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 Sin  


이한영 교수, ACTS 구약학

 
I - 선악과

 에덴 동상엔 크게 두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다 (창2:9,17).  첫 째는 식물로써의 나무들이다 (창1:11,12,29), 그러나 둘째 종류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로써 (창2:9,16,17)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을 수호하는 상징으로써의 나무들이다.  즉, 첫 째 종류의 각종 나무들은 사람이 임의대로 먹을 수 있으나 (창1:16)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하나님의 영역으로써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즉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1:17) 명하시고 "사람이...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걱정하시며 이를 어긴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그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3:23-24).


 인간의 원죄는 바로 이 두 번째 종류의 나무들인 생명 나무와 선악과 중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로 발생한다.  과연 이 나무들이 무엇을 상징하기에 그 단순한 행위가 인류의 연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난과 영원한 저주를 도래케 했는지 구약신학에 있어 이에 대한 성경 적 해석은 필수적인 것이다.  먼저, 에덴 동산 가운데 있던 이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논의해보려 한다.


1) 생명나무
 John Calvin은 그 생명나무는 실제 과일을 맺는 나무이나 오늘날 성례전과 같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즉, 실재적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기억하는 것과 같이 그 생명나무를 바라볼 때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에 대한 의존과 신뢰를 상기시켰을 것이다라는 추정이다.  물론 칼뱅은 그 과일 자체가 생명을 준 것은 아니오 그 과일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라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 생명나무는 생명의 원천이시며 (The primary source of life) 그 생명을 주권 적으로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영역, 즉,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영역을 상징한다 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심으로 하나님은 그 생기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잠언에는 생명나무를 지혜(3:18), 의인의 열매(11:30), 소망의 성취(13:12), 온량한 혀(15:4)로 상징하고 있는데 참된 지혜와 의와 소망과 말씀이 생명과 관련된 것이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죄 사함을 생명의 속죄(출 30:16)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죄 사하심이 하나님께 있듯이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전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 16:22, 시42:8시)이시며 그 생명을 또한 보존하시고(신4:42;시64:1) 구원하시는(시55:18,103:4) 분이시다.  


 이렇게 생명나무는 생명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징하고 있음을 구약성경은 분명히 전제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1:8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라며 대저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으며(시36:9)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생명을 건드릴 수 없음을(욥 2:6) 분명히 말하고 있다.  


 생명을 근본적으로 조작하는 모든 행위는 죄의 최고 근원이 된다.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자살행위 또한 인간 복제의 시도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영역을 전면으로 도전하는 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시도는 죄를 낳을 뿐 생명의 근본적 본질인 영생에 대해서는 아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이는 타락과 함께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은 쫓겨나고 그 생명나무 또한 아무도 접근 할 수 없도록 봉쇄되었기 때문이다(2:24).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생명나무의 본체이심을 밝히고 있다.  그는 생명 그 자체이다(요1:4;5:26).  그럼으로 레위기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고 생명의 상징인 양의 피를 흘려 생명의 속죄(출30:16)를 말하고 있다.  신약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속죄와 영생임을 밝히고 있으며(히9:11-28) 더 나아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생명나무의 본체이심을 계시록에서 밝히고 있다(계7:14/22:14).

  
2) 선악과

 선악과는 그 과일 자체에 독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과일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사탄은 그 과일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창 3:3-5) 인간을 유혹한 것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와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해석이 있다. 


 a. 신화 설 (The mythical view)
 신화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창1-2장을 신들과 인간들의 전쟁을 주제로 한 전설로 본다.  신이 인간에게 그의 소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유일한 속성인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신화라고 말한다. 
 이러한 신화 설에서는 선악과의 실체를 부정하며 그것을 상징적인 신화로 야기하며 선악과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의 진화를 뜻하며 원시적인 상태에서 문화적인 상태로 발전한다 라는 진화론적 해석을 주장한다.


 b. 검정기간 (Probation)
 Gerhard Vos는 창세기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그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지 아니하며 또한 선악과란 윤리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지 생리적이나 이성적인 진화를 말하고 있지 않다 라고 반박한다.  그는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인간의 종교/도덕적 성숙을 향한 검정기간(probation)에 유익한 것이었다 라고 주장한다.  즉, 선악과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문제집이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보다더 총괄적인 주석에 의해 선악과의 사건은 생명나무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을 규정하는 주권을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전임시키려는데 그 문제를 집중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선악에 대한 주권문제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과 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솔로몬은 그가 선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다(왕상3:9).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전12:14).
 가정에서 부모자식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옳으냐 라는, 즉 선악의 주권문제이다.  부부도, 사회도, 국가들 간에도 궁극적으로는 누가 선하며 누가 악하냐 라는 선악의 주권문제이다.  이는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지 않고 인간에게 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하나님의 제일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두 영역을 상징한다.  이는 생명과 선악에 대한 그의 절대주권이다.  이를 침범하고자 한 인간은 끝내 타락했으며 그 타락의 결과로 고난을 동반한 죽음과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해 오는 끊임없는 갈등의 아픔을 살아가는 불행한 존재가 되었다.      


II - 타락

 타락의 기원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데서 시작되었음을 위에서 논의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타락이 임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동시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이성의 조직적 분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신학적 과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는 절대주권자이시며 인간의 타락은 자유의지의 과실을 조작한 사탄의 일이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1) 뱀의 정체

 뱀은 타락의 주도자이다.  그 뱀이 실제 뱀이었는가 하는 것은 많은 견해가 있다.  창 3:1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함으로 이것은 "들짐승 중에" 하나인 실제 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적 뱀이 그러한 일을 행한 것은 아니다.  고후11:3은 그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라고 말하며 딤전2:13-14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함으로 뱀을 통한 사탄의 미혹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요 8:44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즉 "마귀에게서" 났다 라는 말은 뱀에게 유혹을 받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그 뱀의 본체는 야생 뱀이 아닌 사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상의 상황에서 발람 선지자가 당나귀를 통한 천사의 말을 들은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민22).


2) 타락의 과정

 창세기는 타락의 기원에 있어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a. 의심부여  3:1b

 b. 말씀의 과장 3:2-3

 c.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오역하는 사탄- 3:4

 d. 진리와 거짓을 섞어버린 사탄 3:5

 e. 하와는 인본주의적인 논리로 (감각과 지각에 의한) 사탄의 논의를 받아 들였다 (3:6). 이는 그 본질에 있어 오늘날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요1서 2:16에서 그 타락의 모습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는 다음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
 육신의 정욕 (lust of the flesh) ----- Good for food
 안목의 정욕 (lust of the eyes) ----- Pleasing to the Eye
 이생의 자랑 (Pride of life) --------- To make one wise.

 f. 창3:6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죄의 유기적인 성격을 말한다.  죄는 잉태하고 자라고 번져나간다.



3- 죄의 결과

 죄로 인한 결과는 궁극적으로는 죽음이다(창2:17).  그러나 그 죽음까지의 과정전체가 죄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다. 

 

a. 시각의 타락
 "눈이 열렸지만" (3:7) 뱀이 말한 대로 열리지 아니했다.  창2:25에 그들은 타락 전에 서로의 창피함을 알지 못했다.  죄로 인해 눈이 열린 것은 단순히 이성에 대한 눈이 열렸다 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성의 그릇된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음란성).  즉 성에 대한, 사물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해석 또 목적이다.  타락 이후 사람은 서로 착취하는 눈을 뜨게 되며 그 중 제일 큰 착취는 성에 있다.  오늘날 성문화는 상업화 되어 성을 착취의 매체로 사용하며 각종 죄를 더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b. 은폐 (hiding from God)
창3:8-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고립되게 하였다.  이는 선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거룩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감추어 은폐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어두움의 문화는 지하로 들어가며 숨겨지며 은밀한 곳에 자리한다. 


c.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저항

 창3:9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다니신다.  이것은 재판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떠한 정보를 알아내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 가를 다 아시는 분이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을 (omnipotency, omnipresence)을 시139편에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네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곡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한다.  노아는 그 시대사람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홍수에 대해 분명히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방주의 문이 닫히도록 사람들은 그 부르심에 저항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오묘한 부르심을 분명히 들었으나 그 부르심에 저항하고 다시스로 향해갔다.  선지자들의 외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아니하고 그 선지자들을 죽였다.  오늘날 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온 누리를 부르고 계시나 사람들은 죄로 인해 그 음성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d. 원망과 책임회피

 아담은 자신의 죄를 여인에게 돌리고 여인은 자신의 죄를 끝내 하나님께 돌린다 (3:12-13).  하나님은 이러한 회피에 대해 반응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선포하신다 (3:15).  원망은 죄의 결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되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원망하며(출15:24) 아론을 원망하며(출16:2) 하나님을 원망했다(출16:8).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다.  두 주일이면 횡단할 수 있는 광야길을 40년 동안 방황하게 되었으며 출애굽한 첫 세대는 다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율법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욥의 위대함은 그가 원망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잠언 기자는 고난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기 때문이다(잠19:3).  예레미야 선지자는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애3:39)함으로 인간의 죄 책임을 타인에게 혹은 하나님에게 원망하며 회피하지 못하게 외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해 회피하지 아니했다.  그는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딤전1:15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자신의 죄악됨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죄로 인해 죄를 핑계하며 회피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으심을 입은 자들의새로운 모습인 것이다. 


e. 죄의 성장

 창 6:5(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는 다음과 같은 죄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죄의 강도  (intensity) ---  관영함과
 죄의 내적화 (internalization) ---  그 마음의 생각
 죄의 전적화 (extent)  ---  모든 계획이 악할 뿐
 죄의 계속성 (continuity) ---  항상 악할 뿐

 창 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이 말씀은 절대 타락성(universality of evil)을 반영한다. 즉 "모든 혈육 있는 자"에게 해당하며 롬 3:10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를 뒷받침 해준다.  죄는 대대로 이어지고 성장함을 구약성경은 말하고 있다.  열왕기상 마지막 장인  22:53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그의 아비와 마찬가지로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죄악을 행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왕상22:51-53).  이는 역사가 항상 악했음을 결론짓게 된 것이다.  구약은 죄가 한 순간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오 계속 관영하고 생각에까지 스며들며 모든 계획과 역사속에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f. 죽음

 하나님의 생명과 선악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욕심은 시각의 타락과 은폐와 부르심의 저항과 원망과 책임회피와 죄의 끊임없는 성장 속에서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2:17에서 분명히 경고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죄와의 삶은 하루 하루가 이 영원한 고난을 의미하는 죽음의 연습이다.  거기에는 잉태하는 고통이 있고, 가정의 고난이 있고, 가시덤불과 같은 삶 속에서 생존의 땀을 흘려야 하며, 모든 인생의 영화가 꽃과도 같아 시들어지며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함이 있다(창3:17-19).
 야고보는 이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요약하고 있다.  구약의 역사는 바로 이 고난과 죽음의 역사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죽음을 경험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한마디로 이 고난과 죽음의 연속이다.  욥은 이러한 삶을 "여자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고백한다(욥14: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