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과 사순절


유선호 목사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 ’절기’라는 말 대신에 ‘교회력’이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생겼고, 천주교의 사순절을 도입하여 사용하는 교회들도 생겼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와 연합하려는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공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인 동시에,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이 의식주의적인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는 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1. 절기와 교회력

절기는 일어난 사건들을 기념하는 연례적인 경축일(年例的 慶祝日)을 의미하는데, 어떤 사건을 매년 기념하여 경축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특히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의 3대 절기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는데(출 23:14-17), 이것들은 모두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이라는 양대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들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 관련하여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등의 절기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일부의 예배학자들은 ‘절기’라는 말 대신에 ‘교회력(敎會曆)’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교회력에 따른 목회’를 제창하는데, 여기서 교회력을 따른다 함은, “①교회력과 ②예전색깔과 ③성서일과(Lectionary)의 세 가지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예전색깔과 성서일과의 자세한 내용은 목회예식서 부록을 참조하십시오.) 이러한 교회력에 대한 관심은 천주교의 ‘전례운동’(典禮運動, Liturgical Movement)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것으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중세 천주교의 예배의식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예배복고운동’의 일환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운동을 ‘예배갱신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천주교의 ‘전례운동’을 그렇게 번역했을 뿐이지, 실상은 의식주의운동(儀式主義運動)인 예전운동(禮典運動)입니다.

2. 교회력은 이교도와 천주교의 성인숭배 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이 교회력은 본래가 이교도들이 죽은 자들을 기념하던 풍습을 받아들여 천주교가 순교자와 성인들이 죽은 날로 지킨 데서 유래하였습니다(헤스팅스,「종교와 윤리의 백과사전」제3권, p. 84.). 교회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지적하기를 “고대교회가 부활절, 오순절, 성탄절의 3대 절기로 만족하지 못하고, 거기에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성자들의 축제들로 둘러쌌는데, 점차 교회력의 모든 날들이 특정한 순교자와 성자를 기념하는 성일이 되었고, 모든 경우는 실제 또는 가상의 성자들의 사망일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전설과 환상적인 신화에 근거되고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가장 조잡한 미신을 조장하였다.”고 하였습니다(필립 샤프,「교회사」 3권, pp. 390-391.).

교회력은 크게 전반부인 그리스도의 절기들(Temporale)과 후반부인 성자들의 절기들(Sanctorale)로 나뉘는데, 그리스도와 관련된 절기들은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과 관련하여 몇 개 안되는 반면, 성자들의 절기는 순교자의 절기, 신앙고백자들과 수도사들의 절기, 동정녀들과 성녀들의 절기, 주교들의 절기, 성모 마리아의 절기, 만성절 등 2000개나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키는 교회력의 절기와 축일은 1146개입니다(1988년).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우상숭배적인 교회력을 폐지시켰습니다.

3. ‘교회력’인가, ‘절기’인가?

교회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천주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회력’과 ‘전례색깔 상징’과 ‘성서일과’를 사용한다는 말이며, 결국은 자유롭고 신령한 예배가 아니라 중세적인 틀에 매이게 되는 의식주의적이고 예전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은 “교회력에 따른 절기예배의 수용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가 과거 형식의 틀에서 어렵게 벗어났는데 왜 또 그 틀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가?”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절기를 지키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며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일이고, 자유롭고 비예전적인 예배를 드렸던 성결교회 전통을 이어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절기설교’, ‘절기에 따른 예배’ 등이 훨씬 더 성경적이고 신선한 복음주의적 표현이 될 것입니다.

4. 사순절(Lent)은 이교도에게서 유래하였습니다.

부활절에 세례 받을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시작되었던 것이 점차 변질되어 부활절을 준비시키기 위해 금식하고 금욕하는 40일간의 회개 기간으로 된 것이 사순절인데, 이 사순절은 7세기 이후의 중세시대에야 공식적으로 지켜졌던 것이고 그 기원 역시 이교적입니다. 봄 축제에 관한 다른 관습들처럼, 축제 전에 있던 ‘금식’을 받아들여서 발전된 것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을 가리키는 ‘Lent’라는 말은 실상 ‘봄철’을 의미하는 말인데, 40을 의미하는 희랍어 Τεσσαρακοστ와 라틴어 quadragesima를 번역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맨 처음 ‘40일’을 의미하던 단어가 어떻게 ‘봄철’을 의미하는 말로 변천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슬롭(Alexander Hislop)에 따르면, 니므롯의 아들 담무스(Tammuz)가 40세 때에 멧돼지에 받혀 죽었는데, 그가 살았던 1년을 하루로 계산해서 40일간 애곡하기 위한 기간이 설정 되었고, 고대에는 이 40일 동안 그의 은총을 새로이 얻고자 즉, 그가 지하 세계에서 나와 봄을 시작하도록 자기 스스로를 매질하는 풍습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준수하는 것이 페니키아, 이집트, 멕시코 등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히슬롭은 “이교도들 가운데서 이 사순절이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대 축제의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되어진 것처럼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사순절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모세의 시내산 40일, 엘리야의 40일, 예수님의 40일 금식 등을 거론하지만, 맨 처음 금식기간이 예수님의 시체가 무덤에 있었던 기간을 의미하는 40시간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그것들은 모두 다 후대에 아전인수 격으로 덧붙인 해석들에 불과합니다.

5. 사순절은 절기가 아닙니다.

절기란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즉 기념할 만한 중요한 종교적 혹은 민족적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절기가 그렇고 우리나라의 3.1절, 광복절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광복절을 지키기 위해서 40일간 금식하며 지키는 등의 절기를 만드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해 강림절을 만들고 부활절을 잘 지키기 위해서 사순절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의도된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종교적 술수일 뿐입니다. 자고로 절기란 역사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역사성이 없는 것은 절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 사순절은 부활절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에서는 사순절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기원과 정신이 마땅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끝장난 분이 아닙니다.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지금 우리는 살아계신 부활과 승리의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금식하며 부활절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금식과 금욕은 추도식에는 어울릴지 모르나 부활의 기쁨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 감사하며 축하하며 잔치를 열어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이라는 양대 사건을 기념하던 구약의 3대 절기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7. 사순절은 퇴보적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사순절은 의식적이고 위선적인 퇴보적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사순절의 금욕생활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육제(카니발, Carnival)가 생겼는데, 이것은 천주교 국가에서 사순절 전 1주일 동안 지키는 명절입니다. 이때 서민 대중은 제어 받지 않는 환락에 스스로 몰두했고 이러한 오용은 후에 모든 천주교 국가들에서 정당화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에서 열리는 ‘리오 카니발(Carnival in Rio)’ 인데, 수백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하며, 음주와 폭력과 섹스와 향락의 광란이 극에 달합니다. 카니발이 끝난 다음 날 천주교 성당 앞뜰에는 카니발 동안 저지른 성적인 죄를 고백하러 온 남녀로 꽉 차는데, 고해성사만 하면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강림절이 불필요 하듯이 부활절을 잘 지키기 위해서 사순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절기란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절에 기념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사순절은 본래가 이교도에게서 온 것 일뿐 아니라, 부활의 신앙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되는 신령한 기독교의 신앙을 금욕적 의식주의 종교로 전락시킬 위험이 큽니다. 필자는 독자들이 의식주의와 복음주의 중 어느 한쪽을 분명히 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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