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세계선교 역사

                                                     
1. 역사적 개관


    우리는 초대교회가 서쪽으로, 로마를 거쳐 서유럽으로 전파된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동쪽으로 뻗쳐나간 선교 역사를 간과해왔다. 안디옥에서 희랍어를 사용하는 서쪽 세계뿐 아니라 지중해 세계와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고대의 무역 루트를 따라 동쪽으로 복음이 전해진 것을 무시해왔다. 225년경에 현재의 이라크에 20명 이상의 기독교 주교가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3세기말에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디오피아는 4세기 중엽에 복음을 받아들였다.


5세기까지는 주교들이 아시아 깊숙이 들어갔다. 상당수의 아랍 족속들은 2세기에 이미 기독교인들이었다. 서구 교회는 동방교회의 한복판에서 회교가 발생했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의 절반정도 기독교화된 족속들을 회교 전사로 변형시켰고, 마호멧 사후 1세기 이내에 페르시아 제국, 시리아, 이집트, 지중해 남부 해안을 정복했다. 얼마 뒤에 이슬람 군대가 스페인, 프랑스 남부, 시실리, 이태리 남부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 주교로 하여금 회교 왕에게 조공을 바치게 했다.


    한편 북쪽으로부터 이교도들이 북유럽과 서유럽을 침공해서 기독교 문화를 파괴했다. 그래서 9세기 말경에 서구 기독교는 이슬람교에 거의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서구 교회는 이슬람의 우세한 문화와 군사력에 의해 지배되고 포위된 게토처럼 되었고, 서구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인 복음전도가 금지된 이류 시민처럼 되었다. 서구 기독교 전통(예전, 신학, 교회 직제)의 본질적인 부분들이 서구 기독교가 이처럼 선교적 진출이 불가능한 게토처럼 되어버린 오랜 기간에 형성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즉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교회가 자신을 모든 민족에게 선교하도록 보냄받은 공동체로 이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중세 이후 서구 기독교 세계의 재부흥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빌려 전개했던 이슬람 학문에 크게 빚을 졌다. 바꿔 말하면 르네상스 시대 서구인들은 이슬람을 통해 그리스의 학문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이면에는 이슬람 초창기에 아랍의 반 야만족들에게 그리스 문화유산을 전해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와 동방교회가 있었다.
    서구 기독교가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투쟁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집중되었다. 수 세기간 투쟁 끝에 이베리아 반도를 해방시킨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방과의 무역루트를 장악한 이슬람을 우회해서 대담한 항로를 통해 동아시아 향료를 획득하는 길을 찾았다.


    이슬람은 종교적 신앙과 정치권력이 강하게 결합된 신정체제였다. 이슬람에 대항했던 서구 기독교도들은 종교적 신앙과 정치적 군사적 권력과 상업을 결합시킨 그런 틀을 만들어냈다. 결국 16세기 서구 선교가 보여준 종교와 정치 군사와 상업의 결합은 이슬람의 영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 로마 세계의 복음화(1세기-500년)


1) 초대교회로부터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 전까지 
  초대교회와 관련하여 세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기대되던 임박한 재림이 발생하지 않자 초대교인들은 역사를 중시하게 되었고, 일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둘째 교회의 임무는 세계로 꾸준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셋째 예루살렘의 멸망은 어떤 특정한 지역이 교회의 본부가 될 수 없음을, 교회는 하나님의 방랑하는 백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의 대도시들에 체류하면서 조력자들을 이용하여 복음을 주변도시에 전하게 했고, 도시 주변의 농촌에는 점진적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로마는 예루살렘과 안디옥 다음가는 기독교 제3의 도시였다. 로마교회의 초기 구성원은 빈민층이었다. 상류층이 사용하던 라틴어 대신에 희랍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2세기까지 기독교는 안디옥을 통해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 전해졌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주교들의 교회였다. 3세기 중엽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가 소집한 회의에는 80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북아프리카 교회의 교인들은 주로 상류층이었다. 짧은 기간에 복음이 로마제국 전체를 향해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확신, 교인들의 삶의 모범, 핍박에서 보여준 교인들의 태도였다. 순교는 핍박의 시기에 세상 속에 현존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으로 선포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선포의 다른 형태였다.

2) 기독교 공인 이후
    313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종교로 공인하고 387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5세기에 기독교 인구가 네 배 증가했다. 여기에는 커다란 위험들이 있었다. 신앙은 피상적이 되었고, 한 인간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몇 가지 교리를 신봉하는 것으로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교의 직위는 봉사보다는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에 신앙과 고대문화의 종합이 이뤄졌다. 오스르호에네가 첫 번째 기독교 왕국이었다면 아르메니아는 두 번째 기독교 왕국이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국왕의 개종으로 전체 국민을 개종시킨 첫 번째 사례였다. 패트릭에 의해 아일랜드는 복음화되었고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켈트 교회의 특징은 교회생활의 중심이 교구가 아니라 수도원이었고, 수도원의 최고 책임자는 주교가 아니라 수도원장이라는 점이었다. 아일랜드 수도승들의 위대함은 기독교 문화 발전 못지않은 선교적 열정에 있었다. 완만하게 복음화가 진행되었던 프랑스가 5세기 말 프랑크족의 클로비스 왕의 세례를 통해 빠른 진전을 이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야만족들이 개종시 아리우스파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클로비스 왕은 카톨릭에 의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화에서 최선의 것을 끌어넣었다. 교회는 서로마 제국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콘스탄틴 이후 서구 교회는 교회를 제국과 쉽게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바깥에 있는 야만인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복음화를 통해 그 민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예전을 진행함으로써 그 민족 언어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민족적,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정치가 교리적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서구 교회가 칼케돈 신조를 채택했다면, 페르샤 제국의 기독교인들은 제국주의적인 기독교를 반대하여 네스토리아주의를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칼케돈 신조를 강요하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네스토리아주의를 택한 페르샤 제국을 분리시켰다. 페르샤 제국의 네스토리우스파들은 인도와 중국을 포함하는 열정적 선교사들이었다.


또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에 교회는 신학적 적대자를 박해하기 위해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폭력에 의한 비기독교인의 개종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이 북아프리카에서 교회가 살아남지 못하고 이슬람에게 넘어가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2. 서구 기독교의 탄생(500년-1000년)


    이 기간 동안에 교회는 한편으로는 이슬람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야만인들의 침략을 맞아 그들의 개종을 위해 싸웠다.

1) 이슬람과의 대결
    아랍인들의 유럽에 대한 공략은 무척 빠르게 진행되었다. 650년에 고대 페르샤 제국이 멸망했다. 예루살렘, 가이사랴가 함락되었고, 팔레스틴 일대와 시리아 전역이 회교도에 의의 지배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를 따라 642년에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되었고, 715년에는 스페인의 대부분이 회교도의 손에 들어갔다.


732년 회교도들은 프랑스의 심장부인 투르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846년에는 로마가 약탈을 당했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을 막아내다가 결국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 손에 떨어져서 종말을 맞았다. 이슬람에로의 개종으로 그리스도인 인구가 줄어들어 갔다. 이슬람 침략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인명 손실이 대단히 적었다는 점과 기독교 문화의 붕괴가 너무 빨리 진행되었다는 점에 있다.


무슬림은 우월감 속에 살았고, 그리스도인들은 열등감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평등과 특권을 상실한 이등 국민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회교도 치하의 생활을 민족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지배보다 더 관용적이라고 느꼈다. 회교도의 정복과 육상과 해상의 무역로를 회교도들이 장악함으로써 기독교는 유럽의 종교, 지중해 세계의 종교였다가 북부, 서부 지중해의 종교가 되었다.

2) 야만인의 개종
    교회가 야만인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작업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 과업이 어느 정도 완성된 것이 14세기 말이었다. 이들의 개종이 가능했던 것은 왕실의 호의, 순교, 수도원이다. 영국은 교황 그레고리 대제가 어거스틴과 동료 수도사들을 캔터베리에 파견함으로써 유럽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레고리는 새로운 나라에 선교 사업을 전개함에 있어서 수도승과 수도원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 그는 선교 방법에 있어서 적응(accommodation)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 백성들의 이교 신전들을 파괴할 필요가 없으며 그 안에 있는 우상들만 파괴하면 그만이다... 만약 그 신전 건물이 쓸만하면 잡신 예배와 분리시켜 그것을 참된 하나님의 예배에 이용하는 것이 좋다.”(601년 7월 18일자 편지)


아일랜드 출신의 성 콜롬바는 아이오나 수도원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아일랜드의 열심을 물려받은 영국 교회는 향후 4세기에 걸쳐서 위대한 선교교회로 활약했다. 당시 최고의 선교사는 보니파티우스였다. 수도승들의 봉사는 기도와 노동, 그리고 그 지방 언어와 문화를 보급시키는 것이었다. 라틴어 사용을 통해 유럽의 통일에도 기여하고, 유럽 문명의 특징인 자국어들의 다양성을 마련하는데도 기여했다.


    샤를르마뉴 황제는 색슨족을 개종시키고자 애썼다. 한 부족이 정복되면 군사력에 의한 황제의 보호와 부족의 개종이 뒤따랐다. 이것은 정복 권력과 종교의 제휴라고 하는 위험스런 관계를 드러냈다. 색슨족을 개종시킨 긴 과정에는 순교와 살육의 긴 이야기가 동반된다.


    슬라브족을 위한 선교는 9세기에 콘스탄틴과 메토디우스 형제와 관련 있다. 이들은 알파벳을 창안하여 슬라브어를 문자화하여 성경을 번역했다. 로마는 라틴어만을 교회의 유일한 예배언어로 인정한데 반해, 콘스탄티노플은 현지어 사용을 허락함으로써 동방교회의 단결을 강화시켰다. 러시아가 기독교국가로 굳어진 것은 블라디미르(980-1015)에 의해서였다.
   
3)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지닌다는 깨달음을 갖고 실천한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였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교회들에 속한 시리아 출신 알로펜이 635년에 중국에 기독교를 전했다(경교). 그는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태종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장안에 수도원을 세워 중국 선교의 센터로 만들었다. 그러나 경교는 수도승과 성직자를 바그다드에 의존했다. 경교는 신학과 예술에서 부분적으로 불교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적응’의 선교 방식을 시도했지만 외국인의 종교라는 명성을 제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북부와 북경에는 13세기까지 경교가 존재했다. 수백 권의 기독교 서적이 들어가 30여권의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아마도 경교의 선교사들은 중국으로부터 일본, 티벳, 몽골, 만주, 한국, 자바까지도 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남인도의 성 도마 교회에 주교를 파송했다.


당시에 지리적으로는 가장 확장된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다. 그렇지만 서구의 제국주의와 정복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고, ‘기독교왕국’(Christiandom)로부터 벗어난 형태의 기독교는 중국에서 불교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의의는 비기독교왕국(non-Christiansdom)의 종교로서 군사적, 정치적 정복 방식을 따르지 않고, 타종교의 사원과 나란히 자신의 제단을 세우고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모범을 통해 부단히 선교하려 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1000년 기독교
    유럽이 이제 기독교화가 되었다. 기독교가 유럽의 유일한 종교가 됨으로써 기독교는 유럽의 기초를 구성한다. 신앙은 유럽을 결합시키는 사회적 결합체다. 때로 세례는 합법적인 권력과 소유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된다. 교회는 로마 제국의 보편주의와 문화를 그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은 붕괴되었지만 제국의 보편주의가 남아있는 곳은 교회였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동방교회, 특히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를 분열주의자나 이단으로 의심하여 자신의 모델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3. 기독교왕국의 복음화(1000년-1500년)


1) 노르만족의 복음화
    서기 1000년은 기독교 왕국에 공포와 불안의 해였다. 교회의 시대는 1000년으로 끝난다는 신앙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000년은 유럽의 기독교화를 거의 이룬 때였다. 기독교화된 유럽 제일의 과제는 기독교 세계를 경계 지역으로 확장하는 일이었다.


스칸디나비아로부터 온 바이킹의 침략으로 유럽이 고통을 당했다. 영국과 아일랜드가 침공을 받았다. 침공의 주도권을 쥔 자는 덴마크인들이었다. 이들의 개종은 길고도 느린 과정이었다. 덴마크에 실질적으로 기독교가 정착된 것은 11세기 초 크누트 왕의 통치기였다. 그는 교리와 국가를 연합시킨 방식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정리했다. 노르웨이에서도 기독교 전래에 왕의 역할이 컸다.


올라프 왕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기 위해 회유, 간계, 협박, 강압주의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나라에 정착한 기독교는 노르만족의 고대 습관과 전통으로 상당히 변형된 형태의 기독교였다.


아이슬란드는 순전히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 시대의 유일한 나라였다. 스웨덴은 1164년이 되어서야 웁살라에 대주교 교구를 설치하고 대주교를 임명했다. 오랜 습관이 된 사고방식을 뿌리뽑는 것은 산당을 부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웨덴 사람들의 개종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들의 오래된 미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핀랜드가 기독교화된 것은 1291년이 되어서였다.


    주후 1200년경에는 유럽의 거의 대부분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수많은 순교를 통해서 이뤄지기도 하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기독교화가 안된 프러시아 지역을 튜우튼 기사단이 기독교를 가르친다는 조건으로 점령했다. 본래 이 기사단은 환자와 부상자를 도와줄 목적으로 조직되었지만 이 지역은 기사단과의 50년 전쟁으로 기독교권에 합병되었다. 이러한 강압적인 선교 방식이 얼마나 내면적인 회심을 불러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496년 클로비스 왕의 개종과 더불어 집단세례를 받은 백성들을 향한 계속되는 질문이었다.

2) 십자군 전쟁과 기독교 선교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때부터 1291년 에이커에 있던 최후의 십자군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2세기 동안에 치러진 전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교회사의 참담한 장이다. 십자군 전쟁의 배경은 첫째 한 세기 이상 된 서유럽의 흉년으로 경제적인 사정이 극도로 침체되어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며 동방 진출을 모색했던 시기였다.


둘째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회교도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서방의 도움이 필요했다.


셋째 기근과 흉년으로 타계신앙이 일어났고 성지를 회복하려는 종교적 열정이 일어났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유럽이 각성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과 접촉하게 되었고, 지리적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선교에서 만회할 수 없는 재난이 되었다.


첫째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관계는 영구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둘째 기독교인들과 회교도 사이에 나타난 원한의 자국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정세의 한 요소로써 작용하고 있다.

회교도들에게는 서구 기독교도가 침략자로 기억된다.


셋째로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세계의 도덕적 수준을 낮추었다. 오래되지 않아 인노센트 3세는 똑같은 원칙이 기독교의 이단운동을 억압하는데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십자군들에게 이교도들은 근절되든지 아니면 영원한 노예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십자군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는 새로운 방식의 선교 형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3) 선교 수도회의 조직과 활동
    기독교 역사 첫 12세기동안 선교의 주된 전략은 인접지역을 복음화시킨 것이었다. 동방교회는 페르샤 제국을 본거지로 해서 인도, 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했다. 서방교회는 야만족의 침입과 이슬람에 포위되어 인접지역에 사는 부족들,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또 그동안 수도원이 변천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속적 요소로서 선교의 주요한 근거지였었다. 이러한 서방교회의 선교 방식에 13세기에 큰 변화가 생겼다. 특별한 사업으로서 전문가들을 멀리 떨어진 곳에 파송하는 중앙 선교 기구의 조직은 전혀 새로운 생각이었다.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라는 두 개의 탁발 승단이 선교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13세기가 끝나기 전에 프란치스꼬회는 전 세계를 누비고 있었고, 도미니꼬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방 땅의 이교도들 사이에 거주하는 형제들의 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 아닌 국가에 교회 관구를 설치한다는 대담한 정책은 아비뇽의 교황들에게 돌려진다.


성직 매매, 궐석 성직제, 족벌주의 등 많은 문제를 지녔던 교황들이지만 아비뇽의 황제들은 해외 관구를 설치하는데 기여했다. 이제부터 선교의 자원은 탁발 수도단에서 제공되고 선교에 대한 책임과 정책은 교황청이 감당하는 새로운 유형의 선교가 시작되고 있다. 


4) 몽골의 침략과 이슬람화
    몽골은 1222년 러시아와 쿠만족을 침략했다. 1240년 키에프가 함락되고 1241년에는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이 패배했다. 그러나 몽골은 내부적인 문제로 잠시 철수했다. 유럽은 그 배후에 징키스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1211년 북중국을 정벌하고 12년 안에 그의 군대는 태평양과 인도양, 흑해에 미치고 있었다. 유럽은 이슬람을 물리치기 위해 몽골과 손을 잡을 것을 고려했다. 허망한 꿈만은 아니었다. 당시 원나라의 왕비들과 조정 대신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상당수 있었다. 몽골 역시 세계 제패의 첫째 장애로 회교도들을 생각했다.


따라서 몽골과 서유럽과의 동맹은 실현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교황은 몽골의 왕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그 사이에 몽골은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켰고 1260년에는 다마스커스를 함락시켰다. 기독교가 옛 영토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번영과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중앙 아시아에 네스토리우스파 교단이 재건되었으며, 1275년에는 원나라 세조가 북경에 대주교 교구를 설치했다. 페르시아에서 통치하고 있던 일 한국의 칸 아바가는 1274년에 리용 회의에 사절을 파견했으나 서방세계는 분열되어 있었으며 그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중국 북경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라반 사우마는 1278년 성지를 방문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왔다가 일 한국의 새로운 칸 아르룬에 의해 서방세계에 파견하는 특사로 선택되었다. 교황청의 추기경들로부터 따듯한 영접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기치 못했다.


추기경들이 그의 신학적인 노선에 대해 시험하려 하자 그는 당연히 노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들은 로마의 주교와 친교를 갖지 않는 그 어떠한 기독교인들도 정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291년에는 사라센족이 기독교 거점인 에이커를 함락시켰다.


아르군도 라반 사우마도 사망했다. 사우마가 세례를 주었던 아르군의 아들 오르야이투가 회교도로 전향했다. 이렇게 해서 몽골 세계 전부는 무슬림 문화에 흡수되어 갔고, 몽골은 서방 기독교의 동맹자가 되는 대신에 새롭고도 가장 위협적인 이슬람 세력의 선봉으로 등장했다. 1369년 라틴 교회는 북경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었다. 200여년에 걸쳐 서방교회가 벌린 중국선교의 최후였다.

5) 기독교 확장의 실패 원인과 새로운 기회
    15세기 말에 이르러 기독교는 거의 전적으로 유럽의 종교였다. 아시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도처에서 쇠퇴되고 있었고 일부에서는 멸절되었다. 중요한 원인으로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여행이 어려웠던 점이다. 서방 선교사들은 현지인 사제들과 주교들을 양성하는 것을 너무 소홀히 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부분적으로나마 현지인 사제와 주교를 두었다. 둘째 비극적인 불안정성과 야만족의 침입으로 인한 참화의 반복이 선교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십자군 운동은 그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회복을 알리는 첫 징후였다. 12세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회교도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회교도 최후의 근거지가 함락된 것은 1492년이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은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스페인은 기독교가 우세했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는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이 ‘재정복’ 과정 가운데에는 고상한 일도 있었고 압박과 폭력이 일어나기도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완전히 해방된 이후에 기독교의 세계 확장기가 뒤따르게 되었다. 


4. 식민주의의 선교(16-18세기)


1) 16세기
    1492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발견’(구아나하리 또는 산살바도르)과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을 통한 인도 서해안에 도착한 것은 유럽인들의 사고와 기독교의 관점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인도로 가는 해로는 이슬람 세력의 배후를 돌아가는 아시아의 뒷문의 발견이었다. 이런 항해의 목적은 복음 전파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땅에 존재할 것으로 믿어지는 기독교 국가들과 동맹을 체결하여 무슬림 세력을 몰락시키는 것이었다.


    1493년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교서들을 발표하여 15세기에 해상 지배자로 부상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아조레스에 선을 그어 그 서쪽은 스페인에게 속하도록 하고, 동쪽을 포르투갈에 속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발견되는 땅들과  무역 독점권을 왕실에 귀속시키고,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복음화에 대한 책임도 국왕들에게 위임했다. 1494년에는 분계선을 이동하여 브라질이 포르투갈에 속하도록 했다.


    인도에 들어간 포르투갈인들은 오래지 않아 최남단 지역에서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들’ 10만 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에 속한 자들로서 과거 메소포타미아와 관련성 때문에 시리아인들로 불려지지만 인도인이었다. 서방교회는 대주교 메제네스를 인도에 파견하는데 그는 1599년 디얌페르의 종교회의를 통해 성 도마교회의 독립성을 부인하고 서방교회에 종속시키도록 했다. 이것은 서구 기독교인의 오만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1896년 레오 18세가 시리아 교회 조직의 독립성을 그 옛 교회에 회복시켜줌으로써 치유가 되었다.


    1534년 이냐시오 로욜라가 6명의 친구와 함께 예수회를 설립했다. 이들의 주요 목표는 이단자들과 이교도들을 카톨릭 신앙으로 재회심시키는 것이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1542년 인도의 고아에 가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1549년 일본에 도착한 사비에르는 일본 사람들과의 초기 접촉을 통해 선교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게 되었다. 비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철학에서 이용할만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며 기독교적인 것을 세우기 앞서서 비기독교 세계의 일체는 모두 허물어야 한다는 교리(tabula rasa)는 서구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일본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복음에 의하여 이 문명은 변화되고 재창조되어야 하지만 기존 문명 자체가 무가치한 것으로 거부당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사상은 풍부한 결실을 거두었고 동시에 상당한 논란도 따랐다.


1579년 동양 지역의 순찰사로 일본에 온 발리라뇨는 일본 선교와 관련하여 세 가지를 제안했다. 선교사들은 그 지역의 습관과 선입관에 순응해야 하며, 일본인들로 하여금 유럽여행을 하게하며, 일본인에게 사제직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601년 일본인 최초의 사제들을 서품했지만 그 뒤에 일어난 대박해로 인해 2세기간 선교의 문이 닫혔다.


마태오 리치는 1583년 중국에 들어갔지만 사비에르의 후기 관점을 따라 위대한 문명을 취급할 경우에는 상당한 신중성과 존경심을 갖고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교황이 마닐라에 1579년에 마닐라 감독 교구를 창설했다. 16세기 말에 필리핀 섬들은 스페인의 지배로 들어갔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탐험이나 정복을 위한 모든 원정에 승려들과 수도사들이 수행했다.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가 주역을 담당했으며, 예수회가 그 뒤를 따랐다. 산토 도밍고 교구는 1511년에 설립되었으며, 멕시코 최초의 교구는 1525년에 설립되었다. 브라질에는 1552년 최초의 주교가 바히아 교구에 부임했다. 1575년에는 에쿠아도르, 볼리비아, 페루, 칠레 같은 나라들 전체에 걸친 대주교 교구가 설립되었다.


이 지역 복음화의 가장 큰 장애 요소는 원주민들에 대한 스페인 이주민들의 잔인성이었다. 엔코미엔다(encomienda) 즉 추천이라는 제도에 의하여 이주민들은 일정한 인디안들을 배당받았는데 인디안들을 보호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대신에, 인디안들로부터 공물이나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귄리를 위임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도는 이주민들이 인디안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데 이용당했다. 이런 흐름에 가장 지속적으로 크게 저항한 사람이 바르톨로뮤 드 라스 카사스(1474-1566)였다.


그 역시 금을 목표로 1502년에 온 이주민의 한 사람이었다.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07년에 사제가 되었지만 정복자의 역할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성례전을 준비하다가 집회서 34장(빵은 가난한 자의 생명이고 그것을 빼앗는 것은 살인이다)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다.


1514년에 자신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원주민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543년 치아파의 주교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52년 간 원주민을 위해 투쟁했다. 멕시코에 있던 콘타도르 로드리도 데 알보르네스는 1525년에 스페인 국왕에게 인디안 사제의 양성을 위해 고등교육 기관의 창설을 촉구하면서 단 한 명의 인디안 사제가 유럽인 사제 50명 보다 더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중남미에 살고 있는 사제들과 수도사들은 수 많은 인디안들을 하인으로 부리는 ‘상류총각 클럽’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었다. 16세기 내내 인디안이나 혼혈인에 대한 사제 서품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1772년 제3차 리마회의에서 이 금지법이 폐기되었다. 오늘날에도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기독교의 대륙이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외국의 종교로 남아있다. 16세기에 보다 큰 용기와 성령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인디언, 혼혈인 사제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했더라면 그 결과는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2) 17-18세기 
    16세기의 선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왕과 대 종단들이 장악하며 예수회가 주도적 역할을 했고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가 뒤를 따랐다. 선교사들은 왕권의 보호를 받았고, 선박을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으며, 후원도 풍족했고, 종단들 사이의 경쟁심으로 선교활동이 활성화 된 것은 이점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연관성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일, 특히 무역에 관한 일에도 너무 깊숙이 관여하게 했고, 종단간의 경쟁심 또한 지나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17세기에는 교황청이 선교부를 조직했고, 선교 본부와 선교회 사이의 관계의 변화가 일어났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는 포교성성을 결성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선교사업은 국왕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었다. 로마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주교교구를 설립해야 했다. 또 수도회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신속히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해야 했다. 포교성성은 선교사들에게 그 백성들의 풍속에 순응하도록 지시했다. 1663년에 파리에 외국선교협회가 신학교를 설립했다. 


    이태리의 예수회 수도사 로베르토 드 노빌리(1577-1656)는 1605년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사비에르나 리치의 뒤를 따라 인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도인이 되고자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는 상류 카스트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는 인도의 기존 선교사들의 방식인 개종자를 포르투갈화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어서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인도인들로부터는 즉각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결국 그의 선교방식이 인도인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선교 후기에 신분이 낮은 카스트의 신자들이 늘어났다. 노빌리의 진정한 문제는 인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엄격히 카스트를 유지하면서도 복음적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즉 노빌리는 카스트를 사회적 특징으로만 보았지만 카스트는 종교와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류 계층에서의 선교의 성공도 놀라운 것이지만 기독교 대중운동이 일어난 것은 하류 계층이었다.


    중국에서는 아담 샬이 마태오 리치를 계승했다. 선교사들에 대한 무고와 핍박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1692년 황제에 의한 관용령이 반포되었다. 그리고 중국인 최초의 주교로 로가 1685년 서임을 받았으나 6년 후 사망했다. 1651년 교황 바오로 5세는 중국사제들이 중국어로 미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반발이 심해 중국어는 결국 라틴어에게 미사 용어로 자리를 다시 내줬다.


로마에 있던 신학자들은 중국의 관습이나 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한 문제에 현지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자 했다. 1701년에 파송된 교황의 특사인 투르논은 마태오 리치에 불리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자 중국 황제는 투르논을 쫓아냈다. 이에 맞서 투르논은 로마의 관습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예수회의 관습을 금지시켰다. 중국 황제는 마태오 리치에 의해 입안된 규칙을 따르는 자들만 중국에 남게 했다.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는 1742년에 투르논의 입장을 지지하는 교서를 발표함으로써 ‘적응’의 첫 번째 대시도가 실패로 끝났고, 이후 200년간 카톨릭 선교의 관습을 지배했다.  

 
    이런 접근 방식으로는 아프리카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선교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지식, 그들의 습관과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 세례에 앞선 길고도 인내성 있는 교육과 세례 이후의 참을성 있는 목회적 보호 등을 결여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선교 활동의 약점은 현지인들에게 자발적인 정신과 독립적인 정신을 개발시키지 않는 것과 단 한 명의 현지인 사제도 양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정책의 응보는 선교회가 추방되었을 때 지도력을 갖지 못한 현지 교회는 급속히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포교성성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부분적인 성공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도회 사이의 지나친 경쟁과 분열 때문이었다. 그에 못지않게 현지인 사제들에 비해 외국인 사제의 비중이 너무 높았다는 것, 그리고 최대 장애요소로는 로마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생활과 라틴어 기도문의 사용 등 로마교회의 지역적인 규칙들을 새로 생긴 교회들에게 일방적으로 보편적인 원칙으로 강요한 점이었다.

3) 동방교회의 선교
    동방교회는 이슬람의 진출과 몽골의 진출로 타격을 받아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러시아가 통일을 이뤄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선교는 1454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그로 인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 러시아 황제의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를 응징하는 제2의 콘스탄티누스라는 자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선교의 특징은 국가와 교회가 너무 유착되어 양자를 분리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1702년 서시베리아의 선교는 활성화되어 필로페이 주교 재직시 4만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에게 면세의 특권을 선언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다.


중국 선교나 칼묵크 선교는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볼가강 중류 지역의 선교는 세례자에게 군 복무를 면제해준다는 것으로 인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러시아 말을 할 줄 몰랐고 자신의 언어로 교리를 배운 적도 없었다. 동 시베리아 선교는 선교가 말보다는 생활의 질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선교사들은 신앙뿐 아니라 농업과 수공업의 기술을 현지인들에게 가르쳤다. 러시아선교의 확장과정은 책략과 위업, 영웅적인 열성, 사도적인 단순성과 고난을 무릅쓰려는 정신이 혼합된 역사였다. 아직도 옛 시대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지만 거기서 19세기 주목할만한 성취가 나올 것을 보게 될 것이다.

4) 개신교회의 선교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 세계는 선교에 대해 생각할만한 여유를 갖지 않았다. 1648년까지 프로테스탄트는 생존권을 위해 싸워야 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체 안에서 분열되어 논쟁을 일삼았다. 이러한 약점 이외에도 유럽 이외의 광대한 세계와 접촉을 갖지 못했다.


모든 지역에서 통치자가 신민의 종교를 결정하고, 그 영토 내에서 통치자는 국가와 종교에 대한 최고 결정자였다(cuius regio, eius religio). 주어진 테두리 안에 폐쇄된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7세기에 영국과 화란이 해상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자 전체적인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화란의 선교는 카톨릭의 방식을 따라 화란 목사는 동양에 거주하는 화란인들의 영적 안녕을 보살피는 공복이었다. 개신교의 선교 특징은 선교지에서 현주민들이 자국어로 성경을 읽도록 번역하는 일이었다. 남인도에서 타밀어 성경은 1714년 치이겐발크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1688년 신약성경이 말레이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동남아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장로교 선교사인 존 엘리오트는 1671년까지 3,600명의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을 14개 마을에 정착시켰으며 인디언 전도자 24명을 훈련시켰다. 모히이칸 언어로 신구약 성경을 1663년에 출판했다. 그러나 엘리오트는 영국과 인디언의 전쟁으로 모히이칸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사람이 하나도 생존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유럽대륙의 교회가 선교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비롯되었다. 경건주의의 원리는 개인적 회심과 경건의 요구였으며, 공동체 내의 긴밀한 친교와 증거의 책임이었다. 프랑케는 1706년 치이겐발크와 플뤼차우를 인도로 파송했다. 이들이 세운 선교 원칙은 교회와 학교의 병행, 주민들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 선교의 목적은 개인적 회심, 조속한 시일 내에 교역자를 가진 인도 교회 건설 등이었다. 그런데 동인도회사는 일반적으로는 선교사역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이들은 선교가 주민들의 반감을 도발하여 상업에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을 두려워했다.


5. 선교의 세기(19세기)


    18세기 말까지 유럽이 약했다는 사실은 부강하고 선진대륙인 유럽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언뜻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유럽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18세기 4분의 3분기였다. 모든 제품이 수공으로 만들어지던 때에는 동양과 서양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큰 격차가 일어난 것은 산업혁명과 공장제 공업과 증기와 전기의 발명 이후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구질서의 붕괴는 유럽으로 하여금 새로운 확신과 시대의 진전, 새로운 선교의식을 갖게 했다.


이로 인해 탐험이 이뤄지고 세계 여러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이주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영국은 인도와 미얀마와 실론을 지배했고 이집트를 거의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병합했고 알제리를 차지했고 튀니스를 병합했다., 화란은 인도네시아를 정복했다. 한편 이슬람 세력은 퇴조했다. 1914년 영국은 아프리카의 상당한 지역을 병합했다. 프랑스와 독일, 벨기에 그 뒤를 따라왔다. 태평양의 광대한 섬들도 유럽인들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해갔다. 식민지배는 경제적 침략, 사회적 침략, 지적인 침략, 그리고 종교적인 침략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식민주의가 종교적 각성과 때를 같이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로마 카톨릭도 19세기에 선교활동이 다시 활성화되었고,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 문화적으로 철저히 서구적이면서 러시아적이었다.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노예제 폐지와 같은 사회운동과 선교사업 등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선교는 선교협의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업을 감당할 힘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1792년 영국 침례교 선교회를 필두로 1795년 런던선교회(나중에 영국 침례교회의 기관이 됨), 1799년 성공회의 교회선교회, 1804년 영국 및 해외선교회, 1810년 미국 해외선교위원회, 1814년 미국 침례교 선교부, 1815년 바젤 선교부, 1824년 베를린 협회 등이 설립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 교파가 선교사업을 지원하는 일에 관여했다. 그 결과 선교사업의 신속한 확장이 이뤄졌다.


18세기 말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성경이 번역된 언어가 70여 개였으나, 19세기 말에는 신구약이 전부 번역된 언어가 100개가 넘었다. 19세기 선교 활동에서 혁명적인 것의 하나는 독신녀 선교사의 등장이었다. 신구교 구분없이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독신 여성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계층은 강력한 종교체제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부족 사회거나 가난하고 비특권적 계층들이었다. 대중운동으로 교인이 급증하자 현지 목회자들이 늘어났다.


19세기 말이 되면 외국인 안수자 보다 현지인 안수자가 훨씬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일어난 본질적인 문제는 선교회는 교회의 지위로 빠져 들어갔다는 점이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우선 선교사의 우월감과 온정주의(paternalism)였다. 다음으로 선교지 교인들은 자신의 문화에 적합한 방식으로 예전이나 신앙을 표현하기보다는 선교사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793년 인도에 도착한 윌리엄 캐리는 영어 사용 세계의 선교사업을 본격화시킨 장본인이다. 그의 선교에 대한 관점은 독립적이고 근대적이었다. 다섯 가지 원칙을 보면 복음전파, 그 나라 언어로 기록된 성경 보급, 가급적 신속히 교회를 세움, 비기독교인들의 배경과 사상을 연구, 현지인 교역자 양성 등이다. 특히 그는 처음부터 교회와 선교를 통합적으로 보았다. 중국에서는 복음을 향한 문호개방은 서방 열강의 상업적, 정치적 압력과 밀접한 연관된 것이었다.


서방과 중국 사이의 긴장은 결국 아편전쟁을 초래했다. 남경조약으로 서구 열강은 치외법권적 특권을 얻게 되었으며, 반대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기독교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군함과 대포 뒤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태평천국의 난(1846-1853)과 의화단 사건(1900)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현지 목회자 양성의 중요성도 20세기 중엽 서방 선교부의 추방으로 인한 붕괴 후 그 가치가 증명되었다.


    식민주의의 전성기(1858-1914)의 특징은 다음의 다섯 개 사건과 관련이 있다. 영국정부가 인도의 통치를 맡음으로써 준 주권적 권력체였던 동인도 회사의 수명이 끝났다. 선교사들은 동인도회사의 적대적인 편견과 차별대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유럽과 중국의 전쟁은 1858년 조약 체결로 종식되었다. 중국은 서구 기독교 세력에 문호를 개방했지만 평화의 세력 뒤에는 총검을 두르고 있었다.


제2차 복음적 각성운동이 대서양을 건너 여러 지역으로 파급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선교협회가 형성되었고, 기존 선교회에는 지망자들이 쇄도했다. 일본도 2세기 동안 닫혔던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857년 리빙스톤의 책이 출판되면서 서구 교회가 아프리카 선교사업을 재개할 때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감정을 혼합시킨 것이 일본 기독교의 주요 특징이었다. 시메타 니이지마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후 1874년 동지사 대학을 설립했다. 우지무라 간조는 무교회운동을 일으켰다. 일본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일본적인 바탕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문제가 등장했다. 우에무라는 외국인들은 지도적인 위치에서 물러나야 하며 교회는 순수한 일본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1877년 장로교 3개 선교부의 합동으로 일본 기독교 일치교회가 세워졌다.


1904년에는 동경신학사라는 최초의 독립적인 신학교를 세웠다. 중국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내지선교회를 1865년에 창립했다. 이 선교회는 초교파적이며, 공식 교육이 부족한 자들에게도 개방하며, 선교회의 지휘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야 하며, 중국식 복장과 가급적이면 중국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선교회의 일차적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점증하는 반기독교적 운동이 1900년 6월 24일 의화단 사건으로 일어났다. 모든 외국인을 살해하라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외국인 프로테스탄트들의 희생은 어른이 135명, 어린이 53명 등 188명이었다. 이 봉기는 8월 외국 군대가 북경에 들어가 진압했다. 서구는 중국인들에게 인명피해와 재산피해에 대해 보상을 하게 했다. 그런데 누구보다 더 희생이 컸던 중국 내지 선교회의 허드슨 테일러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양순함을 중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기독교계는 중국이나 중국인들에게 별다른 원한이 없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기독교가 갖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중국이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인도에서는 거의 모든 선교부가 상류 카스트들에게 접근하였다. 가난한 계층에서 개종운동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은 걱정과 난처한 마음으로 이 운동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식하고 천대받는 민중이 대거 교회 안에 유입됨으로 인해 그들의 선교사업 전체에 대해서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선교사들은 희한할 정도로 정세 변화에 둔감했고, 선교사의 인도교회에 대한 지배가 대단히 장기간 계속될 것으로 여겼다. 인도 교회 안에서 새롭게 성장하는 지도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6. 현대의 선교(20세기) 


    교회가 선교의 주체로 인식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초대교회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를 제외하면 지난 2000년 세계 선교 역사에서 선교의 주체는 교회로 인식되지 못해왔다. 20세기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서구문화가 급속히 세속화되면서 과거의 기독교국가였던 서구가 선교지 상황이 되어버린 것과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서구 교회의 선교지였던 제3세계교회들이 서구 선교회로부터 독립하여 교회가 되면서 교회를 선교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선교의 주체를 교회로 인식하게 되었다. 국제선교협의회가 제3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와 통합한 것은 선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선교의 주체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1963년 멕시코시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의 선교대회 표어는 육대륙에서의 선교였다. 보내는 교회와 받는 교회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모든 곳이 선교지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서구에서 받아들여지는데는 한 세대가 더 걸렸다.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서구 선교회가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1952년 열린 빌링엔 대회는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를 표어로 하고, 중국에서의 선교사 추방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며, 선교의 방식은 십자가여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대회 직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선교론이 주창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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