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간 보내는 전도 편지


1일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편지 드리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일 세상의 끝이 온다 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자그마한 이웃사랑의 정을 가꾸어나가고 싶습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어떤이로부터 매주 한 장씩 아름다운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시인, 작가, 교수, 상담자들이 순수한 인간애와 인생의 지혜를 담은 [생명의 서신]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매주 한통씩 보내드릴 [생명의 서신]에 대해 부담은 조금도 느끼지 마시고 읽어보신 후 맘에 맞지 않거나 관심이 없으시면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과히 나쁘다고 여겨지지 않으신다면 가까이 두셨다가 생각 나시는대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하신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날로 더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일

 

땅만보고 산 인생

미국의 어떤 소년이 길에서 5달러 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줍고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행여 또 이런 일이 있을까 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녀 그만 그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길에서 줍는데 큰 취미가 생겨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 외에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주웠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많이 잃었던 것입니다.

그 일생이 결국 넝마주이 인생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어느 구두닦이 소년은 구두를 닦을 신발을 찾기 위하여 하루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만 쳐다보았습니다. 그

는 그렇게 함으로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것을 쳐다볼 기회를 잃었습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구두닦이로 마치지 아니하면 안되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보고 사는 자는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쳐다보고 사는 자는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릴 것이요,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은 저속해지고 비열해지나 하늘의 것을 보는 인간은 거룩해집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소망과 희망을 주신 주님,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거룩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3 일


가장 쉽게 망치는 방법

아름다운 화단을 망쳐 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꽃밭에 불을 지르면 될 것입니다.

물 속에 잠기도록 물을 퍼부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를 하지 않고도 쉽게 망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지요.

잡초가 무성해지면 저절로 망쳐지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친구간의 우정을 망쳐버릴수 있을까요?

돌아다니면서 그 친구를 마구 헐뜯고 다니면 될 것입니다.

그 친구의 우정을 크게 배반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것이 없습니다.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저절로 망쳐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쳐버릴수 있을까요?

방탕하고 법을 어기고 타락해 버리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대로 나를 그냥 편하게 두면 나는 저절로 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영혼을 망쳐서 멸망에 떨어질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내 영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내버려두고 살면 될 것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시지요? 조개 속으로 모래알이 한 개 들어갑니다.

그 부드러운 조개의 살 속에 거칠은 모래알이 들어왔으니 조개는 얼마나 아프고 쓰리겠습니까?


고통스러운 조개는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 견디며 참습니다.

이렇게 한 해가 가도 또 가고 하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혹 고난이 있는 것은 당신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인 것입니다.
참고 견디고 이기세요.

 


4 일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은 대상을 보는 관점부터가 다르다.

종교는 대상을 볼 때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대상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과학은 "어떻게"라는 방법에서 시작하여 대상의 분석과 현상을 논한다.


종교는 사물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과학은 이성의 눈으로 본다.

이렇듯 두 영역은 출발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종교를 비이성적이라 해서도안되고,

과학을 비신앙적이라 매도해서도 안된다.

서로 약점을 보완해 나갈 뿐이다.


하나님은 과학적 이성을 분석, 비평해서는 도무지 알 수 가 없다.
소련 우주비행사 티토프가 시애틀에 와서 기자 회견을 하는 중에

"내가 이 지구 위에 올라가서 지구를 몇바퀴 돌아보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더라."라고 했다.


얼마 후에 같은 장소에서 미국의 우주비행사 글렌이 말하였다.

"나는 우주여행을 하면서 우주의 찬란한 광경을 구경하였는데

지구 위에나 똑같은 자연법칙이 운행되어서

우주여행을 완전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보니

과연 하나님은 계시더라."고 했다.


똑같은 광경을 보았지만 그들의 관점은 이렇게 차이가 있다.
신앙은 이성으로 먼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고 아는 것이다
터툴리아누수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가 힘들다.


우리의 이성 넘어에 계시는 주님.
우리의 믿음의 눈을 밝게 하사 늘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5 일


안녕하십니까?
또다시 글월을 드리게 되어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담은 조금도 느끼지 마시고 읽어보신 후

맘에 맞지않거나 관심이 없으시면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과히 나쁘다고 여겨지지 않으신다면 가까이 두셨다가

생각나시는대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흔히 '예수 믿고 싶어도 꼴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안믿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먼저 저희는 몸둘바를 모릅니다.

그런 사실을 부인할수도 없고,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이해하는 눈으로 보아주신다면 만일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았었다면

얼마나 더 큰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의인(義人)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罪人)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2:17)
여기서 죄인이란 사회적인 법을 어긴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필립 디 네리는 성자로도 불리우는 16세기의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네리가 당시의 최고의 대학이었던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고 있는 동안에 어떤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 청년의 말인즉 자기는 유명한 그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네리는 그 청년에게 묻기를 "대학 공부를 다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했더니 청년의 대답인즉 "박사 학위를 얻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계속 질문하길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무엇을 하겠는가?"했더니

청년은 대답하기를, "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 처리해서

뭇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다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그 후에는 상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돈을 많이 벌고 드디어 부자가 될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네리는 계속해서,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고 했습니다.


청년은 답변하기를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히 살 것이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지?" 그러자 그 청년은 대답하기를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네리는 한 번 더 물어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는 것이지?"

이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런지 몰라 하는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로 가 버렸습니다.

밤사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본 청년은 인생의 허망함을 크게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다 자기의 일생을 맡겼다고 합니다.

귀하신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업에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6 일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바람, 공기, 마음등).
하나님은 영(신)이심으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입니다.


1.모든 피조물이 증거 합니다.
많은 천문학자들이 천체의 신비함과 기묘하게 조직된 것과 운행되는 것을 보고

우주 만물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창조로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2.인간의 양심이 증거 합니다.
어느 누구든지 위급할 때에는 하나님부터 찾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교육이나 권유를 받은 일이 없는데도

하나님을 찾는 것은 양심의 고백이요, 인간 본심의 부르짖음입니다.


3.예수께서 증거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천하에 없는 사기꾼이나  거짓말장이나 정신병자중 한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기꾼도 거짓말장이도 정신병자도 아님을

역사와 온 인류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영접할 때 혼돈 속에 방황하던 우리의 삶에
질서가 잡히고 도무지 의미도 없는 공허한 삶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가 맺히고, 죄와 고독과 고통의 연속에서
참 자유와 기쁨과 감격의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7 일

 

나는 누구인가?
어느 공원 벤치에 어떤 사람 하나가 밤늦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공원 지기가 순찰을 돌다 이 사람을 발견하고

 "당신은 누구요?"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응답이 없어 큰 소리로 "이 사람아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더니 일어나면서 하는 말이 "내가 누구냐고?

아 내가 그걸 알면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쇼펜하워였습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이 질문이 풀려야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이 한목숨 받쳐 뭔가 한 번 해보겠는데 풀리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질문을 풀어 보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죽었다든지, 입시에 실패했다든지, 큰 불행한 일이 닥칠 때,

또는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큰 실언, 큰 실수를 저질러 놓고 잠못이루는 밤이면

이 질문은 어김없이 또 찾아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놓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사람의 현주소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영혼과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동료 인간과는 인격적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의 살길은 내 영혼이 생명의 시냇가에 심겨져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여기 참 평안의 안식처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11:28)



8 일

어느 여인의 목마름
또 ... 또 ... 무려 여섯 번이나.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


현대인들이 텅빈 마음을 채워 보고자 음악, 영화, 스포츠 등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술, Sex, 도박 등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저것 해 보지만 참 만족이 없습니다.
심령의 갈등은 더욱 심해 갑니다.


성경은 그 까닭을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마음의 첫 자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메우려 하나 도무지 만족할 만큼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남편을 여섯 번이나 바꾸어 보았으나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을 마음 자리에 모시게 되니 기뻤습니다.
참 만족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손가락질을 한 그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그분께 나의 사랑과 온 마음을 드릴 때 내 영혼에 참 만족이 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부분이 있습니다.
그 텅빈 무저갱 같은 마음을 채워 보고자 이것저것을 해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마음을 채워 줄 멋있는 남자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이 허전함이 심해졌던 것입니다.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남편을 찾게 되었습니다.
또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욱 심해 갔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남편을 찾게 되었었습니다.

 


9 일  


어느 재벌의 변신

사람들은 자기 행복을 찾기 위하여

행복에 이르는 조건을 만들기위해 전 인생을 투자합니다.

돈을 버는데, 권력을 잡는데, 학문을 쌓는데 온 인생을 바칩니다.

그러다가 자기 건강을 잃어버리고, 자기 가정을 잃어버리고,

자기 이웃을 잃어버리며 자기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삭개오가 그러한 사람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그 모습은 돈을 모아 재벌이 되었지만

자기 영혼을 잃어버린 비극적인 인간상의 한 단면입니다.

돈은 벌었지만 매국노로 낙인찍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생명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고독한 모습을 보시고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사랑의 음성은 시들어 가고 있는 삭개오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건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친구처럼 불러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삭개오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 앞에 봄눈 녹듯 녹았습니다.

그 동안 자기 삶의 무가치함을 뼈저리게 느낀 삭개오는 지난날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새생활을 시작할 것을 다짐합니다.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참 행복은 물질의 풍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된 성품을 버리고 예수님같은 아름다운 삶을 배워 가는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도 당신의 고독한 모습을 보시고 사랑의 음성으로 이렇게 부르십니다.
" ○○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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