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어떤 음악을 사용할 것인가?



Ⅰ. 들어가는 말

 교회음악을 전공했거나 교회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문제에 관해서 한 두 번은 생각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성경적인 관점과 교회음악의 역사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교회음악이란 무엇인가?

 넓은 의미의 교회음악이란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모든 음악을 다 교회음악이라 할 수 있다. 

그 개론에 관한 것은 많은 교회음악 개론서들을 참고하거나 

필자가 쓴 아가페 출판사에서 발행한 ‘오픈 찬송가’ 부록을 참고해도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교회 안에서 그것도 예배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음악에 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 기독교 예배는 음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음악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럼 예배는 무엇인가?


Ⅱ. 본론

 1.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다. 구약 성전의 제사와 신약교회의 예배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지만 제사나 예배는 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구약의 제사는 제사장에게 위탁하는 형식이고 신약의 예배는 회중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다. 구약의 제사에서는 제사장  아닌 사람이 함부로 제사를 주관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심한 경우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아닌 사람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었다. 이 지성소 개념을 잘못 이해해서 교회 강단에 지금도 아무나 올라가지 못하게 해서 목사나 장로는 올라가지만 그 외의 교인들은 아예 올라가지도 못하게 하는 교회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고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향해서 성경은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말한다. 또 구약의 제사에서는 성도간의 교제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오늘날 교회 예배에서는 성도간의 교제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특히 현대 예배학에서는 이 성도간의 교제는 점점 중요시되고 있는 추세이다. 

 전통적인 예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 종적인 관계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어왔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주일날의 공적인 예배에서도 일단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하기 때문에 심한 경우 교인들끼리는 인사도 하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도 과거에는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이 종적인 관계와 함께 현대 예배학에서는 성도간의 횡적인 관계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특히 주일날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적인 예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뿐만 아니라 성도 상호간의 교제도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지만 그 동안 간과되어왔던 부분들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일반적으로 다음 다섯 가지(예배, 교제, 봉사, 교육, 선교)로 이야기하는데 예배는 성도간의 교제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인 성도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다 함께 만나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위에서 언급한 교회의 존재목적 5가지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예배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예배를 예배답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악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개신교회의 현실은  주일날 낮 예배와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속회)등에서 그 동안 설교가 상대적으로 너무 강조된 나머지 예배의 다른 요소들이 고루 발달하지 못했었다. 또 모든 예배를 다 주일 낮 예배와 같이 너무 경건하게 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다른 예배들이 그 특징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경건함도 중요하지만 기쁨과 감사의 표현도 아주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옛날부터 내려온 조상 제사와 유교적인 생활 방식이 이런 예배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실 경건이란 말은 성경에서 어떤 엄숙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우리 성경에 경건이라고 번역된 단어가운데 하나는 헬라어의 ‘Eusebeia'란 말인데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Piety' 혹은 ‘Godliness'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존경심을 표현하다, 혹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 하나님을 사랑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성경 야고보 1:27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 이런 점들을 교회들이 인식하고 각 예배의 특징들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 나라 외에도 주일날 저녁 예배를 드리는 나라들이 몇 나라 있기는 하지만 우리 전통적인 저녁예배와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주일 저녁예배를 찬양예배 혹은 찬양집회라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많은 교회들은 아직도 말 그대로 “말씀을 사모하여” 교회에 나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기 보다 설교 들으러 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예배의 제 요소 가운데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설교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예배에서 모든 초점이 설교에만 맞춰지면 생기 있고 다양하고 기쁨에 넘쳐야 할 예배가 그 균형을 상실할 수도 있다. 아직도 일부 교회들에서는 매 주일 찬양대의 찬양을 그날 목사님의 설교주제와 일치하는 곡으로 고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설교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기능은 있겠지만 아름답고 다양한 표현이 되어야 할 예배의 성격에 비추어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인 설교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인 찬양이라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설교의 효과 극대화를 위해서는 오늘날 컴퓨터와 전자매체의 발달을 이용하는 것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는 메시지 전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깊이 있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설교시간에 큰 교회에서는 설교자의 표정이나 몸짓을 뒤에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교인들은 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를 위해서 프로젝트 빔을 이용하거나 대형 스크린, T.V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이런 시설을 설치해두고도 시선이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에게로 집중하지 않아서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교 시간 등에 이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회중의 시선을 느끼지 못해서 불편하겠지만 회중 입장에서는 설교자의 섬세한 표정까지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 설교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회중찬송 시간에도 대형스크린에 악보를 띄워주면 교인들이 얼마나 자유스러운 두 팔로, 감격적인 몸짓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는가?

 예배의 제 요소들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기도, 찬양,헌금등-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분-성경봉독, 설교, 축도등-그리고 성도 상호간의 교제부분-성도간의 인사와 축복, 환영, 광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런 매 순서에는 그 순서에 맞는 음악들이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서 사용되어왔다. 예배의 순서나 내용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가감되어왔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성경이 흔치않던 시절에는 교회예배에서 성경봉독이 예배의 큰 비중을 차지했고 그 전통은 아직도 일부 개신교 교파에도 남아있다. 교회에서 너무 화려한 음악에만 치중하던 시절에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찬양대가 있기도 했고 그 반동으로 또 어떤 시절에는 아예 성경에 나오는 가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게 했던 시절도 있었고 찬양대를 구성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회중찬송만이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들은 어떻게든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기독교 예배는 비기독교문화에 대해서 그리 배타적이지 않았다. 물론 비성경적이거나 예배에 방해가 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 기독교는 다른 문화도 선택 수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탄절 축하행사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는 같은 장로교 교단이면서도 같은 총회가 아니라는 이유로 강단교류에 아주 인색하다. 물론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다양하고 풍부한 신앙생활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2. 예배와 음악

 우리 기독교와 음악은 거의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자체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사 43:21) 

 예배에서 사용하는 음악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구약과 신약,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약의 찬양
  구약시대에도 많은 종류의 음악들이 성전과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 성전에서 사용된 음악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제사에서 사용된 음악들의 예를 보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레위인들이 성악음악과 기악음악들을 다 사용했으며 특별한 축제나 행사에서는 춤을 추는 일도 종종 있었다.(대상 15장, 출15장) 성전에서의 찬양은 그 음악은 알 수 없으나 가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위대하심, 그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등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시편은 원래 읽기 위한 책이 아니고 노래하기 위한 책이었다. 그러면 그 시편은 어떤 음악으로 노래했을까? 시편 제목들을 자세히 살펴본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히브리인들의 민요 가락 등에 맞추어서 부르기도 했으리라고 본다. 시 22편의 ‘아얠렛샤할’이나 45편의 ‘소산님’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널리 불려지던 민요의 제목이었으리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다. 시편은 성전에서 불린 것들도 있고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도 있으며 특별한 행사에서 불린 노래도 있다. 당시의 음악들은 오늘날과 같은 화음이나 특별한 조성이 있은 것 같지는 않고 말의 음률을 중심으로 낭송(chanting)했으리라 여겨진다. 

찬양하는 방법은 언약궤를 안치하는 것과 같은 큰 행사에서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많은 악기를 동원해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노래했다(대하 5:12-13).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나서 부른 노래는 온 백성이 다 함께 노래했으며 여자들이 춤을 추면서 화답(Responsorial)하는 노래를 불렀다. 구약시대에도 춤은 기쁨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면서 너무 기뻐 힘을 다해 노래하며 춤추었는데 그 방식이 너무 심했던지 미갈이 흉을 볼 정도였다.(대상 15:29). 평상시 매일의 제사에서는 12명의 레위인들이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서 노래했으리라 보여진다(대상 25장).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구약시대의 찬양은 제사의 성격에 따라 노래하는 사람들이나 악기의 종류등이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춤을 추며 찬양하기도 했다.  그 음악적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가사는 주로 하나님의 선하심, 위대하심, 자비하심, 그 백성에게 행하신 일들을 칭송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2). 신약의 찬양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에서처럼 풍부한 음악적 언급들이 없다. 이것은 역사적인 이유와 초대교회의 시대적인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 포로 이후 성전의 노래하는 제사장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성전의 음악적 전통은 그 맥이 끊어졌다. 회당에서는 성전에서와 같은 제사의식도 없어졌고 당연히 제사를 주관하던 레위인들의 역할도 없어졌다. 즉, 초대교회에는 직업음악인이 없었으며 성전의 음악적 전통도 계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에 기록된 음악적 언급은 몇 가지가 있는데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난 칸티클들이 있다(눅1:46-55, 눅1:67-79, 눅2:13-14, 눅2:28-32). 이 노래들은 기독교 찬송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으며 Calvin주의 교회에서는 성경의 Text로만 노래하라고 할 때 특별히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의 의식에서 찬송하신 기록이 마 26:30에 나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관례를 따라 유월절 만찬에서 할렐 찬송(시 113-118편)을 부르신 것을 말한다. 그 외에는 서신서들 가운데 음악적 언급이 몇 군데 있는데 바울의 말 중 고전 14:26의 ‘찬송시’와 엡 5:19과 골 3:16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들 수 있다. 이 음악적 언급들은 예배와 관련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각 용어상의 차이가 없다는 견해들도 있으나 시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며 찬미는 오늘날의 우리 찬송가와 같은 것으로,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정규적인 찬송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 불리는 성가종류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성전과는 달리 교회안에서 찬송하는 모습을 묘사한 글이 없는데 그것은 신약시대에 찬송을 중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풍부한 음악적 유산을 가지지 못한 이유와 초대교회가 아직 선교 초기단계에 있어서 제도적인 조직이 완비되지 못한 점, 특히 예배의식이 체계적으로 아직 정립되지 않은 점, 그리고 당시 로마 사회나 선교지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약에도 찬송, 찬양,찬미라는 단어가 53회나 언급되어 있으며 찬양하라는 것은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명령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특히 골3:16에서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누가복음의 칸티클들 외에는 찬송의 내용이 명확하게 나온 것이 별로 없고 구약의 시편을 신약의 성도들도 불렀으리라는 것은 성경의 여러 기록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로 인해 지하로 들어간 시대에는 당연히 구약 성전에서와 같은 화려한 교회음악이 존재할 수 없었다. 기악음악은 거의 존재하기 어려웠고 성악음악도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무반주 음악이 주로 불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면서 급격하게 변해서 4세기 이후 기독교는 로마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예배와 조직이 잘 갖춰지게 된다. 중세사회에서는   교회는 전문 음악인들을 찬양대원으로 보유하기도 했다. 지금도 바티칸 성당의 성가대는 최고의 음악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세에서의 교회음악은 그 수준이 너무 높아져서 일반 회중들은 연주할 수 없는 음악들이 작곡되고 차츰 회중의 찬송은 그 중요성과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라틴어를 잘 모르는 일반 회중들에게 미사는 지나치게 형식 위주로 되어버렸다. 당시의 음악적 유산들은 오늘날의 수준에서 보아도 전문 음악인들이 연주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단순히 들을 수만 있는 찬양들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회중찬송이 빠진 예배는 당연히 그 힘을 잃어가고 전례언어인 라틴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찬송도 부를 수 없는 회중들은 서서히 예배에서 적극적인 참여자가 아닌 관람자로 바뀌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예배의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이  중세 시대의 교회음악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레고리안 성가는 오늘날도 인류의 가장 뛰어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다. 이 시대에는 전례를 위한 음악들이 특히 발전했으며 교회는 순수 예술의 보호자겸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음악가들이 교황청이나 교회로 몰려들었으며 그들은 교회의 후원아래 마음껏 자기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세속음악들도 발전하기 시작해서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의 마이스터징거, 트루바도르, 민스트렐등이 세속적인 음악의 발전도 이어갔다. 그로 인해 세속음악과 교회음악 사이의 상호영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3) 종교개혁시대의 찬양
    이미 언급한 것처럼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기도 하다. 중세 교인들이 예배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적극적인 예배 참여자가 될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 이후 회중들은 예배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예배언어가 각 나라의 언어로 바뀌고 회중찬송이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라틴어로만 드리던 미사가 각 나라의 자국어로 된 예배로 바뀌고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찬송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시대의 회중 찬송은 구교에서 그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찬송을  빨리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찬송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지만 그 공급이 수요를 따를 수가 없었다. 당시 개신교인들이 다 음악에 능통한 사람들이 아니고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나타난 음악이 바로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다. 이것은 이미 유럽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민요나 세속적인 노래들에 종교적인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음악의 레퍼토리는 짧은 시간에 많이 늘어날 수 있었고 교인들은 그 노래를 배우는데 큰 애로를 느끼지 않고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교회음악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세속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 Calvin파 교회에서는 시편가와 성경에 나와있는 가사가 아니면 교회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된 개신교인들에게 감격적인 찬송을 금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고 자신의 신앙경험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작 왓츠나 웨슬리의 주관적인 찬송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찬송들은 성경의 내용을 가사로 쓰기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신앙적인 체험들을 그 가사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각 나라마다 자기 고유의 찬송들이 나오게 되고 각 민족들은 자기 정서에 맞는 찬송들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 나라 ‘찬송가’는 18-19세기의 서양찬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서서히 우리 나라도 민족 고유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찬송에 점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각성 운동이 일어날 때를 전후해서 복음찬송(Gospel Hymn)이나 복음성가(Gospel Song)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20세기 교회에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음악은 아직도 보수적인 많은 교회들에서는 주일 낮 예배 시간에는 사용이 제한되고 있다. 사실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자체에도 이런 음악이 많이 삽입되어 있지만 찬송가라는 범주에 들어서 사용하고 있다. 


4) 현대의 찬송 
   오늘날은 C.C.M(Contemporary Church Music)이라는 장르가 교회 안에 나타나서 보수적인 교회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마치 앞 세대에 복음성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음악의 변화는 어느 세대에나 있을 수 있고 또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찬송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말씀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찬송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돌리는 하나의 수단이다. 당연히 이 음악은 시대정신이나 민족적 정서 더 나아가서는 세대차이에 따라 다양한 찬양이 나와야 한다. 서양사람과 동양사람의 정서가 다를 수 있고 남자와 여자의 정서가 다를  수 있으며 10대와 60대의 정서가 다른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마땅한 것이다. 그러니 이들 각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는 다양한 계층, 다양한 연령,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려면 이들의 공통된 특징을 찾아내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 교회 안에서도 어린 아이들과 어른들의 예배를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가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주일 낮 예배 시간에 만약 어른들이 참석하는 예배에서 10대들이 좋아하는 랩 찬송을 불렀다고 가정해보자. 10대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아주 당황해 할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의 문제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랩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정서를 대부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10대들은 이것이 자기들의 삶과 아주 친숙하기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아니 오히려 아주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랩 찬송은 10대들의 예배에서 사용한다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그 리듬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이미지를 풍기거나 가사가 문제가 된다면 예배를 계획하는 사람들이 신중하게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반대로 10대들의 예배에서 항상 느리고 단조로운 리듬의 찬송만 부르게 하면 이들은 곧 찬송에 흥미를 잃게 되고 예배는 생기 없고 지루한 것으로 변하고 만다.

 이제 한 원칙을 말하면 찬송은 그 예배의 정신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학자들은 예배를 종합예술로 설명하기도 한다. 섬세하게 기획되고 준비되며 참석자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준비 없는 예배를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준비 없는 찬송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구약의 기록에 의하면 잘못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가 백성들이 죽는 일까지도 있었다. 우리 기독교 예배는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이 각각 다른 예배를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다. 각종 축하 예배와 절기 예배 또 우리 일상과 관련된 결혼, 장례, 돌, 개업, 이사 등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한다. 이런 예배에서 우리는 그 예배정신과 일치하는 찬송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탄절 예배나 부활절 예배에서는 그 예배에서 성탄과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표현이 나타나는 찬송을 하는 것이 좋고 장례식 예배에서는 장례의 성격을 나타내는 찬송이 좋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축하예배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의 성품이나 양심을 통해서도 희미하게나마 조금은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탄 축하 찬양예배에서는 어떤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Carol 같은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캐롤이란 그 자체가 성탄을 축하하는 음악이니까 자연스럽다. 만약 우리가 ‘징글벨’이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같은 음악을성탄 성가 속에 삽입해서 진심으로 기쁘게 성탄을 축하한다면 그 속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혹은 너무 세속적인 냄새가 난다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실까? 우리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가사를 표현할 수 없는 악기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춤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다른 예술 활동이나 움직임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 않을까? 자녀 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한다면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뻐하고 축하하는 모습을 보고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까? 특히 그 예배자체가 축하 찬양하는 예배라면 더욱 더 그러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의 재롱을 보고 즐거워하는 부모를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이런 축하 찬양을 받으시리라고 본다.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성경의 흐름중 시편의 예를 보아도 우리 기독교는 외부문화에 대해서 

그리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신약시대에도 각자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개인적인 노래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음악의 역사를 보면 우리 교회는 일반 문화에서도 좋은 요소들은 많이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다양한 문화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 문화들 가운데 좋은 것들은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도 더욱 더 다양하고 풍부하며 아름다운 것으로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리라 본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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