나는, 사무엘상 16:14-23에 다윗이 사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고용된 수금 연주가로 사울 에게 소개되었다. 그 다음은, 사무엘상 17:55-58에서 다윗이 사울 에게 소개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두 번째 소개”를 살펴보면, 그 나라에서 가장 용맹 있는 자들을 사울 자신의 경호원으로 삼으려 하는 사울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 때에 사울의 관심은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는 것이었다. 거인 골리앗을 죽인 이새의 막내 아들의 용감성을 한 본보기로 본 후에, 이새나 그의 다른 아들들을 자기의 정예부대로 삼을 가능성이 사울 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세 번째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산악지경에서 추격대의 추격을 받다보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다윗과 사울 사이의 화해와 반목의 이야기 속에서 일시적인 우정의 회복이 갑작스런 무시무시한 미움의 폭발로 이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질투심과 심각한 불안감의 영향으로 인한 사울의 정신 분열과 타락을 이해하면, 이러한 사건들이 연속되는 것은 매우 사실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Ⅱ. 열왕기 상하

명칭 : 고대 히브리어 정경에는 열왕기서가 상하 구분없이 한 권으로 되어 있었다. 책의 첫 머리에 나오는 단어나 구(句)를 따라 책 명을 삼는 관례로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기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책의 명칭을 “왕들”이란 뜻의 “멜라킴”(םיכלמ)이라 한다.

1. 열왕기 상하 개관

Ⅰ. 솔로몬 통치(왕상 1:1-11:43)
A. 다윗의 최후 정리와 아도니아의 진압(1:1-2:11)
B. 솔로몬 통치의 시작(2:12-46)
C.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한 후에 지혜를 간구함(3:1-28)
D. 솔로몬의 국가 통치(4:1-34)
E. 솔로몬의 성정 건축(5:1-7:51)
F. 성전 봉헌식과 하나님의 약속이 수여됨(8:1-66)
G.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 스바의 여왕(9:1-10:29)
H. 솔로몬의 배교와 몰락(11:1-45)
Ⅱ. 다윗 계열 왕국의 초기 왕들(12:1-16:28)
82
A.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여로보암의 반역(12:1-14:31)
B. 유다의 아비야와 아사(15:1-24)
C. 이스라엘의 나답, 바아사, 엘라(15:25-16:14)
D. 이스라엘의 시므리와 오므리(16:15-28)
Ⅲ. 유다와 이스라엘의 동맹 시대(16:29-왕하 9:37)
A. 아합과 엘리야, 갈멜 산의 시험(16:29-18:46)
B.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이 죽기까지의 아합과 엘리야(19:1-22:53)
C.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왕하 1:1-18)
D. 엘리사에게 기름부음과 엘리야의 승천(2:1-25)
E. 여호람과 요호사밧이 모압을 대적함(3:1-27)
F. 엘리사의 이적들, 나아만이 깨끗케 됨(4:1-5:27)
G. 벤하딧의 전쟁, 사마리아의 구출(6:1-7:20)
H. 하사엘과 예후에 대한 엘리사의 임무, 이세벨의 죽음(8:1-9:37)
Ⅳ. 이스라엘의 쇠태와 멸망(왕하 10:1-7:20)
A. 예후의 오므리가(家) 멸절 및 바알 숭배자들(10:1-36)
B. 유다의 아달랴와 요아스(11:11-12:21)
C. 이스라엘의 여호와하스(13:1-25)
D. 유다의 아마샤와 아사랴(웃시야)(14:1-22;15:1-7)
E. 여로보암 2세(14:23-29)
F.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들: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15:8-31)
G. 유다의 요담과 아하스(15:32-16:20)
H. 사마리아의 멸망, 반 정도 회개한 이방인의 재거주(17:1-14)
Ⅴ. 사마리아 멸망 이후의 유대인의 왕조(18:1-25:30)
A. 히스기야와 산혜립(18:1-19:37)
B. 히스기야의 병, 갈대인의 사자에게 자기의 부를 과시함(20:1-21)
C. 악한 왕 므낫세, 그이 아들 아몬(21:1-26)
D. 요시야의 개혁(22:1-23:30)
E. 마지막 왕들과 예루살렘의 멸망(23:31-25:21)
F. 그달리야의 암살, 여호야긴에 대한 선대(25:22-30)

2. 연대기의 문제

앗수르의 자료들 속에 동시성(synchronisms) 또는 동시대적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히브리 왕조들의 연대기에 많은 빛을 비추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B.C. 893년에서 666년까지의 그 제국의 역사에 속하는 앗수르 지명의 기원에 관한 이름의 명부(Assyrian eponym lists)이다.
틸레는 남쪽 왕국과 북쪽 왕국 사이에는 달력계산의 차이가 있었음을 입증했다. “비계승년”이라는 연대계산 제도는 왕이 즉위한 역년(歷年)의 나머지 기간을 그의 통치의 첫 해로 계산했다. 이 계산도는, 왕이 전 해의 마지막 날 왕위에 올랐을지라도 그 하루가 통치의 한 해로 계산되었다는 점과 또한 새해의 시작인 그 다음날이 통치 제2년의 시작이라는 점을 의미했다. 그러나 계승년 제도에 의하면, 왕이 즉위한 그 해는 전혀 통치 연대로 계산하지 아니했고 다만 그의 통치의 첫 해는 그 다음 새해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유다의 경우에 있어서는, B.C. 930년의 왕국분열 시대로부터 850년 경에 이르기까지 계승년 제도가 지켜졌다.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 시대까지는 비계승년 제도가 북왕국에서 지켜졌다. 아마샤의 시대로부터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는 유다의 마지막 시기에는 계승년 제도로 환원되었다. 북왕국에 있어서는, 930년에 비계승년 제도가 시작되어 800년 경까지 계속되었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로부터 사마리아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는(B.C.

798-722) 비계승년 제도가 계승년 제도의 계산법으로 바꾸어졌다. 그러므로 유다에서는 여호사밧 제10년으로 계산된 햇수가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사밧 제11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보다 더 큰 혼란은, 북왕국에서는 종교개혁 첫 달인 니산월(Nisan) 혹은 아빕 월(Abib)에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다 왕국에서는, 매우 일관성 있게, 모든 역사 속에서 티스리 혹은 에타님을 세속력의 첫 달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이런 기초 위에서 모든 날짜와 통치 연대를 계산하였다. 이러한 상위점이 생긴 이유를 단정짓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연대계산에 있어서 1년이라는 차이가 있는 경우를 참작해야 한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사실은, 연대기는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속해서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수주의 학자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페인(Payne)은 남북 왕국의 분열 연대를 930년으로 보고 있는데 비해, 틸레(Thiele)는 그 시기를 931년으로 계산한다. 항상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있어야만 하며 또한 새로운 증거가 나옴에 따라 적당한 조정이 있어야 한다.
유다 후기 역사에 대한 보다 최근의 작품은 와이즈만(D.J. Wiseman)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제목은 “영국 박물관에 있는 갈대아 왕들의 연대기”이다. 이 책에서 발견된 토판들은 B.C. 620년과 566년 사이의 일련의 분명한 연대들을 나타내 준다. 그 토판들은,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브폴라살(Nabopolassar)이 바벨론에서 앗수르 군대를 격파한 후에 626년 11월23일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음을 말해 준다. 니느웨의 멸망 후 612년에 앗수르의 왕이 된 앗슈루발리트 2세는 610년에 하란(Haran)에 있는 그의 방어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시야가 전사했던, 므깃도의 전투는 609년에 일어났고, 같은 해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 해인 608년에 여호야김은 느브갓네살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느고(Necho)의 도움을 받아 통치를 시작했으며, 598년에 죽었다. 느부갓네살이 애굽과 앗수르의 연합군을 격파했던 그 유명한 갈게미쉬(Carchmish) 전투는 605년 5월이나 6월에 일어났었다. 나보폴라살은 605년 8월 16일에 죽었으며 느부갓네살이 그의 후계자로서 9월 7일에 바벨론의 왕이 되었다. 601년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국경지역에서 애굽 군과의 고전 끝에 일시적으로 패배하였다(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실은, 여호야김이 그의 통치 말년에 위험을 무릅쓰고 바벨론에 반역하였던가 하는 점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예루살렘을 597년 3월 15일 혹은 16일에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했다. 같은 달에 시드기야가 임명된다. 결국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셀의 제 3차 침략 기간인 587년 6월에 멸망했다.
이러한 토판들은, 597년의 예루살렘 정복을 느부갓네살 제 8년이라고 하는 열왕기하 24:12과 그것을 느부갓네살 제7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 예레미야 52:28 사이의 모순을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갈게미쉬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갈대아 대군을 홀로 통솔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서쪽지방에서는 이미 그가 사실상의 왕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열왕기하를 기록한 유대 역사가는 그의 최초의 통치 연대를 605년이나 604년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비계승년 제도를 사용하던 바벨론에서는 그의 통치가 604년이나 603년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이 경우에 바벨론의 공식적 계산법을 따랐음이 분명하다.


제 21 장
선지서 개론
오바댜서, 요엘서, 요나서

1. 선지서 개론

히브리어 성경의 전문용어에 의하면, 전선지서들(former prpphets)에는 이미 우리가 다룬 여호수아서, 사사기, 열왕기 등의 네 권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취급하지만, 그들은 선지자적 관점에서 기록되었으며, 또한 어쩌면 저자 자신의 직업이 선지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장과 다음 여섯 장에서 다루어지는 책들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후선지서로(latter prophets)로 분류된다.

2. 히브리 예언의 성격

예언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기 위한 인간이라는 대변자를 통하여 말씀이 구두나 혹은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홍해를 건넌 것이나, 구리뱀 사건 등의 사건들도 예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메시야 시대의 모형적 성취를 차례로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나타내주는 모형들을 지니고 있다. 아론의 제사직임이나 성막의 그 자체, 성막에 포함되는 여러 자료들 및 제사의식들이 포함되므로, 넓은 의미에서는 구약의 많은 부분이 예언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들의 메시지는 역사 속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들의 말이 보존되지 못한 사람들이 상당수가 된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윗 시대의 나단과 갓의 경우이며, 그 후에는 스마야,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및 기타 많은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말로써만 전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구술 선지자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메시지는 당시 이스라엘의 생존 위기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정경 선지서와 똑같은 의미, 똑같은 차원에서 오는 세대에 대해 영속적인 중요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되는 시대와 관련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성령께서 저자들을 영감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메시지를 기록하게 하신다. 그래서 이 책들은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서 우리에게까지 보존되어 온 기록들이다.

3. 예언적 직임의 성격

“예언하다”라는 히브리어 니바(nibba’ 는 nābā’ 의 niphal 형)라는 단어는 소환하다. 알리다, 부르다 등을 의미하는 악카드어 동사 나부(nabû)에 그 어근이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함무라비 법전의 서판에 보면 바벨로 왕은 자신을 니비트 벨(nibit Bēl, 바알이라 불림)이라고 했으며, 니비우(nibiū, 임명함)라는 신들은 그를 땅 위에 있는 그들의 통치자로 삼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nibba’라는 동사는 신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부름 받거나 임명받은 자를 뜻했음이 분명하다. 불리움 받은 자, 나비(nābiѷ), 즉 선지자라는 독특한 단어는 이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선지자는 자기

자신의 견해를 남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임명된 전문가가 아니며, 그는 하늘에서 온 사신으로서 하나님에게로부터 인간에게로 전해져야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칭호는 하나님의 사람(이쉬 엘로힘, םי??? שׁיאּ)이었다. 이 명칭은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그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며 그 분과의 개인적 교제를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책임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조명하시고 말하도록 인도하실 때만 말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칭호 선견자(ḥōzeh, 호제, 혹은 rō’eh, 로에)이다. 이 명칭의 의미는 선지자는 물질세계의 거짓된 모양이나 외관에 속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안목으로 문제점들을 사실 그대로 본다는 의미이다. 선지자는 선견자로서 특별한 환상이나 주님의 주시는 외부의 계시를 받았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실재를 전할 자격을 지닌 자들이었다.

4. 히브리 예언의 기능

선지자의 기능은 단순히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구약 선지자들의 사역으로는 다음 네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규정될 수 있다.
①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공로나 힘 또는 인간적 동맹세력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자비하심과 구원의 능력만을 의지하라고 자극할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가나안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에 모세가 어려운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이스라엘에게 권했던 것처럼, 8세기의 위대한 선지자들은 그들의 동포에게 앗수르나 애굽 등과의 인간적 동맹의 원조를 의뢰하지 말고 주의 구원의 능력을 철저히 의뢰하라고 권고했다.
② 선지자는 그의 백성에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시킬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즉, 안전과 축복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신실성은 교리적 확산 뿐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그들의 의지의 진실한 순종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순종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제사나 예배도 만족케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신앙은 거룩한 행위를 포함한다. 예를 들면,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3-18). ③ 선지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때때로 경건한 왕들에 의해 시작되거나 혹은 선지자들에게 의해 자발적으로 진행된 부흥에의 노력은 전체 인구의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백성의 대다수는 완고한 불순종의 태도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러나 완고한 자세는,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의 경고에 의하면, 언약의 백성을 마침내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도록 까지 하는 하나님의 종국적 진노를 야기할 뿐이었다.
④ 히브리 예언은, 성취된 예언을 객관적으로 확인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의 권위를 확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명기 18장에서는 참 선지자의 여부는 그의 예언의 성취여부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품절된 밀가루를 아주 싼 값에 구입할 정도로 밀가루 값이 24시간 이내에 하락되리라는 엘리사의 주장을 조롱했던, 열왕기하 7장에 나오는 비웃는 장관의 경우에서처럼 때로는 그러한 성취가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기도 했었다. 다른 경우에는, 예언이 주어졌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 저편에 있으리 만큼 먼 미래에 성취된 것도 있었다.



Ⅰ. 오바댜서

구약성경 중 가장 짧은 이 책은 오바댜가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기록연대를 보수주의 학자들은 B.C. 848-840년 경이 될 것이라고 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585년으로 택하고 있다. 파이퍼(Pfeiffer)같은 사람들은 이 책을 두 가지 다른 자료로 구분하는데 그 중 나중 부분은 포로기간이 아니면 B.C. 539년의 바벨론 멸망직후에 기록되었다고 했다.

1. 오바댜서 개관

Ⅰ. 에돔의 멸망이 도래함(1-9)
A. 난공불락의 셀라가 함락됨(1-4)
B. 성읍이 약탈당하고, 유린되며, 버려짐(5-9)
Ⅱ. 에돔이 심판 당하는 이유 : 이스라엘에게 악행을 함(10-14)
Ⅲ. 주의 날이 임함(15-21)
A. 에돔에게 임박한 심판(15-16)
B.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17-20)
C. 궁극적 메시야 왕국(21)

2. 저작 연대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의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 멸망의 뒤이은 시기로 잡는다. 라븐(J.H. Raven)이나 데이비스(J.D. Davis) 등과 같은 학자들은 그 연대를 아하스 시대(B.C. 743-728)로 추정하기를 좋아하며, 이 책의 역사적 언급을 에돔과 블레셋의 손에서의 패배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중대한 난점은, 오바댜 11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군사정복 기간 중에 있었어야만 할 그런 예루살렘의 함락과 약탈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구절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유다의 적들이 예루살렘에 쳐들어가서 귀중품들을 노획했다. 그 도시가 노략될 때, 여러 약탈자들이 약탈을 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질 지방을 결정하려고 제비를 뽑았다. 이러한 기록은 B.C. 587-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가해졌던 그 도시의 철저하고도 영속적인 멸망과는 거의 조화되지가 않는다. 더구나 ASV에서 바로 번역된 것처럼 13절은 침략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공격받게 되는 다른 경우를 예상하고 있다.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585년설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루살렘이 이미 페허더미가 되었다면 이러한 글들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습격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은 어떤 군사적 행동과 더욱이 에돔이 어떤 역할을 맡았음이 분명한 어떤 교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상황들과 유일하게 조화되는 기록된 사건은 이 침공이 여호람 시대로 여겨진다.
585년설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뱌댜 1-9절을 읽고 그것을 그에 목적에 따라 적용시켰다고 하는 강력한 증거로 인하여 힘을 상실하고 만다. 예레미야서 49:7-22을 보면 하나님의 초기 사자들의 예언에 크게 의존했던 일련의 신탁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오바댜는 예레미야에게서 빌여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감정을 예레미야의 경우보다 더 간절하고 빠르게 표현하며 부분적으로는 보다 무겁고 무뚝뚝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오바댜의 문체의 모난 부분들을 매끄럽게 다듬으므로 써, 예레미야는 자신이 원본을 만든 자가 아니라 각색한 자였음과 또한 각색한 자로서 자신은 모든 주의 경고들을 보다 명료하고 명백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Ⅱ. 요엘서

요엘(Joel)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요엘 선지서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이 심판의 날은 그 나라에 경제적 타격을 줄 황폐케 만드는 메뚜기에 대해 상징되고 있다. 이 재앙은 모든 불신세력에게 공평히 임할 마지막 파멸의 때를 가리키고 있다.


1. 요엘서 개관

Ⅰ. 여호와의 날의 모형으로서의 메뚜기 재앙(1:1-2:11)
A. 메뚜기 떼의 엄청난 습격(1:1-7)
B. 이 침략은 미래의 인간침략자를 나타냄<앗수르인과 갈대아인>(1:8-20)
C. 보응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2:1-11)
Ⅱ. 회개에의 요청(2:12-19)
A. 진실한 마음의 회개와 또한 외형적 형태의 회개(2:12-15)
B. 모든 계층과 나이를 포함하는 전 국가적 회개(2:16-17)
C. 주의 자비가 회복되리라는 약속<요아스 통치 시대에 분명히 성취됨>(2:18-19)
Ⅲ. 축복의 소나기에 대한 약속(2:20-32)
A. 북방에서 오는 이스라엘 침략자들의 무시무시한 전복(2:20)
① 산헤립
② 마지막 날에 세계의 세력판도
B. 메뚜기 재앙과 가뭄 후에 여호와께서 비를 주심(2:21-27)
C. 이 비는 마지막 날 성령 부어주심을 암시함<유월절에 시작됨>(2:28-32),
Ⅳ. 여호와의 날에 있을 하나님의 최후 승리(3:1-21)
A.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살육, 마지막 독재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3:1-12)
① 유다를 억압하는 페니시아와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예시함(3:1-13)
② 마카비 시대에 승리를 예시함(3:14-16)
B. 모든 구속받은 자를 포함하는 예루살렘의 천 년 동안의 승리와 평화(3:17-21)

2. 저작 연대

요엘의 예언은 여러 비평학파, 자유주의자들 및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9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것으로 줄곧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내적 증거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하는 기간인 요시야 왕의 유년 시절, 즉 830년 경이 가장 합리적인 연대이다.
① 이 예언서의 어조가 암시하고 있는 통치형태는 섭정통치와 가장 잘 조화된다. 왕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제사장들이 국가를 지도할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왕하 11:4에 보면, 요아스는 7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숙부 여호야다는 요시야의 통치 후반부인 자신의 사망시까지도 유다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② 아모스와 요엘 사이에는 빌어온 것이 나타나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예를 들면, 요엘 3:18과 아모스 9:13은 “산들이 단 포도주에 떨어지며”라는 약속을 담고 있다. 요엘이 아모스에게서 인용한 듯 보이지만, 본문의 가리키는 바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요엘 3:16에서 발견되는데 예언적 강론의 중심부에서 그는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라고 말한다. 이와 똑같은 구절이 아모스의 예언 초두에 나타나는데, 아모스는 그것을 자기의 첫 설교를 발전시키는 일종의 본문으로 사용했었다고 추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근거 위에서 살펴볼 때 요엘은 아모스 이전 시대, 즉 755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이 분명하다.
③ 보다 더 결정적인 주장은 유다를 위협하는 적군에 대한 저자의 언급 속에서 발견된다. 앗수르인이나 갈대아인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유다의 적들이 페니시아인, 블레셋족, 애굽인 및 에돔족이라고 언급되어 있다(욜 3:4,19). 이것은 앗수르나 바벨론이 위협하지는 않았으나 애굽과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이 강대했고 공격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요아스 시대에도 애굽의 세력은 여전히 두려운 것이었고, 르호보암 시대에는 시삭(Shisak)이 나라를 황폐케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노략했다. 그리고 아사의 통치 시대에는 에티오피아 왕조의 오소르콘 1세(Osorkon Ⅰ)가 보낸 장군인 제라(Zerah, 925-829)의 무서운 침략이 있었다. 요아스 조부, 여호람의 시대와 여호사밧의 시

대에서도 에돔족과 블레셋족이 유다를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강습했는데 성공하기까지 했다(왕하8:20-22, 대하 21:16-17). 요아스 시대 이후의 어떤 시대에도 유다가 이러한 원수들과 직면한 적은 없었다. 갈대아 시대 이후에는 애굽이 침략세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첨부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힘을 지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사와 헬라 시대의 저작 연대설의 가능성을 배제시키는 것으로서 보인다.
이 예언서의 저작 연대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B.C. 835년이 내적 증거와 보다 가깝게 일치한다. 어떤 왕이 유다의 왕자에 올라 다스린다는 언급이 없으며, 통치의 책임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있다는 암시와 또한 이웃 나라들이 유다의 대적들로 언급되는 등, 이러한 요소들은 요아스의 유년 시절을 가리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Ⅲ. 요나

요나(Yōnāh)라는 이름은 ‘비들기’라는 뜻이다. 이 선지자는 열왕기하 14:52에서 여로보암 2세(739-753)가 넓은 지역을 정복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으로 언급되는데, 이 예언은 그와 같은 열렬한 애국자에게는 매우 잘 어울리는 예언이다. 그의 고향은 북방 이스라엘에 있는 스불론 지파의 가드헤벨이다. 이 선지서의 주제는 이방인이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와 동정이 그들에게까지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을 그들에게 증거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이며 이 임무를 게을리 하면, 요나 자신처럼 그 나라도 재난과 징벌의 깊은 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선지자적 관점에서 볼 때, 요나가 큰 물고기 뱃 속에 사흘 동안 들어가 있었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지내심과 부활의 모형이 된다(마 12:40).

1. 요나서 개관

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요나(1:1-3)
Ⅱ. 요나의 도망과 하나님의 추적(1:4-17)
Ⅲ. 구원을 요청하는 요나의 기도(2:1-10)
Ⅳ. 하나님의 명령이 새로워지며, 니느웨에서 이행됨(3:1-9)
Ⅴ.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를 슬퍼함과 여호와의 반응(3:10-4:11)

2. 저작 연대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요나서의 저작 연대를 B.C. 430년 경으로 추산하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여호와 예배에 참여하는 일에 사마리아인들이 제외되었으며 또한 편협한 배타주의의 압력으로 인하여 모든 이방민족의 아내들이 이혼 당했던 그 시절의 에스라나 느헤미야 등의 유대지도자들의 “좁은 국수주의”에 반대하기 위하여한 토막의 준역사적 이야기를 비유로 만들어낸 것이 요나서라는 전제 때문이다. 좀더 자유스런 견해가 그 나라에 요청되면 그 시대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보다 우주적 이상을 지닌 어느 무명의 저자에게는 가장 시기적절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430년설은 이스라엘 종교사가 일관성 있는 사상으로 발견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요나서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 따라 그 비유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된다. 요나 자신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며 바다는 이방인을 나타내고 큰 물고기는 갈대아 시대의 바벨론을 뜻하며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 삼일간 있었던 일은 바벨론 포로를 나타낸다. 요나가 이방인에게 대한 전도의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유일한 참 신앙을 증거하며 편협한 배타주의의 거추장스런 한계선을 내버려야 할 책임이 유대인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것도 5세기 유다에 있어서는 역시 하나님의 뚯이었다. 요나의 마음을 그렇게도 슬프게 했던 박넝쿨이 갑자기 시들었던 기

적적 사건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 진다.
본문을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면, 기사의 여러 가지 특징들은 우화적 형식과는 거의 조화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큰 물고기가 바벨론을 나타낸다면 니느웨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욥바를 떠나는 배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그 배가 이 풍유와 조화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70년의 포로 기간을 나타내기 위하여 3일이 선택되어야만 했던 이유 또한 분명치 않다.

3. 진정성에 대한 역사적 반론

① 앗수르 시대에 살았던 히브리 저자가 앗수르의 왕을 단지 “니느웨의 왕”의로만 언급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앗수르 시대가 지난 오랜 후 시대에 살았던 저자만이 그러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 왕”이라는 요나서의 용법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만족할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기록들을 보면(악카드어, 히브리어, 헬라어 혹은 라틴어를 막론하고) 니느웨를 언급한 적이 있는 고대 저자들 가운데서 니느웨가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저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B.C. 430년 경에 살았던 저자가 니느웨의 왕이 앗수르의 왕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 고지식한 것이다.
② 또 주장하는 내용은 3:3에서 니느웨가 과거시제 “성이었고”로 말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도시가 없어진지가 오래되었다거나 아니면 그 저자가 “그 도시는 큰 성이었다”(was being, tihyeh)고 말했으리라는 것이다. 저자가 이와 같이 미완료시제(tihyeh, 티에)를 사용함으로써 니느웨 성의 크기를 표현했다는 것은 쉽사리 인식이 된다. 그러나 이때 저자의 특별한 목적은 그 성이 이미 전부터 큰 성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완료시제인 “이었다”(hāyetah, 하에타)였다.
③ 니느웨의 엄청난 크기에 대해서는 기사 속에 믿어지지 않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저자는 그 성이 크기 때문에 그 성을 지나가는데 사흘이 걸린다고 말한다(3:3-4). 그러나 주의 해야할 점은, 본문이 말하는 것은 요나가 그 성을 통과하는데 쉬지 않고 사흘 걸린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전도하면서 그 성을 통과하는데 사흘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길 모퉁이에서 설교하는 일은 메시지가 전해져야 할 장소마다 꽤 긴 시간 동안 멈추는 것을 요구한다. 8세기에 60만 명이나 되는(욘 4:11) 많은 사람이 살고 있던 도시에서 이 임무를 완수하는데 사흘이라는 기간은 결코 긴 것이 아니다. 여기에다가 도시 외곽에 본래부터 있었던 상당수의 인구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④ 작고도 먼 나라에서 온 무명의 외국인의 권고에 응하여 니느웨와 같은 이방인의 도시가 그렇게 빨리 회개했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모든 주민들은 베옷을 입고 그들의 짐승들에게까지도 애통하는 표시를 하라고 하는 왕의 조서는 아주 불합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도 역시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방인들로부터 그렇게 쉬운 반응이 있었다는 것은 아주 기적적인 일로 여겨야 하지만 그러나 그 기사가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모든 일의 배후에는 전능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될 때, 인간에게 확신을 가져다주는 성령의 능력을 누가 제한하겠는가? 만약 니느웨 성 사람들과 가축을 포함하여 전 도시를 삼키게 될 큰 파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짐승들까지도 통회의 표시를 하도록 한 것보다 더 적절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4. 언어학적 논쟁

요나서에 대하여 포로 후 시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본문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소위 아람어풍(Aramaisms)에 습관적으로 호소한다.
① 1:5에는 히브리어에서 일반적으로 배를 의미하는 단어인 오니아(ה???, ’oniyyah)와는 달리 스

피나(sepinah)가 나타난다. 스피나는 아람어에서는 흔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여기서만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것은 덮다(to cover)라는 동사 사판(sāpan)에서 유래된 것이 분명한데, 이것은 페니시아인의 비문들과 구약성경에서 가끔 나타난다. 이 표현은 본래 덮개 있는 배 혹은 갑판 있는 보트를 의미하는 것이며 아람 사람들이 가나안에서 그것을 빌어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우리가 결론 내려도 될 것이다.
② 1:6에는 기억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샤트(‘āsht, 힛필형)가 나온다. 아람어에서는 이 동사가 엘리판타인 파피리(Elephantine Papyri)처럼 초기에 나타난다. 이것과 관계 있는 명사 에세트(‘ēshet)가 아가서 5:14에서는 노리개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아쇼트(‘ashōt, 단수로는 ‘ashtūt)는 욥기 12:5에서 생각, 의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수리아어나 아람어에서는 요나서에서 사용된 의미, 즉 ‘기억하다’라는 의미로는 그 동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③ 관계접속사 쉐(she)가 4:10에서는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1:7에서는 브셀미(beshellemī, 누구로 인하여)라는 두 복합어로 나타난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아람풍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쉐(she)는 절대 아람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히브리어는 그것을 아람어 관계사 디(di)처럼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관계사 디(di)는, 기독교 이전 아람어에서는 이유를 의미하는 전치사 브(be) 다음에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쉐(she)는 드보라의 노래(삿5:7)에서처럼 사사시대와 같은 초기에 나타나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노래가 북방 갈릴리 주민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주목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페니시아인의 비문에는 세(še)가 매우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과 요나의 배에 탄 선원들은 페니시아 태생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화 속에 이 관계자가 나왔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요나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합리주의 자들의 강력한 반대를 생각해 볼 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을 언급하는 것이 적합하다. 마 12:40-41에서 그리스도는 현대 비평주의에 의해 신화적인 것이라고 가장 직접적으로 거부받는 두 가지 사건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요나가 고기뱃 속에 있었다는 것과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데 있어서 그의 설교의 효과성에 대한 것이다. 마 12:40에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만약 요나의 이야기가 한낱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리스도가 금요일부터 부활절 아침까지 무덤에 있었다는 것도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다음은 마태복음 12:41을 보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하였음이어니와 요나 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명백한 것은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옛날 니느웨에 살던 성경도 모르는 이방인의 수준에도 못 미쳤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불 신앙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만약 그러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실제로 회개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비진실이며 그의 책망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된다.

5. 본문의 완전성

합리주의적 근거에 의존하여 아이스펠트(Eissfeldt)는 요나서를 두 가지 전설을 혼합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중의 하나(1-3장)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을 다루며, 다른 하나(4장)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대하여 요나가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다. 사람을 삼켰다가 그것을 다시 토해내는 물고기의 이야기가 다른 문학작품에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는 이 사건을 오직 전설적인 것이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는 전설로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실제적 사건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입증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근본적으로 아이스펄트의 반론은 기적이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한 것이다. 선험으로 인한 추론은 先驗 그 자체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나 선입관 없는 문학비평에 근거해 볼 때 요나서의 배경이 되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밝혀낼 수 있는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다.

제 22 장

아모스서, 호세아서, 미가서

Ⅰ. 아모스서

아모스라는 이름의 뜻은 “짐을 들어올리다”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표제의 뜻은 본서의 저자가 남유다 사람으로서 패역한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사역이 그에게는 실로 무거운 짐이었으나 이를 인내와 담대함으로 훌륭히 수행해낸 사실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아모스서 개관

Ⅰ. 여러 나라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1;1-2:16)
A. 전조 : 진노의 날이 가까웠음(1:1-2)
B. 비인간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이방 이웃나라에게 입힌 심판(이 모든 나라들이 화재와 파멸 을 당함, 1:3-2:3) ① 다메섹(1:3-5) ② 가사(1:6-8) ③ 두로(1:9-10)
④ 에돔(1:11-12) ⑤ 암몬(1:13-15) ⑥ 모압(2:1-3)
C.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죄로 인하여 언약의 두 나라에 임한 진노(2:4-16)
① 하나님을 떠나 거짓 교사들을 좇는 유다도 화재로 파멸을 당함
②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와 근친상간, 하나님께 대한 감사 없음, 의인을 박해한 죄로 인하 여 이스라엘도 파멸을 당하게 됨.
Ⅱ.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경고(3:1-6:14)
A. 이스라엘의 전적부패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심판(3:1-15)
① 특권이 클수록 책임도 큼(3:1-3) ② 아모스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신임장(3:4-8)
③ 가난한 자를 억압하며 사치하고 방종한 이스라엘의 죄악은 황폐와 인구멸절의 벌을 받 게 됨(3:9-15)
B. 목이 곧아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4:1-13)
① 쾌락과 물질을 추구하며 육욕 적인 예배형식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함(4:1-5)
② 심판이 도래한다는 재앙에의 경고가 무시됨(4:6-13)
C. 비탄과 마지막 호소(5:1-27) D. 쾌락을 추구하는 상류층이 포로될 운명(6:1-14)
Ⅲ. 이스라엘에 운명에 대한 다섯 가지 환상(7:1-9:10)
A. 황충 ― 억제됨(7:1-3) B. 불 ― 억제됨(7:4-6) C. 다림줄―모두가 납작해짐(7:7-9)
D. 늦 여름 괴일― 끝이 가까움(8:1-14)
E. 벧엘의 부서진 성전 : 이스라엘이 이방인처럼 취급됨(9:1-10)
Ⅳ. 회복에의 약속(9:11-15)
A. 준비 : 신약 시대(9:11-12)
B. 천년왕국의 완성(9:13-15)


2. 저자

이 책의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정도 떨어진 드고아 출신의 선지자 아모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아모스는 원래 뽕나무를 재배하고 가축을 돌보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7:14) 벧엘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7:13). 그러나 당시 여로보암 Ⅱ세가 거주하였던 우상의 중심지 벧엘에서 자신의 설교가 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유다로 돌아와서 자신의 예언을 기록하였다. 한편 아모스 선지자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율법과 역사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자임을 알게 된다.

3. 자작 연대

아모스의 사역은 여로보암 2세(B.C.793-753)의 통치 후반부에 가까운 760-755년 경이라는 것이 구약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일치되는 견해이다. 이 왕은 군사적 성공이라는 측면에서는 찬란한 공적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북방 왕국의 범위를 931년에 세워졌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회복하는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리품을 통하여 상당히 많은 부가 유입되었고 또한 다메섹이나 북쪽 혹은 북동쪽에 있는 공국들과 유리한 상업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부의 증가와 함께 하류층 사람들의 몫은 줄어들고, 부유한 귀족들에게는 물질주의와 탐욕이 더욱 표면화하게 되었다. 그들은 파렴치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했고 시회적으로 그들보다 이래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냉소적으로 무시했다. 제 7계명의 규정을 무시하던 일반 대중은 가정의 존엄성을 침식했으며 또한 종교적 형식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달래려고 하는 위선적 시도의 죄를 범했다.
본서는 아모스가 벧엘에 대하여 설교하던 연대를 “지진 전 2년”(1:1)이라고 자세히 말해 주는데, 이것은 이후에도 기억되었던 웃시야 시대의 심한 지진이다(슥14:5). 불행이도 이 지진의 때가 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죄우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예비적 징조로서는 도움이 된다. 아모스가 전한 심판에의 경고는 분명히 성취되었다. 1:1의 기사는 아모스가 자기의 메시지를 말로 전하고 나서 적어도 2년 동안은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음을 가리켜 주기도 한다.

4. 본문의 완전성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아모스서의 진정성을 인정하며, “선지서들 중의 가장 초기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열 다섯 절은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분류되어 왔다. 이것은 일정한 고발형식을 지니고 있는 1:9-12을 포함한다(“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파이퍼는 아모스의 역사적 상황을 죄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고발을 했을 뿐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었던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러므로 이러한 모습을 혼란시키는 구절들은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주장들이 이스라엘 사상의 역사적 발달이라는 특수한 이론에 근거한 것이지, 본문 그 자체의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5. 오경과의 접촉점들
① 아모스 2:7 “부자가 한 젊은 여자에게 다녀서”라는 구절은 종교적 매춘에 관한 언급이 분명한데, 이것을 신명기 23:17-18에서 명백하게 금지되어 있다. 아모스의 청중들은 이전의 율법이 정죄하지 않는다면 이 행위를 죄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율법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와 아모스 때에 승인을 받은 것으로서 아모스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작성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② 아모스 2:8은 “전당잡은 옷”을 밤새껏 지키는 자를 비난하는데(출 22:26에서 금지된 행위), 그것은 채권자가 저당 잡은 물건 위에서 잠자는 죄악이다(신 24:12-13).


③ 아모스 2:12은 나실인의 헌신에 대한 언급인데, 이것은 민수기 6:1-12에서만 발견되는 규정이다.
④ 아모스 4:4은 “삼 일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말하는데, 이것은 이방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구약성경에서는 신명기 14:28과 26:12에서만 규정되어진 내용인데, 소산의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릴 것을 말하고 있다.
⑤ 아모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수은제로 드리며……” 이것은 율법―레의기 2:11과 7:13(이것은 P구절이다)에 의해 금지된 행위이다.
⑥ 아모스 5:23은 아모스 시대의 제사의식에는 노래가 수반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역사서에서는 이 의식을 다윗 왕으로 인한 것으로 말한다. 만약 P가 아모스 시대 이후에 작성되었다면, 모세의 규정에 이러한 행위를 포함시키기 위해서 제사의식에서 음악적인 면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오경 전체 어디를 보아도 제사에 음악이나 노래가 동반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⑦ 많은 비평가들이 소위 포로 후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제사용어가 아모스 시대에 마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아모스에 의해 자주 그리고 자유롭게 언급되고 있다.
⑴ 4:5의 낙헌제(ה???, 느다바, 참고, 레 7:16-18;22:18, 민 15:3, 신 12:6-7 등),
⑵ 5:21의 “성회”(ה???, 아사라, 참고, 신 23:36, 민 29:35),
⑶ 5:22 한 절에 한꺼번에 나오는 “번제”, “소제”, “화목제”는 율법의 여러 구절에서 조화적으로 또는 따로 자주 언급된다(레 7:11-14; 8:1-32).

Ⅱ. 호세아서

호세아(Hōshēa’)는 ‘구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명 2인으로서 북방왕국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Hoshea)와 실제로 똑같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 두 이름을 구분하기 위하여 영어성경에서는 이 소선지서의 이름을 항상(둘째 음정에 h가 없이) Hosea 라고 쓴다.
본서의 주제는 북방 왕국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또한 사회윤리와 개인윤리가 크게 부패해 그들의 죄를 진지하게 항의하는 것이다.

1. 호세아서 개관

Ⅰ. 선지자의 훈련(1:1-3:5)
A. 국가의 형벌과 회복을 상징하는 그의 가정생활(2:1-2:1)
① 음란한 성향이 있는 고멜과의 결혼(1:2)
② 자녀들 :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1:3-9)
③ 은혜의 종국적인 승리(1:10-2:1)
B. 그의 가정적 비극,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2:2-23)
C. 고맬에 대한 그의 태도, 명령과 계시(3:1-5)
Ⅱ. 선지자의 가르침(4:1-14:9)
A. 국가의 타락과 그 원인(4:1-6:3)
① 심판의 결정과 판결의 선언(4:1-19)
② 제사장, 백성 및 왕에 대한 경고 : 신당의 함정(5:1-15)
③ 회개에의 권유(6:1-3)
B. 국가의 타락과 그 형벌(6:4-10:15)
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소송진술(6:4-7:16)
a) 변덕, 살인 : 피를 거둠(6:4-11)
b) 계속되는 반역, 간음 및 술취함으로 인하여 긍휼의 막혀짐(7:1-10)

② 심판이 선고됨(8:1-9:17)
a) 광풍을 거두며 세상을 열렬히 사랑함(8:1-14)
b) 이스라엘이 포로 되며 쇠퇴해짐(9:1-17)
③ 반복 및 호소 : 빈 포도나무(10:1-15)
C. 여호와의 사랑(11:1-14:9)
① 변덕스런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불변적 사랑(11:1-11)
② 포로 : 완강히 반역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유일한 방도(11:12-12:14)
③ 지도적 원리와 포로의 종국적 결과(13:1-16)
④ 회개에의 최후 호소, 궁극적 축복의 약속(14:1-9)

2. 저작권과 본문의 진정성

호세아 선지자는 북방 왕국 이스라엘의 백성임이 분명하다. 그는 사마리아 통지 자를 “우리 왕”(7:5)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유다는 부수적으로 언급될 뿐이며, 주된 관심은 열 지파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저자의 말투는 유다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수리아의 아람어 사용 지방에 가까이 있는 북쪽 이스라엘을 연상케 해주는 사투리를 보여준다. 호세아의 아버지의 이름(브에리)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정은 사회적 지위가 있었다. 그의 예언이 제공해 주는 내용을 떠나서는 다른 어떤 전기적 항목들도 알 수 없다.

3. 저작 연대

이 책에 나오는 예언들 중 어느 부분은 여로보암 2세의 죽음 B.C. 753년 이전에 주어진 것이 분명한데, 1장은 이스라엘의 상징적 의미를 예후 왕조의 비참한 최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752년 살룸이 여로보암의 손자 스가랴를 암살했을 때 성취된 것이다. 한편, 5장은 므나헴 왕(752-742)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7장은 1, 2십년 늦은 시기로 추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애굽으로 하여금 앗수르와 싸우게 하려는 정부의 표리부동한 정책을 비난하는데, 이러한 정책이 호세아 왕(732-723)의 통치 이전에 이스라엘에 의해 행해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적어도 25년 이상 전파되었던 설교를 발췌 결합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무방하다. 아마 마지막 편집은 호세아의 설교사역이 시작된지 30년이 지난 해인 725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4. 고멜의 문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야기되는 난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제사장에게는 특히 금지되었고 또한 전체 이스라엘에게도 언짢았던 그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셨을까? 윤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보수주의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이러한 경험은 사실이 아니며 일종의 폭넓은 비유일 뿐이라고 했다. 이 이론을 위하여 어떤 학자들은 고멜이라는 이름이 ‘완성’ 즉 죄의 완성을 뜻하며, 그의 어머니의 이름 디블라임은 제사제물의 우상적인 형태인 건포도 떡(3:1)을 의미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나은 해결책은 호세아가 그때 고멜과 결혼했다는 것과 공공연하게 품행이 단정치 못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만약 호세아 더 나중 시대에 그의 메시지를 전했었다면, 그는 자신의 가정적 비극을 회고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와 손길로 여겼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녀의 미래적 음란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지만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권고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는 명령과 동일한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명령이 이 말 그대로 선지자에게 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Ⅲ. 미가서
미가(Micah)라는 이름은 미가야후(Mī-kā-Yāhū)가 줄어진 형태이다. 이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인가” 하는 의미이다. 메시지의 기본 주제는 구원적 신앙의 필수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의와 주권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 개혁과 실제적 거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적 신앙이 대체적으로 결핍되었기 때문에 북방 왕국과 남방 왕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형벌이 끝난 후에 그 나라는 다시 회복될 것이며 종국에는 메시야가 임하실 것이다.

1. 미가서 개관

Ⅰ. 우상숭배한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1:1-16)
Ⅱ. 특수한 조서 : 상류층에 의한 압박(2;1-3;12)
Ⅲ. 하나님의 은혜의 궁극적 승리(4:1-5:15)
Ⅳ. 배은 망덕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논쟁(6:1-16)
Ⅴ. 신실한 남은 자들에 대한 언약의 성취(7:1-20)
A. 야만적 이기주의와 치욕적 부패가 만연함에 참 이스라엘이 슬퍼함(1:1-6)
B.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를 여전히 의뢰함(7:7-10)
C. 교회 시대와 천년왕국을 통한 그리스도의 승리(7:11-20)

2. 미가서의 저작성

미가는 남방 왕국의 백성으로서 예루살렘 서쪽 약 20마일 지점에 있는 갓 근처의 모레셋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으며,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그의 가문이 비천한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교사역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무도한 귀족과 부자에 의해 착취를 당했던 농부와 평민들의 고통에 특히 관심을 쏟았다는 점이 의미 깊다. 미가는 생애의 많은 부분을 예루살렘이라는 수도에서보다는 시골에서 보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이사야의 경우와 같이 국제 정치와 깊은 접촉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북방 왕국의 몰락에 대하여 한 장(6장)을 할애하였다.

3. 저작 연대

기록 연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추측해본다. 미가가 남유다의 요담(B.C.743-716년), 아하스(731-716년), 히스기야(715-687년) 등 세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선지자로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볼 때 미가의 선지 활동 기간은 최대 약 60년 간으로 볼 수 있다. 미가서 6장에 이스라엘에게 전파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최후 순간의 회개를 통하여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으므로, 적어도 722년의 사마리아 함락 이전에 미가가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해도 무방하다. 그의 설교 사역이 끝난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확실

한 증거가 없다. 렘 26:18-19에 보면, 히스기야의 통치기간 동안 그의 열렬한 경고는 진지하게 받아졌으며, 정부의 후원 아래 일어났었던 개혁 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본서의 기록연대는 선지자 예언 활동 후반기 B.C.700년 경으로 볼 수 있다.

4. 본문의 완전성

비평가들은 6,7장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이스라엘 역사의 후기에 속하는 구절들에서만 나타나는 사상과 동기를 담고 있다는 이유이다. 이 두 장은 포로기간 후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모인 것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크게 멸망할 것을 예언하면서 메시야의 주권 하에서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궁극적 승리가 있을 것을 말한다. 벨하우젠은 7:7-20까지도 포로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신명기적 이사야서와 동시대의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드라이버를 비롯한 보다 온전한 그의 몇몇 후계자들은 이 구절들에게 주어진 그러한 후기 연대의 필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모든 반 초자연주의자들은 4:10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데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또 바벨론 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이와 같은 예언들은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8세기가 이 구절을 기록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인간을 넘어서는 시야를 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곧 살펴보겠지만, 이사야 40-66장이 8세기 저자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이 구절을 미가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제 23 장

이 사 야 서(Ⅰ)

이 선지자의 히브리어 이름은 예사-야후(Yeša‘-Yāhû)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매우 적절하게도, 이사야의 메시지 기본 주제는 구원이란 인간의 능력과 육체의 선행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인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사야서는 기독론을 아주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복음적 선지서”라고 적절하게 불려진다.

1. 이사야서 개관

Ⅰ. 힐책과 약속의 부분(1:1-6:13)
A. 첫째 설교 : 반역이 심판과 은혜를 대항함(1:1-31)
B. 둘째 설교 : 미래의 영광을 위한 현재의 징벌(2:1-4:6)
C. 셋째 설교 : 완고한 나라에 대한 심판과 포로(5:1-30)
D. 넷째 설교 : 선지자가 하나님에 의해 정결케 되고 소명을 받음(6:1-13)
Ⅱ. 임마누엘에 대한 부분(7:1-12:6)
A. 첫째 설교 : 세상 지혜로 임마누엘을 거부함(7:1-25)
B. 둘째 설교 : 신속한 구원은 오실 구속 자를 예시함(8:1-9:7)
C. 셋째 설교 : 교만한 사마리아에 대한 냉혹한 포로의 운명(9:8-10:4)
D. 넷째 설교 : 사악한 제국(앗수르)은 정복되고 영광스런 제국이 도래함(10:5-12:6)
Ⅲ. 하나님의 심판 : 각 나라에게 지워진 짐들(13:1-23:18)
A. 바벨론(13:1-14:27) B. 블레셋(14:28-32) C. 모압(15:1-16:14)
D. 다메섹과 사마리아(17:1-14) E. 구스(18:1-7) F. 애굽(19:1-20:6)
G. 바벨론, 두 번째 집(21:1-10) H. 에돔(21:11-12 I. 아라비아(21:13-17)
J. 예루살렘(22:1-25) K. 두로(23:1-18)
Ⅳ. 일반적인 심판과 약속에 대한 첫째 부분(24:1-27:13)
A. 첫째 설교 : 보편적인 죄에 대한 보편적인 심판(24:1-22)
B. 둘째 설교 : 구원자, 승리자 및 위로자 이신 주께 대한 찬양(25:1-12)
C. 셋째 설교 : 유다의 위로를 기뻐하는 노래(26:1-21)
D. 넷째 설교 : 압제자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보호(27:1-13)
Ⅴ. 이스라엘의 불신자에 임할 고통에 대한 부분들(28:1-33:24)
A. 첫째 설교 : 이스라엘에 있는 술주정뱅이와 냉소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28:1-29)
B. 둘째 설교 :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눈먼 영혼들에 대한 심판(29:1-24)
C. 셋째 설교 : 인간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30:1-33)
D. 넷째 설교 :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으로 인한 구원(31:1-32:20)
E. 다섯째 설교 : 간악한 사기꾼에 대한 벌과 그리스도의 승리(33:1-24)
Ⅵ. 일반적인 심판과 약속에 대한 둘째 부분(34:1-35:10)
A. 첫째 설교 : 이방 세계열강의 명망(34:1-17)
B. 둘째 설교 :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속의 축복(35:1-10)

Ⅶ. 히스기야에 대한 부분(36:1-39:8)
A. 유다에 대한 심판이 비켜짐(36:1-37:38)
B. 유다 왕에 대한 심판이 비켜짐(38:1-22)
C. 소유물로 인한 왕의 교만에 대한 심판 : 바벨론 포로(39:1-8)
Ⅷ. 위로의 부분(40:1-66:24)
A. 평화의 목적(40:1-48:22)
B. 평화의 왕자(49:1-57:21)
C. 평화의 계획(58:1-66:24)

2. 이사야서 저작권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선지자는 고귀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출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국제 관계의 업무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생의 대부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면서 거기서 국내외 적인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는 외국 세력과의 어지러운 동맹관계를 맹렬히 비난했는데, 그것은 정부와 백성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육체의 힘을 의뢰함으로 실패가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가 죽을 때까지(698년 혹은 696년) 이사야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인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히스기야를 통하여 수행되었던 종교개혁 기간 동안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었다. 그러나 성전의 환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경고하신 것과 같이(사6:9-10)그 나라는 대체적으로 그의 영적인 메시지에 대하여서까지도 귀머거리가 되었다. 소수의 열심 있는 신자들을 제외하면, 그 시대를 향한 그의 메시지는 거의 실패했었다. 히스기야의 타락한 아들, 므낫세 시대에는 앞 시대에 있었던 엄격한 여호와 예배를 강하게 반대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당시의 정책에 관한 한 이사야는 자기의 모든 노력이 무너졌음을 보기까지 살았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 그의 동족은 아하스 시대보다도 더욱 더 절망적으로 부패한 상태였다.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므낫세가 통치하는 동안 이사야의 관심은 점차적으로 예루살렘 정복, 바벨론 포로 및 그 너머 있는 회복에로 맞추어졌다. 옛 전통에 의하면 그는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 어느 때에 톱으로 켜져서 순교하였다고 한다(히 11:37). 이사야 37:37-38에 산혜립의 죽음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는 B.C.681년 산혜립이 죽을 때까지는 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당하다.

3. 이사야서의 구성에 대한 비평적 이론들

18세기 후반의 자연신론(deism)이 발달함에 따라, 초자연적 확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미래사건을 예견하는 이사야서의 상당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책이 단순히 인간적 기원의 책으로 취급되었다면, 이러한 성공적인 예언은 그것이 성취된 후에 기록되었다거나 아니면 최소한 성취되었던 때에 기록되었으리라고 설명해야함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 우리는 이사야서 비평역사를 4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⑴ 요한 도에더라인(Johann C. Doederlein)은 이사야 40-66장의 저작연대를 6세기라고 하는 조직적 논증을 출판한(A.D. 1789년) 최초의 학자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주전 8세기의 사람인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함락(B.C. 587년)이나 70년간의 포로를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40장 이후에 나타나는 포로된 유다에 대한 위로의 글들은 그가 쓴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700년 경의 어느 사람이 593년 바벨론을 정복하고 또한 유대인 포로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를 허락했던 고레스 대왕의 등장을 예언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레스의 사역이 예견됐을 뿐 아니라, 이사야 44:28과 45:1이 두 본문에서는 고레스의 이름이 언급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 예언들의 저자는 고레스가 국제적 인물로서 처음 등장하

는 시기(약 B.C. 550년 경)와 그의 확정되는 제국 안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킨 그 사이의 어떤 때에 바벨론에 살았던 무명의 어떤 유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540년 경 바벨론에 살았던 이 허위저자는 비평가들에게 “신명기적 이사야”(Deutero-Isaiah)로 알려지게 되었다.
⑵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바벨론의 미래가 중요함은 제1이사야서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는 근거에서, 보수주의 학자들은 제2이사야서에 대한 포로 시대 연대설을 반대하기 때문에, 이사야서의 전반 39장들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라이프치히(Leip-zig)의 아랍어 교수였었던 에른스트 로젠무엘러(Ernst F.K. Rosenmueller, 1768-1835)는 도에더라인(Doederlein)의 입장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다음의 논리적 단계를 취했다. 만약 8세기의 저자가 바벨론의 중요성을 예언해 주는 40-66장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비슷한 예언을 13장 및 14장 등과 같은 제 1 이사야서의 많은 부분들도 역시 역사적 이사야의 것이라는 점이 부인되어야 하며 그것은 포로기의 무명 선지자의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이러한 바벨론적인 부분들을 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은 다른 구절들, 심지어 신적 예언이 문제시되지 않은 구절들에 대해서도 이사야의 저작성을 의문시하게 된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진정한 8세기 이사야서의 부분들은 수 백 구절로 줄어들고 말았다.
⑶ 이러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중에, 소위 제2이사야서라고 하는 많은 구절들은 바벨론에서의 저작설과 조화될 수 없음이 점차로 분명해지게 되었다. 지리, 식물 및 동물에 관한 언급들은 수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저자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이에 대한 증거를 주장하면서, 괴팅겐(Göttingen)의 버나드 듐(Bernard Duhm, 1847-1928) 교수는 세 명의 이사야 설을 제안했는데, 그들 중 누구도 바벨론에서 살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40-55장(제2이사야서)은 540년 경 레바논 어느 지역에서 기록되었으나, 페니시아인지 수리아인지 분명치 않다. 56-66장(제3이사야서)은 450년 경 에스라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듐이 계속해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이사야서 속에는 유대 역사의 후시대로부터 마지막 편집이 이루어졌던 1세기에 이르는 기간 사이에 추가된 삽입부가 있다고 했다. 죠지 아담 스미스(George Adam Smith)는 자신의 주해용 이사야서 주석에서 이 비평학자를 지지했다. 이사야서 전체에 대한 B.C. 2세기의 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듐이 1세기 삽입설은 지지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⑷ 브라운리(Brownlee)를 비롯한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이사야서 66장 전부가 통일성의 강한 증거들을 보여준다는 견해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이사야 학파를 신봉하는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지지자에게 의해 질서 있게 조직적으로 정리됐음을 시사해 준다고 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제자들의 무리가 8세기 선지자의 말을 다음에 기억하여 이어지는 세대에서 추가되다가 마침내 3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이 학파의 유능한 전문가에 이르러 모든 자료를 잘 짜여진 문학적 걸작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4. 자료구분에 대한 비평적 논증
⑴ 주재와 소재의 상위성
알렉산더(J.A. Alexander)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사야서에는 인간의 일반적인 예측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저자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미래에 대한 예언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이사야서의 내용을 거부하는 사람은 문장의 어투, 문체, 숙어와 역사적, 고고학적 언급 그리고 수사학적 특성, 도덕적 어조 및 종교적 기풍 등에서 나온 구체적 증거를 통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이러한 증거들이 발견되고 소개됨으로써 그가 유지하려했던 앞의 가정은 왜곡된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690년 경 이사야가 직면했던 역사적 상황은 바벨론의 멸망보다 150년 앞서서 고레스의 이름을 예언하는 이상한 징조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다는 종교와 윤리 면에서 너무 쇠퇴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나라의 완전한 백성의 포로 됨을 주장했을 정도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율법과 훈계적 징벌의 약속

대로 행하시려고 했다면, 파멸과 포로 외에 다른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백성이 먼 땅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들의 조상의 땅으로 돌아올 희망은 없어지게 되었다. 토레이와 다른 몇 사람들은 고레스에 대한 두 가지 언급은 본문에 진정으로 속하지 않고 나중에 삽입된 것이라고 하며 제거하려고 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본문상의 증거는 그러한 삭제를 전혀 허용치 않을 것이다. 엘리스는 이사야 44:26-28의 점층법적인 구조를 지적하면서, 고레스라는 이름이 제거된다면 이 구절은 완전히 무너지며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한다. 이 구절에서 가장 큰 강조점은 미래를 예언하며 또한 예언한 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모든 예언적 언어의 근간이 되는 신적 권위에 대한 객관적 확인을 하도록 삽입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실은 바벨론 중심적인 장들(40-48장)은 이사야서 전반부에서 미리 준비되지 않고서는 나타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Young)이 지적한 대로 1-39장은 “계단을 이루고 있다. 즉, 그것은 사람들을 점차적으로 앗수르 시대로부터 갈대아 시대로 이끈다. 이 둘은 합쳐서 전체를 이룬다. 왜냐하면 앞 부분은 뒤에 대한 준비이며, 뒷 부분은 앞의 완성이다.” 즉, 이사야 시대의 분위기는 포로에 위협으로 꽉차 있었다. 사마리아는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산혜립은 701년에 예루살렘까지 정복하기 위해 주권을 확립했다. 신중한 목적 하에서 이사야는 38장과 39장을 36장과 37장 이후에 두는데, 이것들은 701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서술한다. 그 까닭은, 38장과 39장은 다가올 바벨론 포로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기 때문인데, 그것은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자에게 자기의 부를 자랑한다는 그의 교만이다. 그래서 그래서 39장은 갈대아의 포로라는 불길한 예언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 이전의 장들에도 그 나라에 도래할 포로에 대하여 많은 암시가 있다(참고, 3:24-26;5:5-5;11:13;24:11-12;27:13;32:13-18). 이러한 모든 구절들을 후기의 삽입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논점을 교묘히 피하지 않고서는 8세기 이사야가 포로의 도래를 미리 알았다고 하는 사실의 증거들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바벨론적 관점이 두 이야기설 주장자들이 주장하는 제 2 이사야서를 통해서는 광범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한다. 48장 이후에는 포로와 회복에 대한 분명한 암시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많은 설교자들은 므낫세 시대에 유대에서 유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는 상황에 대한 설교이다.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결국 본서가 바벨론 포로 및 회복 등에 대해 얼마나 자주 언급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자세히 열거해 본다면, 여러 해석자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받아온 사람들을 놀라게 해줄 것이다.”다시 말하자면, 제 2 이사야서의 주장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하기가 쉬운 6세기에 대한 언급들을 찾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바벨론 이라는 이름이 1-30장에서 보다 40-66장에서는 덜 언급된다는 점도 사실이다. 통계적인 계산에 따르면, 바벨론이 후반부에서는 4번 나타나지(43:14; 47:1; 48:14, 20), 1-39장에서는 9번 혹은 12번 이상 나타난다.
제 2 이사야서가 팔레스타인에서 기록되었다는 내적 증거. 이사야 40-66장은 바벨론의 지리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있지 않으나, 팔레스타인의 지리에 대해서는 매우 익숙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백향목, 디르사 나무 및 상수리 나무 등과 같은 팔레스타인 고유의 나무들이 언급되고 있다(41:19;44:14). 저자의 지리적 관점은 팔레스타인이 분명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의 명령을 바벨론에 보낸다고 했다(43:14). 저자는 유다의 성읍들이 여전히 서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유다의 성읍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40:9을 살펴보라. 이 구절은 시온을 비롯한 유다의 다른 성읍들이 갈대아의 침략으로 인하여 황폐하게 되었다기 보다는 저작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음을 가정하고 있다. 62:6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희 성벽 위에 파수군을 세우리라.”
만약 그 성읍들이 그대로 서 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다고 이 예언서의 저자가 가정하는 것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58:6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구절은 포로가 되어 갈대아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던 백성에 대한 말로는 매우 이상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직까지 그들 자신에 땅에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법정을 지니고 있었음이 매우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만 사회의 하류층이 손해를 당하도록 법을 집행하는 범법자에 대한 그릇된 재판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제 2 이사야서가 포로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증거. 최근의 학자들은 제 2 이사야서를 팔레스타인이나 혹은 레바논 북부 지역에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40-66장은 후기, 즉 포로 혹은 포로 후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도 역시 내적 증거의 자료에 대해서는 설명 못해 준다는 점이 여전히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8세기 이사야 시대에 만연했던 수많은 죄악들이 제 2 이사야서의 저자가 살던 시대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1:15에서는 피흘림과 폭력을 이렇게 비난한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그리고 이런 죄악들은 59:3,7에서도 다음과 같이 여전히 비난받고 있다.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니라…… 그 발은 행악 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이 두 책에서 선지자는 유다 에게 자행되던 만연한 거짓, 불의 및 압제에 대하여 통렬히 비난한다.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늑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탈취하는 자는 화있을진저”라고 하는 10:1,2과 59:4-9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비슷한 고발이 나타난다.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제 1,2이사야서에서는 모두 그 나라 종교생활을 혐오할 만한 위선으로 묘사한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니라” 또 29:13과 58:2,4을 비교해 보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즐겨하며……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더구나 이 책의 두 부분에서는 유대인들이 신성시하는 숲에서 흥청대는 비밀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말한다. 1:29에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57:5, “너희가 상수리 나무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종교 의식적인 매춘 뿐 아니라 므낫세 시대에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행해지던 가증스러운 습관인 몰렉과 아드람멜렉에게 자녀를 희생으로 드리는 언급이다(왕하 21:6, 대하 33:6). 또 한편 이사샤 57:7은 이러하다.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그리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포로 이전에는 번성했으나 그 이후에는 없었던 예배형식인 산 꼭대기의 예배에 대한 암시가 분명하다. 그리고 62:2-4은 이러하다.“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이러한 일들은 선지자가 이 말들을 기록할 당시에 계속 행해지던 사악한 악들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제 24 장
이 사 야 서 (Ⅱ)

1. 소위 언어와 문체의 상위성
오경 비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서를 난도질하는 자들은 저자의 차이를 주장하기 위하여 드물고 또한 독특한 단어 및 구절들의 목록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증거가 정당한 결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고 취급되어져야 한다. 단순히 단어의 나열로써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게 된다. 네겔스바흐(Nägelsbach)는 이렇게 지적한다. “왜냐하면 진짜라고 인정되는 이사야서 속에는 이사야서 특유의 새롭고 독특한 사상과 단어가 나타나지 않은 곳은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① 제1이사야서와 제2이사야서 사이의 문체상의 유사점은 많고도 분명하다.무엇보다 가장 뚜렷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명칭이 이사야서 전반에 걸쳐 자주 나타나는데,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오직 5회만 나타날 뿐이다.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qedôšh Yiśrā’ēl, 케도쉬 이스라엘)인데, 이것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예언들을 지배하는 중심 되는 신학적 강조점을 나타낸다. 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이 명칭은 1-39장에서 21번, 40-66장에서 14번 나타난다. 구약에서 이 명칭이 나타나는 또 다른 곳은 시편 71:22; 89:18 및 예레미야 50:29; 51:5 등이다. 실제로 이사야서가 이 명칭을 창안했든 아니했든 간에, 이것은 그의 모든 저작에 대한 일종의 권위 있는 보증서가 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전체 작품의 통일성에 대해 강력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제2이사야서는 제1이사야서와는 다른 저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그 문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체가 매우 비슷하게 나타난 곳이 있는데 이는 후기의 저자가 앞의 저자의 제자이거나 모방자임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들은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보수주의 자들은 이 두 이사야서 속에 같이 나타나는 구절은 적어도 40-50구절이 된다고 하며 또한 그것은 동일한 저자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한 구절들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는 1;20; 40:5; 58:14에서 나타난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43:13)는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14:27)과 매우 비슷하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는 35:10과 51:11에 나온다.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11:12)는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56:8)과 비슷함
“이것이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오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 하실 해라”(38:8)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62:2)는 아주 닮았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는 11:6-9과 65:25에 나타난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를 흐를 것임이라”(35:6)는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41:18)과 매우 비슷하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11:2)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61:1)와 아주 유사하다.
35:8에서 우리는 사막을 관통하는 우리는 사막을 관통하는 여호와의 대로(大路)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 사상이 40:3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11,14)는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43:24)와 매우 비슷하다.
② 지적되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제2이사야서와 8세기 선지자 미가 사이에는 문학적 유사성이 많고 또한 뚜렷하다는 점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리니……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사 52:12)―“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미 2:13).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 58:1)―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사 49:23)―“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미 7:17).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사 41:15-16)―“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여러 백성들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미 4:13).
이사야가 미가의 영향을 받았는지, 미가가 이사야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말하기 어려우나, 그들이 서로의 설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성령께서 그들을 움직여서 같은 시대에 같은 말로써 하나님의 메시지를 표현하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분위기와 견해를 표현하고 있으며, 거의 같은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호세아 13:4을 언급할 수 있다. “나 밖에는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 문장이 제2이사야서 후반부에서는 43:11과 45:21에서 두 번 나타나는데, 서로가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호세아는 이사야 직전에 살았기 때문에 젊은 선지자가 나이든 선지자에게서 신중하게 빌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2. 소위 신학사상의 상위성

41장에서 53장까지의 여러 구절에서 언급되는 여호와의 종의 신분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합리주의자들은 그들의 철학적 전제 때문에, 고난의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그 종이 누구인가 하는 최근의 연구를 살펴보면, 최근래의 대부분 반 초자연론자들은 고난받은 종이란 유대 국가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현대 유대주의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메시야에 대한 언급인 “종의 노래” 속에서 해결할 수 없는 난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 형태로 이사야 53:4,5, 8,9을 해석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그들 자신의 죄를 대신 담당했으며 그 종 대신에 이스라엘이 매를 맞았고, 이스라엘 나라는 재판관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고 또한 모든 유대 종족은 법적 살해를 당했으며 어느 부자와 함께 장사 지내었다고 해석되게 된다.

3. 이사야 40―66장의 진정성에 대한 부가적 증거들

① 신약 성경은 제 1,2 이사야서의 저자를 한사람이며 단일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신약의 많은 인용문들은 단지 전통적인 그 제목에 따라서 이사야서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이사야서는 인물을 분명히 암시하는 다른 언급들이 있다.
마 12:17-18은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라고 하면서 이사야 42:1을 인용한다.
마 3:3은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고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눅 3:4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라고 하면서 이사야 40:3-5을 인용한다.

사도행전 8:28에 보면,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 특히 이사야 53:7-8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빌립과의 대화 속에서(행 8:34) 묻기를,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라고 했다.
로마서 10:16은 아사야 53:1을 인용하여 “이사야가 가로되……”라고 말한다.
로마서 10:20은 이사야 65:1을 인용하여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라고 말한다.
가장 결정적인 신약의 인용문은 요한복음 12:38-41이다. 38절은 이사야 53:1을, 40절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다. 그리고 나서 영감 받은 사도는 41절에서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논한다. 분명히 이것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성전환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개인적으로 보았던 그 선지자가 틀림없는데, 이 환상은 이사야 53:1에서 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고 진술되었다. 만약 이사야 6장과 53장을 기록한 저자가 동일인물이 아니라면 (제2이사야설의 주장자들은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굳게 단언한다), 영감 받은 사도가 오류를 범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두 이사야설의 주장자들은 신약성경 속에 오류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심지어 구약성경이라는 영감된 책의 저작권과 같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에서까지도 그들은 동일한 회의를 던진다.
② 제2이사야 설에 있어서 가장 만만찮은 난점은 그 저자의 이름이 보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8세기 이사야가 아니라 제2이사야의 이름이 잊혀졌다는 것은 전혀 생각조차 할 수없는 일이다. 구약성경 전체 중에서 제2이사야서의 예언보다 더 장엄한 구절의 예언은 없다고 하는 것은 분석적 비평가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탁월한 천재의 명성이 그렇게 빨리 사라져서, 70인경이 번역되던 B.C. 3세기 경에는 그의 이름이 완전히 잊혀지기까지 되었단 말인가? 이사야의 글에 대한 성경 외의 최초의 언급은 시락의 지혜서 49:17-25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 사실을 언급한다. “그는(이사야) 시온에서 슬퍼하던 자들을 위로했으며…… 또한 마지막 때에 될 일과 이전에 이루어졌던 감추인 일을 나타내 보였다” 여기에서 “위로”라고 사용된 바로 그 단어가 70인경이 이사야 40:1을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제자가 그의 스승을 그렇게 능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무명인물로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어떤 세계문학에서 비교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가정인데, 이 절단하는 이론의 주장자들은 이 가정에 몰두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사실이 있다. 즉, 예언적 작품에 대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이 지켰었던 거의 불변적인 법칙은 어떤 예언적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선지자의 이름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바댜와 같이 짧은 작품 속에도 저자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의해 강조된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선지자의 메시지를 진정한 주의 대변자의 권위 있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그들의 그 선지자의 신분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영이 지적한 바와 같이, 무명의 저술 선지자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의 정신에 크게 반대된다.
또한 가장 짧고도 특출하지 않은 소선지서들이라도 그 메시지와 이름이 기억되었다고 한다면, 그 나라가 나은 가장 탁월한 선지자의 이름이 후세에 남겨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0-66장의 저자의 이름은 참으로 보존되었으며, 그 이름은 8세기 이사야 그 자신이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제 25 장
나훔서, 스바냐서, 하박국서

Ⅰ. 나훔서

나훔(Nāḥûm)은 “위로”라는 뜻이다. 본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인데, 반역하는 불신자들에 대한 보응과 그의 백성에 대한 긍휼을 수반하는 거룩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앗수르 세력을 파멸시키시는 그의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변호를 보고 기뻐한다고 묘사된다.

1. 나훔서 개관

Ⅰ.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찬송(1:1-2:2)
A.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과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선하심(1:2-11)
B. 도래하는 유다의 회복(1:12-2:2)
Ⅱ.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2:3-3:19)
A. 그 성의 보좌와 멸망(2:3-13)
B. 니느웨 멸망의 이유(3:1-19)

2. 저자의 출생지

나훔은 엘고스(Elkosh)출신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이 성읍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합하는 이론들이 있다.
⑴ 제롬(Jerome)은 엘고스를 갈릴리에 있는 엘게시(Elkesi) 혹은 엘카우제(El Kauze)와 동일시했다. ⑵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가버나움과 동일시했는데, 이는 가버나움(Kepar-Nāḥûm)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엘고스는 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나중에 개명되었을 것이다. ⑶ 매우 희박한 추측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앗수르의 모술(Mosul) 근처에 있는 알쿠스(Alqush)와 동일시했다. ⑷ 도한 다른 사람들은 엘케세이(Elcesei)라고 했는데, 위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그것은 예루살렘과 가사 중간지점인 시므온 지역의 벧 가브레(Bet Gabre) 아래쪽에 있는 유다 마을이었다. 아이스렌(Eiselen), 라븐(Raven) 및 영은 이 네 번째 추측을 지지하는데 동의한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적 증거가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 저자는 유다 왕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3. 저작 연대

나훔서는 앗술바니팔 군대 이전의 더배의 멸망을 661년에 일어난 사건, 즉 과거의 사건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에, 이 예언은 그 이후에 쓰여졌음이 분명하다. 반대로, 니느웨의 멸망은 미래의 사건으로 예언된다. 그러므로 본서는 B.C.612년 이전에 저작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학자들은 그 예언의 성취에 더 가까운 연대를 택하는데, 그것은 625년 혹은 620년이다. 이러한 성취된 에언을 사건후의 예언이라고 설명하는 합리주의 비평가들은 자연히 그 연대를 612년 후로 추정한다.
4. 나훔의 메시지

나훔 2:6은 매우 정확한 예언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니느웨의 주요 성벽이 대홍수에 휩쓸려 무너졌으며, 이러한 방어제의 붕괴는 그 성을 포위하고 있던 메대와 갈대아로 하여금 무난히 그 성을 습격하도록 했다고 후기의 역사는 기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훔이 앗수르 수도의 멸망을 바랐다고 하면서 우스꽝스런 입장이라고 반대하며, 그것을 국수주의적 광신주의와 복수심에 불타는 원한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선지자가 지니고 있던 입장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그의 열렬한 소원은 여호와께 자기의 거룩을 이방인 앞에서 입증하심을 보는 것, 즉 모든 속국을 그렇게 오랫동안 무자비하게 짓밟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 제국의 무정하고 잔인한 압제에 대적하여 여호와의 거룩이 입증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앗수르의 철저하고도 본보기 적인 멸망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은 결국 무력이 정의가 아님과 아무리 강력한 이교도일지라도 여호와의 공의로운 진노 앞에서는 전혀 무력함을 배울 수 있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멸망 사실과 그 방법을 그렇게 놀라우리 만큼 정확하게 예언하실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주권을 고대 세계에 가장 잘 입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Ⅱ. 스바냐서

스바냐(ה?נ??)는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라는 뜻이다. 그의 주제는, 어떠한 반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여전히 그의 모든 세계를 굳게 지배하신다는 것과 불순종하는 유다 에게 무서운 징계를 가하시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나라들을 완전히 멸하심으로 가까운 장래에 그의 지배권을 입증하신다는 것이다. 적당한 때의 회개만이 이 진노를 유예시킬 수 있다.

1. 스바냐서 개관

Ⅰ. 예상되는 주의 날(1:1-3:7)
A. 유다의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1:1-2:3)
B.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2:4-15)
C. 예루살렘의 죄로 인한 재난(3:1-7)
Ⅱ. 미래 왕국의 설립(3:8-20)
A. 나라들에 대한 심판(3:8-13)
B. 기뻐하는 남은 자와 메시야 왕국(3:14-20)

2. 스바냐서의 연대와 저자

스바냐는 구시의 아들이며 히스기야의 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히스기야는 바로 히스기야 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연대기적 내용을 따르면, 사실상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예루살렘을 “이곳”(1:4)으로 말하며, 그 지형에 대해 친숙하게 아는 듯이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루살렘에 살았음이 분명하다. 아마 그는 요시야 시대 초반, 즉 B.C.621년 부흥운동 이전에 그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윤리적, 종교적 상황은 매우 저급했었는데, 그것은 므낫세와 아몬 시대의 악한 영향 때문이었다(3:1-3,7).
일부 합리주의 비평가들은 2:4-15과 3:18-20의 진정성을 의문시하며 이 구절들을 포로 후기의 것으로 추측했다. 그들의 그러한 연대추정의 주요한 기준은 히브리 종교사상이 진화론적 과정 속에서 단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가 하는 이론이다. 아이스펠트와 몇몇 학자들은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2:8-11)에 대해서 포로 후기 연대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그 심판들은 오바댜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구절은 그것과 나란히 놓여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경고와 매우 잘 조화가 된다.

3. 스바냐의 메시지

스바냐는 B.C.630년 경 카우카수스(Caucasus) 지역에서부터 급습해 와서 메대와 앗수르로 몰려온 스쿠디아인들(Scythians)의 갑작스럽고 파괴적인 침략에 대해 언급하는 것처럼(1:10-18) 보인다.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그들이 수리아를 휩쓴 후에 애굽을 위협했기 때문에 프사메티쿠스 1세(Psammetichus Ⅰ)는 그들은 돈을 주고 내어보냈다고 한다. 호전적인 유목민에 대한 이러한 징벌은 유다가 유린당하게 되는 여호와의 날이 다가옴을 이스라엘에게 통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말하기를 블레셋도 하나님의 심판을 겪게 되며(2:4-7), 암몬과 모압 및 구스와 앗수르와 같이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들짐승만이 거하는 황량한 광야가 되게 된다(2:17). 이러한 무서운 모든 경고와 함께, 모든 나라에게보다는 주로 남은 자들에게 전해졌던 다음과 같은 회개에의 호소가 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3). 이 호소는 요시야의 동조자들에게 호응을 얻는데, 므깃도의 전투(B.C.609)에서 그들의 영웅이 불시에 죽은 후에 그들은 유다의 힘을 유지할 수가 없었지만 이 회개에의 호소에 호응했다.
3:13에는 이스라엘의 궁극적 축복의 약속에 대해 천년왕국적 의미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미래의 시대는 전세계적인 신앙의 시대이며, 모든 나라 사람들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일심으로 여호와를 섬길 것이며 같은 신앙의 말을 할 것이다(3:9-10).

Ⅲ. 하박국서

하박국(Ḥabaqquq)이라는 이름은 “껴안은 자”, “매달리는 자”라는 뜻이다. 이 선지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약속성취를 방해하는 분명한 난관들에 직면한 신앙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난관들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계시를 통하여 해결하려고 고심하고 또 해결하게 된다. 그리고 선지자는 즐거운신뢰의 찬송으로 끝을 맺는다.

1. 하박국서 개관

Ⅰ. 신앙의 문제(1:1-2:20)
A. 하나님께서 사악함을 왜 저지하지 않고 허용하시는가?(1:1-12)
① 유다에서 압제가 저지되지 않음(1:2-5)
② 하나님의 징계로서의 갈대아인(1:6-12)
B. 악한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승리하는 것을 하나님은 왜 허용하시는가(1:13-2:20)
① 갈대아인의 무자비한 잔인성과 어리석은 우상숭배(1:13-17)
② 하나님의 응답을 겸손하고 충실하게 기다리는 신자(2:1-4)
③ 갈대아인의 다섯 가지 죄로 인하여 그들을 치시는 심판(2:5-9)
④ 그의 땅 위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주권(2:20)
Ⅱ. 모든 의심이 해결됨 : 신앙의 기도와 흔들리지 않는 신뢰(3:1-19)
A. 부흥을 위한 기도(3ㅣ1-2)

B. 미래에 대한 분명한 상징이 되는 주의 급속한 심판(3:3-16)
C. 신자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그의 거룩하심의 변호를 받음(3:17-19)

2. 저자와 저작 연대

하박국은 여호야김 시대에 사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갈대아인들의 존재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무서운 존재라고 언급되기 때문이다(1:6-10). 이것은 B.C.612년의 니느웨 멸망 이후 시대와 가장 잘 조화되는데, 어쩌면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던 B.C.605년 이후일지도 모른다. 갈대아인의 팔레스타인 정복에 대한 예언은 매우 빨리 성취될 것은 예정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도 무방하다. 하박국 1:2-4은 유다 귀족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탐욕스런 착취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시야의 죽음(B.C.609) 이후 시대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박국이 B.C.607년 혹은 606년 경에 그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1:2-4이 유대 본국의 압제자들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을 싫어하고, 그들을 애굽인과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앗수르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1:2-4의 본문에 이방침략자들이 언급된다는 증거가 없고, 부자들에게 유리하도록 한 재판정의 속임수는 국내적인 죄악을 말한다.
일부 비평가들의 생각에 의하면, 포로 전기의 사람 하박국이 비록 1장과 2장의 저자였다고 하더라도 1장과 2장의 자료는 후기의 어느 편집자가 재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평가들은 3장은 선지자의 말이라기 보다는 찬송이며 또한 첫 절과 마지막 절에서 음악 용어가 언급된다는 근거에서 3장에 대한 하박국서의 저작권을 한결같이 의문시한다. 이와 같은 근거 위에서 파이퍼는 3장의 연대를 B.C.3,4세기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윗 시편에 나오는 음악용어는 후기의 것이며 또한 아모스 6:5을 비롯한 구절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기에 음악이나 노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하는 정당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이 찬송을 쓰고 그것을 노래하는 일에 매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 성경의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음악 용어가 후기 저작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또한 하박국이 주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찬송을 지을 수 없었다고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비평가 자신들도 쉽게 지적하듯이, 선지서 들의 많은 부분은 성격상 주로 시이다. 일부학자들은 쿰란 동굴Ⅰ에서 나온 하박국서 주석에는 제3장이 빠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매우 중시했다. “그 두루마리에서 이것이 빠진 것은 이 이론과는 모순되지만 그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제3장이 유다 계약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증명되지 못한다. 이 찬송은 다른 장들에서 사용되었던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박국서 주석이 완성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70인경은 3장 모두를 싣고 있는데, 70인경의 이 부분이 하박국서 주석보다 더 오래된 것인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3. 하박국서의 메시지

하박국의 예언은 특이하다. 강포와 패역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왜 하나님은 속히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구원치 않는가 하는 신앙적 물음에 대해 하박국 선지자의 두 가지 질문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형식을 빌어 답해 줌으로써 악인의 대한 심판에 필연성과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구원의 확실성을 극명히 증거해 준다. 하나님은 갈대아인의 죄를 알고 계시며, 마침내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변호하실 것이다. 이러한 의심들이 모두 사라지자, 하박국은 거룩한 기쁨의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변호하시고 그의 주권을 온 세상에 나타나셨던 과거 순간들, 출애굽 가나안 정복 그리고 사사시대를 회상했다.


제 26 장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서

Ⅰ.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의 히브리어 이름은 (וּה??ר? , Yirme-Yāhû)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본서의 주제는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부터 돌아서야 포로로 잡혀가는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호도니 경고가 있다. 사회에 모든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변명할 여지없이 죄 속에 빠져있다고 책망한다. 유다가 회개치 않은 한 바벨론 포로는 불가피하다. 온 나라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징벌로서 갈대아인들의 멍에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의로운 가지에 의해 이스라엘이 구원될 날이 올 것이므로 참 이스라엘은 혈육의 팔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1. 예레미야서 개관

Ⅰ. 요시야와 여호야김 시대의 에언들(1:1-20:18)
A.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1:1-19)
B. 나라의 죄와 무감각(2:1-3:5)
C. 북에서(갈대아인들)재앙이 쏟아질 것에 관한 예언(3:6-6:30)
D. 바벨론 포로의 위협(7:1-10:25)
E. 깨어진 언약과 허리띠의 표징(11:1-13:27)
F. 가뭄, 미혼 선지자의 표징, 안식일에 관한 경고(14:1-17:27)
G. 토기장이 집의 표징(18:1-20:18)
Ⅱ.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에 있었던 후기 예언들(21:1-39:18)
A. 시드기와 예류사렘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채찍으로서의 느부갓네살(21:1-29:32)
B. 미래의 메시야 왕국(30:1-33:26),개인주의의 교리(31:1-40)
C. 시드기야의 죄와 레갑인들의 충성심(34:1-35:19)
D. 선지자의 두루마리를 태우는 여호야김(36:1-32)
E. 포위 중 옥중에 있는 예레미야(37:1-39:18)
Ⅲ. 예루사렘 멸망 후에 관한 예언(40:1-45:5)
A. 유다의 남은 자 사이에서 사역(40:1-42:22)
B. 애굽에 피난간 자 사이에서 사역(43:1-44:30)
C. 바룩에 대한 격려(45:1-5)
Ⅳ. 열방을 책망하는 예언들(46:1-51:64)
A. 애굽(46:1-28) B. 블레셋(47:1-7)
C. 모압(48:1-47) D. 암몬, 에돔, 다메섹, 아라비아, 엘람(49:1-39) E. 바벨론(50:1-64)
Ⅴ. 역사적 부록(52:1-34, 유다의 멸망과 포로)

2. 저자의 약력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 즉 B.C.626년 그가 20세 되던 해에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아나돗이라고 하는 그의 고향 땅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해마다 유대의 종교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 그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풍부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친척 중 한 사람이 부도를 낸 후 재산이 몰수되었을 때 그것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다시 살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시야 치하 때 정부로부터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고 왕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하자 비장한 애가를 불렀다. 그렇지만 에레미야는 다른 동료 제사장들과 친척들로부터 특별히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언약을 배반한 백성들을 책망하고 세상적인 방법대로 사는 그들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다.
요시야가 죽은 후 우상숭배자들과 친애국파가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예레미야와 그가 주장하던 모든 메시지에 치명적인 어려움이 닥쳐오게 되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장로들과 왕자들이 예레미야를 돌보지 않았다면, 그는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에레미야 7-10장 사이에 있는 그 유명한 성전의 설교에서 그는 “대 규탄”을 했기 때문에 체포당하게 되었으나 장로들로 말미암아 피할 수가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가 금지되었다. 그래서 그는 바룩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을 때마다 백성들에게 선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글이 여호야김 왕의 손에 들어갔을 때 난로 가에서 서기관이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찢어서 태우고 말았다. 후에 여호야김 왕의 후계자인 시드기야가 국수주의적인 귀족들의 영향을 받아 예레미야를 감옥에 넣게 되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를 반역자로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남몰래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갈대아인이 B.C.598년에 침공한다는 에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예레미야가 깊은 토굴에 갇혀 죽게 되자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위험한 지경에서 보호해 주었다.
느부갓네살이 폭풍처럼 도시를 뒤엎을 때 에레미야는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왜냐하면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느부갓네살 왕에게 복종하도록 강권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머물기로 작정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 외의 게릴라들과 편당들이 무리들을 위해 사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달랴가 꾐에 빠져서 죽임을 당한 후에는 팔레스타인에 남아서 느부갓네살의 분노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일의 땅에 가서 피해 살기를 원하는 유대의 남은 자들 때문에 애굽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애굽에서 예레미야는 수년 동안 더 예언하다가 아마 그곳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된 것 같다.

3. 예레미야서의 역사

여호야김이 불태워 버린 예레미야 예언의 원본 외에도 그 후대의 판이 있었음을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후대 판은 우리가 지금 맛소라 사본에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더 앞서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70인역으로부터 알 수 있는데 사실 70인역은 맛소라 사본보다 ⅛이 더 짧다. 그것은 또한 장의 배열에 있어서도 다르다. 마소라 사본의 46-51장까지가 70인역에서 25장 바로 뒤에부터 있으며 그것도 역시 배열 순서가 좀 다르게 되어 있다. 맛소라 사본의 예레미야 33:14-26은 70인역에서는 빠져있다. 아마 이 초기의 판은 선지자가 살아 있었던 동안에 출판되었던 것 같고 애굽에서 배포되었던 것 같다. 에레미야가 죽은 후에 바룩이 그 선생의 설교를 모두 모아서 더 논리적인 순서로 일목요연하게 배열하였던 것 같다. 맛소라 사본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레미야 사후의 바룩판을 보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36:32은 두 번째의 임시 판이 여호야김의 치하 때 출판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음을 주목하라. 또한 예레미야는 이 초기의 설교에다가

시드기야 치하 때와 그 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메시지를 첨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 예레미야서의 진정성

대부분의 합리주의적 비평가들을 예레미야서의 어떤 부분들이 예레미야 자신과 그의 비서 바룩에게 속하였음을 부인한다. 그 저작권을 반대하는 몇몇 구절들을 열거하자면,
⑴ 10:1-16 : 이유는 이 부분이 포로 중에 있는 유대인들을 제 2 이사야서의 어투로서 우상숭배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⑵ 17:19-27 : 이유는 이 부분이 에스겔서와 제사법전, 즉 예레미야서 보다도 조금 후대의 작품들과 유사하게 엄격한 안식일 준수하기 때문이다.
⑶ 30, 31장 : 이유는 이 부분이 포로 후 시대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기대와 에스겔 18장에 있는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⑷ 51장 : 이유는 41절에서 바벨론을 아트바쉬(Athbash) 용법으로 쉐샥(Sheshakh)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트바쉬 용법은 후대의 문학적인 기교로 간주되고 있다. 아트바쉬는 하나의 암호로서 히브리어 알파벳 중 맨 끝에 있는 것이 첫번째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끝에서 두번째 있는 것이 앞에서 두 번째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을 제시하는 암호이다. 따라서 바벨(B-b-L)은 KJV에 있는 바와 같이 쉐샥(Sh-sh-k)이라는 암호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후대의 작품으로 몰아붙이는 모든 기준들이 증명되지 않은 가설 위에 서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예를 들자면 오경의 P문서 외 제 2 이사야서가 포로 후 시대의 것이라든가 또한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가설 등이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사이에 큰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가설 역시 정당화시키기 어렵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에 따르면 이 두 선지자는 동시대에 사역을 하였고 예레미야의 후반기에는 최소한 같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1:29-30은 에스겔 18:2-3과 아주 유사하다. 아마 에레미야가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에스겔이 받아서 확대된 설교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5. 기타 역사적인 문제점들

29:10에 있는 70년간의 포로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서 이 70년을 어떻게 계산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유다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B.C.586년 경이다. 539년에 바벨론은 바사에 정복되었고 그로부터 1,2년 이내에, 즉 536년 경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유다로 돌아가고자 하던 사람들이 발길을 내딛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586년은 536년은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기간을 설정해야 한다. 느부갓네살이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것은 B.C.605년이었고 그 때 상당수의 포로들(다니엘, 사드락, 아벳느고, 메삭)을 잡아갔기 때문에 이 연대가 시작년으로 보여질 수 있다. 따라서 536년은 약 70년 약 70년이 되는 해이다. 또다른 가능성은 느부사라단 장군이 586년에 성전을 파괴한 것을 70년의 시작년으로 보고 그 포로기간이 제 2 성전이 완전히 재건된 해, 즉 516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두 가능성 중에 스가랴 1:12은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성읍들을 긍휼이 예기치 아니 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70년이 되었나이다.” 이것을 말할 때를 약 B.C.519년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천사들까지도 70년이 아직 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 19:10의 은혜의 약속은 성전이 재건되기까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지난 102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비평가들이 43:9-13과 44:30에 있는 에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했다. 거기에 따르면 애굽 북쪽이 느부갓네살 왕 치하 때 갈대아인들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된다는 내용이다(겔 29:9-20). 비록 요세푸스가 『고대사』10.9:5-7에서 이것에

대하여 명백한 기록을 제시하고 있지만 헬라의 역사가들은 이와 같은 침공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하난은 그가 건져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만나라는 장소에 이르렀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50년 느부갓네살 치하 23년에 느부갓네살은 수리아를 침공하고 그곳을 정복한 후 암몬과 모압으로 더불어 전쟁을 치룬 후 이 모든 열국들을 자기의 무릎 아래 꿇게 한 후 그는 애굽을 점령하기 위하여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고 기 당시 통치하던 왕을 죽인 후 다른 사람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그는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바벨론으로 데려옴으로써 히브리 민족의 멸망을 가져왔다.” 많은 권위 있는 학자들이 요세푸스의 진술이 단순히 히브리어 성경을 지지하기 위하여 꾸며낸 것으로 처리해 버리곤 했다. 그러나 옥스포드의 탐슨(R.C. Thompson)은 이렇게 말하였다. “핀치(Pinches)가 처음으로 출판한 바벨론의 역대기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이 그의 치하 제 37년, 즉 B.C.567년에 애굽을 침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어디까지 쳐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몇몇 바벨론의 남은 자들이 애굽의 피라미드 근처에서 작은 바벨론을 세웠다는 전통이 있는데 그 도시는 아우그수투스 시대에 중요한 기지로 있었으며 그의 군대가 그곳에 어떤 표식을 남겨 두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ANET에는 영국 대영 박물관에 있는 단편 바벨론 원문이 아래와 같이 번역되어 있다. “제 3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미찌르(Mi-sir) 애굽을 향해 진군하였다.” 루블 박물관에 있는 네쉬호르(Nes-ḥor) 비문에 또다른 고고학적인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네쉬호르는 호프라(Hophra: 애굽어로는 Uaḥ-ib-Ra) 치하에 남부 애굽의 관리로 있었던 사람이다. 이 전기적인 기록에서 그는 애굽을 침범한 아시아의 군대와 북편 백성들이 나일 계곡을 따라 에티오피아까지 진군하였으며 신들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다행스럽게 후퇴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증거를 통해서 볼 때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쳐들어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그 침공이 아주 심각하고 충격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Ⅱ. 예레미야 애가서

상당히 작은 이 소품의 히브리어 표제는 1;1에 나타나는 단어인 에카(’ēkah, 슬프다!)이다. 이 책의 주제는 죄악 많은 유대에 임한 재앙과, 거룩한 도시와 주님의 성전에 임한 처참한 멸망을 애도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선지자는 매맞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손길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1. 예레미야 애가서 개관

Ⅰ. 황폐하고 버려진 예루살렘(1:1-22)
Ⅱ.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 회개만이 유일한 소망(2:1-22)
Ⅲ. 하나님의 옛 은혜를 생각하며 애통함(3:1-66)
Ⅳ. 시온의 옛 영광과 현재의 재난(4:1-22)
Ⅴ.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며 회개하는 민족(5:1-22)

첫 네 장이 아크로스틱(acrostic) 형식으로 기록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장, 2장, 4장은 각각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하여 22절로 구성되어 있고, 3장은 한 알파벳을 세 절로 이어 66절로 구성되어 있다.

2. 저작권
이 책은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진술하지 않고 있으나 예레미야가 이 책을 썼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일반적 전통이다. 이 전통은 70인역과 아람어로 된 요나단의 탈굼 표제에 반영되어 있

다. 오리겐과 제롬과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예레미야가 저자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현대의 비평가들은 내증에 근거하여 이 전통을 부인한다. 예레미야의 이 두 예언이 문체가 너무나 다르고, 두 서너 가지의 역사적인 암시들을 볼 때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 보다 훨씬 후대의 상황과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반면에 B.C.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외에 다른 어떤 후대의 사건이 이와 같은 비극적인 애가를 짓도록 영향을 줄 수 있었는지 의문시된다. 만약 예레미야가 저자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사람이어야 하며 갈대야 정복자들에 의해서 시온이 겪은 그 처참한 비극을 목격한 자라야 한다. 문체와 어투에 있어 애가서와 예레미야서 사이에 괄목할 만한 유사성들이 많이 있다. 예레미야의 저작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드라이버(S.R. Driver) 같은 사람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통받은 시온의 처녀 딸”(애 1:15, 렘 8:21). 선지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애 1:16a; 2:11, fpa9:1,18b). “사랑하는 자 가운데 위로하는 자가 없다”(애 1:2)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너를 잊고 너를 찾지 아니하니”(렘 30:14).이 두 문장을 비교하라. 둘 다 하나님의 심판의 포도주 잔을 의미하고 있다. 애가서 4:21은 에돔에 대해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보라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도 마시지 않지 못하겠거늘 네가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마시리라”(렘 49:12).
두 저자 사이에 관점이 다르다는 것에 근거한 논리는 건전한 성경해석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로서 애가 4:17에 있는 바와는 달리 예레미야는 에굽이 유다를 도울 것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애가 4:17에 곡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애가 4:17은 애굽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애가 4:17에 따르면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았도다.” 이 구절에서 저자는 자기 개인의 소원을 말하는지 혹은 이스라엘 나라를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표현한 것 같지 않다. 또한 비평가들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믿었는데 애가 3:59-66은 갈대아인이 하나님의 복수의 몽둥이를 실컷 맞아야 할 합당한 원수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충돌이 있다고들 주장한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서로 충돌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히 바라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동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복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 27 장

에 스 겔 서

히브리 이름 예헤즈케엘(Yeḥezeqē’l)은 “하나님께서 강건케 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에스겔 예언의 주제는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백성을 다시 바로 잡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완전히 배도에서 돌아가게 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조치였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때가 오면 여호와께서 그가 때렸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뿐 아니라 새 성전에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이룩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1. 에스겔서 개관

Ⅰ. 선지자의 부름과 사명(1:1-3:27)
Ⅱ. 예루살렘 멸망전의 유다에 대한 예언들(4:1-24:27)
A. 제5년에 받은 메시지(B.C.593-592, 4:1-7:27―상징과 설교로서 멸망을 예언함)
B. 제 6년의 받은 메시지(B.C.592-591, 8:1-19:14)
C. 제7년에 받은 메시지(B.C.591-590, 20;1-23:49)
D. 제9년에 받은 메시지(B.C.590-589, 24:1-27―에스겔의 아내,이스라엘에 대한 애곡이없음)
Ⅲ. 이방열국에 대한 예언(25:1-32:32)
A. 암몬, 모압, 에돔, 그리고 블레셋(인근 국가들,25:1-17)
B. 교만한 상업적인 물질주의의 상징인 두로와 시돈(26:1-28:26)
C. 자만으로 가득찬 우상숭배의 상징인 애굽(29:1-32:32)
Ⅳ. 멸망 후의 재건과 회복에 관한 예언들(33:1-48:35)
A. 새 왕국의 건설에 대한 단계들(33:1-39:29)
B. 최후의 왕국과 후일의 성전(40:1-48:35)

2. 저자의 약력

에레미야와 같이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다. 에스겔의 아버지의 이름은 부시(Buzi)로서 느부갓네살이 B.C.597년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간 것을 생각할 때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 같다. 에스겔은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B.C.592년에 시작하게 된다. 그는 그때에 약 30세였다(1:1). 그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은 그의 아내가 B.C.587년 갑자기 죽음으로써 끝나고 말았다(24장).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 사이에 설교자로 활약하였고 종종 장로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문의를 받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메시지에 대하서 실제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3. 에스겔서의 진정성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대성

이 책이(에스겔서) 6세기의 선지자 에스겔이 쓴 것을 부인하는 데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중심된 근거를 제시한다.
①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선지자가 미래의 축복에 대한 약속을 쓴 사람일 수 없다. 에스겔

은 어둠과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에게 그 어떤 왕의 실오라기 같은 빛도 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론 : 대부분의 구약의 선지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참람한 심판을 예언하면서도 또한 그 후에 있을 회복과 은총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모스서, 호세아서, 미가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② 에스겔서의 저자는 바벨론에 사는 사람의 관점보다도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의 관점을 가지고 글을 썼다고 단언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의 거민의 복지를 위하여 상징적인 예언을 실제적으로 하게 되는데 만약 그가 약 1,000마일 이상이나 되는 갈대아 땅에 살고 있었다고 하면 그들을 향하여 예언인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반론 :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목전에서 상징적인 행동을 했다는 힌트나 암시가 전혀 없다. 반면에 오히려 그의 청중들이 바벨론에서 그와 함께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시민들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왕하 24:14에서 우리는 여호야김 왕이 B.C.597년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왕자들과 군인들과 같이 갔으며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서 간 숫자는 만 명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에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에스겔이 상당수의 예루살렘 사람들 앞에서 설교했다는 것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4. 에스겔서와 성결법전 사이의 상충점

에스겔서에 있는 규칙들은 D문서와 H문서와도 다르고 P문서와도 다르다는 사실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에스겔서에는 십일조와 장자가 태어났을 때 바쳐야 할 예물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순절과 그것에 관한 규례 뿐 아니라 제단을 올라갈 때 피해야 할 구체적인 규례들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방금 언급한 이 모든 문제들은 신명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에스겔서가 P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된 원리가 에스겔이 D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결론을 갖게 된다. 에스겔이 P에 제시한 바와 동일한 제사제도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즉, 번제와 속죄제, 화목제, 의식적으로 정하고 부정한 것에 대해서 명백히 구별하는 것들, 이 모든 규례들은 이 희생제도가 독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을 됫받침해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성전의 치수이다. 에스겔서 마지막 부분에 있는 성전의 치수는 제사 법에 있는 것과도 다를 뿐 아니라 열왕기상 6,7장에 언급된 솔로몬의 성전 치수와도 전혀 다르다. 에스겔서에 있는 차이점이 초기의 저작권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기준을 일관성 있게 적용해 볼 때 에스겔이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더 일찍 있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될 때 결국 우리는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보게 되며 저들의 기준이 만족스럽지 않음을 시인하게 된다.

5. 에스겔 40-48장의 성취에 관한 문제

이 장들은 미래의 팔레스타인이 그 도시와 성전과 함께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길고도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이것을 읽는다고 하면 여기 아홉 장에 걸친 예언이 책의 앞 부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의도되었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게 된다(예를 들자면 26-28장에 있는 두로와 시돈의 심판―이것은 그 이후에 역사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문제는 40-48장에 제시된 그 계획이 언제 성취되었는가 하는데 있다. 만약 여기에 구차적으로 제시된 바에 따라 성전이 세워지지 않는다고 하면 선지자가 제시하고 있는 거룩한 도시도 없을 것이고 12지파가 땅을 분배하는 것도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성경의 이 부분이 거짓 예언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에스겔 예언의 결론은 미래에 실현될 하나님 왕국이 선지자

에게 아주 익숙했던 형태로 제시된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즉, 그의 시대에 그가 이해했던 형태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들의 본질적인 진리는 새로운 시대 곧, 그리스도인 시대에 구현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개요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다.”(계 21:1-22).
에스겔 40-48장을 신약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생기는 몇 가지 문제점을 피해갈 수 있다. 이것은 특히 피의 제사를 드리는 규칙을 다루고 있는 몇몇 장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적용되는데, 그것은 갈보리에서 구원을 완성한 이후 시대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만약 희생제사 자체가 속죄적 의미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갈보리 이후에는 이와 같이될 수가 없다(이것 역시 모세의 법으로 입혀져서 제시되어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특히 10:4같은 구절에서 그 어떤 동물의 피 희생도 속죄를 위해 필요하거나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히브리서는 주 예수의 대속행위가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약에 나타난 아론의 제사직과 레위기에 명시된 희생의 법을 다 완성하고 제거했다고 밝힌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생각해 볼 때 본서의 저자는 이 장에 대해 수정된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이 비유적인 해석을 하는 것보다 문제가 적다는 견해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을 구체화시키는데 있어서는 세심한 조심을 해야 하지만, 전체적인 개인을 볼 때 천사가 에스겔에게 전달한 그 모든 약속이 다가오는 새 시대에 영광스러운 지상의 왕국으로 성취되며 구속의 드라마가 종결되어 갈 것이다. 이 장에 언급된 희생제물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시대에 완전한 대속을 주었기 때문에(히 10:12) 화해적 성격이나, 속죄적 성격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규례로서 성찬식을 제정하셨고 그것을 그가 다시 올 때까지 지키도록 구체화시켰다. 전천년설에 따르면 천년 왕국은 그가 재림한 후에 시작이 될 것이다. 만약, 교회 시대에 성례가 계속 지켜진다면 천년 왕국 시대에 새로운 형태가 왜 지켜질 수 없겠는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미래에 일을 천년 왕국의 새로운 상황과 규례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초림한 후 신약 시대에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의 형태와 상황에 대해서 판단하기가 어려웠던 만큼 우리가 천년왕국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영거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완전히 구별해 버린 것은 지지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에스겔 40-48장이 천년왕국에서 성취된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를 명백하게 구별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으며 이 장에서 언급된 말일에 있을 왕이나 통치자(44:3;46:2) 등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이유도 없다. 여기에 있는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다스리게 될 부섭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 28 장
다 니 엘 서(Ⅰ)

다니엘이란 이름은 Dāniyyē’l 로서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니엘서의 주제는 살아 계신 한 분의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거역하는 세계의 열강을 부수시며 그를 진실 되게 믿고 있는 언약의 백성들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구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1. 다니엘서 개관

Ⅰ. 남은 자의 훈련과 시련(1:1-21)
A.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온 자들(1:1,2)
B. 왕을 섬기기 위해 유대의 소년들이 훈련을 받음(1:3-7)
C. 다니엘이 처음으로 받은 순종의 시험과 그의 믿음의 도전(1:8-16)
D. 잇따른 상급 : 지혜를 더하며 직위가 올라감(1:17-21)
Ⅱ. 느부갓네살의 꿈과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계획(2:1-49)
A. 세상의 지혜를 초월한 꿈의 숙제(2:1-13)
B. 다니엘의 해석을 위한 시도와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는 기도(2:14-23)
C. 꿈을 되찾게 하는 다니엘과 그의 해석(2:24-45)
D. 잇따른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다니엘의 승진(2:46-49)
Ⅲ. 황금의 우상과 극렬한 풀무불(3:1-30)
A. 우상을 세우며 국가 종교를 강요함(3:1-7)
B. 신실한 세 친구의 고찰과 시편(3:8-18)
C. 언도 집행(3:19-23)
D.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과 네 사람(3:24-27)
E. 느부갓네살이 두 번째로 하나님께 순복함(3:28-30)
Ⅳ. 느부갓네살이 받은 경고의 잇따른 겸손(4:1-37)
A. 세상의 지혜로 설명되지 않는 경고의 꿈(4:1-7)
B. 꿈 해석 자로 인정된 다니엘(4:8-18)
C. 다니엘의 해석과 교만한 왕에 대한 경고(4:8-18)
D. 말로 다할 수없는 왕의 치욕(4:28-33)
E. 왕의 회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승인(4:34-37)
Ⅴ. 벨사살의 잔치와 성전 기명을 더럽힌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5:1-31)
A. 하나님의 거룩한 기물을 교만하게 잘못 사용한 벨사살(5:1-4)
B. 벽에 쓴 글씨와 왕의 공포(5:5-9)
C. 무기력한 세상의 통치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간청함(5:10-16)
D. 교만한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멸망의 선언(5:17-28)
E. 다니엘의 존귀와 벨사살의 죽음(5:29-31)
Ⅵ. 사자 굴에서 :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는 신자들(1:6-28)
A. 질투의 음모 : 모든 기도를 금하는 칙령(6:1-9)

B. 기도 중에 붙잡힌 다니엘과 칙령의 시행(6:10-17)
C. 그의 기적적인 구원과 원수에 대한 심판(6:18-24)
D.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다리오의 간증(6:25-28)
Ⅶ. 인자의 승리(7:1-28)
A. 짐승(바벨론의 사자, 메대 바사의 곰, 헬라의 표범, 로마의 무서운 짐승, 7:1-8)
B. 하나님의 왕국과 메시야 등극(7:9-14)
C. 천사가 다니엘에게 꿈을 해석함(7:15-28)
Ⅷ. 헬라가 바사를 정복함과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등장(8:1-27)
Ⅸ. 70이레의 환상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9:1-27)
Ⅹ. 지속적인 기도의 승리(10:1-21)
Ⅺ. 안티오커스 치하에서 첫번 박해 : 마지막 박해의 모형(11:1-45)
Ⅻ. 환난과 하나님 백성의 최후의 승리(12:1-13)

2. 다니엘의 저작권

다니엘서를 사건 후의 예언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이 제출한 수많은 반박에도 불구하고 6세기에 살았던 다니엘이 이 작품 전체를 편집한 사람임을 부인할 만한 적절한 이유가 없다. 다니엘서는 다니엘이 590년대의 느부갓네살의 통치로부터 530년대 고레스 왕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그가 정부에서 일하던 중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을 담아 둔 비망록을 그의 마지막 생애에 다 모은 것이다. 바사의 전문 술어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이 비망록들은 바사의 용어가 아람어에 이미 침투될 때 이 비망록을 편집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3. 마카비 시대의 위경이론

⑴ 다니엘서의 후대설에 대한 논거

① 유대인의 정경은 다니엘서를 예언서에 두기보다, 케투빔, 혹은 성문록에 둔다. 이것은 이 책이 모든 정경에 포함된 선지자들 후대에 기록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포로 후 시대의 말라기서와 “제 3 이사야서” 후까지로 본다. 그러나 케투빔에 있는 문서들 중에 어떤 것들은 상당히 오래된 것인데, 말하자면 욥기나 다윗의 시편이나, 솔로몬의 글 등이다. 그러므로 케투빔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후대의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요세푸스는 이미 제 5장에서 본 바와 같이 A.D. 1세기에 다니엘서가 구약성경의 두 번째 부분에 있는 선지서에 포함되었음을 언급하였다. 맛소라학파들이 이것을 새롭게 편집한 이유는 그들이 볼 때 다니엘은 선지자로 임명되거나 기름부음을 받은 적이 없다는데 근거하였다.


② 시락의 아들 예수가 다른 모든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해도 다니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B.C.170). 그러나 에스라와 같이 다른 중요한 저자들에 대해서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이미 말한 바 있다. 또한 비평가들은 시락의 아들에 따르면 요셉과 같은 사람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다니엘의 경력은 요셉의 구체적인 특징들이 다니엘에게는 전혀 없다. “요셉과 같이 태어나서 그의 형제들의 통치자가 되고 그 백성들이 거처가 되며 그의 뼈가 주께 귀한 것으로 여겨진 사람이었다.”


③ 다니엘서에 있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부정확성들은 그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들보다 훨씬 이후에 살았음을 전해준다고 알려져 왔다. 예를 들면, 다니엘 1:1에서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 제 3년에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것으로 진술되어 있는데 반하여 예레미야 46:2은 느부갓네살의 원년이 여호야김 4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갈대아의 정복자가 유다를 침노한 그해, 그의 아버지가 죽음으로 인해 왕이 되었으므로 다니엘과 예레미야 사이에는 1년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렇지

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연대를 계산할 때 등극하기 전 해의 첫 달부터 왕의 통치연대를 잡는다. 즉, B.C.605년은 B.C.608년에 등극한 여호야김의 제 4년째이다. 그렇지만 바벨론 사람들은 첫 통치연대를 다음에 오는 새해로부터 시작한다. 즉, 니산월 1일부터 시작한다(히브리 종교력에 따르면 첫 달임). 그러므로 605년은 갈대아 환산법에 따르면 여호야김 3년의 해이다.


④ 비평가들은 다니엘서에서 지혜로운 사람 혹은 점치는 사람의 한 계층이 갈대아인으로(Kasdim) 언급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의 동족을 자칭하는 이 인종학적 용어가 훨씬 후대로 내려오기까지는 점쟁이 계층을 시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느부갓네살 당시에는 그것이 단지 인종학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다니엘서의 저자는 신 바벨론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여 거의 잊혀진 기록이 되었을 만큼 훨씬 후대에 썼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론은 본문의 자료에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이 작품이 저자가 명백하게 카시딤을 느부갓네살의 종족을 자칭하는 인종적인 용어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다니엘 5:30에서 벨사살은 갈대아인의 왕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가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이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을 바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카시덤에 대한 이중의 용법을 다른 곳에서 찾아와야겠다. 헤도로투스는 갈대아인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들이 수도를 장악하자마자 정치적으로 볼 때 바벨론의 중요한 직책들을 신속하게 다 잡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갈대아인”은 벨 마르둑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윌슨은 악카드어의 카스두(Kasdu), 혹은 칼두(Kaldu)가 수메르의 칭호인 갈두에서 나온 것으로서 점술사가 예언하는 천문적인 도판을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제시했다. 윌슨은 갈두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바벨론의 사마쉬 슈뮤컨(Shamash Shumukin)의 제 14년에 쓰여진 토판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많은 수메르의 칭호들이 갈이란 요소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⑵ 다니엘서의 후대설에 대한 문학적, 언어학적 논증

①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에 있는 외래어들, 다니엘의 아람어 부분에 있는 수많은 오래어들은 6세기에 쓰여진 것보다 훨씬 후대에 쓰여졌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게 되었다. 바사 계통의 언어가 15개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그것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떤 바사 문서에서도 실제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것들이 다니엘서 안에 있으므로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을 다루는 그런 장들 역시 갈대아 시대에 작성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되었다. 이 주장이 자유로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모르나 보수주의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최종적인 형태에 있어서 바사가 바벨론을 다스리기까지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니엘서 자체가 다니엘이 수 년 동안 바사의 통치 밑에서 일을 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바사의 용어를 쓰지 않을 특별한 이유를 생각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바사의 용어들은 대부분 정치와 행정에 관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B.C.530년에 바벨론에서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다니엘서 3장에는 최소한 3개의 헬라어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서가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근동 아시아가 정복당한 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주장들을 한다. 이 세 단어는(3:5) 헬라어, κίθαρις, πσαλτήριον, σιμφονια 등 이 세 단어들은 플라톤 시대까지(약 B.C.370년) 악기의 뜻으로는 현존하는 헬라어 어떤 작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통해 이 단어 자체가 헬라에서 사용된 것을 B.C. 약 4세기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체는 지금 현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중요한 헬라의 문학작품들은 옛날 사람들이 사용하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으므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헬라어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② 다니엘서의 아람어 초기설에 대한 증거들, 다니엘서에 아람어가 오래된 것임을 증거해 주는

괄목할 만한 특징은 수동태가 나타날 때 안에 있는 모음이 가끔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수동태를 나타낼 때 가장 표준된 방법(접두어 hit- 혹은 ’et-) 대신에 성경의 아람어는 호팔(hophal) 형식을 취하고 있다(예를 들자면, neḥat 에서 나온 honḥat, seliq 에서 나온 hūbad, ‘alal 에서 나온 ’abad 와 hu‘al 등이다). 호팔(사역형 수동태)형식을 이렇게 사용한 예가 사해 사본에서 발견된 아람어 문서 가운데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예를 들자면, 창세기 아포크리폰<Apocryphone)과 같은 마카비 전쟁보다 1세기 이후 것일 수가 없다). 어떤 형태들은 다니엘서를 쓴 히브리 유대의 서기관들도 그와 같은 형태를 사용하지 않고 ’et- 타입의 수동태를 사용할 뿐이다. 만약 히브리어가 수동태에 있어서 안에 있는 모음을 만드는 제기가 되었다고 하면 그것이 탈굼에 있어서도 나타났어야만 될 것이다.


성경의 아람어가 엘리핀타인의 파피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다니엘서 제 2장에서 7장 부분을 3세기 이전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로울리까지도 성경의 아람어가 엘리판타인과 팔미레네 비문에 있는 아람어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결정적인 결론에 대해 수락하고 있다. 사샤우(Sachau)는 엘리판타인 파피리 언어가 본질적인 특성에 있어서 성경 아람어와 동일하다고 진술했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니엘서의 히브리어에는 바사의 정부 용어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사가 다스리던 때에 쓰여졌음을 시사한다. 헬라어의 영향이라고 할 만한 언어는 전혀 흔적도 없다. 에클레지어스티커스(B.C.200-1800의 것으로 추정됨)의 히브리어 본문을 살펴볼 때, 만약 다니엘서가 그 당시에 쓰여진 것이라고 비평학자들과 함께 생각한다고 하면 다니엘서의 히브리어와 유사한 것을 많이 제공해 주어야 할 것이다. 에클레지어스티커스는 지혜문학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서의 뒷 부분에 있는 내용과 그 문체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클레지어스티커스는 랍비 문학의 언어적인 특징을 지닌 것으로서 다니엘서와 보다 후대의 현상을 나타낸다.


쿰란의 자료들을 살펴볼 때 히브리어로 쓰여진 작품들 가운데서(제자 규범,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의 전쟁, 감사 시들) 그 어느 것도 다니엘서에 있는 히브리어와 같은 특징을 제시해 주는 것은 없다. 또한 아람어로 쓰여진 창세기 아포크리폰과 다니엘의 아람어 부분 사이에서도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없다. 창세기 아포크리폰 B.C.1세기 것으로서 최소한 읽을 수 있는 다섯 개의 아람어 칼럼을 보여준다. 만약 다니엘서가 마카비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거의 동시대에 쓰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포크리폰은 다니엘서 2-7장에 있는 아람어 부분과 비교해 볼 때 문법과 어휘에 있어서 수많은 유사점들을 마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더구나 아비가드(N. Avigad)와 야딘(Y. Yadin)은 그것이 B.C.3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포크리폰의 언어가 일반적으로 궁중 아람어도 아니고 특히 성경 아람어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다니엘서에는 동방 방언의 특징이 있는 반면 아포크리폰은 서방의 특징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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