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탐식 편
[탐식에 대해서 1]
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탐식을 죄로 규정하고 경계해 온 중세 교회의 전통은 4-5세기 수도원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수도사들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만 먹어야 했고, 그만큼 음식에 대한 유혹이 키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마른 빵을 물에 적셔 부풀려 먹고 채식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풍족한 음식과 이전에 먹던 고기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괴로워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수도사들을 유혹하는데 그 첫 번째가 식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죄들 중에서 탐식이 가장 낮은 수준의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극복하기는 가장 힘든 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60쪽)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다섯 유형으로 좀더 세분화했다.
1. 급하게 먹는 속식:
마치 음식이 곧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재빨리 먹는 것.
이것의 문제는 단지 빠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고 음미할 겨를도 없이 먹으면서 감사를 잃어 버린다.
탐식자는 먹는 일 자체에 골몰할 뿐 감사가 없다.
2.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
음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맹렬하게 먹는 것을 뜻한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얼굴을 음식에 바짝 붙여서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먹는 것이다.
이런 식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것이다.
3. 지나치게 많이 먹는 과식:
배가 부르지만 수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 그 이상으로 음식을 집어 넣는 것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음식에 더 미련을 두지 않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더 먹고 싶어한다.
4. 까다롭게 먹는 미식:
이는 조금을 먹더라도 까다롭게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곤혼스럽게 한다.
이들은 자신이 많이 먹지도, 비싼 음식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소박하게 먹는다고 생각하며
'이 간단한 것 좀 제대로 해주면 안 되나?'하고 생각한다.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등장하는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식사량이 줄어든 사람에게는 전략을 바꾸어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 주라고 조언한다.
'제가 원하는 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바삭바삭한 토스트 한 조각만 곁들여 주시구요..'
5.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세련된 분위기 우아한 식탁과 같은 여러 조건을 갖추 식사를 바라고 고집하는 것.
[개인생각]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중간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채 과도한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탐식인듯 하다.
죄라고 보기 보다는 미련하게 행동했다는 것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급하고 게걸스럽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식사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까다롭게 먹고, 사치스럽게 먹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난친 가난은 탐식으로 몰고간다. 지나친 부 역식 탐식으로 몰고간다.
[탐식에 대하여 2]
에바그리우스 역시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탐식에 빠지면 지성이 흐려지고 욕적이 고조되어 행동이 난잡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제자 카시아누스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일곱 대죄를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누었고,
죄는 육적인 죄에서 점차 영적인 죄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육체에 속한 죄 중에 탐식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은 정욕이 오는데,
이들은 사슬에 연결된 것처럼 앞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그 다음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맛은 포기하지 않은 채) 좀 더 까다롭게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열량, 저지방, 무가당 식품을 찾기 시작했으며 설탕이 없으면서도 톡 쏘는 사이다,
카페인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자극적인 콜라, 지방이 적은 음식, 유기농 과일 등을 찾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까다로운 식습관을 탐식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도 탐식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168쪽)
<탐식을 이기는 길>
1. 신령한 양식에 길들라:
몸은 담백하고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도록 길들이고 영의 양식을 채우기에 힘써야 한다.
2. 금식: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을 끊어 몸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근원을 차단하는 일종의 자기부인 행위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에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과 '노동', '독거'라는 특별 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이중 배고픔은 금식을 가리킨다.
기독 교회 역사를 통해 매년 교회 안에서 시해되어 온 두 행사는 바로 금식과 만찬이었다.
둘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금식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며,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한 떡을 떼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금식을 윤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인생각]
금식은 소극적인 경건이라면, 감사는 적극적인 경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구제: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을 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연습을 하는 것이 몸의 욕망을 다스리는 훨씬 효과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양만 먹고 남은 음식은 먹지 못하는 빈곤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5.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기:
나눔을 일상에서 더욱 풍성히 살아내는 실제적인 방법은 바로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는 일이다.
그런 삶이 몸에 익으며, 음식은 더 이상 자기 만족의 도구가 아니라 이웃과 연결되고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매개체가 된다.
[개인생각]
탐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으로 채우고,
필요한 양을 먹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육체적인 훈련을 한 후 점점 이웃과 나누어 먹는 훈련으로
나아갈 때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흉년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피죽 한 그릇이라도 한끼 때우면 다행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있다고나 할까. 수많은 음식점, 수많은 먹거리에 TV를 켰다하면
먹거리 X파일을 비롯해서 맛집소개, 요리강습 프로그램 등 어느 TV를 보더러도 순전히 먹는 타령이다.
그래서 음악회, 연극, 책소개는 아주 짧은 시간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래가지고 우리나라가 문화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거의 하루 세끼 먹는데 가끔은 간단히 빵이나 떡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다.
그리고 탐식(貪食)보다 탐서(貪書)를 택하고 싶다.
40,50, 60대 중년들은 남자건 여자건 먹는 것 절제하라. 뚱뚱하다는 것 자기 관리 안했다는 증거이며,
우선 체중부터 줄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성인병 유발로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남들보다 먼저 영안실 입학원서 쓸 가능성이 많다.(기분 나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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