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관한 해석(성경의 분노학)


분노(미움)에 관한 해석은 '감정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세속적 감 정관 을 수용하고 있는 사람은 [분노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기독 교 감정관에 입각한 [분노 개념]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분노학]이다. 분노는 부정적 감정의 대표적 성격을 가진다. 이 미움은 하나님의 감정인 사랑의 정반대가 되기에 특별한 뜻이 있다. 심리학에서 [분노]가 인간불행의 대표적 원천으로 지적한다. 그래서 분노 에 관한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윌리엄스 박사(Dr. Williams)는 [분노가 죽인다] (AN GER KILLS)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은 분노는 정신적인 살인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 건강에도 살인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분노(미움, 적대감 등)에 관한 언어가 성경에 600번 정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노 와 인간적 분노]를 동일한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방법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관]에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욱 깊은 연구와 사색, 그리고 관상기도를 통 한 정확한 해답을 추구해야 한다. [성경의 분노학]은 상당히 긴 시간과 노력과 투자가 필요 하다는 점을 전제로, 여기에 필자가 깨우친 [간결한 내용]을 소개한다. 이것은 총론 적인 뜻 이 있음을 말해둔다.  [분노]는 차원이 전연 다른 세 종류로 분류해야 한다.
 
1.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분노를 설명하기 전에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적 언어와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람의 말로는 [하나님의 감정]등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깔멜의 산길](최민순 역, 성 바오로출판사,1988)에 있는 그의 신앙 고백적인 학설에서 [하나님과 피조물간의 차이점]이 어떻게 다른가하는 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그 차이점을 인식하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피조물의 모든 유(有)는 하나님의 무한유(無限有)에 비하면 무(無)일 따름이다--피조물의 모든 미(美)는 하나님의 무한미(無限美)와 견주어 볼 때, 더 없는 추물이니, 잠언의 말씀처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잠31:30)--이 세상 피조물의 온갖 선은 하나님의 무한선에 비하면, 악(惡)이라 부를 수 있다.(사람들이 칭찬하는 선(善)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선과 견주어 보면 하나의 악(惡)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지혜 및 인간 재능을 하나님의 무량하신 예지와 견주면, 순수 지극한 무지(無知)이다. (이것은 바울의 말씀처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 어리석음'-이라는 그대로이다(고전3:19)--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무엇을 안답시고 내세우는 저들은, 너무나 무식한 자들이니,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지혜로운 자들로 자칭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다'(라는 것과 같다)(롬1:22)--이 세상의 모든 낙(樂), 모든 재미를-하나님의 그 낙(樂)에 비하면, 지극한 고통(苦痛)이다.--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지극한 빈곤과 비참함이다.--세속의 생각을 따라 아름다움과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에 스스로 추하고 비천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을 슬퍼하면서, 하나님의 예지, 잠언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신다.'사람들아-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아,(어린이들은 철이 들고)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라. 미련하기 짝이 없는 자들아-슬기롭게 살아가거라-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을 모른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올곧음, 바로 그것뿐이다. 온갖 부귀영화가 나에게 있고-성공하는 것도 나 지혜가 없이는 어림도 없지.-나 지혜는 정의로운 길로만 움직이며 올곧은 길 한가운데로만 다닌다네.-나를 못 견디게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얻게 해주지. 그 사람의 금고가 가득가득 차게 해주지'(잠8:4-6,18-21).--하나님의 예지는 세상의 모든 이들, 마음과 정을 주는 사람들과 대화한다. 인간들이 사랑하는 부귀와 영화도, 사실은 예지 안에 그 참됨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뿐이다.(pp.44-48)"


이상과 같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비교]는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실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에 대한 인식도 새 차원에서 고려할 것을 강요 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완전한 [인간적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가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 나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믿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학 설에 준하면,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최고선(最高善)보다도 [선한 감정] 이라 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의 분노(심판)는 인간적 분노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감정에는 절대사랑]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정은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 는 존재다. 이 말은 그의 감정은 [사랑 자체]라는 점이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있는 [하나님 의 진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며, 사랑의 파도요, 함성이며, 진동이다. 이것을 인간적인 분노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감정에는 [인간적 미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사랑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무리하게 설명한다면 다음의 예화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가령, 초등학교에 다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가게에서 사과 한 알을 훔쳐먹었다고 할 때, 정상적인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눈물의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다. 이 눈물 의 회초리를 들고 아들의 종아리를 때릴 수밖에 없는 그 어머니 가슴에 들어가 보면, 하나 님 진노의 실체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철저하게 사랑의 감 정의 색다른 표현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인간적 분노와 동일한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 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 같은 악성 감정이 존재 치 않는다. 우리가 [사람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동작과 사건을 설명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의 언어]를 연상하면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풍토에서 해석해야 한다.

2. 인간적 의분


인간적 의분은 정의감(의로운 감정)에 기초한 분노이다. 따라서 이 의분은 원칙적으로 선한 분노이다. 이 의분 자체는 인간 사회에 있어야 할 필요한 분노다. 이 의분은 비합리적인 것, 부당한 처사, 비인간적인 행동 등에 대한 분노심을 뜻한다. 혹자는 이것을 사회적 분노라고도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으로 수정하고,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정정하고,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바꾸고, 병적인 요소를 건강한 요소로 개조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이것은 인류사회의 번영과 발전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생산적인 분노이다. 그러나 이 의분도 [하나님의 분노]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적 의분은 인간의 [상대적 감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의 감정은 하나님처럼 [절대적 사랑]이 없기 때문에 변질의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의 감정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정의감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그 정의로운 감정이 영구하게 유지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정은 시간과 함께 무수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 어제의 정의로운 감정이 오늘 저녁에는 [악성감정]으로 변질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인간적 의분]은 악성 감정으로 변질되기 전까지만 의로운 것이며 선한 감정이다. 이 의분이 악성 감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분노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의분은 [인간적 분노]와도 엄격하게 구분한다. 왜냐하면 인간적 분노는 시작부터 [선한 감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 분노는 어두움과 악마성의 토양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시작부터 인간의 불행한 삶과 지옥적인 사건과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다.  의분과 인간적 분노는 그 차원이 다르다

3. 인간적 분노


[인간적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와 의분(의로운 분노)과 엄격하게 구분한다. 인간적 분노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

[분노]라는 말속에는 여러 형태의 부정적인 감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가 [잠재적 분노]다.

이것이 인간이 기지고 있는 특색 중 하나다. 이것은 사람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를 소극적이고, 비 공격적인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가벼운 분노가 마음속에 잠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내면적 분노]는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인 경우도 많다. 이것이 누적되면 우울증, 무력감 등 정신적 질환이 되기도 한다. 이 감정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데 방해요소가 되는 것 중하나이다. 이것이 [의분]과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시작부터 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끝까지 인간을 해롭게만 하는 부정적 감정이다. 부정적 감정은 악에 속하는 불필요한 감정이다.  이 잠재적 분노를 에베소 4장 26-27(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세속적 가정]을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성경에서, [잠재적 분노]의 존재성을 깨닫지 못한다.


둘째가 폭발적 분노이다. 

이것은 외부로 나타난 공격적 분노를 뜻한다. 대인관계에서 표면화된 미움, 질투, 적대감 등 모든 형태의 분노를 말한다. 이것은 100%사탄의 도구가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필자가 언급한 '사탄의 도구' 혹은 '사탄의 첨단무기'란 바로 이 '폭발적 분노'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사탄의 속성은 미움(분노)이다"라고 할 때도 주로 이 폭발적 분노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잠재적 분노가 사탄과 전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잠재적인 분노는 언제든지 폭발적 분노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다만 잠재적인 분노와 폭발적 분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실질적 으로 분노 문제를 관리함에 큰 도움이 되고, 성경(엡4:26-27)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잠재적 분노와 폭발적 분노의 성격, 강도, 파급효과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두 감정을 무기로 비유한다면 잠재적 분노는 고대인 의 무기인 몽둥이나 돌로 생각할 수 있고, 폭발적 분노는 총이나 대포와 같은 현대화된 무 기로 비유할 수 있다. 현대 무기는 사람에게 완벽하고 결정적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생명의 일차적인 적이 된다. 현대 전쟁에서 그처럼 많은 생명을 죽게 한 현대 무기가 실은 현대문명(기계문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인간의 내면적 감정과 밀접한 관계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자체가 감정의 산물이다. 특히 폭발적 감정의 시녀가 된 정치적 폭군에 의해서 다량 살상무기가 생산되고, 이것이 저들의 악성감정에 의해서 집행될 때 죄 없는 무수한 생명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이 인간적 악성감정의 악 마성과 그 위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좋은 예이다. 이것이 감정의 마력이 빚어 놓은 비극적 역사 현실이다. 이것이 인간 삶에 엄청난 독소가 되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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