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백과부 백선행의 삶 


 백선행이라 불린 평양 백과부는 평생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했습니다. 백선행은 사실 평양 백과부가 많은 선행을 해서 환갑이 넘어서고 사람들에게 불리어진 이름 아닌 이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평양 백과부로 불리었습니다. 1848년 조선에서 가난한 농부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당시에는 미천한 출신의 여성이 이름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4살까지는 아가로 불리었습니다. 백선행의 아버지는 7살에 죽고 홀어머니는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키웠습니다. 집이 본래 가난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열 네살에 가난한 농부인 안재욱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그 때부터는 아가가 아닌 새댁으로 불리었겠죠. 이름이 없으니까요. 가난했지만 의지가 되었던 아버지를 잃은 지 7년, 홀어머니와 어린 백선행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위이자 남편인 안재욱에게 의지해 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앓아 누었습니다. 백선행은 가난했지만 좋은 약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고 병세가 악화되자 왼손가락을 그어 피를 입에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재욱은 결국 결혼 후 2년만에 죽었습니다.


워낙 병약했던 남편이었기에 그들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습니다. 16세에 과부가 된 평양 백과부는 다시 과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격변하는 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머니와 평양 백과부 백선행은 간장 장사, 베짜기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와중에 악착같이 일해서 어머니가 모아 두었던 얼마되지 않는 재산마저 친척들에게 속아서 잃고 말았습니다.

 

 평양 백과부 백선행이 놀라운 것은 정말 돈 한푼, 사람 한 명 없이 큰 부자가 되었고 그것을 모두 기증했으며 당시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서 안위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백선행은 콩나물 장사길쌈, 삯바느질은 물론 8km 떨어진 시장에서 음식찌꺼기를 주워서 돼지를 기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백과부를 두고 사람들은 악바리, 구두쇠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백과부는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대여해서 소작료를 받고 다시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돈 있는 사람들은 고리대를 이용해서 쉽게 재산을 늘렸지만 백과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하지만 힘겹게 돈을 번 평양 백과부 백선행은 지금껏 번 수십억의 돈을 10배로 늘릴 기회를 가졌습니다. 일본에서 건물들이 시멘트로 지어진다는 것을 알고 대동강 근처에 있는 만달산을 구입했습니다. 


이 일이 그녀에게 큰 행운이 됩니다. 만달산은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시멘트사업이 일어나면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가득한 이 산은 일본인 시멘트업자에게 구입했던 금액의 10배 가격으로 되팔았습니다.


 1908년 평양 백과부 백선행은 환갑을 맞이했습니다. 이 때부터 그녀는 그동안 먹지 않고 입지 않으면서 모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기 시작합니다. 첫 기부는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 마을에 찾아가 커다란 돌다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백선행은 사학의 대모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학교에 기부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광성보통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에 현재 가치로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돈을 기부했습니다. 백선행의 기부는 학교의 경영권과는 무관했습니다. 그녀는 학교 경영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식민지시절 조선인들을 위해 조선학교에 기부한 것입니다. 그녀는 기독교인이기도 해서 그녀는 대개 평양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기부를 하였는데 당신 평양에 있는 거의 모든 기독교 학교가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독립운동가인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에 조선인을 위한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하고자 한다고 하자 현재 가치로 150억원 상당의 공사비와 운영비용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때 지어진 공회당에는 <백선행 기념관>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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