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Jesus Christ

Jesus of Galilee, Jesus of Nazareth라고도 함. 

 

BC 6경 유대~AD 30경 예루살렘.

 

20세기 세계 인구의 1/3 이상이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

 

그의 행적과 메시지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에는 신학적 동기와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진정한 생애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복음 전승

 

자료


나자렛 예수의 생애·사역·죽음은 그가 일으킨 세계적 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로마 제국의 변경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면서 가르쳤다. 그의 생애는 짧았고, 동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기록된 말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씌어진 동시대의 기록도 없다. 역사적으로 예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교 전통, 특히 마르코·마태오·루가의 복음서 구성을 위해 사용된 자료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후기 교회의 견해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반영한다.



비그리스도교 자료


이 자료들은 빈약하고, 예수의 생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110년경에 씌어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

소아시아의 젊은 통치자 플리니는 트라야누스 황제(AD 111)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는데(〈서신〉 10장 96쪽~), 여기서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미신을 믿는 신자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유대법·전승·〈탈무드〉는 1, 2세기 랍비들의 몇몇 진술만을 고려한다. 그것들은 논쟁과 유대적 변증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과 친숙함을 보여주지만 또한 몇 가지 다른 전설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저작들이 제공하는 예수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판테르라는 사람의 아들(불합리한 어떤 해석들에 따르면)로 태어난 예수(히브리어로 Yeshu)는 마술을 행했고, 현인들을 조롱했으며, 백성들을 유혹하고 선동했고, 5명의 제자들을 그 주위에 모았으며, 유월절 전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주장들을 윤색한 모음인 〈예수의 생애 Toledot Yeshu〉는 몇 개의 번역판으로 중세 유대인들 사이에 퍼졌다. 이러한 독립적인 보고들에 의하면 고대에는 그리스도교의 적들까지도 예수의 역사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18세기말 불충분한 근거에서 시작되어 19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진행되었다.


그리스도교 자료들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도들의 증언은 〈신약성서〉바울로

예수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이다. 〈요한의 복음서〉

공관복음서들은 원래 작자미상이다. 불확실한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것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나 초기 사도들의 동료에 의해 씌어졌다. 복음서들은 70~100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씌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더 오래된 구전 전승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전승의 특성과 구조가 복음서에서 통합되었으며, 복음서들은 명백히 사실·상황·사건들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혹은 전기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이야기 자체를 재생하지 않고, 그 대신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된 역사를 말한다. 예수의 행적을 〈구약성서〉 약속의 성취로 해석하고, 그의 이야기는 죽음(수난과 부활), 신적인 구세주로서의 중요성, 재림에로 나아간다. 복음서의 본문들은 과거의 예수보다는 모든 시대를 대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려고 한다.

〈마르코의 복음서〉· 〈마태오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복음서들의 양식비평은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한 분석은 더 오래된 자료의 탐구를 위한 첫 단계였을 뿐이다. 공관복음서에 들어 있는 구전 전승은 기억하기 쉽도록 내용에 알맞는 고정된 형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예로는 예언적 말씀, 팔복, 화의 선언, 잠언과 유사한 지혜 말씀, 율법에 관한 말씀, 교회 규칙, 대화 등이 있다. 예수의 많은 기적은 그 동기나 특성을 사용해 말해진다.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은 삶을 표현하는 관심과 방식에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며, 부활 이후 교회의 관념과 사고방식의 영향 아래 교회 신앙의 관점으로부터 형성되고 수집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본문을 해석할 때 교회 안에서 그 본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자료들에 대한 이러한 비평적 개관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시대와 주변세계

 

정치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마카베오


BC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헤로데

유대인들은 헤로데의 죽음 이후 헤로데 가문의 통치를 폐지해달라고 로마에 요구했으나, 로마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에게 땅을 분할했다.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인 예루살렘·사마리아·남(南)유대·이두매를 포함한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AD 6년 폐위)에게 주어졌다. 그의 영토는 군사·과세·사법 업무를 관할하는 통치자(총독)하에 로마 행정권으로 통합되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믿고 행정과 사법의 제한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유대의 총독'이 된 본티오 빌라도갈릴리

예수가 자라고 사역한 갈릴리는 다시 유대화되는 과정에 있었지만 외국 이주민들의 정착으로 완전히 특성이 바뀌어 유대인들의 경멸을 받았다. 이 지역의 문화와 문명은 특히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하에 개별 도시들, 대토지 소유자들을 헬레니즘화했지만, 아람어를 쓰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예수 시대에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저항하는 중심지로 알려졌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는 주로 비성서적 자료들, 특히 요세푸스의 저작에서 주로 발견되며 단지 몇몇 내용만이 복음서에서 언급된다. 로마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일정하지 않다. 제사장들과 귀족들은 순응했지만, 숨어서 저항하거나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종교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교바리사이파

마카베오 시대에 생겨난 바리사이파('분리된 자들') 운동은 다양한 계급과 직업을 지닌 평신도로 구성된 종교적 연합을 형성했다. 그 목적은 하느님의 참된 이스라엘을 실현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도 토라(율법)를 엄격히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기도와 금식의 실천, 의식적 성결 등의 개인적인 의식 명령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포함한다. 바리사이파의 경건에서는 또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 죽은자의 부활교리, 이교의 세력을 멸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게 될 다윗적인 메시아에 대한 소망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서 바리사이파와 예수의 관계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가르침의 내용에서 공통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마르 12 : 25~27),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경건에 대한 비판적 진술들이 그것이다. 예수의 많은 말씀은 랍비 전통과 유사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 의와 참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이상을 주장할 때 예수가 거부했다는 것과 그들의 '장로들의 전승'을 하느님의 명령과 대조되는 인간의 전승으로 예수가 인식했다는 것, 세리와 죄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 등을 살펴볼 때 그가 그들을 공격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예수의 견해들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에 대항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으로 유력하지 않았던 바리사이파가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마르코의 복음서〉3장 6절에서 말하는 것과는 반대임).

예루살렘의 제사장 계급에 속했던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랍비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발전에서 혁명적 집단인 열심당

예수가 열심당에 속했다거나 관련된 운동을 창시했다는 주장은 18세기에 대두되어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예수가 로마 정부만이 취할 수 있는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그 십자가형은 대부분 반란자에게 행해졌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 덕분에 사면받은 바라빠(마르 15 : 15)와 같이, 이 당시에는 반란자에 대한 관용어인 '강도들'로 언급된다. 이것은 유월절에 열심당의 반란이 계획되었고, 반란은 피로 진압되었으며, 예수가 실제로 이 반란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예수의 메시아적인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마르 11)는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된다. 후자는 로마에 동조하는 유력한 제사장 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된다. 또한 예수가 게쎄마니에서 잡혔을 때(마르 14 : 47) 한 제자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연관시킨다. 후기의 그리스도교 전승은 변증적이며 신학적인 이유들로 그 사건의 참된 역사적 상태를 인식할 수 없도록 변경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시들은 보존되었는데, 예를 들면 '여우' 헤로데(루가 13 : 32)와 난폭한 세속 통치자들(루가 22 : 25)에 대한 예수의 비판적 말씀들, 그의 제자인 시몬이 열심당(루가 6 : 15, 사도 1 : 13)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열심당에 속했다는 가정을 지지할 충분한 근거들은 없다. 그가 로마에 의해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열심당원으로 잡혔고 국가의 적으로 고발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그가 실제로 열심당원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열심당원이라는 가정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논증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정치적·민족적인 특성이 없고,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도 아닌 하느님 홀로 그의 왕국을 건설하며(마르 4 : 26~29),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분리주의자 에세네파요한 

 

예수의 생애와 사역

 

탄생과 가족


예수의 생애와 그가 활동한 지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단지 윤곽만 파악할 수 있다. 비성서적 자료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15년(루가 3 : 1), 즉 AD 28~29년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상당히 정확하게 활동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탄생 시기와 장소는 불확실하다. 〈마태오의 복음서〉 1·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초기시절이 헤로데 1세 때와 정권의 교체기(BC 4)였고, 〈루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AD 6) 있었던 유대의 첫번째 인구조사와 연결시킨다. 또한 BC 8년경에 행해진 인구조사에 대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많은 자료는 탄생 연도를 BC 7~6년으로 추정한다(BC와 AD의 사용은 중세까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음). 예수의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그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의 복음서〉 2장에서 베들레헴은 부모가 본래 살던 곳이었으며 그들은 자녀들을 위협하는 위험 때문에 이집트를 갔다가 나자렛으로 옮긴다. 그에 반해 〈루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부모가 실제로 나자렛에 살았으나 예수를 다윗 가족 출생지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 잠시 베들레헴에 머문 것으로 나타난다. 두 전승이 각각 고유한 방식대로 그가 탄생한 장소를 지정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아성이라는 신학적 주제의 전설적 변형으로 판단해야 한다.


〈마태오의 복음서〉 1장과 〈루가의 복음서〉 3장의 상당히 다른 계보들에서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교리를 내포한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계보적 사고를 위한 유일한 〈신약성서〉의 증거이다. 그러나 두 본문은 조화될 수 없다. 그들은 본래 예수의 선조들에 대한 일치된 전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메시아성을 계보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구약성서〉의 70인역(그리스어 번역)을 사용하여 유대 그리스도인 집단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본문들은 역사적인 자료들로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교리)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후기의 사상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보적 증명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 전승도 역시 오직 두 자료(마태 1, 루가 1)에만 기록되었으며, 본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도 아니었다. 바울로, 요한 및 나머지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 생각에 친숙하지 않다. 〈마태오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의 기적적 탄생이 언급되고 〈루가의 복음서〉 1장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되는데, 이 전승은 하느님과 성령의 창조적 능력을 말해주며,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로부터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동기가 예수에게 적용되었고, 이차적으로 〈이사야〉 7장 14절(70인역에서 히브리 단어 alma, 즉 '젊은 여인'이 '처녀'로 번역됨)의 메시아 약속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과 연합되었다. 매우 오래된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 지방의 나자렛


예수의 가족으로는 형제 4명과 몇 명의 누이가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서 언급된다(본문에는 교리적 동기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이복형제나 사촌들로 만들 근거가 없음). 가족의 이름은 어머니 마리아(미리암), 아버지 요셉과 형제들은 야고보(야곱)·요셉·유다·시몬(구약 족장의 이름들)이다. 예수의 이름은 히브리 이름인 요수아, 즉 '여호와가 도우신다'의 그리스어 형태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서 예수 혹은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고 언급한다.


가족의 이후 역사에 대한 몇 개의 단편적인 정보가 있는데, 아마 일찍 죽은 것 같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누이들은 처음에는 그의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마르 3 : 31~35).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으로 언급된다(사도 1 : 14). 그의 형제 야고보는 베드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유다의 편지〉의 저자가 다른 형제의 이름을 존경하여 이름을 취했던 것처럼, 〈야고보의 편지〉 저자도 야고보의 이름을 취했다. 4세기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갈릴리에 살고 있었던 유다의 손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윗의 자손들'이라는 이유로 소환되었으나 정치적인 위험이 없으므로 석방되었다.


예수는 가정과 회당에서 교육받았으며(성서 공부, 율법에 대한 순종, 기도, 메시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한 기대 등) 예루살렘의 순례에 참가했다.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듯하며, 그가 신학적 교육을 받았음은 그의 가르침과 '랍비'(선생)라는 명예로운 이름에서 밝혀지는데, 그 시대에 랍비라는 칭호는 훈련되어 임명된 율법학자라는 직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초기생활과 내적 발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알려진 것은 〈루가의 복음서〉 2장 40~52절(성전에서의 소년 예수)에 유일한 설화가 간직되어 있고, 위경들이 전설의 형식으로 예수의 어린시절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사역


세례 요한


공관복음서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물론 비난이 없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이 운동은 아직은 '교회'라고 불려질 수는 없다(이 개념은 후기 전승에서 처음으로 나타남). 그의 말씀과 운동을 확장하기 위해 그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족과 생업의 모든 끈을 결연히 포기하고(마태 10 : 37~, 마르 8 : 34~, 루가 14 : 26~), 그를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마르 1 : 17, 루가 5 : 10)가 되려는 그의 제자들을 불렀다. 그의 말씀들은 극단적으로 날카로우며 제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숨기지 않는다(루가 14 : 25~33). 그는 출신과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부르며 임명하고, 특별한 사람들로 선택한다. 그들 중에는 어부들(안드레아·베드로·야고보·요한)·세리(마태오)·열심당원(시몬과 가리옷 유다)·농부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12명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제자들을 임명하고 설교하며 귀신을 내쫓는(마르 3 : 14) 권위를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제자훈련은 랍비들처럼 '훈련'과 함께 끝나는 과도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 중 누구도 충분한 공부 후에 '스승'(마태 23 : 8)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제자들을 부르는 내용들이 일반적으로 후기의 전승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로 유형화되었고, 개별적인 장면들이 이야기의 본 줄기에 첨가되었을지라도 갈릴리에서 예수가 사역하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회상은 분명히 본문들에 보존되어 있다.


갈릴리 기간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유대와 예루살렘에 가서 수난을 당한 오직 1차례의 여행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1년을 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활동과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수난으로 나누는 편집적 측면과 신학적인 의도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몇 가지 이유들로 학자들은 공관복음서의 구성이 〈요한의 복음서〉의 구성보다 더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3번의 유월절 절기를 지냈으며(요한 2 : 13~23, 6 : 4, 11 : 55), 1번의 수코트(초막절, 요한 7 : 2)와 1번의 하누카(봉헌절, 요한 10 : 22)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만 2년을 넘는 기간이다. 그러나 요한이 독립된 전승에 근거하여 기록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의 시간 지적은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서 예수의 사역 장면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여기서 중심지는 예루살렘임). 

 

예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처음 두 복음서들은 이것을 그의 설교의 요약으로 첫부분에 놓았고, 그의 선교의 중심이며 지배적인 주제로 규정했다(마태 4 : 17, 마르 1 : 15).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마태오가 선호했던 하느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곡한 표현)는 그의 '교리 체계'(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의 끝부분이 아니다. 기초가 되는 유대 단어(말쿠타)는 하느님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의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신약성서〉 본문들에 퍼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는 공간적 의미('……에 들어간다')로도 쓰인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기대는 조상들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세상의 창조자, 주님에 대한 〈구약성서〉의 믿음에 기초하여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믿음에 현재 세상의 상태는 사탄의 권세가 통치하여 사악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왕권은 단지 미래에 나타난다는 모순된 경험이 연합되었다. 많은 집단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묵시적 사변 속에 우주적 기대로 확장되었지만, 다윗적 메시아, 즉 민족의 정치적 대망의 형태를 지니기도 했다. 각 경우에 그것은 마지막 날과 연관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표현은 순수하게 종말론적, 즉 미래의 의미를 가지며, 현재 세상의 시대가 끝나고 극복되는, 외부로부터 이 세상에로 갑자기 침투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세상의 종말, 마지막 심판,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제들은 복음서 전승에 보존된 예수의 말씀들에 꼭 들어 있다. 예수는 결코 하늘나라를 개인적 인간 영혼의 순수한 종교적인 체험으로 바꾸지 않았고, 유대적 종말론적 기대를 세계 내적인 진화적 과정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목표로 보지 않았다. 그의 몇 비유들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예를 들어 씨앗과 추수, 누룩, 겨자씨의 비유). 그러한 경우에서 유기적 과정이라는 근대적 사고가 본문들에 잘못 도입되었다. 그러나 성서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움과 기적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여기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태 6 : 10, 루가 11 : 2)라고 기도한다. 예수의 팔복과 재난 예언(루가 6 : 21~26)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와 애통하는 자는 아직 하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느님의 이름과 뜻이 악용되고, 그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고, 사람들은 파멸시키려는 시험에 의해 위협당하는 매우 곤궁한 상황을 전제한다.


예수의 설교에 따르면, 실현된 종말론


예수의 설교 안에 있는 모든 이념과 이미지는 하느님 자신이 그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가까이 있고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소개하거나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은 실제로는 하느님 자신이 세상을 해방하고 세상에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려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오고 있으나,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에 이미 현존한다. 예수의 말씀에서 하느님은 더이상 신성한 영역 안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위엄의 포로가 아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징조를 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는 예수의 행동에서 계시된 것처럼, 하느님은 아버지, 돕는 자, 해방자이며 지금 벌써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 : 20).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시대의 변화가 여기 있으며, 지금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시간이라고 외쳤다(이사 35 : 5, 마태 11 : 5). '여기 그리고 지금'은 예수의 말씀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예수 설교의 중심적인 특성은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죄짓고 버려진 자들에게, 그리고 '경건한 자'의 선입견에 따르면 마지막 구원에서 가업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유가 어떻게 하느님이 그들에게 행하는지에 대해 썼고, 그를 주님과 왕으로 보여준다(마태 18 : 23~, 20 : 1~, 루가 15). 비유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이미지들로 하느님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명백히 예수 전승의 가장 오래된 줄기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이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했고, 그럼으로써 하늘나라는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경건한 자들을 성나게 했다.


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 안에 예수가 회개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구원의 시간을 놓치지 말도록(루가 14 : 16~, 13 : 6~),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마태 13 : 44~), 어린아이처럼 영접하도록(마르 10 : 15), 자신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거나 자신의 공로로 실현할 수 있다는 자만을 가지지 않도록(마태 13 : 24~, 마르 4 : 26~) 모두에게 요청한다. 예수는 또한 지혜롭게 깨어 있고(마태 24 : 45~, 마르 13 : 33~, 루가 16 : 1~, 12 : 35~) '자기의' 허구를 포기하라고 요청한다. 예수의 설교에서 회개는 필수적인 것, 선결조건,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의 명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움의 결과(마태 4 : 17)이고 자신을 그의 미래에로 개방하는 것, 뒤로의 운동이 아니라 앞으로의 운동이다. 이렇게 예수는 미래와 현재를 떨어질 수 없게 함께 묶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 이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하는지 묻는 묵시적인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을 묻는 사람은 그가 미래도 현재(즉 이미 밝아오는 구원으로서의 하느님의 미래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빛 안에 있는 자신의 현재)도 적절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구원의 때가 밝아오는 증거로서 '표적들'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마태 12 : 38~, 마르 8 : 11). 회개의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적이었듯(루가 11 : 29~) 예수 자신이 '표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표적은 의미 있는 일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정당한 지시이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메시아성'을 가르침의 주제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그의 말씀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론의 특징을 가진 요한의 '나는……이다'라는 어투가 공관복음 전승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예수가 결정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적 예언자와 카리스마적인 기적행위자로서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가까이 있음은 그 자체가 활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게 하는 힘과 도전의 장이 된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지 그 시간을 계산하는 노력을 예수는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도록 요구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과 윤리학의 관련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의 계명들은 어디에서도 예언자적 말씀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수가 그것들을 하늘의 상급이나 마지막 심판 때의 저주와 연결시킬 때조차도 종말론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마태 24 : 24~, 루가 19 : 11~). 하나님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요구들을 '중간 윤리', 즉 하느님 나라의 신속한 도래와 시대의 변화를 동반하는 우주적 파국 가운데 놓여 있는 세계 상황에서 예외적인 율법들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는 그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논증을 소멸하는 질서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현존하는 세계, 〈구약성서〉의 계명들, 창조,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경험들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은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공개된 혹은 숨겨진 근거가 되며,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구약성서〉의 율법 전통의 특성에 상응하여 그는 단일한 말씀과 개인적 명령에 연관된 해석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체계적인 '도덕적 가르침'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계명들을 구체적인 예로, 즉 동료에 대한 행동(살인과 분노, 간음과 이혼, 맹세들, 보복,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의식적 계명(안식일·기도·금식·모독에 관하여), 다른 예식 의무를 설명했다. 예수는 항상 이 계명들의 근원으로 나아갔고,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율법 안에서 밝혔다. 예수가 율법을 존중했지만,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근원이 아니며,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중재하는 절대적인 권위도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더이상 거룩한 문자와 전통에 위장되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와 또한 유사하게 위장되지 않은 사람의 실재 사이에 대면하게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경건한 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과 바리사이파와 같이(루가 18 : 11~) 그것들을 계속 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을 더이상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인간 자체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한 고전적 구절은 산상수훈(마태 5 : 21~48)과는 정반대이다.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한 법률적 행동에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의 주요사상은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이다. 제정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분노, 음탕한 눈, 법적 이혼, 보복, 원수를 배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이러한 극단적 요구들은 역설적으로 과도한 요구들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해방을 의미한다. 첫째로, 이러한 요구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백성들의 자연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실천이 포함된다. 둘째로, 그 요구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행했고 행하고 있고 행할 것과, 무제한적인 하느님의 가능성에 대해 거듭 지적한다. 믿음(마르 9 : 23~)·기도(마태 6 : 1~, 루가 11 : 1~)·염려(마태 6 : 25~)에 대한 예수의 말씀들은 이에 대한 예들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결단하기를 요청하는 곳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벌써 결정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가 요구하는 무제한적인 용서의 동기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에게 보여준(마태 18 : 23~)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있다. 예수는 그의 요구들이 수행 가능한지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한편 예수는 '상급'에 대한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이 물질적인 상은 아니고(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완성이다(마태 25 : 14~).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지불을 주장하고 청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루가 17 : 10).


가까이 있는 하느님은 더이상 인간을 전통적 범주로 등급을 매기거나 분류하지 않고, 긴급하고 중요한 도래로 이끈다. 예수가 얼마나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가는 그의 사랑의 계명에서 보여지는데, 그는 그것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모욕받으면서도 실천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더 좋은 의'는 사랑이다(마태 5 : 20). 예수는 〈구약성서〉의 2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받아들였는데(레위 19 : 18, 신명 5),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모든 율법의 요약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의 특징은 일관되게 모든 다른 율법(안식일 계명)을 가장 중요한 기준(마르 2 : 27, 3 : 4)에 종속시켰다는 것, 이웃사랑을 원수사랑에로 확장하여 고양시켰다는 것(루가 6 : 27~), 계명을 추상적인 관념이나 일반적인 인류애가 아닌 항상 사건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근대 도덕철학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구분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단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확실히 예수는 세계와 민족의 새질서를 계획하지 않았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주인과 노예,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항해 싸우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행을 위해 어떤 지침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팔레스타인 유대 시골 상황, 즉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었다. 그의 말씀·비유·교훈은 얼마나 그가 일상생활을 날카롭게 평가했으며 , 얼마나 명백하게 그것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어진 세계에서 하느님 본래의 뜻과 그의 밝아오는 나라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마태 6 : 24, 루가 16 : 9~).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적으로 규정된 시설을 사용해서도 안 되었고, 세상의 관습적 행동양식을 따라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산상수훈에 의해 다스려질 수는 없다는 주장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보복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 사랑의 계명은 있는 그대로 법적으로 실행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그의 재산을 나누어야 되는 사람을 안내하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만 결정해야 하며 일반적 사회질서를 위해 악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실천 불가능성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비평에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의 계명에 따라 율법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면서 표면적으로 정당한 기준을 속빈 관습이라고 폭로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권집단의 자기중심성에 대항하고, 차별대우를 받는 자(이방인·사마리아인·세리·창녀)와 함께한다. 그의 계명의 정당성과 긴급성이 묵시적 근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백성들에게 근접한 하느님 나라에 상응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선포는 예수 자신의 선교와 밀접하다(루가 11 : 32~). 그가 그의 선교 사실을 그리스도론적 칭호들로써 표현했는지,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그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마태 9 : 36, 15 : 24). 전체적으로 그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 몇몇의 중요한 단어와 장면만이 하느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백성 안에 비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한다(마태 8 : 11~).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조직하지 않았고(마태 10 : 5~), 보편적인 '교회'도 조직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고백한(마태 16 : 17~) 것은 후기 교회의 산물이며, 그 상황과 교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그의 추종자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의 방랑과 사역을 함께할 제자집단을 만들었다. 후기 전승은 소수의 제자집단만을 사도들과 동일시했다(Ⅰ 고린 15 : 5~).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한다. 만약 예수가 이 제자들을 스스로 임명했다면, 그는 그것으로 전(全)이스라엘에 그의 종말론적 주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19 : 28)·〈루가의 복음서〉(22 : 30)에 의하면(그것은 후기까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 같음), 그는 그들에게 새 시대의 완전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재판하는 직임을 수여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예수의 결정은 그의 이야기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의 많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수난 전승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 따라서 수난 전승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관점과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천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려는 것이며, 〈구약성서〉 예언자들과 〈시편〉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본문에서 끌어낼 수 있다.


예수는 아마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밝아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지막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기 위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 그는 자신과 유대 통치자들과의 깊은 갈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성전정화 이야기는 예수가 이 갈등을 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유형화한 후기 전승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의 유일한 동기로 거기서 죽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부활하려는 의도를 든다(마르 8 : 31, 9 : 31, 10 : 32~).


예수 수난의 외면적 과정을 구성하는 가장 좋은 실마리는 그의 십자가 처형이다. 그것은 그가 형을 선고받았고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모든 기록은 그가 금요일에 죽었다는 데 일치한다(마태 27 : 62, 마르 15 : 42, 루가 23 : 54, 요한 19 : 31).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날은 니산 월(3/4월) 15일(유월절 첫째날)이었다.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그것은 전날(유월절 양이 도살되고 축제가 시작되는 저녁)이었으며, 예수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는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고 그 이전의 것이었다. 이러한 날짜매김에는 각각 신학적 의도가 들어 있다. 즉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로 표현되어야 한다든지(공관복음서), 예수 자신은 양들이 도살되는 시간에 죽은 참 유월절 양으로 보여야 한다는(요한) 것 등이다. 역사적으로 요한의 날짜매김이 신빙성이 있으며, 니산 월 14일(4. 7)이 예수가 죽은 날로 간주되어야 한다.


복음서들이 사건의 사실들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최고 유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마르 14 : 55~). 한편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고 그를 석방하려는 헛된 노력들을 했으나 결국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마르 15 : 22~). 이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첫째, 마르코와 마태오에 따르면 유대 최고법정은 예수가 성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사이에 체포된 후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렸으며 그에게 신성모독자로 사형선고를 내렸다(마르 14 : 64). 그후 그들은 또 한 차례 예수를 신문하여 빌라도에게 이른 아침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마르 15 : 1). 루가는 오직 한 차례의 신문만 기록하면서 아침에 했다고 전한다(루가 22 : 66). 그러나 그는 예수의 형선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루가 22 : 71).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대제사장 가야파와 안나스가 예수의 신문에 관여한다(요한 18 : 13~). 둘째, 모든 복음서 내용에 대해서 어떤 증언이 제자들에게 정확한 보도를 주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셋째, 유대 산헤드린의 사법권이 논쟁이 된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유대 정부는 사형을 선언해야 하는 경우와 심각한 종교적 모독(신성모독)의 경우에 돌로 치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재판은 축제기간중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표현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은 그것이 유대적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방식(즉 성서적 증거와 예수의 메시아성 및 하느님의 아들됨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신앙고백의 근거)에서 유형화된다는 것이다. "네가 축복받은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마르 14 : 61)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은 유대적 관점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유대주의를 지닌 후기 교회에 대한 논쟁을 반영한다. 또한 복음서들은 유대인들을 희생하여 빌라도를 면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비성서적 자료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자료는 예수가 반란자로 체포되었고, 비공식적으로 신문당했으며, 그 당시에 예루살렘 사회에서 유력했던 산헤드린의 친로마 제사장들과 사두가이인들에 의해 정치적 반란의 지도자로 빌라도에게 넘겨졌다고 말한다. 성전정화와 성전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적 묵시적 말씀(마르 14 : 58, 요한 2 : 19, 사도 6 : 14 참조)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던 바리사이인들이 그 음모에 연관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수난 설화에서 제사장·장로·율법학자들과 같이 분리된 집단으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수난 이야기에서 다른 장면들을 여기서 분리하여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수 수난의 신학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상당히 교화적이고 예배의식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예수 죽음에 대한 성서의 표현들은(특히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데서) 서로 다르다. 예수가 〈시편〉 22편의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외치고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오직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뿐이다. 회개하는 도둑과 반항하는 도둑 사이의 구별은 오직 〈루가의 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아버지,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로,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다 이루었다"로 다르게 나타난다. 각각의 이 내용들은 로마 백부장의 증언, 즉 "진정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마르 15 : 39)처럼 예수와 그의 이야기에 대한 중요한 표현이다.

  

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예수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선교와 이야기를 무의미하게 했는가? 다시 말해 그는 실패하여 과거에 묻혔는가?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가 되었는가? 예수의 유대인 적대자들에게와 같이 빌라도와 로마인들에게는 더이상 아무 문제도 없었고 결정은 내려졌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고, 그들의 희망은 참담하게 어긋났다(루가 24 : 13~). 〈신약성서〉 본문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대답은 예수가 죽은 이후 부활


이 믿음이 표현하는 형식과 이념은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그가 신적 주권을 갖게 됨을 의미했고, 복음서에서 다양하게 연관시키듯이 빈 무덤 발견 전승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부활한 사람이 40일간 땅에서 걸어다녔고 그후 하늘에 올랐다는 이론은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발견된다(1 : 3). 그래서 부활의 메시지의 분명한 성격과 부활 내용의 애매한 성격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복음서 전승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것 없이는 예수의 단 하나의 말씀과 행동, 그의 수난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성서〉 전승은 과거의 모습으로서의 예수의 기억을 보존하거나 단지 예수가 누구였는가를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현재 누구인가를 선포하고자 한다.


많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이 예수의 메시아 의식, 즉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메시아' 같은 특수한 칭호와 연결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믿음도 오직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묘사하며, 유사한 종류의 수많은 다른 칭호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질문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은 예수가 메시아였고 '지금도 메시아'라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그의 '의식'과 내적 발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예수의 세례·시험·형상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체험된 기록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에게 하나 또는 몇 개의 그러한 칭호들을 적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칭호들이 그의 설교와 사역에 상당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예수가 그의 선교와 활동을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여명에 연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자기 이해를 전통적 칭호를 통해 표현했다는 것은 다른(그리고 의심스러운) 문제이다.


이 문제의 토론을 위해서는 3가지 관찰이 중요하다. 첫째, 공관복음의 진정한 본문들에서, 예수는 결코 자신의 신분을 그의 가르침의 특수한 주제로 삼거나 그의 지위인식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후기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론적 본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예수를 메시아, 다윗의 자손,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라고 말하는 본문 어디에서나, 그가 이러한 칭호들을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사용했다는 어떤 지시도 없다.


예수가 어떤 전통적 칭호들을 자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당시 청중들은 오직 정치적 혹은 민족적 의미에서 메시아 또는 다윗의 자손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예수의 의도와 충돌한다. 또한 배타적 칭호인 하느님의 아들은 비유대교적인 헬레니즘 세계에서 설교하는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후기 청중들에게는 이해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결론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에게만 사용하는 (신적) '주'라는 표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가 자신을 일컬은,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한 문장(마르 10 : 45)만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 교회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는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문제로 좁혀진다. 이 개념은 주권의 칭호이다. 이것은 유대 묵시사상에서 나오는데, 평범한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끝날에 구름을 타고 올(다니 7 : 13~) 세상 심판자의 신화적 모습을 의미한다. 예수의 초기 말씀(마태 24 : 27, 마르 13 : 26, 14 : 62)은 사람의 아들을 종말론적·미래적 의미에서 항상 3인칭으로 말하지만, 어떤 본문들은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마르 8 : 38, 루가 9 : 26, 12 : 8~). 2개의 다른 말씀군(群)은 그를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그의 수난·죽음·부활만을 말하며(마르 8 : 31, 9 : 31, 10 : 33~), 다른 하나는 땅에서의 권위있는 사역과 방랑에 대해 말한다(마태 8 : 20, 11 : 19, 마르 2 : 10~28). 둘 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유대인 청중은 이 말씀들에서 묵시적인 사람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사역과 죽음을 회고해볼 때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두 말씀군은 오직 후기 교회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초기 말씀군만이 아마도 진정한 것으로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앞으로 올 사람의 아들에 대해 말했다면, 그 말은 그에 대한 제자들의 충성이 마지막 심판 때 인정되고 확인될 것이라는 약속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묵시적 언어와 개념으로 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상적 인격과 심판자의 모습과의 관계는 반성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 전승은 수정의 과정을 통해 없어졌고, 후기 교회의 신앙이 전통의 형성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구원에 대한 부활 이후의 말씀에서, 종말론적 '여기 그리고 지금'은 뗄 수 없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속하고 그 안에서 실현되어가고 있었다. 불신앙과 의심에 직면하여,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단지 일어났던 대로 제공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결정적·구속적·궁극적인 행위와 말씀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역사로 해석했다. 신앙으로 예수에게 부여된 주권에 대한 모든 칭호들은 시대의 전환점, 구원의 개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과 현존이 예수 안에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복음서 전승은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 그리스도로 대치하지 않았고, 예수의 말씀·사역·방식(주권과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칭호가 없음)에서 비밀히 암시된 그리스도론을 명시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전승에 적합한 질문은 발전과정 속에서 나자렛 예수에게 무엇이 일어났었는가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왜 그를 확고히 붙잡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질문과 복음서들의 대답을 수용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이것은 역사적 탐구의 한계를 넘어선다.

 

초기교회의 그리스도상( 사도신경)

 

복음서들이 씌어지기 이전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말을 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성찰이 후기에 복음서의 단순한 말씀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초기 그리스도교도 공동체는 처음부터 증언과 예배에 참가했으며, 그 증언·예배의 형식이 복음서에 있는 설화 형식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에 대한 복음서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숙고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별이 없다는 것과 전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후자에 의해서라는 주장이 정당하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 자체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기의 신앙이 구현되어 있는 〈신약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신앙은 짧은 신앙고백이나 신조들 속에 구현되었지만, 본래의 완전한 형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책들 안에 있는 신앙고백들과 신조들의 단편이고,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문서들에서 취한 것들이며,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전례에 내포되어 있는 후기 형태의 신앙고백과 신조들의 단편이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후기 형태이며, 그 기원은 아마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사도신경은 초기 신앙고백의 핵심이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후기의 표현들이 구성되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의 다양한 표현과 형식 가운데서 초기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해 믿었던 요점을 사도신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조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예배행위의 일부였으며 무엇을 믿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서두에 "나는(또는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할 때, 그 선언이 신앙에 근거한 것이지, 단순히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선재


"내가 믿습니다"라는 진술은 그리스도는 마땅히 예배받을 대상이며, 따라서 그는 하느님과 동급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의 바울로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3단계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만물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한 그의 선재(先在), 성육신과 겸허(히브 5 : 7), 부활로 시작하여 영원히 계속되는 그의 영화가 그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진술은 〈요한의 복음서〉 서문일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의 성육신으로 동일시되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했고, 말씀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존재했다. 이 교리의 근거자료들은 필로나 팔레스타인 랍비들의 유대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에서 왔다. 그 자료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요한의 로고스 교리는 로고스를 특수한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신약성서〉의 다른 저작들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 장도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했던 자이며, 따라서 시간과 탁월성에 있어서 창조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구별되는 독특한 자로 말한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의 '앞서'라는 말은 분명히 그의 시간적 선재성과 우월한 존엄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선재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의하면 단어와 개념을 발견하기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예배드리고 있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은 아마도 그런 예배에서 사용된 찬송으로부터 인용된 듯하다. 신학적인 성찰은 만일 이 예배가 합당하다면 그는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


신조의 본문이 만들어졌을 때 이것은 구세주에 대한 통상적인 지칭이었다. 본래 '예수'는 그의 이름으로 '야훼가 구원한다' 또는 '야훼가 구원할 것이다'(마태 1 : 21)를 의미한다. 반면 '그리스도'는 '메시아' 칭호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이었다. 〈신약성서〉의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칭호로 사용했지만(루가 24 : 26, Ⅱ 요한 7), 그 칭호가 매우 일찍부터 고유명사가 되었음을 바울로의 용례로부터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이방인들은 그것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였고,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다(사도 11 : 26).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라는 단어는 주님의 지상 경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례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그리스도'라는 이름보다도 예수라는 이름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약성서〉 내의 본문의 변형이 가리키듯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가 거의 병용되었다. 현대에 와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관습적으로 예민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일부 집단들에서만 그러했다. 많은 교회의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은 문구들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칭호에 대한 〈구약성서〉의 의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칭호가 어떻게 다른 형태가 되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 중의 하나이며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7절의 진술이 그 예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그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몇몇 경우 복음서의 용법이 이스라엘과 참 신자의 특권으로서 신의 아들됨의 의미를 반영한다. 그러나 바울로와 같은 복음 전도자들은 이 명칭으로 어떤 특별한 영예를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예를 예수의 세례 이야기(마태 3 : 17) 및 변형(마태 17 : 5)과 연결시켰으며, 바울로는 부활 믿음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서〉의 '하느님의 아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선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후기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에 선재의 의미를 가미하게 된 것은 삼위일체 교리였는데, 여기서 '아들'은 영원한 2번째 위격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마태 28 : 19). 복음서들이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적이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다신교의 시도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 맞서 사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신앙고백했다. '하느님의 아들'은 영원자는 아들을 가질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관념과 정반대되는 것이며, '독생자'는 신의 출산에 대한 그리스 신화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4절에서 처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표현은 사도교회가 예수는 어떤 분이었으며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루가는 그 칭호를 크리스마스 천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다(루가 2 : 11). '주'(키리오스)라는 칭호가 1세기 동안 사용된 방식으로부터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사용했던 그 칭호의 몇 가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우주에 많은 신적인 그리고 주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주(Ⅰ 고린 8 : 5~6)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유형화되었듯이 모든 사람의 주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라는 것(묵시 17 : 14)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불렀던 〈구약성서〉의 계약의 하느님, 야훼가 새 계약을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로마 10 : 1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과 같이 키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가 대항했던 2가지 부류의 청중들에게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때로 이 명칭은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와 같이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나타냈으나, 〈구약성서〉를 반영하는 문장들에서 때때로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은 선재였다(마태 22 : 44). 점차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주'라는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성육신과 겸허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신조의 더 이른 형태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라고 읽혀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혹은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듯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요한 1 : 14).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이 신조의 특징은 복음서의 중요한 부분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이야기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조와 〈신약성서〉의 편지들, 특히 바울로의 편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유사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 수난 이야기에 할애되었다는 사실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조차 그가 말하고 행한 다른 어떤 것들보다 며칠간의 예수의 삶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의 원인은 〈신약성서〉와 신조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인데, 그것은 곧 예수의 수난·죽음·부활 사건이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신앙이다. 복음서에서 이 사건들은 절정을 이룬다. 편지들은 그 사건들을 초기 교회의 구체적 상황들에 적용시켰다. 바울로가 십자가(필립 2 : 6~11)와 '그(예수)가 배반당하신 밤'(Ⅰ 고린 11 : 23)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서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불려온 것과 이와 연관된 사건들을 교회가 기념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일부는 이러한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또다른 일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헌신적인 삶에서 수난사건의 중요성을 암시했다. 십자가는 어떻게 인류의 구원에 영향을 끼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의 대답은 다양한 은유들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드렸고, 그의 생명은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양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인류를 살렸다. 그의 고난은 사람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을 위한 모범이었으며, 그는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제2의 아담이었다. 그의 죽음은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은유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사의 주요한 대속(代贖) 이론을 예시한다. 〈신약성서〉는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Ⅱ 고린 5 : 19)라는 내용을 상징하기 위해 이 은유들을 사용했다.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며

이 구절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신조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었다. 〈신약성서〉 안에서 이 신조의 근거는 갇혀 있는 영들에게 그리스도가 설교했다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3장 18~20절의 내용이다. 본래 지옥으로 내려감은 아마 그리스도의 죽음, 즉 그가 지하의 죽은자의 거처에 들어갔을 때와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조에 들어오기 이전에, 하강은 서방 가톨릭 신학에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연옥(limbo patrum)으로 불리는 지하세계로부터 〈구약성서〉의 신실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몇몇 교부들은 지옥으로 내려감을 지옥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요성이 계속 증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내려감의 교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설교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되지는 못했다.

 

영화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할 내용으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단언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부활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를 말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3종류의 확증을 위한 근거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로마 1 : 4)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방식이었다. 부활은 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소망의 근거였다(Ⅰ 데살 4 : 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생명"(로마 6 : 4)을 나타내며, "천상의 것들을 추구"(골로 3 : 1)하라는 훈계의 근거였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의심 없이 표현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에 나오는 바울로의 논쟁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부활을 합리화하려는 노력들뿐만 아니라 의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과 복음서와 바울로 편지 간의 차이점들은 부활의 내용에 대해 다양한 전승이 시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들은 다양한 전승들 속에서 얼마나 부활 신앙이 보편적이었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재림교리로서 그리스도론 부분을 결론짓는다. 초림은 육체로 온 것이고, 재림

그리스도의 영화에 대한 신앙고백을 완성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는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다.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에 대한 그의 완전한 통치의 실현이라는 선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았고 믿었던 것에 기초한 사도교회의 기대였다.

 

고대 공의회의 그리스도 교리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정통 그리스도교의 주된 노선은 〈신약성서〉와 고대 신조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초기 형태의 것이 교리로서 정식화되었을 때 그리스도교 신조가 되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처음 4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 즉 그와 성부와의 관계, 신성과 인성의 관계의 정식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정식화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 믿고 고백하던 것을 위협하는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생겼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와 이에 대항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부분이다.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초기 이단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인격과 사명을 오해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다. 〈신약성서〉와 교회의 초기 신앙고백은 그러한 오해를 지적하고 그것에 응답했다. 비유대 세계로부터 지지자들을 모은 그리스도 운동인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오해는 그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관심에서 일부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보통 사람인 나자렛 예수가 세례의 순간에, 또는 부활 이후에 하느님의 양자로 채택되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양자론이다.


니케아 공의회


위의 물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들을 통해 교회에 제기되었다. 그는 로고스가 피조물 중에 처음이고, 하느님에 의해 대리자 또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어, 하느님은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따라서 하느님보다 열등하고 사람보다는 우월하다. 그는 인간을 초월하지만 하느님은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위협하는 아리우스주의아타나시우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는 논쟁들을 종결지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쟁거리를 각 분파에게 주었다. 교리적 논쟁은 니케아에서 시작된 황제의 정치적 개입과 서로 숙적관계에 있는 주교 및 신학자들에 의해 복잡해졌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논쟁들로부터 삼위일체 

 

에페소스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여기서는 정통주의 집단들로부터 몇 개의 극단적인 입장들을 배제하고 4세기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계속된 토론과정을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토론거리를 제공했는데, 왜냐하면 5세기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에서 성부·성자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인성과의 관계를 유비(類比)로써 서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는 '본성'(physis)이었다. 하나의 본질에는 3가지 위격이 있었다(4세기 논쟁의 결과였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하나는 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두 본성이 있었다. 이 두 본성간의 관계에 대해 5세기 신학자들은 논쟁했다.


당파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반세기 동안 몇 개의 주요강조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발전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특징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대적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흡수시킨다고 비난했다. 한편 안티오크에서 사용한 사상과 언어 양식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안티오크 학파가 개별적인 성격을 주장하는 두 인격들로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서방신학은 이러한 두 대안들과 같이 추상적이지 않았다. 이 신학의 주된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실제적 관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을 희생하지 않고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4세기가 지나서도 황제는 항상 화해하는 행위에 참여했는데, 이집트를 비롯한 나라들은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결정은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공의회의 결정은 그들의 정치적인 상황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교회의 규범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와의 갈등은 네스토리우스키릴루스


칼케돈 공의회의 해결


해결의 기초는 로마의 교황 레오 1세의 교서에서 조문화되었듯이,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에 대한 서방의 이해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우리는 모두 일치하여 가르친다……하나이며, 동일한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 완전하고 인성도 완전하며……혼합되거나 변질되거나 나뉘거나 혹은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을 지니며, 본성들 사이의 구분은 결코 연합을 통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존재로 협력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문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가 강조하는 것들이 표현되었는데, 인격의 통일성과 본성들의 구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그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교리에 대한 기본적 진술이 되었다. 서방교회측은 그리스도의 사역교리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동방교회측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는 칼케돈 공의회 이전의 논쟁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칼케돈을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충돌했다.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한 논쟁은 칼케돈의 해석을 명료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극단들은 안티오크 학파의 극단이 정죄되었듯이 정죄되었다.


이러한 모든 신학적 토론에서 나오는 것은 위격의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성과 인성과의 일치성을 확언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해석이었다. 흥미롭게도 교회의 전례는 교회의 신학자들이 진술의 명료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을 때 이 해석을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교회의 전례 초기부터 현존했었던 것에 대해 재진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조문화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처음부터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서방 신앙과 사상에서의 그리스도 해석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교리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남아 있었다.

토론이 주로 동방에서 진행되어왔던 반면, 질문에 대한 가장 상세한 대답을 제공한 곳은 서방교회였다.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


중세


이 문제에 대한 서방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인식했으며, 신적 은총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이 어떻게 비천한 자를 높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과 하느님의 영적 본성의 연결이었고, 인류가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이었다. 그것은 옛 인성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새로운 인성의 기반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구속을 위한 성육신의 중요성을 묘사하려고 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런 강조를, 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결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화해행위를 서술하기 위해 적절한 언어를 찾았던 안셀무스와 종교개혁자들의 서방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형성되는 동안 화해를 서술하는 많은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성서적 말씀 속에 어떤 선례를 가지고 있었다. 화해에 대한 가장 뛰어난 묘사들 중 하나는 속죄에 대한 성서적 은유와 연결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표현방식에 공통적인 것은, 재연합은 하느님의 행위였다는 것과 그 행위에 인간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론들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 때문에 너무 '객관적'이 되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과 마귀 사이의 거래에서 저당물로 보였다. 다른 이론들은 인간의 관련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너무 '주관적'으로 집중시켰기 때문에 구속의 전 영역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그의 책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에서 많은 이론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대속교리로 만들었는데, 이 교리에 따르면 죄는 하느님의 영예에 대한 침해였다. 인간이 그 침해에 대한 대가로 하느님을 만족하게 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인간이 오래 살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참 인간이며 완전한 가치를 가졌던 유일한 생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하느님의 침해된 영예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비의 하느님이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왜냐하면 참 인간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사람들에게 유효할 수 있었고, 참 신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와 죽음의 열매들을 수용함으로써 인류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약간의 변형을 거친 안셀무스의 대속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정통 개신교 이념들의 기초를 형성하면서, 라틴 교회의 신학에 전승되었다. 십자가는 대속의 만족교리에 의해 강화되고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사역을 설명하는 전통적 방식들을 수정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에 스콜라 신학이 공헌한 것은 신학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는 때때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에게서 가장 완전한 표현과 교리적 견해의 충분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인간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며, 그를 통해 삼위일체와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데 필요했던 사다리를 신비주의자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몇몇 그리스 교부들의 신비적 신학에서 예기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 교리는 신비주의가 과도한 범신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더불어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며 숭배의 지속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세의 공헌은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와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인간적 생애를 더욱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형제단은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신비주의로부터 구별되기 위해 실천적·윤리적인 신비적 헌신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주제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산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의 참 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인성을 단순한 교리적 개념으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 새로운 인식은 비잔틴 성상에서 유형화된 그리스도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조토 같은 화가들이 예수를 묘사하기 시작했던 방식에 반영되었다고 헨리 토드와 그밖의 몇몇 사람들은 주장했다.


종교개혁과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보수적이었다. 정통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그리스도론을 거의 변경시키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

루터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내세운 성찬에 대한 사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 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교리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 논쟁이 진전됨에 따라 루터는 신성의 편재성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통하고, 그러므로 신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에서나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해석했다.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이론을 거부했지만, 고대 그리스도론이 성서적 증언에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낳아진 참 하느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참 인간"이라는 루터의 구절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신학 안에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서술의 몇몇 측면을 종합했는데, 그것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예언자·제사장·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로 발전했다. 이것들은 〈구약성서〉의 완성을 상징했고, 교회의 계속되는 삶의 한 측면을 표현했다.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사역에서 그의 예언적 직능을 계속 수행하면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완성했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해 중재자로서 기능을 계속함과 동시에 제사장이면서 제물이 됨으로써 〈구약성서〉의 희생제를 종식시켰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가 임명한 자들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통치하는 분이었다. 개신교도들은 그들의 신학적·윤리적 또는 전례적 입장에 따라 서로를 구분했다. 그러나 삼중직을 통해 개신교 신학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론들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묘사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교리를 신학적으로 조문화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그리스도론 논쟁

20세기 중반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과 현대신학 사이에는 모든 개신교 교파와 신학자들의 시각을 변경시킨 그리스도론 논쟁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 사이의 간격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현대 개신교 신학 사이의 간격이 더 크다.


논쟁의 기원들


종교개혁 시대에 정통교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비판은 '종교개혁의 좌파'인 미겔 세르베투  러므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정통주의 이념을 비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알베르 슈바이처는 H. S. 라이마루스(1694~1768)의 연구로부터 비평적 태도가 발전했다고 보지만, 라이마루스는 예수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다루었던 계몽주의 방식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의 책들은 다른 책들처럼 연구되어야 했고, 예수의 생애는 복음서들의 증언을 비평적으로 조사하고 숙고함으로써 그려져야 했다. 계몽주의는 복음서 기록들의 상대적 신뢰성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수의 생애에 대한 현대적 관심을 처음으로 일깨웠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계몽주의 비평의 대상은 두 본성교리가 아니고 대리적 대속교리라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적 이념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지 않고, 기적,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에 대한 믿음을 서서히 포기했다. 그리스도교리사에서 그들의 중요성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자료에 대해 역사적 연구를 시도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론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다.


19세기


비록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주의 가르침을 단절하는 시작이었지만, 19세기에 와서는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신학자 및 학자, 한동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D. F.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35)와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63)는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 영향을 끼쳤다. 슈트라우스의 연구는 우리가 복음서들 안에 가지고 있는 상(像)의 기초인(그가 '신화들'이라 부르는)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반면 르낭은 상황과 연관된 예수의 내부적·심리적 삶을 연구하여 예수의 경력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두 책은 널리 읽혀졌고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를 위한 자료들이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연구되어야만 한다는 계몽주의의 주장을 따랐고, 그들이 제시한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전기 형태였다. 슈트라우스, 르낭과 더불어 19세기에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책들이 과잉 출판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의 문제에 대한 각기 새로운 가설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의 재건을 함축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연구의 근본적 전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이었다. 또다른 구분방식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대한 종교'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최상으로 인식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교회의 교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형이상학적 진술 때문에 이 인식을 오해했고, 그래서 그 말씀의 본래적 단순성을 왜곡시켰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예수의 역사성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역사성을 의문시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역사문제에 대한 19세기 학문의 일반적 관심으로부터 성장했지만, 또한 그것은 신학자들의 종교적·윤리적 전제들을 반영했다. 그들 중 다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불변적인 것인가를 평가하는 데서는 칸트의 도덕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예수의 본래 말씀을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연관시키는 방법에서는 헤겔의 역사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세기 과학과 연관된 진화론과 자연적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들은 성서의 기적들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 ~1931) 등의 교리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교리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본질, 즉 하느님의 아버지됨과 사람의 형제됨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그 개념과 용어에서 고대 그리스도론이 비그리스도교 자료에 의존되어 있다고 증명했다.


20세기


20세기초 〈신약성서〉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권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관여했는데, 결국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즉 예수는 그의 죽음 이후 곧 도래할 시대의 종말을 기대했었고, 복음서에 있는 그의 가르침들은 종말 이전의 짧은 기간 동안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중간 윤리'였다는 것이다. 현대생활에 이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위험한 현대화로 비판받았다. 예수의 말씀 안에 있는 '철저한 종말론'의 주제는 요하네스 폰 바이스(1863~1914)에 의해 주장되었고, 알베르 슈바이처의 저작들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복음서들의 구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이 이론은 보통 〈신약성서〉 연구에서 이러한 경향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초기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어떤 개신교 교회들은 고대 교회의 신조들을 계속 답습했으나, 〈신약성서〉 문헌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이 신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개신교 교회들의 투쟁은 몇몇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고대 교리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했다.


그들 중 몇몇은 교리를 덜 엄격하게 다루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위격·본질·본성의 정태적 범주들로 그 교리들을 조문화하는 것은, 존재상태보다는 행위와 사건을 강조하는 성서적 사고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개혁교회 전통의 카를 바르트, 성공회 전통의 라이오넬 손턴, 루터교 전통의 카를 하임은 고전적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던 신학자들이다. 교회의 교리에 대한 지지를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 카를 아담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 교리를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형식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교리보다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많은 개신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함으로써 예언자적 직무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제사장적 직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유를 그의 대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재해석했던 구스타프 아울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새롭게 얻은 통찰력을 그리스도의 위격교리에 맞추기 위해 대속교리를 찾고 있었다.


따라서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연합·분열되는 요소가 되어왔다. 모든 그리스도교도는 그들의 충성을 다양한 교리적·전례적 방식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충성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적 진술은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를 분열시켰던 원인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연관된 역사적·비평적 탐구의 결과였다. 그들의 공식적 진술과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그런 탐구를 어느 한도까지 허락할 지는 각각 다르지만, 20세기 후반기에는 그런 탐구를 용납할 것을 시사했다. 다른 한편 1907~10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한 현대주의의 배척은 비판적 탐구방법을 신학적으로 사용할 때 이단이 되는 확실한 경계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로마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상당히 비평적인 문헌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비평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G. Bornkamm J. J. Pelikan 글 | 尹哲昊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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