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천국은 존재하는가?


정성민 교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

사람만 만나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박 집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교회에 가고 있는데 택시 기사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박 집사는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니까 한번 믿어보시라고 그에게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택시 운전사는 점점 쌀쌀맞게 말하더니 마침내는 적극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라고 박 집사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택시 아저씨는 아직 천국에 관심이 없다며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박 집사 역시 조금씩 화가 났지요. 그래서 교회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그래요. 나는 천국에 갈 거니까, 당신은 지옥에나 가세요!” 택시 운전사는 “지옥에나 가라”는 말에 잔뜩 화가 나서 운전석에서 내려 교회로 뛰어가는 박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런 기가 막혀서야. 세상에 저런 나쁜 사람을 봤나!”라고 말하며 분노하였습니다.

만일 택시 운전기사가 정말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 관심도 없고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다면 “지옥에나 가라”는 말에 그토록 화를 낼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에겐 본능적으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이슈(issue)는 바로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과 과 함께 진지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혹은 본인의 죽음 직전의 상꼬【?인간은 질문하게 됩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은 이후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종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다양하게 대답합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죽음을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귀족이나 왕이 죽으면 미라를 만들어서 거대한 피라미드에 묻었습니다. 또한 무덤 안에 저승을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음식과 귀중품들을 함께 넣고 저승 세계의 왕인 오리시스의 조각이나 그림으로 벽을 장식했습니다. 동양의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사와 같은 특별한 예식을 통해 자신들의 조상을 추모하고 기립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을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도 내세라는 말을 113번이나 사용하며 환생과 심판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이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영혼은 불멸인가?

우리는 ‘죽은 후에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과연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멸’과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한다면 물리적인 죽음과 육체의 부패를 극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새로운 세계에서 계속 살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즉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천상에서 영혼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몸을 가지고 살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는 영생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은 윤회사상으로 나타납니다. 윤회사상은 사람이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은 죽지 않고 다른 몸으로 옮겨서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 사람이 최종적인 자유를 가질 때까지 윤회가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적 영생관을 살펴봅시다. 기독교적 영생관은 영혼과 육의 부활을 동시에 주장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매우 비슷하여 성도들이 혼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하여 육체의 구원은 없고 오직 영혼의 구원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성도가 죽었다가 육체를 지닌 피조물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상에서 지녔던 동일한 육체와 동일한 영혼이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1-54)

기독교적 영생관의 특징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 이후에 인격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혼이 바로 인격적 삶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1) 그때 그 사람

첫 번째,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 인격적인 삶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뜻은 죽음 이후 세계에 존재하는 각 사람들은 죽기 이전의 자신과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각자는 자기 동일성의 의식을 가지고 과거의 삶에 대해 올바른 기억을 가집니다. 즉 기독교적 영생관은 사후의 개인의 인격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사후의 인격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사후의 인격적인 삶을 보장하는 강력한 조정자가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지요. 만약에 사후의 삶이 불교처럼 자연스럽게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사후에도 개별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절대자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적인 사후의 삶은 존재하기가 어렵습니다.

2) 부활체의 신분증, 영혼

두 번째로, 기독교적 영생관의 특징은 영혼에 대한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육체와 영혼의 동시적 부활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죽기 이전의 자신과 부활 이후의 자신이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따라서 실제적인 부활은 영혼에 대한 믿음의 토대 위에 일어납니다.

영혼은 우리의 신체 안에 존재하는 어떤 비물질적인 자아입니다. 자아로서의 영혼은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기억을 하고, 생각을 하며, 감정을 표현합니다. 영혼의 이러한 기능들은 육체와 연결되어 작동되지만, 실제로는 육체와 별개로 발생합니다. 죽음으로 인해 신체가 부패되면, 물질적인 신체는 비물질적인 영혼과 분리되게 됩니다. 즉 각 개인의 신체적인 죽음이 영혼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요. 개인의 영혼은 육체적 죽음에 의존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기독교적 영생관은 죽음 이후에 영혼과 몸이 동시에 부활하여 인격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영혼이 정말 존재할까요?

영혼은 정말로 실재하는가?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은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유기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영혼은 두뇌과정이나 두뇌상태 또는 중추 신경계 내의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음은 단지 두뇌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마음과 몸, 영혼과 육체를 동일하게 보는 ‘심신동일론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물질만을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경험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심신동일론자’들을 반박합니다. 죽어서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은 우리에게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들의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서로간의 많은 공통점들이 발견되는데 그들의 공통된 경험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기가 누운 상태에서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죽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몸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자기 몸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엔 새로운 몸을 입게 되었는데 이 몸은 이전의 물리적인 신체와 비슷한 형태의 영적인 몸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영적인 몸은 자신의 본래적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환경과는 상호작용도 접촉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어서 그들은 터널과 같은 어두운 곳을 통과해서 전혀 색다른 영역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텔레파시적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물리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천국이라는 곳에 도착한 이들은 밝게 빛나는 어떤 특별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 분은 사랑과 동정심이 넘쳤고 그들로 하여금 과거를 기억해내고 회개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기독교의 성도들은 이 특별한 분을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들은 아주 평화롭고 행복한 경험을 계속해서 즐기면서 머무르고 싶었지만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깨어납니다.

우리는 사후의 삶을 잠시 동안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들은 단지 환각적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후에 갖게 되는 영적인 몸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들의 간증에 의하면, 영적인 몸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물체를 통과할 수 있으며, 무게를 갖고 있지 않아 시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지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물리적인 환경을 금방 인지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영혼에 관한 문제를 쉽게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는 목회자로서 우리의 신체 안에 영혼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요즈음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는 사실이 화제입니다. 필자도 동아일보에서 “영혼의 무게 21g?"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모든 죽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죽자마자 죽기 전의 몸무게에서 21g 이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왜 모든 사람들의 몸무게는 죽자마자 21g 이 감소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21g은 영혼의 무게라고 추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무신론자들은 감소된 21g은 소변과 같은 수분이 증발한 것이라고 일축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존재에 대해 그리 쉽게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의 부활도 가능케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12-22)

그렇다면 성도가 부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거짓이 아닌 참이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은 사형을 집행한 후에 반드시 공문서로 그 사형집행결과를 로마황제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면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낸 공문서기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빌라도가 로마황제에게 보낸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였다. 나는 예수의 죽음과 무관하다.” 빌라도의 보고서는 로마의 총독이 황제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공문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했고, 베드로가 또한 확인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12제자, 마가 다락방 120문도, 500여명의 성도들이 일시에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났기에 예수를 부인할 수 없었으며, 생명을 내어 놓고 죽는 순간까지 예수를 전했습니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으면서도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자랑스럽게 전했습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육체와 영혼의 부활 역시 실제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철학적인 증명은 가능한가?

역사적으로 사후의 영원세계에 대한 세 가지 철학적인 논증들이 시도되었습니다. 사후의 삶에 대한 첫 번째 논증은 아퀴나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한 삶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인간들의 행복한 삶이 성취되기 위해서 영원한 사후의 세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논증은 두 가지 전제 위에서 가능해집니다. 먼저, 행복의 개념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두 번째 전제는 우리가 이 땅에서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면 우리는 헛되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후의 세계에 대한 두 번째 논증은 칸트에 의해 주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최고의 선은 도덕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그것을 완전하게 이루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덕법칙에 따라 사는 의무를 부여하셨다면, 인간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시점이 죽은 후로 연장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한 사후의 삶은 필히 요청됩니다. 그러나 칸트가 제시한 논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말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의무를 부여하셨는가에 대한 진실성의 문제입니다.

세 번째 논증은 플라톤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불멸설을 통해 사후의 삶을 주장했습니다. 플라톤은 영혼은 단순하여 분리되지 않고 또한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불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영혼은 죽음이라는 신체의 물리적인 분해로 인하여 죽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사후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 거할 장소를 예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우리가 사후에 거할 장소를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천국을 예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예수를 믿는 자들은 천국의 시민권자들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당한 것을 우리 주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

천국 스케치

우리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활의 날에 우리의 온 몸과 영혼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유물론자들에게는 사후의 삶이 불가능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모든 상급을 받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살면서 고난당하며 흘렸던 그 모든 눈물들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계 21:3-4)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 곳에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가 있어 성도들이 그 실과를 따먹으면서 영생할 것입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1-5)

천국은 결코 심심한 곳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성도들은 무엇을 할까요? 그들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어린양 예수의 공로를 찬양할 것입니다. 아마도 찬양이 천국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 (요 7: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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