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나타난 내세


김춘기(영남신학대학교 교수 / 신약학)


내세라는 말은 "지금 있는 세상"에 대비하여 “오는 세상”(the age to come)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이 내세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지만 이 경우에 내세는 하나의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이라는 큰 틀 안에 있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의 내세관은 종말론이라는 넓은 범주 안에서 논하여야 할 것이다.



1. “내세”의 정의


시대를 말하는 희랍어 aion은 신약성경에서 122번 나온다. 이 단어의 뜻은 “시대,” “세대,” “때,” “생명력,” “생애”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aion은 히브리어 olam의 번역어로 칠십인역에서 사용되는데 그 뜻은 순간적인 시간(moment)에 대비하여 긴 시간(a long time)이나 어느 정도의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가 하나님과 연관될 때는 “항상”(always), “영원” 등으로 사용되었다(사 40:28).


후에 유대묵시사상이나 쿰란문서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시대의 가름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유대묵시사상에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의 종말사상에는 이 세상의 기간을 400년 단위로 하여 네 시대로 구분하였다. 주후 일세기 말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위경에 보면(2 Esd. 6:7ff.) 시대를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 시대는 이삭으로 끝나고, 둘째 시대인 현재는 야곱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심판까지고, 세 번째 시대는 부활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인 현시대의 마지막 400년은 메시야 시대인데 이 시대의 끝에 메시야가 모든 인류와 함께 죽으며 그 후 7일간 침묵의 기간이 있은 후 부활이 오게 된다고 믿었다.


이런 구약과 중간시대에 발전된 “시대”에 관한 여러 가지 사상들이 신약성경의 aion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전치사 eis(into)나 ek(from)를 동반하거나 aion이 복수로 사용될 때는 제한적인 시간과 무제한적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긴 시간,” “시간의 과정” 등을 의미한다. 이 경우 구약에서 말하는 “영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게 된다(눅 1:70, 행 3:21, 요 9:32, 롬 16:26, 엡 3:21, 딤전 1:17, 유 13, 히 1:8).


둘째, “시대,” “시기,” “세대” 등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한 시대의 끝을 말할 때 aion을 사용하고 있다(마 13:39, 28:20). 또한 이 단어는 세상의 사건, 세상의 역사를 말할 때도 사용된다. 복수형으로도 사용되는데(히 9:26, 고전 10:11) 그것은 이 시대가 연속적으로 계속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셋째, aion이 “시대의 시간”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aion은 쉽게 “세상”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고(마 13:22, 고전 7:33), 그 결과 aion과 세상은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고전 1:20, 2:6, 3:19). 복수형은 “세상들”을 의미한다(히 1:2, 11:3).


넷째, 현재와 미래의 시대를 구분하는 aion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유대묵시사상의 영향에서 발전한 경우이다. 현재의 세상과 오는 세상을 구분하여 새로운 의미에서 aion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려는 내세는 여기에 속한다.



2. 유대묵시사상과 영지주의에서 보는 시대(aion)에 대한 견해들


신약성경의 배경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유대배경이고 또 하나는 헬라배경이다. 유대배경은 예수로 시작하여 초대교회에 이르기 까지 신약성경의 전반적인 배경이며 헬라배경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초대교회가 소아시아와 로마로 전파되면서 영향을 받은 배경이다. 이런 배경이 형성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관점이다.


신약성경이 쓰인 당시 시대를 보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유대묵시사상에서 보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헬라배경을 이루는 영지주의에서 보는 견해이다. 유대묵시사상은 역사를 하나의 시간의 흐름으로 보고 그 시간을 두 시대로 구분하였다. 그것이 “옛 시대”(old aeon)와 “새 시대”(new aeon)이다. 옛 시대는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 때까지를 말하고 새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서 시작한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 시대를 구분하게 해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분된 옛 시대는 과거와 현재를 말하며 이 시기의 특성은 악함과 구원불능이다. 새 시대는 선함과 부패하지 않음이라는 특성을 지닌 미래의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에 대한 인식이다. 묵시사상에 근거하면 현재는 옛 시대에 속하고 있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시적 현상이 역사 안에서 나타나지 않았기에 현재는 악함과 구원불능인 옛 시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영지주의적 관점의 특징은 역사적 시대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구분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실체(reality)이다. 실체는 시간 개념이 아니므로 영지주의적 관점에서는 역사는 의미가 없게 된다. 실체란 지금 여기의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범주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선을 의미하는 “영의 세계”(realm of spirit)와 악을 의미하는 “물질의 세계”(realm of matter)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물질의 세계에 속하면 그것이 악인 동시에 소멸이고 죽음이고 구원불능이며, 반대로 영의 세계에 속하면 그것이 선이자 불멸이며 생명이고 구원인 것이다. 이런 구분은 외부적인 하나님의 나라라는 하나님의 개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인간의 깨달음, 즉 신령한 지식인 “영지”(gnosis)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지주의적 관점은 동적이라기보다는 정적이고, 역사적(historical)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ontological)이다.


유대묵시사상은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진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인의 삶이나 역사에 하나님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옛 시대라는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활동이 시작되며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가 과거에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이미 행하여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그 사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깨달음의 세계, 즉 영지를 얻게 되면 그 사람은 물질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이 신약성경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유대묵시적 관점은 바울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반에 영향을 주었으며, 영지주의적 관점은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 빌립보교회, 그리고 요한복음에 영향을 주고 있다.



3. 신약성경이 보는 시대에 관한 견해


유대묵시사상에 나타나는 시대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은 예수의 말씀에서도 그대로 나오고 있다.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판에 대하여 예수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즉 내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는 것이다.


이런 구분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재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0)고 하였다. 누가복음 20:34-35에서는 부활에 관하여 말하면서 예수는 이 세상과 상반된 부활 후 세상을 “저 세상”으로 말하고 있다. 부활 후 오게 되는 “오는 세상,” “저 세상”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보상과 달리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런 이 세상의 끝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메시아적 징조로 답하고 있을 뿐 아니라(마 24:3ff.) 비유로 설명하기도 한다(마 13:36-43). 하지만 당시 쿰란문서나 유대묵시사상과 달리 예수의 말씀이나 비유에서는 마지막 전쟁이나 이 두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나 세력들을 이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는다. 인자는 참된 지배자이며 악은 인자에 의하여 멸절되지만 그 악은 인자의 반대에 있는 대응 세력이 아니다.


이 세상은 두 세력의 지배에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말씀에서 나타난 이 세상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과 물질이라는 두 세력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내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도 하나님의 지배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에서는 유대묵시사상에 나오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바울도 유대묵시사상과 같이 이 시대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세상의 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고후 4:4). 이 시대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갈 1:4) 오신 것이다. 특히 영지주의적 관점에 빠져서 구원의 결과가 이미 이루어 졌다고 믿는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은 미래적 관점인 유대묵시적 관점을 강조하였다.


고전 13장에서는 부활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통치의 미래성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15:20ff.). 예수의 부활은 첫 열매이고 그가 강림한 후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는 말씀에 준하면 원수의 진멸은 미래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묵시사상이나 영지주의와 다른 결정적 차이는 현재에 대한 인식이다. 바울은 유대묵시사상이 보는 역사관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것을 옛 시대와 새 시대라는 이분법적 시대 구분에서 탈피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사건 때문이다. 유대묵시사상에서 하나님의 개입인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데 반하여 바울은 예수의 오심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새로운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아담으로 시작된 악함과 구원불능의 옛 시대는 예수의 오심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옛 시대에 속하지만 예수가 오심으로 현재는 더 이상 옛 시대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는 …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는 말씀으로 이미 언급하였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이 점에서 바울은 현재가 세상의 신이 지배하고 있고 세상의 통치자가 힘을 가지고 있지만 구원의 역사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나타났다”는 말에서 바울은 유대묵시사상에서 말하는 미래적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개입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은 영지주의와 같이 현재를 구원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의 오심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하였지만 그 왕국은 가시적이지 않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 가운데 이 나라가 있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시적 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미래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역사에 대한 관점은 이 시대와 오는 시대로 구분하거나 물질의 세계와 영의 세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 이 전의 과거라는 옛 시대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는 현 시대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하는 새 시대라는 세 가지 시대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바울이 이해한 현재는 유대묵시사상처럼 옛 시대에 속하는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는 언제나 거부의 대상이 되고 모든 궁극적인 것은 미래에만 있게 된다. 이런 경우 신자는 현재를 부정하게 되고 미래로 도망하려는 탈 역사주의적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현재는 영지주의처럼 현재에 모든 것들이 결정되는 완성의 시간도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고린도교인들과 같이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를 궁극으로 삼게 되어 윤리적으로 타락하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금욕주의자가 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현재는 새 시대의 시작인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위하여 나아가야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현재와 오는 시대는 유대묵시사상처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과 완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는 오는 시대의 시작으로 연결되고 이 시대는 현재의 완성으로 현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기 때문에 예수의 오심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재는 옛 시대도 아니고 오는 시대는 현재와 다른 저 시대도 아니다.


현재를 새 시대에 포함된 시대로 보는 견해는 후기 바울 서신들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히브리서를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미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기”(히 9:11- 12) 때문이다(히 10:19, 13:14). 결국 내세의 모든 것이 현재에 포함되어 있기에 현재에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히6:5)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이 시대와 오는 시대를 구분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현재라는 이 시대가 미래라는 오는 시대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물론 오는 시대, 즉 내세는 현재의 궁극적 완성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이나 바울의 가르침에서 내세를 말하고 있지만 내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궁극적 목적도 유대묵시사상처럼 미래에 모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예수사건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런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다. 현재는 메시아이신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상태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인 내세는 더 이상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내세는 이 세상과 분리된 또 다른 세상이 아니다. 내세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오심으로 이 세상과 연결된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간의 전환점이 되었기에(갈 4:4) 내세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논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4. 현재와 내세를 연결하는 영생
신약성경에서 “오는 세상”의 특성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면 “영생”이다. 이 “영생”은 유대묵시사상이나 영지주의에서 내세 혹은 영의 영역에서 얻게 되는 궁극적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영생”이란 지금 이 땅위에서 사는 생명과는 다른 생명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단 12:2). 그러므로 이런 영생은 내세나 영의 영역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롬 2:7, 5:21, 6:22f., 16:25f., 갈 6:8, 살후 1:9, 2:16, 몬 15)과 공관복음서(마 18:8, 19:16, 19:29, 눅 18:30, 마 25:41), 목회서신(딤전 1:16, 6:12, 딤후 1:9, 2:10, 딛 1:2, 3:7) 등에서 이런 미래적 의미의 영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와서는 이런 영생을 지금 여기서 얻게 된다고 말한다. 영생은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기에 더 이상 미래적이거나 영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 3:15,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f.).


결국 신약성경은 오는 세상, 즉 내세를 강조하는 유대묵시사상과 이 땅의 세계와 다른 영적 세계를 강조하는 영지주의 사상 속에서 새롭고 궁극적인 내세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세상인 현재의 강조이다. 메시아이신 예수의 오심으로 모든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것은 현재와 내세는 연결되어 있으며 내세의 모든 의미는 예수의 오심으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세에 얻게 된다는 가장 중요한 “영생”을 현재라는 지금 여기서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세의 시작이고 내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의 완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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