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가지 매일의 죄


원서명: SEVEN DEADLY SINS

저자: Anthony Campolo

출판사: Victor Books( Wheaton, 1987)

요약자: 임상훈 연구원



목차


서론

게으름

탐색

분노

교만

질투

탐식

탐욕

후기


중세의 교회 지도자들은 게으름, 정욕, 분노, 교만, 질투, 탐식, 탐욕을 칠대죄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사실 구체적인 죄라기 보다는 몸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마음의 상태, 죄악된 상태이다. 그런데 중세기에 큰 죄악으로 간주되었던 이 죄악들은 사실은 오늘날도 큰 죄악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칠대죄들은 다양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과거보다 더 다양한 모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서 중세에 칠대죄로 명명된 이 죄들이 오늘날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죄들을 극복하기 위한 기독교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함에 있어서 개인 차원은 물론 국가와 전 세계 차원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죄가 우리 개인 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또한 문제가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적이거나 세계적 차원의 문제일지라도 그 해결책은 성경에서 찾는 것이 올바른 태도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 1장 게으름


7대죄 가운데 첫번째는 게으름이다. 7대죄 가운데 게으름이 첫머리에 놓인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게으름을 사람의 연약함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부들이 게으름을 7대죄의 첫머리에 놓은 것은 정당한 일이다.

 

심리치료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책들을 저술한 M. Scott는 게으름이 큰 죄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게으름이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에는 끔찍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랑은 헌신과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이런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잘못된 생각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 이러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게으름 때문에 사랑이 없는 현상은 깨어진 결혼 관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사랑을 만들고 결혼 관계를 세우려고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없어지고 결혼이 붕괴하는 것이다. 실로 많은 경우에 게으름은 결혼 파탄의 주범이 된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어느 남편이 스포츠에 탐닉해서 가정에 소흘하게 되었다. 아내는 처음에 자신도 남편의 취미를 좋아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편의 관심이 완전히 자기에게서 떠나자 견디다 못한 아내는 남편을 떠나고 말았다. 그 남편이 나에게 와서 조언을 구했을 때 나는 그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정비하고 하나님과 가족들에게 마땅한 시간과 관심을 들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그런 생각은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만 그렇게 하면서까지 돌아오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한 시간을 쓸 데 없는 일에 낭비함으로써 하나님과 가정에 헌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나쁜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단 사랑이 식으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사뭇 다르다. 성경은 남편들에게 아내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며 아내들에게 남편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우리 주님께 반드시 크게 책망받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느낌이 그 사람의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자신들의 느낌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사랑은 명령이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사랑이 식는 비극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게으름은 또한 오늘날 자녀 양육에도 많은 문제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부모가 게을러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이 버릇이 없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방을 치우라고 하고도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자기 손으로 방을 치워주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게중에는 부모의 이런 약점을 알고 일부러 해야 할 일을 태만히 해서 부모가 자기 할 일을 대신 하게 만드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내가 식사 후 그릇을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그릇을 어떻게 닦는지 모르는 척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떻게 그릇을 닦는지를 보여주시면서 계속 내가 그 일을 하게 하셨다. 나는 그릇 닦는 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자녀 양육에 관해 부모들이 할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되어간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라는 완벽한 자녀들을 완벽한 환경에서 기르셨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의도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부모들은 하늘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로서 열심히 일하시듯이 우리도 우리 자녀들의 부모로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훈육된 행동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성경의 권계를 읽는다. 그러나 이들은 충분히 하나님께 헌신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들을 하지는 않는다. 너무 게을러서 마땅히 즐겨야 하는 것들을 놓치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그들이 변해야 한다는 점이 두려워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 아니다. 이들은 값싼 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해주는 일들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게으른 사람들은 어떤 일이라도 뒤로 미루기를 좋아한다. 게으른 학생은 읽어야 할 교재를 읽지않고 뒤로 미루다가 마침내 제출해야 할 과제를 제출하지 못한다. 미루는 일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이다.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를 뒤로 미루었던 아그립바 왕처럼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꼭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어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가? 우리는 심판의 날에 우리가 범한 죄보다는 행하지 않은 죄가 더 크게 취급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게으름을 제거하는 길은 성령께 복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생명이 게으름에서 오는 생명 없는 상태를 몰아낸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게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결정을 못하고 미적대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다. 두려워서 게으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깨우쳐 주고 있다. 성령의 역사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임을 아는 사람은 열등감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새로운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로 게으름의 의식에서 벗어나 할 일 많은 세상으로 향하게 하신다. 세상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게으름은 무감각하게 하나 성령은 생명을 주신다. 게으름은 열등감 때문에 생기기도 하나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주신다. 게으름은 자기 중심적이지만 성령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불타는 열망을 주신다. 게으름은 우리를 지루하고 공허하게 하지만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충족한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제 3장 분노


가정에서 격한 행동을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십대의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무시하곤 한다.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종종 교회 캠프나 주말 수양회에 다녀와서 경건한 말과 태도를 보이고 자신들이 변화받았다고 간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이 집에서 행동이 변했음을 보이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진정한 회개를 경험한 아이들은 부모와의 관계를 변화시켜서 그것을 실증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만 가정에서 격분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분노에 상처를 입고 속으로 부모에 대해 반감을 갖는 아이들도 상당히 많다. 성경은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이혼이 일반화되어가는 요즈음 아이들은 부모가 이혼할 때 부모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분노는 자신을 멸시하거나 부당하게 모욕한 사람을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일게 한다. 가해자를 고통받고 뉘우치게 만들고 그가 한 일에 대해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당신께서 친히 갚으시겠다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복수의 행위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복수하는 사람은 공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복수하는 사람들은 평정을 찾고자 고통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치라고 하셨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분노를 건강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먼저 분노가 일 때 시간을 갖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만한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실 충분한 이유가 있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잘못을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일깨워주신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정의롭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당했다고 복수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만사를 바르게 하실 것이다. 죄를 품고 영원히 지낼 사람은 없다. 화를 내는 것은 스스로 지는 것이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분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기독교적인 덕목에 반하는 것이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분노를 다루는 최종적 방법은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 감정은 행동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 모든 해결 방법은 다음의 한 구절로 나타낼 수 있다. "너희를 해치는 사람들과 모욕하는 사람들,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제 4장 교만


15세기 플로렌스의 저명한 설교가였던 사바나롤라가 하루는 대성당의 마리아 상 앞에서 경배하는 어느 나이 든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날마다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흥미가 생긴 사바나롤라는 계속 지켜보다가 친구 신부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좀 보게. 저기 있는 저 여자는 얼마나 마리아를 공경하는가?"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다. "속지 말게. 수년 전 한 조각가가 마리아 상을 조각하게 되었네. 그는 한 여성을 데려와 모델로 삼아 마리아 상을 조각했는데 그 모델이 바로 저 여자라네. 마리아 상이 저기에 세워진 다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늘 와서 아주 정성껏 경배한다네."

 

교만이란 거만한 자기 경배이다. 이것은 자신을 높이고 자기 관심을 다른 사람의 것보다 높이는 것이다. 교만은 구원을 막는 장벽이 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데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선행으로 구원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비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교만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헌신을 손상한다. 교회 사역들 중에도 교만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 있으며 교역자들 중에도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교만 때문에 겸손하라는 성경 말씀을 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은 어떤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고 명한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어느 유대인 교수가 있었다. 속죄일(욤 키푸르)이 되었을 때 그가 회당에 가서 속죄일 절기를 지키지 않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회당에 가서 속죄일을 지키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나 그가 대답했다. "저는 속죄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교만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질책하셨다.

 

이러한 바리새주의와 다른 모양의 영적 교만이 있다. 자기 악한 모습들을 다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교만이다. 이것은 간증을 할 때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더러웠는가를 밝히면서 그런 과거가 있지만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로 더 깊은 영성을 갖게 되었다고 은근히 과시하는 형이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남편을 위해 아내가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여기 술에 취해 누워있는 제 남편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자 그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술 취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하나님께 내가 아프다고 말씀드려요." 교만한 사람은 마치 이 남편과도 같이 자기 모습을 인정치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교만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막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교만한 사람은 개방적이고 정직하지 못하다. 그런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꾸미는 모습을 존경해 주는 사람을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가장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한가지는 교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안다면 우리의 교만은 참으로 헛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불화한 가운데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자기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 화해를 시도하거나 사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본받아야 한다.

 

부모들이 교만하면 자녀들을 망칠 수가 있다. 자신들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실증해 주기를 바란다. 자기들의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녀들을 운동 경기에 몰아넣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십대 소녀들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인대회가 있기도 하다. 교만한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의 결혼을 좌지우지하는 부모가 있기도 하다. 자기 자녀의 배우자 감이 자기 자녀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자기 만족을 위해 자녀들이 교역자가 되도록 몰아넣는 부모도 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무너짐의 앞잡이라는 성구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성구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가장 큰 적은 그 내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과의 군비 경쟁이 과연 명분에서 나온 것인지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온 것인지 의심스럽다. 우리의 교만은 우리 구원을 위해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복음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오해의 한가지는 겸손과 굴종을 혼동하는 것이다. 겸손은 우리의 인간성을 강화해주고 그리스도를 닮게 해준다. 그러나 굴종은 인간성을 말살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잊게 해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한 존엄과 자존을 잃고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 이사야는 제단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고 자기에게 화가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의 죄를 씻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도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 죄를 알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부보다 외면을 더 크게 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다른 사람이 보는 외면보다 우리 내면을 더 크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제 5장 질투


평자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은 아마데우스라는 희곡이 있다. 희곡 뿐만이 아니라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질투로 파멸되어가는 한 사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스트리아의 궁정 악장이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음악의 신동인 모짜르트를 만나게 된다. 모짜르트는 실로 당대의 어느 누구도 갖지 못했던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방탕한 면이 있었다.

 

반면에 살리에리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작품을 만들기로 서원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게 하는 작품을 쓸 꿈을 품고 살아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모짜르트에게 주신 것과 같은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다. 살리에리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작품은 쓸 수 있었지만 대작은 만들지 못했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영감이 없는 자기 작품은 곧 잊혀지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모짜르트의 재능을 질투하게 되고 모짜르트의 파멸로 이끌 계략을 꾸미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한 그는 나중에 정신이 돌게 된다. 극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독백에서 살리에리는 모짜르트에게 주신 재능을 자기에게는 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질투심이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려고 하는 바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과 같은 것을 가지려는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완전히, 그리고 혼자 차지하려는 심사이다.

질투는 어떤 직업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데 심지어는 교회 사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께 설교자, 선교사, 교계 지도자로 헌신한 사람들마저도 질투에 사로잡힐 수가 있는 것이다.

 

뉴 저지 주 어느 시골에 세 교회가 있었다. 그 중 한 교회에 설교의 은사를 받은 박력있는 목회자가 부임하게 되었다. 곧 이 교회는 부흥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두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 신임 목회자를 질투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 온 목사의 스타일을 자기들의 것과 비교하고 자기들의 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새로 온 목회자에 대한 뜬소문이 돌자 이것을 즉각 활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새로 온 목회자는 점점 설교에 힘이 떨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두사람의 질투는 한 능력있는 목사의 사역을 망쳤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 스스로를 작고 비열한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들의 목회가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각종 미인대회에서 우승자가 결정되면 경쟁했던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에 몰려들어 웃으며 축하해준다. 그러나 그들의 몸짓에는 질투가 배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의 한 학교에서는 십대의 한 소녀가 치어리더가 되기 위해 라이벌을 살해한 일도 있었다. 유대의 민간설화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가게 주인이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는 그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크게 질투하는 경쟁자에게는 그가 원하는 것의 두 배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서슴지 않고 자기 한 눈을 뽑아줄 것을 요구했다.

 

대개 사람들은 질투 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질투하게 만든다. 특히 어린이들의 세계가 그렇다. 다른 친구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부러워하며 자기는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그들의 부러움을 사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돌스타인 베블렌의 말에 의하면 품질이 뛰어나게 좋지 않은 제품도 가격이 크게 비싸다고 널리 선전함으로써 판매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과시형 소비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유자가 부자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질투를 유발하는 것이다.

 

베블렌은 이 원리가 결혼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아내를 고를 때 서로 사랑을 나눌 배우자가 아니라 자기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을 고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문화에서는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서로를 질투하는 위치에 처하기가 쉽다. 미모와 몸매가 처지는 여성으로서 미모와 몸매를 갖춘 다른 여성을 질투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질투는 또한 파괴적이기도 하다. 60년대 흑인운동의 지도자였던 말콤 X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얼마나 백인들을 질투했는가를 적고 있다. 그는 백인들이 누리는 모든 특권들과 외모를 부러워하다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백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백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질투 가운데서 어떻게 일해왔는지, 그리고 자신과 백인들에 대한 미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적고 있다. 그는 흑인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을 갖는다고 자유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흑인들이 백인 부러워하기를 그치고 백인 되기를 그쳐야 하며 "검은 것이 아름답다."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질투를 극복함에 있어 우선 기억할 일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계획하고 계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이 다 실현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죄는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 원망이나 불만을 없애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고 계신 놀라운 진리, 우리를 하나님의 왕국에서 봉사하게 하시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은사와 기회를 주신다는 진리를 아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실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불평하고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치우침 없이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우리를 질투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바울은 사랑은 더 이상 질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즐기게 하신 것들을 즐기며 활용하게 주신 기회들을 사용하여 질투를 벗어날 수 있다.

 

제 6장 탐식


강단의 설교자들은 회중들과 별 상관 없는 간음이나 절도 등의 죄에 대해서는 설교를 꽤 한다. 그러나 회중들이 대개 범하고 있는 탐식에 대해서는 설교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뚱뚱한 사람들은 종종 어떤 영양소의 결핍으로 음식을 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탐하는 음식은 해로운 음식이며 그들의 건강을 해친 화학적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반면 몸의 화학적 상태를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폐아들도 이상식성을 보이곤 한다. 영양학자들은 왜 화학적 불균형이 나쁜 음식을 비정상적으로 좋아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 분명히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유전적 요인으로 그 원인을 돌리거나 어린 시절의 식습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거나 하는 것이다.

 

참으로 많은 부모들이 살찐 아이들을 건강한 아이들로 생각한다. 사랑의 방편으로 아이들을 탐식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어려서 비만한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체중과 씨름하며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 번 비만에 적응된 몸은 그 상태를 정상으로 간주하며 늘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탐식을 정죄하고 있다. 잠언에는 술취하고 탐식하는 자들이 가난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플라톤은 식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보았다. 탐식에 따르는 체중 문제는 심각한 문제이다. 약품을 이용한 체중 해결법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체중 감량을 둘러싼 상업주의는 종교 단체들에도 들어왔는데 이 단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량하자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런데 여기서 실패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린 데 대해 큰 죄의식을 갖기도 한다. 한 지역 방송국은 정해진 식사법과 운동을 통해 감량하는 사람을 화면으로 정기적으로 내보이기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법도 곧 실패하고 말았다. 출연하는 사람이 전문가가 하는 처방을 다 따르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햄버거나 프렌치 프라이 등을 먹어댔기 때문이다. 감량을 시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하다.

체중이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사람들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오랜 세월에 걸친 문제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주위에 이들을 날마다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일을 교회가 맡음으로써 사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일에 나서는 사람은 체중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과 늘 같이 있으면서 유혹을 이기도록 해주고 무릎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려 도움을 구해야 한다. 탐식하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움과 이 승리를 얻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형제자매들의 지원 속에서만 가능하다. 바울은 서로의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고 말한다. 체중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을 돕는 사람은 성경의 명령을 실천하는 셈이다.

 

그런데 비만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비만에 참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개인의 권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한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면서 세상에서 일하시는 도구이다. 바울은 우리 몸이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깨우치고 있다. 더우기 몸의 건강 상태는 영혼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년 전 오랄 로버츠 대학에 관한 기사가 신문 머릿기사로 오른 적이 있었다. 학교 운영자들이 이 학교 학생들은 체중을 관리해야 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학교 관계자들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학교 운영자들은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밖에 적절한 음식조절에 관해서는 안식교가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건강에 해로운 것들을 피하도록 강권하는 일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탐식만이 아니라 갖가지 몸에 해로운 것들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많다. 술에 빠지거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골초가 되거나 하는 것이다. 담배는 건강을 해치며 사망으로까지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흡연을 즐긴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끽연가들은 자기들의 끽연 습관을 싫어하면서도 담배를 끊을 수 없다고 느낀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담배를 끊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수십 번도 더 끊었다."

 

흡연은 흡연하는 사람은 물론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친다. 밀페된 방에서 한 사람이 흡연을 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심한 영향을 받는다. 또한 제 3세계 국가들에서는 담배가 기아와 영양 실조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담배 경작지에 음식물을 심어 자라게 하면 남 아메리카의 기아 문제는 상당히 해결될 수 있다.

 

흡연은 중독성이 있다. 흡연은 건강을 해치며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담배는 세계 기아 문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며 영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흡연은 모습을 달리 한 탐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술에 대해 알아보자. 음주 습관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수가 없다. 술 때문에 자기 경력을 망치고 결혼에 실패하고 가정의 행복과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에 따르는 무서운 결과를 점점 더 알아 갈수록 술을 용인하는 분위기도 더 퍼져왔다. 한때 금주를 요구했던 침례교회가 그런 요구를 철회했으며 한때 금주를 훈련에 포함했던 감리교회들도 이제는 음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율법주의가 일어날 필요는 없으나 교회는 약물 남용이 큰 죄이며 담배와 술은 영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술은 마시는 사람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큰 해악을 미친다. 현재 Alanon과 금주 운동협회(Alcoholics Anonymous)가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데 교회는 이들과 협력하여 일 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두 단체로부터 교회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중독과 관련된 개인의 문제는 그 해결책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을 지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원 그룹이 필요하다. 이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제 7장 탐욕


탐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물건을 단지 소유하기 위해 사게 만든다. 그 사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우월감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도 이 물질 문명 가운데 살면서 이런 영향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은 착한 아이일수록 많은 선물을 받는다는 말을 듣는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인사인 샬롬이란 말은 평화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마음의 평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탐욕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살피시듯이 서로를 보살피는 마을에서 산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모세는 탐욕을 경계하여 필요 이상을 거두면 그 분량은 썩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그 거둔 만나가 썩는 모양을 보아야 했다. 샬롬의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갖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잉여분은 없다.

 

영국 윈체스터의 감독 존 테일러는 그의 책 "충분한 것은 충분하다(Enough Is Enough)"에서 기독교인들이 성찬식 형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년에 한 번 유월절이 되면 모든 가족들이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와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들은 이 기부한 재물들을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종교 기구를 유지하는 데 쓰지 않았다. 이 많은 재물들은 잔치를 위해 쓰여졌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빈부귀천이 없이 먹고 마시며 즐겼다. 하나님의 왕국은 잔치와도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잔치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해의 재산의 십분의 일은 잔치에 쓰여지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쓰여져야 했던 것이다.

 

오늘날 탐욕은 개인의 죄로 끝나지 않으며 많은 국제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구촌의 사람들은 그 미래가 참으로 암담하다. 핵전쟁의 위험, 정치적 전제주의, 수천만의 기아, 제3차 세계대전 등 때문이다. 이런 전망 앞에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전쟁과 갈등이 불필요한 것도 필사적으로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의 탐욕으로부터 온다는 야고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취하고 있는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는 사실상 인간의 탐욕을 그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이 자본주의를 기독교적인 것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자유와 사회 발전의 가능성을 보아온 우리는 자본주의를 그 한 요소인 탐욕에 빠지지 않게 구속할 책임이 있다.

 

남미의 아마존 유역에는 지구의 전체 산소량의 20%를 만들어 내는 정글이 있다. 그런데 한 사기업이 그 정글의 일부를 사들여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어 판다. 그 결과로 아프리카에는 환경상의 불균형으로 한발이 생겨났다. 이같은 탐욕은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탐욕은 기업만이 아니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생겨났다. 한 때 주인들이 일꾼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며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하고 아주 낮은 임금을 주던 때가 있었다. 참다 못한 노동자들이 연합해 노동조합이 생겨났는데 그 결과 미국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임금이 높은 노동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위기는 오히려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들 때문에 초래되고 있다. 미국에서 문을 닫는 공장들이 많은 이유의 하나는 노동자들이 계속 더 높은 임금에 더 짧은 작업 시간을 요구하며 때로는 파괴를 위한 파업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노동자들은 남미의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구약의 예언자가 오늘날 있다면 사용자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에게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왕국에 맞서서 세워지는 악의 왕국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요한은 그 마귀적 사회 질서를 바벨론이라는 말로 명명하는데 계시록 13장부터 18장 까지 바벨론의 죄가 열거되어 있다. 바벨론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경배받기를 원하는 짐승이며 세상의 재물들을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도시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도시가 바벨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들어오지 않는 어떠한 사회 경제 체제도 바벨론으로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바벨론처럼 숭배받기를 원한다. 국수주의는 손쉽게 종교로 변하며 때때로 애국심이 맹목적으로 찬양받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바벨론처럼 과잉소비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기아가 존재하는 이유의 한가지는 우리 기호에 따라 농장에서 곡식 대신 다른 것들을 재배 하기 때문이다. 설탕, 커피, 담배 등을 재배하는 남미의 농장들이 곡식을 재배할 수 있다면 기아 문제는 상당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남미에서 사육된 육축이 미국에서 햄버거를 만드는데 쓰여지는 반면 그 육축들을 살찌운 사람들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10억의 사람들이 매일 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고 있으며 매일 4만 명이 굶어 죽고 있다. 세계의 신생아 100명 당 40명은 영양실조로 평생동안 정신적 또는 신체적 손상을 입게 된다. 또한 100명 중 3명만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매년 100,000명의 어린이들이 비타민 A의 부족으로 눈이 멀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탐욕을 극복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주는 것으로부터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희생하고 남에게 줄 때에 그들만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오는 기쁨 앞에서 탐욕은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이른 바 유피 족(Young Urban Professionals)에게 경계하고자 한다. 이들은 편리함을 추구하며 돈을 버는 데 있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 아이 갖기를 거부하고 나름대로의 좋은 삶을 살려고 한다. 결혼에 대해서도 이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이 있지 어떻게 자기들이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이 나아갈 길은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은 마땅히 바벨론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탐욕이 있던 자리에 나누어주는 마음을 창조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다.

 

후기


일곱가지의 큰 죄들을 버림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얻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결하게 될 것이다. 거룩하게 된 사람은 다른 길로는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는 존재가 됨에 따라 우리는 더욱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며 육체에 기회를 주지 않게 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가질수록 더욱 인간이 되어간다.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에 인간성은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성육신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성을 구현하신 분이기도 하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일곱가지 큰 죄들을 이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도움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창조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두신 새로운 인간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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