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예수를 부정하는 스물여섯 가지 이유
글 / 변순복(천안대) 교수
1. 히브리 문자는 곧 숫자, 이유도 26가지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가 아닌 한 시대의 랍비로 여기면서 예수를 믿지 못하는 26가지 이유를 내건다.
왜 하필이면 26가지일까? 도대체 26이란 숫자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26이란 숫자의 비밀을 풀려면 먼저 히브리어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는 언어이다. 숫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문자로 숫자를 표현한다.
이처럼 히브리어는 자음 자체가 고유의 숫자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단어는 각 문자의 수를 더해 그 단어를 숫자로 특징짓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진리’라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알레프, 멤, 타브로 이뤄져 있다. 알레프는 1, 멤은 40, 타브는 400이다. 이를 모두 합하면 441이고 이 숫자를 합하며 9가 된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진리를 상징하는 숫자는 9이다. 그러면 거짓을 표현하는 숫자는 무엇일까? 거짓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쉐케르이다.
쉰은 300, 코프는 100, 레이쉬는 200을 뜻한다.
각 글자의 고유 숫자를 모두 합하면 600이 되고 다시 모든 숫자를 합하면 6이 된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거짓을 상징하는 숫자는 6이다.
토라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타브는 400, 바브는 6, 레이쉬는 200, 헤이는 5를 나타낸다. 이 수를 모두 합하면 611이 된다. 토라 안에는 613계명이 있다. 토라라는 단어에 ‘∼안에’라는 전치사 ‘버’를 첨가하면 ‘버토라’(토라 안에)가 된다. 토라라는 단어의 고유숫자 611에 전치사의 고유 숫자 2를 더하면 613이 된다. 즉 토라에는 613계명이 있게 된다.
이런 것들이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을까? 물론이다. 유대인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성경에서 하나님은 많은 이름으로 등장한다. 각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결코 여러 하나님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중 하쉐임(여호와)이라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단어가 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도 윗사람을 지칭할 때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그분의 함자는 홍자 길자 동자를 씁니다’라고 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어찌 함부로 부를 수 있느냐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 유대인이다.
즉 완전히 구별된 이름으로 하쉐임을 사용하고 있다. 하쉐임이 갖고 있는 단어의 고유숫자를 살펴보면 요오드는 10, 헤이는 5, 바브는 6, 헤이는 5이다. 이 숫자를 모두 합하면 26이 된다. 이 때문에 유대교 학자들은 하나님 이름의 명예를 기리며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을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로 26가지를 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2. 삼위일체론 철저히 부정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를 완성한 종교가 아닌 전혀 다른 종교라고 간주한다. 타낙흐(구약성경)에서는 개인 구원을 위해 다윗의 후손 메시아를 믿는 신앙을 언급한 구절이 없다고 주장한다. 즉 다윗의 후손 메시아에 대한 믿음 또는 신앙이 사후의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유대교인들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가 인류의 죄를 위해 죽고 구원할 것이라는 점, 기독교인들이 예수에게 전가하는 자신들의 죄의 문제에 대한 개념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죄의 근원과 죄에 대한 해결책이 다르다. 유대교의 신은 인류에게 선을 향하는 성향과 악을 향하는 성향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의지를 주었다. 타낙흐의 말씀으로 악을 향하는 성향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천사는 신의 메신저로서 자유 의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단은 신의 대적자가 될 수 없다고 유대교는 가르친다.
유대교는 절대 유일한 신의 단일성을 믿는다. 삼위일체론은 이방 로마 황제 콘스탄틴에 의해 설립된 가톨릭 공의회에서 세워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에 대한 유대식 이해는 이방 황제들과 이방 교회 공의회가 아닌 시내산에서 나타난 신의 계시와 토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 의해 형성된다. 이 때문에 예수를 삼위일체의 성자 하나님으로 예배한다면 그 예배는 우상 숭배를 금한 말씀을 범하는 것이다.
율법이 예수가 오기 전까지 잠깐의 가정교사였으며 이후 그로 인해 성취됐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논리는 신이 이스라엘을 선택했고 그들에게 구별된 삶,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위한 영원한 안내자로 주신 토라에 위배된다(신 28:46)고 유대인은 믿는다. 또 선지자들은 토라의 법들이 메시아 시대는 물론 다윗의 후손 메시아가 나타난 이후에도 계속 유효할 것이라고 선포했다는 것이다(겔 37:25).
토라는 신이 유대 민족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체결했다고 가르친다(레 26:40∼45). 기독교인들이 예레미야 31장31∼34절에 근거, 신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끝내고 이방 기독교인들과의 새 언약으로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대체신학’을 반대한다. 유대교인들은 이 구절이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연관이 있지 이방인 또는 기독교인들과 관계없다고 주장한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유대인들은 믿는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교는 기도, 회개, 선행이 죄에 대한 신의 용서를 확보한다고 가르친다. 죄를 구속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고 예수의 피가 짐승의 제사 피를 대체했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유대교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죄사함에 대한 신의 능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고의적인 죄에 대한 짐승 제사(피)를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고의가 아닌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서만 허락한다. 유대교에서 희생의 피는 토라에서 구체화돼 있는 흠 없는 짐승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 사람의 피는 사용될 수 없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 기독교와 이해 달라
유대교나 기독교 모두 사후 세계의 실존과 심판을 가르친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이해한다. 유대교는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앞으로 오는 세상에 대한 구원과 상응한다고 믿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믿는 것과 구원이 연관된다고 말하거나 암시하는 하나의 구절도 구약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만 구원된다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토라에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어떤 개념도 없다. 토라는 말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유대인에게 신은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인 아버지로 비유된다. 신은 사랑과 경외를 함께 요구한다는 것이다.
토라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신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통해서, 토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생명을 선택하기를’ 권고한다. 구원을 이루는 그 외의 어떤 방법도 타낙흐에 언급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구별될 것을 요구한다. 타낙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을 선택하도록’ 권면한다(신 30:15). 타낙흐의 말씀은 윤리와 거룩함이라는 두 쌍둥이 기둥으로 구성된다. 거룩함으로 세워져가는 원리로서 생명과 죽음 사이를 분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생명과 죽음의 분리는 음식과 결혼, 그리고 시간의 법에서 드러난다.
토라의 법들은 생명과 죽음이 의미적으로 육신적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음식과 결혼과 시간은 사람이 사는 일반적인 삶의 영역 속에 있다. 토라는 유대인들이 육체적인 존재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이 세계를 보는 것을 요청한다. 구별된 사람으로 구별된 음식을 먹으며 구별된 삶을 살 것을 토라는 요구한다.
시간 자체를 신이 구별되게 했다는 관점에서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을 구별하고 지킨다. 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시간을 이처럼 심오한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유대교인들은 자랑스러워한다. 결혼도 구별된 가정을 세우는 예식이다. 신 앞에서 서약하는 것은 신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정이 되고 신을 사랑하는 자녀를 양육하는 교육장으로 가정을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음식과 음식을 먹는 방법 또한 구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우유와 고기를 함께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은 짐승으로부터 나온 것과 살아있는 짐승으로부터 나온 것을 함께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결혼 및 음식을 먹는 가운데서도 삶과 죽음을 구별 짓는다.
4. 토라의 계명은 영원하다
유대인들은 기독교 선교사가 토라의 계명을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메시아 예수를 믿는 것이 계명 준수를 대체했다고 반박한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는 타낙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은 최선을 다해 타낙흐에 기록된 계명을 지킨다. 타낙흐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라에 기록된 신의 법이나 계명은 영원불변하다고 유대인은 믿는다. 사회적 환경이나 조건 등은 변할지라도 신의 말씀인 타낙흐는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사회적 복지 환경이 아무리 좋게 변하고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토라에 기록된 법만이 사람들의 충동과 감정을 긍정적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가르치고 교훈한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신의 법인 모든 계명은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 사람에 의해 폐해지는 것이 아니다. 신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나 어떠한 다른 신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
오경 선지서 성문서에 이르기까지 타낙흐에 나오는 계명과 법에 관한 몇 구절만 보더라도 언약과 계명,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 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9∼10)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출 31:16)
“그런 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신 11:1)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 (신 28:46)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했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시 19:8∼10)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7∼18)
“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너희가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며” (왕하 17:37)
유대인들은 만약 이 말씀들을 신께서 친히 한 것으로 믿는다면 예수가 율법을 성취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신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영원히’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구히’ 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5. “여호와의 율법만이 완전”
신은 당신의 법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첨삭하지 말도록 하셨다고 유대인들은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8절(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을 예로 들어 기독교 논리에 반박한다. 이 구절에서 일점은 아주 작은 점을 말하며 일획은 그리스어 문자 중 가장 작은 문자인 이오타(ι)를 가리킨다. 즉 작은 점 하나나 한 글자도 잘못된 것이 없으며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 때문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율법이 구속력이 있다고 하면서도 예수가 와서 모든 율법을 폐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자신들이 읽는 타낙흐(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지지하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또 기독교인들과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어 토론하기를 원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시 19:7)
신의 율법은 완전하기 때문에 토라의 법들은 첨삭이나 보충이 필요 없다. 다시 말해서 늘려지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신 12:32)
유대인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런 구절을 다시 읽고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가감하지 말라는 구절들을 읽고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무엇을 완성했는지, 무엇이 제했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토라와 선지서의 기록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뜻(노여움)을 돌이키지 않으므로 신의 법은 영원하다고 기록한 구절들은 영원히 구속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또 기독교 선교사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가 종종 '인자'로 언급되고 있다(요 1:51, 3:13∼14, 5:27, 6:27, 8:28, 12:23∼34)면서 신은 사람이나 인자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대해 대답할 것을 유대교인들은 촉구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민 23:19∼20)
기독인들은 이 구절들에 대한 답을 구약성경에서 찾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6. 진정한 평화의 메시아 기다려
유대인들은 신의 말씀인 토라가 메시아 시대에도 효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선지서에 등장하는 많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고 강론한다.
신의 계명들은 다윗의 아들인 메시아의 도래 이후에도 변함없는 효력을 가진다는 논리다.
에스겔 37장 24∼25절을 읽어보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에스겔서는 다윗 왕 시대보다 수백년 후에 기록된 선지서다. 이 본문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기록이다. 신의 말씀을 준수하고 신의 법도를 지켜 행할 때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 즉, 유대인들에게 영원히 왕이 되실 메시아가 와서 다스린다는 예언이다. 그러나 타낙흐 어디에도 메시아가 와서 율례와 법도를 완성한다는 기사는 없다고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반문한다.
또 이사야 2장 3절을 읽어보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것은 메시아가 오면 제3성전이 재건되며 모든 사람이 신의 길로 행할 것이라는 메시아적인 예언이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이 회복되며 모든 것이 창조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 신의 뜻대로 움직여나갈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은 있는 그대로 지켜지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강조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로 왔다는 기독인들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그가 와서 불화와 분열만 일어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했다”는 마태복음 10장 34절을 예로 든다. 예수가 온 후 세상은 점점 더 불화와 분열의 시대로 변해갔다면서 메시아가 오면 진정한 평화, 모든 것이 화목하며 함께 사는 세상이 된다고 강변한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70인역 성경을 읽을 때와 기독교인의 영어 성경이나 한글 성경을 읽을 때 상이한 점이 발견된다. 히브리어 성경과 70인역은 말라기가 3장까지 있다. 그러나 한글 성경은 4장까지다. 물론 내용은 완전히 일치한다. 유대인들은 “단지 장절 구분이 다를 뿐인데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것조차 모른다”고 비웃는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타낙흐 말 3:22,성경 말 4:4)
7. “토라의 율법 안 지켰다” 주장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 토라 안의 율법들을 변질시켰다고 분개하고 있다.
유대교의 관점에서 신약성경을 읽으면 예수의 가르침이 토라의 율법과 모순되는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마태복음 5장 19절과 19장 16∼17절, 요한복음 10장 35절과 15장 10절 등을 보면 예수가 토라의 계명들(심지어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을 충실하게 지키는 자는 오는 세상에서 보상받는다고 가르쳤다. 토라의 계명들은 무시돼서 안 되며 예수 자기 자신도 그것들을 지켰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음식 규례를 살펴보자. 기독교 성경은 예수가 유대인들이 지키는 음식 규례인 코셔 준수를 반대했다고 암시한다. 예수가 코셔 규례를 반대했다면 그는 거짓 선지가가 된다.”
유대인들의 이 논리는 맞지 않다. 예수는 누구에게도 코셔의 법을 어기고 코셔가 아닌 음식을 먹으라고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어떤 규례도 반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 이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예수의 말은 음식이 입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음식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가르침이지 음식 규례와 관련해 아무 것이나 먹어도 된다는 가르침은 아니다.
유대교인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예수가 한 예언 중에는 실현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첫째, 예수는 자신이 죽은 후 땅 아래에 삼일 낮과 삼일 밤을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마12:38∼40). 신약성경은 예수가 금요일, 해 지기 전에 죽었으며 명절을 시작하는 날, 해 지기 전 오후에 땅 아래에 놓였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 즉 두 밤을 땅 아래에 있었을 뿐이다.
둘째,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의 세대 동안과 생애 동안에 다시 올 것을 예언했다(막13:30, 마16:28, 24:34). 자신의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권을 갖고 돌아오겠다던 예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가가 말하는 예수 또한 거짓 선지자이다. 마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한 스가랴서를 인용한 예수의 말을 기록하면서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이는 대단한 실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했느니라’(막 14:27, 슥13:2∼7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반론
예수의 말은 이루지 않은 것이 없으며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
유대인이 하루를 세는 방법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 하루이다.
이러한 계산법으로 하루는 우리의 계산으로 보면 이틀이 된다.
또 예수가 다시 오리라 한 말은 먼 미래, 세상 끝 날에 다시 올 것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가 여기 있는 사람이 죽기 전에 다시 오리라는 말은 말세에 다시 올 것이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혜사 성령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는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다. 예수는 분명한 하나님이며 말씀대로 이루는 전능한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
9. ‘올바른 족보’ 등 6가지 기준
유대인들은 예수가 유대교가 제시하는 아래의 6가지 메시아 표준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첫째,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을 잇는 올바른 족보를 가져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
셋째, 유대 민족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넷째,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
다섯째, 세계 평화를 가져오며 전쟁을 끝내야 한다.
여섯째,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과 믿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메시아가 6가지 예언적 표준을 성취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랍비 중 한 사람인 람반(마이마너디)은 메시아의 정체성에 대해 이같이 밝힌 바 있다. “만약 그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시키면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가정할 수 있다. 즉, 반드시 다윗의 집을 통해 온 통치자여야 한다. 다윗처럼 토라와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 성문 토라와 구전 토라를 모두 반드시 따라야 하며 모든 유대인들을 토라로 다시 이끌내야 한다. 토라의 율법들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성전을 원래 자리에서 재건하며 흩어졌던 모든 유대인을 한데 모으면 우리는 그를 메시아라고 확신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메시아의 첫 번째 기준인 족보문제를 보자. 메시아는 유대인이어야 한다(신 17:15, 민 24:17). 만약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사람은 유대인이다(레 24:10). 또 유다 지파여야 한다(창 49:10, 민 1:18, 왕하 11장, 대하 22장). 그런데 유대 법에서는 지파에 입적하려면 오로지 출생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인간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입적할 지파가 없다고 한다. 또 그들은 예수에 대한 족보가 나와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인들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적이 없다. 또 유대 백성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됐다”면서 “지난 2000년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 세워졌다는 교회가 이런 전쟁의 대부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에는 재림한다는 개념이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재림은 전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는 절대 절망 가운데 생겨난 이론”이라고 우긴다.
기독교의 반론
예수는 다윗의 후손 요셉의 아들로 선지자 미가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창세기에 기록된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로 세상에 온 것이다. 육적인 나라 유다가 아닌 영적인 나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신의 영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유다를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했으며 부활해 성전을 재건했다. 또 부활 승천을 통해 자신이 세상에 온 메시아이자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증거했다.
10. 기독교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어 선지자 사무엘과 호세아가 신은 사람이 아니며 인자가 아님을 명백히 밝혔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삼상 15:2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호 11:9)
유대인들은 또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지적한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지식의 영과 하쉐임(하나님)을 경외할 것임을 예언했다(사 11:1∼3). 신은 유대인들에게 사랑과 경외의 대상이다. 경외란 개인의 행위를 규정짓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논리적으로 따져도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무엇을 경외한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이사야의 예언 자체가 기독교인들의 주장, 즉 ‘예수=신’을 무너뜨린다고 유대인들은 설명한다.
인자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보자. 유대교에서 인자는 유대 민족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출애굽시킬 때 이 용어를 이스라엘(유대 민족)에 대해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선지자 호세아 또한 유대 민족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호 11:1)
유대인들은 기독교 성경에서도 인자라는 용어를 예수의 추종자들을 비롯, 유대 민족을 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또 인자라는 용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그의 후손을 의미한다. 인자가 처음으로 사용된 곳은 시편 2편이다. 하나님께서 새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다윗왕을 통해 인자라는 용어는 왕의 칭호가 되었다. 인자라는 용어는 다윗 왕을 계승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왕과 그 후손에게 적용됐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겔 37: 24∼25)
유대교 입장에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신이 아니며 기름 부음을 받을 왕이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되기도 했다.
기독교의 반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는 신의 영으로 잉태된 완전한 사람이자 메시아로 오신 신이다. 신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된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의 예언은 성취됐다. 예수 또한 인자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때로는 이스라엘로, 때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또는 이스라엘 왕으로, 그리고 자신에 대해 사용했다. 이 때문에 인자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용어 해석은 피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돼 세상에 온 예수는 분명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었다.
11. 삼위일체론, 전통이 없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325년에 신으로 추대되었다고 조롱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나 용어는 유대교 성경이나 기독교 성경 어디에도 없다. 유대인들은 “전도자들이 본문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삼위일체를 조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약간의 애매모호한 구절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유대교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초대 기독교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이라 불리는 이방인 신자들의 큰 무리가 있었다. 아리안은 이집트 제사장인 아리우스(318∼355)가 주도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가 완전한 신이라고 믿지 않았다. 예수가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낳은 유한한 선지자로 믿었다. 삼위일체론의 하나님과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동등하다고 믿지 않았다. 아마 에본인 또는 나사렛인으로 불리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아리안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프랑스의 고트족은 4세기에 이교도에서 아리우스주의로 개종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스페인과 피레네, 비지고트족의 지배하에 있던 남부 프랑스에 있었던 기독교의 두드러진 형태였다. 수에비족 롬바르드족 알렝족 반달족 버건디족 오스트로고트족 모두가 아리안이었다. 아리안들은 수세기 동안 초기 가톨릭교회에서 패권을 다투었다.
예수의 신분에 대한 논쟁은 이방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325년에 표면화됐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터키의 니케아에서 예수의 위상을 결정하고자 교회 주교들을 소집했다. 그러면서 예수의 신격화를 지지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그에게 예속된 지역의 종교들이 신인(神人) 숭배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신인 예수’를 원했다. 주교들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기독론이 로마에 받아들여져야 했기 때문에 황제의 뜻을 수용했다. 신인 예수 결정에 대한 최종 투표에서 218명이 찬성했으며 반대표는 단 2표에 그쳤다.
투표 후 예수의 신성에 투표하도록 압력을 받았던 주교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불신을 가졌고 투표를 번복하고자 황제를 설득하려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예수의 신성을 지지했던 교회의 지지자들을 추방했다. 360년까지 아리우스주의가 로마 기독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수의 신분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계속되었으며 논쟁하던 기독교 주교들은 유배, 파문, 추방되거나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이는 삼위일체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 가르치는 대로 사람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로 가득하게 됐다.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고 승천한 후에도 공중 권세 잡은 세력은 신을 믿는 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했다.
그런 가운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신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무리를 향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사람들 또한 변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그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회의도 하고 표결을 했다. 그런 표결 과정에서도 믿는 자의 수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예수는 분명 신이며 메시아였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12. 삼위일체는 우상이다
유대교에는 삼위일체 개념이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삼위일체를 이방적인 요소라고 폄하한다. 유대교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불가분하시고 시공을 초월한다. 이 때문에 신은 몇 개의 위격이나 부분으로 나뉠 수 없다. 유대교인들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론은 신의 절대적 유일성과 단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은 영원하고 무궁하며 불변한 반면 예수는 아이로 태어나 성인이 돼 죽었으므로 유한하며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서 “유한한 예수는 무한한 신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한 분’이신 하나님이 다른 존재 형태인 예수로 나타났다면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가 환상이었으므로 그의 고난과 죽음도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고통을 당했다면 신이 아닐 것이다. 그가 신이었다면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성부가 성자가 될 수 없다. 성령은 성부 또는 성자가 될 수 없다. 성부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유대교 신학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유대교의 극단적인 유일신론과 부합되지 않는다. 삼위일체론은 유대인들에게는 우상 숭배가 되기 때문이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와 이후의 칼케돈 회의에서 예수를 ‘참 신 중의 신’, ‘완전한 인간’으로 선포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신은 스스로 계시며 무한한 존재이나 인간은 유한하다. 유한자가 무한할 수 없으므로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지지했던 삼위일체에 관한 기독론은 혼란만 초래했다고 강조한다. “삼위일체 기독론은 기독교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웠다. 4세기의 이방인 신학자들이 이방인 로마 황제와 관련해 교리 용어를 구술했기 때문에 비성경적 개념에 대한 신비감을 강요했을 뿐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시대가 되면 이방 나라들은 예수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것을 기억하라고 유대교는 강조한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열방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열조의 계승한 바는 허무하고 망탄하고 무익한 것뿐이라 인생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기독교의 반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 신과 같은 분은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이성 비이성 초이성 등으로 나눈다.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나누면서 어찌 삼위일체를 이성적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신을 아는 것은 신의 지극히 작은 미세한 부분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초이성적이며 초논리적이다. 또 초자연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초자연적인 것, 초이성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믿음으로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은혜를 받았던 노아처럼.
13. 메시아 예언을 예수에 맞췄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유대교 성경 구절과 기사들을 수집해서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독교 성경기자와 편집자들이 유대교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짜 맞추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고 지적한다.
......첫째, 메시아 예언들을 조작, 예수에게 적용했다. “그를 나사렛인이라 칭하리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은 유대교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구절을 왜곡한 것이다. 유대교 성경에는 ‘나사렛’이라는 동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 비메시아 예언들이 메시아 예언으로 둔갑됐다. 셋째, 유대교 성경 구절이 기독교 성경 문맥으로 변화됐다. 넷째, 유대교 성경 구절들이 오역되었고 단어와 문구들이 조작되고 시제들이 바뀌었다. 다섯째, 예수에 대해 잘못 해석했거나 부적절하게 적용되었다.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스가랴서의 예언 중 한 가지가 성취됐다지만 분명한 것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 또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는 점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이사야서 7장 14절에 대한 대표적인 오역 사례이다. 성경에는 그 같은 메시아 예언이 없다. 기독교 성경의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단어 ‘알마’(alma)가 ‘젊은 여인’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동정녀’로 오역한 것이다. 설사 이 단어가 동정녀를 뜻한다 해도 여전히 기독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언어학적으로 잉태시에 그녀가 동정녀였음을 뜻하지 않으며 ‘아이를 낳은 처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구절은 단순히 그녀가 (결혼하여) 통상적으로 아이를 가진 처녀(실제로 그 시대의 모든 유대 여인들처럼)였음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7장의 문맥은 유다 왕 아하스가 남왕국(유다)의 위협 결과에 대해 이사야에게 예언을 구하는 것이다. 북왕국(이스라엘)은 멸망했고 아하스 왕은 그의 왕국도 다메섹과 사마리아 왕들에 의해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을 두려워했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와 왕이 알고 있는 ‘한 여인’이 아닌 ‘그 젊은 여인’의 해산이 임박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8장은 이 예언의 주체가 되는 ‘젊은 여인’이 이사야의 아내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즉, 신이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것인가라는 아하스 왕의 질문에 대한 이사야의 답변인 셈이다......
기독교의 반론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가깝게는 하와의 후손이며 먼 미래를 위한 예언으로는 예수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7장 14절은 유대인들이 해석하는 대로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언과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먼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때는 시제와 상황을 미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신의 뜻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뜻을 이루는 해석으로 구약과 신약을 연결지어야 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오역이 아니며 잘못 적용된 것도 아니다. 예수가 오심에 대한 관점에서 올바르게 해석된 것이다.
14. 기적 많이 기록한 성서를 의심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됐다고 지적한다. 특히 예수의 표적과 이적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유대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별한 능력으로 표적과 기사와 이적들을 행했다고 해서 그가 메시아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라(모세 오경)는 신이 유대 백성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보내실 선지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와 연관 지어서 보면 기독교의 예수 신성화는 큰 문제다. 토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이 일어나서 다른 신을 믿으라고 권고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나 사건을 만들었다고 신이 아니다. 특히 유대교 성경이 가르치는 메시아는 더욱 더 아니다. 신명기가 이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신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2∼6)
예수는 기독교인들에게 표적과 이적을 행한 선지자로 취급됐다. 특히 예수는 ‘신의 아들’로서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신으로 믿어졌다. 예수에 관한 이 두 가지 설명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따른 한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명기가 가르치는 ‘유대 백성들이 모르던 신들’이다.
신명기의 경고는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에서 벗어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 때문에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을 버리고 기독교의 신인 예수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예수는 신이 아닌 실패한 선지자요 랍비였다.
기독교의 반론
신약성경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사람들의 고안품이라는 유대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은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이사와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 예수를 다른 무리가 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안된다. 모든 사람이 운전을 한다고 운전을 하는 모든 사람이 직업적인 운전기사인가? 아니다. 분명 전문적으로 운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예수가 행한 기적을 다른 사람들이 행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고 해서 모두 메시아는 아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된 예수가 나귀를 탄 것이지 예수가 나귀를 탔기 때문에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먼저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5. 직무 성취 전에 죽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그의 직무를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6가지의 메시아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독교가 비유대교적인 사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들이 이사야서 53장과 다니엘서 9장을 들어 예수를 메시아로 추앙하지만 이는 비합리적인 논리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신이다. 그렇다면 죽을 수 없다. 만일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죽어야 했다면 유대인들이 더욱 더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를 핍박해왔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따른다면 예수는 유대인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해야 했다(마 16:21, 막 8;31, 눅 18:33). 그러나 제자들은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눅 18:34).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베드로의 반응을 보라. “베드로가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로다”(마 16:22)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해야 했다. “송축하리로다! 당신은 죽은 지 3일만에 살아나기로 예언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에 틀림없나이다.”
또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죽음을 원치 않았다(마 26:38∼39).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 14:36)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만일 예수가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라면 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겠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예수의 마지막 말은 버림 받은 한 인간의 고백에 불과하다.
선지자 에스겔은 각 사람이 자기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겔 18:19∼21). 이 같은 예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신이 모세의 대속 제안을 거절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쭙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했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
기독교의 반론
예수는 신이 자신에게 맡긴 영혼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성경을 통해 분명히 제시했다. 십자가에서 부르짖었던 기도는 인간이자 하나님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죄인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은 자로 우리의 고민과 번뇌를 모두 체험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이 때문에 예수는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의 무지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고통의 현장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 뽑은 일 등은 구약 예언의 완성이다.
16. 예수로는 인간 죄 속죄 못해 주장
유대인들은 피흘림의 제사는 우발적 범죄에 한해 적용될 뿐 고의적 범죄에는 기도와 회개, 자선 등을 통해 속죄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역대하 6장 36∼39절과 호세아 14장 2절 등을 들어 이같이 주장하고 하나님께서 피흘림 없이 죄를 사하여 주신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요나 이야기, 금송아지 사건, 다윗 왕과 밧세바 이야기 등도 하나님이 피흘림의 제사 없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난한 자는 죄를 속하기 위해 고운 가루를 가져올 수 있었다(레 5:11∼13). 또 유대인의 율법에는 특정한 짐승들의 피만을 제단에 쏟을 수 있고 인간의 피는 드려질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의 피는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0∼13)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고의적 범죄로 상해나 손실을 입혔다면 우선 피해자에게 보상해주어야 한다. 때로는 매우 중요한 금전적 보응이 따르기도 한다. 피해자에게 보상한 뒤 고의적 범죄를 속하기 위해 기도와 회개, 자선활동을 했다. 유대교는 인간 제물을 금한다. 만일 예수가 성전의 희생 제물을 대신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었다면 그는 실제로 성전에서 행해졌던 희생 제물만을 대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예수의 죽음은 오로지 우발적인 죄만을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반론
유대인들은 피흘림 없이 죄 사함이 없다는 히브리서 성경 구절을 문제로 부각시키며 사람을 제물로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죄를 고의적인 죄와 우발적인 죄를 구별, 어떤 죄는 피를 흘려야하고 어떤 죄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큰 오류다.
예수는 죄를 구별해 설명하거나 특정한 죄사함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신을 떠난 사람은 고의적인 죄나 우발적인 죄를 넘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죄를 범한 것이다. 즉 하나님을 떠난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예수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1서 5장 16절은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며 그 외의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되는가? 아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했다. 은혜가 더하다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지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질문하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죄를 멀리하고 떠나야 한다. 죄가 고의냐, 우발적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예수는 분명히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17. 기독교는 바울 종교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신의 종교가 아닌 바울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신약성경을 교묘하게 사용한다. 그들은 이같이 말한다. “예를 들면 누가는 바울이 사도행전 15장과 21장에서 예수의 형제로 기독교 운동의 선두주자였던 야고보와 율법의 유효성 문제에 관해 갈등 관계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는 율법을 전적으로 지지한 반면 바울은 강력하게 대항했다.” 또 유대교는 바울의 신학관이 왜곡된 성관(性觀)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유대교는 결혼 안에서의 성을 신성한 창조적 행위로 본 반면 바울은 결혼 안에서의 성을 정욕의 허용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예수가 ‘그 안에 살고 있다’는 것과 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 극단주의(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함)에서 영적 극단주의(그리스도가 그 안에 살고 있음)로 전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밖에 바울은 예수를 실제로 알았던 제자들이 전파했던 복음과는 다른 것을 전했으며 바울은 예수의 사도로서 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표적, 기사, 이적 등을 사용했다고 유대인들은 설명한다. 토라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어긴 유대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신들을 향해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유대인에게는 사형에 처하게 했으므로 이는 큰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유대교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이 언급한 모든 말이 이단적이 된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즉, 바울은 토라 전체에 매여 있은 유대인들과 7가지 노아의 율법에 매여 있는 이방인 모두에게 신의 율법과는 반대로 가르쳤다. 바울의 서신서들은 심히 왜곡됐으며 예수에 관한 기독론을 지지하기 위해 유대교 성경을 잘못 인용했다고 지적한다. 바울이 유대교 신학과 바리새파 신학의 기초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하고도 고의적으로 잘못 전파했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도덕적 기초를 나타내는 율법을 ‘은혜’로 대체해놓으며 토라 율법의 종료를 나타내는 ‘완성’을 예수에게로 돌렸다고 평가한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기독교의 반론
바울은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으로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 알던 하나님 즉, 하나님의 3분의 1만을 알던 그가 예수를 만난 후 3분의 1을 더 알게 되고 그것을 믿게 하는 성령 하나님을 알게 돼 마침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됐다. 바울은 결코 예수를 만나 기독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 이미 예수를 전하는 운동은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바울은 행위를 저버리고 믿음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보니 믿음이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행위에 앞서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코 행위를 저버린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 사랑의 빚진 자로 묘사하고 자신이 자신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18. 복음서는 역사 아니다
유대인들은 “서신서와 복음서들은 사건들을 실제로 목격해 기록한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유대인들의 주장이다.
“복음서들이 역사적 사건들을 증언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저자들이 그것들을 기록할 당시 살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서들은 역사 문제에 있어 신빙성이 부족하다. 서신서는 바울과 야고보, 베드로 및 기타 사도들의 필명을 전하는 초대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이 기록한 것이다. 주후 30∼36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알려진 예수의 사후 20∼70년이 지난 뒤 기록된 것이다. 즉 서신서들은 예수의 어떤 말이나 이적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최후의 만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에 대해 말하지만 역사적이고 물리적인 사건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유대인들은 또 복음서들이 예수에 관한 믿을 만한 사료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은 하나의 주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로 불린다.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생애 중 역사적 사건들의 순서를 포함해 수많은 암시를 기록, 공관복음서와는 차이를 드러낸다. 가장 큰 차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짜와 관련이 있다.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인 유월절 전날에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이 때문에 유월절 의식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면 공관복음서들은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자체였다. 예수는 니산월 15일인 유월절 첫날의 다음날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예루살렘 밖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 중 첫 제자들을 선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공관복음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 중 첫 제자들을 선택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공생애 시작부터 그의 사명을 선포한 반면 마가복음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사명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요한은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돼 있지만 마가와 누가는 아니다. 즉,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 누가는 바울의 제자였다. 마가복음은 최초의 공관복음서이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660구절 중 600구절)의 약 90%를 인용하고 있다. 만일 마태가 진실로 예수의 제자였다면 마가복음을 인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반론
신약성경의 기록 연대를 문제 삼는 유대인의 주장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유대인 자신들도 구약성경의 저자와 연대를 연구할 때 하나님이 가릴 필요가 있을 시는 가린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동 시대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들에게 서로 다른 메시지를 주셨다. 선지자들은 신이 영감을 주실 때 그들의 눈을 열어주어서 보게 한 것만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는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을 보지 말고 그 배후에서 섭리하는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것이다.
신이 왜 이 말씀을 기록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했는지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21. 유다 배신 사건에 강한 의구심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이는 복음서 안에서 상충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다음은 유대인들의 설명이다.
첫째, 유다가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 타락시켰다고 주장한다(요 13:27, 눅 22:3).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다의 배반을 사탄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막 14:10, 마 27:3∼10).
둘째, 복음서들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누가 뇌물을 제안했는가? 요한은 제자들 중 타락한 돈 궤 맡은 자로 표현한 유다(요 13:29)를 지목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는 제사장(막 14:10, 마 27:3∼10, 눅 22:3)을 꼽는다.
셋째, 유다는 자살하기 전 예수를 배반한 것에 대해 후회했는가? 누가는 아니라고 했지만(행 1:22) 마태는 유다가 자살하기 전 회개했다고 기록했다(마 27:5).
넷째, 유다는 어디에서 죽었을까? 누가에 따르면 유다는 ‘피밭’에서 죽었다(행 1:15∼22). 반면 마태는 유다가 죽은 장소를 몰랐거나 드러내지 않았다(마 27:5).
다섯째, 유다가 죽은 장소라고 누가가 주장한 ‘피밭’을 누가 샀는가? 누가는 유다 자신이 샀다고 주장한 반면 마태는 제사장들이 샀다고 주장했다(행 1:18,마 27:7).
여섯째, ‘피밭’이란 무슨 뜻인가? 누가는 유다가 피 흘리며 죽은 것을 뜻한다고 했다(행 1:19). 마태는 그 땅을 구매하는데 사용된 피의 값을 뜻한다고 했다(마 27:8).
일곱째, 은전 30개 또는 7세겔, 은 10(세겔)개였는가? 마태는 제사장들이 유다에게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은 30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마태는 이를 소위 예레미아의 예언이라 했다(마 27:7∼10,렘 32:6∼9 인용). 그러나 예레미야는 마태의 주장처럼 은 30을 언급하지 않았다. 7세겔과 은 10개를 언급했을 뿐이다. 또 예레미야의 밭은 집을 짓고 포도원으로 사용할 밭이었다(렘 32:6∼15).
기독교의 반론
일상적인 시험의 근인은 사탄의 유혹과 인간의 동의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
요한과 누가는 사탄의 유혹이란 측면을 강조하고
마가와 마태는 유다의 동의라는 측면을 강조했을 뿐이다.
그리고 뇌물에 대한 제안은 당사자간 합의로 이루어진 거래다.
따라서 유다와 제사장이 함께 값을 정한 것이다.
유다의 죽음은 목을 맨 것이다.
절벽 위 나무에서 목을 맨 뒤 예수가 돌아가실 당시 지진이 일어나 그 나무가 부러지면서
유다의 시체가 땅에 떨어져 창자가 터져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유다는 자살 전에 예수를 판 것을 후회했지만 진정한 회개는 아니었다.
후회하고 새롭게 삶의 태도를 바꿀 때 진정한 회개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유다의 죽은 장소는 피밭인데 이는 유다의 돈으로 제사장들이 산 것이다.
유다가 피 흘려 죽은 것과 동시에 그 땅을 구매하는데 사용된 돈이 피의 값이란 점에서 그렇게 불린 것이다.
다소 난해한 점은 마태가 피밭을 은 30에 샀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라고 한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은 30을 주고 밭을 산 사람은 스가랴이다.
마태의 실수일까? 그러나 마태는 이 두 가지 예언적 사건들의 상징을 결합하면서
그 대표자로 예레미야를 언급했을 뿐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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