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1. 두려움(신 1:26~33)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 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곳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 앞에는 골리앗과 같이 우리 인생을 막아서는 방해물(妨害物)들을 만날 때가 있다. 우리 가운데서 방해물이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 앞에 불쑥 골리앗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방해물은 ‘두려움‘이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도전(挑戰)받고자 한다. 두려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보편적(普遍的)인 감정이다. 집과 직장과 학교와 사회에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만약 확인하고 싶다면 거리를 다니다가 특별히 ’운전연습 중!‘ 이란 차를 보라. 그 차안에는 공포에 질린 얼굴이 있다. 두려움은 우리의 삶속에 너무나도 가까이 와 있다. 수만가지 두려움이 때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심리학자 미씬 박사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두려움은 영아기 때의 느끼는 3가지 두려움의 연장’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 중에서 첫째는 추락의 두려움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두려움이다. 어린아이를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하면 아이가 아프다. 즉 간이 떨어질 번했다는 말이다.

둘째는 큰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이가 깜짝깜짝 놀리는 것으로 경끼가 든다는 말이다. 셋째는 버려짐의 두려움이다. 부모나 보호자로부터 버려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혼자 있는 아이들이 겁에 질려서 우는 건 부모가 자기를 버린 것 인줄 아는 두려움이다. 아이가 혼자 있으면 울다가도 엄마가 들어오면 신기하게 알고 울음을 그친다. 미씬 박사에 의하면 유아기의 두려움이 청소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모되어 우리 안에 남아있다고 한다.

추락의 두려움은 성인이 되면서 실패와 포기와 좌절로 나타나고, 뜻하지 않은 사고의 두려움으로 찾아오게 된다. 큰소리나 소음의 두려움은 비판과 폭력이나 처벌에 대해서 나타난다. 내가 비난받으면 어떻게 하나? 학교에 가서 무서워하기도 한다. 체벌(體罰) 받으면 어떻게 하나?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로 기합(氣合)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다. 내가 사고당하거나 병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등이다. 내버려짐과 유기(遺棄)의 두려움은 인간 내적의 두려움으로 고독과 불안과 이별과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수많은 두려움들이 일평생 동안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두려움의 감정이 사람들에게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두려움은 때로 우리에게 유익하다. 어떤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다. 사람이 전혀 두려움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고를 만나겠는가! 만약 높은 곳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다면 자랑일 수 없다. 높은 데서도 두려워하지 않다가는 쉽게 다리를 부러뜨릴 수가 있다. 겁이 많은 게 때로는 좋을 때도 있다. 지금의 두려움은 영적(靈的)인 두려움인데 잘못된 마음의 두려움과 영적인 두려움에 인생이 잡히면 사탄이 주는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영적인 두려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 없이 살아가는, 우리 마음 안에 잘못된, 사탄이 심어주는 잘못된 두려움은 우리 삶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다. 민수기 13~14장(가나안 땅 정탐. 백성의 원망) 말씀을, 오늘의 본문인 신명기 1장(모세가 수령을 세우다. 정탐할 사람을 보내다)에서 간략하게 줄여서 재설교(再說敎)한 것이다.

 

두려움이 우리 삶에서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

(1). 두려움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불신케 만든다.

우리가 영적인 두려움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불신케 만든다. 1장 21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믿고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서 1년여만에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으로 왔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다.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한 이유는 그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1장 29절~32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廣野)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두려움의 위력이다. 온 백성이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들 앞에 있는 가나안 땅이 축복의 땅이 아니라 자기들을 삼키는 저주의 땅으로 보인 것이다. 그 마음에 두려움이 일어나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들이 무효화되고 말았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왜 그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무너졌는가? 그들이 기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정탐꾼들은 10:2로 의견이 분산되었다. 열 명의 보고(報告)에 두려움이 일어나 과거에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無效)가 되고 말았다. 수많은 기적을 보았기에, 홍해가 갈라짐을 보았고, 메마른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아무것도 없는 반석에서 나오는 넘쳐나는 생수의 기적을 보았으나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떨었다.

1장 28절을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열 명의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두려움의 마음을 심어준 것이다. 두려움은 강한 전염성(傳染性)을 가지고 있다. 사업(事業) 때문에 아버지가 두려워하면 엄마와 아이에게도 전염이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기가 죽는다.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아이들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열 명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 온 이스라엘들에게 전염되었다. 수천 년 전의 그 도사린 두려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공격하고 있다. 혹시 우리도 두려움으로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어느 날 의사(醫師)의 진단에 두려워하다가 그간의 누린 축복이 무효가 되지는 않았나? 그간의 사업도 하나님의 손길이 지켜주셨는데 닥쳐온 어려운 일들로 인해 실패를 염려하고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왜곡(歪曲)하게 만든다.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면 정상적인 판단(判斷)은 정지되고 바뀌어지고 왜곡된다.

1장 28절의 말씀에서 가나안 땅의 현상보고로 인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그 백성은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아무리 큰 성읍이라도 옛날 건축이 어찌 하늘에 닿았겠는가!

민수기 13:33절에서는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보고했다. 사람이 아무리 작아도 메뚜기처럼 작을 수 있겠는가!

27절에서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이 왜곡되고 만다. 사업과 건강과 이웃관계와 직장의 고난 속에서 두려움의 억압이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그간 하나님을 찬양했던 붉은 입술이 원망의 푸른 입술이 되었다. 26절에서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믿음으로 살면 순종하지만 두려움으로 살면 거역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게 된다.

이같은 두려움을 이기려면 세가지를 이루어야 한다.

 

두려움을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라.

때로는 실패와 패배와 좌절과 비판과 폭력과 건강. 경제와 관계의 두려움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마음의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시인하라. 허세없이 고백하라. 죄의 고백처럼 고백하라. 마음을 살펴서 주 앞에 올려놓으라. 설교자들은 목회(牧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성도들의 공격과 비판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설교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때마다 이러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오로지 어린아이처럼 목회와 비판과 설교에 대하여 겁에 질리는 일에 대해서 시인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이럴 때 하나님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다. 부부간에도 너무 행복해도 깨질까봐 두렵다. 별 두려움도 많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주장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에 빠질 곳을 미리 아시고 수많은 말씀들로 위로해주셨다. 두려울 때 성경을 통해서 담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으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신 31:6).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膽大)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膽大)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등을 카드에 적어놓고 이 말씀들로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라.

이스라엘의 어려움은 홍해와 가데스 바네아를 비교하면 홍해를 건널 때가 더 어려웠다. 가데스 바네아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탓이다.

아이 앞에 큰개가 와서 으르렁 거려도 아빠의 품에 안기면 덜 무섭다. 암흑 속에서도 아빠나 엄마가 있으면 두렵지 않다. 환경이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36절에서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順從)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믿음의 반응 차이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착되었을 때의 힘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은 없어진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지 않은 탓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쫒는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아버지의 양자가 된 우리는 큰 기쁨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서 ‘두려워하라‘는 ’존경하라, 시인하라‘는 뜻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29~31). 참새와 머리털까지 세신바 됨을 믿지 않음이다. 보혈의 공로를 믿으며 창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몸과 영혼도 죽이시는 주님을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는 “존경하라”는 뜻이다. 아들을 안으시는 하나님. 이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찬송)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주님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축도)

이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하심이 오늘도 주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 안에 다가오는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며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같이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2. 낙심(느 4:7~16)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우리의 적은 골리앗과 같은 방해물들이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낙심’이다. ‘낙심’위에서도 일어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14살의 영국 왕따 소년 앤드류 존스턴“원 보이스“라는 음악으로 신이 내려준 목소리를 들었다. 만학도 차종진 씨가 67세에 중학교 졸업하여 대장암 극복하고 50년 전 자퇴의 한을 풀었다. 2006년 64세 나이로 중학교에 입학해 화제를 모았던 차종진(67) 씨가 2월 13일 강원 인제군 원통중학교에서 동기생과 가족 등의 축하 속에 감격어린 졸업장을 받았다. 1958년 인제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생활고 때문에 자퇴하면서 학업을 중도 포기했으니 중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50년 넘게 걸린 셈이다.

‘낙심(落心)’이란 절벽에서 떨어져 기운을 다 잃은 상태이다. 여기 예배드리는 성도들도 낙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일의 뉴스에서 낙심한 사람들의 통계를 듣는다. 죽음의 통계 중 자살은 10위. 사회학자들은 결정적인 자살요인을 ‘낙심’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낙심은 수많은 사람의 삶의 마음에 남아 의욕을 잃게 한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정신과와 심리학과 동동연구팀은 건강의학 전문지인 ‘성격과 사회심리’란 잡지에서 낙심이 인간의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고했다. 낙심을 오래 방치하면 뇌에서 특수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우리 건강을 현격하게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서 알아내고 잡지에도 발표했다. 이런 연구가 아니라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낙심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불행가운데로 몰아넣는가를 익히 알고 있다. 왜? 우리 모두가 낙심해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낙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욥은 3:11절에서 “어찌하여 내가 태(胎)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라고 탄식했다. 신앙인 욥이 얼마나 낙심했던가? 다윗도 낙심하여 시편 42편 5절~6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 11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라고 고백했다.

자기가 낙심하는 것에 대해서 또 낙심하게 된다는 말로서 내가 낙심한다고 하지 않고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낙심가’를 노래 부른 것이다. 왕상 19장 4절에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너무나도 낙심하여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낙심 없는 자는 없다.

어느 날 훌쩍 낙심은 내 인생에 다가와서 불행으로 몰아넣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낙심을 다루는 문제로 낙심의 이유를 알아서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를 나누어 본다.

 

첫째, 비판과 조롱의 말 때문에 낙심한다. 내 주위의 공격적인 말 때문에 낙심한다. 말에는 능력과 힘이 있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야고보 사도는 3장 2~4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8절에서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다. 악한 말을 불에 비유했다.

꽁초가 온 산을 태우듯 말은 능력이 있다. 누군가의 말로 인해 낙심한 적이 있다. 청소년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부모나 친구들의 비판적이고 조롱하는 말, 형제끼리 싸우는 중에 잘못된 말로 놀리거나, 선생님의 한마디 말로 상처받고 낙심하여 우울한 마음에 빠진다.

느 4장 1~3절에서 “산발랏(Sanballat)그는 호론사람으로 페르시아 왕 다리오2세 통치7년에 사마리아의 총독이었고 아들들은 엘아이야와 셀레미야)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Tobiah)암몬사람으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유대의 귀인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유력한 스가냐의 딸과 결혼하여 유대사회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러한 공격적인 비웃음의 말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낙심했다. 어느 날 불현듯 낙심이 오지 않고 우리가 뱉은 말 때문에 낙심이 온다.

 

둘째, 피곤함 때문에 낙심한다.

포로생활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4장 8~9절에서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4장 10절에서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불을 응답받은 믿음의 사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대승한 후에도 죽여 달라고 크게 낙담한 이유를 왕상 19장 4~8절에서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욥기 30:4에서 원어 'rothem'이 대싸리로 번역됨. 콩과의 관목으로 뿌리는 연료로, 잎은 식용으로 사용. 꽃의 중심은 밤색이고 둘레는 흰색인데 이것들은 사해주변을 아름답게 함. 출애굽의 여정가운데 하나인 릿마(rithmah)는 이 나무의 이름이 됨(민 33:18~19)/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오늘 하나님의 반응은 과로 해결을 훈계나 설교대신에 찾아와서 '떡을 먹으라, 물을 마시라'고 하셨다. 엘리야는 수년간 전쟁 속에서 피곤했다. 승리를 얻은 후에는 평화가 와야 하는데 엘리야는 피곤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그 이유를 아신 하나님. 우리는 천사가 아닌 유한한 육신이다. 피곤에 지칠 때 우리를 낙심케 한다. 주의 사역에서도 낙심할 수 있을 때는 해결책은 조용한 곳에 가서 쉬어야 한다.

 

셋째, 실패가 낙심케 한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성공할 수는 없다. 일이 계속되어질 때 실패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실패했느냐? 실패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나 없나의 차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거의 다 실패했다. 그러나 위대한 성경인물들은 실패에서도 일어났다.

 

넷째, 두려움이 낙심케 한다.

11절에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가네스 바네스에서 실패한 이유는 두려움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낙심의 이유가 된다.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는 두려움이 그들을 낙심케 했다.

낙심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첫째, 기도해야 한다. 어느 날 사탄이 쓰던 도구들을 경매에 붙였다. 여러가지 도구가 진열되어 있는데 그것이 다 닳아있었다. 그것은 수 십 년간 사탄이 이것으로 사용했는데 성공했는데 이 도구의 이름은 바로 ‘낙심’이었다고 했다. 그렇다. 모든 낙심 위에는 사탄의 책략이 웅크리고 있다. 사람이 나에게 나쁜 말을 하는 것 같아도, 두려움과 어려운 환경과 실패 때문에 내가 무너지는 것도 현상일 뿐이고 어려운 환경을 조종하는 것은 사탄의 힘이다. 엡 6장 11절에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火箭)을 소멸하고”.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화살을 당기고 있다.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향해 화살을 당기고 있다. 악한 자의 화전을 맞으면 마음이 낙심케 된다. 우리는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키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는 낙심을 딛고 기도했다고 했다.

느 4절과 9절에서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祈禱)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약 5:·13~18에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祈禱)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祈禱)할찌니라/ 믿음의 기도(祈禱)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祈禱)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祈禱)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 다시 기도(祈禱)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낙심에 빠지면 기도(祈禱)의 응답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하면 응답이 온다.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이 열리고 닫힌다. 장로를 초청해서라도 또 중보 기도하라. 직장인이 직장을 그만 둘까하듯이, 목회도 그만둘까 설교준비나 성도의 상담이 싫어서 새벽에 기도해도 무응답일 때 “오늘의 설교는 네가 설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도구로 삼아서 대신 설교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 은혜로운 설교가 되었다. 그 주일에는 설교 테이프가 더 많이 팔려나갔단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는 어찌할 수가 없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일을 계속해야 한다.

사람의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일들이 힘들었다. 느헤미야의 헌신과 결단으로 자신의 집 대신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해도 하나님의 축복대신에 원수들의 위협만 커지기에 기도(祈禱)하기를, 6절에서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계속 전념하므로 성전 역사가 절반에 이르렀으나 또 고난(苦難)으로 8절에서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또 기도(祈禱)하기를 9절에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祈禱)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또 방해(妨害)로 10절~12절에서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계속했다. 할렐루야.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시작한 일을 계속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처음에 결단 하신 일을 계속 걸어갔다. 이것이 성공과 실패한 자의 차이다.

미국 독지가가 “낙심한 사람들을 위해 신문에 광고로 낸 글”에서 “초등학교를 중퇴한 사람이 있었는데 구멍가게를 개업했지만 곧 파산했고, 그 직후 다른 사업에 손을 댔지만 또 부도를 당하고, 그 빌린 돈을 갚는데 무려 15년이나 걸렸고, 그 후에 정치를 하려고 나섰지만 상원의원에 입후보해서 두 번이나 낙선했고, 하원의원 선거에 두 번 다 떨어졌다. 그 지역 신문은 그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로부터 용기를 얻고 있다”.

이 사람은 아브라함 링컨이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미국을 이끌었다.

낙심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야 한다. 낙심이 찾아와도 기도하기를 계속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

 

 미국의 제 16대(1861년~1865년/1864년 11월~1865년 4월 대통령 재선. 공화당)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현지시간 2009년 2월 11일. 남북전쟁으로 갈라진 나라를 통합시키고 노예 해방을 선언했던 링컨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다. 1865년 링컨이 암살로 최후를 맞았던 워싱턴 포드극장 재개장식에 참석한 오바마 대통령이 '게티즈버그연설패(레플리카: 그림 ·조각 등에서 원작자가 손수 만든 1점 또는 여러 점의 정확한 사본)'를 받았다.

1페니짜리 기념주화에는 링컨이 태어난 켄터키 주의 작은 통나무집이 새겨져 있다. 뉴욕에서는 링컨이 1864년 손수 작성한 재선 취임 연설문 원고가 경매에 부쳐졌다. 344만 달러에 낙찰돼 역사적 문서로서는 미국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

 

셋째,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

여러분의 어려움만 생각지 말고 남의 어려움도 도우며 봉사하라. 그러면 놀라운 기쁨이 찾아온다.

갈 6장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훌륭하게 이루어내야 한다.

느 4장 16~18절에서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21절~23절에서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찌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한마음으로 일어났기에 성벽을 완성하였다.

히 10장 24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울수록 그리하라”.

빌 2장 4절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낙심이 많은 세상이다. 스트레스는 짜증과 자살과 가정 실패 등 신앙포기 등 낙심 속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인생을 재건, 가정을 세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인생과 가정을 반드시 세우는 성도가 되자.

 

(찬송)

1.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내 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2.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내미시네

3.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개척하시네

(후렴) 일어나 걸으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축도)

지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도 주의 말씀 듣고 인생의 낙심가운데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받아 남은 생을 하나님이 맡기신 인생을 완수하기 위해서 굳세게 걸어가기로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3. 분노(엡 4:26~27, 약 1:19~20)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1970년대 초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방콕의 ‘얼반 호텔’에서 연주회를 하던 중 주된 건반 하나가 솟아나지를 않았다. 신경을 써서 1악장에서 연주를 하던 중 마루 바닥에 기름칠을 많이 해서 의자가 미끌어졌던 것이다. 2악장에서도 발로 미끄러지는 의자를 붙잡아도 피아노까지 함께 굴러가므로 화가 난 그는 도끼로 그 피아노를 깨뜨리자 경찰이 출동했다. 우리도 음악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했다. 누군가가 신생아를 차 밖으로 내던진 일이 있다. 화가 난 부모가 자기 아이를 아파트에서 던져버렸다. 부모의 재산분배에 화가 나서 설날에 동생에게 엽총을 쏘아 3명을 죽이고 뒷산에 가서 분신자살 했다. 분노를 내는 것은 잠간이나 그 결과는 엄청나다. 우리 모두는 분노의 비참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 때 내 아이를 그렇게 때리는 게 아닌데? 누군가가 터드린 분노로 신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쏟은 화 때문에 상처를 입히기고 하고 받기도 한다. 분노의 컨트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분노는 다 잘못이기보다는 정당한 감정이긴 하나, 전혀 분노가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 식물일 것이다.

첫째, 사회의 불의, 사기와 거짓에 분 내고 훔치는 일에 분노해야 한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회애에서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볼 때, 누군가 사기 치는 것을 볼 때, 누가 훔치는 것을 볼 때, 옳은 분노는 필요하다.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분이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채찍으로 쫓았다. 분노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불의와 불경건에 대한 분노였다. 자기의 유익이나 방해받아서 좇는 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대부분은 내 자신과 내 유익과 연관되어서 받는 해에 대한 화가 아니었다.

둘째,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쳤을 때 화를 낸다.

못을 치다가 손가락 위에 망치질을 했을 때, 아야! 한 후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자기에게 화를 낸다.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차량소통이 잘 안되고 1분 거리를 1시간이 넘도록 막힐 때, 모든 일을 내 마음 내생각대로 하고 싶은데 그렇지 않을 때, 주변 환경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난다.

셋째, 위기의식을 느낄 때 화를 낸다.

옛 말에 쥐도 궁지에 몰릴 때는 덤비고 화를 낸다. 코너로 몰 때 화를 낸다. 우리는 정당한 일에 분노 하는가 이다. 우리가 분노할 때 조정하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 나만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내 주위에도 엄청난 재해와 상처를 입힌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족과 지낸 인생을 보라. 화와 분노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가, 특히 부부간의 상처가 많다. 성경은 정당한 분노가 아닐 때 잘못된 분노에 대한 성경의 도전을 살펴보자.

 

1. 당신의 분노를 억제하라.

많은 사람들은 분노를 억제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억제해야만 한다. 우리의 변명을 그치고 분노를 거쳐야 한다. 분노를 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라고 한다.

잠 29:11에서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억제한다고 했다. 어리석은 자냐 지혜로운 자냐의 차이다. 분노는 억제할 수 있다고 한다. 분노는 내고 안내고 선택의 문제이다. 분을 왜 내는가? 내가 분노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면 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내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인생을 살며 자신을 살펴보면 분노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화가 정점까지 이르는 문제, 머리끝까지 화가 나도록 방치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단 1초 만에 화가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소 시간이 걸린다. 화가 끓어오르는 시간이 있다. 물이 슬슬 끓어오르듯이 분노가 올라간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창 4:6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형제간의 살인은 가인의 분노 때문이다. 화가 많이 나서 얼굴이 닳아 올라 있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경고하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네가 화를 선택했으나 다스려야 된다는 것이다.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분노로 말미암아 동생을 죽이겠다는 마음이 가슴 안에 끓어올랐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사랑의 마음으로 경고해 주셨지만(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 심판의 길을 선택했다.

심리학자들은 분노의 조정과 억제가 가능하다고 했다. 어린 형제간에 싸우다가도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당장 그친다. 친구와 다투다가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그친다. 부부싸움에 악을 쓰다가도 전화가 오면 갑자기 공손하게 “여보세요”하고 톤이 바뀌어 대화한다.

엡 4:26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낮에는 분내고 해가 지면 밤에는 분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관용적인 표현이다. 24시간은 분을 담지 말고 해결하라는 것인데, 가능하면 빨리 해결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네 분을 네가 조정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분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에 아멘 하자. 집안에서 혈기 내는 부모 밑에서 결혼한 내가 혈기를 부린다. 내가 깽판 치는 건 아니지만 내 목소리로 화를 낸다. 내 마음속의 불덩어리가 있는데 참고, 또 억제하고, 다시 또 억제하면, 불덩어리가 작아진다. 우리 집사람은 ”나의 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겠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면 내 인생의 남은 동안에 내 분을 억제하리라고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다짐해야 한다.

 

2. 분노의 대가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내는 모든 화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잠 29:22에서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 14:29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15:18에서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말씀의 그 포인트는 명확하다. 분을 낼 때마다 결국 패배의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분을 낼 때마다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와 사랑을 잃는다. 배우자와 자녀로부터 때로는 우리의 건강마저도 빼앗아 간다. 분노는 백해무익한 것이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시골교회에서 한 분의 장로는 화를 잘 내는 탓으로 “대포”란 별명이 있었다. 어느 날 집사가 길게 기도할 때 “전지전능하시고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여!” 하면서 5분이 지나자 기도하는 장로를 계속 쏘아보던 그 장로가 ‘그만!!!’ 했다. 기도하다가 싸운 건 처음이었다. 그분이 나중에는 협심증으로 돌아가셨다. 분노는 조절해서 사회의 악을 고치는 좋은 것이 아니면 쏟아내는 것만큼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 된다. 모든 분노를 내는 것은 내게는 독약을 먹이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모든 상처들, 부부간의 상처들은 대부분이 분노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분노의 저주를 우리 대에서 끊어야 한다. 사탄이 우리 육신을 터뜨린다. 우리 사회와 가정에 화를 없애고 높은 소리만 없어진다면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해질까. 우리의 자녀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날까, 분노에는 대가가 있다.

 

3. 하나님의 도움으로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라

잠 22:24~25에서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

“....그의 행위를 본받아”.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이다. 내가 화를 잘 내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 형제, 친구, 영화든 배운 것이다. 누군가 모델이 된 것이 있다. 폭력영화에는 함부로 목숨을 죽이고 있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분명히 누군가 당신의 모델이 되었는가? 대부분은 부모의 영향으로 배운다. 분노는 전염성이 강하다. 특히 어린 시절의 무분별한 분노는 자녀들의 마음을 일생동안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 분노하는 자와 사귀지 않을 수 있으나 어릴 시절에 마음에 남아있는 분노의 상처와 모델은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기쁜 소식은 다행히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가 있다. 어린 시절의 마음 상태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구원받음의 축복이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 화가 있다면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마음에 있는 화는 사라질 수 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된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골 3:15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께 의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마음의 가득 찰 수 있다. 화대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길 빈다. 심장이 못 쓰게 되면 심장을 수술해야 한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로서 예수님의 마음처럼 수술하신다.

고후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다윗의 기도는 “내 마음 속에 정한 마음을 주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이다. 마음을 바꾸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했다. 우리 마음의 분노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라. 새로운 마음을 달라고, 내안의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내 마음의 이식수술을 해달라고 해야 한다. 새 마음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의 뿌리를 능히 뽑아 새로운 치료를 이루신다. 분노의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능히 바꿀 수 있는 분이시다. 어린 시절에 사랑받기보다 상처받고 보호받기보다 함부로 취급당해서 외로움 속에 살아갔더라도 하나님은 그 고통을 아신다. 극복하고 싶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상처들을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품에 안는 하나님께 나아가 다윗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며 두 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두 손 들고 기도하자. 내 마음에 내가 원치 않는 상처들이 있다. 내가 싫어하던 그 모습, 내가 받았던 나의 상처들을, 나를 긍휼히 여겨 새 마음을 주세요. 내가 새 마음을 원하오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마음을 채워달라고 기도하라. 남은 평생 동안 분노 대신 새로운 마음을 가져 새 인생을 살고 하나님께 분노의 문제를 해결해서 가정과 이웃에 평화의 사도로 삼아달라고 기도하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로 상처 입힌 일이 있다면 내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자. 내 성격이 그렇다고 변명만으로 넘기지 말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자.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찬양)

내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주의 사랑 있는 곳 / 내주의 강가로/

내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주의 사랑 있는 곳 / 내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채우소서/ 피곤한 내영혼위에 아! /

내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주의 사랑 있는 곳/ 내주의 강가로/

(축도)

지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도 주의 위로의 말씀을 듣고 내 모든 과거의 삶을 정리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다시는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아서 우리 가정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강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로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4. 적개심(삼하 18:9~15)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찌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더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

인생의 걸림돌들이 골리앗처럼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나서 두려움과 낙심과 분노와 적개심을 이어 간다. 우리 마음에 남아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적개심은 ‘분노(憤怒)’가 밖으로 들어낸 것이라면, ‘적개심(敵愾心)’은 안으로 감추어진 사람에게 나타난다. 적개심은 밖으로 잘 들어나지 않기에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분노보다 적개심이 더 위험하다. 적개심을 심리학적 용어로 ‘피동공격성 장애‘라 일컫는데 상담가들은 주위에 이런 장애자가 많다고 주장한다. 주위에서 자주 본다. 회사 사장에게 늘 혼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불량품을 받아놓고서 ’회사에서 교환해 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다‘면서 해주지 않는 판매원들. 미루는 공무원들에게는 형언키 못하는 적개심이 많다. 이들은 잘 참아내면서 겉은 참지만 속은 그런다고 하나 봐라! 가정에서도 늘 화를 내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들어내는 자와 들어내지 않는 자. 그런데 화를 당하면서도 속으로 적개심을 키워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겉으로 화를 내지 않고 폭발시키지도 않으면 마음에 조용히 증오심을 키워간다. 사회에 불만이 큰 자는 피동공격성 성향이 자란다. 일에 불만이 쌓이는 자는 혹시 ‘피동공격적’ 이지 않은지? 지난날의 화성살인사건 2004년 7월의 유영철 연쇄살인 19명의 전모는 한사람의 마음 속 적개심 인사성 참을성 착한 사람처럼 보여도 적개심은 크다. 경기서남부에서 7명의 부녀자 살해한 2006,2007,2008,2009년의 연쇄살인과 보험금을 노린 아내와 장모를 방화 살인한 2005년 10월의 강호순(39)은 어린 시절부터 살인마가 되기까지는 어머니를 구타하는 아버지 보고 자라, 20대 초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지만 경제적 무능력으로 남의 집을 전전하며 오징어와 옥수수장사, 트럭운전, 식당, 마사지숍 운영, 개 사육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반역한 압살롬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미모가 탁월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로서 삼하 14:25에서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압살롬의 탁월함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서 부하에게 죽었다. 그의 마음에 남은 적개심 때문에 파멸 당했다. 적개심은 이렇게 위험하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 다윗에게는 수십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는 자녀 중의 하나인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강제로 범했다. 그러나 압살롬은 겉으로 화를 표출하지 않았고 다말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타일렀다. 그리고는 그 사건을 적개심으로 키우고 있었다. 양털을 깎는다고 모든 사람을 초대해서 암논을 죽이고 멀리 도망해 3년을 지나다가, 부하가 다윗을 설득해서 불렀지만 본국으로 돌아온 그를 다윗이 2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고 냉대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으로 미움과 증오로 차서 그 결과가 반역이었다. 정권을 탈취하고자 계획하고 옥상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아버지의 동첩들과 동침하고 낯에 침을 뱉었다. 잔인하고 무례한 짓을 했다. 이것은 압살롬의 적개심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반역해서 죽일 수 있는 마음의 적개심의 결과 때문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화를 마음 속에 숨겨둔 적개심은 때로 큰 사건으로 나타난다. 혹 우리 가운데서도 화를 폭발시키는 남편을 정죄하면서 내 마음에 적개심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다 아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 화를 내는 그 사람이 아니고 참는 사람이 적개심을 품고서, 사사건건 반대하고 냉소하고 때로는 폭발시키고 겉으로 들어 내지 않는 자에게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적개심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능력의 말씀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 마음 속의 분노와 미움과 증오와 적개심이 깨끗이 씻을 수 있게 되기를 축원드린다.

 

첫째, 적개심의 실태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라.

내 마음 안의 적개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시작이다. 내 마음 안의 적개심은 외관상으로 들어나지 않는다. 원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평생 마음속에 감춰둘 수 있다. 친구는 물론 심지어 가족에게 조차 감춰둘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을 살 동안 나무에서 물러나 저멀리 숲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바쁜 일정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마음 속의 고통에서 물러나 저 멀리 있는 숲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 산과 골방에 가서 인생을 한번 둘러보아야 한다. 혹 우리의 마음 속에 증오심은 없는지? 누군가를 향한 미움을 여전히 안고 상처주고 있지는 않은지? 아마도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이유가 참다운 헌신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숨겨놓은 원망과 미움은 아닌지? 우리 속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다면 아무리 헌신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드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잠간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우리의 인생 앞에 놓인 골리앗과 같은 장애물이 된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자라버린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실체를 솔직히 인정하라. 당대에 하나님께 의인(義人)이라고 칭찬 받은 욥은 “아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겠습니까 주님이여 마음이 아파 울부짖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숨통이라고 막혔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의인 욥의 기도란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속에 감추지 않고 다 말해 버렸다. 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이런 놀라운 욥의 말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하나님은 책망하셨는가? 놀랍게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욥을 이해하시고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셨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상처와 적개심과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하나님께 발설한다고 해서 우리를 책망하시기보다 찾아온 모든 하소연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첫 번째 단추는 상담학자들은 나에게 그 상처 있음을 인정하고 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상처를 감추어서는 치료가 안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증오와 미움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적개심을 ‘이렇게 회개합니다‘ 라는 고백. 내 안의 분노와 미움을 내 힘으로 없앨 수 없음을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자. 회개하자. 간절히 적개심을 인정하고 들어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해결해주신다.

 

둘째, 적개심의 대상자를 용서해야 된다.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 모든 적개심에는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용서하지 않은 한 우리의 마음에 평화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축복을 진정으로 받기 원한다면 먼저 내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적개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수 없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나 하나님의 은총이 그기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그릇을 비워야 한다. 욥은 고난 자체보다 그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말과 태도였다. 친구들은 위로하는 척 하면서 네가 고난당하는 것은 죄 지은 것을 회개하라. 너 말하는 걸 보니까 죄받게 생겼다. 남의 말로 생각지 말고 내 일이라고 생각하라. 가족이 다 죽고 병든 몸으로 고통받는 욥을 위해 울며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도? 마음의 상처를 얼마나 받았는지 모른다. 위로는 커녕 교묘한 말로 위로하는 친구가 원망스럽다. 욥기 42:10에서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신 것은 적개심으로 칼로 복수한 뒤가 아니라 욥이 용서한 후에 즉 “빌매”,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한즉 축복이 갑절이나 되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저들을 위해 기도할 때가 진정으로 용서한 때 그들의 성공을 위해 진정으로 빌어줄 때, 같이 한 장소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기도생활을 방해하지 않을 때,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함이다. 행여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자를 왜 용서해야 하나? 고 불공평하다고 원망 말아라.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공평과 불공평을 위하기보다 당신의 축복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시기를 눅 6:27에서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롬 12:17에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9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1절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누군가를 향해 적개심을 품고 있을 때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적개심으로 말미암아 가장 손해 보는 자는? 그 대상자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다. 한 상담자의 말은 비유하기를 “적개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가슴에 다이터마이트를 두르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했다. 남편이 아내를 한번 때릴 때마다 마음에 다이너마이트 하나씩을 박아두고 있다고 했다. “때려, 또 때려”하며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박아두면 내 인생이 비참해 진다. 마음속의 적개심을 회개하라.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고 하신 하나님께 맡겨 적개심을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라. 오히려 그를 축복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저와 우리 영혼을 축복하시리라 믿는다. 하늘 문이 열리고 놀라운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축복이 찾아온다. 내부모와 형제와 아내를 용서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셋째, 적개심을 넘어 올바른 것을 바라보라.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 어느 오후 시간에 어머니가 과자를 굽고 9 살된 아이에게 말하기를 저녁 먹기 전에 과자를 먹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보기만 한다고 하면 될까? 결국은 먹고 만다. 간단한 진리를 잊고 살때가 많다. 설교학에서 우리의 눈은 절대 조는 사람을 보지 말라고 가르친다. 조는 자를 보면 힘도 빠지고 톤이 올라가고 신경 쓰인다. 설교 잘 듣는 사람을 보아야 한다. 학교에서 60명중 1명이 졸면 백묵을 던지고 화를 낸다. 목회는 헌신하는 사람을 보고 목회하라고 가르친다. 다양한 사람 중에 내 목회를 반대하는 사람. 가로막는 사람. 불평하고 상처 주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기도하고 후원하는 사람을 보라. 불평하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살라. 상처주고 매일 문제만 만드는 사람만 계속 바라보면 문제아가 된다. 우리는 보는 대로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은혜 베푸는 사람을 은혜주고 축복하는 사람을 바라보라. 사랑으로 바라보는 사람. 축복으로 바라보는 사람. 과거의 상처를 떠나보내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라. 적개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섭섭함과 미의 싹을 거두지 말고 오늘 받은 능력의 말씀을 통해서 적개심을 멀리하고 축복받는 자가 되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큰 지진으로 피해 입는 일로 언젠가 지구를 떠나야 할 짧은 인생. 증오와 미움과 적개심을 떠나보내라. 증오를 묻어둔 사람은 누군가 때문에 섭섭함으로 또 다른 사람의 적개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이다. 마음속에 깊이 증오를 묻어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한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심을 믿고 기도로 나아가자.

 

(찬송280, 구338)

1.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2.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죄인은/ 보혈로 구해주시니 그 사랑 한없네/

3. 나 예수 의지하므로 큰 권능 받아서/ 주님ㄴ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후렴)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축도)

지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 마음 안에 남아있는 증오와 미움과 섭섭함과 적개심을 성령의 능력으로 다 떠나보내고 하나님의 복을 남은 인생동안 가득 가득 받으며 살기로 작정한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5. 의심(요 20:24~31)  891-7035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Thomas(called Didymus)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철학자 페렌 키에로 케하르트는 인생이 살아가는데 두 가지 잘못된 태도로 바보가 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인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맹신(盲信)과 의심(疑心)의 둘 다는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의무 즉 긍정적인 의무를 성경은 환영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후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는 의문을 품을 것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는가? 긍정적인 마음으로 의심해야 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긍정적인 의문을 갖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의문을 갖는 건 좋은 일이나, 문제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실을 무조건 의심하는 태도이다. 오늘은 이 부정적인 태도로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의심하는 태도에 대해서 부활절 아침에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부정적인 의심의 태도는 우리의 믿음과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옛날 고사에 “배중사영(杯中蛇影)“이란 말이 있다. ‘잔속에 있는 뱀의 그림자’란 뜻이다. 진나라 하남에 있는 악광의 태수가 친구를 초대하여 차 대접을 하는데, 그 잔 속에 뱀의 그림자가 있는 것이, 너무 마음에 꺼림칙했다. 웬일인가? 찻잔 속에 뱀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가? 억지로 그 차를 마시고 몸져누웠다. 돌아간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악광이란 태수가 그 사실을 알고 태수 집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아픈 친구를 억지로 정자에 데려다가 다시 차를 대접했다. 찻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가 정자위에 새겨져있는 예쁜 뱀의 그림자임을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의심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를 알겠다. 의심은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이 ”배중사영“이다. 그렇다. 의심이 우리의 인생을 파괴한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아내를 죽인 혐의로 서울시 동빙고에 사는 마흔한 살의 황모씨를 체포했는데 아내를 죽인 이유가 의심인데,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의심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다. 사실이 아닌데도 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아내를 때려 숨지게 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의심 때문에 고통 받고 있나?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가 의심 때문에 파괴되고 있는가? 우리가 사람을 의심하면 미움이 되고, 미래를 의심하면 걱정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면 우리를 불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생을 황폐하게 만드는 의심에는 이렇듯 위력이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부활하신 이후의 사건으로 앞 본문에 부활 후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25절에서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얼마 후 나타나 그 손의 못자국을 넣고 옆구리에 넣어보고 만지고 나서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도마, 의심은 이런 위력이 있다. 우리 마음에 의심은 왜 생기는가? 몇 가지를 의심의 이유로 두 가지를 생각해본다.


1. 부정적인 사람들 때문이다.


의심의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우리의 마음에 의심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이 생긴 것이다. 믿음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왜 의심이 생길까? 내 마음에 회의적인 의심이 생기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큰 비극인 타락은 아담과 하와의 사건은 왜 하와의 마음에 의심이 생겼는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뱀이란 사탄의 영향으로 의심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뱀이 찾아와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와에게 넣기 전에는 과연 에덴동산이었다. 동산 실과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나 어느 날 뱀이 찾아와서 묻기를 창 3:1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할 때 창 3:2~3에서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한 것을 살짝 부정적으로 표현해버렸다. 이 말에 하와의 마음이 걸렸다. 의심이 생긴 것이다. 창 3:2~3에서의 그 대답에서 알 수 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먹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여서 만지지도 말라 던가, “죽을까 하노라” 했는데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하셨다. 뱀의 탈을 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인간에게 다가올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왔을 것이나, 의심이 생기는 순간 모든 하나님이 마음대로 먹게 한 실과는 달아나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으로만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인데 의심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의심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누군가 사탄의 생각을 집어 던진 것이다. 부정적인 말을 마음속에 심어준 것이다. 오늘도 이 타락의 사건은 반복되고 있다. 아주 좋은 관계의 믿고 사랑한 사람에게 누군가 다가와서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밀어 넣는 순간, 지금까지 믿어오던 그 사람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해 그 의심이 자라서, 좋은 관계를 파괴하고 에덴의 그 뱀은 오늘도 동일한 방법으로 유혹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지금도 부정적인 사람들을 누군가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가고 있다. 옛날 누구와 좋았던 관계가 별다른 이유 없이 끊어진 일이 있다면 조용히 하나님 앞에 돌아보라. 아마 과거에 그 사람에 대한 의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관계가 저절로 끊어지거나 파괴된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와서 부정적인 말을 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 마음에 의심을 생기게 하나? 부정적인 사람들 때문이다.


2. 부정적인 환경 때문이다.


부정적인 환경이 의심을 생기게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쓰나미 사태를 본 반응에서 의심을 가진 자들, 갑자기 고난이 닥칠 때 의심이 생긴다. 글렌 쌤버스라는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 훈련을 수료하고 콜럼비아로 떠나는데 비행기가 산꼭대기에 부딪쳐 죽고 말았다. 그의 부모도 믿음이 있었으나 발도 닿기 전에 죽은 일에 대해서 그 당시의 의심을 책에 기록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그들의 믿음의 사람. 교회의 기둥 같은 집사로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잃고 의심이 스며드는 것을 경험하고 담대하게 교회 앞에 나와서 “내 마음의 의심,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증했다. 누구라도 이 같은 환경에서 의심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연약한 자들로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 우리 마음속에 의심은 다가온다. 우리는 때때로 고난 앞에서, 부정적인 말들 앞에서,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의심을 치유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 먼저 부정적인 의심의 마음을 치유하려면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하와의 사탄 유혹은 그가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함께 있었더라면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은 아담이었으니까, 아담이라면 대항했을 것이다. 도마가 부활을 의심한 건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4절에서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만약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마 11:2~3절에서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단강에서 예수께 세례를 베풀고 성령의 비둘기 역사를 목격했고 공생애 시작 때 깨우침으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고백.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있었고 고난받으며 홀로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확신하고 선포한 예수에 대한 의심이 일어났다. 왜 신앙에서 멀어지나? 회의를 느끼나, 홀로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면 당연한 결과를 얻는다. 당신 주위에는 누가 있는가? 기도의 사람이나 영적인 사람이나 말씀을 사모하고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의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성령에 사로잡혀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주위에서 만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나 말씀을 보지 않고 습관적으로 교회출입 하는 사람이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주위에 퍼뜨리는 사람이 주위에 많으면 안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함께 있으라. 둘째는, 겸손히 나의 한계를 인정하자. 25~26절에서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홀로 있으면 자신의 경험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신뢰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이론을 뒷받침하는 수학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얻어진 생각이다. 편견에서 얻어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루이스 토마스는 ”확실히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면 과학은 자연에 대해 몹시 무지하다는 것이다. 20세기 과학이 인간의 지성사에 있어서 가장 뚜렷이 기여한 바가 있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경험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제한적이다. 예로 부산 앞바다에서 배가 출항하는 것을 보면 그 배가 점점 작아지다가 멀리 가서는 안 보인다. 왜 그럴까? 지구는 둥그니까, 돌아올 때는 또 보인다. 우리 눈에 배가 보이지 않아도 배는 있다. 마침 내게 찾아온 친구는 말도 안돼! 우리의 경험은 얼마나 주관적이고 제한적인가? 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 판단과 교육과 지식에 의해서 의심하고 불신하여 내손으로 만져보고 눌러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의 의심의 죄를 우리도 지었다. 종종 우리도 믿음을 의심하고 우리 의심을 믿으나 그건 모순이다. 오히려 우리의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 지혜의 솔로몬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험 이상의 지혜로 가르친다. 믿음은 지식보다 선행한다. 아이는 부모가 주는 대로 먹는다. 콜레스테롤과 칼로리를 몰라도 먹는 것은 부모를 믿기 때문이다. 삶이란 지식 다음에 믿음이 아니라, 믿은 다음에 아는 것이다. 믿음이 먼저이다. 마음 속의 의심을 치료하려면 겸손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 내 작은 그릇으로 우주를 담으려 하지 말고 내 작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담으려 하지 말라. 우리 한계를 인정하면 그 순간 의심의 마음이 사라진다. 좋은 의문을 품고 우리 마음을 황폐케 하는 부정적인 의심을 치유하라.


3.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개발하라.


근육만 개발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믿음도 개발된다. 막 9:23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는, 벙어리 귀신들인 아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아이 아비가 예수님을 믿고서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말씀을 기쁘게 들으시고 그 아들을 즉시 고쳐주셨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십시오. 나의 마음에 의심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감추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고백하면,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아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29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고 하셨다. 복되도다 하신 그 말씀에 예배드리려 나오신 여러분들이 포함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30~31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죽은 이후에 생명 뿐 아니라 이 땅위의 살아있는 지금 생명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찬 삶을 살기 원한다면 늘 의심하고 회의적이고 부정적으로 살아, 기운을 다 빼고 나와 남을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일 뿐 아니라 오늘 도마와 같이 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부활의 확신을 외치며 살아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이 어두운 세상을 주 앞으로 이끌어내는 복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믿을만한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그날 회개한 이후 인디아로 떠나 도마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 더 중요하다. 주님, 내 믿음 없음을 도와주세요. 사랑하는 주님을 제가 믿습니다. 오늘 내 곁에 게신 주님을 믿기 원한다. 저를 도와주세요. 기도합시다. 그 옛날 은혜 주셔서 감격적으로 영접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게 해주시고, 도와주셔서 내 마음에 생긴 의심이 왜 생겼는지 과정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의심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받아들이는 자가 되도록 도와주시고,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내어놓고 내 믿음이 적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선물로 받는 우리 교우들 되게 도와주소서. 의심을 치료받는 십자가의 주님, 부활하신 주님을 힘차게 믿는 자가 되어 마음속에 살아계신 주님이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찬송162/총151)

1.다시 사신 구세주 나항상 섬기네/ 온 세상 주저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은혜로운 성질 부드러운 음성/ 내평생 주님함께 늘 계시네/

2.온세상 살펴보니 그 사랑 알겠네/ 내맘이 아플 때도 그사랑 알겠네/

이세상 풍파 이길 힘주실 ...이 / 마침내 영광중에 예수 오시네/

3.주믿는 성도들아 다 /주예수 영원토록 찬양하세/

(후렴)예수 예수 늘 살아계셔서/ 주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맘에 살아계시네 늘 살아계시네/

(축도)

이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도 도마와 같이 늘 의심에 빠져 내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몰아가는 자가 아니오,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우리 마음의 의심을 치유하므로 이 죽어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구원해 내기로 쓰임 받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우리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6. 스트레스(고후 4:7~11)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clay, pot)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쌓이는 단어라면 ‘스트레스’일 것이다. 다 잘 아는 스트레스란 한 일리 박사의 정의로는 주변에 있는 ‘삶의 부담에 따른 신체적 반응‘을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은 ’스트레스 공화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삼성경제연구소‘에 박희정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구조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이다. 특히 대한민국은 구조 자체가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분단 상황을 일으키는 ‘전쟁스트레스’, 인구가 많은 도시생활에서 생기는 ‘대인관계 스트레스’, 교통문제가 일으키는 ‘약속시간 도착스트레스‘, 허술한 교육제도가 야기하는 ’사교육비 스트레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회식 스트레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지도층이 야기하는 ’지도층 스트레스‘, 이건 지도층 스트레스는 우리나라만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를 시작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될 ’설교 스트레스‘, 이러한 스트레스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얼마 전에 KBS1에서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라는 6부작의 첨단보고서를 방영했다. 그들은 서두에서 질문하며 보고하기를 “심각한 스트레스가 당신의 심장을 멈출 수 있고, 당신의 뇌를 작게 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스트레스가 우리의 심장을 멎게 할 수 있고 뇌를 작게 해서 하이츠머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보고서에 의하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현대과학은 인간질병의 모든 부분을 스트레스와 관련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요인자로 스트레스를 지목하는 질병만 해도 약 290가지나 이미 넘어섰다. 그중에서도 뇌와 심장 그리고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가 스트레스로부터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이 과학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몸뿐 아니라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특히 집중력이나 기억력의 감소, 우유부단한 마음, 공허한 마음, 유머감각이 다 사라져버리고 삶에 웃음이 없어지는 불행한 삶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스트레스로부터 말미암을 수 있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불안과 신경과민과 우울증과 분노와 좌절감, 근심 걱정, 불안, 성급함 모두가 스트레스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스트레스가 우리들의 삶을 망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스트레스에 둘러싸여 있다. 이상하게도 삶은 살아갈수록 문명이 더 발달하고 있는데 현대인들은 더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은 병들고 마음이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을까? 몇 구절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보고자 한다.


1.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가?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있다.


질그릇(clay, pot)의 특징은 무엇일까? 질그릇은 진흙으로 빚어서 구워 만든 그릇으로 질그릇은 쉽게 금이 가고 깨진다. 레위기의 규례에서는 부정한 것이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릇을 깨뜨려야 한다. 문둥병자의 환처가 나았을 때 정결케 되는 규례로는 가져온 제물을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아야 했다(레 11:33, 14:5, 50, 15:12). 이사야 선지자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그의 손에서 빚어지는 질그릇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과 같이 비천하고 연약한 인간이 가졌다고 했다(고후 4:7).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각 사람이 자신을 깨끗이 준비하면 주인의 선한 일에 합당하게 쓰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질그릇은 쉽게 깨어지는 연약한 것이나 하찮은 것의 상징이었다(사 22:15, 계2:27).


어떤 질그릇은 반질반질하고 또 거칠다. 옆 사람의 얼굴을 보자. 사람마다 반질반질해도 깨지고, 거칠어도 깨진다. 질그릇은 조금만 힘을 가해도 약해서 깨진다. 질그릇의 약함을 일상에서 자주 체험한다. 이부자리를 개고, 요강을 비우는 일이 싫었다. 요강을 씻는 척 하다가 요강을 깨니까 산산조각이 났다. 그 다음 날은 놋으로 된 요강을 사 오셨다. 질그릇을 통해서 바울은 무엇을 이야기 할까? 바울은 우리 삶에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파악하고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쇠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로 창조함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질그릇처럼 죄에 오염된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수많은 스트레스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질그릇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사람이 특이한 사람들의 나이 측정법을 개발했다. 무엇을 보고 그 사람의 대충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하루에 거울을 보는 횟수를 보면 그 나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나이에는 사람들이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다. 볼까? 수 십 번이나 본다. 젊은 여인들은 금방 거울보고 또 보고 화장실 앞에 가서 또 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가방 안에 거울을 넣고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본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거울은 안 본다. 화장실에 가서 대문짝만한 거울을 앞에 놔두고도 안 본다. 볼 필요도 안 느낀다. 거울을 안 보시는 분이라면 내가 한물갔구나! 생각하면 틀림없다. 늙음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많다. 몸이 병들고 머리가 나쁘고 피부가 쭈글쭈글해 지고, 돋보기를 끼고 이빨이 흔들리는 일에 대해서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연히 늙을 수밖에 없다. 질그릇이니까!! 그러한 것들로부터 절대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진 자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적고 있다.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모습이다. 우리의 삶의 승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안에 있는 보배(Treasure)에 있다. 질그릇에 있지 않다. 

 

왕의 보물은 금, 은, 보석, 향료, 방패, 그릇, 곡식이나 포도주, 기름, 가축도 포함되었다(단 11:38, 삼상 6:8, 수 6:19,24,대하 32:27~29). 성전의 보물은 금은대야, 은과 금 대접, 그릇, 제사장의 옷 등(스 1:9~11)이며, 동방박사가 가져온 보배합의 보물들, 팔레스타인 지방은 물이 귀해서 이슬을 ‘하늘의 보물’로 보았다(신 33:13).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21, 눅 12:33, 딤전 6:18~19)고 하셨다.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계신 하나님, 내안에 계신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에게 내 삶의 승리가 있다고 선포하신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정말 잘 믿으면 우리의 삶에 전혀 고난이나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에 고난이 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매우 비성경적 것이다. 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이게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도 우리 삶 가운데 우겨쌈과 답답함과 낙심과 핍박과 복장 터지는 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누군가 내 다리를 호미걸이로 넘어뜨리는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 인가? 우리가 질그릇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으로 단판승부를 가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만이 우리가 이 땅만을 바라보고 산다면 모든 사람가운데 믿는 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19절에서 선포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우리는 이 땅을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승부를 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질그릇일 뿐이다. 다만 우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질그릇에 속하지 않고 이 질그릇이 담고 있는 우리 안에 있는 보배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에 있는 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가? 그 고난으로 인해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마시기를 바란다. 삶은 그런 것이구나 하고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 질병 중에 있는가? 내가 왜 병이 들었을까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자. 삶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질그릇이니까요. 우리의 질그릇은 언젠가 금이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 당신의 몸이 아픈 것으로 인해서 당신의 몸과 영혼에 스트레스를 주지말자. 우리는 질그릇일 뿐이다. 저와 여러분의 승부는 질그릇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생에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더 생명을 바라보며 살자. 질그릇을 바라보며 살지 말고 보배를 바라보며 살자.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수많은 삶을 파괴하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줄 믿는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자. 나는 질그릇이다“라고 외치자.


2. 생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목적 있는 삶’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스트레스로부터 해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목적이 없는 삶의 특징을 말하면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삶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한쪽은 기쁘게 하는 그 순간 다른 한쪽은 열을 받기 때문이다. 당신이 한쪽에 영웅이 되는 순간, 다른 한쪽에는 악당이 되기 쉽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다 기쁘게 한다면 여러분은 목적이 없는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나님도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할 수는 없으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기도하는데 우산장수는 기도하기를 “주여,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이스크림 장수는 “주여, 해가 쨍쨍하게 비춰주옵소서” 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쪽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나? 둘 다 기쁘게 할 노릇이 없다. 여러분,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바보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바보스러운 삶의 스타일로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지요, 목회자가 깨닫는 사실 중에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에게 실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몰라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무언가 잘못된 삶을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날 깨달았다. 오늘 복장이 곤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맸는데 어떤 사람은 미소 짓지만 어떤 사람은 그게 뭐꼬? 양복을 자주 갈아입으면 몹시 깨끗하다고 하면서 옷을 잘 입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어떤 사람은 목사가 제비가?“ 우리는 모든 사람을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다. 목적이 있는 삶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헌신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헌신해야 할 줄로 믿는다. 

 

요 5:30에 “.....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원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내가 애쓰야지 내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면 안된다. 예수님조차도 자신 주위의 모두를 기쁘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었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우리는 누구의 인정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혹 이 가운데 지키지 못할 부모의 만족을 위해 애쓰는 분도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사람은 부모가 떠나간 후에도 여전히 그 부모의 한없는 소원 때문에 괴로운 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도저히 만족할 줄 모르는 부모, 석차가 10등이면 5등을, 5등이면 1등을 원하는 부모의 소원들, 전교 1등, 한국 1등을 원하는 부모들, 도저히 만족시키지 못할 그런 부모를 둔 괴로움 때문에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마음의 짐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를 기쁘게 할 수 없다. 이제 그것들을 거두어들이기 바란다. 이제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라. 당신은 질그릇이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질그릇 안에 하나님의 보배를 가진 자들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긴 그 일, 일찍이 사도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고 간증하기를 행 20:22~24에서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목적 있는 삶’을 살았다.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보다는 삶의 목적에 집중한다. 또한 ‘목적 있는 삶’은 삶의 자연적인 우선순위를 가지게 되는 법이다. 왜냐 하면 삶의 목적이 없는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항상 바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늘 쫓겨 사는 삶이다. 골든 맥드날드는 우리 인생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쫓겨 다니는 인생, 다음 하나는, 소명 받은 인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인생이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언제나 책상 위에 두 가지 파일을 놓았다. 붉은 글씨로 하나는 긴급한 일, 하나는 중요한 일에서 어떤 일을 먼저 했을까? 어떤 것을 열어보았을까? 그는 항상 먼저 중요한 일을 먼저 열어보았다고 한다. 긴급한 일은 별로 열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요 8:1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인생인지를 아는가? 바울의 정의로는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질그릇을 빛내려고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다 없어질 그 무엇을 위하거나 좀 더 예쁘고, 좀 더 오래 살고, 좀 더 높은 지위나 좀 더 많은 돈을 위해서 부름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인 줄 믿는다. 우리가 이 보배를 바라보는 순간 세상의 쓸데없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수많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 받으려면 

 

3. 능력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능력이 어디에 있을까? 바울이 말하는 8~9절에서 “이는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싶은데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말씀인고로, 우리의 능력이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어려운 번역이므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내게 하려함이라“(쉬운 번역).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함이라”.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내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병도 들지 않고 자녀도 잘되고 모든 것이 잘되고 그래서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바울은 우리가 질그릇이니까 병들고 우겨쌈을 당해도 핍박과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을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간증이 될 줄 믿는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을 잘 체험하고 기록한 사람에 대해서 읽어보자. 시 46:3에서 자연의 격변에서도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5절에서 사회불안에서는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10절에서 전쟁의 불안에서는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로 만든 찬양이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는, 여러분이 기억하는 찬양이다. 스트레스가 우리에게 가하는 느낌 있는 손해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반드시 그 안에서 인생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야 한다. 모든 병의 원인도 ‘서두름’에 있다. 스트레스가 가하는 손해를 피하기 위해 여러분은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즐거운 식탁을 갖기 위해 둘러앉아서 기쁜 시간을 가진 마지막 때는 언제인가? 연을 날리거나 숲속을 거닐거나 자기 손으로 무엇을 만들거나 석양의 시간에 파도를 따라 거닐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 하루 종일 시계도 보지 않고 글을 읽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어깨에 어린 자녀를 목말 태우거나 삶을 누리므로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던 때가 언제이던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런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오늘 하나님 말씀은 ”네가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있는 보배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의 수많은 풍파를 잠잠하게 만들며 건너갈 수 있는 자임을 믿는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젊은 날에 주당 14불을 받는 트럭 운전사였다. 어느 날 18세 때 한 음반을 출시해서 승승장구하고 그가 죽기 전 바로 한 달 전에 이런 고백을 했다. ”내가 일주일만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100만불을 쓸 것이다“. 그 당시 100만불은 10억원이다. 그렇게 인기가 많고 유명했던 그가 세상의 부를 모두 다 가졌던 그는 그 마음속에 평안함이 없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살아가는가? 한 무명의 수도사의 시를 읽어드리고자 한다. 그는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음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할 것이다. 나는 긴장을 풀 것이며, 몸을 유연하게 할 것이며, 지금까지 내 삶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 멍청해 질것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은 매우 적을 것임을 나는 안다. 나는 더 많은 여행을 하고, 더 무언가에 몰입하고, 더 많은 산을 타며, 더 많은 강을 헤엄치며, 더 많은 석양을 바라볼 것이다. 나는 더 많은 산책을 하며, 더 많이 바라볼 것이다. 나는 더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이며, 현미밥은 덜 먹을 것이다. 나는 더 많은 실제문제들을 가질 것이지만, 향상의 문제들은 덜 가질 것이고, 나는 매일 매순간을 분별있고 사리에 맞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행복했던 때가 있었으며, 다시 산다면 더 많은 런 순간들을 가질 것이다. 사실 나는 다가올 많은 해들을 사는 대신에, 매일 그저 순간만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온도계와 뜨거운 물을 담은 병과 안경과 비옷과 아스피린과 낙하산을 가지지 않고는 어느 곳도 가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다시 산다면, 나는 더 가벼운 짐으로 여행하며, 무언가를 하며 어떤 장소에 갈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는 그 이른 봄에 맨발로 시작하여 늦가을까지 그런 상태로 지낼 것이다. 우연이 아니라면, 겉으로 좋은 성적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회전목마를 더 많이 탈 것이며, 더 많은 들국화를 꺾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학위를 많이 받은 한 수도사의 인생의 마지막 고백이다.


참 그렇다. 우리 잠시 하나님 앞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우리는 질그릇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바라보고 미소 짓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삶들을 즐기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기도)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하고 여러분의 영혼과 몸을 병들게 하는 인생의 부담이 무엇인가요? 한번 하나님 앞에 조용히 오늘의 말씀을 묵상해보자.

주님, 우리들의 삶의 속도를 늦추어 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고요케 하심으로 심장의 박동을 진정시켜주십시오. 영혼의 비전으로 우리의 허둥대는 페이스를 안정되게 하십시오. 혼돈의 날 가운데서도 영원한 언덕의 고요함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부드러운 음악의 물줄기로 내 신경과 근육의 긴장을 깨뜨려 주십시오, 잠시 휴식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꽃을 보기 위해, 친구와 잡담하기 위해,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미소 짓기 위해, 좋은 책의 글 몇 줄을 읽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기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 우리들의 삶의 속도를 늦추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영속적인 가치에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도록 저희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저 위대한 목표점을 향해 우리가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경쟁은 언제나 빠른 자의 것이 아니며 인생이란 그 속도를 증거 하는 것 이상임을 매일 매일 환기시켜 주십시오. 솟아오르는 참나무를 바라보며 그것이 천천히 그리고 잘 자랐기 때문에 크게 되었음을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아버지 내 몸 안에 긴장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 영혼에 쉼이 없음을 자복합니다. 돌아보니 수많은 세상의 스트레스가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아버지 말씀 앞에 나를 올려드리오니 하나님의 권능으로 내 영혼과 마음에 있는 스트레스를 깨끗이 해결해 주십시오. 남은 생애는 주안에서 잠잠히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인생의 작은 선물로 만족하는 삶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찬양369/ 통487)

1.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시험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근심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축도)

이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도 주의 말씀을 받아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쓸데없는 스트레스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다시는 빼앗기지 아니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기로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7. 외로움(딤후 4:9~18)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Demas)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Crescens)는 갈라디아로, 디도(Titus)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Luke)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Mark)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Tychicus)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Carpus)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Alexander)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이 말씀은 외로운 자들을 위한 말씀이다. 혹시 인생길을 가면서 나 혼자 남겨져 있는 듯한 고독감을 느끼는가? 혹시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너무 젊고 너무 행복하여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훗날을 위해서 이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자.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언젠가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보니 위대한 불굴의 사도바울조차도 한때 그의 인생에서 외로움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다 정복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그도 동역자에게 손을 내밀어 구원을 요청했다. 옥중서신으로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이 땅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서이다. 가장 마지막 4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이제 감옥에 가서 곧 사형당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6절에 “관제(drink offering)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전제=관제는 제사장이 제물을 제단 위에 놓고 불사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제사이다(출 30:9, 레 23:23). 짐승의 크기에 따라서 포도주를 붓는 양이 달랐다. 포도주는 그냥 마개를 열어두어도 날아가는 휘발성인데 그 포도주를 제단 위에 부으면 얼마나 빨리 증발하겠는가,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쏟아 부어짐이 되었다는 것이다(딤후 4:6, 빌 2:17). 그는 떠날 시간이 다 되었고 사형당할 방법까지도 다 알았던 것 같다. 그 당시 흉악한 죄인들에게는 흉악한 십자가형이었고, 또는 목매어 교수형을 시키거나, 어떤 사람에게는 목을 쳤다.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흉악한 죄인이라도 순간적으로 목을 베어서 단두하는 형을 집행했다. 바울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 황제의 친위대들이 예수를 믿었기에 그 가운데 유력한 사람들이 있어서 사도바울의 사형날짜를 미리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제 자기의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편지하기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 이겼다.

그는 7~8절에서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았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로마 감옥에 있다가 목이 달아날 형편이 다 되었기에 홀로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9절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사도바울은 평생에 어느 누구를 향해서 이토록 그리움의 날을 기다려 본적이 없었다. 죽음 앞에서 진한 외로움으로 사는 2천년 전의 한 노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믿음도 있었고 소망도 있었던 그도 외로움 앞에서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디모데야, 어서 속히 내게로 좀 와다오“, 이것이 외로운 인생이다. 삶의 고난 앞에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고난이 우리의 삶에 외로움을 가져다준다.

 

두번째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별이다.

자신을 떠난 사람들을 열거한다. 데마는 나를 버렸고, 그레스게디도는 갔고, 누가는 함께 있는데, 마가는 데리고 오라, 두고는 보냈다. 알렉산더가 해악을 많이 끼쳤으니 너도 주의하라고 했다. 계속해서 모두 떠나고 바울만 홀로 감옥에 남았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전도여행 다닐 때 언제나 사람들을 데리고 다녔으나, 세상을 떠나게 된 이제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했다는 것이다. 이별은 그에게 외로움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에는 실버타운이 많은데 타임지의 통계에는, 노인들의 70%가 일 년에 단한번의 방문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사회의 잔혹함이다. 모두들 독립적인 삶을 살기에 바빠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갈 때는 예약을 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자 일 것이다. 이별이 우리의 삶에 외로움을 가져다준다.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우리의 가곡은 많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죽음의 이별을 노래한다./ 한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마지막에서 이 시인은 노래한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가을 밤에 등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날 때 평생을 같이 지나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날 때 우리에게 외로움은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반대와 거부이다.

14절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누가 반대하고 거부하면 마음이 외로워진다. 성경은 이혼과 간음을 행치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가장 강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상대와 헤어지는 이혼은 상대가 신의를 지키지 않은 이혼으로 헤어지게 될 때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고난과 이별과 반대와 거부가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어떻게 이런 외로움을 극복하는가? 일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에 중독되어 사는 것이다. 일중독은 우리에게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물질과 돈에 집중한다. 돈을 많이 버는 일이다. 백화점에서 카드로 돈을 많이 쓰며 비싼 쇼핑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는데 물질과 돈이 외로움을 걷어내지 못한다. 마음속의 외로움을 이기려고 술과 성과 쾌락에 몰두하나 이런 방법들은 우리의 인생을 더 깊은 파멸로 이끈다.

 

외로움에 대한 대처방법은

1. 최선을 다해 나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마음속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처한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 외로움에 빠지면 자기 비하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바울은 외로움을 감추지 않는다. 9절에서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21절에서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했다. 그는 탄식하며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두 번씩이나 외로움에서 “어서 오라”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13절에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이 땅을 곧 떠날 사람이라도, 고난과 박해와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비탄에 빠져 더 어려운 문제를 만들지 않고 ‘겉옷’을 가져오라고 했다. 감옥은 습기가 많고 추운 곳이어서 늦가을이 되면 겉옷은 꼭 필요한 것이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우리 평범한 인간의 행복이기도 할 테니까. 믿음이 너무 좋아서 마음의 외로움을 골방에서 금식하며 기도만 하는 것도 좋겠지만 몸이 필요로 하는 요구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닥치면 더 외로워진다. 겉옷과 부피가 큰 성경책은 사도바울을 위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치고 외로우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기 바란다. 원망이나 depression에 빠지지 어려운 일에서 최선의 방법을 행하시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마음에 고난과 반대와 이별이 있고 모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찾아서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홀로 남겨져 있다면 오늘 일어나서 그리스도인 친구를 만드세요.

쌍둥이 아이를 낳았는데 한 쌍둥이 아이가 아픈데 의사진단으로는 가망이 없었다. 쌍둥이 둘을 떼어놨다가 혹시나 해서 그 건강한 쌍둥이 아이를 아픈 아이 옆에 눞혀 놨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다. 건강한 쌍둥이 아이가 손을 내밀어 다 죽어가는 쌍둥이 아이를 붙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쌍둥이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더라는 것이다. 너무 놀란 의사가 그림에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외롭다고 혼자 탄식하지 말고, 혹 이별하여 외롭다고 문을 닫아 잠그지 말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친구를 만드셔야 한다. 몸이 병들었다면 무엇을 시작하여야 한다. 무엇을 가져오라! 당신이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하시기 바란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역사하실 줄 믿으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려할 때도 어려운 요단강 가운데로 먼저 법궤를 앞세워 제사장이 먼저 물이 넘치는 강을 건너자 백성들이 마른 땅을 건넜다. 장정 5천명이 굶주려 있을 때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을 주어라‘. 축사하시고 먹이신 분이 계신다. 문을 걸어 잠그지 마시고 홀로 염려하고 괴로워 마시고 일어나서 당신이 행할 수 있는 일을 행하라. 그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축복하실 것이다.

 

2. 당신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자들을 용서하라.

누군가 당신을 반대하고 거부할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가 반대와 거부와 미움과 적대감을 키워갈 때 점점 더 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에서 온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도 점점 더 멀어져서 외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멀어지게 되고 알코올과 쾌락과 일에 중독되고 우리의 삶을 수렁으로 몰아넣게 된다.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체포된 사도바울은 재판받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바울은 죽느냐 사느냐의 길에서 붙잡혀 있었다. “다 나를 버렸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용서하기로 작정했다. 사람의 약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버렸다면, 부모와 아내와 친구들인가? 그들을 마음으로 용서하고 떠나보내야 한다. 예수님도 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등 돌림을 당했다. 예수님이 사랑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버리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만 부활 하신 후에 그들을 다시 찾아가셨다. 이것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3.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라.

최선을 다해서 환경을 개선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해야 한다. 모든 희망이 다 희미하고, 모든 것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외로움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했던 사람들이다. 모세는 40년간 외로이 광야에서 버려짐을 당했다. 수많은 백성들과 친척들로부터, 많은 인기와 영화로부터, 재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침묵을 당해야 했으나 가시떨기로부터 하나님을 만났다. 다윗은 양을 치려고 수많은 날들을 홀로 보내야 했다. 홀로 무서운 짐승들과 싸워야 했고, 홀로 수많은 밤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러나 그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시편 8:3~4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밤에 홀로 있지 않으면 수많은 달과 별을 볼 수가 없다. 다윗은 별만 본 게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다윗은 외로운 들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한 것이다.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사도바울은 주님이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시는 놀라운 승리를 체험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우리 주위에 모든 소리가 사라질 때, 우리가 홀로 남겨져서 하나님 앞에 신음할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온다.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자. 하나님을 깊이 만나자. 이 말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을 만나는 인생들은 오늘 말씀을 가슴에 담자. 외로운 자들에게 우리의 따뜻한 손을 내밀자.

 

(찬송)

 

(축도)

이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도 이 말씀 붙들고 인생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능히 이기며 오히려 나아가 내주위에서 외로움에 울며 떠는 자들을 위로하고자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8. 오해(삼상 18:6~14)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번 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이 설교를 듣는 동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란다. 1940년대 초 하와이에서는 미국 군인과 원주민들 사이의 오해로 작은 전쟁이 발발했다. 그 원인은 간단했다. 태풍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하와이에 레이더를 설치해 놓고 태풍이 올 기미를 보이면 산위에 빨간 깃발을 매달아 미군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하와이 주민들도 좋은 뜻을 알기 원했고 군인들도 알기를 원했다. 원주민들이 보니까 산위에 빨간 깃발만 보이면 태풍이 온다는 것. 저 깃발이 우리에게 태풍을 가져다 주는구나, 올라가서 그 깃발을 부수었다. 세우면 부수고 세우면 부수었다. 그러다가 전쟁까지 발발했다. 오해로 말미암은 전쟁이었다.

중학교 친구 중에 미술을 싫어하는 친구가 있었다. 한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어느 날 미술선생이 박물관에 가서 도자기를 그려오라는 숙제를 냈는데 친구와 단짝이 되어 도자기 그림을 그리는데 그 친구의 그림솜씨가 신통치 않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그렸다. 그중에 몇몇 친구들은 박물관에 가지 않고 그 그린 사람들 것을 죽으라고 보여 달라고 그러고, 그린 사람들은 안보여 줄려고 그러다가 뺏긴 친구도 있었다.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검사를 하는데, 베낀 그림인지 직접 그린 그림인지 탁보면 안다는 것이다. 다 잡아 내는데 나와 같이 간 친구에게 그림을 베꼈다고 오라는 것이다. 분명히 가서 그렸다고 저가 증언해 주고 했으나 인정을 못 받고 그날 늘씬하게 얻어맞았다. 책이고 뭐고 다 찢어버리고 나온 친구가 그날 이후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미술을 아주 싫어했다. 그 이후에 헤어져서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술선생하고는 결혼을 안했을 거란 사실이다. 선생님의 오해로 한 인생의 예술성을 말살한 것이다. 혹 오해를 당해 보신 적이 있는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예외 없이 오해를 받아보셨을 것이다. 누구라서 오해를 당해보지 않았겠는가, 오늘 본문에도 심각한 오해가 등장한다. 이 오해로 말미암아 다윗은 10년이 넘도록 사울에게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소위 인간사냥이 벌어진 것이다.

8절에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다윗이 한 일이 무엇인데 나라를 욕심 부렸겠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의분을 느끼고 그를 죽인 것이 전부였다. 아무런 나쁜 동기가 숨어있지 않았다. 형들에게 떡을 갖다주려 다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격분하여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쳐 죽인 것뿐이다. 다윗에겐 오직 한 가지 그것이었다. 백성들의 인기를 생각하고 하는 행동은 꿈에라도 사울의 자리를 노리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여인들의 노래에 대해 다윗은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가르칠려고 한 마음도 없었지만 사울은 오해했고 그날 이후 다윗을 주목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다윗은 10년이나 괴롭혀서 다윗을 도망자 신세로 만들었고 사울은 이 오해로 말미암아 왕에서 쫓겨나 험한 세월을 맞게 되었고 왕으로 세움을 입었는데 그의 가문은 멸망하고 말았다. 한사람의 오해가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가문을 몰락으로 몰아넣었다. 오해는 이렇듯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무서운 능력이 있다. 수많은 관계들이 오해로 말미암아 깨어졌다. 수많은 전쟁과 갈등이 오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우리는 오해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다른 사람을 오해하므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던져준다. 오해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마비시킨다. 오해를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감성적인 오해이다. 흔히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사랑스럽고, 미운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밉다는 감성을 말한다. 여러분의 아들이 음식을 소리내어 쩝쩝 하고 먹으면 야, 참 건강하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야 돼 하지만, 미운 사람이 앉아서 조금만 소리를 내고 먹어도 추잡스럽게 음식을 먹어도 음식에 소리를 내노? 시집간 딸이 집에 와서 코를 골고 자면 야! 얼마나 피곤하면 저리 곤하게 잘까, 참 잘 자네, 며느리가 30분만 더 자도 게을러 빠져가지고 저래 자나? 이것은 감성적인 오해이다. 여러분의 삶을 잘 보자.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나!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오해가 있다. 우리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주관대로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를 굳혀나가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성적 오해가 생긴다. 생각을 잘못해서 생긴 오해이다. 이 두 가지 하와이에서 일어난 전쟁과 미술선생님의 오해, 이 모두는 이성적 오해에서 생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마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많은 오해가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가하면 필연적 오해가 있다. 자기가 한 행동이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고, 누가 봐도 내 잘못인 것, 분명히 나쁜 의도는 없으나 상대방에게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필연적인 오해가 있다. 그런가하면 우연적인 오해가 있다. 의식하지도 못했고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고 그런데 우연히 그 모든 조건들이 맞아서 오해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오해는 종류도 있을 뿐 아니라, 단계도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단계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오해의 시작은 전혀 말이나 행동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여인들의 노래는 다윗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골리앗을 죽인 것은 전혀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사울에게는 그것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 다음은 어떤 단계인가? 오해가 생긴 결과로 마음속에 상한 기분이 생긴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집요한 반응이다. 9절에서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한번 오해하면 계속 그렇게 보인다. 계속 의심이 들고 누군가를 오해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산같이 다가온다. 좋은 의도조차도, 아무 뜻 없는 웃음조차도 때로 그것은 오해로 다가온다. 마지막 단계는 집요한 반응을 보인 끝에 오해의 늪 속에 빠져버려 악신이 사울에게 내려 야료한다. 10절에서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괴로워한다)하는고로”. 사울이 전혀 작은 일로 다윗을 오해하고 불쾌하고, 분노하여,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했을 때, 악한 영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려서 번민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오해하는 사람은 내 마음이 자꾸 다른 데로 간다. 후에 정신을 차려보면 그게 아닌데, 다윗이 자기를 헤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오해의 생각에 자꾸 빠져들어 괴로워하고 그 뒤에 오해의 뒤에는 악한 인격적 존재가 도사리고 있단다. 그것이 바로 오해의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까지 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오해의 늪에 빠지게 되면 남에게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내 인생이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주위를 보라. 여러분의 인생을 보라. 형제간, 시어머니와 며느리간, 성도간, 직장간, 많은 관계들이 이 작은 오해 때문에 깨어져 버렸다. 사랑해야 될 사이가 미움의 관계로 발전한다. 그래서 내 영혼의 상태는 부셔지고, 상대의 마음에는 상처를 입힌 적인 얼마나 많았나, 우리는 어떻게 이 오해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삶을

파괴하고 마비시키는 오해의 늪에서 어찌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오해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물을 깊이 보아야 한다. 깊이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의외로 우리 주위에서는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들 가운데 타인을 오해하여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착하고 단순한데도, 늘 섭섭한 게 많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는 사물을 깊게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지혜(知慧)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지혜를 아주 많이 강조하는데 다름아닌 분별력이다. 사물을 깊게 보는 분별력이다. 단순하면 미련한 것이므로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사람은 착한데도, 그 착한 사람 때문에 아주 혼줄 난 사람이 있을 게다. 착한 사람이 아주 무서울 때가 있다. 단순한 사람도 그렇게 좋은 게 아니다. 생각이 너무 좁아서 사물을 넓고 깊게 보지 못해서 자기 생각 안에 가두고 단순하게 살아가므로 늘 오해한다. 단순한 사람은 대개 흑백논리를 가진 사람이 많아서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회색지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틀린 것 아니면 옳은 것뿐이다. 분명히 흑과 백은 있으나 하나님과 말씀, 우리의 영혼은 영원하다. 분명히 우리의 생각을 좁게 만들어서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사람인데 그를 향해 틀렸다고 이야기 하거나 비판하고, 저주하고, 적으로 삼는다. 어느 분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가 흑백논리를 가지기 쉬울까? 가만히 관찰해보면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일수록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함부로 정답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유명한 의사에게 가면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가 쉽게 이야기하는가? 돌팔이다. 돌팔이는 생각할 것도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잡는가? 어느 한 분야에서 깊이 공부를 하게 되면 이것이 반드시 정답이라는 말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유명한 과학자들은 “오직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한다. 교육계에서 평생을 가르친 분의 말인데 “무식과 고집은 비례한다”고 한다. 친구가 농촌 목사가 쉽지 않단다. 왜냐? 고집이 너무 세다는 것이다. 뭘 깊이 모르니까 자기들이 한번 생각한 게 진리야. 그래서 회의를 하면 회의가 되질 않고 자기가 똑똑한 목사고 자기가 박사다. 아무리 얘길 해도 회색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너는 틀렸다고 말하는 걸 농촌에서 많이 본다.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해는 내 인생을 파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다. 오해의 잘못에서 참으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지혜를 가지기를 축원드린다. 사람과 사물을 깊이 보는 눈을 키우라. 누구가 말한 것을 금방 믿지 말라. “너희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들으면 소리를 시켜서 전달해야 하는데 듣고 나서 바로 말하고 판단하고 도마 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쓸데없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가? 잠언에서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이해력이 넓은 사람. 깊이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저 마음속에 착하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착한 것에다 지혜를 더해야 할 줄 믿는다. 우리가 오해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물을 깊이 보아야 한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가능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긍정적인 눈이 필요하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농담은 너무 유명하다. 하루는 무학대사가 문안하니 이성계가 ”오늘 대사님의 얼굴은 돼지 같소이다“ 하니까, 대사가 임금에게 ”오늘 왕께서는 얼굴이 부처님 같습니다“. ”그래요, 응?“ 임금님이 돼지와 부처가 말이 되냐고 하니까 ”원래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니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

어떤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눈이 필요하다. 모든 사건을 늘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오해하며 오해당하고 살수밖에 없고 오해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긍정적인 눈이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내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적 오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달라 신학교 총장이 텍사스의 젊은 변호사의 실화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는 수십명이 모인 법조회사가 있는데 해마다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를 나눠준다. 30시간을 요리해서 굉장히 큰 칠면조를 만드는데, 독신 변호사는 큰 칠면조 고기를 선물로 받고서 모두에게 주는 것을 멋진 포장지에 싸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 칠면조를 집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 젊은이는 그 선물을 들고 뉴욕의 전철에 앉았는데 사실 그 선물은 자기에게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 포장지 안의 칠면조는 친구들이 놀려주려고 돌덩이를 넣은 가짜였단다. 그걸 모르는 변호사는 병색이 짙은 한 남자가 옆에 앉았기에 대화하다가 사업에 부도를 내고 좌절에 빠진 자에게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한 그는 그냥 주면 걸ㄹ인으로 취급당하는 체면을 살려서 싼 값에 칠면조를 넘겼다. 그 남자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남자를 기다리던 아내와 아이들은 파티를 벌여놓고 칠면조 고기를 뜯었는데, 아마 그 남자의 입에서는 심한 욕설이 나왔을 것이다. 이튿날 그 변호사의 친구들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하여 그 이야기를 들었다. 오! 그 지하철역에서 그 사람을 찾았으나, 평생을 그 변호사를 오해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것이 오해이고 우리의 연약함이다. 때로 좋은 의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역으로 우리가 입힌 해가 좋은 의도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약한 존재여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능한 긍정적인 해석으로 살야야 할 줄 믿는다. 그래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이유가 있었겠지. 가능하면 오해와 섭섭한 마음을 갖지 말자. 이해해줄려고 노력하자. 예수님은 평생 이 땅에서 제자들로부터 오해받고, 선한 뜻을 곡해받고, 한 번도 원망 없이 당신의 마음을 넓히셨다. 연습해 보자!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아멘. 성경이 그리는 그림은 바다같이 넓은 마음이다. 황새같이 넓은 마음이지 뱁새 눈같이, 형사같이 쫓아다니는 마음을 성경에서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은 지 5년, 10년이 지났는데도 뱁새 눈 같이 돌아간다면, 오해하고, 늘 삐치고, 늘 무언가를 캐내려하고, 뭔가 잘못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리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면 모든 것에 긍정적이 될 줄로 믿는다. 가족이 긍정적인 사람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보자. 식탁에서 누군가를 욕하는 모습이나 늘 남의 잘못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내 돈을 떼먹은 일이 일부러 떼먹었겠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얼마나 궁색했으면 사기를 쳤을까! 라고 대화를 풀어간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긍정적인 사람, 복 받을 사람, 우리의 가정은 천국이 되고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 외에는 우리가 오해를 풀 방법이 없다. 좋게 잘해 준다고 해도 오해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도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사람과 사물을 깊이 보는 것과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해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오해를 받아보았는가? 오해 받을 때 무방비 상태가 된다. 오해받고 있을 때 아무리 그 오해를 정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보통은 더 나쁜 상태가 되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료를 잔뜩 장전하고 그 오해들을 바로잡을 만반의 준비로 그 사람을 만나지만 더 깊은 오해의 웅덩이만 만들뿐이다. 우리가 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상태는 더 나빠지고, 오해의 힘은 우리 인생을 마비시킬 수 있다. 다윗은 10년간 오해로 말미암아 생사를 건 도망을 해야 했다. 사울이 그렇게 끈질지게 오해하고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은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유이다. 그는 사울과 오해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다. 엔게디 광야의 어느 굴에서 몇 가지 물건만 가져왔을 뿐 사울의 털끝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오해의 상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이다. 오해받았다면 분하지 말고 그 오해를 풀려고 하지말자. 풀면 풀수록 오해는 우리를 더 얽어맬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을 기름 부으시고 10년간 그를 훈련시키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냥 오해받은 게 아니었다. 10년 동안의 끈질긴 오해 속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필요한 모든 인격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그의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 젊은 변호사는 평생 남을 오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신다. 그분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일어나 간섭하실 줄 믿는다. 그때를 기다리자. 크신 하나님은 바라보자. 그는 오해당하고 괴로운 길을 아신다. 그때마다 낙심하지말고 탄식하지말고 관계를 끊지말고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 맡겨드리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이 축복이 되어 남은 평생 누군가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오해로 말미암은 마음의 동기가 말씀을 통해 이해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가정과 인생은 하나님의 축복을 조금 더 많이 받는 인생이 될 것이다.

(기도)

누군가를 오해하고 계시다면, 오해를 당해서 마음의 상처를 가졌다면 하나님께 모두 다 맡기고 올려드리자. 하나님 앞에 내 연약함을 맡기고 내 이웃의 연약함도 깨달아서, 오해로 인한 관계의 불편을 위해 하나님께 올려드려 긍정적인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기를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하자.

 

(찬양)

1.외로움도 견디어 내겠오 바보란 소리를 들어도 좋소/ 나를 비웃는 그 비웃음들 그 사랑을 받아주겠소/

이 모든 것이 힘들다는 것을 당신은 나에게 알려줬소/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많고 크오/ 그래서 나는 따라가겠소/

우리 모두 손을 내밀어서 넘어진 형제 일으켜 주세/ 사람이 살면 한번 사는 것 걸음 멈추고 생각해 보세/

시냇물이 강물로 흘러서 저 바다와 하나가 되듯이/

2.옆에 있는 형제 손을 잡고 우리 모두 노래합시다/ 서로 보며 인사 나누고 우리도 합시다/

우리 모두

(후렴) 우리는 하나요 당신과 나도 하나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오

 

(축도)

이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사울과 다윗의 오해로 말미암은 비극을 우리에게 보여주므로 우리에게 오해의 교훈을 가르치신 그 교훈을 다 받아들고 평생 다시는 다른 사람을 오해하지 않고 연약하여 다른 사람이 나에게 끼친 오해를 이해하며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기로 작정하는 성도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9. 시험(야고보서 1:12~18)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험이다. 일찍이 19세기 아일랜드의 현자였던 오스카 와일드(1864~1900,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심미주의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시험 말고는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다”. 인생에 있어서 시험이 얼마나 어렵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지적해 준 말이다. 성경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시험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시련의 시험이고, 또 하나는 유혹의 시험이다. 둘 다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로 “헤가스모스”라고 쓰지만 어떤 때는 시련(試鍊)으로 쓰이고, 어떤 때는 유혹(誘惑)으로 쓰인다. 주어진 상황이 시련이 될 수도 있고, 유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굳이 구분하려고 한다면 시련은 우리의 성장을 돕기 위해 하나님의 의에 대해 주도되는 것이 많은 반면, 욥은 우리를 범죄케 하기 위해 사탄에 의해 고안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야고보 1:2~4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의 시련을 이야기한다. 욥의 시험, 사도들이 당한 시험 모두는 그들의 부도덕이나 악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테스트요 시련이었다. 그러나 13~14절의 시험은 다른다. 유혹의 시험을 의미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유혹의 시험은 즐거움이나 이익을 약속함으로서 악을 행하도록 꼬득이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유혹을 피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유혹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도대체 이러한 시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시험을 받고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말씀한다.

 

먼저,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시험 없이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실제의 삶에서 그러한 일은 가능하지 않다. 13절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라고 했지, “만일 시험을 받거든“이라고 하지 않았다. 시험은 당연히 있는 것인데,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시험을 당한다. 당신도, 우리도 시험을 당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시험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이와 성별에도 상관없이 시험은 다가온다. 너무 신령해서 시험을 안 받는 사람도 없고 누구나 다 시험을 받는다. 당신이 주님을 향해 성숙해 갈수록 유혹과 시험을 받는다. 이것은 삶의 진실이며 우리 모두가 시험받는다는 것은 인생에 실제이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시험거리를 똑같은 문제들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그러므로 시험받을 때에 놀라지 말라, 당황하지 말라. 또한 그것은 굳이 숨기려고도 말라, 사실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다. 시험에 지는 것이 아니다. 히 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하물며 우리이겠느냐!.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곤 한다. 저들은 내가 어떻게 이런 나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마음에 시험이 오는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속지 말라. 시험을 모두가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품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시험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마틴 루터(1483~1546,Martin Luther,독일)는 ”우리는 우리의 머리에 죄가 날아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다만 그 죄가 머리에 집을 짓지 않게 할 수는 있다“고 했다. 그렇다. 죄에 머리에 날아드는 것을 막진 못하나 머리에 집을 짓지 않게는 할 수 있다.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다. 시험은 불가피하다. 시험을 이기기 원한다면 실제적이 되어야 한다. 구름에 뜬 삶을 살지 말고, 인생에 속아 살지 말고 인생을 현상적으로 실제적으로 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모두가 다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시험받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마시기를 축원드린다.

 

2.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무책임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사회탓, 정부탓. 부모탓. 자녀탓, 배우자탓. 마귀탓. 심지어 하나님을 탓하며 현대인들은 살아간다. 사람이 시험을 받으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는 식의 반응을 보았는가? 예. 아담이 바로 그러한 자였다. 아담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한 그 여자가 그 과일을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젊잖은 것 같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즉 하나님, 결국 당신께서 저를 이런 꾀에 빠뜨리셨어요. 그러나 저는 순결하게 살아드렸는데 당신께서 끌어들인 저 여자가 오는 바람에 제가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저 여자가 아니면 저는 시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요. 하나님. 당신이 주신 남편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어요. 제 아내만 아니었던들 제 아내가 내 마음의 분기를 돋우지만 않았던들 하나님, 저는 그날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제가 홧김에 바람을 피운 걸 하나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저 여자 때문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나이까? 우리 마음속에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아담이 했던 똑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부모 때문에, 당신이 던져주신 환경 때문에, 내가 시험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정확히 야고보가 본문에서 정확히 부정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왜 죄를 짓는가? 누군가 우리를 죄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 외부의 어떤 것도 우리를 죄짓도록 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심지어 사탄조차도 우리를 죄짓게 할 수 없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수는 있을지언정 죄짓게 만들 능력은 없다. 우리가 죄를 짓는 단하나의 이유는 나 자신이 그 죄를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13절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죄는 우리가 시험에 동의하고 그것을 따라갈 때에 발생하는 것이다. 죄는 전적으로 우리 쪽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나 자신을 관련시키기 전까지 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시험을 받더라도 그 직전까지 나는 안전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그 유혹에, 시험에 진정으로 반응하는 그 순간 죄는 일어난다. 유혹을 이기기 원한다면 시험을 이기기 원한다며, 그렇다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시기 바란다. 하나님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환경을 탓하지 마세요. 그것은 미성숙의 특징일 뿐이다. 시험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시험은 결코 하나님의 의에 시위되지 않는다. 그 시험에 빠지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일 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하나님, 내가 과거에 시험에 빠졌던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임을 시인합시다“. 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시인하는 일이 필요할 줄 믿는다. 우리는 실제적이 되어야 한다. 시험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시험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시험에 대해서 승리하기 위해 세 번째는 시험에 대비해야 한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눅 22:46).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3)고 말씀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사탄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한다. 시험을 이기기 원한다면 시험에 대비해야 한다. 본문 16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손톱으로 파서라도 밑줄을 그으라. 시험은 미리 당신에게 경고하지 않는다. 시험인 이유는 시험인줄 당신이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에게 다가온다. 에덴동산에 있던 하와에게 시험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모두가 전쟁에 나가고 홀로 왕궁에 남아있던 다윗에게 어느 날 시험은 훌쩍찾아 왔다. 우리는 시험에 대비하고 방어해야 한다. 당신은 시험을 어떻게 준비하시는가? 예비할 수 있는가? 시험에 잘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시험의 작용과 단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야고보는 시험의 단계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고후 2:11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의 계략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를 기록해 놓았다. 그들이 어떤 과정으로 사탄의 작용에 의해 무너져 내렸는가를 남김없이 숨김없이 이곳에 기록해 놓으셨다. 야고보는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네 가지 과정’을 소개한다. 한 가지 그가 사탄에게 감사한 것이 있다면 사탄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똑같은 기만전술을 2000년이 넘도록 지속적으로 사용해온다는 것이다. 사탄의 궤계를 알기를 원한다고 가르친다. 사탄의 궤계는 뻔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 이후에 우리 인생은 시험으로 빠뜨린 사탄의 유혹과정은 일정하다. 4단계를 기억하자.

첫째는 욕심(慾心)이다. 14절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은 첫 번째 단계인데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욕망이나 욕구는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안에 아주 좋은 욕구들을 심어주셨다. 식욕. 성욕. 성취욕 등 우리 안에 있는 대부분의 욕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한 욕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은 적절하게 통제(統制)되어야 한다. 사탄은 일정한 궤도를 달리고 있는 우리의 욕구를 이탈시켜 변질시키는데 전문가라고 성경은 소개한다. 사탄은 이렇게 일정한 궤도를 달려야 할 우리 마음속의 욕구를 다른 곳으로 이탈시키게 되면 우리는 오직 욕망(慾望)만을 채우려고 하고, 결국 그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만다. 음식이던 일이던, 성이던, 돈이던, 그 무엇이던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욕구가 통제력을 상실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된다.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 주신 궤도를 벗어나게 될 때 그것은 시험으로 나아가게 되는 첫 번째 관문이 된다. 야고보는 분명히 말씀한다. 시험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외부가 아닌 우리 마음의 욕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둘째는 미혹(迷惑)이다. 14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에 끌려는 낚시 용어이다. 낚시를 잘하는 비결은 미끼에 있다. 자기가 잡고자 하는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쓰는 것이 낚시의 핵심이다. 죽은 새우보다는 살아있는 생새우를 바늘에다 끼우고 낚시 바늘은 안에 감춰져 있고 산 새우는 너무 아파서 발광하는 게 물속에서 보면 헤엄치는 것처럼 보인다. 붕어가 그 곁에 놀다가 침을 흘리고 아! 살아있는 새우! 퍼득거리는 새우에 끌린다. 그 다음 단계는 미혹(迷惑)이다. 그 안에는 날카로운 낚시 바늘이 있으나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걸 알아야 한다. 사탄은 그렇게 우리를 속인다. 사탄은 당신을 잡기 위해 어떤 미끼를 사용하는가? 사탄은 말하기를 “저는 당신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당신의 욕망도 알고 과거의 상처도 잘 안다. 당신이 좋아하는 미끼를 잘 알고 있기에 사탄은 바늘을 그 미끼 안에 감추고 우리 앞에 그 미끼를 던진다. 시험은 언제나 욕심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사탄은 안다. 내 안에 어떤 욕망이 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 때문에 성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어릴 때 너무 물질 때문에 고생하고 살았던 자는 돈에 탐닉하게 된다. 사탄은 그러한 약점을 잘 안다. 우리 마음 안에 욕심이 있다. 상처가 있음을 아는 사탄이 우리가 좋아하는 미끼를 그 앞에 바늘을 숨기고 던져놓는다. 시험은 언제나 실제보다 더 좋아 보이지만 저것만 가지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줄 믿는다. 소유하면 내 인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리라 생각한다. 좋아 보이는 그 순간 우리는 미혹되고 만다. 욕심 그리고 미혹, 그 다음의 세 번째 단계는 불순종이다.

세 번째는 불순종이다.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잉태(孕胎)해서 죄를 낳는다. 잉태는 마음속에 키우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시작한 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사탄의 바늘이 시험인 줄 알면서도 그 미끼를 조금씩 물어뜯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언제나 당신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당신의 행동으로 간다. 사탄은 맨 먼저 사탄의 주위를 사로잡고, 다음에 생각을 사로잡고, 마침내 행동을 취하도록 우리를 사로잡는다. 사람은 이렇게들 이야기한다. 아무 해도 없는 공상(空想)이 무엇이 해가 되는 가고?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은 점차 잉태하기 마련이다. 삶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수많은 텔레비전 광고를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욕심의 미끼를 던지는 행위이다. 우리의 마음에 욕심의 생각이 자라는 그 순간 그것은 잉태하게 된다. 붕어가 그 물고기에 집착하는 순간에 예전에 그 낚시 바늘에 걸렸다가 입이 찢어져 본적이 있어도 그 낚시 바늘을 보는 순간 몇 번을 툭툭 건드리다가 입질을 해보다가 드디어 덥썩 물고 만다. 마지막 단계는 사망이다. 15절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것이 시험이 일어날 때의 비극이다. 새우를 문 물고기는 마침내 입이 찢어진다. 푸라이판에 올려져 불에 굽힌다. 과거에 인생에서 기름에 튀겨진 때를 기억하라. 이 단계를 거치지 않았는가. 성경 말씀은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시험에 빠지면 그 결과는 사망, 하나 뿐이란 것이다. 사망은 생명의 반대이다. 시험에 이기면 생명의 면류관이지만, 지면 사망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시험에 빠질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온다. 죄가 잉태하게 된다. 그 죄에 빠져서 죄를 짓는 순간 이 땅에서 잠시나마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사망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죄의 노예가 되고 내 마음은 수치심에 빠져 내 가정은 파탄나 버리고 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야고보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가르친다. 살고 싶은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내가 가는 싶은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갈 수 있지만 되돌아오는 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선택의 자유는 있어도 결과는 선택할 자유는 없다.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실제적이 되어야 한다. 내가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변명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중단해야 한다. 또한 시험에 대해서 알고 방어해야 한다. 욕심을 거쳐, 유혹을 거쳐 불순종을 거쳐,반드시 시험에 빠지면 사망이 온다는 것을 마음에 심어야 한다. 아멘!, 너무나 좋아 보여서 사탄이 우리를 미혹한다. 그것만 가지면, 이 말만 해야 내 마음이 시원할 것 같고, 이렇게 행동해야 좋을 것 같아서, 모든 것이 다 미혹되어 시험에 빠지는 순간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순간 결과는 사망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시험에 빠지는 데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17절에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그는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 시험에 대해서 말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갑자기 말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것을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긍정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것이 시험을 이기는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험이 우리의 내면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인간의 생각에서 바꾸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열쇠가 될 것이다. 관건은 시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선한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성경은 시험과 싸우라, 마귀와 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귀와 논쟁하지 말라. 마귀는 2000년간 전문가로서 그 방법을 써왔다. 우리는 오히려 마귀와 논쟁하기보다 벗어나야 한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유혹에 항거하여 싸운 게 아니라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했듯이 우리는 사탄과 싸우기 보다는 18절에서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시험을 이기는 중요한 비결은 거듭나는 것이다. 시험은 내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다. 시험에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시기 바란다. 다윗은 이것을 훗날에 깨달아서 시편 119:9~11절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나의 행실을 깨끗이 하려면 주께 범죄치 않으려면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라”. 오늘 하루도 기도하며 말씀 한 구절이라도 읽고 생활할 때 “주여 내 마음의 생각을 다스려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굴복시키고 나아가면 시험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패배를 위해 부름 받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승리함의 부름을 받은 자인 줄로 믿는다. 길이 승리를 지켜나가는 우리 되기를 축원드린다.

 

(기도)

시험에 대하여는 삶의 능력이 필요하다. 당신이 가장 잘 넘어지는 영역은 어디인가? 무엇에 대해서 나의 자제력이 약해지나? 내 기질인가? 식욕인가? 낭비벽인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후회하는 언어습관인가? 혹시 음주인가? 음란한 생각인가? 사탄이 알고 미끼를 던지는 취약점은 어디 영역인가? 그것을 규명하고 인정하고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잘 넘어지는 영역을 주님은 아십니다. 저는 항상 넘어집니다. 제 과거를 잘 아시는 주님, 도와주십시오.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고쳐주세요. 우리는 때로 시험을 부를 때 수신기를 내려놓아 야 할지 모른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고 올바르게 고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된 잘못된 관계는 정리하고 직업을 바꾸기도 해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듯이 생각을 바꿔야 하고, 시험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시는 그 약점을 향해 기도합시다.

 

(찬송) 342장, 통395장

1.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너 시험을 이겨 새힘을 얻고 주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2.네 친구를 삼가 잘 선택하고/ 너언행을 삼가 늘 조심하라/너 열심을 다해 늘 충성하고 온 정성을 다해 주봉사하라

3.잘 이기는 자는 상 받으리니/ 너낙심치 말고 늘 전진하라/네 구세주 예수 힘 주시리니 주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후렴)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축도)

이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 붙들고 오늘 주신 이 말씀 받아 승리하기로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10. 염려(마 6:25~34)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늘 걱정이 많은 한사람이 출장차 비행기를 탔다. 걱정 중에도 비행 창구에 가서 사고가 나면 보험금을 탈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 마침 기내 중국식이 나왔다. 또 덤으로 주는 과자 속에는 열어보니 이런 글귀가 나왔다. 오늘 당신의 투자는 큰 빛을 볼 것입니다. 분명히 비행기 사고를 대비해서 투자하고 비행기를 탔는데 괜히 불안했다. 차라리 사지를 말 것을 이 세상에서 염려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인생은 없다. 우리는 형태와 정도는 달라도 모두 염려를 체험하며 살아간다. 이 자리에도 염려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염려해 보았고 또한 염려가 얼마나 해로운지도 직접 체험해 본 사람들이다.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염려는 느린 형태의 자살”이다. 염려가 우리의 정신과 육체에 얼마나 많은 해를 주었기에 그가 이런 말을 했겠나, 독일어의 염려는 “부르캔”인데 짐승이 다른 짐승의 목을 물어서 질식시키다. 영어의 촉(질식시키다). 실제로 염려는 우리의 목을 졸라 모든 우리의 인생을 질식시키는 능력이 있다. 주위에서 염려거리가 많은 사람들은 염려하지 말라가 아닐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돌아서면 염려하는 약한 존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염려에 대해서 산상보훈으로 어떻게 가르치는가? 예수님이 바라보고 정의를 내리신 염려에 대한 몇 가지를 나누자.

 

첫 번째, 염려의 진리는 염려는 비이성적이다.

그렇다. 염려하는 것처럼 비이성적인게 없다. 대부분의 염려는 일시적이다. 염려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 영원한 것을 위하여 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염려는 그렇지 않다. 지나갔던 지금 이 시간에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염려의 대부분은 영원한 세계 때문이 아니다. 영혼을 위해 염려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염려는 일시적인 것들 때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아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다. 음식과 옷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주요 포인트이다. 예수님의 논리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밥인가 옷인가? 목숨과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 팔 하나 없는 몸이라도 더욱 중요하기에 양복보다는 내 목숨을 택할 것이다. 풍성한 음식이냐? 건강하게 장수하는 몸이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더라고 해서 맛있는 음식이 먼저인가? 왜먹나? 살기 위해 먹는다. 누가 음식을 목숨하고 바꿀까?

그러므로 너희의 염려가 중요한 영혼을 위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안 중요한 음식과 옷을 위하여 생명에 해를 받아서야 되겠는가! 옷 걱정과 음식걱정으로 몸을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비이성적 행위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주어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내 목숨이 있고나서야 집이 있고 음식이 있고 의복이 있는 법이다. 사업과 돈. 몸을 망칠 수는 없다. 염려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 비이성은 사탄의 논리로서 전혀 맞지 않는 해법이다.

 

두 번째, 염려는 비효과적이다.

염려에 대한 미신은 염려하므로서 효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이 염려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녀들을 위해 방구둘이 꺼져라고 염려하는 것이나 남편을 위한 염려, 사업, 직장, 경제를 위해 염려하면 그것들이 나아질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염려한다. 그러나 염려에 대한 진실은 아주 다르다. 염려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자져다 주질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한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키를 크게, 또 날씬하게, 납작코를 오뚝코로, 머리털이 막 쏟아난다면 염려해서 해결 하겠지만 염려는 전혀 우리 삶에 유익과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죄와 해악일 뿐이다. 염려는 백해무익하다. 전혀 효과가 없는 독이다. 염려하므로 내 인생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염려는 비이성적이고 비효과적이다.

 

세번째, 염려는 비신앙적이다.

심하게 이야기해서 염려하는 순간에 무신론자가 된다. 당신은 믿음이 없네요. 이유는 간단하다. 염려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정말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내 인생을 좌우하시며 미래를 보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묵자라면 염려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왜 염려의 노예가 되는가? 염려의 순간에 무신론자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것 같으나 염려하는 순간에 내 머릿속에는 하나님은 없고 내 역사의 관장은 하나님 없이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려한다. 염려는 얼마나 비신앙적인가를 가르치려고 비교하시기를 새들을 보라, 농사를 지으려고 씨 뿌리던가? 창고를 짓고 곡식을 거두던가? 설교당시 산상보훈의 그 산 주위에는 들에 백합화가 피었을 것이다. 들꽃을 위해 수고와 길쌈으로 베틀을 돌려서 옷감을 짜던가? 들꽃이 입은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왕복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저들을 입힌다고 말씀. 내버려진 들풀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신다. 믿음이 적은 자야, 염려는 비이성적이고 비효과적이고 우리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비신앙적이다. 염려는 걷으라. 우리의 삶에 해를 끼치는 염려의 극복방법은 가장 큰 염려를 적자, 옆의 인간이거든 이름대신 화살표로 표시하라. 우리가 영원한 세계를 발견했고 소유했다면 한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계명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어떤 것. 내 삶의 첫 자리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염려는 붉은 신호등이다. 경고의 싸인이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희미해질 때 붉은 신호로 싸인이 온다. 눈을 다른데 둘 때 붉은 신호등이 켜진다. 염려가 생기면 내 삶의 붉은 신호등인줄 알자. 하나님 외에 우리 삶의 첫째 근원이 되는 것이 생기면 염려가 된다. 자녀, 배우자. 돈, 사업, 공부 등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자리에 앞서 놓이면 염려의 이유가 된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서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목적의식을 바로 가져야 한다. 왜 구원해 주셨나?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사는가? 그게 내 삶의 목적인가? 아니면 잠시 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다는 것의 우상을 위해 살았는가? 인생을 질식시키는 염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평안의 믿음으로 살자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우리는 부름 받은 자이다. 순례자가 이 땅의 모든 것을 잠시 사용하다가 두고 갈 나그네이다. 호텔에 가면 호텔 가구에 약간 흠이 생겨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텔레비전 모퉁이가 떨어져 나가도, 내일이면 떠나갈 몸이니까,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건가? 우리의 목적은 영원의 세계인 하늘나라에 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두 번째, 한 번에 하루씩 살아가자(34절)

우리는 우리의 날들 중에서 단 이틀만 염려하지 않으면 평생 동안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어제와 내일이다. 그 두 날만 염려 안하면 염려할 일이 별로 없다. 먼저 염려하지 않으려면 어제의 잘못을 잊자. 만일 지난날의 죄가 생각난다면 하나님께 아뢰고 회개하고 그 죄를 잊자 지난날의 죄와 슬픔이 우리의 인생을 옭아매지 않도록 하자. 염려에서 탈출하는 비결이 이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에 주께로 맡겨야 한다. 그리고 내일 일을 앞당겨서 염려치 말자. 비가 올 때까지는 먼저 우산을 펴들고 있지 말자. 땡볕이 나는데 잠시 날씨가 흐리다고 우산을 펴들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어리석은 일을 우리가 알면서 앞당겨서 염려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치 말고 하루 하루씩 살라고 하신다. 오늘은 하루 지나니까 우리가 그렇게도 걱정해던 내일이었다. 어제는 IMF걱정하고 세상걱정을 그토록 했는데 하루 지나니까 오늘이었다. 아직도 오늘 살아있다. 얼굴만 좋으시네! 내일의 염려대신에 오늘을 사는 법을 배우자. 오늘 하루의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족하다.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주기도문에서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매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내일을 위해 다음 달과 일 년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바로 이것이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아야 하나, 그 이유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일을 바라보다가 염려에 빠져서 축복을 잊어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 오늘 하루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한 줄 믿는다. 단 사흘을 살수 있다고 의사가 진단했다면 나머지 이틀을 위해서 고민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 하루가 얼마나 귀한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귀한 것인데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위해 오늘의 축복을 놓치지 말자. 고난당했던 안의숙 여사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다도 가도 끝이 없고 곤해요. 주님 내손 팔 내미사 내손 잡아 주소서/ 매일 매일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기 주옵소서”라고 찬송했다.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하루씩 사십시다. 음식 먹을 대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내 마지막 식사처럼 부부간에도 오늘 하루만 살 것처럼 애틋하게 살자. 천년만년 살 거라고 하지 말자. 모든 게 달라진 것

 

세 번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바울은 롬 8장에서 자기 아들을 주신 이는 그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 공중의 새와 들풀도 하나님이 먹이시지 않겠느냐, 염려와 믿음은 동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으로 믿으면 염려는 뒷문으로 도망갈 것이다. 마음 속에 염려가 들어오면 마음 속에 있던 믿음은 밀려나오게 된다. 둘은 동거할 수 없다. 결단하자. 염려하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든지, 둘 다 붙들고 살수는 없다. 만약 세상일에서 염려가 생긴다면 빌 4:6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반대기도하지 말자. 셋째 딸을 낳은 어느 조카의 편지를 받고는 다섯째까지는 아들되리라고 축복해 주었다. 조금만 우유주는 시간이 늦어도 숨이 넘어갈듯이 울어 제끼는 그 아기의 울음소리에서 조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단다. 우리 애기는 엄마나 아빠가 아기를 위해서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고 녹여서 준비하는 잠깐 동안이 섭섭해서 자기의 필요를 위해서 그토록 집이 떠나가도록 목놓아 운다고... 그 속에 있는 조카의 모습을 본 것이다. 만약 애기가 엄마나 아빠가 준비하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토록 울지는 않을 것을... 덮히고 있구나, 조금 있다가 더 좋은 것을 먹어야지. 그걸 못 보니까 목숨 걸고 울고, 두려워서 울고, 섭섭해서 울고,,,, 굶을까봐 얼어 죽을까봐 우는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대하 20:15에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왕(유대 4대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세 나라(모압, 암몬, 마온)와 연합하여 레위사람 야하시엘이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전쟁 자녀와의 전쟁, 배우자, 직장, 경제, 건강, 큰 전쟁. 세 나라(모압, 암몬, 마온)사람들이 함께 여호사밧을 치고자 하여 몰려와도..... 고통당하지 않는 자는 없다. 병원에서 항암치료는 어렵다. 성도들의 사랑의 기도로 당할 수없는 전쟁을 승리케 하였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싸우면 하나님은 팔짱을 끼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 앞서 싸울 것이다.

 

(기도)

염려거리를 두고 떠나라. 무엇이 염려로 짓누르나 이곳에 두고 가야한다. 비신앙적이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욕심내어 오늘 하루뿐인데도 혹시 다음달, 다음해를 걱정한 건 아닌가? 어느새 믿는 자가 하나님의 신뢰를 잊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가?

 

(찬송)

1.너 근심 걱정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2.어려워 낙심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3.너 쓸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4.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후렴)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축도)

성부성자 성령의 은혜가 남은 일생동안 염려에 희생되지 않고 믿음으로 날마다 감사하며 하나님은혜를 찬양하며 살기로 작정하는 교우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11. 죄의식(창 3:7~12)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몸에 지니게 된다. 그가운데 어떤 상처는 평생 우리의 몸에 상처를 남긴다. 몸에는 흉터가 여럿 있다. 동네의 개가 갑자기 다리를 문 적도 있고, 일 년에 몇 번씩 복날이면 개를 물어주고 있다. 눈에 띄는 부위라면 성형수술로 가리려고도 하고 숨기려 한다. 못에 어떤 상처로 인해 흉터를 남기는 것 같이 우리의 마음에도 흉터가 있다. 그 상처가 평생 동안 흉터를 새겨놓는다. 비록 그 흉터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다. 조용히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흉터들이 보일 것이다. 그중의 어떤 흉터들은 평생 동안 마음속에 남아서 우리의 인생들을 괴롭힐 것이다. 몸의 흉터는 상처로 인해 생기지만, 우리 마음의 상처는 罪로 인해 생긴다. 죄가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내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게 남아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생긴 흉터들은 우리들 자신이나 사람들과 지은 죄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 세상에 죄가 없다면 우리 마음에 상처가 생길 여유가 무엇일까? 죄 때문에 우리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흉터가 생긴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마음의 흉터들을 ‘죄의식’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마음에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에 때로는 넘어지고 유혹에 넘어지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내 부족으로 인해 죄를 짓고 나면 마음속에 죄의식이 남는다. 어떤 죄의식은 평생 마음에 남아서 평생을 불행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불행으로 몰아넣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영적 성장의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오늘로써 11가지이다.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에 참여해도 내 믿음은 자라나지 않고 신앙의 발전이 없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이 모르는 죄의식의 큰 흉터가 있는 경우가 많다. 어찌하면 이러한 죄의식과 마음의 흉터를 없앨 수 있을까? 몇 가지를 살펴보자.

죄의식에 대해 잘못되게 대처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살펴보자. 본문은 인류최초의 부부가 죄짓고 죄의식을 잘못 해결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죄가 우리 마음에 찾아오면 그 죄를 숨길려고 한다. 그 둘이 제일 먼저 7절에서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범죄한 이후의 최초의 행동은 가리움이었다. 그전에는 벗었으나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다. 영적으로 얘기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감출 것이 없었다. 죄가 없었기에 정직하게 서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옷을 벗어도 괜찮았으나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자신들이 만든 옷으로 몸을 가렸다. 우리 마음에 죄가 들어오면 죄로 말미암아 주위에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까지 나의 죄를 공개할 수가 없게 된다. 홀로 외로워진다. 서로 진심으로 말할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만 가린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자신을 가렸다.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죄의 결과와 방법은 피하는 것이다. 가능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숨길려고 애쓴다. 그 노력은 좋으나 그 지은 죄는 우리의 노력으로 결코 가릴 수가 없다. 무화과 나무잎은 곧 시들고 매말라서 부스러진다. 며칠만 지나면 땡볕에 사라진다. 철저히 노력하면 우리가 지은 죄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할 수는 있으나 두 사람에게만은 숨길 수 없다. 하나님과 나 자신이다. 하나님과 나에게서 해결하지 않으면 내 인생을 끝까지 괴롭힌다. 내 양심이 나에게 소리친다. 그 결과 그 죄의 짐이 내 인생의 짐을 무겁게 한다. 내 양심의 가책과 내 마음의 짐을 진 인생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천만금이 있은들 무얼 하겠는가! 나를 불행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한다.

잠 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다윗은 죄의식을 마음에 가지고 살아본 사람이었다. 시편 32:3에서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그는 죄의식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체험한 사람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우리의 죄를 잘못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11~12절에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누가 벗었음을 고했느냐? 하나님이 주셔서 내게 주신 여자라고 변명한다. 이것이 아담의 반응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반응이다. 종종 하나님에게도 변명한다. 그때 조금만 나를 붙들어 주셨더라면, 내 사업을 조금만 거들을 주셨더라면, 그때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순탄하게 지났을 것을, 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화냈을까? 하고 결국 저 여자 때문에, 여자는 저 인간 때문에... 무슨 일의 결말에는 행복했던 관계가 원수로 변한다. 나는 아니고 저 사람이란다. 이 모든 죄성이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인생을 통해서 교훈하신다. 우리 마음은 늘 남을 비난하고 전가하기를 원한다.

세 번째는, 자신을 학대한다.

양심이 약한 사람은 내가 먼저 죽기를 자청하거나 당한 것이 싸다고 생각한다. 복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책하고 인생을 실패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의식하지 못하는 죄의식의 위력이다. 불행으로 몰아가는 원인은 우리가 약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 누구나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가 그 죄를 해결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가?

먼저 우리 마음속의 흉터와 죄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먼저, 우리의 죄를 자백하라고 하신다. 죄를 자백하자. 첫 번째 단계는 자백이다. 마음의 흉터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죄를 자백하자. 가장 쉬운 단계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죄를 짓고 후회하는 인생이 죄의 자백 없기에 그 죄의 짐을 자기가 무겁게 지고 간다. 자백이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죄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시인하는 것. 잘못했습니다.

시 51편에 “....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침상을 적시는 회개. 토설하라.

자백이 중요함은 요일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임을 가슴으로 받자. ‘자백’은 헬라어로 ‘호몰로게오’인데 ‘호모’는 동성, ‘로게오‘는 말하다이다. 하나님께 변명치 않고 내 잘못을 아뢰는 것을 뜻한다. 저 여자가 내 속에 불을 지른 것이 아니다. 상대의 잘못은 하나님이 심판하길 것이기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부분은 성령이 내게 가슴을 찌른 지적을 따라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 자백하라.

“새가족들에게 꼭 전하는 복돌이 이야기” 장롱 위의 꿀단지를 손대려하다가 옆에 있는 고려청자를 깼다. 가정부가 고려청자를 얼른 씻어내서 땅에 묻었다. 복돌이와 가정부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볼 때마다, 식사를 함께 할 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평생에 가정부는 아기를 보고서 ‘도련님‘하지 않고 ’복돌아’ 하고 막 대놓고 불러댔다. 그리고는 오라고 해놓고서 ‘두부’ 한 모 사온나! 해도 ‘그건 네가 해야지‘라고 할 수가 없었다. 가정부가 ’고려청자‘하면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콩나무‘ 사와라, ’마루청소‘나 ’설거지‘도 시켰다. 드디어 복돌이는 가정부의 식모노릇을 해오게 되어 너무 괴로웠다. 도리어 결심을 하고서는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아버지, 사실은 고려청자를 제가 깨었습니다. 꿀을 먹으려고 하다가 고려청자를 깼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복돌이를 껴안으시면서 ”그래, 아들아 고맙다. 벌써부터 네가 고려청자를 깬 것을 알고 있었단다. 언제든지 나에게 와서 이야기 해주기를 기다렸단다”.

여러분! 이 가정부는 누구인가? 사탄이다.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이렇게 사탄의 종이 된다. 하나님이 모르는 죄는 없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너가 안다“(天地 地知 我知 子知).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와서 자백하기만을 기다리신다. 울면서 아버지에게 잘못을 자백하고 용서를 받고나니 세상이 다 자기 것과 같았다. 그 다음에 가정부가 왔다. ”복돌아, 다마네기 좀 사온나”. 사 왔을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마음속에 생긴 죄와 죄의식들을 어찌 해결할까? 자백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아뢰자.

2.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다. 어떻게 용서하시는가? 세 가지 방법으로 용서하신다.

첫째 즉시 용서하신다.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짐을 얼마나 져야 하는가를 고통받아야 하고, 그래서 죄의 값을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그건 헛되고 내성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평생 우리의 죄를 짋어진다고 해도 조금은 죄의 짐을 조금도 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이만큼 죄를 지었으니 이만큼은 고통받아야지 하고 미루시는 분이 아니다. 시편 32:5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내가 자백하자마자 우리의 죄를 즉시 사해버리신다. 하나님을 우리생각대로 생각하지 말자.

느 9:17에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용서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은 탕자(蕩子)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전하셨다. 멀리 집을 떠난 아들이지만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에 돌아오기 전부터 벌써 용서하고 살았다.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게 아니다. 먼저 기다리시는 하나님. 먼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아버지 내 죄짐이 너무 무겁고 고달픕니다. 용서해달라고 자백하자. 이 죄가 내 인생을 누른다고 고백하면 내 죄의 짐을 풀고 달려나와서 저와 여러분을 품에 안아주실 것이다. 그는 즉시 용서하시며 완전히 용서하신다. 시편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사 38:17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는 순간에 그 죄를 들어서 등 뒤에 던지신다. 제리 콜린스는 바다에 버린 고기를 다시 “낚시금지“한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앞이 아니라 등 뒤로 보이지 않도록 죄를 던지신다. 그 연못에 가서 과거에 버린 낚시대를 드리우며 버린 고기를 낚지 말자. 골 2:13~14에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塗抹)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함은 로마시대 죄인에게는 감옥 문 앞에 죄목을 적어서 판결의 처분내용을 걸어놓은 것이다. 우리의 회개시 하나님의 공로 의지할 때 그 증서를 ‘도말‘하신다. ’무효화‘하신다. 찢어버리고 불태우시고 무효화시킨다. 십자가 앞에 자백하면 즉시, 완전하게 용서하신다. 하나님의 용서는 반복적으로 무한으로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에 ?유대인의 관습은 세 번까지만 용서한다. 네 번째는 귀퉁이를 때려도 된다. 칭찬받으려고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할까요? 490번이 아니라 무한으로 용서하라. 하나님의 용서는 즉시, 완전히, 반복적으로, 무한히 용서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용서를 믿지 않는 것은 그분이 치룬 대가를 우리들이 너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좌 위에서 기분 좋게 용서하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용서하셨다. 양과 소와 짐승의 피 이상인 자신의 피로 용서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 과거의 죄가 무엇이든 자백하자.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껏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3. 거룩한 삶을 살아가자.

요 8장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하며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다. 설교 중에 끌려온 여인이 얼마나 창피와 공포를 가졌겠는가! 동네사람들이 돌로 쳐죽일 일 이 생겼다. 율법에 따라서 돌로 쳐죽이라고 한다면 로마법에 위반되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에 위반되는 기로에 서서 7절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9절에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나이 들면 죄에 대해 너그럽다. 신학자들은 요새 같으면 돌로 쳐죽였을 것이라고 했다. 10~11절에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용서함 받은 죄들이 계속 다시 살아나는 것은 죄의식에 쌓이는 것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죄를 등 뒤로 던지신 것을 믿는다. 삶이 흐트러지고 동일한 죄를 또 범하게 될 때 그 죄들이 생각나서 죄짐을 지고 살게 된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섬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약해서 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죄의식은 어깨를 무겁게 하고 불행으로 몰아간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가르쳐주심을 받으라. 남은 생애는 과거의 어떤 죄 때문에 불행한 삶을 중단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죄사함 받은 새로운 기쁨과 용기와 결심으로 힘찬 내일을 살아가시는 성도되기를 축원 드린다.

(기도)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아 흉터로 남은 죄의 흔적들을 성형함이 예수 믿는 자의 특권 자백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그때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 짐을 벗겨주소서 죄의식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고 싶다. 어린양의 피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한다. 죄의 종, 사탄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 속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하자.

(찬송)

1.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길이요/주의 피로 내죄를 씻었네

2.주의 밝은 빛되사 어둠 헤치고/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지금 내가 주앞에 온전케 됨은/주의 공로를 의지함일세

3.내게 성령 임하고 그 크신 사랑/ 나의 맘에 가득 채우며/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내맘 항상 주안에 있도다

 

(후렴)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축도)

이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오늘도 놀라운 보혈의 공로와 말씀 의지하여 마음속에 있는 죄의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씻어버리고 죄사함 받은 자로 의인으로 사랑 기뻐 뛰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송도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영적 성장의 12가지 걸림돌” 12. 열등감(시 139:13~18)

1. 두려움(신 1:26~33)

4. 적개심(삼하 18:9~16)

7. 외로움(딤후 4:9~18)

10. 염려(마 6:25~34)

2. 낙심(느 4:10~1)

5. 의심(요 20:24~31)

8. 오해(삼상 18:6~14)

11. 죄의식(창 3:7~12)

3. 분노(엡 4:26~27, 약 1:19~20)

6. 스트레스(고후 4:7~11)

9. 시험(약 1:12~18)

12. 열등감(시 139:13~18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우리 인생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것들은 많다. 열등감은 특히 심각한 것은 안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밀즈“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열등감을 갖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열등감은 인간이 세상에서 태어나던 순간부터 발생하는 필연적인 감정이다. 우리가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등감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는 IQ 130 이상되는 사람들의 열등감이 그 이하인 사람보다 더 많다. 여러분이 열등감을 느껴보았다면 머리가 좋으신 것이다. 열등감은 한 번도 느껴보지 않았다면 아마 130이하일 것이다. 짐작이 안 간다면 심각한 편이다. 우리나라의 설문조사기관에서 서울대학생의 40%가 아주 심각한 열등감의 질병을 안고 있으며 나머지 40%는 중간 이상의 열등감에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열등감은 머리의 좋고 나쁜 것의 조건과는 관계없이 모두 열등감에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열등감의 피해는 크지만 감추고 살아간다. 시달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 상담가 제임스 닥스는 그의 책에서 열등감으로 인해 자신의 생애를 마감한 비참한 학생의 죽음을 소개하고 있다. 그 학생은 공부도 잘했고 외모도 잘 생겼고 집안도 부유했다. 모두가 부러워할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속에는 언제나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기숙사 지하실에서 목매어 죽었다. 그 학교는 신학교였다. 이처럼 열등감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될 때 우리의 삶에서 자신감을 빼앗아 버리고 자기의 경멸감, 고립된 감정을 가지고 그것을 사실로 믿게 해서 평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열등감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일어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열등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하나님이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불러서 모세를 사용코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려고 불렀지만 “내가 누구관데 ”, 그는 과거에 이집트의 왕자였다가 미디안의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자존감이 다 무너졌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을 불신앙한 열등감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드디어 모세는 불신앙으로 까지 간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확신을 주려고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출 4:2), 지팡이를 뱀으로, 다시 지팡이로 변하게 하고, 손을 품속에 넣자 나병이 들고 또 넣자 나병이 낳았다.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이 정도에도 열등감을 떨치지 못하고 말에 능치 못해 입이 뻣뻣하다고 목한 게 너무 많았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나? 입의 말을 가르치마.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출 4:15),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나 같은 자를 보내시려는가? 고집 센 자를 보라, 하나님이 노를 발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의 모습이다. 열등감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모세가 열등감을 극복했을 때 세계사에 길이 남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열등감은 극복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순종만 하면 회복되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는 링컨은 학력이 없어서 열등감을 가졌으나 실력을 추구하여 그것을 극복했다.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말미암아 다리를 많이 절었고 신체적인 열등감을 가졌으나 지도력을 길러 미 대통령이 되었다. 록펠러는 가난의 열등감에 시달렸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대부호가 되었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였기에 열등감을 가졌으나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문제는 열등감의 조건이 내게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때로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과거의 실패 때문에 신체적 약점이나 재산의 부족함 때문에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열등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 열등감을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노예가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 마음속 깊숙이 찾아오는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몇 가지 방법들을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자.

먼저, 지금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임을 기억하자.

지금의 내 모습대로 지으시고 이 땅에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 하게 되었나? 어쩌다가 부모끼리 눈이 맞아서 내가 존재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다 보셨고 주의 책에다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셨다고 말씀한다. 시편 13~16에서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母胎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모습 그대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 대로이다. 키가 150cm도, 180cm도 그의 뜻이다.

어느 목사님의 넷째 아이가 ‘다운증후군’인줄 알면서도 낳았다. 의사의 진단에서 심히 괴로워 한건 주위사람들이었다. 교인들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그 가정이 달라지고 목사님 설교도 달라졌다.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목회자의 놀라운 보배들을 다 가지게 되었다. 축복이 되고 설교가 달라지고 강단에서 풍성한 은혜가 넘쳤다. 그 아이가 순수하게 자라면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워낙 사랑을 받아서 그 가정의 기쁨이 되었다. 모든 시선이 그 아이에게 모였다. 순박한 심정 때문에 서로 안으려고 했다. 레너 마리아, 헬렌 켈러의 기적은 우연도 아니고 쓸모없음도 아닌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이루어진 뜻과 기적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마 6 :27~30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우리는 들풀, 백합. 참새보다 귀중한 존재이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실 만큼 우리는 가치있는 존재이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심사숙고하셨다. 이 땅에 보내시려고 계획하시고 책에 기록하셨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드려라.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니 신묘막측(神妙莫測)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고 다윗처럼 지금의 내 모습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대로 계획하신 뜻임을 기억하므로 나의 열등감들을 능히 극복하자.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지금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부터 절대 비교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자. 열등감의 대부분은 비교의식에서 비롯된다. 만일 사울이 다윗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다면 사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운명과 그 아들들의 삶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자는 영원히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없게 된다. 비교는 언제나 자신을 꺾는다. 이 세상에는 늘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홉 가지를 잘해도 다른 사람이 한 가지를 잘 할 수 있기에 그것을 비교하는 순간 열등감이 생긴다. 교회 안에서도 비교문제가 발생한다.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똑같이 봉사를 하는데도 남의 주목을 받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시기하고 열등감에 젖었다.

고전 12:17에서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발과 발가락은 양말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다 눈만 되면 상상이나 하겠는가? 눈은 하나만 있어도 괜찮다. 심장처럼 중요한 지체일수록 눈에 띄지 않는다. 간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간이 배 밖에 나온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롬 12:3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사도바울은 모든 고민을 겪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 발가락이면 그걸로, 발가락이 눈처럼 눈썹을 그리려 하지 말고, 3절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교회 안에서 이 땅에서 세상. 인가. 잘났는가 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면 나와 내 가정, 교회 세상에서 덕이 될 것이다. 비교하지 마세요. 목사의 세계에서도 비교가 된다. 어느 요가선생은 열등감의 체형이 있다고 했다. 턱이 앞으로 빠지고 허리가 펴지거나, 허리가 굽은 자도 있다던가...... 내가 발이라도 자기 소명을 다하면 눈이 받는 영광을 받을 것을 믿어야 한다. 교회 안에도 해와 같은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 오히려 숨어있는 별과 같은 존재 때문에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는 든든하게 보일 뿐이다. 지금 나를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서로 간에 시기하고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셋째, 자신의 단점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우리는 결함이나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바꾸어보려고 노력해보자.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 단점을 바꾸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빌 2:13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과 동업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내 힘으로 고칠 수 없으므로 흠과 단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잡으신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를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단점은 바꿀 수가 없는 것도 있다. 작은 키나 불구 등 때로 기도로 응답받지 못하는 것도 있을 때는 바울처럼 낙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신 특별한 표로 보자. 고후 12:8~10에서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점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로 남겨두자. 우리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단점과 삶의 흠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때까지는 우리는 열등감에 대한 문제를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등감의 문제는 스스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의 동의 없이 그 누구도 당신이 열등하다고 느낄 수 없다. 결국 당신만이 자기 회의의 전염병을 중단시킬 수 있다. 당신만이! ... 이제부터는 열등감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찬송)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고 너를 가장 많이 알고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시고 너를 가장 많이 알고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며 /

주의 생각 잴 수없어 /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고 / 광야중에도 폭풍중에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

주의 생각 잴수 없어 / 주의 자비

주의 사랑 끝이 없단다/

 

(축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사 이 땅에 오셔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더 이상 어리석게 남과 비교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내 단점을 고쳐가며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습관(習慣)은 이런 것이다. 독일 여행 중에 한참 잠을 자던 불면증 환자가 “앗 참, 수면제 먹을 시간이 되었구나” 하면서 수면제를 챙기는 사람이 있었다. 공부하기를 원한다면? 지속적으로 갈망하라. 예수님 덕분에 새 삶을 경험한 자들이라면 주의하라. 하나님 은혜로 건강해졌으면 건강한 이후에도 주의하라. 음란하고 방탕한 자들이 과거로 돌아가면 주님은 내 은혜가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 고 질책하실 것이다. 과거가 살아있다면 과거의 습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똑같은 행동을 3주 동안만 계속하면 새로운 습관이 된다고 한다. 습관으로 제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해야 만 된다.

 

 아기 예수가 누워있었기에 말구유와 지푸라기와 강보 등은 모두 다 중요하다. 성경의 중심은 복음서이다. 이단은 복음서를 안 본다. 요한계시록, 다니엘서, 에스겔서만 보고 말한다. 로마서는 변증서이다. 몸이 중요하지만 팔과 다리는 한쪽을 자를 수 있지만 목숨은 자를 수 없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첫째, 알기 쉽도록 하려고 함이다.

말은 듣는 자를 소중히 해야만 한다. 개와 고양이가 만날 때마다 싸우는 이유는 신호가 틀리기 때문이다.

개가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올린다. (웃지 못한다). 꼬리에 기분이 달렸다. 꼬리가 다리 사이에 들어가면 요주의 신호이다. 사람이 꼬리 달렸으면 정말 좋겠다. 반대로 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가 내려간다.

신호가 틀리는 건 남녀도 마찬가지다. 개와 고양이는 자기 신호를 버려야 한다. 내 신호대신 상대방 신호를 따라야 한다. 대화의 채널을 맞추라. 예수님이 대화하시려면 사람의 말을 해야만 한다. 구름의 뜻과 하늘의 뜻만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인간의 경험이나 평범한 것으로 꽃과 새와 씨 뿌리는 이야기 등 눈에 보이는 것들로 말씀을 전하셨다.

둘째, 모르게 하기 위함이다. 13:14에서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여우(헤롯왕)에게 가서 말하라. 마음이 비뚤어진 자에게는 모르게 하신 게 비유이다.

셋째, 진리를 구체화하기 위함이다. 보통 사람은 어려운 이야기로 하려고 한다.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 진리(眞理)는 누구나 알아들어야 한다. 초등학생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우리 생활 속에 있는 이야기이며 매일 경험하는 이야기로 해야 한다. 현실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체화하라.

넷째, 재미있어야 한다. 비몽사몽간에 꿈에서 은혜는 얻지 못한다. 조는 사람은 설교자의 책임이다. 설교자는 관심과 매력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인천을 왕복했다고 이야기 하려면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게 하라.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으로 재미있게 말하라.

다섯째, 깊이 생각하게 하라. 골짝 밭이라고 했다. 좋은 땅보다는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remind는 생각나게 함이다.

여섯째, 비유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예화(例話)는 잊어버리지 않고 오래 간다.

일곱째, 깨닫고 실천하게 한다.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는 ‘너도 가서 그리하라’는 가르침이다.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하게하고, 실천의 방법까지 제시한다.

여덟째, 창세 전부터 감추인 것을 들어내는 계시적 의미이다. 13:34에

  

 

 러브 스토리:

43회 아카데미 작곡상(프란시스 레이의 감미로운 배경음악). 11계명은 “네 아비를 속이지 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안타깝고 애절한 사랑을 그렸다.

이태리 이민가정의 가난한 딸인 앨리 맥그로(ALI MACGRAW)는 명문 부호의 아들로 아이스하키 선수인 라이언 오닐(RYAN O'NEAL)이 매사추세츠 주 법률에 의해 셀프 서비스 결혼을 행한다.

에릭 시걸(ERICH SEGAL)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아서 힐러(ARTHUR HILLER)가 영화화한 작품이다. 항암치료비를 빌리려고 5천불을 차용하러 아버지를 찾아간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사랑이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주중에 아내의 점심을 사주는 남편은 바람을 피우는 중이란다.

 

  

 다말(Tamar)

1.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기 원했던 여인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 1:3).

다말이라는 여자는 시부(媤父)인 유다의 씨를 받아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우리는 다말을 음란한 여자나 부도덕한 여자로 알았고 유다도 그 여자를 음란한 여자로 알아서 불에 태워 죽이려 했으나 나중에 “그가 나보다 옳다”. 의롭다고 말했다. 룻기 4장 12절에서 성읍 사람들이 룻을 축복할 때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축복했다.

다말은 유다 집에 아들을 낳아서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일에 소망을 두었다. 사탄은 그 길을 막았다. 엘도 죽고, 오난도 죽고, 셀라는 죽을까봐 유다가 다말에게 주기를 거절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한 길, 어려운 길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결심했다. 음행을 정당화 하려는 것은 아니나, 그런 일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다말의 순결한 마음을 하나님은 받으신 것이다. 믿음의 세계는 자아가 죽은 상태라야 들어갈 수 있다. 왜 다말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렸는지를 깨달아보라.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신약을 풀어주는 성경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신약에 짧게 기록된 것은 구약성경에서 다 풀어준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5장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한절은 구약의 출. 레. 민. 신 성경전체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애굽을 떠나(구원을 받아도) 육신에 속한 생각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한 채, 광야길 같은 삶을 살면서, 옛 마음은 죽고 새 마음이 살아나 결국에는 영원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모습을 이야기 해 준다. 출.레.민.신 까지의 사실을 고후 5:17 한절이 설명해 주고 있다. 창 38장 1절=마태 1장3절. 창세기에는 유다가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끝나버리면 마태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마태복음에는 유다가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과 오난과 셀라 뒤에 베레스와 세라가 나온다. 유다가 결혼해서 낳은 맏아들이 엘이고, 둘째가 오난이고, 셋째가 셀라이다. 유다의 맏아들 엘이 맞이한 아내가 다말이다. 창 38장 7절에서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다말과 결혼해서 살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 훌륭한 유대인, 초라한 예수님

갈릴리 바다(갈릴리 호수, 디베랴 호수, 벳새다 바다. 게네사렛 호수)는 지름이 12km쯤 되는 호수인데, 엣날 사람들은 큰 호수를 바다라고 불렀다. 그 호수 한쪽에 벳새다가 있고, 여기서 호수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가버나움이 있고, 게네사렛이 있고, 디베랴가 있고, 건너편에는 거라사 등이 있는데, 디베랴 사람들은 그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 하고, 벳새다 사람들은 벳새다 바다라고 했다. 안식일에는 예루살렘 옛 성전벽(‘통곡의 벽‘)앞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성경 찍으면서 사진을 못 찍게 했는데 사진 찍는 것도 노동이라고 했다. 경비원들은 무전기를 켜서 연락하면서....

 

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린 엘과 오난

창세기 38장 7~8절에서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해서 죽였다는 것인데. 유대에서는 형이 결혼해서 아들 없이 죽으면 그 아내가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게 아니라,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난 아들로, 형의 계보를 잇게 되어있다. 엘이 다말과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 없이 죽었기에. 둘째 오난이 형수에게 들어가서 형의 계보를 이어야 하는데, 오난은 형님의 이름보다 자기 이름을 내고 싶었고, 형님 집을 세우기 싫었기에 형수에게 아기를 못 갖게 하려고 땅에다 설정(泄精)한 탓으로 오난도 죽고 말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에서 태어나게 하시려고 경수가 끊어진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었고,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해서 에서와 야곱을 택했다. 유다는 결혼해서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고, 세 아들중 하나로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중대한 위치에 선 것이다. 자기 생각을 따라 육신의 정욕대로 떠내려갔다. 하나님이 엘에게 기대와 계획을 두었다면 마땅히 다말에게 “여보, 증조할아버지 이삭이 40살에 결혼해서 60살이 될 때까지 아기를 못 낳다가 기도해서 우리 할아버지 야곱과 에서를 낳으셨지. 그리고 야곱 할아버지가 열두 아들을 낳은 중에 우리 아버지 유다에게 약속을 주셨지. (창 49:10)” 그러니까 우리는 메시야를 낳는 가정이야“라는 생각으로 육신의 욕망을 버려야 했지만, 엘이 악한 일로 죽게 되었다. 엘이 죽자 오난과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으려 했으나, 씨를 형수에게 주지 않고 그냥 땅에 설정해 버림으로 사탄의 계획에 말려들었다. 다말이 정말 음란한 여자였다면 젊은 남자와 재혼했지 늙은 시아버지를 유혹했겠는가? 유다 집의 대를 이어서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일에 참예하려고 했던 것이다.

엘과 오난이 죽자 유다는 셀라와 다말의 동침시키기를 두려워했다. 셀라를 통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려고 유다에게 “저 여자와 동침만 하면 죽는다” 는 생각을 넣어 다말은 셀라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다말을 친정으로 내쫓았다. 11절에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죄사함은 롬 4:6~8에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과 고넬료의 거듭남. 사도바울. 구스 내시는 요일 1:7~9에서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고후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롬 3:10에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 했다고 왜 하필 롬 3:10뿐인가? 성경 속의 의인이란 단어는 198번이나 있는데 “노아는 의인이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과 오난은 마귀가 주는 욕망을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떠났다.

 

2.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법칙

에스더 3:1~11에서 “그 후에 아하수에로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 두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였더라/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 / 저희가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고한고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아하수에로왕 십 이년 정월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하만이 아하수에로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부쳐 왕의 부고에 드리리이다/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는 소견에 좋을대로 행하라 하더라”, 창 38:11~12에서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 쫓겨난 다말

에스더도 아름답고 리브가도 아름답고, 유다의 아들 엘과 결혼한 다말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는 보통 집안이 아닌 곳에 시집가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가운데 쓰임받고 싶었다.

 미리 넘겨볼 수 있었다면

성경을 읽으면서 다음에 일어날 이야기를 몇장만 넘겨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에스더 3장 이후에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위치에서 그 다음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유대인을 멸망시키기로 한 12월 13일에 은1만 달란트(45kg*1만=45만kg)로 만든 장대 위에 “하만이 목매어 달리겠구나” 할 것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곧 왕이 된다고 안다면 다윗을 따르던 자들이 아말렉에 의해 사글락이 불타고 그의 가족들이 사로잡혀 갈 때라도 “다윗을 따르다가 다 죽겠다. 다윗을 죽이자”고 했는데 다음 책장에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될 줄 알았다면 그리 안했을 것이다.

 나는 안 돼

죄를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 성경의 법칙

눅 10장에서 여리고 강도 사실을 알고,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었음을 알았다면......

창 38:12에서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유다의 아내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다말에게 다른 길을 여신 것이다. 다말은 인간적으로 모든 것이 포기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회를 주셨다. 엘과 오난과 셀라 대신에 유다에게서 직접 씨를 얻도록 했다. 자기 마음에 딱 맞는 구원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하 5장11절에서 나아만 장군은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라며 자기의 생각과 기준이었으나, 14절에서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자기의 생명까지 미련 없이 버릴 때 하나님의 길을 열어주셨다. 구원받은 것이다. 탕자도 자기의 방법이 완전히 무너진 후에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낳고자 하는 그들의 기대가 다 무너진 후에야 이삭을 얻었다. 이것이 성경의 법칙이다.

 그저 비행기 표 값만 주십시오

 

 의에 주리고 목 마르다

혼인 잔치집에서 인간이 준비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야 예수님이 준비한 새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다. 자기의 의가 무너질 때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 된다. 내 생각에 맞는 교회, 내 귀에 맞는 설교, 내 마음에 드는 일이라는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 우리의 생각들이 무너질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

 자기에 대한 포기

“얼마 후“란 시간은 바로 절망의 시간이다. ”나는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구나” 하는 시간이다. 눅 15:16~19에서 둘째아들이 돼지우리에 내려간 후,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 자기 생각과 방법이 다 포기될 때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3.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인도

창 38:6~14에서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 항아리에 담길 술

옛날 중국에 공주님이 왕궁의 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혜는 뛰어나지만 얼굴이 흉측해서 공주가 “선생님은 참 못 생겼는데 어디에서 그런 지혜가 나와요?“ 하니까, 빙그레 웃으면서 왕궁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지만 토기그릇도 있어서 임금님이 마시는 술은 귀한 그릇에 담지 않고 토기그릇에 담는 다오”. 공주는 이후로는 귀한 술을 금그릇에 담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술맛이 변해버렸다 이것을 임금이 알고는 좋은 술일수록 토기나 질항아리에 담아야 보존이 된다고 가르쳤다. 지혜자는 “저의 얼굴이 잘 생겼으면, 저에게 있는 지혜도 변해서 궁중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겠지요“라고 답했다.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옷으로 몸을 휩싸고 길가에서 기다렸다. 유다는 아내가 죽은 후 외로웠고 고향도 아닌 타지에서 양털 깎으러 가서 창녀를 보자 마음이 끌렸다. 유다는 가진 돈이 없으니 염소 새끼 한 마리면 안되겠는가? 하니까, 보증물로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받고서야 동침을 허락받아서 잠잔 것으로 인해서 다말은 임신했다. 다말은 유다의 씨를 얻는데 다시없는 기회를 얻었다.

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면

행 3장에서 성전 미문(예루살렘 동편문, 오늘날 ‘황금문’이다. 이문을 통해서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면 바로 감람산이다. 구약에서는 ‘왕의 문’(대상 9“18)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쳤다. 치유의 능력 후에 옥에 갇힌 베드로, 성경의 두가지 양상은 복음 듣고 증거하는 자와 그 증거를 듣기 싫어하는 자가 있다. 다윗의 생각과 사울의 생각이 반대이고, 가인의 생각과 아벨의 생각이 반대이고, 에서의 생각과 야곱의 생각이 반대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어야 한ㄷ.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에는 선교사가 정부에 등록된 교회와 선교회에 속한 외국선교사에게만 비자를 준다. 일년 중 추울 때는 15도, 가장 더울 때는 25도여서 살기에 좋다. 케냐인 교회에 소속되어 차량과 땅을 등록된 교회의 이름으로 사야한다. 그 교회 목사가 쫓아내면 재산을 그대로 두고 쫓겨난다. 케냐인 목사들은 화려하게 산다. 미제 최고급승용차와 미제 세탁기와 별장 같은 집에서 산다. 아프리카 목사들은 외국선교사들을 사람 대신 돈뭉치로 본다. 돈을 안주면 내쫓는다. 전시용 집회를 해서 그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어 한국에 보고하는 일이 중요하다.

 

4. 저주 위에 임하는 구원

창 38:12~20에서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 육체 밖에서 보면

다말을 통해서 그 속에 숨겨진 구원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다말이 자존심과 자기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창 38장(다말), 요 4장(사마리아 여자), 8장(간음한 여자)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돌로 때려죽이거나 불에 태워 죽여야 할 유혹의 여인이고 간음한 여인이다. 예수가 전하고, 바울이 전해도 대적하는 사람,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노아는 방주라는 구원의 길을 만들었다(창 6:14~16). 물에 빠졌다가 건짐을 받은 후의 새로운 삶을 기뻐하라.

 구원의 약조물

다말은 시아버지의 씨를 얻어 아이를 가졌을 때 닥칠 일을 미리 생각하고 닥쳐올 죽음에 대비했다. 유다는 창녀와 잔 것이 창피하여 가까운 친구에게 염소새끼를 주며 에나임 길 곁으로 가서 그 약조물들을 찾아오게 했다. 유다 앞에 끌려온 다말이 불에 타 죽을 날이 왔으나 보증물을 본 순간 유다는 현기증이 나고, 26절에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했다. 다말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그 의로 인해 심판이 떠나가 버렸다. ”셀라가 장성했으니 셀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해야 하는데....이건 다말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내 생각을 따랐어. 이 여자를 죽이지 마라”. 그렇게 심판은 물러갔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씨를 얻는데 만족하지 않고 멀리있는 심판을 마음에 앞당겨서 미리 가보았다.

5. 생명의 약조물

창 38:24~30에서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 가려진 영원한 세계

어제와 오늘은 우리 말인데, ‘어제’는 지나간 섭섭한 일들, 억울한 일들이고, ‘오늘’은 현실 살기에 바빠 내일 닥칠 문제를 대비하지 못한 것이고, 내일(來日)은 순수한 우리말 대신에 한자(漢字)일 뿐이다.

 이제 꼰 새끼줄에 엽전 꿰기

옛날에 부자가 데리고 지내던 종들을 내보낼 때가 되어 내일이면 해방된다“고떠날 준비를 하는 중에 ”오늘 저녁에 마지막으로 할 일은 젓가락만큼 가늘고 여물고 길게 새끼줄을 꼬아주게!”. 종들은 마지막 날까지 일을 시킨다고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새끼를 대충 슬슬 굵게 꼬았으나 충성스런 종은 몇발이나 되는 새끼줄을 가늘게 열심히 꼬았다. 주인은 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엽전뭉치를 내놓으며 “새끼줄에 꿰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충성스런 종은 많은 엽전으로 논밭을 사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 성경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다. 먼 옛날의 이야기를 책으로 지금 읽지만 말고 늘 그 자리에 함께 가 있어야 한다. 우리 마음을 성경 안으로 자꾸 끌어가야 한다.

 소경과 눈을 뜬 사람

나면서 소경된 사람과 정상으로 태어났다가 사고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반응이 다르다. 전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냥 “예”하고 대답만 하지만, 후자는 뒤에서 누가 부르면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듯 한다. 마음의 눈이 소경인 사람은 사건이 부딪힌 후에야 후회하지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은 부딪히기 전에 앞을 본다. 몽고사람은 평균 시력이 3.5란다. 눈 나쁜 사람이 케냐나 몽고에 가서 살면 눈이 아주 밝아진다. 소경은 문제를 만나도 자신에게 왜 닥치는지 모른다. 부딪혀도 무엇에 부딪혔는지 모른다.

 생명의 약조물

마 1:1~3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다말(Tamar)이라는 이름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이 따랐다. 용납되지 않는 일도 해야 했다.

 그는 옳도다

석달쯤 지난 후 다말의 배는 “문은 문인데 걸어 다니는 문”은 소문(所聞)이다. 소문이 퍼져나가 유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창 28:26에서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지팡이는 목자가 지니는데, 증거물들은 그리스도의 의와 약속을 의미한다. 다말은 자신의 것이 아닌 유다의 지팡이와 도장과 끈 곧 약속을 가지고 나갔다.

마 7:22~23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벤허에서 친구 멧살라(예루살렘의 호민관)의 미움으로 노예선에 끌려가던 중, 아리우스(집정관)를 구하고 그의 양아들이 되어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 반지를 판에 찍어서 원수인 친구에게 내민다. 유다의 도장은 바로 유다의 약속을 가진 것이다. 약속의 말씀이 인쳐졌을 때 다말의 행위는 의롭다고 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6.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

롬 8:31~37에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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