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1875-1965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1. 그의 생애

이승만 이승만은 감리교회 평신도이며 독립운동가.정치가.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호는 우남.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가난한 선비.이경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가 용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았다하여 승룡이라고 지었다. 1887년 과거에 낙방한 후 승만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승만"이가 아닌 "리승만"이라고 기록하였고 여어로는 일반적으로 쓰는 "Lee"라 하지않고 "Rhee"라고 표기하였다.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탄생하였으니 왕족의 후예라하여 광복후 리박사 반대파들이 이를 빌미로 왕종복고를 노린다고 비난한 바 있다.

세살 때 서울 남대문밖 염동으로,열살 때 도동으로 이사하였으니 그에게는 황해도 평산이 고향이기는 하지만 별로 추억거리가 없다.

1879년 전직대신 이건하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박사가 한학과 특히 한시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난 것은 이때의 수업에서 연유된것이라고 생각된다. 1884년 천연두로 실명에 경지에 이르렀다. 승룡이의 부모는 6대 독자를 잃을까봐 한의를 불러대고 백약을 썼으나 효력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중원 의사 알렌(H.N.Allen 安連)로 적대시하던 당시 서양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이것이 이박사와 외국인과의 최초의 만남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최소한 외국인에 대한 적의를 버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1890년 박승선과 결혼하였고 이태 후에 장남 봉수를 낳았다. 1908년 장남이죽었고 부인은 그 이전에 별세하였다고 전한다. 망명 중인 1934년 결혼한 프란체스카여사와의 사이에도 자녀가 없어 양자로 계승되어가고 있으니 후손이 귀한 집안이다. 부모의 사전 승락없이 신경우의 권유로 열아홉의 배재학당에 들어가 노블(W.A.Noble)에게서 알파벳을 배웠다.


리승만은 일년만에 영어를 익혀 제중원 선교사 휫팅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배재학당에 삼문출판사를 차려 초기 성경,기독교문서를 출판한 헐버트(H.B.Helbert,)를 도와 편집도 하고 그의 한국역사 저술에 협조하였다. <코리안 레포지토리>편집에도 참여하였는데 이는 후에 독립신문이나 협성회보를 통한 개화운동,반일운동,더나아가 미국망명중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보겠다.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밀서를 갖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가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알린 헐버트 바로 그 사람이다. 리승만은 대통령이 된지 일년만에 헐버트를 초청하였으나 노환으로 서울 위생병원에서 죽어 사회장으로 마포 양화진에 묻혔다.

당시 배재학당 당장이었던 아펜젤러(H.G.Appenzeller,)와는 사제의 사랑이 두터웠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2년 6월 11일 어청도 근해에서 선박 충돌로 아펜젤러가 순직하였을 때 리박사는 한성감옥에 있었는데 며칠 후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하루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고 한다.그들의 동상은 현 배제중.고등학교 교정에 약 70미터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 박사로부터 서양사와 회의 진행법을 배웠다. 새로운 용어인 동의,개의,다수결의 원칙등을 흥미있게 들었으니 이것이 그와 민주주의 최초의 만남인 것이다.

국모시해 복수사건의 협의를 받고 쫓기다가 미국인 여자선교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피하였다. 그는 이무렵 개화사상에 심취하였고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2. 한성감옥에서의 개종과 옥중학교

협성회와 독립협회 간부로 활약하였고 협성회보에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조정의 비리를 공격하였다. 1898년 정부 전복을 모의했다는 협의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투옥되었는데 그때 함께 투옥되었고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뒤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6년만에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한성감옥에서 이박사와 함께 복역한 이들은 이상재와 그의 아들 승인,홍재기,김정식,이원극,이준,이동녕,박용만,이종일,유성준,안국선,신흥우,양의정 등으로 쟁쟁한 한말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리승만은 아펜젤러의 잦은 방문을 받았고 그가 죽은 후 배재학당 당장을 이어 받은 벙커(D.A.Bunker,)는 설교도 하였고 책도 넣어주었다. 언더우드(H.G Underwood,)게일(J.S Gale)도 자주 찾아 전도하였으며 신흥우의 부친이며 배재학당 교사였던 신면휴도 자주 문안하였다.


이 감옥생활,만 육년동안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손가락이 으스러져 책장을 넘길 수 없어 옆에있는 죄수가 넘겨주면 읽곤 하였다. 리승만은 이 감옥에 옥중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한편 많은 서적을 읽어 견문을 넓혔다. 이 기간에 개종하여 확고한 믿음이 형성되었고 지식을 얻었으며 옥중 투사나 방문하는 선교사등과 폭넓은 교제를 하였다. 이 육년동안은 육신적으로 괴로웠으나 그의 정신력은 강하고 풍부하게 살쪘고 인격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신학월보(193년 5월호)에 투구한 <옥중전도>서두에 [옥중경력의 두가지 긴중한거슬 말삼코저 하오니 두가지인즉 첫째 깨달을 일이오.둘재 감사할일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것이 확실하다.

당시 감옥에서 책 읽는 것은 금하였다. 리승만은 혹 고담책을 보다가 들키면 빼앗기고 혹 오랜 죄수가 공부를 하여 보겠노라하면 관원들이 대답이 "이곳은 학당이 아니다"고 하였다고 한다 계속하여 그의 글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혹 뜻이 있어도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하니 어디서 착한 말을 얻어 듣겠느냐.
그중에 내가 홀로 특별한 인기를 얻어 내외국의 여러 책을 얻어 주야로 읽고 가르쳤다.


새로 감옥서장이 된 김영선 간수장 리중진,박진영이 부임한 이후로 죄수교육과 서적질(도서실)설치를 허락하였다.
작년(1902)음력 구월에 비로소 각 감방에 있는 청소년 수십명을 불러 내어 한 감방을 치우고 가갸거겨를 써서 읽히니 웃기도 하고,흉도 보고,책망하는 자도 있다. 지금 반년이 못되었는데 국문은 다 잘 보고 쓰며 동국역사와 명심보감도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신약을 하나같이 공부하여 조석기도를 저의 입으로 하며 찬미가 너덧가지는 들을만하며 언행이 일변하여 새 사람된 자 여럿이다.

지난달 한문과 영어를 배운적이 있는자는 신흥우씨가,청소년 수는 양의종씨가 가르쳤으며 여가에는 성경말씀과 옳은 도리를 권면하였다. 나는 매일 두 바의 한 시를 담당하였다.


매토요일은 대청에서 본서장의 도강을 받은 후에 우열을 가리어 우수한 자에게는 종이를 주고 못하는 자에게는 절을 시켰다. 매주일은 정학하는 데 벙커 목사가 와서 공부한 것을 문답도 하며 성경 말씀도 가르치시매 그 효험이 대단하였다.]

1985년 이상재선생 손자 홍식씨 집에서 한성감옥 옥중 도시대출부가 나왔는데 광므 7년 (1903년) 12월 2일자 학당(배재학당의 약자인듯)리승만 구신약전서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가 성경을 읽었다는 실증이다.


광복후 리박사는 정동제일교회에 매주 거의 빠짐없이 낮예배에 출석하였고 4.19가 난 다음에도 나왔다. 교회에서는 명예장로로 추대하였다. 방석을 드렸더니 사양하였고 나중에 경무대에서 걸상을 만들어 갖고 온 것을 교회에서 자꾸 권하니 마지 못하여 그 자리에 앉았다. 1955년경 박창현 담임목사와 곽만영장로가 경무대를 찾아가 리대통령에게 교회를 다시 짓겠다고 하였더니 "사람은 차지 않는데 무슨 건축이냐"하고 꾸지람만 듣고 나왔다. 다만 마루가 헐어 그것만 고치도록 공병대에 지시하였다.(곽만영장로 증언)

19세에 배재학당에서 기독교를 알고 23세때 한성감옥에서 개종하였으니 71년동안 평신도로 살다 간 감리교도다.

1949.3.1.대한민국 건국대훈장이 주어졌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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