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령과의 관계


Ⅰ. 시작하는 글

지금 지구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토질오염, 수질오염, 공기오염 등 환경오염으로 지구는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지구가 병든 것은 순전히 인간들의 양심이 부패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고 그리스도의 영성이 오염이 되어 사회와 공동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영적 환경도 이미 세속적으로 오염이 되어 우리의 신앙이 죽어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와 신앙이 건강해 보이지만 교회의 탈과 믿음의 탈만 벗으면 우리의 영성이 심히 병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가 제도권 안에서 전통과 교리와 권위 그리고 외형적 성장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성이 건강한 사람은 법이나 전통, 제도, 교리 등과 외형적 성장에 보다는 예수의 영/정신(spirit)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바울은 율법에 의한 종교적 구조 의식(rite)의 거부를 위해 영성을 강조했으며, 인간의 계획과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강조했다. 

 
영적인 사람(pnematikos)은 자신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결정적인 원리로서 성령을 의지하며, 그에 따라 경건하고도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와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 흥미 있어 하고 험담을 늘어놓기에 분주하다. 

 
그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시기와 미움, 투쟁과 분열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사회적인 욕심으로 교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런 일들이 육신의 열매로서 영성이 상실된 사람들의 모습이다.(갈5:19-21,딤후3:1-5)
이제는 영성 회복을 위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Ⅱ.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창조될 때에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창1:27)을 말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아담이 아들 셋을 낳았을 때에 그 생긴 모습이 자신을 닮았다고 말한 것처럼(창5:3)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1:26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두 단어가 나오는데 '형상'은 안에 속한 것을 말하며, '모양'은 밖에 속한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안에 속한 것-생각, 의지, 감정을 갖고 있고, 밖으로는 모양, 즉 몸을 갖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안(In)의 형상이라 함은 인간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의 형상'을 말하며, 하나님의 밖(Out)의 모양이란 성육신을 통해 실천적인 공생애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영성이란, 하나님의 인격이며, 정신이며, 삶 그 자체를 말하는 "사랑의 영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성이 구체화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그 분의 공생애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 실체이시다.(고후4:4,골1:15,히1: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곧 예수 그리스도 시므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따라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격과 그 분의 삶을 따르는 것(마5:3-10,고전13:4-7,갈5:22-23,골3:12-14,약3:13-18)이 곧 기독교의 영성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님의 영성인 사랑의 영성과 더불어 예수님의 정서를 갖고 살 때에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랑의 형상이 회복되어 영성인(靈性人)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성결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롬12:2) 

 
"프란시스 쉐퍼"는 영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신앙 영성'과 '생활 영성'이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즉 교리의 영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생활의 영성은 공동체의 영성으로 묘사된다. 교리의 영성은 '바로'(right)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며, 공동체의 영성은 '아름다움'(beautiful)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신앙의 영성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쉐퍼의 영성인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과 조화가 있는 아름다움이 강조된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쉐퍼의 영성은 첫째는 바른 교리의 영성이며, 둘째는 아름다운 삶의 영성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어 주는 말이 '사랑'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쉐퍼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이다. 

 
그는 영성이 예배당 안에 갇혀 버린 영성을 '추한(Ugly)영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공동체 의식으로 확대시켜 나아가는 '아름다운(Beauty)영성' 즉 생활 영성을 추구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폴 스티븐스가 말하는 '영성'이란, 우리가 '종교성'이나 '기도회'등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고 주장한다. 그 응답의 방법은 일상적인 업무, 인간관계, 사회적 활동 등 자신의 모든 영역에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규적인 예배나 기도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체가 영적인 하나님의 시간으로 재인식하고 말씀이 생활화되어 건강한 영성을 보전해야 한다.
마틴 루터는 주일 저녁에 교회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주일까지는 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6일 동안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사랑하는 장(場)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월요일부터 한 주간의 교회는 예배당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터, 가정 등 세상 속에 자리한 모든 삶의 현장이 곧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회는 결코 예배당 건물에 한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영성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교회당에서의 종교적 의식으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전체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께 응답하는 영성의 표현이요, 저자거리는 영성 훈련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Ⅲ.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 교회가 10년 전부터 '영성'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아직 진정한 의미의 영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영성은 성령 운동 즉 은사 운동이 아니다. 영성도 물론 성령과의 관계가 매우 깊지만 은사 충만이나 질병 치유 등 신비의 운동은 아니다. 부흥 집회 등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결국엔 신비한 은사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영성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율법적 신앙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율법적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데 성경 말씀을 많이 읽거나 많이 암송을 하거나 또는 교리나 성경을 많이 공부하여 지식을 많이 갖고 있으면 그것이 곧 좋은 믿음으로 인식을 하는데 이것 또한 영성은 아니다. 

 
특히 현세적 삶인 가족 관계, 대인 관계, 직장과 사업 등 일상 생활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소홀히 여기며, 교회와 기도와 예배 그리고 전도 활동 등에만 열심히 충성하는 것이 곧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결코 그런 것이 영성은 아니다. 

 
캐나다의 영성 신학자인 "폴 스티븐스" 박사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영성 현장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이미 설계해 놓은 틀 안에서 우리의 생애를 마감하는 날까지 영성 훈련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과 의식(rituals)과 교리 등을 통해 종교성(piety)을 부각시키며 종교화시키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종교성을 영성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성을 통해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키워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결국 현대판 바리새인적 신앙을 양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직도 한국 교회가 소속된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 안에서의 열심과 충성이 강조되어지면서 신앙이 종교화 되어가고 있다. 영성이 왜곡되었거나 남용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Ⅳ. 영성 회복의 필요성

한국 교회는 세계가 부러워 할 만한 교회 성장을 가져왔다. 교단별로 규모가 큰 교회들이 많이 있고, 교회의 신자 수, 충성심, 헌금, 많은 예배와 기도회 등은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장해 왔는지를 잘 보여 주는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목회자들의 노력한 결과와 평신도들의 열심 있는 충성심 위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의 성장이 멈추었다. 그 큰 이유는 교회가 맛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그 능력과 신뢰를 상실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는 이면에 숨겨졌다가 이제 슬며시 그 정체를 드러내는 몇 가지 허상(虛像)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량주의(物量主義), 기복신앙(祈福信仰), 기독교적 샤마니즘(Shamanism), 세속주의(世俗主義), 교회의 기업화(企業化) 그리고 성직자의 권위 의식 등이다. 그 결과 외적으로는 교회와 교단의 분열이 많아졌고, 형식적인 의식이 배인 종교적 전통과 제도만이 남았고, 내적으로는 종교적 개인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면 차라리 교회의 문을 닫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18:6-10)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 건물은 많으나 에클레시아적 교회는 심히 적고, 진리를 입으로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행함으로 말하는 사람도 심히 적고, 믿음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사랑과 능력은 약하고, 항상 '나'는 보이나 '이웃'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것은 영성으로 살아야 할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살기 때문일 것이다.(롬8:8-9)
영성 생활은 종교적 신앙이기보다는 참된 인간의 삶 그 자체이다. 

 
영성 회복은 단순히 착한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바로 믿고, 성령으로 바로 살자는 '바로 운동'인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삶이었듯이 우리의 삶은 영성인(靈性人)이 되어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Ⅴ. 영성의 세 가지 방향

주재용 교수는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형성된 "복음"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기독교 영성의 바람직한 방향을 언급함에 있어서 '정통적 행동 없이는 정통 교리와 신학은 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영성 운동의 방향을 논할 때에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실천적 삶이 영성적으로 강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최종호 교수는 영성의 회복과 그 실천성을 말하려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아가페)'의 낱말을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의미로 설명을 하고 있다.

1.하나님의 사랑(영성의 기원) -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시고 선택해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 받을 만한 선한 것이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이 '사랑(아가페)'은 하나님 본래의 모습이며,(요일4:7-8) 이 사랑으로 예수님을 보내시고 화목제로 삼으시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요일4:10) 

 
하나님의 인격은 사랑의 인격이며 그 분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공의도 깊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하나님의 삶은 모두가 '사랑'이시다. 그 사랑으로 우주와 만물과 인간을 선하게 창조 하셨고, 후에 타락한 인간을 죄인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대속의 자리로 보내 주신 것이다.
여기서 영성의 기원을 찾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다.

2.하나님께 대한 사랑(영성의 회복) -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적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감사와 찬양, 예배와 기도 등의 신령한 삶으로 표현되어진다. 

 
나는 피조물 됨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며, 나는 종 됨을 깨닫고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하고, 나는 자녀 됨을 깨닫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순종을 다 한다. 

 
그래서 내 삶의 주역이 내가 아닌 하나님의 영(靈)이 되시게 하여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생이 되도록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진리를 깊이 묵상해 보면 또 다른 감격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찬양과 사랑을 드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서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선택이 내 영혼을 평화롭게 하며, 예수님의 대속이 내 가슴을 울리고, 성령의 내주로 내 인생이 아닌 주님의 인생으로 사는 사람이 진정 좋은 믿음의 사람이다.
이것이 곧 영성 회복의 길일 것이다.

3.이웃에 대한 사랑(영성의 실천) -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발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감격으로 인하여 이웃 사람들에 선(*service)을 베풀고 싶은 것이 자연적인 이치이다.(마10:42,행2:42-46,요일3:17) 이것은 삶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것에 대한 기쁨이요 환희일 것이다. 

 
하나님은 영(靈)으로 존재하는 분이시기에 그 분을 직접적으로 섬길 수는 없다. 다만 예배로 그 분을 섬길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웃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며 사랑하는 일은 영성의 열매로서 그 사람의 신앙을 측량할 수 있는 것이다.(약2:14-26,요일3:14,18,23,24)

이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영성이 회복이 되면 '사랑의 사람',
'사랑의 교회'가 되어 사회로부터 사랑과 신뢰가 회복되어 선교의 문은 활짝 열려져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 될 것이다.(행2:47) 


Ⅵ. 영성 회복의 필수 요소들

1.가난한 마음 - 아무런 욕심과 욕망이 없는 마음, 항상 텅 비워져 있는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는 영혼의 굶주림을 고백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무욕(無慾)의 마음과 지극히 겸손한 마음은 구원의 전제 조건이요, 영성회복의 필수 요건이 된다. 가난한 마음은 곧 사랑의 마음이기에 이런 사람은 언제나 온유하며, 겸손하며, 악을 행치 아니하며, 절제와 관용과 평화가 있으니 성령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세속의 문화에 무관심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하며, 일상 생활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릴 줄 알며, 이웃을 향하여 봉사하고 섬길 줄 아는 영성인(靈性人)이 될 것이다.(열하4:3,마5:3)

2.기 도 - 기도는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원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 그분의 자비 등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에 대한 앎이다.(마6:33)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소원을 성취하려는 욕망의 기원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내 영혼과 마음에 그려질 수 있도록 인내하며 깊이 있는 묵상 기도 생활이 요구된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아(自我)를 죽이고, 내 마음을 비우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웃을 돌아보게 하는데 필수 요건이 된다.
바리새인과 같은 '고상한 기도'보다는 세리와 같은 '겸손한 기도'가 영성 회복에 매우 좋은 도움이 될 것이다.

3.말씀 묵상 -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말씀이다. 말씀의 문맥만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잘 이해를 해야 한다.
말씀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삶의 양식을 바꾸어 거듭난 사람으로 변화를 주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딤후3:16-17)
그러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福)이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다.(요1:1)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영성을 회복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그 말씀은 영성의 규범이요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4.예 배 -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예배가 의식(儀式)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영적으로 진실 되고 참되게 드려야 한다.(요4:23-24,롬12:1)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가 드려져야 하며, 기쁠 때나 괴로울 때 등 언제든지 예배를 통해서 능력을 얻고, 위로도 얻어 생활의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며, 전인적(全人的)-육체적. 정신적. 영적-치유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며, 자유와 평화를 선포하신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의 거룩 된 만남'인 것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뵙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했듯이,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독자 이삭과 자신의 찢어지는 듯한 고통까지 드렸듯이 나의 마음과 뜻과 영혼의 힘을 다 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이며 이때 우리의 영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5.공동체- 영적인 사람들은 자연히 공동체를 형성한다.(행2:46,4:32)
공동체 생활은 단순한 몸과 몸의 만남이 아니고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요 영성과 영성의 만남이며 사랑 과 사랑의 만남인 것이다.
물은 각처에서 흐르지만 결국 한 곳에서 만나듯이 영적인 사람들은 초대 교회처럼 한 곳에서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 곳에서는 문제와 만나며, 용서와 만나며, 치유와 만나며 봉사와 만나는데 이것이 공동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며, 이웃을 함께 돌아보게도 하여 우리의 영성을 항상 보존 해 주기도 한다. 물론 육적인 사람들도 저희끼리 만나 공동체를 형성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곳에는 감사와 격려와 위로와 용서 등 사랑이 없으며, 시기와 험담과 분열 등이 있을 뿐이다.

영성 회복의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다.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타락 전의 에덴 동산의 삶을 회복하여 내 마음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목적이 있으며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는데 그 뜻이 있다.
그리고 영성 회복은 사람의 지식과 감정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성령의 임재와 다스림으로 가능한 것이다. 

 

Ⅶ.영성과 성령의 관계

영성을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정신 그리고 그 분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성령의 열매가 있었다. 기독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된 인간의 참 모습을 본 받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열매라고 휘튼 대학의 로버트 교수는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영성과 성령의 관계는 절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 모든 영역에서 영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를 죽이고 성령의 충만을 얻어야 한다.(엡5:18)
영성은 성령의 열매이며 영성인은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영성 회복은 성령의 내주(內主)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1.예수님의 영성과 성령 -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세례 요한으로 부터 요단강에서 물 세례를 받으셨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다.(마3:16)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으며40일을 금식 기도를 하셨다. (마4:1-2)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과 함께 튼튼한 준비를 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의 완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부터 출발을 하셨으니 그것은 8가지의 기본 인격이다.(마5:3-10) 그 기본 인격은 갈라디아서 5:22-23절의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이니 예수님의 영성은 곧 성령의 충만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성령과의 동행하심이었으며 그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영성이었다.

2.제자들의 영성과 성령 -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참 자유를 위해 오셨는데 제자들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는 정치적 자유를 기대 하면서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다. 그 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눈과 몸으로 경험을 하고 신앙고백도 하였지만 결국엔 십자가 앞에서 모두 실망을 하고 배반을 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가 되는가 했지만 그들은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다시 모여서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다가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 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행2:1-4) 이때부터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에 충만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행4:8,31)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충만한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돌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행7:54-60) 과연 제자들은 자연인에서 영성인으로 변화를 입어 자신의 인생과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선교 활동을 한 것이다.(행4:8,7:55)

3.초대교회의 영성과 성령 -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여 기도 하다가 역시 성령의 충만을 받고 그들의 의식 구조와 생활 양식이 크게 달라졌다.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눠 쓰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로부터 나누어주고, 언제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행2:44-46) 그들이 성령과 함께 동행하여 기쁨과 평화 그리고 참 자유를 누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도 받고 선교의 문도 활짝 열린 것을 보게 된다.(행2:47)

이와 같이 영성의 활동은 언제나 성령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영성은 곧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을 의미하는데 그 속성은 마태복음 5:3-10절의 '제자의 도'에서와 고린도전서 13:4-7절의 '사랑의 열매'에서 예수님의 영성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성령의 열매와 제자의 도(道)와 사랑의 열매는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영성인 것이다. 

 

Ⅷ.마무리 하는 글

최종호 교수(부산신대)는 [영성의 성령론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세상의 현실 속에 있는 나는 자주 두 개의 '나'로 모습을 드러낸다. 즉 '본래의 나(self)'와 '이기적인 나(ego)'가 그것이다. 시기, 미움, 험담, 분열 등 악독은 어두운 육적 열매로 '본래의 나'속에 있지 않고 그것은 자기만을 고집하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에서 표출되어진 '이기적인 나'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는 '나'와 하나님 밖에 거하는 '나' 사이에 새로운 투쟁 거리로 들어간다. 

 
두 개의 나, self와 ego에 대한 구별은 '창조된 나'와 '타락된 나'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인간 본래의 나(self)에 거하신다. 그러나 또 하나의 나(ego)가 확대되어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靈)과 형상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어 버렸다. 성경은 이와 같은 ego의 확대를 타락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ego로 둘러싸고 있는 인간의 실존 속에 구체적으로 찾아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논술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새 생명'이 되심을 친히 보이셨고 후에는 성령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성령이 거하지 않는 인간의 영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와 같은 삶, 즉 하나님의 삶을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은 인간의 영성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묶인 자들과 눈 먼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을 찾아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게 하신다.(사61:1,눅4:18) 그러므로 영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엄두섭 목사님은 "참다운 영성은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정의를 내리시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에게 임하며 그 영을 받은 자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특히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의 사람을 찾아 성령은 사역을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는 곳엔 영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영성과 성령과 삶은 언제나 하나이다.

우리는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어 이해를 한다.

1. 자연인 - 무신론자, 무속인, 타종교인을 총칭해서 자연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생활의 경험과 양심에 따라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신앙적 표현을 한다.

2. 육적 그리스도인 -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수도 믿는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동의(同意)하는 것이지 결코 믿음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의 신앙은 언제나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늘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살아간다. 다만 습관적인 예배에 참여하고 필요시에 기복적인 기도를 할 뿐이다.

3. 영적 그리스도인 - 이들은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구원의 은총 앞에 감사를 잊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본(本) 받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라면 자신의 명예와 재산과 신분도 포기하면서 순종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계획과 노력을 앞세우지 않고 항상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을 겸허히 기다리는 사람이며 이웃을 자주 돌아보는 일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는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열매는 뿌리가 결정을 해준다. 나는 자연인의 뿌리인가, 육(肉)의 뿌리인가, 아니면 영(靈)의 뿌리인가?
그리고 각 열매는 고유의 냄새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냄새는 역시 예수의 향기일 것이다.
예수의 향기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마22:36-40,계19:8)곧 영성을 의미하며 그것은 성령과의 관계에서 피어날 것이다.

끝으로 한국 교회의 현실과 관련해서 김경재 원장의 '콩알과 콩깍지'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 한다.
우리가 콩이 자란다고 했을 때에 콩과 콩깍지가 모두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현 상황은 콩깍지는 자라는데 콩알은 자라지 않는 현상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교회 건물은 커졌는데 교인들의 신앙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에 이제 우리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콩깍지를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콩 알맹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 콩알을 키우는 것이 곧 영성 운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앙은 '종교적 의식의 행함'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생활'이어야 한다. 그 생활이란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대하는 마음 그대로 사랑하며 섬기는 일인 것이다.(마22:35-40,19:16-22,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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