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
키르벳 쿰란에 위치한 쿰란 동굴들
위치: 키르벳 쿰란은 사해 북서쪽 해변 근처에 위치한다.
발굴: 발굴은 요르단 고고학 당국,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오늘날은 록펠러 박물관으로써 불려진다), 그리고 로랑 드 보의 지도아래 프랑스 성경과 고고학 학교(the Ecole Biblique et Archeologique Francaise)의 후원으로 1951-1956까지 키르벳 쿰란에서 이루어졌다.
추가적으로, 다양한 다른 탐험들은 그 장소에서 가까운 고대 필사본들을 산출한 11개의 동굴들 안에서 여러 해 동안 조사와 발굴들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 필사본은 지역 목동들에 의해서 1947년도에 발견되었다.
물 근원: 물은 모든 정착시기 동안에 물저장고들(Cisterns) 안으로 모아졌다. 이것들 중에 하나는 철기 시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나머지들은 제2성전 시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제2성전 시대 동안의 공동체는 키르벳 쿰란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에인 파쉬카(Ein Feshka)’의 큰 샘으로부터 나귀를 이용하여 운반하여 물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물저장고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논쟁이 있으며, 설비(installations)들은 정결 목욕탕(ritural bath)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사실상 정상적인 이해에 있어서 물저장소들(water reservoirs) 이었다. 만약 폭이 한 뼘 정도되는 계단을 가진 설비들이 정결 목욕탕으로 동일시 된다면 쿰란의 설비들 대부분은 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름들: 제1성전 시대 동안에 그 장소는 ‘이르 하멜라흐(염성, 아래를 보라)’라고 불리어 졌을 것이다. 제2차성전 시대에 그것은 소코카(Sokoka)라는 이름으로 본문에 나타난다.
점령 시기들:
1) 철기시대 Ⅱ, BC 8세기 – BC 6세기
빈약하게 보존된 철기 시대의 장소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발굴 지역의 약 두 배 크기로 위치하였다.
점령의 연대 추정은 주로 남은 도기(pottery)에 기초한다. 점령의 끝은 바벨론 사람들에 의한 유다 왕국의 파괴에 기인된다고 예상된다.
이 정착촌은 수15:61-62절에 언급된 ‘이르 하-멜라흐(염성)’로써 동일시 되어져야만 하며, 광야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마을 중 하나이며, 그것의 설립은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고” (대하26:10) 라는 구절처럼 웃시야 왕(BC 790-740)의 활동에서 기인될 수 있다고 제안된다. 염성이라는 이름은 고대에 거주민들이 사해로부터 생산되며 귀중한 필수품인 소금 무역에 종사했다고 제안될 수 있다.
2) 그리스-로마 시대
a. BC 131-31: 하스모니안 시대 동안에 어느 정도의 농장 형태가 설립되어졌다. 이 당시에 원형 물저장고(water cistern)는 없어졌고, 두 개의 다른 직사각형의 물저장고들이 건축 되어졌다. 비록 안뜰 건물의 일부 형태는 존재했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시대에 적은 수의 다른 유적들만이 동일시 될 수 있다.
훨씬 더 큰 지역을 포함하며 확대된 그 장소는, 아마도 에세네 공동체가 있을 때,
BC 100년 전에 짧게 설립되었다. 오늘날 근본적으로 보여지는 공동체의 형태는 이 당시에 그것의 모양을 취하였다. 현존하는 물저장고들은 와디 쿰란을 가로질러서 건축된 댐으로부터 물을 운반하는 하나의 수로에 의해서 채워진 물저장소들(water reservoirs)의 훨씬 더 광대한 체계안으로 합병되었다.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공동체는 제분기들, 저장용 통들, 화덕들, 도기 가마들, 하나의 세탁소, 부엌용 그릇들을 보관한 지역에 인접하며(약 800개가 발견되었다.) 명백하게 식당으로 사용된 하나의 큰 방, 하나의 필사실(2 또는 3 개의 책상들과 한 개는 청동 그리고 다른 한 개는 점토(terra cotta)로 만들어진 잉크 병들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정결 목욕탕들을 포함했다.
이 정착 시기로부터 잠자는 숙소로써 확인된 공공의 복합 건물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그 장소에서 인접한 이회토의 동굴들 안에서 살았다고 믿어진다. 이곳의 여름철 온도는 화씨 104도(섭씨 40도)가 넘는데, 습기의 증발작용 때문에, 이 동굴들은 이 지역에 자연적인 냉방기 환경을 제공하였다. 가정용 도기, 매트들, 그리고 음식의 유물들을 포함하는 일부의 동굴들로 인도하는 계단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동굴들이 침식에 의하여 제거되었기 때문에 단지 계단들만 남아있다.)
죽은 사람은 그 장소의 동쪽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남자들은 공동묘지에 인접한 평탄한 지역에 매장되었고 반면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것의 아래쪽 언덕 위에 매장되었다.
이 정착의 시기는 아마도 광대한 불과 맹렬한 지진의 결과로써(아마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하여 입증된 하나,
유대고대사 ⅩⅤ. v. 2 그리고 유대전쟁사 Ⅰ. xix.3) 또는 아마도 덜 명백한 이유 때문에 BC 31년에 종결되었다.
b. BC 4 – 약 AD 66
키르벳 쿰란은 앞선 공동체의 기본적인 노선을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의 배치를 가지고 재 점령 되었다.
이 공동체는 다수의 화살촉들과 검은 재의 층에 의해서 입증된 것 처럼 로마에 대항한 1차 유대인 혁명 동안 격렬한 종말을 가져왔다.
파괴자들은 로마 군대 또는 당시에 마사다를 점유한 그들의 후에 유대인 열심당원들 일 수도 있다.
c. AD 132-135
키르벳 쿰란에서 발견된 로마에 대항한 2차 혁명 때의 동전들은 그 장소에서 발견된 2차 혁명의 동전들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처럼,
일부의 유대인 도망자들은 항거하는 동안에 거기에서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것을 제안한다.
에인 파쉬카 근처의 유적들(큰 샘이 존재하는 장소):
정착촌은 키르벳 쿰란의 점령 시기와 동시대인 BC 131 -31과 BC 4 - AD 66에 에인 파쉬카에도 존재했다. 후의 정착촌은 인접해있는 키르벳 쿰란이 당했던 것처럼 대략 같은 시기에 파괴되었다. 정착촌은 AD 1세기 말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키르벳 쿰란에서 처럼, 에인 파쉬카의 점령은 로마에 대항한 두 번째 혁명 동안에 또한 증명된다. 하나의 수도원은 비잔틴 시대 동안에 존재했다.
에인 파쉬카의 정착촌들은 쿰란의 정착촌들 보다 규모 면에서 훨씬 더 간소하였다. 건물 유적들은 방들로 둘러 싸여진 안뜰을 가진 하나의 큰 건물, 짐승 울타리들, 그리고 물 저수지와 수로들의 그룹을 포함한다. 이 저수지들의 기능은 확실하지 않다. 제안들은 물고기 연못들과 무두질 공장을 포함한다. 저수지로부터 취한 샘플들과 조사는 무두질 과정에서 사용된 무두질 작용 물질의 어떤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
에인 파쉬카와 키르벳 쿰란에 대한 동시대의 연대 추정과 두 곳을 연결하는 하나의 벽의 존재는 두 공동체가 협력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추가적으로 에인 파쉬카로부터 정기적인 물 공급을 받는 것과 키르벳 쿰란의 거주자들이 또한 에인 파쉬카의 농장으로부터 다량의 음식을 조달했다는 것은 가능하다.
키르벳 쿰란 근처의 동굴들 안에서 발견된 문서들(대체로 사해 사본으로 언급되는)
문서들의 연대:
문서 연대의 평가는 고문서학, 키르벳 쿰란의 유적에 발견된 유기체 유물에 대한 탄소 14 분석 그리고 일부 문서들이 둘러싸여진 천,
그리고 더 최근에는 문서들에 대한 분광사진기(spectrographic) 분석에 기초한다.
문서들이 모두 동시대에 산출된 것은 아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BC 3세기 말 만큼 초기로 연대를 추정하며, 반면에 다른 문서들은 AD 1세기 중엽 만큼 후대로 연대를 추정한다.
발견된 문서들의 숫자:
약 900-1,000개의 두루마리 유물들이 키르벳 쿰란으로 부터 약 1km 이내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문서들의 보존 상태:
문서들 중 단지 10개 만 잘 보존되었다. 다른 문서들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다수가 단지 사본 조각들만이 남아있다. 가장 완전한 두루마리는 1번과 11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문서들이 쓰여진 재료:
대부분은 동물(양, 염소 또는 송아지) 가죽으로부터 준비된 양피지 위에 쓰여졌다.
문서들의 내용:
세 개의 주요한 범주들로 분류된 문서들의 유형: 성경 본문들, 외경 본문들, 그리고 종파적인 문헌.
동굴들 안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 약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는 성경 본문들이다.
최소한 세 개의 역본들이 기술된다: 맛소라 히브리 역본 이전의 것, 70인역(BC 3세기 첫 중반에서 BC 2세기 말 사이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그리스어 역본),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성경으로 알고 있는 모든 책들이 에스더를 제외하고 기술된다.
외경 본문들은 에녹서, 희년서, 나보니더스의 기도, 레위의 증거(Testament), 납달리의 증거, 그리고 창세기 외경을 포함한다.
종파적인 문헌은 전례의 기도들, 묵시의 문헌, 분리주의자 공동체를 위한 체계적인 규율들(훈련 규칙들 포함), 그리고 성경 주석들을 포함한다.
학자들에 의해서 번호 붙여진 필사본들의 체계:
동굴들 안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Qumran”를 위해서 “Q” 문자로 나타내며,그앞의 숫자가 동굴 번호를 나타내며, 그리고 Q 다음의 숫자는 문서 그 자체에 할당되었다.
동굴들은 지리적인 위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서를 포함하는 동굴의 발견된 순서에 따라서 번호가 붙여졌다. 예를들면, 동굴 1(Cave 1)은 필사본이 발견된 첫 번째 동굴이며, 동굴 2는 두 번째 동굴, 등.
주의: 수천 권의 책들과 논문들이 키르벳 쿰란과 사해 사본에 관하여 쓰여졌다. 유용한 두 개의 간결한 연구는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와 Volume 3, No. 3 of the journal Near Eastern Archaeology(2000, 9월)에 있는 키르벳 쿰란에 관하여 쓰여진 글이다.
플리니 장로로 부터 인용문(AD 23 or 24-79)
사해의 서쪽에, 그러나 해안의 유해한 발산물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 밖에 에세네파라는 외로운 부족이 있는데, 전세계의 다른 모든 부족들과는 현저히 다르다. 그들은 여자도 없고 모든 성적 욕망을 거부하며, 돈도 없이, 오직 야자나무들만을 벗삼고 있다. 날마다, 다수의 난민들이 신입 회원으로 들어오는데, 감당할 만큼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삶에 지쳐있고, 그들의 관습을 채택하기 위하여 운명의 파도에 의해서 그쪽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이리하여 수천 세기 동안(믿기 어렵지만) 그 인종은 아무도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영원히 살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피곤함은 그들에게 구성원이 많아지는 유익이 된다.
에세네파 아래에는 이전에 엔게디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그 땅의 비옥함과 야자나무 숲은 예루살렘에 이어 두 번째였으나, 이제는 예루살렘처럼 잿더미가 되었다. 다음은 마사다에 도달하며, 바위 위의 요새, 그것은 또한 사해로부터 멀지 않다. 이것은 유대의 경계이다.
(영어 번역: H. Rackham, The Loeb Classical Library).
〔주의: 플리니의 타틴어 본문에 “사해”는 “아스팔트 호수”로써 언급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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