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이야기

 

노용찬(서호교회 담임목사)


 

태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첫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이다. 그리고 그 말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이 선언은 모든 과학적인 설명을 뛰어넘는다. 성경은 과학책은 아니지만, 과학을 뛰어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과학이라는 언어로만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신앙의 언어로 이해하려고 할 때에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창세기에서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라고 할 때의 의미는 이 세상이 생긴 바로 그 때를 의미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의 의미와는 다르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헬라어로 ‘아르케’로 표기되어 있는데, ‘시작’, ‘기원’, ‘처음’의 뜻을 갖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창세기의 ‘태초’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창조되는 그 시점을 뜻한다.


  “천지(天地, 하늘과 땅)”라는 말은 히브리인들에게 “우주”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에 그 말은 단순히 이 지구만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전체, 즉 존재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어졌다는 엄숙한 선언이며, 나아가 우주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엘로힘”이다. ‘엘’은 강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한 그 위격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하여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요1:3, 엡 3:9, 골 1:16, 히1:2).

  또한 복수표기는 탁월성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표현법이기도 하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하여 하나님 야훼를 부르는 대신에 ‘엘로힘’과 같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1)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에 ‘창조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는 ‘바라’(bara)이다.2)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재료를 가지고 ‘만든다’는 용어와 구별하여 사용되었다. 즉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그 의미상으로 볼 때 만들 뿐 아니라 만든 것을 보존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으신 것을 과거의 것으로 사라져 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도 보존하시며, 미래에 있어서 완성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증언하고 있다(시33:9). 이사야 선지자는 우주를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만드셨다고 묘사하고 있다(사45:11-12). 히브리서 11장 3절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천지창조는 6일 동안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1일”이 정확히 얼마만큼의 시간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3) 하지만 성경 말씀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6일 동안의 창조 순서를 보면, 빛(포스 phos, 빛과 어둠, 낮과 밤) ⇒ 궁창(하늘, 아래 궁창, 위 궁창으로 나뉨) ⇒ 땅과 바다와 식물 ⇒ 해와 달과 별(낮: 큰 광명체가 주관, 밤: 작은 광명체가 주관, 계절, 날, 해) ⇒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 땅에 기는 동물과 사람의 순서로 지으셨다.


<창조의 순서와 내용>

 

성경구절

창조내용

자세한 설명

결과

첫째날

3, 4절

빛이 있으라!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있게 됨

보시기에 좋았더라

둘째날

6 - 8절

하늘과 물

아랫물과 윗물이 나뉨

 

셋째날

9 - 13절

땅과 바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됨, 땅에는 씨맺는 식물, 씨맺는 열매 맺는 나무를 종류대로 지으심

보시기에 좋았더라

넷째날

14 - 19절

별, 달, 해

낮과 밤을 다스리고 계절과 년수가 있게 됨

보시기에 좋았더라

다섯째날

20 - 23절

물고기와 새

물과 하늘을 채움, 종류대로 지으심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섯째날

24 - 30절

동물, 사람

동물-땅을 채움, 종류대로 지으심

사람-특별한 사명을 받음(땅을 다스림, 하나님과 교제함)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일곱째날

31절

안식하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창조 사실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했는가?’가 아니라 ‘왜 창조하셨는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그러한 일을 하셨는가 하는 “목적”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지, “어떻게”라는 “방법”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따라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영원히 존재하는 계획에 따라 세상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것이다(행15:18, 엡1:11).


  창조의 처음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묘사하고 있다. 처음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은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있듯이 세상을 품고 돌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궁창’(히브리어로 ‘라키아’)은 히브리어로 ‘퍼짐’(expansion)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푸른 하늘, 창공, 창천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기도 한다. 히브리인들은 세계가 하늘과 땅과 바다 세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궁창은 마치 사발이 엎어진 것과 같이 큰 보자기가 휘장처럼 덮어져 있고 그 위에 해, 달, 별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람4)을 지으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 중에 제일 훌륭한 존재는 사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5)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흙(아파르)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2:7)고 하셨다. ‘생령’이란 ‘살아 있는 인간’(a living soul)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하게 겉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면, 도덕적인 면, 의지적인 면을 지닌, 자유의지를 가진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 정치적 형상, 자연적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의미이다.6)


  하나님의 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은 사람은 영원한 존재로서 이해력과 의지의 자유를 지니고 있는 영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정치적 형상이라는 것은 사람은 다른 피조물을 관리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의미이다.

  도덕적 형상이라는 것은 사람은 사랑, 정의, 자비, 진리, 순결하며 또한 의롭고 참으로 거룩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또한, 사람은 홀로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시어 삶의 동반자인 하와(여자)를 지어 주셨다. 과거에는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다 하여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의 몸에서 나왔다는 말은 둘이 한 몸, 즉 삶의 동반자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갈빗대는 ‘내 마음의 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여자와 남자는 그 본질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고린도전서 11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다.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하는 청지기의 의무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서로 사랑하며,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창세기를 통해서 보면 사람은 세 가지 면에서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요, 셋째는 자연과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가장 기초가 되는 윤리의 근거가 된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와의 관계가 잘못될 때에 인류 역사는 혼란에 빠지곤 하였다. 예를 들어 서구인들은 한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는 성경 구절을 잘못 이해하여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한 잘못된 세계관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역사를 낳았으며, 그로 인한 역사의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안식일(安息日) 제정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3)


  인류전반에 대하여 정해진 휴식을 위한 거룩한 날을 말한다. 히브리어 명사 ‘샤바트’(shabbath)는 일을 쉰다는 동사(shabath)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엿새 동안에 마치고서 7일째에 안식하시고, 이 날을 축복하여 성별하신데서 비롯되었다(창 2:1-3).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면서 안식일을 성수할 것이 다른 아홉 가지 계명과 함께 제4계명으로 주어졌다(출 20:8-11,31:18,신 9:10). 그 후 이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성수되고, 그 날을 휴식의 날로서 뿐 아니라 하나님에의 예배를 위한 성회로서 지켜야 할 것으로 명령되었다(레 23:3). 모세는 안식일을 강조하여 백성에게 말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의해 애굽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잊지 말고 성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신 5:12-15).

  이러한 안식일 규정을 종합하면 안식일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거룩한 날이다(창 2:1-3,출 20:11).

   2. 육체적 휴식의 날이고, 피로 회복을 위한 날이다(출 23:12).

   3. 하나님에 의해 축복되고, 성별된 날이다(창 2:2, 출 16:23, 31:15 등).

   4. 안식일을 지킨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다(창 2:2).

   5.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거룩한 날이다(레 23:3, 왕하 4:23, 암 8:5).

   6. 안식일 성수의 여부는 이스라엘 민족과 타민족을 구별하는 기준의 하나이다(출 31:13).

   7.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속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레 23:26-32).

  출애굽 당시에는 성막 및 산당에서 안식일 예배가 지켜졌는데, 그때 흠 없는 수양 둘을 드리고(민28:9), 구운 떡 열둘을 드리는 일(레 24:5-8) 등이 행해졌다. 안식일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일하는 것과 불 피우는 일이 금지되었다(출 35:3).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안식일 성수에 대해 강조하였고(사 56:2-6,렘 17:21-27), 시편 기자도 ‘안식일의 찬송시’로서 주의 행사를 찬송하고 있다(시 92편). 에스겔은 안식일이 크게 더럽혀져 있음을 지적한 적이 있고(겔 20:12,13), 느헤미야는 그 시대에 상인들이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매매한 것을 강하게 비난하는 동시에 그 죄를 책망했다(느 10:31,13:15-22).

  이렇듯 각 시대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성별하여 지키고, 이를 위해 싸워 왔다. 포로 후, 안식일은 할례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중요 사항으로 인식되어 있었다(느 13:15-22).


  예수님 당시에는 안식일의 정신이 망각되고, 형식화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일에도 율법을 구실로 하여, 때로는 그 때문에 오히려 자선이라든가 필요한 행위마저 금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안식일에 대해서도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는 그 위선을 지적하시고,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마 12:1-14, 막 2:27-28, 눅 13:15-17).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침대(자리)를 옮긴다든가(요 5:10), 병자를 고친다든가(막 3:2,눅 13:14), 밀 이삭을 딴다든가(마 12:1-2), ‘안식일에 정해진 거리’ 이상을 걷는다든가(행 1:12참조)하는 것을 금지했다.


  예수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눅 4:16,마 24:20), 안식일의 근본적인 정신과 그것을 지키는 것에 관한 편협한 율법주의를 부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명령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다(막 3:4,눅 13:15-16). 즉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막 2:27) 말씀하셨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제7일, 즉 토요일에 행해졌다(마 12:9,10,행 13:14). 이것이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회에서는, 1주의 첫날(일요일)로 바뀌었다(행 20:7). 그것은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구세주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한주간의 첫날이었던 데서 한 주간의 첫날, 즉 주일로 정해진 것이다(마 12:8, 막 8:31, 16:9, 요 20:19, 행 20:7, 고전 16:2, 계 1:10 주의 날).

  바울은, 고린도 및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권면하는 말 중에서, 매주일 첫날에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전 16:1,2). 장차 다가올 미래에 있어서 안식일(영원한 안식의 날)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회복될 것이다(사 66:23, 겔 44:24, 45:17, 46:1, 3, 4, 12).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히 4:9, 계 20장, 21장)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때에 정해진 제도이면서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다(히 4:9).


먹을거리를 주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29절)고 하셨다.

  또한 동물들에게는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30절)고 하셨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시고 생물들에게는 먹고 살아가도록 먹을거리를 허락하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혼의 제정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4,25).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부부로 함께 살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 여기서 ‘돕는다’는 단어의 의미는 넉넉한 데서 충분히 남을 돕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히브리어 ‘에쩨르’라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로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배필’이란 서로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말씀 안에서는 남녀의 차별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는 부부로,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게 함으로써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창1:28).


에덴7) 동산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이라고 불리는 동산에 살고 있었다. 에덴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성경에는 에덴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강의 이름이 나온다. 그 강의 이름은 “비손”과 “기혼”과 “힛데겔”과 “유프라테스”이다. 힛데겔은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을 흐르는 “티그리스 강”으로 알려져 있다. 비손과 기혼이 어느 곳을 흐르는 강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에덴의 위치는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어디쯤이라는 것이다.


금기사항

에덴동산에 있던 처음 사람에게는 한 가지 금기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창2:16,17)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한 것이었다.8)

  사람에게 주어진 금기사항은 오직 그것 한 가지였다. 그러나 “먹지 말라”는 단순한 금기사항을 지키지 않을 때 오는 대가는 죽음이었다.


창조역사의 결론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는 “좋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아름답고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야말로 그곳은 낙원이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불행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단 한 가지, 매우 단순한 금기사항을 어김으로 시작되었다.


<요약>

1.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2. 우리 인간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

3. 인간은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가)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관계적 존재이다. 이 관계는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의 근본이 된다.

  나)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을 말한다. 자연적 형상이란 이해력과 의지의 자유를 지닌 영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다. 정치적 형상이란 다른 피조물을 관리하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도덕적 형상이란 사랑, 정의, 자비, 진리, 순결하며 의롭고 참으로 거룩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다)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존재이다.

  라)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4. 하나님께서 쉼(안식)이 필요하신 것처럼 인간에게도 쉼(안식)이 필요하다. 쉼(안식)을 통해 인간은 영성(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다.


  5. 결혼의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결혼은 다음과 같은 원리가 있다. ‘떠남’(leaving)의 원리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의 곁을 떠나”(창2:24). 연합의 원리 - “그 아내와 연합하여”(창2:24). 한몸됨의 원리 -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친밀성의 원리 - “두 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창2:25).

  결혼은 또한 신앙적, 사회적, 개인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창조신앙에 따른 결혼관은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결혼) 서로 연합(사랑)하여 둘이 한몸(성적관계)되어 가는 것이다. 이 세 요소는 마치 삼각형의 세 각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만일 이 셋 중 하나가 결핍된다면 결혼은 완전할 수 없다(Walter Trobisch).


1) 성경에는 하나님을 일컫는 말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히브리어로 표기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엘 엘룐’(창14:18-20) 지극히 높으신 자. ‘샤팟’(창18:25) 재판자. ‘엘 올람’(창21:33)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레’(창22:14)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창33:20)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엘 샤다이’(창49:25)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닛시’(출17:15) 주는 나의 깃발. ‘여호와 샬롬’(삿6:24) 주님은 평화이시다. ‘엘 브릿’(삿9:46)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츠바옷’(삼상17:45) 만군의 하나님. ‘아도나이’(시2:4) 주님 혹은 주인. ‘케도시 이스라엘’(사1:4)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 치드케누’(렘23:6) 우리의 의로운 주. ‘여호와 삼마’(겔48:35) 주는 거기에 계신다. 아람어로 표기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아티끄 요밈’(단7:9)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 ‘일라야’(단7:18) 지극히 높으신 자. 또한 헬라어로 표기된 것들도 있다. ‘로고스’(요1:1) 말씀. ‘소테르’(요4:42) 구주. ‘데오스 호 파테르’(엡3:15) 하나님 아버지. ‘퀴리오스’(빌2:9-11) 주님. ‘알파 카이 오메가’(계1:8) 처음과 나중 등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관련된 관용어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 준다.


2) 창세기 1:1의 본문은 “창조하다”(bara)와 “만들다”(asah)를 분명히 구분한다. 1:1의 “창조하다”는 창조 전체를 표현한다. 이에 비하여 “만들다”는 2절과 함께 시작하여 안식일과 함께 끝난다.


3) 시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많이 있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즉 과거의 현재(기억, memoria), 현재의 현재(보기, contuitus). 미래의 현재(기대, expectatio). 어거스틴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시간이란 언제나 영원한 현재일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4) 히브리어 ‘아담’은 최초의 인간 이름인 동시에 ‘인간 존재’ 또는 ‘인류’를 가리킨다. 남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이쉬’와 여자를 뜻하는 ‘이솨’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의 개개인을 이르는 말이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는 대조되는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시103:13-16). ‘네페쉬’는 구약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내적 존재’, ‘살아있는 존재’, ‘인간 그 자체’, ‘욕망과 감정의 장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혼’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바사르’라는 단어도 연약한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소마’와 ‘사르크스’로 번역되었다. 


5) 몰트만(Moltmann)은 그의 저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zu)‘” 지으셨다. 그러나 전통적인 번역들은 “그의 형상에 ‘따라’(nach)”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적 관계에서 이 구절은 “그의 형상을 향하여”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창조는 성육신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론은 인간론의 완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론은 그리스도론의 준비가 된다. 사람의 규정은 두 가지 개념들, 곧 zalam과 demuth, 희랍어로 εικων과 ομοιωσισ, 라틴어로 imago와 similitudo로 묘사된다. 첫째 개념은 석고상을 가리킨다면, 둘째 개념은 비슷함을 가리킨다. 첫째 개념은 밖을 향하여 대리하는 면을 표현한다면, 둘째 개념은 안을 향한 반사의 면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땅 위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며, 그를 닮음으로써 하나님을 반사한다.


6) 이것은 요한 웨슬레(John Wesley)의 견해이다.


7)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 이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2:8-9). 에스겔 36:35, 요엘2:3, 이사야 51:3에는 에덴 동산이 언급되어 있다.


8) 왜 이러한 금지명령을 주셨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적으로 지으시지 않았다. 스스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도덕적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적인 개념을 선택의 문제로 설명하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를 선택할 수 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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