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의 저작권에 대하여


1. 서론


2007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에서

김지연의 “신명기 간음죄 규정(신22:22)과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삼하11-12장) 비교연구”의 논문을 최우수 논문에 선정했다고 한다.1)

  신명기라는 이름은 !yrI%b;D]h' hL,ae(이것들은 말씀이라)고 하고, 히브리어 성경도 이 제목을 취하고 있다.2)3)4)



2.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은 38년간 바란 광야와 가데스바네아 근처를 유랑하면서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출애굽한 구세대는 모두 죽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 진군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둘러가는 우회로를 따라 요단 동편 모압 평야에 진을 치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모세가 고별설교를 하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백성들을 미리 준비시켜야 했다. 따라서 모세의 설교는 언약갱신이었다.5)6)

  신명기는 시내산 및 광야의 경험과 가나안 정복을 서로 연결시켜주며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옮겨진 리더십의 변화를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신명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효과적으로 해설해주는 오경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7)8)

  신명기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세 말기, 곧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일어난 것들이다.9)10)



3. 신명기의 모세 저작권


(1) 신명기에 대한 고등비평

18세기 계몽주의의 가운데서 태어난 합리주의 철학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모든 기독교회가 오경이 주전15세기에 살았던 역사적 모세에 의해 써졌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연신론이 역사비평주의와 초자연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눈에 띄었다. 스피노자는 에스라가 오경을 마지막으로 만든 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 말이 생전에는 무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라프, 퀴넨, 벨하우젠에 의해 문서설을 결정짓는데 기여를 했다.11)


(가) 오경문서설의 초기 진행

오경문서설은 모세로부터 5세기가 지난 후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 형성된 것이라는 문서설은 프랑스 의사로서 창세기를 문학적으로 분석하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진 아스트룩(Jean Astruc)으로부터이다.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이 나타나고, 2장에는 여호와로 언급되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1780-1783년에 아이호른(Johann Gottfried Eichhorn))이 구약서론에서 창세기 전체와 출애굽기 첫 두 장에서 여호와문서(J)와 엘로힘문서(E)로 나누었다. 이것이 후에는 오경이 모세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J-E의 구분이 오경전체에 미치게 되었다.12)

  1806년에 드 베테(Willhelm M.L. De Wette))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신명기 연구를 했다. 그는 오경 중 그 어느 것도 다윗이전 시대의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명기는 열왕기하 22장에 의해 요시야 종교개혁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표식이 있다고 했다. 즉 예배처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려고 한 것인데 모든 왕국의 부분들을 더 가깝게 정치적으로 뭉쳐서 경건한 자들의 모든 헌금을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금고에 쏟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부의 캠패인을 위한 조작이라고 하며, 그 책의 연대를 주전621년(요시야종교개혁 연대) 혹은 바로 직전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D문서가 발생했다. 따라서 오경의 자료가 E(가장 초기의 것) J, 그리고 7세기 문서 D라고 했다.13)


  1853년 후펠트(Hermann Hupfeld)의 작품 “창세기의 자료”가 나왔는데 ‘문서설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했는데 그는 E문서에서 E2를 발견했는데, J와 너무 흡사하다고 했다. 후펠트는 E문서의 나머지 부분(창세기 20장에서 시작됨)을 뽑아내어 가장 초기의 문설 판정을 한 후 “기본문서”라고 명명하고 E1으로 표기했다. 이 E1문서는 후대의 비평가들이 P(제사문서)라고 명명했다. 후펠트의 문서들의 순서는 PEJD였다.14)


(나) 문서설의 네 문서 요약

① J는 남조 유다에서 어느 익명의 저자에 의해 주전 850년경에 써졌다.

  ② E는 이스라엘의 북조에서 무명의 저자에 의해 주전 750년에 써졌다. 또한 주전650년에 무명의 편집자가 J와 E를 결합하여 J-E를 만들었다.

  ③ D는 요시야 왕이 주전 621년에 부흥을 일으킬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지도를 따라 공식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④ P는 에스겔의 성결법전(레17-26장, 주전 약570년. H로 알려져 있음)으로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서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이 되었고, 에스라는 가장 후대의 제사문서를 율법에 첨가시켰다.15)


(다) 문서설의 변증법적16) 발전개요17)

① 아스트룩은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자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J와 E로 구분했고, 이 아이디어가 아이히호른에 의해 체계화됨. ② 드 베테는 D가 요시야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했다. ③ 후펠트는 E를 초기의 E1(혹은 P)과 후대의 E2(J를 더 닮은 것임)로 구분하여 문서설의 순서를 PEJD로 만듬. ④ 그라프는 P의 율법적 부분이 가장 후대의 것으로서 포로시대의 것이라고 함. 역사적 부분은 좀 더 이전의 것으로 봄.  P1EJD2의 순서로. ⑤ 퀴넨은 P의 역사적 부분은 율법적 부분만큼이나 후대의 것임을 느꼈다. PEJD순서. ⑥ 벨하우젠은 문서설을 완전히 다듬어 JEPD를 체계적이고 진화론적인 형태로 발전시킴.

  이러한 가설을 프린스톤의 그린(William Henry Green)이 철두철미하게 반박했다.


(라) 문서설에 대한 비판

문서설 특히 벨하우젠의 가설은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부인되었다.

  

1) 하나님 이름으로 문서의 기준을 삼을 수 없다.

1893년 클로스터만(August Klostermann)은 맛소라 히브리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승하는데 있어서 무오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문서의 자료를 찾아낼 수 없다고 했다. 1909년 영국에서 위너(Harold M. Wiener) 유대인 변호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료구분을 한다는 것은 비실제적이고 무모하다고 했다. 1908년에 어드만(B.D. Eerdmans/퀴네의 후계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리된 문서들을 찾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1930년 노르웨이의 모빙켈(Sigmund Mowinckel)은 J-E의 문서설을 공격했다. 올브라잇(W. F. Albright)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18)


2) J·E·P가 분리된 문서라는 것에 대한 반박

헤르만 궁켈(Herman G)은 휴고 그레스만(Hugo Gressmann)을 양식비평을 원조로 삼고, 양식비평을 했는데, 옛 시대의 문학사를 정확하게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고, 오경문학에 대한 실제적 접근은 문서설주의자들의 분석 비평적 방법이 아니라 종합적 창의적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궁켈이 벤하우젠 학파의 인위적인 문서분석을 분쇄는 하였으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시대였다고 하는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능력을 갖춘 백성임을 도외시한 것이다.19)


3) J가 E보다 앞섰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1920년 캐넷(R. F. Kennett)은『신명기와 십계명』이란 책에서 J가 아니라 E가 가장 최초의 기록된 문서였다고 말하였다.20)

  

4) E가 J 후대의 문서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파울 폴츠(Paul Volz)와 루돌프(Wilhem Rudolph)는

1933년『해설자로서의 엘로히스트: 오경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의 공저에서 E의 단락들을 세심히 재검토한 후 독립된 그리고 일관성 있는 E문서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모빙켈(Mowinckel)도 E란 그에게 있어서 J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라 했다. 페더슨도 J와 E를 분리시킬 수 없다 했다.21)


5) 신명기가 요시야 시대라는 가설에 대한 반박

20세기 비평가들은 텍스트 자체의 자료와 그 당시를 주름잡았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22)


6) 초기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23)

1919년 케겔(Martin Kegel)은『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신명기연대를 621년으로 잡은 것은 건전하지 않다고 했다.

  1924년 에딘버러의 웰치(Adam C. Welch)는 주전 7세기에 단일 성소에 대한 율법을 공표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된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브링커(R. Brinker)는 모세의 신명기 제정이 후대에 여러지역 성소에서 보충되었다고 했다.

폰 라드(Gerhard von Rad)는 신명기가 지방 레위인들 가운데서 발생했으며, 주전701년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슨(Edward Robertson)은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때 신명기와 언약의 책(출20-23장)을 포함한 핵심적 율법들을 소유한 조직된 공동체였음을 주장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예루살렘의 카우프만(Yehezkel Kaufmann)은 P가 D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2) 신명기적 역사 가설

신명기에 대한 비평은 연대기와 관련되어 있다. 신명기 연대를 어느 시대의 문서로 보느냐에 따라 신학적인 차이가 생긴다.24)

  1943년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가나안 정복에서 바벨론 포로에 이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 권의 책(신명기적; the Deuteronomistic History)이라고 주장했다. 신명기-열왕기가 여러 권의 책들이 하나로 엮어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전체가 하나의 독립된 책이라고 주장했다.25)

  신명기적 역사 가설 자들은 하나님 백성의 과거를 예언 정신에 비추어 풀이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가시는 길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하나님 백성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죄를 들추어내고 그로써 신학적으로 책임성 있는 과거극복의 길을 제시한다.26)27)


(3) 복음주의적 견해

복음주의자들은 신명기의 핵심주제가 중앙 성소 집중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폰 라드는 신명기에서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장소라는 것은 주관적이며 본문의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페더슨도 만약 중앙 성소 예배가 신명기의 주제라면 당시 종교관습에서 ‘바못’과 ‘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신명기 12장에서 ‘바못’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베르다는 12:13의 ‘택하실 그 곳’이라는 의미를 각 족속에서 한 장소‘라고 해석하여 열두 장소 이상의 예배장소로 이해하였고, 폴은 예루살렘과 지역적인 차원의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중앙성소를 반대하였다. 클라인은 고대근동의 주요 왕들이 체결한 조약을 재발견함으로써 신명기의 구조적 통일성과 통합성을 강조하였고, 키첸은 신명기의 구조가 10세기 이전의 히위족 계약법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28)


  카일과 델리취는 신명기는 십계명과 그것이 나타내는 묵시 중에서 가장 정수가 되는 내용을 권고하는 설명이며 강요이고, 교회적이며, 사법, 정치, 사회조직적인 더 나은 발전이 나타나 있어서 가나안 땅에 백성들의 복지와 생활을 위한 영원한 기초라고 했다.29)

  칼빈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언약이 선포된 지 약 40년 후에 그것을 다시 새롭게 하셨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들에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모세가 선포한 말씀이라 했다.30)



4. 성경의 바른 해석


성경의 저자와 저자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글이 써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31)32)33)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2세들에게 말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익명의 저자가 주전 5세기 안팎에 썼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성경을 세분하여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숲은 바라보지 못하고 한 개의 나무만을 찾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들이 성경을 심히 왜곡하는 것이다(벧후3:16).



5. 결 론


신명기는 모세오경에 속하는 책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유혹에 맞서기 위해 신명기의 구절을 인용하였다(마4:1-11). 그런데 이것을 부인하게 되면, 즉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하면 성경을 심히 훼손하게 된다. 주전15세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주전 5세기에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성경을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분명히 모세가 이미 한 번 실패한 사람들이 거의 죽고,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 전에 이미 선포했던(출20장-31장 등) 것을 다시 선포한 것이다. 따라서 중앙 성소 집중과 헌금의 집중을 위한 것과 바벨론에서 실패한 결과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기에 익명의 어떤 저자가 신명기를 썼다는 것은 너무나 편협한 생각과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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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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