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이 있는가?

남는다면 나의 '어느 일면'이 남는 것인가?

지금의 '나'와 죽은 다음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

천국은 어떤 곳인가? 그리고 누가 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지금 창 밖에는 어두움이 깔렸는데 내가 죽으면 그 흑암이 나를 휘덮고 말겠지.

이제는 찬란한 빛도, 인생의 장엄함도 모두 사라진, 짧은 한 순간의 무위와 공허만이 남고 말거야” 버트란드 럿셀이 죽음 직전에 남긴 말이다.


  인간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문제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신중하게 고려되어 왔다. 불교나 힌두교 신자는 삶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들이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변하는 환생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회교도 신자들은 일곱 개의 천국, 즉 육적인 쾌락의 장소와 영적인 축복의 장소가 있다고 믿는다.(그들이 성전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이루셨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하지만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성경은 또한 지옥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눅12:5에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 ” 고 지옥에 대해 경고하셨다. 지옥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받아들이기가 두려운 개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보편구원설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단지 사람은 소멸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신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분명한 말씀들이 있다.(마5:22, 13:41-42, 계20:14-15, 마5:29)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신중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드물다. 과거에는 천국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상과 설교에는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주제를 찾아보기 어렵다. ‘필립 얀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이 평온한 수용의 단계를 갖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죽음은 인간이 칠십을 전후하여 누구나 한 번씩은 다 맞이하게 되는 인생의 필연적인 大事이다. 그러나 모두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으로 치부하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아니 초연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현대 의학은 많은 육체적 질병들을 정복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적 질병만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정신적 질환의 이면에는 틀림없이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으리라! 이 공포의 억압적 심리상태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직시하려는 것을 막고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되고 있다. 성경 말씀은 이런 사람들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


  그러나 당신이 진리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사망을 조롱할 수 있었던 그 경지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죽음에 대한, 죽음을 꿰뚫어 볼 진리적 진실을 갖지 않고서 어떻게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 죽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육신에는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정되는 두 가지는 1) 죽는 순간 뇌세포가 그 기능을 중지한다. 따라서 의식이 활동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2) 죽는 순간 심장의 고동이 자동적으로 멎게 된다. 이 밖에도 육체적 죽음에 대한 의학적 소견은 많다. 그리고 성경적으로는 죽음은 육신의 분리 또는 분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는 말씀처럼 육신은 피곤하고, 찢기고, 병에 시달리고, 불의의 사고로 상처받으면서 부단히 영혼에 위험을 주다가 끝내 영혼을 담을 수 있는 힘이 없어질 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 관점에서 죽음은 매우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


  인간이 세상의 피조물이나 동물이나 생물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각자가 우주 안에 유일한 고유한 개성 곧  한 인격 또는 한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이나 식물은 개체는 있으나 인간과 달리 그 본질은 종(種)이나 류(類)로서 대표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뇌와 마음과의 관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격렬한 논쟁이 있는데, 하나는 뇌가 곧 마음이라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마음이 뇌의 작용을 이용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후자의 주장이라면 사람이 죽은 후에도 마음이 살아있으며 또 활동할 수 있는 어떤 매개체만 주어진다면 계속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베토벤은 죽었지만 그의 교향곡 9번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는 소멸하나 그의 인격은 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살아있는 동안은 우리가 동일한 육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물질적으로만 말하면 우리의 몸은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의 육체를 지금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지금도 육체는 세포의 사멸과 생성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는 인격은 계속적으로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사후에도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그 어떤 사람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것처럼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유비는 충분히 있으며 우리는 믿음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이렇게 우리가 죽은 다음에 무엇인가 남는다면 우리의 ‘어느 일면’이 남게 될까?  인간은 단순히 영혼과 육체가 합쳐진 존재가 아니고 영혼과 육신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체로서의 생명인 ‘생령’으로서의 인간이다. 단순히 영혼과 육체가 합쳐진 존재라면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죽음으로 인한 유기체의 생명이 깨진 후 남는 것이 있다면 단순한 ‘영혼’ 또는 ‘영’ 이상의 어떤 존재로 우리가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지금의 나와 죽은 다음의 나는 어떻게 다른가? >


  하지만, 사후의 우리의 존재가 과연 현재 내가 느끼고 인지하는 이 인격의 연장일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현재’는 오직 ‘여기’ 밖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나”라는 인격도 내가 이 땅에서 가졌던 출생배경, 삶, 이름, 경험, 무의식, 믿음, 가족 등 수많은 요인들로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게 되는데, 죽은 다음에 남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금의 “나”라는 인격의 보존과 연장이 될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나와 새로운 나는 어떻게 관련되며, 어떻게 계속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죽은 다음에 남게 되는 것이 지금의 나의 연속이긴 하지만 단순한 연장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의 “나”라는 오직 하나뿐인 이 인격이 계속 존속은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하는 “나”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굳이 표현한다면 ‘초월적 나’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내 가족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때에도 부모 자식으로서 아니면 아내로서의 어떤 의식 또는 감정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사두개인들이 칠형제가 있는데 맏이 장가들어 후사가 없이 죽어 그의 아내를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차례로 일곱째 까지 그렇게 하다가 그 여자도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자가 일곱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 ~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장)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본 조망 >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신 후 그의 육체는 썩지 않고 빈 무덤만 남겨두고 부활체로 변형되셨다. 이것은 보통 인간이 밟는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매우 의도적이고 전형적(典型的)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전15:20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형(原型)을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제자들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열렸을 때 그들은 주님인 줄 알아보고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 이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이 물질적 육체적 차원에서 주님으로 확인되는 것을 초월하여 제자들에게 인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은 문이 잠긴 방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들어오셨으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이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무엇으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다른 모습이셨지만 다른 모습이 아니셨고, 영이나 유령이 아니지만 육체도 아닌 몸, 연관성은 있으나 연장은 아닌 몸, 제자들의 눈앞에 시공간적으로 나타나셨지만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몸으로 오셨다는 표현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설명 자체가 시공간적 표현의 한계 안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제한적으로 삼차원적으로 묘사된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 그것이야말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참 육신의 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은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제자들에게 동일한 분, 그 주님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죽은 후의 삶에 대한 소망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것의 증거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더 높은 차원으로의 승화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와 그 곳의 영생의 표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우리가 갈 곳은 어떤 곳인가? >


  장차 우리가 갈 곳은 영광스러운 곳이다. 그 곳은 애매한 곳이 아니다. 현재의 삶과 그리고 육체와 연관성은 있으나 단순한 연장이 아니고 전혀 높은 차원,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영광의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 주셨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의 죽음은 단지 터닝 포인트일 뿐이다. 마찰도, 시공간의 속박도, 연약함도 없는 영광의 곳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다.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약간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천국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공간적인 곳이 아니다. 쉽게 말해 저 위에 있는 어떤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21장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 ”라고 묘사되어 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와 물질적 세상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그 우주가 다른 물질적 공간적 우주로 단순히 교체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천국이 장소적인 곳이긴 하나, 시공적 상황에 제한되는 그런 공간적인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무한히 시간이 흘러가는 곳 수천 년 수만 년 죽지 않고 사는 그런 곳도 아니다.  황금 길에서 그리고 영원토록 하아프를 타면서 찬양을 불러야만 하는 그런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예를 들어 우리의 기쁨을, 웃음을 길이로 몇 센티미터라고 재려고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그 “때”가 천국인 것이다.


  계시록의 성경의 묘사는 최선, 최상의 상태를 나타낸 것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천국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곳이라는 사실이다.



<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한 바구니 안에 썩은 사과와 싱싱한 사과를 함께 담을 수는 없다. 천국에 악인이, 의롭지 못한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들어갈 사람과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계21:27)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인가? 그것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이다.(계7:14) 오직 나의 피가 아니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옷을 희게 할 수 있다.



< 천국에는 언제 들어가나? >


  죽으면 즉시 들어가나요? 아니면 부활 때까지 잠잘 것인가? 전천년인가요? 후천년인가요? 아니면 무천년인가요? 이러한 주장들이 신학자들에게는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나요? 세월이 베틀의 북처럼 빨라서 모든 인생이 멀지 않은 장래에 죽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시공을 떠나 영적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 곳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시간을 초월한 세계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시간개념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먼저 죽은 자나, 나중 죽은 자나 주님 앞에 함께 서게 될 것입니다.



< 어떻게 살 것인가? >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곳”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때”입니다. 이제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동행입니다.(게시된 설교문 "동행과 승천" 참조) 이런 의미에서 육체의 죽음은 많은 제약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의 더욱 친밀한 동행을 위한 좋은 계기라고 하겠습니다. 단지, 우리는 이 육체의 삶 가운데서 사망을 극복하신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충만히 누리고 그 살리는 생명이 나에게서 이 사망의 세상으로 흘러넘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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