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


제1일 천지와 빛의 창조

1절  천지의 창조
“태초”에 라는 말이 나온다. 태초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이며 영원 가운데 처음으로 시간이 게재되는 순간이며 공간과 물질의 시작일 뿐 아니라 시간 자체의 시작이기도 하다. 태초는 만물이 창조되는 첫 순간으로 절대적으로 일회에 한하기도 하고 피조물이나 인간이나 또 다른 어느 존재도 창조의 순간에는 그 곳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태초를 있게 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창조하시니라”는 말이 있는데 구약에서 창조 하다라는 뜻은 오직 두 경우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행동일 때이고 다른 하나는 재료의 사용 없이 만들 때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구약 성경에 2570회가 사용된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위엄있는 하나님을 지칭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으며 다만 우주의 주인이요 하늘에 있는 높은 분이고 창조자임을 고지할 뿐이다.

“하늘과 땅”의 의미는 구약 성경에서 3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영물(靈物)들의 거소 즉 영계의 하늘 과 둘째 지구를 둘러 싸고 있는 공간 하늘(궁창) 셋째는 천체를 포함한 우주 하늘을 뜻한다. 여기서 하늘의 의미는 태초에 하나님이 온 우주를 무에서 창조하셨음을 나타내며 우주가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고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진화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진 것도 아니요 오직 절대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나타낸다.

1절에서 나오는 창조는 3절 이하에서 서술되는 6일 창조 사역의 제목이 아닌 하늘과 땅은 첫째 날의 창조물이다. 그렇다면 첫째 날에 창조된 사물은 3절의 빛 하나만이 아닌 “천지 즉 우주”와 “빛”임을 유의해야 한다. 1절의 창조는 무에서의 창조라는 특징이 있다.

2절  창조된 지구의 최초 상태
성경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1절과 2절이 서로 대등한 절임을 알 수 있다. 즉 1절만 분리시켜 제목화 할 수 없게 만들어 져 있다. 첫째 날의 창조 이야기가 연속됨을 알아야 한다. 1절의 하늘과 땅의 창조의 언급이 땅에 관한 이야기로 축소 제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돈하고 공허하여”라는 말이 있다. 혼돈은 구약 성경의 사막 광야와 같이 완전한 꼴을 갖추지 못한 사물의 상태를 표현하며 공허란 비어있음을 의미한다. 거주민이나 서식 생물이 없다는 뜻이다. 3절에서 식물과 동물 인간 등이 지구를 채우며 창조된 것이 셋째 날부터 이기에 아직은 비어있음을 알 수 있다.
“흑암”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사 45:7에 나는 빛도 짖고 어두움도 창조하여 라는 말씀이 증명하고 있다.

“깊음”은 와글와글 떠들다 라는 히브리 동사에서 온 말로서 소요하는 많은 물 또는 깊은 물을 의미한다.”흑암이 깊은 물위에 있었다”라는 구절은 땅이 창조될 당시 흑암과 함께 지구를 덮고 있는 물도 부가적으로 창조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 당시 지구가 물로 덮여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구절인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신”이라는 말 중 신이라는 단어는 바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바람이 지구를 둘러싼 물을 건조시키며 창조 사역을 수행을 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성령 하나님이 게재된 첫 문구이기도 하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 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본성을 계시하는 성경 최초의 구절이다. 곧 요 1장의 성자의 천지창조 사역과 창 1장의 성부 성령 하나님의 동시 사역이 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운행하시니라” 이 말은 성령의 창조 사역을 설명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이제 막 창조된 지구에 생명력을 부여하시기 위해 지구를 감싸고 두루 다니시면서 부단히 창조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2절은 첫째 날에 창조된 지구의 상태와 성령의 창조 사역을 생동감있게 소개한다.

여기서 중조론(The gap theory)에 대하여 언급하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중조론은 우주가 2차에 걸쳐 창조되었다는 이론으로 재창조설이라고 한다. 중조설에 의하면 1절에서 온 우주가 완전히 창조되었으나 천사가 타락하는 이변적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지구를 심판하신 결과 어둠과 물로 뒤덮어 혼돈과 공허를 만들었는데 2절이 바로 심판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1절에서 창조된 원 창조의 시기와 3절부터 다시 창조되는 6일 창조의 시기 사이에는 무궁한 세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여러 가지 근거로 학자들 사이에 부인되고 있다. 이 이유는 여기서 생략한다.

3절  첫째 날의 두 번째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6일 창조 기사 가운데 10회나 사용되는 말이다. 본 구절은 창조자 하나님이 말씀을 방편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인격적 창조신이며 그가 곧 만물의 명령자임을 밝혀준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말씀하셨나? 루터는 이 말씀을 들으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아무도 없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요 이 말씀은 신적 본질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내면적으로 말씀하신 결과는 하나님이 생각하셨다 와 동일한 의미가 된다. 그러면 가라사대는 아직 보이지 않는 대상인 빛 자체에 말씀이 선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다음 구절 “빛이 있을지니라”가 3인칭 명령 즉 간접 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간접 명령이란 3인칭 대상을 향한 명령 또는 희구(希求)를 나타낸다. 그의 말씀은 창조물들이 실재하기 위한 모든 요건들을 포함한다. 즉 그의 말씀은 실재에 수반되는 모든 방법들까지도 포함한다. 결국 “빛이 있으라”는 명령은 빛을 빚으시는 성령의 사역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말씀의 영속적인 효력으로 인하여 우주는 혼돈이나 무(無)로 되돌아 가지 아니하고 질서 정연한 우주로 존속한다.

결국 1-2절이 창조의 서론이거나 원 창조의 서술이고 3절부터 6일 창조의 시작과는 구분되어질 필요가 있다. 사실 3절 이후의 창조는 1절에서 창조된 우주에 잠재된 재료들이 사용되어 실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에서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재료 자체가 무에서부터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에서 1절의 첫 창조와 3절의 둘째 창조인 빛 창조 사이에 삽인 된 2절이 시간의 경과를 암시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혀둔 바가 있다. 하나님은 천지가 창조된 즉시 이 명령을 주셔서 빛이 땅에 비치도록 하심으로 지구에 첫째 날 아침이 오게 하셨다. 그럼 이 빛은 어떤 것인가?


어거스틴은 이를 본질상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빛을 영적인 것과 혼동하여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비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것은 큰 잘못이다. 이 빛은 본질 상 물질적인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빛에 의해 땅에 낮과 밤이 왔으며 아침과 저녁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영적 광명이 땅에 낮과 밤을 오게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칼빈이나 루몰드의 견해에 의하면 이 빛이 영적인 빛이 아니며 태양 자체에서 비치는 빛도 아니며 물리적인 빛으로 태양과 분리된 상태에서 비치는 빛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이 창조의 순서에서(태양 없는 빛을 만드심) 태양과 달 없이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에 가지신 빛을(영적인 빛을 말하지 않음)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빛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매개체없이 공간에 위치할 수 있게 되었다 빛과 천체가 함께 있어 광명이 창조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무리한 억측임에 틀림이 없다.

바벨론의 한 전설에 의하면 우주의 기본 요소와 동일시 되는 창조주 태양 신이 빛과 어둠이 대립되듯이 어둠의 세력인 혼돈의 괴물과 대립하여 투쟁하던 끝에 결국 빛의 신인 어둠을 물리치고 질서 있는 우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빛이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상호 교체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빛과 어두움은 상대를 구별 지어 주는 동반자로서 그 존재에 있어서 밀접히 교류한다. 빛이 생김으로 어둠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다른 한 쪽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을 공존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빛이 있었고”는 이 후에 사용될 성취의 표현인 “그대로 되니라”의 예시로 사용되었다. 1장에서 이 같은 성취어가 7회 사용된다. 이 성취어들은 주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뒤에 수반되어 하나님의 명령이 지체없이 즉각적으로 성취된 사실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표현한다.

본 절은 첫째 날의 두 번째 창조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어두움으로 휩싸인 천지를 창조하시고 3절에서 즉시 빛을 창조하심으로 광명과 어두음이 교차하는 세상을 만드셨다. 빛이 창조되기 전 지구를 전면적으로 뒤덮었던 어둠은 빛이 창조되기 위한 선제 조건이었으며 빛이 있음으로 어둠은 존재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빛은 이 후에 창조되는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선제 요소가 되었다.

4절 빛의 판정 및 빛과 어두움의 분리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원 히브리어에서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고 그리고 그 것이 좋았더라”라고 직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빛을 지으신 후 그 것이 좋았더라 라고 판정을 하신 것은 어둠은 죽음과 상통하고 빛은 생명과 상통하기 때문이며 또한 어두움은 무질서와 빛은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둠을 제외하고 빛에 대해서만 좋다고 판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존재 명령 없이 창조된 사물에 대하여서는 좋다는 표현이 생략되었다. 예를 들어 1절의 천지 창조와 어둠의 창조 27절의 인간 창조 등에는 “이 있었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표현이 생략되어있다.
둘째 하나님 계획이 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빛의 창조는 어둠 창조의 완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빛과 어둠을 함께 창조하시는 것이었다. 빛을 보시고 좋다고 하신 것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빛의 완전성을 판정하심이지 어둠을 배제한 빛만의 완전성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어느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서 반동적인 창조 사역을 수행한 곳은 아무 것도 없다.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하나님께서 빛 사이와 어둠 사이를 직접 나누셨다라 하고 해석합니다. 빛과 어둠의 나눔은 단지 낮과 밤의 시간적 교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동일 장소와 동일 시간에 양자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하나만 기능을 하게 하는 뜻입니다. 또한 이 기능은 서로의 작용에 의하여 고유 기능이 더욱 선명하게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5절 첫째 날의 경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여기서 낮과 밤이란 지구의 일정 면적에 빛과 어둠이 나타나는 시간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낮과 밤의 명칭 구분은 하나님께서 낮과 밤의 서로 다른 목적을 따라 엄연히 구분하셨음을 보여준다. 즉 자연 자체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다른 방편과 목적으로 사용될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이 명칭은 인간에게 주어 진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 주어진 이름이고 인간의 속된 용어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용어로 쓰여진 것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첫째 날은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을 제외한 모든 날들에서처럼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창조의 날이 여섯째 날까지 중단 없이 계속되었으며 제 6일에 진행된 창조 사역이 종결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각 날의 끝에 이 구절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첫째 날을 위시한 각 날의 길이가 모두 동일 했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본 구절이 저녁부터 첫째 날을 언급함은 일몰에서부터 하루를 계산하는 유대인의 일자계산법 때문이라고 머피는 주장한다. 레 23:32에서 안식일 계명은 일몰에서 다음 일몰까지 즉 하루를 안식일로 규정하고 있는 규정과 연결시킬 수 있다.

결과적으로 첫째 날의 창조 사역은 천지의 창조, 부가적 창조물인 흑암과 물의 창조, 빛의 창조, 빛과 어둠의 구분, 낮과 밤의 명칭 구분 등이었으며 이 위대한 첫째 날의 창조 사역은 저녁과 함께 고요히 막을 내렸다. 하나님은 지구의 자전의 첫 바퀴가 이 때 저녁을 맞게 하심으로 통상적인 태양일을 창조의 날로 확정하였다.



제2일 궁창의 창조

6절  궁창의 창조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에서 나오는 궁창이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단단한 금속성 물질로 된 하늘의 지붕을 뜻하는 것으로 높은 산을 기둥삼아 지탱하는(욥 26:11) 물을 담고 있는 다락방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하늘의 견고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궁창을 자연과학적인 사실로 묘사하지 않고 궁창에 대한 특성이나 현상을 비유나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궁창은 궁창의 광대성과 하나님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서사시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궁창의 어원은 “내뻣다, 펼치다의 의미를 가지며 확장된 것, 펼쳐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어적인 의미는 궁창이란 윗물과 아랫물 사이에 펼쳐진 것 또는 물들의 확산을 지칭한다. 이 것은 곧 아랫물과 윗물 사이를 구분하는 대기권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뒤덮인 지표 위의 물의 일부(혹은 수증기)를 위로 올리고 그 중간을 가스층의 대기권으로 만드심으로 윗물과 아랫물의 경계로 삼으셨다. 지표를 둘러 싸고 있던 물 자체의 일부가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는지 또한 물 표면의 안개 층이 증발하여 윗물이 되었는지는 결정하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궁창 위의 물은 아랫물과는 달리 수증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지구의 둘레에 텅빈 공간을 창조하심으로 천지가 혼합되지 않도록 지으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럼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윗물과 아랫물을 분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데이비슨은 하나로 있던 물을 둘로 나눔으로 두 개의 물 근원을 만들고 윗물은 비의 근원이 되게 하고 아랫물은 바다와 강과 샘(지하수)의 근원이 되게 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둘째 날 사역은 지구를 둘러싼 많은 물의 분량을 대폭 감소하여 윗물로 만드심으로 셋째 날 물이 쉽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절  궁창의 창조 사역 서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라는 궁창 창조의 재 설명은 “궁창이 있으라”는 명령이 궁창을 실존하기 위해 불충분함으로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짐과 동시에 이 후 이것이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계속적으로 발휘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서술이다.

둘째 날의 창조는 두 부분으로 분리되어 궁창과 윗물의 창조는 둘째 날 당일에 완성되었으나 아랫물에 관한 사역은 셋째 날로 넘어가 그 중반에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둘째 날의 창조는 셋째 날의 창조에 연속되는 것으로 비록 윗물이 완성되었다 할지라도 아랫물이 셋째 날에야 적당한 위치에 모아졌기 때문에 완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판정이 보류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10절에서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여 윗물과 아랫물에 관계된 최종 판정을 하게 되었다.

8절  궁창의 새로운 명칭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에서 하늘이란 높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서 온 것으로 높은 곳을 뜻하고 있다.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신 것은 지구를 둘러싼 공간인 궁창이 1절에서 창조된 하늘에 속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궁창은 공간 하늘이며 공간 하늘은 우주 하늘에 연결되는 부분으로 모두 하늘에 속한다. 그러므로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심은 하늘에 속한 우주의 일부분으로 궁창의 위치를 분명히 한 것이다. 궁창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 졌음을 밝혀 준다.(창 27:28, 출 16:4, 신 33:13)



제3일 지표와 초목의 창조

9절  육지와 바다의 창조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첫날에 창조된 빛은 둘째 날의 궁창 창조로 인하여 불순 가스가 제거되고 맑은 공기 즉 투명한 대기권이 생겨나서 공간을 통하여 자유롭게 지상을 비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 전체를 덮고 있던 아랫물은 이 빛을 땅에 직접 공급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셋째 날에 이 물들을 한 곳에 모으셔서 빛이 궁창을 통하여 땅에 직접 공급하는 방편을 만드셨다. 따라서 둘째 날의 창조는 셋째 날에 연결되었으며 그로 인해 완성되었다.

“뭍이 드러나라” 는 그 뭍이 “그 뭍이 보여질지니라”로 직역된다. 뭍이 드러나라는 명령은 이미 물 속에 있던 단단한 물이 드러나는 현상을 설명한다. 따라서 이 명령이 주어질 때 지구는 이미 물로 뒤덮인 체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본문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물이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에서 물이 모인 결과 뭍이 드러난 것이라면 침강이 먼저였을 것이고 뭍이 드러난 결과 물이 한 곳으로 모인 것이라면 지각의 용기가 먼저 일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을 나누어 생각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니 지각의 침강과 융기는 지구 표면에 나타난 동시적인 현상으로 물과 육지에 양자의 결과가 함께 미쳤을 것이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라는 명령이 먼저 언급된 것은 둘째 날에 아직 완결되지 않았던 아랫물에 대한 설명을 먼저 종결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침강과 융기가 어느 것이 먼저 인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방법과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 달려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에 감탄할 뿐이다.

10절  뭍과 물의 새로운 명칭
둘째 날에 창조된 궁창이 하늘의 일부로서 “하늘”이라고 불리듯이 물로 뒤덮인 지구 표면에 드러난 육지가 땅의 일부로써 결국 “땅”이라고 불린다.

뭍이나 땅이 모두 단수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들이 아무리 여러 개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일지라도 모두 바다 밑으로 연결된 하나의 땅 속에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뭍은 아랫물로 구성된 바다와 대조되며 땅은 윗물로 구성된 궁창과 대조되며 마른 땅을 가르친다. 뭍이 드러나므로 지구는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셋째 날의 창조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시작한 지구와 관계된 모든 창조 사역의 완성이다.

11절 식물의 창조
본문에 열거된 식물의 종류는 풀 또는 어린 싹, 채소, 과일, 나무 등으로 구분된다. 풀이라는 말은 그 어근이 습하다는 의미로 물기 있는 장소에 잘 자라는 식물을 총칭한다. 채소라는 말은 풀 보다가는 더 크고 고등한 식물류를 가르친다.
결국 풀은 하등 동물의 식용으로 채소는 고등 동물과 인간의 식용으로 창조된 것이다. 나무는 어원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안았지만 튼튼하다 강하다라는 의미에서 온 것으로 본다. 나무는 채소 보다가는 강한 식물로서 다년생 식물을 총칭한다.

“땅은 ---을 내라”라는 말에서 원어는 땅은 싹을 내라 혹은 올라오게 하라로 직역된다. 하나님은 땅의 창조가 완료되자 식물을 내도록 명하신다. 땅의 창조는 식물 창조의 준비 사역이며 선제 조건이었다. 식물의 창조가 이전 사물의 창조와 구별되는 것은 식물 자체가 존재 명령을 받지 않고 땅이 식물을 내도록 명령 받았다는 것이다. 식물 창조 사역은 간접 창조 사역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식물을 내도록 명령은 받은 사실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씨가 먼저냐, 식물이 먼저냐”하는 질문에 답을 준다. 그 것은 식물이 먼저요 씨가 나중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땅이 씨를 내도록 명 받은 것이 아니라 식물 자체를 내라고  명 받았기 때문이다.

12절 식물 창조의 성취 서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땅은 각기 종류대로 식물을 냈다. 이는 식별이 분명할 정도로 풀 채소 나무를 각기 종류대로 낸 것을 의미한다. 땅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무한한 창조의 생장력을 식물에 부여하였다.

칼빈은 식물이 해와 달이 창조되기 이 전에 지어진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이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에게 돌리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 때 만은 식물들이 태양이나 달을 이용하지 않고 창조되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동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먼저 풀과 채소를 나게 하셨다. 이는 곧 태어 날 동물과 인간의 식물이 되도록 미리 계획하신 것이었다.



제4일 광명들의 창조

14절 광명의 창조
광명이란 1절에서 창조된 천체에서 3절에 창조된 빛이 결합되는 것을 말하며 “광명이 있으라”는 말씀은 그 동안 존재하지 않던 천체 자체를 존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기 존재하던 태양과 달에 빛을 부여하여 빛을 가진 천체로 만드신 것이다. 여기서 태양은 발광체로서 지구에 빛을 발하며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반사체에 불과하지만 양자 모두가 지구에 빛을 비춘다는 공통적인 사실을 갖고 있다.
광명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은 지구에 주야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광명을 주야로 나누게 함으로 기타의 다른 사역들이 함께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광명으로 주야를 나누게 한 사역은 일자와 연한을 있게한 기본 사역이다.

15절 광명의 기본 사역
광명이 빛을 비추는 것은 그 것의 존재 목적이며 근본 기능이다. 이제 땅위에 비치는 모든 빛은 오직 광명으로 온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빛을 비추는 광명은 해와 달을 비롯하여 별들도 포함한다. 광명체가 빛을 발하게 하는 기능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하여 즉시 발휘되기 시작했다. 수억 광년 거리의 별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빛을 비추기 시작하여 그 빛은 지상에 도달하게 되었고 밤하늘을 은빛 보석으로 수놓았다.

16절 광명들의 구분과 그 구별된 사역들
여기서 언급하는 큰 광명들은 태양과 달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다 큰 광명은 태양을 가르키며 보다 작은 광명은 달을 가르킨다. 따라서 큰 광명은 낮을 주관하고 작은 광명은 밤을 주관하게 하신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의 통치권을 해와 달에게 부여한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하늘의 절반 정도의 영역에서 태양은 낮을 주관하며 그 반대의 다른 영역에서 달이 밤을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두 광명에게 이 같은 통치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며 태양과 달은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종의 위치로 다스리고 있을 뿐임을 유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낮과 밤을 다스린다는 표현은 통치의 의미보다는 지상에 빛을 공급하는 사역의 시간적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낮과 밤을 오게 하는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별들을” 이란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는 “만드시니라”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광명을 만드신 방법과 동일하게 천체로 하여금 빛을 발산하는 별이 되게 하신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얼마나 중요하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17-19절 광명의 기본 사역 재 설명        
18절은 형식상 독립된 문장을 구성하지 못함으로 17절에 종속된 성격을 갖는다.
“그 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셨으니”에서 두셨으니의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선물들을 주다는 것으로 광명이 인간을 비롯한 지사의 모든 생물에게 유익한 선물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우리를 위해 하늘 궁창에 광명을 주셨으며 지구촌에 서식하는 모든 생물의 삶에 유익한 선물로 봉사하게 만드셨다. 모든 천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생물에게 베푸신 자애로운 배려와 섭리를 계시한다.

“비취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둠 사이를 나누게 하시니라”에서 14절과 15절에 명시된 내용들이 재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기본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미 명령된 그대로 기능이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형식상의 순서보다는 하나님의 창조 성취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고 있다.

넷째 날의 창조 사역이 완전무결한 것임을 드러낸다.


제5일 어류와 조류의 창조

20절 어류 및 조류의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에서 다양한 종류의 수중 생물이 창조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물고기가 물에서 활동하듯이 새가 활동하는 범위를 보이고 있다. “땅 위 하늘 궁창면”이란 지상에서 한정된 높이의 공간을 뜻하는 것으로 새의 활동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21절 어류와 조류의 창조 서술과 그 판정
큰 물고기란 긴 몸집을 가진 수중 동물을 말하며 고래를 비롯하여 상어 물개 바다뱀등과 같이 꼬리가 긴 짐승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류란 수중 곤충에서 거구를 가진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수중 동물 전체를 가리킨다.

날개 달린 새라고 표현한 것은 새만을 국한해서 말하지 않고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에서부터 날아다니지 않는 온갖 종류의 조류를 총칭하기 위해서이다.

다섯 째 날은 물을 채우는 수중 생물과 공중을 채우는 조류가 창조되었다.

물과 궁창은 둘째 날의 창조물로 이 날에 양자를 삶의 영역으로 삼는 어류와 조류가 창조된 것은 전 3일과 후 3일 사이의 연계적 관계를 보여준다.

물과 궁창이 본래 동일 한데서 분리된 것으로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어류와 조류의 유사성은 많은 것이 밝혀졌다.

초목이 창조된 뒤에 동물들을 창조하신 것은 합리적인 순서일 뿐 아니라 저들의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먼저 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에 틀림이 없다.

22절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선포
이 날의 창조에 있어서 드러난 또 하나의 특징은 창조된 어류와 조류에게 복을 주신 일이다.

앞 절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판정이 결국 본 절의 축복으로 끝맺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의 내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으므로 성취가 확실하다.

하나님의 축복 선언은 어류와 조류가 인간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의 돌보심과 배려하심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수중생물과 공중생물의 번성과 증식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셨다.



제6일 동물과 인간의 창조

24절 동물의 창조
11절에서와 같이 다시 간접 창조의 성격이 드러난다. 땅이 생물을 내도록 명령 받음으로써 생물 창조의 중간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땅에 명령하지 않고도 말씀만으로 생물을 창조하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명령하신 이유는 땅이 모든 생물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는 의도이며 또한 땅에 생물 창조의 중요한 재료와 조건을 공급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에 의해 모든 생물은 땅과 긴밀한 관계를 일생 동안 유지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땅이 내도록 명령 받은 동물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가축이다. 가축은 네 발을 가진 포유류 동물을 가리킨다. 둘째는 기는 동물이다. 이는 다리가 없거나 혹은 있어도 짧거나 또는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동물들을 총칭한다. 이 것은 주로 곤충을 이야기 한다. 셋째는 땅의 짐승이다. 이는 가축과 구별되는 야생동물을 가리킨다. 육식성이든 초식성이든 식성과 관계없이 인간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동물들을 가리킨다.

25절 창조 사역 서술 및 하나님의 판정
동물들의 창조가 다음에 설명될 여섯째 날의 두 번째 창조물인 인간 창조와 엄격히 구별되는 것을 보여준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축복이 선포됨은 곧 그에게 예속된 동물에게도 축복이 간접적으로 선포된 것임을 의미한다.

26절 인간의 창조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한다.
첫째 장엄 복수로 취급하여 복수의 의미 대신 단수의 의미로 해석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체에게 말씀하신 독백으로 해석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의 수종하는 천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넷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 설명한다.
이상의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받아들여질 만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칭한다는 결론에 따라 ‘우리의 형상과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의미한다. 그럼 형상과 모습은 무엇을 뜻하는가?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육신상의 닮은 모습을 의미하며 후자는 윤리적인 국면의 닮은 모습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형상과 모습에 대한 언급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듯이 인간이 지상을 통치함으로써 형상과 모습이 인간의 지상 통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통치의 대상은 수중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 땅의 가축 기는 동물 그리고 온 땅 등 매우 다양하다.

27절 남자와 여자의 창조 서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성을 격정적으로 표현했다.
1장 전체에서 겨우 5회 사용되는 “창조하다”가 이 대목에서 3회나 사용되었다. 이 것은 인간 창조의 영광스러움이 이 날 대 절정에 이르렀음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본문의 남자와 여자는 원어상으로는 수컷과 암컷을 암시한다. 본 구절은 인간이 진화의 소산이 아닌 창조의 소산이며 인간의 신적 근원성을 보여준다.

28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선포
“복을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에서 동물들에게 선포되지 않았던 축복이 마침내 인간에게 선포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선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시였다. 하나님이 주신 최초의 계시는 인간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긍휼함과 자비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또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에서 “생육과 번성”은 22절에서 어류와 조류에게 주어진 축복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 것은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동물들에게도 함께 적용된다. 이 축복은 암수가 생식의 능력을 가지고 종족을 유지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29-30절 인간과 동물의 식물
29절과 30절은 한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29절은 인간의 식물에 대하여 30절은 동물의 먹이에 대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식물을 인간보다 먼저 지으신 이유가 밝혀진다. 그 것은 가장 나중에 창조될 만믈의 제왕인 인간의 생존의 대책을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이 것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임에 틀림이 없다.
칼빈은 이 부분을 “보라 내가 너희를 짖기도 전에 이미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놓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너희의 자비로운 아버지임을 믿으라. 너희가 창조되기 전에 너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듯이 너희에 대한 배려는 장래에도 이와 같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을 교훈적으로 표현했다.

31절 하나님의 최종 판정과 제6일의 경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하고 말씀하신 것은 이는 대상이 여섯째 날의 창조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6일 동안 지으신 모든 창조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판정은 6일 창조 사역에 대한 종합적인 최종 판정의 성격을 드러낸다. 6일 사역의 종합적인 판정 결과는 심히 좋았더라로 표현된다. 이 것은 만물창조의 정점인 인간 창조가 이 날에 완성됨으로 하나님께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감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창조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여섯째 날은 정관사에 의해 다른 날과 구별된다. 이 것을 직역하면 “그 여섯째 날”로 창조의 날 가운데 가장 기억할 만한 중요한 날임을 암시한다. 또한 관사없이 표기되던 모든 날들이 종결되는 날임을 표시하기도 한다. 또한 중단없이 진행되던 창조의 날이 드디어 이날에 종료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로써 지구 상에서 최초의 한 주가 경과되었고 이 것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주일을 이루는 시초가 되었다.


제7일 하나님의 안식 (창세기 2장)

1절  창조의 완료
‘천지와 만물이”에서 원어는 “그 하늘과 땅”으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그 하늘과 땅은 창 1:1에서 언급한 하늘과 땅을 지시한다.
“만물”이란 원어는 “그 것들의 모든 군대”로 직역된다. 여기서 군대란 질서 있게 배열된 창조물들을 가리킨다.

“다 이루니라”에서 원어의 뜻은 완성하다. 마치다. 멈추다 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동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이 단어가 수동의 의미를 사용하는 것은 창 1:1 에서 “창조하시니라”의 능동동사와 대조를 이루기 위한 것이며

또한 “하늘과 땅”을 주어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2절 하나님의 안식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란 일곱째 날에 중지 하시고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중지란 미완성된 상태에서의 중지 상태를 표시한다기 보다 제 7일 안식 후의 계속적인 창조 사역을 예시하기 위한 잠정적 중지 상태를 표현한다.

“그 지으시던 일이”의 원어 번역은 “만드신 바 그의 일”로 직역할 수 있다. 이 말은 6일 간의 창조 사역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중지 하신 것이 아니라 6일 창조 사역만 중지하신 것이다. 이 것은 일곱째 날에는 이미 창조 사역이 끝난 뒤임을 암시한다.

“안식하시니라”에서 원어의 뜻은 고요히 앉다. 휴식하다를 의미한다. 이 것은 신인동형(神人同形)론 표현으로 휴식이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는 단지 상징적 의미의 휴식일 뿐 창조 이외의 다른 방향에서의 계속적인 활동과는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곧 6일 창조에서만 안식을 의미할 뿐 하나님이 모든 사역을 중지하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제 7일 안식은 출 20:11의 인간의 안식을 유도하기 위한 예표적 안식이며 6일 창조 행위에 국한된 중단을 의미함을 유의해야 한다. 창조의 정점인 인간에게 제 6일의 노동 후 제 7일에는 안식한다는 사실을 표본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피조 세계의 모든 것들이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안식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3절 일곱째 날을 복 주심
“일곱째 날을 복주사” 여기서 하나님이 비생명체인 날에 목을 주신 것은 특이한 일이다. 창 1장에서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동물과 인간에게 복을 주신 경우는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를 무생물에 사용하신 것은 전무하다. 이 것의 특별한 이유를 찾는다면 첫째, 앞으로 축복이 선포된 이 날을 지키는 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임을 예표시키기 위함이고 둘쩨, 하나님의 축복의 영역은 생물인 동물과 인간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피조된 세계의 모든 영역 심지어 시간이나 날 또는 무생물까지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들어 내신”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란 어구를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삽입했다. 그 이유는 창 1:1 로 관심을 돌이키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것은 창세기의 첫 번째 단락 곧 창조의 기사가 여기서 끝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창조 기사는 6일 창조 사역과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이때부터 인간에게 시간 운용의 표본이 되었다. 출 20: 11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


종(終)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의 내용을 마지막 정리하면서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문자적 창조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문자적 창조론은 신학적 편견을 개입시키지 않고 신화적 의미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상징적 의미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문자적 의미로 사실적 의미로 역사적 의미로 해석하는 창조 이론이다.
이 이론의 타당성을 이야기 하기 전에 이치에 맞지 않은 2개의 기존 이론을 설명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첫째는 1절 제목설이다.

창 1:1 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를 6일 창조의 직접적인 서술로 취급하지 않고

3절부터 시작되는 6일 창조 서술의 제목 또는 서론으로 간주하는 이론을 말한다.
즉 3절부터 첫째 날의 창조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며 1절과 2절은 단지 제목이나 배경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둘째는 중조설이다.

우주가 2차에 걸쳐서 창조되었다는 이론으로 “재창조설”이라고도 한다.

중조설에 의하면 1절에서 온 우주가 완 전히 창조되었으나 천사가 타락하는 이변적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구를 심판하신 결과 어둠과 물로 뒤덮인 혼돈과 공허가 생겼다는 것이다. 2절이 바로 심판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1절에서 창조된 원창조의 시기와 3절부터 시작되는 6일 창조의 시기 사이에 무궁한 세월이 개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제목설과 중조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내용은 6일 창조가 3절부터 시작된다는 것과 첫째 날의 창조물이 빛이라는 점이다.

또한 각기 다른 내용은 땅의 창조를 제목설은 셋째 날에 두지만 중조설은 6일 창조 이전에 둔다는 점이다.

이 같은 두 이론에 의해 오늘날 기독교계는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6일 창조를 시작했다는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창조물의 일부가 제외 되었다는 점과 본문 해석 상의 난점들이 있어 타당성을 상실한다.

이상 창 1:1-2:3 의 어원 고찰에서 살펴 본 문자적 창조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날에는 천지와 빛이 창조되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이 창조되었다.
셋째 날에는 지표와 초목이 창조되었다.
넷째 날에는 1절에서 창조된 천체 곧 해와 달과 별에 3절에서 창조된 빛이 주입되거나 반사됨으로 발광체와 반사체가 창조되었다.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창조된 궁창을 채우는 조류와 물을 채우는 어류등이 창조되었다.
여섯째 날에는 동물과 남자와 여자가 순서대로 창조되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창조를 완료하시고 안식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6일 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는 쉬심으로 지구 역사에 최초의 한 주간이 경과되고

이 후에 주간으로 연속되는 시간의 수레 바퀴가 회전을 시작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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