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이해


박익수 교수(감신대 신약학

 


I. 들어가는 말

 ​  현대인들은 공해와 정복되지 않은 각종 질병, 불의의 사고, 격무와 스트레스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에 건강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 우리는 건강식품을 찾고, 무사고를 빌고, 휴식과 적당한 운동으로 맞서고 있으나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묵도해 오고 있다. 우리는 마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과 같은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면 죽음의 공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행동연구(behavioral research)에서 널리 증명되었는데, 죽음을 개념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는 동물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를 극복하고 확신을 갖고 살다가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길을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정서적인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자연질서 속에서의 변화와 같은 자연적 과정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또 다른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실체는 삶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구나라트나(Gunaratna)"우리는 삶을 원하고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삶을 이해한다. 죽음은 넓은 의미에서 생명의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삶과 죽음은 동일 과정의 양단(兩斷)이며, 당신이 과정의 한쪽 끝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다른 끝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목적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목적 또한 이해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모든 생물에게 오는 보편적인 것임으로 우리는 죽음을 삶의 자연적인 과정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죽을 준비를 하는 셈인데, 바꿔 말하면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죽음의 은유적, 상징적 의미보다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생물학적인 '죽음'에만 제한하여 살펴볼 것이다. 필자는 크게 사상적으로 구약에 근거해서 묵시사상 출현 이전 유대인들의 죽음 이해와 유대 묵시사상과 혼합주의적 헬라 문화 유입 이후의 구약, 신구약 중간시기의 문헌, 그리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죽음 이해를,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부활의 개념을 타 종교의 죽음 이해와 함께 살펴 볼 것이다.

. 신약성서의 죽음에 대한 배경 연구

1, 묵시사상 출현이전의 구약성서에 나타난 죽음

 

   ​구약성서에서 사용된 죽음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야웨 하나님께서 인간의 生死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은유적인 죽음이해이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 6-7)

  ​야웨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전권을 지닌 자로 등장한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행·불행과의 연관 속에서 은유적으로도 언급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부'(Sheol) 또한 '죽은 자들의 나라'도 지하세계를 지시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불행을 의미하는 비유로서 사용된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하는 하나의 악한 세력()으로서의 죽음이해이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13:3- 4)

  ​위 본문에서도 '죽음'에 대한 유사한 이해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죽음'이란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상황을 지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야웨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파괴시키는 다양한 조건들을 지시한다. 이러한 이해는 이스라엘 주변국들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것으로서, 죽음을 야웨와 전투를 벌이는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행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죽은 자의 왕국이 아마도 스올이나 우가리트 문서에서 죽음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는 존재인 MOT같은 그 자체의 신들을 가졌을 때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서 이러한 신들은 우상이나(9:21 ; 13:7) 열등한 세력, 죽음의 천사(12:23 ; 삼하 24:16 ; 33:22), 혹은 악마(91:5) 등으로 축소되어 있다.

  ​셋째는, 역사적 생명의 종말로서의 생물학적인 죽음이해이다. 2-3장의 창조설화에 묘사된 인간은 복잡한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피조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생명을 지니게 된 육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구약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생명력'(life-force)을 부여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 개역: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리고 그 생명력(생명체, 생령)은 인간의 피와 호흡 속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호흡하는 것을 살아있는 증거로 보았고, 피 흘리는 것을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다음의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nephesh)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9: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nephesh)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7:10-11)

   위의 본문들에서 언급된 '생명'은 히브리어로 ''nephesh''이다. 원래 이 단어는 '목구멍'을 의미했는데, 점차적으로 '호흡''생명'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피조물'(23:30)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이해에 따르면, 구약의 인간이해는 후대의 해석자들처럼 인간을 'nephesh'의 소유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nephesh' 그 자체로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인간과 생명'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생물학적 죽음'이란 육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생명력'이 떠난 결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생명력이 '나갔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생명(nephesh)이 떠나려 할 때에....." (35:18) 개역 :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생명(nephesh)이 떠날 때에..." (2:12 : 개역: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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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생명()이 떠나는 것을 하나님의 의지와 연관시킨 이해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아이의 생명(nephesh)이 그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왕상 17:17-18:21 : 개역: 아이의 혼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nephesh)을 취하옵소서..."(왕상 19: 4)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104: 29)

  ​그렇다면 피조물로부터 떠나간 '생명()'(nephesh)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구약성서는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간다고 언급하고 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3: 19)

   "그가 만약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ruah)과 호흡을 거두신다면...." (34: 14)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호흡, ruah)은 그 주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12: 7)

   '생명(nephesh, 혹은 ruah)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언급 속에는 아직 ''이란 개념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nephesh)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귀속된 것으로서 죽음과 더불어 떠나가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이해되었다.  결론적으로 생물학적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셨던 '생명()'이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육체적인 종언인 것이다.

  ​2-3장의 창조설화는 "땅을 경작할 자가 아직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땅을 경작할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생명의 번식과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므로 그 구조 속에서는 죽음의 실재에 대한 것은 처음부터 관심 밖이었다. 다만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일정기간 동안 땅을 경작하다가 자연스럽게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심지어는 포로후기 예언자들이 이상적인 시대를 갈망했을 때에도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럽고 적합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직 인간의 존재 영역으로부터 제거되어져야만 하는 ''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죽음 그 자체의 적합성'에 대한 반감이나 거부감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일류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운명은 하나님의 창조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14:14).

  ​정상적인 삶의 연한, 즉 장수하여 노년의 행복한 때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마치는 것을 행복한 죽음으로 보았다. 또한 장수한 삶이 축복 받은 죽음과 관련을 맺는 한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15:15 ; 28:8 ; 35:29 ; 대상23:1 ;29:28 ; 42:17 ).

  ​그러나 묵시사상 이전의 대부분의 구약성서 본문이 '인간의 유한성'을 거부감 없이 수용한다거나,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지라도 "조기사망"(premature death, 삼하18:33, 38:1-3, 10, 12), "폭력에 의한 죽음"(violent death, 왕상2:28-33, 12:11-13, 20:2, 10-11, 삼상28:15-30), 혹은 후손 없이 죽음을 맞는 경우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묵시사상 이전의 구약성서에는 인간의 생명은 언젠가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인간은 땅에서 완전 소명되는 것이라는 이해가 두드러지고, 죽음 그 자체나 죽음 이후의 상태나 삶에 대한 관심이나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죽음''유한성'은 그 자체로서 두려움과 극복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정황들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이스라엘의 '계약공동체' 이해로부터 온 것이다. 즉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였으며,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 그들을 야웨와 맺은 계약공동체와 야웨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죽는다면 '유한성'에 대해 탄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8:3-5, 10-12 ; 38:18-19).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탄식'의 내용이 '유한성'에 대한 것이라든지, '죽음으로 인해 없어지게 될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관계성의 상실.' 즉 야웨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 및 하나님과의 관계의 상실이 탄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대한 열망이 '사후의 삶'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묵시사상 출현이후의 문서들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이해

  ​B.C. 2C 무렵, 당시 종교세계에서는 '죽음을 그 자체의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소망'을 내포하는 '묵시론'이 폭넓게 퍼지게 되었으며, 또한 '묵시적 종말론'이 묵시문학의 핵심사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당시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죽음의 초월에 대한 소망'은 역사적, 사회적 여러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핸슨(Hanson)이나 바렛(Barret) 같은 학자들이 '비록 적지 않은 비유대적인 영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시문학의 뿌리는 구약의 예언운동'이라고 묵시문학의 근원을 추적한 것이 옳은 것 같다. 핸슨(Hanson)에 의하면, 묵시문학에 나타난 종말론의 형성을 포로기 직전과 포로기의 예언운동에서부터의 계속적인 발전으로 보고 있다. 이때의 민족적 위기와 패망과 같은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해답을 주려 한 것이 묵시문학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언문학에서 묵시문학에로의 변화는 공동체 위기와 국가적, 종교적 붕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생활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종교적 문학운동의 결과였다. 새로운 역사적, 사회적 여건은 묵시론자들로 하여금 신화에서 온 개념들을 사용해서 이 세상이 아닌 피안의 다른 세계에 관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주전 2세기에는 정치적 불의, 군사적 횡포, 그리고 헬라문화의 우주관의 유입 등으로 기존의 사회적, 종교적 체제의 존속여부에 의문을 제기케 되었고, 또한 사람들이 현재의 사회적, 종교적 체제에 소외감을 갖게 되었을 때 묵시문학의 저작활동은 활발했었는데, 이 때 임박한 종말, 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 혹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개념들이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세계는 이미 개인의 영혼불멸에 대한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소위 '지하세계'라고 하는 죽음 후의 장소와 처지에 관한 정확한 표상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하세계가 죽은 사람들을 다시는 지상세계로 복귀시키지 않고 어둠의 존재로 이끌어간다는 생각은 점차 이스라엘 사람들 머리 속으로도 스며들었다. 이스라엘에서 '쉐올'(Scheol)이라고 불리는 이 죽은 자들의 나라는 비교적 후기(지혜문학 형성기)에 이르러서야 신학적으로 사유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죽은 자들의 거처로 인식된 '쉐올'과 그곳에서의 존재방식에 대한 관심은 죽은 자의 지위에 관하여 보다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전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땅만이 하나님의 세력범위라는데 만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죽음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비통하고 힘겹게 체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삶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으며, 죽음은 곧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후기단계에서 형성된 죽음에 대한 반응은 이전 단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사유단계에서는 죽음이 전반적으로 불행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여전히 죽은 자를 불결하게 여기는 신념은 있었지만, 포로기가 끝난 후부터는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를 위하여 묘지를 만드는 수고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죽은 자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자로 취급받지 않았다. 또한 죽은 자의 거처에 사는 이들의 비참함에 대한 언급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에 이 때에는 죽은 자를 잠자는 상태로 묘사하기 시작한다(14:10-12 ; 3:5, 4:8 ; 13:3 ; 22:29 ; 26:19 ; 51:39, 57 ; 12: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 3-4)

  죽음을 잠자는 상태로 인식했던 사상이 발전하여 단 12:2에 이르러서는 죽은 자들의 잠자는 상태에 대한 언급은 어렵지 않게 부활에 대한 언급으로 바뀌어 갔다. 어쨌든 이러한 이미지는 죽음으로 인해서 느끼게 되는 공포를 격감시켰으며, 나아가서 이러한 죽음의 잠자는 상태는 마치 꿈처럼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교제의 계기로 생각될 수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와같이 죽음을 극복하는 희망은 구약성서 후기문서에 속하는 묵시문학에 이르러서야 죽은 자들의 부활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3. ·구약 중간기의 문서들에 나타난 죽음이해

  ​이 때 '사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영향을 끼친 요소들로는 첫째, 당면한 어려운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재 사용된 '고대 이스라엘의 갈등신화'(Israel's ancient onflict-myths)이다. 이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악마'(the demons)의 자율성(autonomy), 능력(potency), 그리고 심지어는 존재(existence) 여부조차도 부정되었던 인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주변국들에 의한 침략과 정복, 포로기를 경험했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적대국가들을 야웨 하나님의 적대자들이요, '악마'들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악마'의 실재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죽음'을 포함한 세계의 불행과 재난에 대한 이해 및 설명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것들의 극복 또한 기대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쿰란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사 세상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그리고는 인간을 위해 두 명의 사자들을 임명하셨다사악한 짓을 하는 자들은 모두가 '죽음의 사자'(The Angel of Darkness)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며, 어둠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다심지어는 '의로운 일'을 행하는 자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들이 행한 모든 죄와 사악한 행위들은 '죽음의 사자'의 지배의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수수께끼 같은 섭리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더욱이 인간이 당한 모든 고통과 시련은 '죽음의 사자'의 사악한 지배력에 의한 것이다"(1 QS , 17-22).

  둘째,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문헌부터 지혜문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하나의 확신, '야웨는 그이 백성들에게 죽음이 아닌 생명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형태의 죽음을 사악한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에 잘 드러나 있다.

 

 "생명길로부터 벗어나 죽음을 자초하지 말아라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으며, 살아있는 것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Wisdom of Sol. 1:12-1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셨으며, 자신의 영원한 형상대로 빚으셨다;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것은 사악한 사탄이며, 그를 따르는 자들은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Wisdom of Sol. 2:23-24).

 ​셋째, 특히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조기사망'의 원인을 인간의 죄악으로, 또는 인간의 운명적 죽음을 죄악의 결과로 보는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만약 인간의 죄된 조건이 극복될수만 있다면, 죽음은 그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구약성서가 증언하듯이 '생명'을 계약공동체와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당시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겪고 있었던 압제와 혼돈의 세력이라는 오랜 세월의 통치는 종식될 것이며, 하나님의 계약적인 통치가 모든 그릇된 것들을 바르게 할 것이라는 공동체의 계약적인 삶으로의 회복을 하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부활생명'으로 이해한 것이다.

  ​다섯째, 주변국가들의 종말론, 그 중에서도 특별히 페르시아 종말론의 영향이다. 페르시아의 종교는 부활 및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내포하고 있는 철저한 우주적 이원론으로서, 이러한 외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고유한 고대 신화들의 의미적용을 보다 명료하게 함과 동시에 보다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B.C. 4C말엽부터 팔레스틴의 유대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혼합주의적 헬라문화에서 형성된 한 차원 높은 인간이해의 영향이 그것이다. 특히 희랍과 동방의 '신비종교들'안에서 발전된 ''(psuche) 또는 '기억'(thumos)과 같은 개념들이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반성적 사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들 속에서는 죽음의 주제가 지속적이면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폭압적인 셀류시드 왕가의 통치 하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정황 및 불확실성들을 제시함과 동시에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 중에 첫 번째는, 죽음을 축복으로 이해한 것이다. 죽음을 축복으로 이해한 것은 당시 박해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죽음 이해이다. 죽음을 축복으로 본 이유는 죽음이 계속되는 박해로부터 자유함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문헌에서 죄악이나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징조로 간주되었던 '조기사망'이나 '폭력에 의한 죽음'은 희랍문화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야웨신앙을 신실하게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범(Norm)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잘 반증해 주고 있는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는 죄와 고난에 대한 전통 신학적인 입장을 새롭게 기술하고 있다. 즉 폭력에 의한 의로운 자들의 '조기사망'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그만큼 빨리 경험하게 될 것임과, 동시에 그들을 이 세상에서의 고난으로부터 자유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비록 그가 제때가 되지 못하여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안식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은 생애기간이나 많은 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사악한 곳으로 빠지고 그의 영혼이 거짓에 의해 기만당하기 전에 그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그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할 때에 주님께서 일찍이 사악한 세상에서 그를 데려갔다" (Wisd of Sol. 4:7-14).

  두 번째는, 신앙을 증언하는 순교행위로 죽음을 이해한 것이다. 배교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음을 당함으로써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죽음 이해이다. 구약 초기문헌에 따르면, 행복한 죽음이란 조기사망이나 폭력에 의한 사람이 아닌 오랜 삶 후에 맞는 자연스러운 죽음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서는 '폭력에 의한 죽음'도 자주 행복한 죽음의 영역 속에 포함시켰다. 한 예로, 경건한 엘리아자르(The pious Eleazar)가 금지된 음식을 취할 것을 거부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하루빨리 내 무덤으로 나를 보내주오. 만약 내가 이렇게 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많은 젊은 사람들은 엘리아자르가 90살의 나이에 배교자가 되었구나 하고 믿을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내가(살기 위해) 율법을 파기한다면 나는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임과 동시에 내 생애를 더럽히는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오. 그래서 만약 내가 용기 있게 죽는다면, 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성스러운 율법에 합당한 행복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훌륭한 본보기를 남기게 될 것이오"(2 Macc. 6: 23-28)

  세 번째는, 충성된 자들에 부합된 부활의 소망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활의 소망은 배교 행위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기약된 것으로 명백하게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 부활의 소망은 계속해서 순교를 당하는 자들을 위한 만족할 만한 보응이었다(2 Macc. 7:10-11, 23).

  ​이 때에 죽음은 피조 질서의 한 자연적인 부분이 아니며 하나의 부정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갖게 된다. 몸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옛 세대를 통치하는 죽음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확신이 이를 확증한다. 새 세대는 죽음의 멸망에 의해서 특정지워질 것인데,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형될 때가 바로 그 부활의 때인 것이다(II Baruch, 51).

  특이한 것은 사해문서에 나타난 죽음이해는 동시대의 문헌들의 것과 상당히 다른 이해를 보인다신구약 중간시기의 다른 문헌들과는 달리, 쿰란공동체의 문헌에서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의 존재양식에서 또 다른 존재양식으로의 이 세상적인 변화, 즉 죽음으로 비유되는 것들로부터 생명으로의 변화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곳의 엄격한 생활양식과 비유적인 성서말씀에 참여함으로서 죄를 짓고자 하는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인간을 탈선시키고자 하는 '어둠의 영'의 공격을 피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하늘의 천사들과 교제하게 될 수 있다고 이해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쿰란 문헌에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보다는 무가치한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널리 확장되고 있음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 모두는 다 죄인일 수밖에 없으므로(1 QH IV, 29-30)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은 공동체의 선택받음(1 QH IV, 5,31; X,3-4)과 그에 동반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인간의 사악한 본성은 깨끗함을 받았고(1 QH III, 21), 인간의 죄도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다(1 QH X VII, 15). 그리하여 공동체는 천사의 통찰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신들을 天上會議에서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는 자로서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시대를 미리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1 QH III, 21-22). 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내용을 영혼의 불멸성과 영원히 하늘나라에 머물고자 하는 소망에 대한 증거들로서 이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을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서 얻게 된 또 다른 결과, 즉 종말의 축복을 이미 경험한 것으로 이해한다.

III. 신약성서의 죽음 이해

   ·구약 중간기의 문헌에서 나타난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은 신약성서에서도 지속되거나 보다 발전된 양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묵시적 종말론은 보다 분명하게 죽음을 인간실존의 영역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부활은 그 자체로서 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 창조의 한 부분으로서 지속되는 것이 되었고, 죄와 '유한성' 사이의 인과론적 관계가 보다 명백하게 주장되었다. 또한 쿰란 공동체의 사해 사본에 나타난 실현된 종말론은 이미 예수께서 전해 주신 '영원한 삶'(Eternal life) 속에 참여하는 것으로 창 2-3장에 언급된 죽음에 대한 원인론도 '죽음이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었으며,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죽음의 세력을 물리쳤다는 인식에 의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확신에 차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에서도 그리스도교적 죽음을 희랍적 영혼표상에 힘입어 보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의 삶과 메시지가 정당시되고 예수가 주님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 개입활동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광 중에 나타날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었다. 죽음을 고려하지 않는 이와 같은 재림 기대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1.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난 죽음이해

 ​바울은 기본적으로 묵시사상 전통 안에 서 있다. 묵시사상 전통은 죽음을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에 들어온 적대 세력으로 생각한다. 죽음은 특히 로마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처럼, 이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었다.그의 서신 서들에서 죽음이란, 세상 그 자체를 타락의 상태로 인식하는 묵시적 종말론과 같이, 다분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창조자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구약성서나 랍비 유대교와는 달리 그는 죽음의 운명을 창조자의 섭리라기 보다는 죄의 결과로 명백하게 이해하였다.

  ​"그런즉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인 것 같이..."(5: 18-19)  

"죄의 삯은 사망이다" (6: 23)

  ​바울은 특별히 롬 8:19-22에서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인류뿐만 아니라 땅 그 자체에서도 선포하신 저주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죄와 죽음과의 관계가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구원론과 연관되는데, 곧 모든 피조 세계가 다 죄에 빠지게 되었으며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죽음은 모든 피조 세계를 타락시켜 창조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도록 하는 악마의 활동과 관련된 죄의 세력에 대한 표지가 된다. 그러므로 '유한성,' 곧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져야 할 악의 세력이 되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5: 18-19)

  ​죽음, '유한성'에 대한 이해가 이와 같이 역사적인 문제로 인식됨에 따라, 죽음은 역사적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소망의 정당성을 입증한 사건이 되었으며, 새 시대의 도래를 증언해 주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죽음에 관한 바울의 사상에는 최소한 두 가지 기본 요건들이 나타난다.

    첫째, 죽은 자들의 마지막 부활과 재림은 모든 피조물의 소망이 된다는 것이다. 장차 일어날 마지막 우주적 구원은 죽음의 마지막 패배가 되었으며, 동시에 죽음은 기독교인들과 피조물 모두에 대한 '마지막 원수'가 된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 55)

  묵시적 종말론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죽음을 가져온 악의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는 이제 바울에게서도 열렬한 소망과 열망의 차원으로 바뀐 것이다. 죽음은,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생물학적으로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패배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간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는 그때에 비로소 죽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15:53-54). 하나님의 미래가 그리스도 안에 실제적으로 임재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현재 상태가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바라고 있다는 미래적 의미, 이 두 개가 다 그의 사상을 점유하고 있다. 바울 사상의 일관된 주제가, 하나님의 다가오는 승리를 향한 전주곡으로서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묵시사상적 해석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살전 4:16)은 결코 그리스도와의 교제로부터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불러내시어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 분'(4:17)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관에 기초하여 바울이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직접 연결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에서 '죽은 자들''잠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라는 용어는 이미 고대부터 '죽음'을 대신한 완곡어로서 초기 헬라시대의 작품은 물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문서들에서도(47:30 ; 31:16 ; 왕상 2:10 ; 14:12 ; 13:3 ; 51:39 ; 12:45 ; 13:36 ; 고전 11:30) 폭넓게 쓰여졌다. 헬라 문학작품은 물론 다니엘서를 제외한 구약성경에서도 '죽음'''으로 비유했으나 그 때는 내세에 대한 실질적인 기대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죽은 자'라는 거슬리는 단어를 피하여 다른 말들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관례에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수면(睡眠)의 경험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유사하다. 어린아이들이 잠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더 나은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죽은 자들을 주안에서 '잠자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죽음에 대한 보다 심오한 신학적 이해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삶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이해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리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 5: 6-9)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1: 21-24)

  바울에게 있어서 '유한성'이란 타락한 피조 세계의 당연한 운명(구약성서와는 배치됨)인 반면에, 개인의 죽음의 시기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구약성서와 일치). 죽음은 헬라문헌이나 신구약 중간기의 순교문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의 바람직한 탈출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사건으로 사라져갈 옛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죽음은 이미 그 세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그것의 궁극적 의미도 상실된 지 오래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 복음서의 죽음이해

 ​(1) 공관 복음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죽음에 대한 명백하고도 체계적인 이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작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죽음이해는 특별히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죽음은 '하나님의 적'으로서, 사악한 세력들과 관련을 맺는 것으로서 인식되었다. 또한 이러한 죽음의 영향력은 부활사건에서 극복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죽음이해는 구약성서의 그것보다는 오히려 신·구약 중간기의 이해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적 관심은 신앙인들의 생명과 구원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비그리스도인들의 처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묵시문학의 새로운 점은 '악인들''비신앙인들'마저도 부활신앙에 포함시키고 잇다는 것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인 고려는 죄인들과 타락한 자들을 사랑하는 예수의 메시지와 상통한다. 사실상 공관복음서에서는 죽음이 바울에게서처럼 모든 존재의 범주로 제시되지도 않으며, 인간이 직면한 주요한 문제로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죄와 인간의 죽음 사이의 관계나 혹은 조기사망 같은 것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때때로 부정되기까지 하였다(1:1-2 ; 13:24-30).

  다른 한편, 공관복음서에는 신·구약 중간시기의 여러 문헌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死後세계에 대한 관심도 나타난다. 재성육신에 대한 분명한 언급들 중의 하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속에 묘사된 사후의 세계이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16: 23-30)

  ​또 다른 예는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지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예수는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시고도 틀렸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곧 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재성육신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16:13-16) 또한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엘리야나 그 밖의 다른 예언자들이 재성육신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유사하게 분봉왕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심히 당황해 하는 보도 중에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헤롯이 이르되 요한이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9:7-9)는 말씀도 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날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20: 36에 추가: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의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22: 23-32)

  제임스 파이크 주교(Bishop James Pike)나 런던의 교회에서 목회했던 웨더헤드(Leslis Weatherhead)는 예수 시대에는 재성육신론이 거의 누구에게나 수긍되는 개념이었다고 주장한다.

  (2) 요한 복음서와 제 3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 이해

  ​요한복음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내포한 새 시대로의 변화라는 묵시론적 주제는 더 이상 논의의 핵심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미래적인 변화가 부정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 이미 일어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실현된 종말론). 따라서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1:4 ; 3:36 ; 5:24). 생물학적인 죽음은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또한 임박한 죽음에 대한 예수의 반응도 공관복음서의 그것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그의 임박한 죽음이 악한 세력과 관련된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한다(10:17-18).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죽음이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12:23-24).

3. 계시록의 죽음이해

  ​이 묵시적인 저서는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인한 로마제국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반영해주고 있다. 계시록의 주된 논제는 순교한 자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이 땅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20:1-6). 동시에 저자는 죽음이란 질병과 재앙을 가져오는 악한 세력에 의해 일정기간 동안 지배되는 것이라는 신념을 보다 명백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이 세상 위에 임할 재앙에 대해서는,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늘로부터 땅에 떨어진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 별이 지옥 구덩이를 열자 거기에서부터 큰 용광로에서 내뿜는 것과 같은 연기가 올라와 공중을 뒤덮어서 햇빛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그 연기 속에서 메뚜기들이 나와 땅에 퍼졌습니다.... 그 메뚜기들에게는 땅에 있는 전갈(독사)들이 가진 것과 같은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것들은 땅에 있는 풀이나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쳐서는 안되고 다만 하나님의 도장이 이마에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히기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메뚜기들이 주는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주는 고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다섯 달 동안에는 사람들이 아무리 죽으려고 애써도 죽을 수가 없고 죽기를 바라더라도 그들을 피해 달아날 것입니다. (9: 1-6)

  또한, 죽음 이후에 죽은 자들이 당할 고통과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롣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다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니라" (20: 12-15)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는 죽음의 은 죽은 자의 정신상태에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초자아(super-ego)의 가시적인 투영으로 곧 자기 자신의 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합당한 '범아일여(梵我一如, That art Thou)는 당신의 진정한 자신은 과 같다는 것을 뜻한다. 심판주가 자기 자신이 된다는 사상이나 하나님이 되신다는 기독교적 입장을 이정용 교수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논증한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율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 없이는 상상할 수 없고 사람은 하나님 자신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귀속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과 똑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나타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배경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전경이 되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소리와 침묵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것이다."

  다른 한편,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악의 세력에 맞선 전쟁은, 다니엘서에 묘사된 바와 같이, 먼저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통치권을 받으신 후에(5), 사탄은 땅으로 내쫓긴다(12). 그 후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사탄을 따르는 무리들이 천년왕국의 통치가 시작될 때까지 싸움을 벌이게 된다(19:11-20:6). 마침내 그리스도의 승리가 지하세계까지 이르게 되고 사탄과 죽음과 지옥은 망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신약성서 시대의 그리스도교 태동단계에서는 죽음이나 삶이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죽음은 생물학적인 삶의 종말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새로운 삶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로, 즉 죽음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된 삶과 하나님의 은총의 상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삶을 의미하고, 반대로 생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일치하는 삶과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신앙인의 새로운 현존양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신약시대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바뀐 것은 예수의 재림은 지연되고, 로마인들에 의한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된 2-3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다. 자연히 제도화된 교회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실의 안주를 희구하면서 윤리적인 종교가 되어갔다.

. 나오는 말

1, 동양의 여러 종교들과 현대 과학의 죽음에 대한 이해

  ​우리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동양의 여러 종교들의 주장과 학자들의 연구에서 죽음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통과해야 할 두 개의 결정적인 관문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출생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두 통과의식(通過儀式)으로서 출생과 죽음의 날을 기리고 있다. 이들의 관계는 양면을 가진 문()과 같다.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둘 다 방향은 다르나 경험에는 동일할 수 있다. 출생이 무의식(無意識)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오는 의식(意識)의 해방이라면, 죽음은 일생동안 의식에 갇혀 있던 무의식적인 자아가 해방되는 굉장한 심리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둘 다 분리된 두 개가 아니고, 두 개의 다른 표면을 가진 동일한 본질인데, 이 관계는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곧 물질은 에너지가 표현된 상태일 뿐이라면, 에너지는 표현되지 않은 상태의 물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물질을 알기 때문에 에너지를 아는 것과 똑같은 출생의 순간을 아는 것으로써 죽음의 순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의 삶에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죽음은 삶의 끝이거나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항상 우리와 함께 여기 삶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은 삶 속에 있고 삶은 죽음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변화의 관념에 근거한다. 죽음은 삶의 다른 편이자 삶의 연장이요, 삶은 죽음의 다른 편이고 연장이 되는 이유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양()과 음()의 힘을 양전기와 음전기로 불리는데, 이 상징은 모든 사물에 적용할 수 있다. 양은 삶을 지시한다면 상대적으로 음은 죽음을 가리킨다. 음은 양의 존재를 전제로 삼고, 양은 음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때 변화라는 것은 모두 축소와 팽창의 형식을 따르며 항상 두 반대편의 상호작용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남성과 여성, 빛과 어두움의 관계도 삶과 죽음 사이의 관계와 아주 유사하다. 그림자나 어둠은 빛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빛 또한 어둠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빛의 강도가 감소할 때 어둠의 강도가 증가한다. 아인슈타인의 질량법칙(E=MC²)에서 힘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의 질량이고, 질량은 나타난 상태의 힘이라는 공식을 따른다면, 죽음은 삶의 표현되지 않은 상태이고, 삶은 표현된 상태의 죽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삶은 의식 있는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은 의식 없는(無意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적(靜寂)이 소리 때문에 알려지고 소리는 정적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삶은 죽음의 다른 편이요 죽음은 삶의 다른 편인 것이다. 한 쪽은 다른 쪽의 전제요 전경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의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은 죽음에 임해서 사람의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서 풀려난다고 믿었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종교도 해방의 진정한 경험은 죽음의 순간에야 온다는 입장이다. 힌두교인들과 불교인들도 역시 완전한 해방은 죽음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무의식은 의식의 세력에서부터 해방되고, 그리고 무의식 자체가 완전히 해방될 때 그것은 사마디(Samadhi), ''() 혹은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2, 죽음의 극복 : 부활

  ​우리는 지금까지 죽음에 대한 성서신학적 이해를 살펴보았다. 묵시문학 이전의 구약성서는 대체로 죽음을 하나님의 자연스런 창조질서의 한 과정으로 이해했으나, 묵시문학 이후의 문서들에서는 순교와 같은 죽음에 대한 대안으로 부활이 제기되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힌두교와 같은 동양의 종교들은 환생(還生) 혹은 재성육신(再成育身)을 주장한다면, 성서는 죽음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제시한다. 이 때 죽은 자들의 부활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에서 확실시 된 것으로 제시된다. 헬라인들은 죽음을 육체적 몸의 감옥으로부터 영혼의 해방으로 이해함으로서 부활을 영적 존재로 옮겨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영혼이 육체적 몸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개념이 없어서 부활을 영혼이 현재의 것과 유사한 다른 육체적 몸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기대했다.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제 3의 제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부활의 몸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부활이해를 주장했는데,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사건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직시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 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 12-20)

  ​예수의 부활은 이제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인을 위해서도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기반으로 간주되고 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셔서도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벧전 3: 18-19)

  그런데 부활의 날까지 죽은 자들은-'잠을 자든지'(살전 4:13-18)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평안히 있든지'(1:23 ; 고후 5:8)-하나님의 마지막 승리 때까지,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비록 바울이 믿는 자의 죽음 직후의 그리스도와 '개인적 만남'을 언급하면서도 그의 일차적 관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갖는 최후의 승리, 곧 모든 믿는 자들이 장차 갖게 될 '부활'에 있었다(살전 4:17 ; 6:8). 이것은 모든 피조물과의 연대성도 포함한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과 승리의 때에 있을 영원한 삶에도 모든 피조물은 공통의 유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일으켜질 수 있는가? 어떤 몸으로 올 것인가?(고전 15:35)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그는 육신 없는 인간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해답 속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 인간은 죽기 전에만 육신과 함께 살다가 죽고 난 후에는 육신 없이 영혼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항상 육신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는 '지상적', '부패할', '천한', '약한','자연적' 욱신 안에서 생활하지만, 부활한 뒤에는 '천상적', '부패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강력한', '영적' 몸을 갖는다는 것이다(고전 15:40-44).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고전 15: 50)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육체적인 몸의 다른 편은 '신령한 몸'이라고 지적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 15: 44)

  ​현대 과학자들도 모든 생물, 즉 식물, 동물, 사람은 원자와 분자로 된 육체적인 몸 뿐만 아니라, 또한 에너지의 상대적인 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육체와 영체는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둘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제외하고 한 가지만을 말할 수 없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염색체가 만들어지는 기본적 유전인자를 데옥시리보(deoxyribo)핵산, 또는 DNA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모든 다른 존재의 원초적인 범주인 음과 양의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학적인 유전인자와 인성의 원형은 하나이고 불가분리적이다.

  ​모든 종교의 구원의 궁극적인 구조는 세상에 있고 싶은 욕망에서 풀려나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것'은 다시 죽지 않는 것이데, "다시 죽지 않는다"는 이 개념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궁극적인 목표요, 종교의 지고한 목표도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구원이다. 불교는 그것을 '열반'(涅槃)이라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귀의함을 '구원'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른다고 한다. 성어거스틴도 우리의 삶은 영원한 집, 곧 우리의 무의식의 영원한 심층을 향한 순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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